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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한 의사! 예수! (마 9:1-8)

by 【고동엽】 2022. 2. 4.

영원한 의사! 예수! (마 9:1-8)

 

술이 없으면 단 한 시간도 살 수 없는 알콜 중독자 아버지에게 두 아들이 있었습니다. 결국 아버지는 술 때문에 패가망신하고 말았습니다. 후에 큰 아들은 입에 술을 한 잔도 대지 않는 아들이 되었는데, 둘째 아들은 아버지같이 술고래가 되었습니다. 신문기자가 큰 아들에게 물었습니다.
“왜 술을 마시지 않습니까?” “내가 술을 어떻게 마실 수 있습니까?” 둘째 아들에게 물었습니다. “왜 그렇게 술을 마십니까?” “보고 배운 것이 그것인데 내가 술을 안 마실 수 있습니까?”
아버지의 술 때문에 큰 아들은 술을 안 마시게 되었고, 둘 째 아들은 술을 마시게 되었습니다. 죄가 전가되는 사람이 있고 안 되는 사람이 있습니다. 오늘은 죄의 문제를 다룬 본문입니다. ◀제목소개!▶

 

마9장에는 여러 가지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1~8; 중풍병자를 고치신 사건, ▶9~13; 마태를 제자로 부르신 일, ▶14~17; 금식에 대한 교훈, ▶18~26; 아이로의 죽은 딸을 살리신 일과 열두 해를 혈루증으로 고생하던 여인을 고치신 일, ▶27~34; 소경과 벙어리를 고치신 사건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35절 "예수께서 모든 성과 촌에 두루 다니사 저희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라"
▶여기서 예수님이 하신 사역 세 가지가 나오는데, 그것은 ‘가르치시고 전파하시고 고치신 일’입니다.

①두루 다니사; ‘모든 성과 촌에 두루 다니사’ 갈릴리 지방 곳곳을 말합니다.
욥2:2절에 하나님이 사단에게 물었습니다. "네가 어디서 왔느냐" 사단의 대답은 "땅에 두루 돌아 여기저기 다녀왔나이다"였습니다. 예수님도 여기저기 두루 다니셨고 사단도 여기저기 두루 돌아다녔습니다.
차이점은 예수님은 가르치시고 전하시고 고치시기 위해서였고, 사단은 먹이 사냥을 위해서였습니다. 지금도 사단은 여기저기를 돌아다닙니다.
벧전5;8절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요10:10절 “도적이 오는 것은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예수님은 선한 목적을 위하여, 사단은 악한 목적을 위하여 지금도 두루 다닌다는 말씀입니다.
②가르치시며; 예수님은 열두제자를 가르치셨고, 70인 제자를 양육하셨습니다. 그리고 기회 있는 대로 산에서 들에서 회당에서 성경을 가르치셨고, 그리스도인의 바른 삶을 가르치셨습니다. 기독교는 그 전승을 따라 들어가는 곳마다 학교를 세우고 신학교를 세워 사람들을 가르쳤습니다.
③전파하시며; 한 마디로 복음전파입니다. 우리도 땅 끝까지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전해야 합니다.
④고치시며; 주님의 공생애동안 고치시는 사역에 중점을 두셨습니다. 마9장에 보면 ‘중풍병, 혈루증, 눈먼 자, 벙어리를 고치셨고 귀신들린 자도 고치셨습니다. 그리고 죽은 자도 살리셨습니다. 마4:23절에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셨고 24절에 “앓는자, 각색병자, 고통에 걸린자, 귀신 들린자, 간질하는 자, 중풍병자들을 데려오니 저희를 고치시더라”고 했고, 마9;35에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라"고 했습니다.

