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강》 남을 판단하지 말라! (롬 2:1-5)
선교 2세기에 맞이한 한국교회가 지금 침체 국면에 있습니다. 양적으로도 크게 저하되었고. 질적으로는 크게 수준이 미달이라는 평입니다. 그래서 요즘 학자들의 가장 큰 논란은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섬겨라! 하나님을 하나님처럼 대접하라!"입니다.
욥기 서에 보면 사단이 등장하고, 욥의 아내가 등장하고, 욥의 세 친구들이 등장합니다. 물론 주인공은 욥입니다. ▶네 부류를 한 번 조명해 보면 우리들의 신앙의 유익이 될 줄 믿습니다.
①사단: 하나님을 도전의 대상으로 보았습니다. 자신이 하나님처럼 되려고 도전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계신지 모르고 까부는 사람은 사단보다 못하고 하나님이 계신 줄 알면서도 하나님께 대들며 도전하는 사람은 사단입니다.
주일성수 안 하는 것도 하나님께 대한 도전입니다. 하나님의 계명을 알면서도 지키지 않는 것은 사단 적이며,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입니다. /믿/
②욥의 아내: 하나님을 이용의 대상으로 보았습니다. 욥2:9절 "그 아내가 그에게 이르되 당신이 그래도 자기의 순전을 굳게 지키느뇨 하나님을 욕하고 죽으라"
욥의 아내는 욥의 순진성과 충성을 인정했습니다. 자신의 남편 욥은 그 정도면 하나님께 끔찍이 잘하는 것인데도 욥이 자식을 다 잃고, 재산을 다 잃고, 몸에 악창까지 나서 죽게 될 정도로 저주받은 것을 보고 하나님이 욥을 배신한 것이므로 하나님은 마땅히 욕먹어야 할 분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욥의 아내의 하나님의 대한 대접입니다. 그래서 그녀는 욥에게 "하나님을 욕하고 죽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악세 사리처럼 좋을 때는 지니고 다니고 필요 없을 때는 버릴 수 있는 대상으로 여겼습니다. 기분 좋으면 하나님의 일을 잘 하지만 기분이 나쁘면 팽개쳐 버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때에 따라 변하고, 장소에 따라, 조건에 따라, 기분에 따라 변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욥의 아내 같은 신앙입니다.
③욥의 친구들: 하나님을 무능의 대상으로 보았습니다. 욥의 소식을 듣고 그의 친구들이 찾아왔습니다. '엘리바스와 빌닷과 소발'입니다.
그들은 욥의 모습을 보고 일제히 소리 질러 각각 자신의 옷을 찢고, 하늘을 향하여 티끌을 날리며 자신의 머리에 재를 뿌리며 칠일 칠 야를 욥과 함께 있었으나 욥에게 위로의 말 한마디 한 친구가 없었다고 욥2:11-13이하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욥의 친구 세 사람은 하나님을 무능의 대상으로 보았습니다. 그들은 "우리가 잘 보았다. 이왕 왔으니 하나님께 기도하자! 금식기도하자! 하나님은 살아 계시지 않느냐! 불가능을 가능케 하시는 분이니 기도하자!"
이런 믿음의 자세는 털끝만큼도 찾아볼 수가 없었습니다. 소리 지르고, 울고, 겉옷을 찢고, 티끌을 날리고, 한탄하며 7일7야를 침묵으로 일관했습니다.
여러분! 문제가 있을 때 하나님께 기도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바로 욥의 친구들처럼 하나님을 무능 자로 보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없었습니다. 문제 속에서 문제만 보지말고 하나님을 보고 안심하십시오. 오늘도 하나님은 새 일을 행하십니다. 사43:19절 "보라 내가 새 일을 행하리니 이제 나타낼 것이라!"
④욥: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보았습니다. 욥2:10절 "우리가 하나님께 복을 받았은즉 재앙도 받지 아니하겠느뇨 하고 이 모든 일에 욥이 입술로 범죄치 아니하니라"
욥은 하나님을 절대자로, 능력자로, 주권자로 대접했습니다. 하나님은 복을 주시고, 저주도 주시며, 7년 풍년도, 7년 흉년도 주십니다. 반석에서 물을 주시고, 가뭄도 주시며, 만나를 주시고, 기근도 주십니다. 지팡이로 인도도 하시고, 막대기로 때리기도 하시는 분입니다.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대접한 욥의 신앙은 어떤 신앙인가?
