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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도들이여! 너는 행복자로다! (신 33:24-29)

by 【고동엽】 2022. 2. 3.

성도들이여! 너는 행복자로다! (신 33:24-29)

 

옛날 어느 임금님이 병이 들었습니다. 전국에서 모인 유명한 의사들이 최선을 다했지만 고치지를 못했습니다. 그런데 한 도사가 찾아와서 처방을 내리기를 '왕의 병을 고치려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의 속옷을 입으면 된다'는 것입니다. 신하들이 전국을 헤매며 행복한 사람을 찾았습니다. 공부를 많이 한 학자를 찾아가서 행복하냐고 물었지만 배울수록 근심이 많다고 했습니다. 돈이 많은 부자를 찾아가서 행복하냐고 물었습니다. 그런데 부자는 아직도 더 많은 돈을 벌어야 하기 때문에 행복은 안중에도 없다고 했습니다. 아주 건강한 사람을 찾아가서 행복하냐고 물었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은 언제 병이 찾아올지 몰라 불안하다고 말했습니다.
행복한 사람을 찾지 못해 낙심하여 돌아오는 길에 밭에서 일하고 있는 한 부부를 보았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찬양하며 기쁘게 노래'하면서 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 모습을 본 신하가 기쁜 마음으로 달려가 물었습니다. "당신은 행복합니까?" 그러자 "예! 우리 부부는 하루 하루를 감사하며 살고 있습니다. 우리는 너무 행복합니다"
드디어 행복한 사람을 만난 신하는 자초지종을 말했습니다. 그리고 입고 있는 속옷을 벗어 달라고 정중히 요구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농부가 난처한 표정을 지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무슨 문제라도 있습니까? 돈은 얼마든지 드리겠습니다" 그 때 농부가 슬픈 표정을 지으며 말하기를 "죄송합니다. 저는 가난해서 지금까지 속옷을 입어본 적이 없습니다"
이 때 신하가 유명한 말을 남겼습니다. "행복한 사람은 있는데 속옷이 없구나!"
이 이야기는 인생의 행복이 학식이나 재물이나 건강, 권력의 소유에 있지 않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매일 매일 주어진 삶 속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하면서 사는 자가 진정한 행복자임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빌립보서를 통해 '기뻐하라'고 우리에게 당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세속에서 기뻐하라고 한 것이 아니라 '주안에서'에서 기뻐하라고 당부합니다.
빌3:1절 "종말로 나의 형제들아, 주안에서 기뻐하라" 빌4:4절 "주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그리고 빌4:10절에서는 "내가 주안에서 크게 기뻐"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기쁨이 행복입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의 조건은 기뻐할 조건이 아닙니다. 지금 감옥 안에서, 쇠고랑을 차고 있습니다. 그런 그가 세상에서 자유롭게 살고 있는 자들을 향하여 '주안에서 기뻐하라'고 합니다.
주님 안에 있는 은혜를 아는 사람이 진정한 행복자입니다. /믿/ ●많이 가졌다고 행복한 것이 아닙니다. 돈으로 고급 침대는 살 수 있지만, 깊고 편안한 잠은 살 수 없습니다. 돈으로 맛있는 음식을 살 수 있지만, 입맛까지 살수는 없습니다. 또 돈으로 좋은 집을 살수는 있지만, 돈으로 행복한 가정을 살수는 없습니다.
시127:2절 "여호와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에게는 잠을 주시는도다"
시128:1-2절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 도에 행하는 자마다 복이 있도다 네가 네 손이 수고한대로 먹을 것이라 네가 복되고 형통하리로다"
시121:4,8절 "이스라엘을 지키시는 자는 졸지도 아니하고 주무시지도 아니하시리로다/여호와께서 너의 출입을 지금부터 영원까지 지키시리로다" /할/ 주안에 있는 성도가 행복한 사람입니다. ◀제목소개!▶

 

