본문 바로가기
◑ 자료 18,185편 ◑/자료 16,731편

그 헤아림을 도로 받는 비결! (눅 6:27-38)

by 【고동엽】 2022. 2. 5.

그 헤아림을 도로 받는 비결! (눅 6:27-38)

 

본문은 마5-7장의 같은 배경으로 예수님의 산상설교로써 그리스도인들에게 황금률로 불리는 신앙인의 생활덕목입니다. 본문은 산상에서 주님의 같은 말씀을 들었던 제자 누가를 통해서 그 누가가 느끼고 강하게 받았던 부분을 기록하고 있는 말씀입니다. ▶이 교훈을 황금의 교훈이라고 말한 것은, 만약 사람들이 이 짧은 교훈을 받아드리면 황금덩어리가 인간을 부유하게 하듯, 우리의 마음속에 부유함으로 풍성함으로 넘쳐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요7:40-47절에 보면 예수님의 가르치심에 많은 민중이 동요하기 시작하자, 어느 날 대제사장과 바리세인들이 예수님을 체포해 오라고 하속들을 보냈습니다. 그런데 그 하속들이 예수를 잡지 않고 그냥 돌아 왔습니다. 그 모습을 보고 대제사장과 바리세인들이 "왜 잡아오지 못했느냐?"고 질책을 하자, 그들이 대답하기를 "그 사람이 말하는 것처럼 말한 사람이 이때까지 없었다"고 실토했습니다.
이 말은 쉽게 표현하면 예수님의 가르침에 권위가 있고, 깊이가 있고, 생명력이 있었다는 증거입니다. 한마디로 우리 예수님은 그의 가르침 속에 메시아적 자기 계시를 나타내고 계시며 하늘나라 법의 선포 자로써 절대적 권위로 행동하셨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선포하신 말씀을 보면, "너희를 미워하는 자를 선대하라! 저주하는 자를 위해 축복하라! 너희를 모욕하는 자를 위해 기도하라! 네 이 뺨을 치는 자에게 저 뺨도 돌려대라"고 하십니다. 뺨을 맞는 것은 인격적 모독입니다. 그러함에도 참으라는 말은 "너희 안에 사랑의 마음을 간직하라"는 말입니다. 또 보십시오! 네 겉옷을 빼앗는 자에게 속옷도 주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물질적인 문제입니다.
30절 "네게 있는 것을 주라"고 하십니다. 그러면서 31절의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는 말씀을 주십니다. '사랑의 교훈이요 용서의 교훈'입니다. 가장 힘있는 자는 용서하는 자요, 이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은 본문에서 성도의 '차별화를 선언'하고 계십니다. "원수를 사랑하고 선대하고 축복하고 위하여 기도해 주라"고 하십니다. 이 말씀은 가히 혁명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당시의 유대교는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고 가르쳤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너희는 유대교인과 달라야 하고, 세상 사람들과 달라야 하고, 죄인들과 달라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회교도의 경전인 코란에 그들의 위대한 선지자 '모하메드'에 관한 일화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는 숙부와 숙모에게 많은 핍박을 받았습니다. 숙부는 그에게 돌을 던지기도 했고 숙모는 그가 맨발로 걸어 다니는 곳에 가시를 놓아두곤 했습니다. 또 아침 기도를 드리기 위해서 가고 있는 그에게 숙모가 쓰레기를 던지기도 했습니다. 그 때 '모하메드'는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숙부의 두 손이 저주를 받아 멸망하게 되리라. 그의 재물과 그가 번 것이 그에게 쓸모 없게 되리라. 그는 곧 이글거리는 불 속에 들어가게 되고, 비방하며 돌아다니는 그의 아내도 그렇게 되리라. 그녀의 목에 종려 섬유를 꼬아서 만든 밧줄이 감기게 되리라" 고 저주했답니다. 그 위대한 회교도의 선지자도 원수에게 관대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은 사랑의 화신으로 오셨고, 그의 제자들에게도 사랑의 실천자가 되라고 가르치셨습니다.
스테판은 돌을 던져 자기를 치는 사울을 향하여 무릎을 꿇고 기도하기를 "주여!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소서" 이 기도에 예수를 핍박하던 사울이 깨어져 변화 받고 기독교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전무후무한 사도 바울이 되었습니다.

1. 주님은 때로 우리들이 감당할 수 없는 것을 요구하실 때가 있습니다.