⑴언제나 하나님 중심적인 생활을 했습니다.
주시는 분도 하나님이시요. 거두시는 분도 하나님이심을 고백했습니다.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신앙, 귀합니다.
⑵어디서나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악창이 나고, 손마디가 쑤시고, 살에 구더기가 생기는 등 아무리 고통이 와도 그는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기쁠 때, 일이 잘 되어질 때, 건강할 때 하나님께 찬양하는 것은 누구나 다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욥처럼 잿더미에 앉아서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은 보통신앙이 아닙니다.
⑶욥은 다 잃었어도 믿음은 잃지 않았습니다.
그 믿음 가지고 불가능이 가능해 질 것을 믿었고, 마지막 순간까지 절대 절망하지 않았습니다. 이런 신앙이 역사를 일으킵니다.
마9:28-29절 "예수께서 집에 들어가시매 소경들이 나아오거늘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능히 이 일 할 줄을 믿느냐 대답하되 주여 그러하오이다 하니 이에 예수께서 저희 눈을 만지시며 가라사대 너희 믿음대로 되라 하신대" 우리가 하나님을 어떤 하나님으로 믿느냐가 중요합니다. ◀제목소개!▶
▶1장을 한번 집고 넘어가고자 합니다.
사도 바울은 롬1:1절에서 자기 자신을 가리켜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택정함을 입은 사람이라고 소개했습니다. 바울은 일평생 동안 복음 전파를 위해서 자기의 모든 것을 다 바친 사람입니다. 결혼도 아니했습니다. 독신으로 살면서 오직 복음을 위해서 살고 복음을 위해서 죽은 사람이라고 말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곧 이어서 사도 바울은 2절 이하에서 '그러면 복음이 무엇인가?'를 설명해주었습니다. 여러분! 복음은 한마디로 '복된 소식'인데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죄가 주홍빛보다도 더 붉다 할지라도 깨끗하게 다 사함 받고 심판주 되신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의롭다 하심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죄를 짓고 죽을 날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사형 언도를 받고서 처형될 날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뜻밖의 소식이 들려왔습니다. 모든 죄가 다 사해졌다는 겁니다. 자유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것보다도 더 기쁜 소식이 어디 있겠습니까?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다 죄와 허물로 죽은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주시고, 우리를 위해 우리 대신 십자가 위에서 피 흘리고 죽게 만드심으로 말미암아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은 누구나 다 모든 죄에서 용서함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누리게 하시고 영원한 하늘나라를 기업으로 잇게 하시며 죽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신 이것보다도 더 기쁘고 복된 소식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런데 만일 사람이 복음을 받아들이지 아니하면 어떻게 됩니까? 하나님의 진노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다고 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죄 때문입니다. 죄 때문에 하나님의 무서운 진노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복음을 받아들이지 아니한 사람에게 하나님의 진노가 어떤 식으로 나타난다고 했습니까? 마음의 정욕대로 더러운 우상을 섬길 수밖에 없습니다. 종교적으로 타락할 수밖에 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부끄러운 욕심에 자기의 몸을 내놓을 수밖에 없습니다. 성적으로도 타락할 수밖에 없습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상실한 마음대로, 부패한 마음대로 온갖 합당치 못한 일을 자행하게 되어서 도덕적으로도 타락할 수밖에 없다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와 같이 타락한 인간들에 대해서 이미 정해놓으신 바가 있다고 했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사형입니다. 죽어 마땅하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있는 길은 단 한 가지밖에 없습니다. 복음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 외에 다른 방법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런데 이 세상에는 아직도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고 있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이 있습니다. 우리나라를 생각해보세요. 4명 가운데 아직도 3명은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고 있습니다. 더욱더 안타까운 사실은 복음을 받아들이지 아니할 뿐 아니라 복음을 대적하고, 복음 전파를 방해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여러 번의 전도 여행을 통해서 누구보다도 이 사실을 뼈저리게 체험했던 사람이었습니다.
▶바울은 오늘 본문에서 복음을 받아들이지 아니하고 복음 전파에 방해가 되는 두 종류의 사람을 우리들에게 소개해주었습니다.
첫째가 1-3절까지 기록되어 있습니다. 스스로 의롭다고 생각하면서 하나님의 심판은 자기에게는 해당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자기 잘난 맛에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쉽게 다른 사람을 판단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도덕주의자'들이 그러했습니다.