신33장은 모세가 죽기 전에 이스라엘의 12지파에게 축복하는 내용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 24-25절은 아셀 지파에 대한 축복의 내용입니다. 아셀은 야곱의 12아들 중 8번째 아들의 이름이다. 그 이름의 뜻은 '기쁨'입니다. 모세는 인생의 산전수전 다 겪은 사람입니다. 누구보다도 하나님을 잘 섬기고 하나님의 귀한 일군으로 부름 받아 충성한 사람입니다. 그런 그가 죽기 전, 비스가 산에 오르기 전, 모압 평지에서 성령에 감동을 받아 백성들을 축복하고 있습니다.
26-28절까지는 여수룬에게 축복하고 있고, 29절은 총 결론편으로 이스라엘을 축복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모세가 축복하고 있는 현실은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습니다. 광야 생활입니다. 이들 앞에 놓인 것은 요단강이며 가나안 땅입니다. 이들 앞에 놓인 것은 정복해야할 가나안의 원주민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모세의 축복의 결론은 29절 '이스라엘이여 너는 행복자로다'라는 것입니다. 여기 이스라엘은 예수를 믿는 모든 성도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성도들이여! 너는 행복자로다"
▶'크로스비' 여사의 이야기입니다. 그녀는 9000편의 찬송시를 쓴 평신도로서, 생후 6주만에 소경이 되어 할머니께 성경을 배웠으며, 15세에 맹인학교에 입학하였고, 94세를 일기로 생을 마쳤습니다. 그런 그녀가 세상에 마지막 남긴 한 마디 말이 있는데 '나는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입니다' 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그녀의 고백 속에 흐르는 한 줄기 빛을 보아야 합니다. 그녀가 그렇게 고백할 수 있는 근간이 무엇인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안에 살았기 때문입니다. /할/ ▶이 말에 은혜가 되는 사람은 진정한 행복자입니다.
구약에 하박국 선지자도 행복한 사람이라고 고백했습니다. 합3:17-19절에 보면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치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식물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리로다" 한 마디로 요약하면 '나는 하나님으로 인하여 행복합니다'라는 고백입니다. ▶이 고백이 오늘 우리의 고백이 되기를 바랍니다.
●미국 샌프란시스코에 가면 금문교라는 다리가 있답니다. 샌프란시스코 해엽에서 태평양을 가로지르는 다리인데 이 다리를 건설할 때 여러 사람이 밑으로 떨어져 죽기도 하고 다치기도 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 문제를 위해 다리 밑에 그물을 쳤다고 합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을 그물을 치고 난 후에는 그 밑으로 떨어지는 사고가 한 건도 없었다고 합니다.
여러분! 우리가 기억할 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실 뿐 아니라 우리를 언제든지 뒤에서 구원의 손길로, 구원의 그물로 우리를 지키시고 보호하고 계십니다. /믿/

1. 아셀 지파가 받은 축복은 무엇인가?(24-25)

 