우리들의 능력은 보잘것없는데 너무 과한 요구를 하실 때가 있습니다. 본문 말씀만 해도 그렇습니다. 27-28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미워하는 자를 선대하며 너희를 저주하는 자를 위하여 축복하며 너희를 모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어떻습니까? 우리들이 할 수 있는 일입니까?
그 다음 29절을 보면 더욱 힘든 일을 요구하십니다. "네 이 뺨을 치는 자에게 저 뺨도 돌려 대며 네 겉옷을 빼앗는 자에게 속옷도 금하지 말라" 우리가 어떻게 이런 일을 할 수 있습니까? 흉내조차 낼 수 없는 일입니다. 우리들이 아브라함입니까? 사도 바울입니까? 베드로입니까? 어떻게 이런 일을 하라고 요구하실 수 있습니까?
과연 이 요구는 정말 불가능한 일입니까? 그러면 왜 이런 요구를 우리에게 하셨겠습니까? 이 말씀은 문자 그대로 행하라고 하는 뜻도 있지만 그 보다도 '그런 정신을 가지고 세상을 살라'는 뜻이 더 강합니다. 이런 정신으로 살면 언젠가는 그 헤아림을 도로 받는 축복이 있다는 것입니다.
38절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도 헤아림을 도로 받을 것이니라"

 

▶여기에 담겨져 있는 정신이 무엇인가?

①세상을 좀 손해 보면서 살라는 뜻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세상에서 손해를 보면서 살아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사람이 너무 약게 살면 정이 가지 않습니다. 너무 자기 이익에 밝고 조금도 손해를 보지 않으려고 하면 가까이하기가 싫습니다. 좀 어수룩한 부분도 있고 적당히 속아 줄줄도 알고 손해도 볼 줄 아는 사람에게 정감이 가고 가까이하고 싶은 마음이 우러납니다.
남녀가 선을 볼 때 그런 느낌을 받습니다. 선을 보려고 나온 여성을 보니까 빈틈이라고는 없이 아주 야무지고 흠 하나 없이 보입니다. 그러면 남자들은 대부분 질려 버립니다. 그리고 부담스러워 합니다. 그 여자를 위해 할 일이 전혀 없을 것 같은 느낌을 받습니다. 그러면 여자가 싫어집니다.
좀 빈틈도 있어 보이고 순진해 보이고 내 역할이 필요할 것 같은 여성에게 남자들은 마음이 갑니다. 그리고 끌립니다. 남자들은 이런 여성들을 좋아합니다. 남자들은 그런 여성에게 기사도 정신을 발휘합니다.

▶'프란두스의 카니발'이라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세계 대전 때 스페인 군대가 프랑스를 침공했습니다. 이 군대가 파죽지세로 진격해서 양민을 학살하고 마을마다 불을 지르며 악명을 떨쳤습니다. '프란두스' 마을 사람들도 걱정이 되었습니다. 불원간에 악명 높은 그 군대가 이 마을에도 쳐들어올 것이 분명한데 야단이었습니다. 그때 동네의 여인들이 꾀를 냈습니다. 동네의 남자들을 모두 피난 보내고 동네에는 여자들과 어린아이들만 남아 있게 했습니다.
드디어 스페인 군대가 쳐들어 왔습니다. 와 보니까 동네에 남자들은 하나도 없고 아이들과 여자들만 남아 있습니다. 그러자 이 스페인 군대는 기사도 정신을 발휘합니다. "세상에 남자들이 비겁하게 여자들만 남겨두고 도망을 갔다"고 욕을 하면서 전리품 중에서 좋은 물건을 여인들에게 나누어주고 밤에는 무도회까지 열어서 위로해 주고는 다음날 떠났다는 것입니다.
동네는 불바다가 된 것이 아니고 오히려 적군들로부터 선물까지 받았습니다. 그래서 이것을 '프란두스의 카니발'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남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첫인상이 너무 완벽하게 보이는 남자들은 피곤합니다. 남자가 좀 어수룩한 부분이 있고 바보스럽기까지 해서 아저씨 같은 느낌이 있어야 정이 가고 가까이하고 싶은 마음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세상을 살아갈 때 이런 여유 있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약간 바보스러워 보일 정도의 순진함이 있어야 합니다. "이 뺨을 때리거든 저 뺨도 돌려 대라." 얼마나 바보스러운가? 엄청 손해보는 삶입니다. 그런데 주님이 그렇게 하라는 것입니다.
▶무디가 전도 길에서 산을 넘어가야 하는데 그만 도중에 폭설을 만났습니다. 눈이 쌓인 산길을 가고 있는데 사람 하나가 쓰러져 있습니다. 보니까 몸이 얼어서 죽어가고 있습니다. 그냥 놓아두면 곧 죽을 것 같습니다. 그래서 무디는 그 사람을 들쳐 엎고 혼자 가기도 어려운 길을 갔습니다. 그때 누군가 뒤에서 한 사람이 오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 사람에게 도와 달라고 협조를 요청했습니다.
그랬더니 그 사람은 "혼자 가기도 힘든데 죽을 사람을 왜 들쳐 메고 갑니까? 당신도 정신 차리시오. 빨리 이 산길을 빠져나가지 않으면 당신도 죽을 것이오." 하고는 그냥 지나가 버렸습니다. 이것이 지혜로운 모습일 수 있습니다. 만약 눈이 더 오면 자신도 산을 빠져나가지 못하고 죽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무디는 우직한 사람입니다. 무디는 그런 꾀가 없습니다. 그래서 이 사람을 들쳐 엎고 갑니다. 얼마를 가다 보니까 앞서가던 사람이 그만 넘어져 있습니다. 다리에 냉기가 올라와서 얼어붙는 바람에 더 이상 가지를 못하고 쓰러져 죽어 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우직한 무디는 그 사람을 엎고 가다가 엎어지기도 뒹굴기도 하는 동안 온 몸에서 열이 나고 땀이 나서 무사히 그 산길을 탈출했다고 합니다.
오늘 사람들은 저마다 약게 살겠다고 발버둥들을 치고 있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네 뺨을 치는 자에게 저 뺨도 돌려 대며, 네 겉옷을 달라는 사람에게 속옷도 금하지 마라." 얼핏 생각하면 미련한 사람같이 생각되고 우매한 사람같이 생각되고 그렇게 살면 오늘 같은 세상을 어떻게 살아가겠는가 하는 생각마저 들지만 이것이 세상을 살아가는 비결이라는 것입니다.