오늘 본문은 막2:1-12절과 눅5:17-26절에 비해 압축되어 기록되어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마태는 사람들의 믿음의 행위에는 크게 비중을 두지 않고 예수님이 죄를 사하시는 면에 초점을 맞추어 기록하였습니다.
죄로 얼룩진 인생에게는 이 세상에 살면서 여러 가지의 문제들을 안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보통 중풍 병은 노후에 많이 찾아오는 것인데 본문에 나타난 중풍병자는 예수님이 '소자야' 하신 말씀을 볼 때 상당히 젊은 사람이었음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중풍 병의 상태도 '침상에 누운 중풍병자'라는 표현을 볼 때 아주 심한 상태였음을 엿볼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문제를 만난 인생들에게 한 가지 유일한 소망이 있습니다. 그 소망은 예수님입니다. 인생의 모든 문제는 예수님 한 분만이 해결하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본문에 보면, 가버나움으로 오신 예수님은 어느 집에 머무셨습니다. 예수님이 그 집에 계시다는 소문이 나자 많은 사람들이 모여와 문 입구가 막힐 정도로 가득 찼습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소문을 들은 중풍병자는 네 명의 친구들의 도움으로 예수님을 만나려고 찾아왔습니다.
예수님만 만나면 이 사람의 질병의 문제가 해결된다는 믿음으로 왔으나 도무지 집안으로 들어갈 수가 없었습니다.
저들은 지붕을 뜯고 구멍을 내어 중풍병자를 침상 채 달아 내렸습니다. 집안에서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사람들에게는 생각지 않은 일이 발생했습니다.
흙먼지가 날리고 지붕에서 침상이 내려오니 의아해 했을 것입니다. 어찌 보면 저들의 행동이 무례한 행동이었을지도 모릅니다. 자기들의 문제만 생각하는 염치가 없는 자들이라고 비난받기에 충분합니다.
그러나 저들은 예수님을 만나는데 있어서 어떤 장애물도 헤치고 나올 정도의 믿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중풍병자와 네 명의 친구들은 예수님에 대한 믿음과 확신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저들은 지붕을 뚫을 정도의 확신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신앙은 이렇게 적극적인 생각을 하게 합니다.
▶믿음이 있는 사람은 어떠한 일을 만나든지 포기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믿음은 기적을 보게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믿음이 없는 사람은 장애물이 있을 때 하나님을 원망합니다. 믿음이 없는 사람은 문제가 있을 때마다 자기의 이성으로 돌아가고, 경험으로 돌아갑니다. 하나님 앞에서 똑똑한 체 하며 합리적인 방법을 추구합니다. 이런 사람들은 하나님 은혜를 체험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믿음으로 하면 안 되는 것 같지만 반드시 되고 맙니다. ▶믿음으로 하면 죽는 것 같지만 살아납니다. ▶믿음으로 하면 망하는 것 같지만 흥하게 됩니다.
그래서 성경은 "믿음으로 하지 아니하는 모든 것이 죄니라"(롬14:23)고 경고하고 있습니다.

▶중풍병자와 네 명의 친구들은 단합된 믿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목적이 같은 믿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비록 자기 몸을 마음대로 가누지 못한다 할지라도 믿음이 좋은 친구가 내 주변에 있다면 그 사람은 참으로 행복한 사람입니다.
예수님은 "저희의 믿음을 보시고"(2절) 중풍병자에게 "소자야, 안심하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고 선언하셨습니다.
여기 '안심하라'는 말씀은 죄책과 불안으로 살아온 인생에게 평화의 복음이었습니다. 그리고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는 말씀은 오직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바로 하나님이심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행3장에 보면 베드로와 요한이 제 구시에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가다가 구걸하던 앉은뱅이를 보고 예수 이름으로 일으켜 세웠습니다. 예수님의 능력을 받아 기적을 행할 수 있어도, 결코 죄 사함의 선포는 하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은 허물과 죄로 죽어 버린 인생을 살리시기 위해(엡2:1), 죄와 사망의 법아래 있는 우리를 해방시키시려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롬8:2).
인생에 있어서 가장 시급한 문제는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인생의 문제는 먹을 것이 아닙니다. 입을 것도 아닙니다. 주택문제도 아닙니다. 돈의 문제도, 직업의 문제도 아닙니다.
인생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문제는 바로 죄의 문제입니다. 죄가 있는 곳에는 언제나 다툼과 전쟁이 있고, 불행이 있고, 결국 사망이 있습니다.
다윗은 죄 용서 받은 자의 행복을 이렇게 노래하고 있습니다.
시32:1절 "허물의 사함을 얻고 그 죄의 가리움을 받은 자는 복이 있도다”

