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그들에게 복을 주리라! (민 6:22-27)
우리가 예배를 마치고 축도를 받습니다. 그 내용은 고후13:13절의 내용입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너희 무리와 함께 있을지어다" 이 말씀을 신약의 축도라고 합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으로 읽은 말씀을 일반적으로 "구약의 축도"라고 합니다.
예배순서의 마지막에 나오는 "축도"라는 순서는 한문으로 빌축자인 祝(축)과 기도라는 禱(도)가 합쳐진 것으로 복을 비는 기도입니다.
예배학에서 축도라는 것은 강복선언으로 구약에서부터 시작된 오랜 역사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민족의 시조로 아브라함을 선택한 순간부터 자신이 사랑하고 선택하신 사람들에게 복을 내려주셨습니다.
창12:3절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 하신지라"
하나님은 축복에 대한 기사로는 처음으로 언급하신 말씀입니다.
구약에서 하나님의 종들이 복을 빌어주는 시간은 제사장들의 고유하신 권한 중의 하나였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을 찾아와 예배하고 돌아가는 사랑하는 성도들에게 복을 내려주라고 제사장(목사)들에게 위임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이 축도는 예배드리는 시간 중에 지금 하나님이 복을 내려주시고 있다고 선언하는 예배의 절정을 이루는 것입니다.
요한 칼빈이 시작한 개혁교회에서는 사도의 축도보다 구약의 제사장의 축도를 사용하였고, 스위스에서는 지금도 이 축도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여호와는 네게 복을 주시고 너를 지키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로 네게 비취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주시기를 원하노라"고 선언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미국의 침례교회와 장로교회의 일부에서는 고후13:13절의 바울의 축도를 즐겨 사용하고 있습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너희 무리와 함께 있을지어다!"
우리 한국 교회에서도 대부분이 신약의 축도를 합니다.
'축복권'은 축복을 해 주는 특권, 남에게 복을 빌어주는 권리를 말합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다른 민족들과 달리, 축복의 말을 사모하고 복 받기를 사모하는 특징이 있습니다. 그들은 부모로서 자녀에게 축복을 선언하기도 하고, 랍비나 제사장에게 축복의 말씀을 듣기도 하는데, 성경에는 축복권에 대한 말씀이 여러 곳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창32:26절에 보면 야곱이 하나님께 축복 받기 원하여, 밤새 씨름했던 천사가 떠나려고 하자 그 천사를 붙들고 "당신이 내게 축복하지 아니하면 가게 하지 아니하겠나이다"라고 말하며 끈질기게 간구했습니다. 결국 천사가 축복의 말을 하자, 야곱은 그 축복의 말을 듣고 천사를 가게 했습니다. 야곱은 하늘의 복을 그렇게 탐냈습니다. 천국은 침노하는 자의 것입니다. 여러분들도 축복을 받기 위해 끈질기게 기도하는 성도들이 되시길 바랍니다.
그러나 우리가 한 가지 알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습니다. 왜 하나님이 이렇게 본문 전체에서 택한 백성들에게 복을 주겠다고 했는지 알아야만 합니다.
▶7:1절을 다같이 보자! "모세가 장막 세우기를 필하고"
다시 말해서 성막 봉헌식을 앞두고 하나님은 택한 백성들에게 축복을 약속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성막을 세우신 것에 너무 기뻐하신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복 받기를 싫어하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여러분들이 정말 복 받기를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하나님의 성막을 바로 세우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성막인 여러분들의 교회를 온전히 바로 세울 때 하나님은 기필코 여러분들에게 복을 주실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본문의 말씀은 하나님께서 아론과 그의 아들들에게 축복권을 주시는 부분입니다. 이것을 아론의 축복권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최고 지도자인 모세에게 제사장들이 복을 베풀 수 있는 권한을 주셨습니다. 제사장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내리는 축도는 당시 이스라엘의 최고 지도자이며 선지자인 모세를 통해 제사장들에게 전달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축도는 오직 이스라엘의 제사장인 아론과 그 아들들만이 할 수 있었습니다. 한 나라의 최고 지도자인 모세도 할 수 없는 가장 소중한 권한을 제사장들에게 허락하여 주셨습니다. 이 나라 최고 지도자에게 가서 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거룩한 종들에게 받을 수 있는 축복이 있습니다.
구약의 제사장은 막강한 권한을 가지고 있었던 당시 종교의 전권을 가지고 있었던 사람들입니다.
제사장은, 백성들에게는 하나님의 대변자였고 하나님께는 백성들의 대표자였습니다. 성전에서는 제사를 담당하여 언약궤와 회막을 관리하였고, 율법에 따라서 선과 악을 구별하고, 소송과 분쟁이 있을 때 재판관이었고,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율법과 규례를 가르치는 스승이었습니다.
그리고 아무도 행사할 수 없는 제사권과 축복권을 하나님께로부터 위임받았습니다. 그래서 제사장이 축복을 선포하면 하나님께서 복을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오늘날 당신의 종들을 통하여 제사장에게 주신 축복권을 주셨습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하나님이 제사장들에게 축복을 선언하라, 당신의 이름으로 축복을 선언할 때 복을 주시겠다고 약속하고 계십니다. 축복을 선언하는 것은 하나님의 약속과 동일합니다.