 

②창조 정신을 가지고 살라는 뜻입니다.

"겉옷을 달라는 사람에게 속옷도 금하지 말고 5리를 가자고 하는 사람은 10리를 가 주라." 이 말은 꼭 그렇게 하라는 뜻도 담겨져 있습니다만, "창조 정신을 가지고 살라"는 뜻이고 "만들어 가면서 살라"는 뜻입니다. 다시 말하면 좀 더 세상을 넓게 살라는 말입니다.
"5리를 가자고 하는 사람은 10리를 가주어라." 그것이 사랑하는 사람의 요구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왜 5리뿐이겠습니까? 하루 종일같이 가자해도 마다할 이유가 없습니다. 그런데 상대가 싫은 사람이니 문제입니다.
본문에서 말하는 상대는 원수를 가리킵니다. 죽도록 싫은 사람이 5리를 가자고 하면 10리를 가 주라는 것입니다. 어떻게 같이 갈 수 있겠습니까? 이것이 문제입니다. 그런데도 주님은 요구하십니다. 그러면 왜 이토록 집요하게 요구하시는 것입니까? 그것은 질서 때문입니다. 이 세상의 질서를 유지하시기 위해서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을 사랑하시는 주님의 깊은 마음과 의도를 알아야 합니다.
여러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사람이 싫다고 해서 다 멀리하고 헤어지면 어떻게 됩니까? 남편과 아내가 싫다고 해서 모두 헤어지면 이 세상의 가정이 어떻게 존속될 수 있겠습니까? 친구가 싫다고 해서 모두 헤어지고 멀리하면 이 세상에서 인간관계가 어떻게 형성될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이웃이 싫다고 해서 서로 담을 쌓고 살면 어떻게 더불어 살아갈 수 있겠습니까? 주님은 이런 비극을 없애기 위해서 이 땅의 그리스도인들에게 이렇게 강한 요구를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세상을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에게는 한 가지 삶의 철학이 있어야 합니다. 그것은 문제가 발생했을 때 그 문제를 피하지 말고 극복하라는 것입니다. 자연 종교에서는 문제가 발생했을 때는 피하라고 가르칩니다. 그리고 그 문제를 운명적으로 받아들이라고 가르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팔자로 받아들였고 아무런 생각 없이 숙명으로 수용하면서 살아왔습니다. 적어도 우리 민족은 이렇게 운명으로 받아들이는 데 잘 훈련이 되어 왔습니다.
그런데 기독교는 그렇게 가르치지 않습니다. 기독교에서는 문제를 피하거나 운명적으로 수용하는 것보다 적극적으로 극복하는 것을 가르칩니다. 그렇게 좋은 방향으로 만들어 가면서 살아가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생활입니다.
이 세상에는 한 사람도 내 마음과 똑같은 사람은 없습니다. 그리고 이 세상에는 내 마음과 꼭 맞는 것이 한 가지도 없습니다. 부부라고 해서 마음이 다 맞는 것은 아닙니다. 형제도 부모도 자식도 마음이 맞지가 않습니다. 그래서 때로 다투기도 하고 갈등을 일으키기도 하지만 그러면서 서로 수정하고 맞추어 가면서 사는 것이 인생입니다. 안 그렇습니까?
그래서 부부싸움은 '필요악'일 수도 있답니다. 가끔씩 싸우는 것도 정신 건강에 좋다고 합니다. 다 쏟아놓고 보면 스트레스가 풀리고 정신 건강에도 좋다고 합니다. 그렇지만 될 수 있으면 참고 넘기는 것도 좋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실 때 미완성으로 지으셨습니다. 이렇게 미완성으로 지어진 인간끼리 모여 서로 보완하고 서로 맞추어 가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살아가다가 앞길에 장애가 생기면 서로 힘을 합해서 제거하거나 극복하고 앞길이 좋지 않으면 함께 아스팔트길을 만들고 환경이 삭막하면 서로 지혜를 모아 꽃밭을 만들면서 사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세상을 만들어 가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창조해 가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그 과정에서 때로 수고가 필요하고 희생이 필요하고 손해도 감수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만들어 가는 인생의 모습입니다.