▶예수님이 '소자야 안심하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는 말씀에 '서기관들이 속으로 이 사람이 참람하도다'라고 도전을 했습니다.
이 세상에는 두 종류의 사람으로 분류해 볼 수 있습니다. 누굽니까? 죄인과 의인으로 분류해 볼 수 있어요! 그러나 보다 깊이 들어가 보면 그것은 죄인인줄 모르는 죄인과 죄인인 줄 아는 죄인입니다.
오늘 본문에 두 종류의 죄인이 등장합니다. 1-8절에 중풍병자와 어떤 서기관들입니다. 그리고 9-13절에 세리와 죄인들이라는 죄인인줄 아는 사람들과 바리새인들로 대표되는 죄인인 줄 모르는 죄인입니다.
내가 죄인임을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주님께 가까이 나가면 나갈수록 죄인임을 깨닫게 됩니다. 베드로는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입니다”라고 고백했고, 사도 바울도 그의 생애를 주님 나라를 위해 헌신하며 달려가다가 "내가 죄인 중의 괴수"라고 고백했습니다(딤전1:15).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이 하나 있습니다. 우리가 죄를 지었기 때문에 죄인인 것이 아니라 죄인이기 때문에 죄를 짓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근본적으로 죄인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나 주님 앞에 우리가 죄인임을 자백하면 진정한 자유를 누릴 수 있습니다.
본문에는 죄인임을 인정하지 않고 죄를 감추면서 결국 그 죄의 문제를 해결 받지 못한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자기들이 죄인임을 알고 주님 앞에 나가 죄 사함을 받고 죄로부터 자유를 누릴 게 된 사람도 있습니다.
서기관은 바리새인과 함께 종교적으로는 완벽한 행위를 하는 사람들입니다. 일주일에 두 번씩 금식하고, 십일조 생활을 철저히 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을 향해 "화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잔과 대접의 겉은 깨끗이 하되 그 안에는 탐욕과 방탕으로 가득하게 하는 도다"(마24:25)라고 책망했습니다.
27절에서도 "화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회칠한 무덤 같으니 겉으로는 아름답게 보이나 그 안에는 죽은 사람의 뼈와 모든 더러운 것이 가득하도다"라고 꾸짖고 있습니다.
이처럼 인간은 교활하고 가식으로 가득 찼습니다. 겉모습은 지적으로 보이고 고상한 것 같은데 우리의 속은 참으로 더럽습니다. 시기와 질투, 탐욕, 증오심, 악한 생각들이 그칠 줄 모르고 솟아나고 있습니다.
우리들 안에도 끊임없이 이런 거짓과 위장이 있습니다.
▶신앙이 없으면서도 신앙이 있는 것처럼 종교 생활을 하지는 않습니까?
▶욕심이 없는 것 같으면서도 욕심으로 가득 찬 우리는 아닙니까?
▶돈에 관심이 없는 체 하면서 돈에 눈이 먼 우리는 아닙니까?
▶사랑을 노래하지만 우리의 마음에는 미움으로 가득 차지는 않았습니까?
주님은 우리에게 속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겉모양을 중요시하고 있습니다. 외적인 것에 너무 신경이 곤두섰습니다.
무슨 차를 타고 다니는가? 어떤 집에 살고 있는가? 어느 학교 출신인가? 그 사람의 배경이 좋은가? 등등 갖가지 외적인 요소를 보지만 예수님은 사람의 중심을 보십니다.