①아셀은 다자한 복을 받았습니다.
한마디로 아들, 딸을 많이 낳았다는 것입니다. 생산의 복이요, 번성의 복입니다. 지금은 무자식 상팔자니, 혹 하나만 낳아서 잘 기르자는 등 적게 낳기 운동을 벌이고 있지만, 우리 때만해도 자식 많은 것은 큰복이고 능력이었습니다. 시127:3절 "자식은 여호와의 주신 기업이요 태의 열매는 그의 상급이로다"
▶자식들의 번성의 복이 행복입니다. 이 복이 우리 성도들의 가정에 임하게 되시기를 소원합니다.
②형제간에 우애가 깊었습니다.
"그 형제에게 기쁨이 되며" 서로 서로 아끼고, 돌보고, 사랑하며 형제들이 화목을 이루고 산다는 것이 행복이고, 기쁨이고, 축복입니다.
성경에 보면 형제간에 우애가 없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가인이 아벨을 돌로 쳐죽인 일이 있었고, 에서와 야곱은 서로 의가 좋지 못했습니다.
요일4:20절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치 아니하는 자가 보지 못하는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느니라"
롬12:10절 "형제를 사랑하여 서로 우애하고 존경하기를 서로 먼저 하며"
시133:1절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
▶자식들이 우애하고 사는 것이 행복입니다.
③지상의 풍요의 복입니다.
"그 발이 기름에 잠길지로다" 창49:20절에서 야곱도 아셀 지파를 축복하기를 "아셀에게서 나는 식물은 기름진 것이라 그가 왕의 진수를 공궤하리로다" 아셀 지파의 땅이 비옥한 옥토임을 의미합니다.
당시 부의 상징인 감람유를 생산하는 감람나무가 울창할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기름은 그 생활의 윤택함을 의미합니다. 옛날의 기름은 화폐 대용으로 사용되었습니다. 화폐가 통용되지 않을 때 기름은 가장 귀한 화폐가치를 대신했습니다.
왕하4:1-7절에 보면 엘리사의 제자인 선지생이 죽자 그 아내가 과부가 되었는데 빚쟁이들이 두 아들을 빚 값으로 빼앗아 가려고 합니다. 그때 엘리사가 빈 병에 기름이 차고 넘치는 기적을 행하여서 이것을 팔아 빚을 갚고 나머지는 생활하라고 했습니다.
또 다른 영적 의미는, 구약 이스라엘의 왕이나 제사장, 선지자들은 기름을 머리에 부어 세우게 됩니다. 이 기름이 조금 많으면 발까지 흘려 내려온다는 것입니다. 일군 되는 의식입니다. 아셀지파에서 하나님의 일꾼들이 많이 나올 것을 예언하고 있습니다.
진정한 행복은 '하나님의 사명 따라 헌신하며 충성하며 사는 것'입니다.
④삶의 터전인 성읍을 견고하게 지켜줄 것을 약속하고 있습니다.
"네 문빗장은 철과 옷이 될 것이라" 여기 문빗장이란 말은 '단단히 잠그다, 꼭 닫다, 안전하게 닫다 혹은 요새, 성체를 의미하는 것'으로서 견고한 성 즉 난공불락의 요새가 될 것을 의미합니다.
또 다른 의미는 '신발'이란 뜻으로, 순례자의 신발이요, 전투하는 신발이요, 승리하는 신발을 의미합니다.
진정한 행복은 '하나님이 지켜주시는 축복'입니다. 시121:8절 "여호와께서 너의 출입을 지금부터 영원까지 지키시리로다"
⑤네 사는 날을 따라 능력이 있으리로다!
신앙의 힘을 능력입니다. 사40:28절 이하에서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의 날개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우리의 약함을 능력으로 보충해야 합니다. 빌4:13절 "내게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그런데 본문이 주는 영적 의미는 여기 '능력'은 '평온'이란 뜻으로 '길이 길이 태평성대를 누리어라'는 뜻입니다. ▶태평 성대의 복, 얼마나 행복한 복입니까? 이 복이 사랑하는 성림의 모든 성도들의 삶의 터전 위에 임하게 되시기를 예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 '여수룬'의 받은 복은 무엇인가?(26-28)

 

29절 '이스라엘이여 너는 행복자로다' 그리고 이스라엘이 행복자인 이유를 26절에서부터 설명하고 있습니다. 일명 '여수룬의 행복'이라고도 합니다.
사44:2절 "나의 택한 여수룬아 두려워 말라" 여수룬이라는 말속에 하나님의 선택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여수룬은 이스라엘의 별명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이 잘나서 택한 것이 아니라 숫자가 많고 강해서 택한 것이 아니라 가장 연약하지만 하나님께서 그들을 택하신 것은 그들을 사랑하시고 기뻐하셨기 때문입니다.
'여수룬'이란 말은 원문이 '예수룬'을 음역한 말인데, 70인 역에서는 이 말을 '사랑 받는 자'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델리취'라는 신학자는 이 말의 어원을 '야솨르'(옳음, 곧음)로 보고 '옳은 자, 의로운 자'로 번역을 했습니다.
그래서 여수룬을 보편적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 의로운 자가 된 이스라엘'을 의미하며, 오늘에 있어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성도들, 즉 저와 여러분들을 의미합니다.
여수룬, 곧 이스라엘, 다시 말하면 오늘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하나님의 자녀가 된 성도의 행복이 무엇인가?
여기에 사용된 행복의 단어는 '아쉬레'로 '충만한 행복, 완전한 행복'을 의미합니다. 그 내용을 한 마디로 설명하면 성도의 행복은 하나님 자신입니다.
앞서 1-2절 내용을 보면, 하나님이 여수룬을 위하여 시내산에서 찾아오시고, 세일산에서 일어나시고, 바란 광야에서 비취시고, 일만 성도 가운데 강림하시는 자체가 여수룬에게 행복이라고 했습니다.
다시 말하면 성도는 하나님의 사랑의 대상입니다. 하나님의 손길 안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자입니다. 그래서 행복자입니다.