▶인도의 신화 가운데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신이 '와르미키'라는 미남 청년을 창조하고 연못에 있는 연꽃을 꺾어 예쁜 소녀를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그 소녀를 청년에게 이끌어다 주고는 함께 살라고 했습니다. 이 소녀는 좋아라 하고 청년에게 다가가서 가슴을 들여다보았습니다. 그러더니 깜짝 놀라서 뒷걸음을 칩니다. 이 청년의 가슴속에 늑대들이 가득 들어 있다는 것입니다. 소녀는 이 청년하고는 무서워서 살수가 없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이 신이 소녀를 밝은 광야로 데려갔습니다. 이 소녀가 밝은 광야로 나가니 좋아했습니다. 넓고 시원하고 푸른 잔디가 좋았습니다. 그런데 조금 있으니까 광풍이 모래바람을 일으켜 눈을 뜰 수가 없었습니다. 이 소녀는 울면서 말합니다. "이곳도 제가 살 곳이 못 됩니다." 그래서 신은 이 소녀를 고요한 연못으로 데리고 들어갔습니다. 이 소녀는 깊은 물 속에서 한가로이 놀고 있는 물고기들을 보고 좋아했습니다. 그런데 조금 더 들어가 보니까 물 속에는 온갖 요물들과 뱀들이 우글거렸습니다. 이 소녀는 소리를 지르면서 밖으로 나왔습니다.
신은 그 소녀를 조용한 언덕 위의 벤치에 앉혔습니다. 그곳은 온갖 꽃들이 만발해 있었습니다. 아지랑이와 나비들과 벌들이 이 꽃 저 꽃을 찾아다니는 모습이 아주 아름다웠습니다. 그런데 조금 후 햇볕이 내리 쪼이자 얼굴에서 땀이 흐르고 눈을 뜰 수가 없습니다. 소녀는 여기서는 하루도 살수가 없다고 투정을 부렸습니다.
그때 신은 이 소녀를 조용히 타일렀습니다. "네 앞에 캄캄한 암흑이 있거든 너는 태양이 되어 밝은 빛을 비추어 주어라. 네 앞에 광풍이 있거든 너는 한 송이 백합이 되어 향기를 풍겨 주어라. 네 앞에 뱀과 요물들이 득실거리거든 너는 썩어 가는 물을 정화하는 생수가 되어 주어라. 햇빛이 내리 쪼이거든 너는 구름이 되어 이 땅을 시원하게 해주는 그늘이 되어 주어라.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 인생이란다."
"5리를 가자고 하거든 10리를 가주어라." 이 말씀은 맞추어 가면서 살아가라는 말씀입니다. 극복하면서 살아가라는 말씀입니다. 내 마음에 맞게 꽃밭을 만들어 놓고 살아가라는 뜻입니다.

 

③어떻게 이런 정신으로 살아갈 수가 있는가?

거기에는 한 가지 비결이 있습니다. 그것이 31절과 36절에 나온 말씀입니다.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또 36절에 "너희 아버지의 자비하심 같이 너희도 자비하라"고 하신 이 말씀이 비결입니다. 이 마음을 품고 살아가면 이 문제도 가능할 수가 있습니다. 우리 능력으로는 불가능하지만 내 가슴속에 이 마음을 품고 살아가면 내가 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하십니다.
▶미국의 어느 조그마한 동네에 유명한 분이 살고 있습니다. 어느 초라한 노부부인데 자녀가 넷이 있음에도 다섯 명의 아이들을 입양해서 모두 아홉 아이를 양육하며 살았습니다. 그 다섯 아이는 모두 고아원에서 입양한 한국의 아이들입니다.
그런데 기막힌 것은 그 아이들 중 한 여자아이는 다른 집에서 먼저 입양을 했었는데 기르다 보니 이 아이가 저능아라 버린 아이였습니다. 그 아이를 이 노부부가 다시 입양하여 양육한 것입니다. 그 아이가 지금 40세입니다. 나이는 어른인데 지능은 아이이기 때문에 지금도 어린아이처럼 행동합니다.
이 노부부가 이제는 늙고 힘이 드니까 아이를 노부부의 딸이 대신해서 기르고 있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 노부부는 그 누구보다도 지금 행복해 하면서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참으로 이해 못할 일입니다. 자기아이도 아닌 남의 아이들을 그것도 불구아를 데려다가 평생을 뒷바라지하고 자신들의 삶을 희생하며 살면서도 기뻐하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인간적으로 생각하면 이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자신이 낳은 아이도 버리는 세상입니다. 그런 세상에서 이런 일이 어떻게 가능합니까? 그런데 가능하단 말입니다. 바로 이 36절의 말씀인 ‘자비’를 가슴속에 묻고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나는 불가능한데 주님이 그의 마음속에 계시니까 가능한 것입니다.