제사장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불변의 확신과 함께 자신은 지금 하나님의 통로요,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고 있다는 확신으로 선포해야 합니다. 제사장들이 여호와의 이름으로 이스라엘 자손에게 축복하면 하나님은 친히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복을 주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의 불변하시는 약속이었고, 천지는 없어질 수 있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없어지지 아니하고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신 말씀입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축복 형식의 특징이 나옵니다.
①'여호와'라는 명칭이 세 번 나타나고 있습니다.
"여호와"라는 명칭이 한번만 사용되어도 좋은 문장이 될 수 있는데, 세 번씩이나 사용한 것은 축복하시는 분이 우리의 여호와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확증하기 위한 강조입니다. 하나님의 존재 안에 성 삼위 하나님이 계심을 간접적으로 암시하고 있다고 해석하기도 합니다. 성부 하나님은 축복과 보존의 하나님으로, 성자 그리스도는 은혜로, 성령은 평안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②축복의 대상은 2인칭 "너"입니다.
이 짧은 본문에 "너"라는 2이칭 대명사가 5회나 나오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이라는 민족을 한 사람같이 대하시고 있다는 뜻도 되지만, 하나님은 제사를 드리러 나오는 한 사람 그 한 사람에게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계시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전체적으로 일반적인 말씀을 주시고 있기에 "너"라고 하셨지, 사실은 우리 각 사람의 이름을 부르고 계시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읽으면서 자신의 이름을 그 안에 넣어 읽으면 더 큰 은혜가 됩니다.
③복의 의지가 강하십니다.
"원하고, 원하고, 원하신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그의 자녀들에게 잘하여 주려는 소원을 가지고 있습니다.
시107:9절 "저가 사모하는 영혼을 만족케 하시며 주린 영혼에게 좋은 것으로 채워주심이로다"
시115:11-13절 "여호와를 경외하는 너희는 여호와를 의지하라! 그는 너희 도움이시요 너희 방패시로다. 여호와께서 우리를 생각하사 복을 주시되 이스라엘 집에도 복을 주시고 아론의 집에도 복을 주시며 대소 무론하고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에게 복을 주시리로다"라고 약속하셨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사랑하시는 성도들에게 좋은 것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부어주시려고 준비하고 있습니다.
이제 본문에서 축복의 내용을 알아봅시다. 오늘 제목이 ◀내가 그들에게 복을 주리라!▶입니다.
1. 복의 주체는 하나님이십니다(24).
"여호와는 네게 복을 주시고…"
우리 나라 사람들도 복 받기를 좋아합니다. 그래서 산이나 바다에 가서 나무 또는 돌로 어떤 형상을 만들어 놓고 '비나이다 비나이다' 하고 복을 빌기도 합니다. 그러나 복을 받기 원하는 마음은 있는데, 누가 복을 주는지 모르고 아무 데나 찾아가서 복을 빕니다.
복의 근원은 하나님,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분이 우리들에게 '복을 주시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믿는 사람들은 복을 받습니다.
실제로 세계 여러 민족이 있지만 그 중에는 복 받은 민족과 그렇지 못한 민족이 있습니다. 복을 받지 못한 민족이 있다면 복 받을 대상을 잘못 알고 빌었기 때문에 축복을 받지 못한 것입니다.
여기에서 '복'은 히브리어 '(바라크, barak)'로, 하나님의 축복에서 오는 행복한 인간의 상태를 말합니다. 이것은 영적인 축복뿐만 아니라 성공, 번영, 풍요, 건강, 장수, 자손, 그리고 힘과 지혜를 포함하여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이, 복의 가장 정식이고 기본이 됩니다. 세상적인 탐욕과 거짓과 죄악으로 인해 얻어진 복은 잠시 왔다가 사라지고 맙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복을 받아야 합니다.
창14:19절에 보면 살렘 왕 멜기세덱이 아브라함을 만났을 때 아브라함을 축복하는 말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천지의 주재시오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여 아브람에게 복을 주옵소서"
아브라함은 살렘 왕 멜기세덱의 축복을 받고, 전쟁에서 얻은 것 중에서 십분의 일을 멜기세덱에게 주었습니다.
이어서 멜기세댁은 "너의 대적을 네 손에 붙이신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을 찬송할지로다" 하고 하나님을 찬송하라고 하였습니다. 전쟁에서 이기게 하신 하나님, 그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라는 말씀입니다.
삼상2:20절에 "엘리가 엘가나와 그 아내에게 축복하여 가로되 여호와께서 이 여인으로 말미암아 네게 후사를 주사 이가 여호와께 간구하여 얻어 드린 아들을 대신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한나가 서원대로 아들 사무엘을 하나님께 바치고 하나님을 찬양하자, 엘리 제사장이 한나와 그 남편 엘가나를 축복한 내용입니다. 하나님은 엘리 제사장의 축복기도에 응답하셔서 한나에게 세 아들과 두 딸을 허락하셨습니다. 그 이상의 축복을 주셨습니다.
롬15:29절에도 보면 사도 바울이 "내가 너희에게 나갈 때에 그리스도의 충만한 축복을 가지고 갈 줄을 아노라"고 하였습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교회를 방문하기에 앞서 축복권을 가지고 그의 성도들에게 갈 것이라고 편지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한 것이 우리에게 큰 축복입니다. 빛을 만드시고 하늘과 땅과 많은 짐승과 대자연을 만드신 것이 우리에게 축복이고, 그 다음에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신 것이 축복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우리의 죄악과 가난과 질병과 저주를 물리치고 믿음으로 구원받게 하신 것입니다. 이제 하나님을 믿는 우리의 삶은 믿지 않는 사람과 근본적으로 달라지게 되었습니다.