두번째로, 4절 말씀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아예 하나님의 심판 자체를 무시해버리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심판? 웃기고 있네. 그런 것이 어디 있어? 인생을 즐기기나 하자. 노세 노세 젊어서 놀아. 늙어지면 못 노나니. 건강할 때 마음껏 인생을 즐기는 거야"
이런 자들에게 사도 바울은 본문 5절에서 무엇이라고 경고하고 있습니까?
"다만 네 고집과 회개치 아니한 마음을 따라 진노의 날 곧 하나님의 의로우신 판단이 나타나는 그 날에 임할 진노를 네게 쌓는 도다"
이런 말입니다. "너희가 복음을 받아들이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복음을 대적하면서 너희가 무사하리라고 생각하느냐? 그렇지 않다. 너희는 지금 하나님의 진노를 쌓아가고 있는 것이다. 진노의 그 날, 하나님의 의로우신 판단이 너희에게 나타나는 그 날, 너희가 쌓아놓았던 무서운 하나님의 진노가 한꺼번에 너희에게 임할 것이다. 각오해라!"는 것입니다.
▶사람마다 제 잘난 맛에 산다는 말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대게 자기중심적으로 모든 것을 생각하고 판단합니다. 개인뿐 아니라 민족도 그렇습니다. 독일 사람들은 자신들을 게르만 민족으로서 세계에서 가장 우수한 민족으로 자랑하며 타민족을 멸시합니다. 이웃나라 일본을 소위 신국 '태양신'(국기에 태양신을 넣었다)이라고 해서 다른 나라 백성들과는 전혀 구별된 백성이라고 자랑합니다.
특별히 한국인을 '조센 징'이라고 깔봅니다. 중국도 자기나라를 대국이라고 큰소리를 칩니다. 우리나라도 민족의 자부심이 있습니다. 백의민족, 동방예의지국이라고 합니다. 일본을 왜놈, 쪽발이라고 부릅니다. 중국 놈들은 떼 놈이라고 부릅니다. 흑인은 깜둥이라고 부르고, 서양 사람들을 코쟁이라고 부릅니다.
▶이솝우화에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하루는 포수가 어느 산에 들어갔는데 메추라기 새 어미가 나와서 하는 말이 "사냥꾼 아저씨! 새는 잡되 예쁜 새는 잡지말고 볼품 없는 새만 잡으세요" 사실 메추라기는 꼬리가 없기 때문에 새 중에서도 가장 볼품 없는 새 중 하나입니다. 그런데도 메추라기는 자기 눈에 자기 새끼가 가장 예쁘고 아름답게 보였기 때문에 자신 있게 못생긴 새만 잡으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한참 있다 보니까 사냥꾼이 잡은 새는 모두 메추라기 새끼뿐이었습니다. 그것을 본 메추리 어미는 땅을 치며 통곡하면서 "아휴! 볼품 없는 새만 잡으라고 했더니 모두 예쁜 것만 골라잡았다"고 소리쳤습니다.
어미 메추리의 눈에는 자기 새끼가 제일 예쁘게 보였습니다. 고슴도치도 자기 새끼가 가장 예쁜 줄 압니다.
사람들도 이와 마찬가지입니다. 자신에게 대한 평은 아주 부드럽게 하고 타인은 사정없이 깎아 내리는 것이 사람들의 성품입니다.
이런 인간의 교만은 현재 뿐 아니라 옛날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바울 당시 세계적인 수도 로마에는 스스로 일등 국민이라고 자부하는 로마인들과 지혜를 자랑하는 헬라인들과 종교적 우월감에 사로잡혀 있는 유대인들이 섞여 살고 있었습니다.
바울은 이런 사람들이 모이는 로마 교회에 편지를 보내기를 1;18-32까지에서 이방인들 곧 로마인들과 헬라인들의 몰지각한 종교적인 타락과 윤리 도덕의 타락을 통박하면서 29-31절에서 21가지 죄목을 열거하면서 그런 죄에 빠진 이방인들은 사형에 해당된다. 즉 지옥가야 마땅한 존재라고 사정없이 퍼부었습니다.
이것을 들은 유대인들은 속으로 '그렇고 말고!' 맞장구를 치면서 쾌재를 불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람 바울은 그 날카로운 말씀의 검을 이번에는 동족인 유대인들의 죄악을 낱낱이 파헤치면서 '너희들이야말로 이방이들 보다 더 악한 죄인으로서 지옥가야 마땅한 자'라고 난도질을 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오늘 본문으로부터 시작하여 3장 8절까지의 말씀입니다.