▶'이스라엘이여 너는 행복자로다' 왜 그들이 행복자입니까?

①하나님이 도와주시기 때문입니다(26).
"여수룬이여 하나님 같은 자 없도다 그가 너를 도우시려고 하늘을 타시고 궁창에서 위엄을 나타내시는도다"
'여수룬'은 계약이란 말과 의란 말의 합성어로서 '의로운 계약의 백성'이란 뜻입니다. 우리 기독교는 계약의 종교입니다. 하나님은 기록된 계약의 말씀대로 세상을 창조하셨고, 기록된 계약의 말씀대로 인간을 구원하셨고, 기록된 말씀대로 세상을 심판하실 것입니다. 성민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계약으로 선택된 백성입니다. 저와 여러분은 하나님의 계약대로 부름 받은 구원의 백성입니다.
엡2:8-9절 "너희가 그 은혜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요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도와주셔야 행복하게 살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신실하신 분입니다. 히13:8절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느니라" 롬8:28절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하나님은 궁창에서 위엄을 나타내십니다. 왜냐하면 사단권세를 짓밟기 위해서입니다.
②하나님이 나의 처소가 되어 주시기 때문입니다(28).
"영원하신 하나님이 너의 처소가 되시니" 그렇습니다. 태초로부터 지금까지 영원하신 하나님을 처소로 삼는 성도들은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들입니다.
시16:1절 "하나님이여 나를 보호하소서 내가 주께 피하나이다"
시91:9-10절 "네가 말하기를 여호와는 나의 피난처시라 하고 지존자로 거처를 삼았으므로 화가 네게 미치지 못하며 재앙이 네 장막에 가까이 오지 못하리라" 그렇습니다. 하나님만이 우리들의 안전한 처소이며 행복한 삶이 보장되는 피난처입니다.
③하나님의 능력의 팔이 대적을 멸해 주시기 때문에 행복자입니다(27).
"그 영원하신 팔이 네 아래 있도다 그가 네 앞에서 대적을 쫓으시며 멸하라 하시도다" 팔은 '힘과 능력과 보호'를 나타냅니다. 팔은 안전한 피난처를 의미합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팔과 우리의 팔에는 무한한 차이가 있습니다.
인간의 팔이 가정을 지키고, 자녀들을 지킬 수 있는 힘의 한계가 있습니다. 내 팔은 일터와 사업을 지킬 수 있는 능력의 한계가 있습니다. 어떤 상황이 오면 그 팔은 힘이 되어주지 못합니다. 능력과 힘의 한계를 드러내는 자신을 믿지 말고 영원하신 하나님의 팔 아래에 잡히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팔은 쇠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팔은 그 힘과 능력이 다하는 법이 없습니다.
시91:5-7절 "저가 너를 그 깃으로 덮으시리니 네가 그 날개 아래 피하리로다 그의 진실함은 방패와 손 방패가 되나니 너는 밤의 놀램과 낮에 흐르는 살과 흑암 중에 운행하는 염병과 백주에 황폐케 하는 파멸을 두려워 아니하리로다 천인이 네 곁에서, 만인이 네 우편에서 엎드러지나 이 재앙이 네게 가까이 못하리로다" /할/
④하나님은 우리의 안전한 피난처가 되시기 때문에 행복합니다(28).
"이스라엘이 안전히 거하며" 다윗은 시18:2절 "여호와는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요새시요 나를 건지시는 자시요 나의 하나님이시요 나의 피할 바위시요 나의 방패시요 나의 구원의 뿔이시요 나의 산성이시로다"
⑤이슬같은 은혜를 주시니 행복잡니다.
28절 "야곱의 샘은 곡식과 새포도주의 땅에 홀로 있나니 곧 그의 하늘이 이슬을 내리는 곳에로다"
근동지방의 이슬은 모든 농작물을 잘 자라게 하고 열매를 맺게하는 동력이 됩니다. 성경에서 이슬은 하나님의 은혜로 비유되기도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의 이슬을 머금고 사는 성도는 복받음 사람이요, 행복한 사람입니다.
다윗은 시1"3절에서 고백합니다. "복 있는 사람은...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시절을 좇아 과실을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이 그 행사가 다 형통하리로다" /할/
이슬은 하나님의 은혜를 말합니다. 이슬을 가리켜 하늘의 보물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의 이슬이 매일매일 내리는 성도는 불황에서도 호황을 누릴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 사는 성도는 어떠한 구조조정이 있다고 할지라도 두렵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의 이슬로 적시는 성도는 그 인생이 도산을 당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는 가정은 언제나 행복합니다.