2. 하나님이 우리를 지켜 주셔야 합니다(24).
하나님께서 지켜 주시기를 위하여 기도하라는 말씀입니다. "여호와는 네게 복을 주시고 너를 지키시기를 원하며"라고 했습니다. 즉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위하여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시127:1절 "여호와께서 성을 지키지 아니하시면 파수꾼의 경성함이 허사로다" 즉 하나님의 보호하심이 절대적이라는 뜻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언제나 하나님께서 지켜주셔야 안전하다는 것을 경험하였습니다. 그래서 시편 기자도 다음과 같이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이스라엘을 지키시는 자는 졸지도 아니하시고 주무시지도 아니하시리로다"(시121:4)고 하는가 하면 하나님께서 보호하여 주시기만 하면 "천인이 네 곁에서 만인이 네 우편에서 엎드러지나 이 재앙이 네게 가까이 못하리로다"(시91:7) 간증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을 눈동자 같이 지켜 주셨다고(신32:10) 표현하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성전에 올라가면서 노래했다는 시121편을 보면 "여호와는 너를 지키시는 자라. 여호와께서 네 우편에서 네 그늘이 되시나니 낮의 해가 너를 상치 아니하며 밤의 달도 너를 해치 아니하리로다. 여호와께서 너를 지켜 모든 환난을 면케 하시며 또 네 영혼을 지키시리로다. 여호와께서 너의 출입을 지금부터 영원까지 지키시리로다."고 노래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모든 위험에서 지키시고 보호하여 주시기를 바랍니다.
본문에서 "지킨다"는 말은 "둘레에 가시로 울타리를 치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이것은 모든 악한 세력으로부터의 보호뿐 아니라 가난과 재앙과 각종 질병과 전쟁으로부터의 보호를 의미합니다. 가시로 담장을 친다는 말은 어떤 대적도 막아주신다는 철저한 표현입니다. 하나님의 화염검으로 지키십니다.
우리가 애국가를 늘 부름니다만 "하나님이 보우하사 우리 나라 만세"그대로입니다. 하나님의 보호하심이 아니면 안전할 수 없음을 실감합니다.
"지켜주신다"는 말씀 속에는 우리에게는 항상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연약하고 미숙하고, 죄를 짓기 쉬우며, 유혹에 노출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유일하며 완전하신 보호자이십니다.
하나님의 보호와 지키심을 받는 것도 큰복입니다. 재산이 줄어들지 않게 지켜주시고, 건강하게 지켜주시고, 가정과 직장과 나라를 지켜주시고, 전쟁과 위험에서 안전하게 해 주시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하나님께서 광야의 이스라엘 백성들을 뜨거운 태양 아래에서 지켜 구름기둥으로 보호하시고 밤에는 불기둥으로 보호하시고 사나운 짐승에게서 보호하시고 적군에게서 보호하신 것같이, '하나님이여 이 나라와 이 민족도 지키고 보호하여 주시옵소서' 하고 기도하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신32:10절에서 모세는 "여호와께서 그를 황무지에서, 짐승의 부르짖는 광야에서 만나시고 호위하시며 보호하시며 자기 눈동자같이 지키셨도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지키고 보호하시되 어느 정도로 보호하시느냐 하면, 눈동자처럼 보호하신다고 했습니다. 눈동자는 아주 예민하여서 조그마한 것이 들어오기만 해도 금새 깜박거리고 반응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우리를 보호하신다는 사실입니다.
시험 당하지 않도록, 병들지 않도록, 저주받지 않도록, 마귀의 포로가 되지 않도록, 하나님께서 늘 지키고 보호하시므로 우리는 결코 하나님의 품을 떠나서는 안됩니다.
위를 세 번이나 수술한 남자가 링거를 맞고 누워서 아픔을 고통스러워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의 아내가 그를 간호하다가 그만 졸고 말았습니다. 조금만 졸아도 링거가 잘못되어서 남편은 아픔을 호소했습니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여보, 제발 잠 좀 자지 말고, 날 좀 지켜 줘"라고 했습니다.
시121:4절 "이스라엘을 지키시는 자는 졸지도 아니하시고 주무시지도 아니하시리로다"
하나님은 졸지도 아니하시고 주무시지도 않으시고 우리를 지켜주십니다. 그 하나님의 보호를 받으시기 바랍니다.
3. 하나님이 우리들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셔야 합니다(25).
하나님께서 은혜 베푸시기를 위하여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여호와는 그 얼굴로 네게 비취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얼굴로 네게 비취사"라는 말은 "자비를 베푸사"라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있는 그대로 보게되면 어느 한 사람도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을 받을 자격이 없습니다.
오래 전에 경찰을 조롱하고 세상을 깜짝 놀라게 했던 살인범으로 탈옥한 신창원의 어린 시절에 대한 이야기를 어느 신문에서 읽어보았습니다.
어머니가 일찍 세상을 떠났고, 아버지는 신창원이를 키울 때 남의 밭에서 수박 하나 훔쳐 먹었다고 소년원에다 고발했다는 것입니다. 소년원에 가서 오히려 아이의 성격이 좋아지기는커녕 더 많은 범죄를 배워서 그렇게 됐다는 것입니다.
사람은 매로만 다스릴 수는 없습니다. 사랑과 용서가 아이들을 바르게 자라게 합니다.