서기관들은 율법에 능통한 사람들입니다. 그런데도 오실 메시야가 유대 땅에 오셨지만 믿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오히려 그 메시아를 죽이려고 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수많은 기적들을 보았고, 들었습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을 메시아로 받아들이지 못하였습니다.
율법에 정통한 사람이요, 율법을 가르치는 사람의 위치에 있으면서도 신앙적 편견, 믿음과 동떨어진 고정관념 때문에 정작 보아야 할 것을 보지 못하였습니다.
서기관들은 예수님을 향해 신성모독을 하는 자로 속으로 욕하였습니다. 그래서 4절에 "예수께서 그 생각을 아시고 가라사대 너희가 어찌하여 마음에 악한 생각을 하느냐"고 꾸짖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속을 보고 계시며, 중심을 살피고 계십니다.
시139:1-4절 "여호와여 주께서 나를 감찰하시고 아셨나이다. 주께서 나의 앉고 일어섬을 아시며 멀리서도 나의 생각을 통촉하시오며, 나의 길과 눕는 것을 감찰하시며 나의 모든 행위를 익히 아시오니, 여호와여 내 혀의 말을 알지 못하시는 것이 하나도 없으시니이다"
하나님을 속이려 들지 마세요. 우리의 마음을 다 아시는 하나님 앞에 진실하게 서야 합니다.
예수님은 자기를 믿지 못하는 서기관들에게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는 말과 일어나 걸어가라 하는 말이 어느 것이 쉽겠느냐"고 물었습니다.
보통사람의 관점에서 보면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는 말이 쉬울 것입니다. 어떤 증거가 필요치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중풍병자에게 '일어나 걸어라'고 하는 것은 능력이 없으면 거짓으로 판명될 것입니다.
그렇지만 예수님의 관점에서 보면 '죄 사함의 문제'가 더 컸습니다. 죄의 문제는 오직 하나님밖에 해결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먼저 중풍병자에게 죄 사함을 선포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죄 사함의 권세'에 시비를 거는 서기관들 앞에서 주님은 중풍병자에게 "일어나 네 침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고 명령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이 병자를 고치시는 모습을 보면 참 특이합니다. 세상에서 병을 고치는 방법과 주님께서 고치시는 방법이 아주 다르게 나타납니다.
세상의 의사들이 과학적이고 의학적인 방법으로 치료하는 것과 예수께서 병을 진단하고 병자를 치유하는 접근방법이 전혀 다르다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먼저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주님은 기적을 일으키셨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그들의 믿음을 먼저 배워야 합니다.

 

1. 어떤 믿음을 가졌는가?

 

①중풍병자는 자기 힘으로 거동이 불가능한 사람입니다(2).
"침상에 누운 중풍병자" 중풍 병은 전신이나 반신 혹은 신체의 일부분이 마비되어 거동이 불편한 상태를 의미합니다. 본문의 주인공은 침상에 누워있었던 점으로 미뤄 전신마비였던 것 같습니다.

②'저희의 믿음을 보시고' 어떤 믿음을 보셨는가? 연합하는 믿음을 보셨습니다.
친구들과 병자의 믿음을 함께 보셨습니다. 다 훌륭한 믿음이었습니다. 친구를 주님 앞으로 데리고 가기만 하면 반드시 고쳐질 것으로 믿은 네 친구들의 믿음도 훌륭했고, 친구들의 권면에 기꺼이 따른 병든 자의 믿음도 훌륭했습니다.
기독교에서는 개인의 신앙을 존중히 여깁니다. 개인의 신앙에 따라 그 사람의 구원과 구원 받지 못함이 결정됩니다. 그러나 혼자 믿는 것보다 온 가족이 함께 믿을 때 그 신앙은 더 존귀하고, 더 큰 역사를 이루어 나갈 수 있습니다. 연합의 힘은 큰 산을 옮길 수 있습니다. 한 사람이 천을 쫓고 두 사람이 만을 쫓습니다.