 

④하늘의 섭리를 바로 알고 사는 것이 헤아림을 도로 받을 수 있습니다.

사람은 기본적으로 하늘의 섭리를 느끼고 살아야 합니다. 하늘의 섭리를 느끼면 몇 가지 주어지는 마음이 있습니다.
⑴자중하는 마음입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신의 섭리를 느끼며 살아갈 때 비로소 자중하는 마음이 생깁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은 타락을 해도 한계가 있습니다. 넘어져도 아주 넘어지지 않고, 타락을 해도 막가파 식으로 타락하지는 않습니다. 하나님을 의식하고 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알고 신의 섭리를 아는 사람은 절대로 기고만장하지 않고, 교만하지도 않습니다.
⑵감사하는 마음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감사하게 되어 있습니다. 모르니까 불평하고 원망하는 것입니다. 구원해 주신 것이 감사요, 이 세상을 지날 때에도 우리를 지키시고 보호해 주시는 하나님의 손길이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시121:8절 "여호와께서 너의 출입을 지금부터 영원까지 지키시리로다" /할/
⑶고난의 의미를 바로 알면 이것이 도로 헤아림을 받게 됩니다. 이것은 신앙인들에게만 주어지는 영적 능력입니다. 사람은 언제나 형통하고 기쁘고 잘되고 성공만 할 수는 없습니다. 때로는 내 생각과는 정반대로 혼란스러울 때도 있습니다. 그런 때 그 고난의 의미를 아는 것은 하나님의 섭리를 알 때 가능합니다. 이것은 신앙인에게 주어진 은총입니다.

▶미국의 어떤 청년이 늘 "언젠가 나는 하나님을 위해 헌신하겠다"하는 마음을 품고 살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원치 않는 교통사고를 당해서 다리 하나를 절단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의족을 했습니다. 그러고 나서 이 청년이 충격과 실망 속에서 헤어나지를 못했습니다. 얼마나 충격이 컸겠습니까?
그러면서 곰곰이 생각해 봅니다. "왜 내게 이런 일이 생기는가." 도무지 이해가 가질 않았습니다. 그렇게 고뇌하던 중에 "나는 언젠가 하나님께 헌신하겠다"하고 생각했던 옛날의 마음이 떠올랐습니다. 그리고 이 두 가지 생각을 연결해서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러다가 결국 지금이 바로 하나님을 위해서 헌신할 때라고 결단을 내렸습니다.
드디어 이 청년이 아프리카로 선교하러 떠났습니다. 지금의 '콩고'라는 아프리카 땅에 도착하자 식인종들이 기다렸다는 듯이 몰려옵니다. 하얗게 생긴 먹이가 오는데 식인종들이 얼마나 군침을 삼켰겠습니까?
그때 이 청년은 자신의 의족을 뽑아서 식인종들에게 던졌습니다. 이 식인종들이 그 뻣뻣한 의족을 들고 먹으려니 먹어집니까? 그러니까 이 야만인들이 그만 모두 엎드려서 그 청년을 신으로 떠받들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 청년이 아주 쉽게 선교 사역을 감당했다는 선교 초기의 일화가 전해 내려오고 있습니다.
이 청년이 그때 비로소 하나님의 깊으신 뜻을 깨달아 알았습니다. 하나님의 그 깊으신 섭리에 얼마나 감복했겠습니까? 그래서 신앙인은 하나님의 섭리를 느끼며 살아가는 것이 무엇보다 소중합니다.

▶청주 상당교회 목사님은 한 집회자리에서 인상 깊은 이야기를 했습니다. 이 목사님의 친구가 장애자로 판사가 되었는데 그 가정 내력이 있습니다.
제천에서 자라나 함께 한 마을에서 자랐는데 자기 집은 잘 살고 친구 집은 너무 너무 가난했습니다. 그 이유는 그 아버지가 늘 술만 마시고 도박을 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아버지가 도박으로 전 재산을 날려버리자 어머니가 삯바느질을 해서 근근이 살아갔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아버지가 도박해서 돈을 다 잃고 눈이 벌개져서 돌아와서 아내에게 말합니다. "돈 내놔" "당신이 몽땅 팔아 날리고 삯월세로 삯바느질로 사는데 무슨 돈이 있소?" "삯바느질해서 번 돈 있잖아 내놔" "없어요." 그때 돈을 안내 놓으니까 홧김에 잠을 자고 있던 아들을 들어서 마당에 던져버렸습니다. 그 일로 인해 이 아들은 척추가 삐고 다리가 부러져서 장애자가 되었습니다. 몸에 장애가 있으니까 아이들이 함께 놀아주지 않았습니다. 그러니까 그 아이는 골방에 들어가서 공부만 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수재가 되어 사법고시 합격을 하고 판사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장애인 아들이 아버지를 모시고 관광을 하러 다닙니다. 아버지에게 정중하게 효도를 다했습니다. 온 고을 사람들이 판사가 된 것보다 자기 아버지가 자기를 장애자로 만들었는데도 효성을 다하는 그 아들을 높이 평가했습니다.
그 판사는 자기 아버지를 원망하거나 불평하는 것이 아니라 '나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뜻이 있어서 아버지를 만나게 했고 내가 장애자가 되었으나 내가 장애자가 됨으로 말미암아 오히려 더 공부를 해서 하나님의 영광을 보았다.'고 했답니다.