우리 인간은 구원받을 만한 아무런 가치가 없는 자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은혜로 우리를 사랑하셔서 죄악 가운데서 건져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여 주셨습니다.
"아 하나님의 은혜로 이 쓸데없는 자 왜 구속하여 주는 지 난 알 수 없도다"고 찬송할 수밖에 없습니다.
"여호와는 그 얼굴로 네게 비취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하나님이 당신의 얼굴을 찡그리고 어두운 표정을 지으신다고 하면 불편한 심기를 가지고 계신다는 증거입니다. 하나님께서 밝은 표정을 지으신다고 하면 우리에게 생명과 기쁨을 주시는 것입니다.
여기서 여호와의 "얼굴"이란 표현은 그분의 성품과 전인격을 상징하는 표현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당신의 얼굴을 가리우거나 감춘다는 것은 인간 편에서는 절망과 죽음을 의미합니다. 반면에 하나님이 "얼굴"을 들어 우리에게 진리의 광채로 비추어주신다고 하는 것은 생명이요, 구원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은혜 베푸시기를 기뻐하고 있습니다. 엡2:4-5절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사랑을 인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살리셨고 (너희가 은혜로 구원을 얻은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은혜'는 히브리어로 '하난'인데, 이것은 '사랑과 호의, 불쌍히 여기고, 동정과 자비를 느끼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신다는 것은 죄악으로 죽을 수밖에 없고 저주 가운데 빠질 수밖에 없는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고, 용서하시고 구원해 주신다는 말입니다. 이것은 대가없이 거저 주시는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시103:8절에 "여호와는 자비로우시며 은혜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 하시며 인자하심이 풍부하시도다"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 베풀기를 원하시는 것은, 부모가 자식에게 무엇인가를 베풀기 원하는 것에 비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사고 당하고 위험 당하고 가난과 질병, 저주 가운데 사는 것을 원치 않습니다. 죄 값으로 고생하는 것을 원치 않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다 행복하게 잘살고, 풍족하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자비하시며, 은혜로우시며, 인자가 풍부하신 분이십니다.
이탈리아 르네상스 시대의 최고 미술가였던 '마켈란젤로'에게 한 제자가 찾아왔습니다.
"선생님, 예술은 영원하다고 했으니 최대의 예술가이신 선생님의 이름이야말로 영원히 역사에 남을 것입니다. 선생님은 영원한 존재입니다."
제자의 말에 미켈란젤로는 정색을 하며 "이 사람아, 이 세상에서 영원한 것은 하나님밖에 없다네"라고 말했습니다. 하나님만이 영원하지, 사람은 영원하지 않다는 말입니다.
세상의 재물, 영화와 권세는 잠시 우리 곁에 머물다가 사라질 수 있습니다. 없어졌다가 다시 생길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이라면 부하게도 하시고 가난하게도 하십니다. 우리는 다시 한 번 하나님의 존재를 깨닫고,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서 풍족한 삶을 사시기를 바랍니다.
4. 하나님이 우리들에게 평안도 주셔야 합니다(26).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주시기를 원하노라"
여기서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라는 말은 마치 어머니가 젖 먹는 아기를 품에 안고 젖을 빠는 아이를 사랑스러운 눈으로 계속하여 지켜보는 모습을 말합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평강 주시기를 위하여 기도해야 합니다. 본문에서 "평강"은 "솰롬"을 말합니다. 이 "솰롬"은 안전, 행복, 번창, 평안등 다양한 의미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단순히 "전쟁이 없는 상태"를 의미하지 않고 "기쁨과 생의 환희가 샘솟는 듯한 역동적인 평화"를 말합니다.
사55:12절의 말씀과 같이 "너희는 기쁨으로 나아가며 평안히 인도함을 받을 것이요, 산들과 작은 산들이 너희 앞에서 노래를 발하고 들의 모든 나무가 손바닥을 칠 것이며"라고 노래하는 것과 같은 상태입니다.
평강의 복은 인간이 가장 원하는 복일 것입니다. 아무리 많은 재산과 높은 지위가 있어도 평강이 없으면 그 모든 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평강'은 하나님이 임재하셔서 모든 것이 조화를 이룬 완전한 상태를 말합니다. 그래서 평강의 축복이란 전쟁이 없는 평화, 죄악이 없는 마음의 평안, 분쟁과 갈등과 다툼이 없는 화목한 관계를 가리킵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주시는 최고의 축복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평강의 축복을 모르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우리 마음속에는 하나님의 평강이 있어야 합니다. 아무리 재산이 많아도 마음에 평강이 없으면, 아무리 높은 권력을 가졌어도 평화가 없으면, 최고의 인기를 누려도 평화가 없으면 그런 것들은 아무 소용이 없게 됩니다. 술·담배를 떠나지 못하고, 마약을 떠나지 못하고, 도박을 떠나지 못하고 불안과 두려움, 공포 속에 사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하나님께서 주시는 평강의 축복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시29:11절에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에게 힘을 주심이여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에게 평강의 복을 주시리로다"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요14:27절에서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평강은 죽음 앞에서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자기 영혼을 하나님께 맡깁니다. 하나님께서는 승리를 허락하여 주십니다.
선한 사람에게는 평강이 있지만 악한 사람에게는 평강이 없습니다. 그는 늘 불안하고 두려워하고 공포 속에 떱니다.