③고칠 수 있다는 확실한 믿음의 소유자들이었습니다. ‘우리는 고칠 수 없다. 그러나 주님은 고칠 수 있다’는 확실한 믿음을 가졌습니다. 믿음은 확신입니다. 구원의 확신, 기도 응답의 확신, 영혼이 잘 되면 범사가 잘 된다는 확신이 중요합니다. 주님은 그 사람의 믿음의 분량 따라 역사하십니다. “네 믿음이 크도다. 네 믿음대로 될찌어다” /할/

④장애물을 극복하는 믿음입니다.
네 사람들이 무거운 들것을 들고 먼 길을 왔지만 예수님 앞에까지 갈 수가 없습니다. 용신 할 수 없을 정도로 수많은 사람들이 가로막고 자기들만이 예수님의 말씀을 듣겠다고 조금도 양보해 주거나 비켜주는 이가 없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정면 돌파로 행동적인 믿음을 보였습니다. 멀리 있으면서 주여! 주여! 한 것이 아닙니다. 행동했습니다. 장애물이 있다고 해서 뒤 돌아서지 않았습니다. 장애물을 뚫고 전진했습니다. 일찍이 톨스토이는 '행동하지 않는 믿음은 믿음이 아니다'고 말했습니다.
눅19장에 삭개오가 예수님을 보려고 나갔지만 선천적으로 키가 작은 삭개오는 예수님을 볼 수 없자 포기하지 않고 뽕나무 위로 올라가서 예수님을 바라보았습니다. 그 열심! 그 정열! 그 믿음을 보시고 예수님은 "삭개오야 내려오라 오늘 내가 너의 집에 유하여야 하리라" 하시고 삭개오의 집에 가셔서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도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축복의 말씀을 해 주셨습니다.
우리가 신앙생활, 믿음생활 하려면 많은 장애물들이 있습니다. 우리가 천국 가는 길에는 사탄들이 수많은 지뢰와 온갖 덫과 올무 같은 장애물들을 설치하고 우리가 걸려들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딤전3:7, 4:1)
구약에 아간에게는 탐욕이 장애물이 되었습니다. 요나에게는 미움이 장애물이었습니다. 도마라는 예수님의 제자는 의심이 장애물이었고, 데마라는 바울의 동역자에게는 세상사랑이 장애물이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성도들이 장애물이 닥쳤을 때 극복하는 방법이 있습니다.
⑴정면으로 돌파하는 방법입니다.
사탄과의 싸움은 피한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믿음을 굳게 하여 대적하여 싸우는 것입니다.
벧전5;8절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너희는 믿음을 굳게 하여 저를 대적하라"
⑵돌아가는 방법이 있습니다.
이것을 우회 작전이라고 합니다. 피하는 것이 아니라 전술상 돌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⑶넘어가는 방법이 있습니다.
시냇물은 흐르다가 앞이 가로막히면 모였다가 넘어서 흘러갑니다. 신앙생활에 장애물이 닥쳤을 때 포기하지 말고 위로 올라가는 신앙이 되어야 합니다. 장애물이 크면 클수록 믿음의 강도를 높여야 합니다. 기도의 강도를 높여야 합니다.
자동차를 운전할 때 평지에서는 5단 기어로서도 잘 달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언덕이 닥치면 기아 변속을 하여야 합니다. 4단가지고 안되면 3단으로 높이고, 3단가지고 안되면 2단으로, 2단도 안되면 1단으로 높여야 합니다.

⑤포기하지 않는 믿음이 귀한 믿음입니다.
그들은 장애물을 극복하고 지붕에 올라가서 그 지붕을 뜯어내고 병자를 침상 채 매달아 예수님께로 내려 보냈습니다. 얼마나 멋진 발상입니까? 갈6:9절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피곤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
이런 믿음을 보시고 주님은 “소자야! 안심하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고 선언하시자 그는 침상에서 일어나 걷고 뛰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할/

 

2. 영원한 의시가 되시는 예수님의 고치시는 순서가 있습니다.

 

①죄부터 고치셨습니다.
중풍병자가 예수께 왔을 때 "네 병이 나아라" 하지 않으시고 "소자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하고 죄부터 고치셨습니다. 진단이 다르고 순서가 다릅니다. 그 말은 그의 병의 원인이 죄로 말미암았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병을 고치되 근본이 되는 죄부터 해결하십니다.