 

2. 그 헤아림을 받을 수 있는 원동력은 무엇인가?

 

①사랑입니다. '원수를 사랑하라!'(27)
▶사랑과 미움에 관련된 인간의 유형을 넷으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
⑴사랑하는 자를 미워하는 자입니다. 나에게 선을 베풀고, 은혜를 베푸신 분들에게 악하게 대하는 악마적 본성을 나타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은혜를 원수로 갚는 자들입니다. 부모를 학대하고 심지어 자기 부모를 죽이는 패륜아도 세상에는 많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사랑을 지극히 많이 받았던 가롯 유다는 은 30냥이 탐나서 예수님을 팔았습니다.
⑵미워하는 자를 미워하는 것입니다. 이런 마음을 학자들은 동물적 본성이라고 말합니다. 자기에게 손해가 되는 사람을 악으로 보복하는 자들입니다. 자기를 해쳤다고 해서 나도 해치고, 자기에게 억울하게 했다고 해서 자기도 억울하게 하고, 자기에게 사기 쳤다고 자기도 끝내 사기치는 마음은 동물적 본성입니다.
⑶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는 자입니다. 학자들은 이것은 인간적인 본성이라고 말을 합니다. 보통 사람들의 본능적 사랑입니다. 남들로부터 사랑을 받았으니까 사랑하고, 대접받았으니까 대접하고, 남이 나에게 좋게 했으니까 나도 좋게 하는 상대적 보상을 하는 본성입니다. 이러한 사랑은 죄인들도 하는 사랑이라고 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세 번이나 '죄인들도 이렇게 하느니라.'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 '죄인'이란 하나님을 믿지 않는 불신자를 말합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도 다 이렇게 한다는 것입니다.
⑷미워하는 사람, 즉 원수까지라도 사랑하는 자입니다. 학자들은 이것은 하나님의 본성이라고 말합니다. 천사 같은 본성입니다. 나를 미워하는 자를 사랑해주고, 나를 학대하는 자에게 선대하고, 나를 저주하는 자에게 복을 빌어주는 마음, 이것은 하늘이 준 마음이며, 주님의 마음이며, 하나님의 본심입니다. 주님이 지금 이 사랑을 하라는 것입니다. ▶누구에게? 우리들에게! "내가 너희 듣는 자들에게 이르노니" 20절 "제자들을 보시고 가라사대" 이것은 땅 위에 사는 모든 인생들을 향해, 그리고 믿음의 사람들을 향해 주시는 메시지입니다.

 

②어떻게 사랑해야 하는가?
'⑴너희를 미워하는 자를 선대하라! ⑵너희를 저주하는 자를 축복하라! ⑶너희를 모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주님은 항상 쉽게 가르치십니다. "너희 원수를 사랑하라"고 하시고 무엇이 원수인지 혹 이해하지 못할까봐 "너희를 미워하는 사람을, 너희를 저주하는 사람을, 너희를 모욕하는 사람을" 이라고 밝혀서 설명해 주십니다. 그리고 사랑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모르는 사람들을 향해서 "선대하라. 축복하라. 위해서 기도하라"고 구체적으로 일러주고 있습니다.
어떤 랍비도 이렇게 가르친 적이 없었고, 세상의 어떤 현인과 철인도 "너희 원수를 사랑하라"고 말하지는 아니했습니다.
▶29절은 구체적으로 사랑하는 방법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네 이 뺨을 치는 자에게 저 뺨도 돌려 대며 네 겉옷을 빼앗는 자에게 속옷도 금하지 말라" 더 나아가서 30절은 보다 넓은 일반적인 행동원리를 말하고 있습니다. "무릇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 것을 가져가는 자에게 다시 달라지 말라". 31절은 가장 넓게 일반적인 행동원리를 말하고 있습니다.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도 남을 대접하라"고 하십니다.