우리는 늘 평화로운 가운데서 안정된 삶을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평강의 축복을 받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의지하는 사람은 마음속에 평안이 있습니다. 만일 불안과 두려움, 공포가 있다면 믿음이 없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아무리 태산같이 많은 문제가 쌓였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을 의지하면 하나님께서는 마음에 평강을 허락하여 주시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을 주십니다.
▶카놀 산도스씨는 나이 60세 파산을 했숩니다. 그는 수백만 달러의 빚을 지고 병원에 입원을 했습니다. 나이도 먹고, 파산해서 빚도 졌으니 이제 갈 곳은 딱 하나밖에 없다고 생각한 그는 자살을 결심했습니다.
그때 어디에선가 찬송가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너 걱정 근심 말아라 주 너를 지키리/주 날개 밑에 거하라 주 너를 지키리/주 너를 지키리 아무 때나 어디서나/주 너를 지키리 늘 지켜주시리'
그는 찬송소리를 따라가 보았습니다.
병원의 뒷문을 열고 가보니 조그마한 교회가 있었습니다. 그곳에서는 몇 사람이 모여 찬송을 부르고 있었는데, 산도스씨는 조용히 뒷자리에 앉아서 그 노래를 들으며 눈물을 흘렸습니다.
교만하여 세상의 돈 명예 권세만 생각하고 살아왔던 것을 회개하며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눈물 흘리며 기도하자 마음이 편안해졌습니다. 여태까지 체험하지 못했던 평안함을 못보았습니다. 평안만 온 것이 아니라 기쁨도 왔습니다.
'지금까지 인생을 혼자 살려고 노력했는데, 이제는 하나님께서 함께하여 주시옵소서 이제는 하나님을 위해서 살겠습니다'
그는 다시 시작하기로 했습니다. 쓰레기를 수거하는 일부터 시작하여, 돈이 좀 모아지자 통닭 집을 운영하였는데, 그것이 맛도 있고 정성을 들이니까 잘 팔려서 전국에 체인점까지 낼 정도로 선풍적인 인기를 얻었습니다. 이것이 '산도스 치킨'입니다.
나이 60세가 넘어서 파산하고 빚 가운떼서 자살을 결심한 그에게 하나님은 기회를 주셨습니다. 그리고 믿음으로 기도하고 다시 시작했을 때 그는 백만장자가 될 수 있었습니다.
여러분, 아직 기회는 있습니다. 포기하지 마십시오. 과거에는 자기 노력으로, 자기 경험으로 살았다고 할지라도, 이제는 하나님과 더불어서 하나님이 주시는 지혜로, 하나님의 능력으로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을 누리는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과 동업할 때 생각하지도 못했던 기적과 축복이 나타날 것입니다.
5. 제사장의 축복권을 통하여 주시는 하나님의 복을 받는 성도가 되자!(27)
"그들은 이같이 내 이름으로 이스라엘 자손에게 축복할지니 내가 그들에게 복을 주리라"
제사장이 하나님의 이름으로 백성을 축복할 때, 그것은 제사장의 권위가 아니라 하나님께로 부여받은 하나님의 권위로 축복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반드시 복을 주신다고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론의 축복권을 통하여 주시는 복은, 첫째 여호와가 복을 주시고, 둘째 지켜주시고, 셋째 은혜를 베푸시고, 넷째 평강을 주십니다.
25년 동안 출판계에서 일을 하던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쉬는 날도 없이 일을 하다보니 심한 허리디스크로 3년 동안 자리에 눕게 되었습니다.
그때 열심히 교회에 나가던 그의 아내가 "누워서 심심하니 책이나 읽으세요" 하고 성경책을 주었습니다. 특히 잠언을 읽으라고 펼쳐 주었습니다.
그렇게 하여 그는 생전 처음 성경을 읽게 되었습니다. 출판사에서 일을 하며 이 책 저 책, 책도 많이 읽고 교정도 많이 보았지만, 별로 감동이 없었는데 잠언서를 읽는 순간 그의 마음은 녹아지기 시작했습니다.
특히 잠8:32절 "내 말을 순종하는 자에게는 복이 임하고 불순종하는 자에게는 저주가 임한다"는 말씀을 읽을 때는 정신이 번쩍 들었습니다. 하나님을 믿으면 복을 주신다는 말씀이 너무나 강하게 그의 마음에 들어왔습니다.
그래서 잠언만 읽은 것이 아니라 전도서도 읽고 시편도 읽었습니다. 읽을수록 마음에 감동이 왔습니다. 하나님을 인정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자 이렇게 누워서 허송세월 할 수만 없었습니다.
그는 새벽기도에 나가기 시작했습니다. 매일 새벽기도에 참석하는 동안 6개월만에 낫기 힘든 허리디스크가 치료되었습니다.
이렇게 은혜를 받고 믿음을 갖게 되자 그는 자기 인생을 한 번 돌아보았습니다. 그리고 지금까지는 자기를 위해서 일했지만 이제는 하나님을 위해서 일할 것을 결심했습니다.
그는 자기가 배운 것이 한평생 출판사일밖에 없으니 이제 문서 선교하는 출판사를 세우고자 하고, '규장 문화사'를 시작했습니다.
이슬비 전도편지를 만들고, 사람들에게 도움이 될만한 책을 번역하기도 했습니다. 처음에는 경영이 어려워서 빚더미에 올라앉기도 했지만, 하나님께 모든 것을 다 맡기고 나자 마음에 평강이 넘치고 어려운 고비도 넘기게 되었습니다.