 

3. 왜 이스라엘이 행복자입니까?(29)

 

"이스라엘이여 너는 행복자로다 여호와의 구원을 너같이 얻은 백성이 누구뇨 그는 너를 돕는 방패시요 너의 영광의 칼이시로다 네 대적이 네게 복종하리니 네가 그들의 높은 곳을 밟으리로다"

①성도의 진정한 행복은 구원받은 것에 있습니다.
"여호와의 구원을 너같이 얻은 백성이 누구뇨?"
여기 '행복'이라고 하는 말 '아쉬레'는 '복 그 자체'를 의미하고 있습니다. 즉 복의 본질, 복의 실존 그 자체를 말하고 있습니다. 복 그 자체가 무엇입니까? 바로 구원이라고 했습니다. 영원히 죽을 수밖에 없는 우리들이 구원을 받아 영원한 생명으로 산다는 말입니다. 산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생명이 있다는 말입니다. 생명 그 자체보다 더 큰 복음은 없습니다. 그렇다고 그것이 영적인 것에 국한되는 것은 아닙니다. 구원이란 죽어서 천당 가는 그런 영적인 구원도 되지만, 이생에서도 통용되는 단어입니다.
▶질병으로부터의 구원받은 결과가 건강입니다. ▶가난으로부터의 구원받은 결과가 부요와 재물입니다. ▶위험으로부터의 구원받은 결과가 평안입니다. ▶저주로부터의 구원받은 결과가 축복입니다. ▶그 절정이 죽음으로부터의 구원인데 그것이 생명입니다.
●중요한 것은 구원의 확신을 갖는 것입니다.
사43:2절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구원은 하나님 편에서는 완성된 일입니다. "내가 너를 구속하였다"고 할 때 하나님 편에서는 구속된 것입니다.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다"고 할 때 지명된 것이고 부른 것입니다. "너는 내 것이라"고 할 때 이미 우리는 하나님의 것이 되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 편에서는 구원이 완성된 것이고 또 확실한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가 구원을 받아들이는 확신이 없다는데 문제입니다. "내가 너를 지명했다"는 것을 어떻게 믿는가? "나를 불렀다"는 것을 어떻게 믿는가? "너는 내 것이라"는 것도 어떻게 보장하는가? 구원받는 우리편에서는 모든 것이 다 불확실합니다.
오늘 우리는 구원의 확신을 가지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
롬5:1-2절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하심을 얻었은즉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자"
"믿음으로 의롭다하심을 얻었은즉" 완료입니다. 믿음으로 구원받았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자" 구원받았는가 안 받았는가에 머물지 말고 구원받았기 때문에 화평을 누리라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화평을 누리는 일만 남았습니다. 구원에 대해서는 확신을 하십시오. 하나님이 우리를 지명하여 불렀다고 한 이상, 너는 내 것이라고 한 이상, 그 말씀을 받아들이는 이상 우리는 이미 구원의 확신에 이른 것입니다. 조금도 의심하지 말고 방황하지 마십시오. 우리는 하나님과 더불어 화평을 누리는 일만 남았습니다.
2절 "또한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 여기에도 '얻었으며' 완료입니다. 구원의 확신을 가진 우리는 이제는 화평을 누리고 바라고 즐거워하는 일만 남아있습니다. 바라고 즐거워하는 것은 구원의 기쁨, 확신만이 필요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어떤 때에 구원하셨는가?
롬5:8절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10절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 그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목되었은즉 화목된 자로서는 그의 살으심을 인하여 구원을 얻을 것이니라"
왜 구원의 확신이 그렇게 중요합니까? 신앙생활의 본질은 구원의 확신에서 이루어집니다. 내가 구원받은 이것이 기쁘고 즐겁고 의미가 있고 흔들 수 없는 확고한 기반이 되어야만 그 다음에 영적인 문제가 성화의 자리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크리소스톰' 이라는 유명한 믿음의 사람을 로마 황제가 감옥에 가두었습니다. 감옥에 가두었는데도 불구하고 그 안에서 기도하고 찬송하고 감사를 하는 것입니다. 그러자 황제가 불러다 묻습니다.
"너는 어떻게 된 놈이기에 감옥 안에서도 기도하고 찬송하고 감사를 하고 있느냐?" 그러자 크리소스톰이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내가 예수 믿다가 감옥에 갇힌 것이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하나님의 일을 하다가 감옥에 갇혔으니 얼마나 기쁜 일입니까?" 황제가 다시 "그럼 저 놈에게 아무 것도 주지말고 굶겨라" 그래서 굶기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며칠동안을 아무 것도 주지 않고 굶겼는데도 여전히 기도하고 찬송하며 감사하고 있습니다. 황제가 다시 묻기를 "도대체 굶어가면서도 무엇이 그리 감사하다는 말이냐?" 그때 크리소스톰은 "주님을 위해서 금식하니 얼마나 감사합니까?" 황제가 화가 나서 끌어내어 매를 치라고 명령합니다. 그러나 매를 맞으면서도 감사를 합니다. "매를 맞으면서 무엇이 감사하다는 말이냐?"
"주님을 위해서 맞으니 얼마나 감사합니까? 주님은 나를 위해서 채찍에 맞으셨고 십자가에서 찢겨 죽으셨는데 내가 그 분의 고난에 동참할 수 있게 되었는데 얼마나 감사합니까?"
여러분! 이것이 진짜 신앙입니다. 구원받은 자의 모습입니다. 드디어 황제가 명령합니다. "끌어내어 죽이라" 그러자 크리소스톰은 기다렸다는 듯이 소리치며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를 연팔합니다. 황제는 "이제 죽을텐데 죽으면서도 감사하다는 말이냐?" 그는 "믿는 사람에게는 최고의 영광과 최고의 축복이 순교입니다. 요한계시록에 최고의 축복이 순교라고 합니다. 이 순교는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순교의 반열에 참여 할 수 있는 사람은 따로 있습니다. 그런데 이 자리에 나를 참여시켜 주시니 얼마나 감사합니까?" 황제가 기가 막혀 명령하기를 "내 보내라 이런 놈은 죽여도 아무 소용이 없다"