▶질병은 몇 가지 원인에 의해서 발생할 수 있습니다.
⑴무리해서 올 수가 있습니다.
사람이 무리하면 병이 발생합니다. 내 능력은 열밖에 안 되는데 스무 가지 능력이 요구되는 일을 하면 병이 납니다.
기계를 보면 더 쉽게 알 수 있습니다. 4톤을 실을 수 있는 차에 10톤을 실으면 펑크가 나고 고장이 나고 부서지게 됩니다. 혹시 견디더라도 오래가질 못합니다.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무리하면 몸살이 나고 병이 생깁니다. 이런 병은 대부분 평안히 쉬면 쉽게 낫습니다.
⑵불결해서 생기는 병이 있습니다.
주변 환경이 불결하거나 우리 신체를 깨끗하게 유지하지 못하면 병이 발생합니다. 전염병은 불결해서 생겨납니다.
⑶상한 음식을 먹어도 병이 생깁니다.
이런 병은 깨끗하게 해주면 낫습니다. 더러운 것을 치우고 오염된 것을 버리면 병에 걸리지 않습니다.
⑷어떤 때는 부주의로 병이 생길 수도 있습니다.
자동차에 부주의하면 사고가 나고 부러지고 다치게 됩니다. 길을 가다가도 잘못해서 부딪치거나 넘어지거나 미끄러지면 깨지고 부러집니다. 또 전기나 화재 같은 사고를 통해서도 사람들은 다치거나 병을 얻게 됩니다.
⑸또한 폭식과 폭음을 하든지 생활이 무절제하면 병이 발생합니다.
그 정도가 심하게 되면 암이 발생할 수도 있습니다. 위장병이나 위염 등은 음식을 절제하지 못하거나 규칙적으로 공급해 주지 않아서 생긴 병입니다. 폐암도 보면 담배를 절제하지 못하고 과하게 피울 때 많이 발생합니다.
⑹또 타락한 성문화를 통해서도 병을 얻게 됩니다.
모두가 무절제해서 그렇습니다. 그러나 이런 병도 조심하고 절제하면 낫게 됩니다.
⑺그런데 어떤 병은 죄 때문에 올 수도 있습니다.
이것이 오늘 성경이 말씀하고 있는 병입니다. 그런 병은 고칠 방법이 없습니다. 백약이 무효입니다.
오늘 태아들 가운데 미숙아나 불구아, 그리고 저능아가 많은데 그 통계가 11.1%나 된다고 합니다. 이것은 무서운 통계 수치입니다. 열 명중에 한 명 꼴이 넘는다는 얘기입니다.
그 원인은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습니다. 의약품을 과용하거나 잘못 사용해서 병이 생길 수도 있고 병의 치료시기를 넘겨서 발생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임신 중에 부모가 술이나 마약이나 담배나 성병 때문에 아기에게 병이 발생했다면 그 병은 부모의 죄 때문입니다.

이 중풍환자는 전신마비가 왔습니다. 백약이 무효라서 고생을 많이 했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을 보면 사람들이 메고 예수께로 왔다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병자를 보시고 "네 병이 나아라"가 아니고 "네 죄 사함 받았느니라" 고 선언하셨습니다. 병의 원인이 죄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병의 근원을 고치시는 모습입니다.
▶심판에는 몇 가지가 있습니다. 그중 하나는 장차 주어질 심판이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 앞에서 주어지는 심판입니다.
두 번째는 당장 주어지는 심판이 있습니다. 잘못하면 당장 심판이 떨어집니다. 주로 구약적인 심판입니다.
그런가 하면 세 번째는 한참 후에 주어지는 심판도 있습니다. 주로 신약 적인 심판으로 오늘날에 볼 수 있는 심판으로 많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 심판은 부모의 죄나 자신의 죄로부터 올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부모들의 죄가 한참 후에 자손들에게서 나타나기도 합니다. 이 중풍병자의 경우일 것입니다. 그는 자신의 죄로 말미암아 병을 얻은 경우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 중풍병자에게 죄부터 고치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신앙인 들은 언제나 이 심판을 두려워해야 합니다. 그리고 종말을 두려워하는 심정을 가져야 합니다. 이것을 생각할 때 우리의 자세가 가다듬어 지고 경건해 지는 것입니다.