지금은 하나님의 축복으로 양재동에 규장 문화사 사옥도 신축하고 베스트셀러를 많이 내서 점점 흥황하게 되었습니다. 그가 바로 규장 문화사의 대표, 이슬비 장로 여운학 장로입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살아 계셔서 우리에게 복을 주시고, 우리를 지키시며, 은혜를 베푸시고, 평강을 주십니다.
아론의 축복권을 통해서 주시는 하나님의 복을 받는 성도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6. 우리가 이 복을 받으려면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1) 하나님의 절대 권위(주권)를 인정해야 합니다.
잠3:6절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
①모든 일에 하나님을 앞세워야 합니다.
잠16:3절 "너의 행사를 여호와께 맡기라 그리하면 너의 경영하는 것이 이루리라"
②항상 하나님을 영화롭게 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가장 기뻐 받으시는 것이 우리의 산 제사입니다.
롬12:1-2절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2) 살아 역사 하는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히11:6).
①하나님이 복 주실 것을 믿어야 하고, ②이루실 것을 믿어야 합니다.
3) 철저히 순종하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삼상15:22).
미국의 초대 대통령인 죠지 워싱톤의 어머니가 생일을 맞이했을 때에, 많은 하객들이 몰려와서 축하했습니다. 그때, 하객 중 한 사람이 대통령 어머니에게 물었습니다. "어머니는 아들을 어떻게 키웠기에, 그토록 위대하게 만드셨습니까?" 그 물음에, 워싱턴의 어머니는 다음과 같이 대답했습니다. "예, 나는 아들에게 하나님께 대하여 절대 복종하기를 가르쳤습니다."
죠지 워싱톤이 위대하게 된 것은, '하나님께 순종하고 복종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4) 지도자(제사장)을 기쁘게 해 드려야 합니다(히13:17).
"너희를 인도하는 자들에게 순종하고 복종하라 저희는 너희 영혼을 위하여 경성하기를 자기가 회계할 자인 것같이 하느니라 저희로 하여금 즐거움으로 이것을 하게 하고 근심으로 하게 말라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유익이 없느니라"
5) 죄를 철저하게 회개해야 합니다(사59:1-3).
"여호와의 손이 짧아 구원치 못하심도 아니요 귀가 둔하여 듣지 못하심도 아니라 오직 너희 죄악이 너희와 너희 하나님 사이를 내었고 너희 죄가 그 얼굴을 가리워서 너희를 듣지 않으시게 함이니 이는 너희 손이 피에, 너희 손가락이 죄악에 더러웠으며 너희 입술은 거짓을 말하며 너희 혀는 악독을 발함이라"
6) 구별된 삶, 사람을 사랑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벧전3:8-12).
1. 형제를 사랑하라!
8절 "마지막으로 말하노니 너희가 다 마음을 같이 하여 체휼하며 형제를 사랑하며 불쌍히 여기며 겸손하며"
①'마음을 같이 하라' 그 사람의 마음과 같이 하라는 것입니다.
굉장히 어려운 부탁입니다. 내 마음을 그 사람의 마음에 합하라. 즉 일치하라는 말입니다. 내 의견이 없습니다. 자존심도 없습니다. 양보하면 승리하게 되어 있습니다.
②'체휼하라' '체휼'이라는 말은 '같이 느낀다'는 뜻입니다.
이웃의 기쁨과 이웃의 슬픔, 이웃의 모든 삶에 동참할 수 있는 삶의 태도를 가리킵니다.
우리가 정말 형제를 사랑하는 교제를 나누기 위해서는 내 주변에 있는 이웃들의 기쁨에 동참하고 이웃의 슬픔에 동참할 수 있어야 합니다.
사실 우리는 우는 사람과 더불어 울기는 쉬운 것 같습니다. 그런데 웃는 사람과 더불어 같이 웃을 수 있는가? 다른 사람의 성공을 보고 박수치며 축복해줄 수 있는가? 이것이 더 어려운 것 같습니다.
③'불쌍히 여기라' 하나님의 속성 가운데서 제일 강조된 것이 바로 이 불쌍히 여기시는 속성입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를 불쌍히 여기십니다.
복음서에 보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방황하는 수많은 무리들을 바라보실 때 제일 많이 기록되고 있는 표현이 "무리들을 불쌍히 여기시더라"는 것입니다.
④'겸손하라' 형제 사랑을 지속하기 위해서는 이 겸손한 태도가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빌3:5절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예수 그리스도는 누구보다도 겸손하셨습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마11:29) 이 겸손은 섬김의 마음입니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섬기려 하고"(마20:28)
2. 9절에서 베드로는 형제 사랑뿐만 아니라 한 걸음 더 나아가 '핍박자 까지라도 사랑하라'고 가르칩니다.
"악을 악으로, 욕을 욕으로 갚지 말고 도리어 복을 빌라"
나를 악하게 대하는 사람, 또 나에게 욕을 하는 사람, 이런 사람들을 우리가 어떻게 대하게 됩니까? 같이 악으로, 욕으로 대하는 것이 보통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에게 그렇게 하지 말라고 가르칩니다. 오히려 더 적극적으로 그들을 사랑하라고 가르칩니다.