 

③여기서 사랑하는 비결 몇 가지만 상고해 보자!(37)
⑴비판하지 않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남을 '정죄하고 비판하고 험담하는 것'을 좋아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남의 눈에 티가 보이면 내 눈에는 들보가 있다'고 하셨습니다.
▶우리나라 초대교회사에 있었던 일입니다. 예전에 화장실 시설이 좋지 않아 문을 안에서 잠그는 장치가 없었을 때의 일입니다. 교회 청년 한 명이 볼일이 급해 화장실에 가서 노크도 없이 문을 확 열었는데 글쎄 목사님이 화장실에 쭈그리고 앉아 담배를 피우고 계시더랍니다. 불신자 때의 습관을 끊지 못했던 것입니다. 깜짝 놀라 그냥 문을 닫았지만 그 사실이 온 교회에 소문이 나버리고 말았습니다.
문제가 커지자 교회에서는 제직회를 열어 목사님을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를 의논하게 되었습니다. 모든 제직이 '우리는 담배 피우는 목사님을 모실 수 없다'고 하면서 당장 목사님을 내보내자고 결의를 했습니다. 결정적인 흠이 있으니까 누구 한사람도 '안 됩니다' 하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때 장로님 한 분이 일어섰습니다. "제직 여러분의 말씀과 결의가 전부 옳습니다. 저도 반대하지 않겠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 목사님이 다른 곳에 정해진 임지도 없이 지금 나가시면 사모님과 자식들은 굶게 될 것이 아닙니까? 그리고 담배 피우는 목사를 누가 모셔가겠습니까? 3개월만 목사님께 시간을 드립시다. 그 동안 담배를 끊고 기도로 준비하며 다른 교회로 가시도록 합시다"라고 했습니다.
제직들은 장로님의 말을 받아 드려 목사님은 3개월의 시간을 얻었습니다. 목사님은 자기 자신을 생각해 보니 너무 한심했습니다. 그 시간부터 목사님은 강단에 엎드려 회개의 기도를 드렸습니다. 눈물과 콧물을 흘렸습니다. 하나님의 성령 충만을 체험하게 되었습니다. 성령의 불을 받은 것입니다. 그 다음부터 목사님은 불같은 말씀을 선포하셨습니다. 3개월이 지난 후 다시 제직회를 열고 목사님의 거취 문제를 의논했을 때 모든 제직들이 목사님을 붙잡았답니다. 그 후 그 교회는 크게 부흥되어 많은 곳에 선교하는 교회로 자리 매김하고 있다고 합니다.
⑵용서하는 것입니다(37). "용서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용서를 받을 것이요"
용서는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는데, 하나는 남을 용서하는 것, 다른 하나는 자신을 용서하는 것입니다. 나에게 피해를 준 사람을 용서하는 것은 쉬운 일은 아닙니다. 그러나 나 같은 죄인도 주님께 용서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면 내가 용서 못할 사람은 없습니다. /할/
여기 '용서'란 말은 '너그럽게 보아주다, 제거시키다, 숨겨 주다, 씻겨 주다, 지워 없애다'라는 뜻인데 헬라어로는 '포기한다', '탕감한다'라는 뜻을 지닙니다.

▶용서란 구체적으로 어떤 것인가?
⑴이해하는 것입니다. 그 처지, 그 입장, 그 형편, 그 정황을 이해하는 것이 용서입니다.
⑵잊어버리는 것입니다. 감정, 원한, 분노, 이런 것들을 잊어버리는 것이 용서입니다. 그런 것들을 기억하는 한 용서는 성립되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 기억을 되살리는 것도 용서를 방해합니다.
⑶사랑하는 것입니다. 물론 쉬운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마음을 지니고 사랑하는 몸짓을 취하는 것이 용서입니다.
⑷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를 위해 축복하는 기도를 드릴 수 있게 될 때, 용서는 구체화되는 것입니다.

④용서하면 어떻게 됩니까?
먼저 내 마음이 편안해 집니다. 내 영혼이 평정을 되찾게 됩니다. 증오심, 적개심, 원한 같은 감정의 풍랑을 가라앉히고 내 영혼이 평화를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 뿐입니까. 내가 남을 용서해야 내가 저지른 잘못도 용서받게 됩니다(마6:12).
⑴왜 우리는 원수를 사랑해야 합니까? 여기에 대해서 상당히 많은 사람들이 감상주의적인 입장을 취합니다. 사람들은 우리가 그들을 사랑하면 그들도 우리를 사랑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그들에게 잘해주면 그들도 우리에게 잘할 것이라고 합니다. 우리는 그들을 우리의 친구로 변화시키기 위해 그들을 사랑해야만 한다고 주장합니다. 김정일조차도 사랑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를 협상 테이블로 끌어내고 그에게 친절을 베풀면 그도 친절하게 나올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일리가 있는 말씀입니다. 그렇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 이 당부는 그 헤아림을 받는 비결이 거기에 있기 때문입니다.
이 명령은 원수가 잘 되라고 그런 것이 아닙니다. 원수를 미워하면 결국에는 내가 손해를 보게 되기 때문에 사랑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사람은 악한 감정을 마음에 품고 있으면 몸에 좋지 않은 '아드레날린'이라는 호르몬이 분비됩니다. 이 아드레날린이 몸에 많이 분비되면 건강이 나빠집니다. 이 호르몬은 인간의 감정이 격해질 때 생긴 답니다. 그러나 좋은 감정을 가지고 있으면 '엔돌핀'이 팍팍 쏟아져 나와 우리의 몸에 젊음을 준다고 합니다. /할/