 

②영혼을 고치십니다.
사람들이 중풍병자를 침상에 눕혀 들고 왔습니다. 와 보니 사람들이 많아 예수께 접근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지붕을 뚫고 네 사람이 합심해서 달아 내렸습니다.
얼마나 감동적인 모습입니까. 서로 협동하는 것은 이렇게 아름다운 것입니다. 더불어 살아가고 함께 도와가며 살아가는 모습이 이렇게 아름답고 진지합니다.
그 모습을 보시고 예수께서 얼마나 감동하셨겠습니까? 그래서 예수께서 그 중풍병자에게 주목하셨습니다. 그러면서 이 중풍병자에게 "소자야 안심하라"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말씀은 "소자야 이제는 두려워하지 말고 불안해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여러분, 병자에게 가장 시급한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영혼의 안심"이고 "영혼의 위로"입니다. 우리가 병자들을 심방하는 것도 여기에 이유가 있습니다. 우리가 병자들을 그 자리에서 고칠 수는 없지만 병든 사람들에게서 이런 불안감을 덜어주고 영적으로 위로하는 것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병자들뿐 아니라 사람이 살아가면서 느끼는 가장 피곤한 것은 바로 이 불안감과 절망감입니다.
이 중풍병자는 몸은 전신이 마비되었는데 정신은 온전했습니다. 그러니 몸은 말을 듣지 않고 살아갈 희망은 없고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것이 고통일 뿐만 아니라 내일이라고 소망이 있는 것도 아니고 그저 막막하기만 하니 얼마나 불안했겠습니까? 그가 예수께 오면서도 "과연 고침 받을 수 있겠는가" 하는 불안감 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병자에게 예수께서 먼저 만나자마자 하신 말씀이 바로 "소자야 안심하라" 하는 말씀입니다. 이것이 진정한 영적 위로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영적 치유입니다.
사람이 병들면 가장 먼저 찾아오는 것은 몸의 아픔보다 "영혼의 불안"입니다. 병도 그저 맹장 하나 떼어내는 것이 아니고 중병이라고 생각해 보십시오. 경험한 분들은 알 것이지만 얼마나 고독하고 불안합니까? 그래서 내 병이 암이라는 진단을 받는 순간 사람들이 지레 죽지 않습니까?
이런 사람들에게 가장 요구되는 것은 영적 안식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에게 영적 안식부터 주셨던 것입니다.
이것은 병자뿐만이 아닙니다. 오늘 현대인들도 모두 이 영적 안식이 필요한 사람들입니다. 영혼의 안식이 필요한데 받지를 못하니까 기쁨을 상실하고 우울증에 빠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극도로 심해지면 결국 자살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래서 신학자 ‘폴 틸리히’는 현대인은 지식, 기술, 고도의 문화생활을 누리고 살지만 타인에게 공개하기 어려운 세 가지 그림자가 따라다닌다고 했습니다.
그것이 공허감이고 죄책감이고 공포감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현대인들은 많은 것을 소유하고 누리고 살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늘 공허감에 시달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또 현대인들은 늘 마음이 안정되지 못하고 만성적인 죄책감에 눌려 있거나 실수에 대한 공포감, 종말에 대한 공포감에 시달린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오늘 현대인들은 위로 받아야 살아갈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니 이 중풍병자를 생각해 보십시오. 몸은 부자유하고 회복 가능성은 없으니 그 불안한 마음이 얼마나 크겠습니까? 그런데 그가 주님께 왔을 때 주님은 죄도, 영혼도 함께 고치셨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영원한 의사 예수"이십니다. 주님은 우리의 몸을 고치실 뿐 아니라 우리의 영혼을 고치십니다. 이것이 최고의 은혜요 축복입니다.