▶영국의 수상이었던 처칠이 청년 때 공부도 하지 않고 한동안 깡패 노릇을 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가 정신을 차리게 된 동기를 자서전에서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어느 날 길을 가는데 옥스퍼드 대학생이 단정하게 교복을 입고 책을 읽으며 가고 있었습니다. 건달인 처칠이 그 모습을 보는 순간 속이 몹시 뒤틀렸습니다. 그래서 그 학생을 건방지다고 쳐서 시궁창에 처넣었다고 합니다. 그러니 그 학생의 입장에서 생각하면 얼마나 화날 일입니까?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한바탕 싸움이 벌어졌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대학생이 시궁창에서 옷을 털고 나오더니 "실례했습니다."하고 다시 책을 보고 가더랍니다. 그 모습을 보는 순간 처칠이 큰 충격을 받았다고 합니다. 망치로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것 같은 아찔한 느낌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처칠이 그 길로 서점으로 가서 수십 권의 책을 사 가지고 와서 공부하기 시작한 것이 동기가 되어 나중에 한 나라의 수상까지 되었노라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말씀하시기를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오히려 복을 빌라"고 했습니다. 우리 속담에도 "미운 사람에게 떡 하나 더 주라"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이것은 굉장히 무서운 말입니다. 이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미운 사람에게는 다 뺏고 싶은 것이 보통 사람들의 공통된 마음입니다. 그런데 그런 사람에게 하나를 더 줌으로써 싸우지도 않고 상대를 이기라는 말입니다. 얼마나 고단위 처세술입니까? 그래서 사도 베드로는 이 방법을 이 세상을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제시한 것입니다.
①원수를 원수로 갚지 말아라!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롬12:19) 우리가 스스로 원수 갚으려고 하는 것은 주께 대한 월권 행위입니다.
②원수가 행한 일을 잊어야 합니다.
상대방이 나에게 잘못 행한 모든 일들을 잊어야 합니다. 우리는 흔히 주변에 있는 사람들을 용서한다고는 말하면서도 그들의 행동은 잊어버리지 못하는 경우들이 많이 있습니다.
우리가 어떤 사람을 참으로 용서했는가를 알 수 있는 표준은 우리가 그의 악함을 참으로 잊어 버렸는지의 여부에 달려 있습니다. 정말 우리가 상대방을 용서했다면 모든 것을 다 잊을 수 있어야 합니다.
시103:12절 "동이 서에서 먼 것같이 우리 죄과를 우리에게서 멀리 옮기셨으며." 동과 서는 완전히 반대 방향입니다.
③원수를 위해 복을 빌어야 합니다.
이 부분이 제일 어렵습니다. 원수를 갚지 않기로 결심하고 그의 잘못을 잊어야 할뿐만 아니라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본문은 "도리어 복을 빌라" 고 말합니다.
나를 괴롭히는 사람, 내 마음에 상처를 입힌 사람, 생각만 해도 진저리가 나는 사람, 보기만 해도 밥맛이 떨어지는 사람들을 위해 복을 빌어주어야 합니다.
일단 기도를 시작해 봅시다. 그리고 기도로써 그 사람을 축복해 봅시다. 그러면 내 마음속의 상처가 놀랍게 치료됩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그렇게 안 합니다.
미워해 보십시오 이를 갈아 보십시오. 점점 비참해지는 것은 자기 자신입니다. 그 사람을 생각하면 가슴이 떨립니다. 식사도 안 됩니다. 밥을 먹지 못하면 누구 손해입니까? 자기 손해입니다.
용서하지 못하면 제일 비참해지는 것은 자기 자신입니다. 나 자신을 위해서도 우리는 그 사람을 용서하고 축복 할 필요가 있습니다.
다시 한번 9절을 봅시다! "악을 악으로, 욕을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입었으니 욕으로 갚지 말고 도리어 복을 빌라 이를 이는 복을 유업으로 받게 하려 하심이라"
이 말씀 속에서 우리는 아주 중요한 말씀을 읽습니다.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입었으니" 성도의 삶은 세상 사람들과는 구별된 삶입니다.
레11:45절 말씀과 벧전1:6절 말씀처럼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니라" 하나님의 거룩을 따라 거룩하게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주님은 무엇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십니까?
"이는 복을 유업으로 받게 하려 하심이라" 할렐루야! 하나님의 복을 받는 통로라는 것입니다.
10절에서는 생명을 사랑하라고 하십니다. "그러므로 생명을 사랑하고" 여기서 "생명"이란 "우리 인생을 사랑하라"는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생명을 사랑하고 좋은 날 보기를 원하는 자는" 좋은 인생이 우리 앞에 전개되기 위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이웃과의 바른 인간 관계"입니다.
우리의 인생이 아름답기를 원하면 바른 인간 관계를 가져야 합니다.
본문은 시34:12-16절까지를 인용한 것인데, 구약의 본문을 그대로 인용하지 않고 베드로 자신이 제시하려는 교훈에 맞게 생략적으로 인용하고 있습니다.
시편에서의 '생명'과 '좋은 날'은 인간의 현세적인 축복, 즉 장수와 번영과 명성, 재해로부터의 해방 등을 나타내는 말씀이지만, 사도 베드로는 본문에서 시편을 인용하면서 미래의 기업, 내세의 축복으로 그 의미를 종말론적인 차원까지 확대하고 있습니다.