②성도의 행복은 하나님이 방패가 되어 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는 너를 돕는 방패시오" 이 말은 하나님이 여수룬, 곧 이스라엘, 오늘의 성도들의 모든 삶의 방패가 되어주신다는 약속입니다. 권력의 보호보다 하나님의 보호가 더 안전합니다. ▶누가 우는 사자 같은 마귀의 공격에서 우리를 막아 주셨습니까? 오늘 말씀은 분명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방패가 되신다고 하셨습니다. 세상에 이보다 더 분명하고 강한 보호자가 어디 있겠습니까? 그래서 성도는 행복자입니다.
●다시 29절의 이어지는 말씀을 보세요! "너의 영광의 칼이시로다" 여기서 칼은 하나님의 말씀의 검입니다. 또 능력을 상징합니다. 성도의 행복은 하나님이 우리의 방패가 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가정도 하나님이 지켜주셔야 합니다. ▶우리의 사업장도, 직장도, 우리의 국가도 사회도 하나님이 지켜주셔야 합니다. ▶우리 교회도 하나님이 지켜 주셔야 안전합니다.

③성도의 행복은 하나님이 승리하게 하시기 때문입니다.
"네가 그들의 높은 곳을 밟으리로다" 이 말은 싸움에서 승리하고 승자의 편에 세워주시겠다는 약속입니다. 전쟁은 냉정합니다. 패자는 승자의 노예가 됩니다. 패자는 말이 없습니다. 그러나 승자는 개선가가 있고 면류관이 있습니다.
하박국의 고백이 무엇입니까? 합3:19절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라. 나의 발을 사슴과 같게 하사 나로 나의 높은 곳에 다니게 하시리로다"
우리가 왜 행복자입니까? 하나님이 우리를 승리자로 세워주시기 때문입니다. 다윗을 승리자로 세우셨고, 다니엘도 승리지로 세우셨습니다. /할/

 

4, 행복한 가정을 이루는 4가지 원동력은?