 

③육신을 고치셨습니다.
예수님은 죄와 영혼을 고치시고 나서 그의 육신을 고치셨습니다. 세상방법으로는 육신부터 고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죄를 해결하시고 영혼부터 고치셨습니다.
이 중풍병자는 죄 사함을 받고 영혼이 고침 받으니 몸은 저절로 고침 받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중풍병자에게 "네 침상을 들고 집으로 가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이 신앙생활의 순서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먼저 내 영혼이 복을 받아야 합니다. 그러면 나머지 문제는 저절로 풀어집니다.
그래서 신앙생활은 "내 영혼 이 복을 받는 생활"입니다. 이것이 우리들이 신앙 생활하는 목적이고 축복입니다.

오늘 현대인들은 잘 살기 위해서 별 짓을 다합니다. 그리고 건강하기 위해서 별것을 다 찾아 먹습니다. 참 안쓰러울 정도입니다. 그런데 생각해 보면 그 방법은 접근이 잘못된 것입니다. 그것은 순서가 바뀌었습니다.
먼저 신앙회복부터 해야 합니다. 그러면 "건강한 삶"이 주어집니다. 그래서 성경에 보면 "네 영혼 이 잘되면 범사가 잘되고 강건해진다"고 했습니다.

▶캐나다의 목재 왕 ‘깁슨’이라는 사람이 이런 고백을 했습니다. 그는 처음에 물방앗간으로 시작했는데 점점 부자가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마침내 280마일(약 500Km)이나 되는 철도를 개인이 소유할 정도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나중에는 5,200정보(약 1500만평)의 산림을 보유하여 목재 왕으로 아주 큰 부자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자 사람들이 어떻게 해서 그렇게 큰 부자가 되고 성공했느냐고 질문을 했습니다. 그는 그의 성공 이유를 이렇게 대답했다고 합니다. "나는 세상을 움직이는 근본이 무엇인지 그 궁극을 발견했기 때문에 나의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고 일했다"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그가 말하기를 "나는 수단방법으로 모은 재산은 4대 이상을 가지 못 하지만 하나님이 주신 복으로 모은 재산은 수천대로 이어진다는 사실을 굳게 믿는다"고 했습니다.
이런 고백은 신앙이 회복되고 고침 받은 후에 일어나는 삶을 체험했기 때문에 나올 수 있는 것입니다.

 

④생활을 고치십니다.
주님께서는 고침 받은 병자에게 말씀하시기를 "네 침상을 들고 집으로 가라" 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그 동안 병 때문에 열심히 하지 못한 일들을 하면서 살라"는 말씀입니다. 참 소망 적인 말씀입니다. "이제 집으로 가라" 얼마나 소망 넘치는 말씀입니까. "생활의 회복", 이것이 곧 축복의 삶입니다.
구원받는다는 사실은 그 자체로서 중요합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구원받은 사람으로 살아가는 삶입니다. 병을 고치는 것도 중요합니다. 그런데 더 중요한 것은 회복된 다음에는 건강한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병자에게 말씀하시기를 "네 침상을 들고 집으로 가라"고 하셨습니다. 그 말씀은 "이제 가서 못 다한 일을 하라"는 뜻입니다. 생활이 뒤죽박죽되었던 그의 삶에 이제 질서와 회복을 주시는 것입니다. 예수께로 가면 누구에게나 이 질서와 회복이 주어집니다.
이렇게 예수께서는 병을 고치되 완전하게 고치십니다. 죄도, 몸도, 영혼도, 생활도 함께 고치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영원한 의사이십니다.
하나님은 고치시기 위해서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셨습니다. 뒤죽박죽되었던 것, 잘못되고 무질서한 세상일들을 고치시기 위해서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세상에서 고통을 당하는 사람들의 죄를 치료하시고 영혼을 치료하시고 몸을 치료하시고 생활을 고치시기 위해서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우리 모두 예수님을 통해서 이런 은혜를 받고 회복되는 삶 을 살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영혼과 죄와 생활과 육신을 고치시는 예수님을 맞아들이셔서 우리의 나약한 신앙도 고치고 바로잡는 축복의 삶을 살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씌어진 모든 굴레들을 시원하게 벗어버리고 참 자유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 주님은 그런 자유와 은혜와 복을 주시기 위해 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믿/

 

출처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글쓴이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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