⑵용서하면 '보상 즉 헤아림의 축복'이 있습니다.
㈀주님의 칭찬이 있습니다. 32-34절에 세 번이나 "칭찬 받을 것이 무엇이뇨?"
칭찬에는 두 가지가 있는데 '사람으로부터 받는 칭찬과 하나님으로부터 받는 칭찬'이 있습니다. 여기에서 말하는 칭찬은 하나님으로부터 받는 칭찬을 말합니다. 사람들로부터 받는 칭찬도 좋지만 이것은 정확한 것이 아닙니다.
여기 '칭찬'은 헬라어로 '카리스'라는 말인데 이것은 '은혜'라는 말입니다. 칭찬 받는 일은 하나님의 은혜로 되는 일이요, 은혜 받은 자에게 주어지는 결과임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야 하나님의 칭찬을 받을 수 있습니다.
▶원수를 용서하고, 악한 자를 선대하고, 기대 없이 줄 수 있는 믿음은 은혜 받지 않고는 불가능한 것입니다. 사람들의 칭찬은 은혜 받지 않고서도 가능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칭찬은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야만 가능합니다. 이 칭찬은 신비의 칭찬입니다. '이 은혜, 이 감격, 이 축복, 이 능력'으로 사시기를 축원합니다.
⑵"그리하면 너희 상이 클 것이요"(35) 이 땅에서도 이 상이 있고 저 영원한 천국에도 이 상이 있습니다. 설레는 마음으로 그 헤아림을 사모하시기 바랍니다.
⑶세상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칭함을 받게 됩니다. 다시 말하면 '저 사람은 진짜 성도구나!' /할/

 

3. 헤아림의 축복은 '주는 자'가 받습니다.(38)

 

31절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먼저 '대접'하라고 하십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대접받기를 좋아합니다. 대접이라고 하면 주로 먹는 것을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가장 큰 대접은 역시 사람다운 대접을 받는 것입니다. 인격적으로 대접받는 것보다 더 큰 대접은 없습니다.
다음으로 '받고자 하는 대로'라고 했는데 '내가 다른 사람에게 바라고 받고자 하는 대로 내가 먼저 다른 사람에게 해 주라'는 말씀입니다. 공동번역에 "남에게서 바라는 대로 남에게 해 주어라"고 번역했습니다.
▶이스라엘에 두 바다가 있는데 죽은 바다가 있고, 산 바다가 있습니다. 사해 바다는 죽은 바다인데 물을 받기만 하고 주지를 않아 썩어버린 물이 되었습니다. 갈릴리 바다는 헬몬산에서 내려오는 물을 받아서 다시 요단강으로 내려보냅니다, 갈릴리바다는 고기가 약 37종이 서식하고 있다고 하는데 풍성한 바다 살아있는 바다입니다.
주님은 친히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고 하십니다. ▶무슨 뜻입니까?
⑴하나님께서 갚아 주시겠다고 약속했습니다.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라는 말씀은 나는 이웃이나 형제에게 주었지만 하나님께서는 친히 나에게 갚아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원수도 하나님이 갚아 주시고, 상급도, 면류관도 하나님이 갚아 주시고, 축복도 하나님이 갚아 주신다'는 확실한 믿음을 가지세요!
⑵하나님께서 후히 주시겠다고 약속했습니다. 여기 '후하게'라는 말은 '갑절 이상, 넘치게'라는 뜻입니다. 본문은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주신다고 약속했습니다. '후히 되어'라는 말은 '분량과 좋은'이라는 말의 합성어로서 '좋은 분량으로 준다'는 뜻입니다. /할/
⑶하나님께서 안겨 주시겠다고 약속했습니다. 이 말의 뜻은 내가 축복을 찾아 동서남북을 돌아다닐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직접 축복을 가지고 오셔서 내 팔에 한 아름 풍성하게 안겨 주시겠다는 뜻입니다.
'헤아림을 도로 받을 것이니라'는 '다시'와 '재다, 측량하다'의 합성어로 '다시 측정을 받을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⑷결론적인 성경 구절을 읽고 말씀을 마치려고 합니다.
고후9:6절 "적게 심는 자는 적게 거두고 많이 심는 자는 많이 거두느니라."
전11:1절 "너는 네 식물을 물위에 던지라. 여러 날 후에 도로 찾으리라"
눅6:38절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도 헤아림을 도로 받을 것이니라" /할/ (2005년 8월 21일 대예배 설교)

출처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글쓴이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원글보기
메모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