 

①행복한 가정의 원동력은 사랑입니다. 사랑은 모든 인간관계의 시작이요. 중심입니다.
미국의 역사상 존경받는 대통령을 꼽으라면 링컨과 루즈벨트입니다. 루즈벨트는 경제적 대공황을 극복한 대통령입니다. 그런데 그가 사랑 받는 대통령이 되기까지 훌륭한 부인의 내조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는 엘레나 라는 부인과 결혼을 했습니다. 자녀를 여섯명을 낳았습니다. 너무 가난하고 힘든 환경 속에서 아이들을 키웠습니다. 그 과정에서 한 아이를 잃어버리기도 했습니다. 설상가상으로 어느날 남편이 아프기 시작했습니다. 다리가 점점 마르기 시작합니다. 치료가 되지 않아서 다리를 절게 되었고, 마침내 남편은 휠체어를 타야만 했습니다.
이것을 안타깝게 지켜본 친척 중에 한 사람이 엘레나에게 "이렇게 어렵고 힘든데 이혼을 생각해 보는 것이 어떠냐"고 물었습니다. 그때 엘레나는 유명한 대답을 했습니다. "제가 사랑한 것은 남편의 다리가 아닙니다. 저는 남편을 사랑했습니다. 저는 남편의 다리 때문에 결혼한 것이 아니라 남편을 사랑했습니다. 그 다리가 어떻게 되느냐는 것이 우리의 관계에 아무런 영향을 미칠 수가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엘레나의 조건을 뛰어 넘은 사랑의 힘이 가정을 지킬 수 있었고, 장애인 루즈벨트를 미국 최고의 대통령으로 만들게 된 것입니다.
②행복한 가정의 원동력은 대화입니다.
가정에서의 대화는 혈액순환과 같습니다. 피가 온 몸에 산소와 영양분을 공급하듯 대화는 가족 간의 사랑을 전달하는 통로입니다. 피가 막히면 동맥경화가 오거나 신체에 심각한 이상이 생깁니다. 마찬가지로 가정에 대화가 부족하거나 단절되면 심각한 가정 문제가 발생합니다.
③행복한 가정의 원동력은 질서입니다.
가족의 행복과 안전은 질서에 달려 있습니다. 골3:18절 "아내들아 남편에게 복종하라 이는 주안에서 마땅하니라" 골3:20절 "자녀들아 모든 일에 부모에게 순종하라 이는 주안에서 기쁘게 하는 것이니라"
행복한 가정에는 영적인 권위의 질서가 세워져야 합니다. 부모의 권위, 형제간의 권위가 세워져야 합니다 이 권위는 하나님이 정하시고 인정하신 것입니다.
④행복한 가정의 최고의 원동력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믿음입니다.
가정을 디자인하신 분은 창조주 하나님이십니다. 가정의 기초는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고, 하나님을 가정 중심에 모신 가정은 복이 있습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 도에 행하는 자마다 복이 있도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을 높이고, 하나님을 섬기고, 하나님을 믿는 가정은 자손 천대까지 복을 받습니다. 이것이 성경의 약속입니다.
성도가 예배의 감격을 잃어버리면 가장 불행한 삶을 살게 됩니다. 찬송을 해도 기쁨이 없고, 기도를 해도 응답이 없고, 말씀을 들어도 아무런 감동이 없고, 봉사를 해도 기쁨이 없으면 다시 성령으로 충만해야 합니다.
스펄존 목사가 하루는 '십자가를 생각해도 아무런 감동이 없어서 통곡하고 울었다'고 합니다. 신앙생활의 가장 큰 위기는 구원의 감격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여러분은 감격적인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까? 여러분은 행복자입니다. 하나님의 반드시 여러분을 도울 것이며, 여러분의 대적을 물리칠 것이며, 여러분의 산업을 지켜 주실 것이며, 승리자의 삶을 살게 할 것입니다. (2004년 6월 27일 대예배 설교)

출처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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