여기 '생명을 사랑하고'는 불행과 고통에서 떠나 희열과 평안의 생활을 얻으려고 사모함을 의미하는 말이며, '좋은 날'은 이 세상의 아름답고 좋은 날을 의미하지만, 장차 올 세계를 은유적으로 표현한 것으로 그리스도인에게 영광을 가져다 줄 날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기독교는 결코 이 땅의 것에 국한되지 않습니다.
기독교의 근본 진리는 항상 영적이고 내세의 축복을 목표하고 있습니다.
성도는 결코 이 세상에서는 참된 안식을 찾을 수가 없습니다. 이 세상에서는 우리의 소망의 닻을 내릴 만한 장소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내세를 바라보는 자, 주님의 재림을 대망하는 자는 그가 취해야 될 삶이 있고 목적이 있습니다.
그것은 미래를 내다보면서 그 영광스러운 미래를 위해 준비하는 삶입니다.
그 증거로 베드로는 20절에서 미래의 심판의 약속을 받고 그 날을 위해 철저하게 순종하며 준비한 노아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확실한 미래를 가지고 있는 성도는 현재의 삶을 형편없이 살 수 없습니다. 바람 부는 대로, 물결치는 대로 세파에 밀려 사는 자가 아닙니다.
내세의 소망을 가진 자는 이 세상의 것 때문에 쉽게 마음이 동요되는 자가 아닙니다. 내세의 소망과 하늘의 시민권을 가진 성도는 하나님의 자녀로서 살아야 할 품위가 있어야 합니다.
①혀를 금하여 바른 말을 하라고 합니다.
"혀를 금하여 악한 말을 그치며" 영생을 사랑하고 다가올 세계를 간절히 고대하는 그리스도인들은 무엇보다도 먼저 혀를 조심하여 악한 말을 하지 않아야 됩니다.
솔로몬은 잠18:21절에 "죽고 사는 것이 혀의 권세에 달렸나니 혀를 쓰기 좋아하는 자는 그 열매를 먹으리라"고 하였습니다.
이처럼 우리 지체 중의 극히 작은 부분인 "혀"를 잘못 사용함으로 말미암아 곧 무서운 결과를 초래할 수 있음을 성경은 경고하고 있습니다.
성도의 참된 경건은 자기 혀를 재갈먹여 그 혀를 통제하는 것입니다.
약1:26절 "누구든지 스스로 경건하다 생각하며 자기 혀를 재갈 먹이지 아니하고 자기 마음을 속이면 이 사람의 경건은 헛것이라"
그러므로 성도의 언어 생활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그 사람의 입에서 나오는 말은 그 인격을 나타내기 때문입니다.
하늘을 대망하며 사는 성도는 악한 말을 그치며 궤휼을 말하지 말아야 됩니다. 여기 "궤휼"은 다른 사람을 속이거나 해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성도의 입에서는 죄를 회개하는 말과 하나님의 성호를 찬양하는 것과 기쁜 구원의 소식을 전하는 말과 감사의 소리만이 터져 나와야 합니다.
②악에서 떠나 선을 행하는 자가 되라!
"악에서 떠나 선을 행하고" 여기 "악에서 떠나"는 "악에서 돌아서라"는 의미입니다.
본문 9절에는 악을 악으로 갚지 말라고 베드로는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잡히시던 날 밤에 베드로는 대제사장의 말고의 귀를 베는 감정에 격한 모습을 보여 주었으나 이제는 그의 변화된 모습을 여실히 보여 주면서 악을 악으로 갚지 말라고 권고하고 있습니다.
롬12:17절 "아무에게도 악으로 악을 갚지 말고 모든 사람 앞에서 선한 일을 도모하라"고 했고, 21절에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갈6:7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고 하였습니다. 악을 심으면 악을 거둘 것이고, 선을 심으면 선을 거둘 것입니다.
③화평을 구하며 좇아 살아라!
"화평을 구하여 이를 좇으라" 약3:18에는 화평은 "심는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다. 화평을 만드는 사람은 낮은 마음, 즉 겸손한 마음을 갖추어야 하고, 온유한 마음을 가져야 하며, 관용이 있어야 하고, 인내를 가져야 합니다.
화평케 하는 자가 하나님의 아들의 자격을 얻습니다(마5:9).
화평케 하는 자, 그가 하늘나라의 시민입니다. 이런 사람이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화평케 하는 자란 말은 영어로 "Peace Maker" 입니다.
평화를 만들어 내는 사람, 자기 마음에 평화가 있는 사람 정도가 아니라 다른 사람까지도 평화롭게 만들어 내는 사람입니다. 그 사람이 "Peace Maker" 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지금도 복 주실 자를 찾고 계십니다.
12절 "주의 눈은 의인을 향하시고 그의 귀는 저의 간구에 기울이시되 주의 낯은 악행하는 자들을 향하시느니라".
주님은 누구를 찾으십니까? 또 누구에게 관심이 있습니까?
"주의 눈은 의인을 향하시고"
여기서 의인은 믿음으로 사는 사람, 구별되이 사는 사람들을 가르킵니다.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믿음으로 사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계명을 따르며, 지키며 사는 자들입니다.
"그의 귀는 저의 간구에 기울이시되"
하나님의 귀는 성도들의 기도소리에 귀를 귀울이신다고 합니다.
렘33:3절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비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
"주의 낯은 악행하는 자들을 향하시느니라"
심판의 하나님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것을 보시고 심판하시는데, 선을 행한 자에게는 복을 주시고, 악을 행한 자에게는 심판의 매를 가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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