▶1절 "그러므로 남을 판단하는 사람아 무론 누구든지 네가 핑계치 못할 것은 남을 판단하는 것으로 네가 너를 정죄함이니 판단하는 네가 같은 일을 행함이니라"
'그러므로' 앞장 18-32절의 접속사로써 이방인들의 죄를 지적하는 것을 보고 쾌재를 부른 유대인들을 향하여 말하고 있습니다.
그 당시 유대인들을 선민이라는 우월감에 빠져 이방인들을 우습게 보고 판단했습니다. "어휴! 저런 병신들~ 저러니까 저주를 받고 하나님께 버림을 받지!" 정죄하고 판단했습니다.
사도바울은 그런 유대인들을 향하여 "그러므로 남을 판단하는 사람아" 여기 '판단'은 '두 가지 사이를 구별짓는다. 판단하다, 심판하다'는 의미입니다.
세상은 판단하는 자와 판단 받은 자가 있습니다. 그런데 사실은 사람들 모두는 판단하는 자입니다. 사람들은 판단하기를 좋아합니다.
설교하는 저 자신도 남을 판단하는 편에 속합니다. 우리는 종종 지도자를 판단합니다. 대통령이 어쩌고, 저쩌구, 장관이 어쩌고, 저쩌구, 또 남들을 판단하고, 친구를, 이웃을, 교회를, 주의 종을 판단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마7:1-2절에서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 너희의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고 하셨습니다.
요8;3-11절에 보면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간음 중에 잡힌 여자를 끌고 와서 가운데 세우고 예수께 말하되 "선생이여 이 여자가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혔나이다 모세는 율법에 이러한 여자를 돌로 치라 명하였거니와 선생은 어떻게 말하겠나이까" 그러자 예수께서 몸을 굽히자 손가락으로 땅에 글을 쓰시고 일어나서 말씀하시기를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고 하시니 그들이 다 가버리고 오직 예수와 그 가운데 서있는 여자만 남았습니다. 그 때 예수께서 "여자여 너를 고소하던 그들이 어디 있느냐" 물으니 여자가 "주여 없나이다" 하고 말하자 예수께서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나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고 하시고 용서해 주셨습니다.
주님은 정죄하기 좋아하고, 판단하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을 향하여 눅6:41-42절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너는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를 보지 못하면서 어찌하여 형제에게 말하기를 형제여 나로 네 눈 속에 있는 티를 빼게 하라 할 수 있느냐 외식하는 자여 먼저 네 눈 속에서 들보를 빼라 그 후에야 네가 밝히 보고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를 빼리라"
사람들은 남을 칭찬하는 일에는 인색하고 관심이 없습니다. 그러나 남을 악평하고 험담하는 일에는 얼마나 흥미와 관심이 있는지 모릅니다. 이것이 바로 인간의 타락한 성품의 특징이라고 학자들은 말하고 있습니다.
그 당시 유대인들은 자기들만 하나님이 선택해준 백성이라는 선민의식이 매우 강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는 타민족과는 달리 하나님이 있고 하나님이 정해주신 율법과 계명이 있고, 성경이 있고, 성전이 있고, 하나님을 향한 예배가 있고, 하나님의 보호와 능력, 기적의 역사를 가진 민족이라고 자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선민의식이 너무 고조되어 자기들의 교만으로 빠지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할례를 행하고, 율법을 지키면 이미 구원 얻고 심판을 면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이방인들을 죄악시했고, 심판의 대상자로 보았습니다. 자기들만 구원받고 자기들만 주어지는 축복인 줄 알고 이방인들을 개 취급했습니다(수로보니게 여인).
그러나 롬3:9-10절에 보면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죄 아래 있다고 선언하고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고 했습니다.
남을 판단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관점에서 볼 때 죄인이 죄인을 판단하는 것입니다. 오직 판단은 인간을 창조하시고 다스리시는 하나님만이 인간보다 뛰어난 통찰력과 능력을 가지시고 판단할 수 있는 것입니다.
다만 우리는 자기 자신을 판단해야 합니다. 내가 지금 바로 행하고 있는가? 바로 가고 있는가? 바로 믿고 있는가?
오늘 본문은 "무론 누구든지 네가 핑계치 못할 것은 남을 판단하는 것으로 네가 너를 정죄함이니 판단하는 네가 같은 일을 행함이니라"
남을 판단한 우리가 스스로 양심에 비추어 보면 판단한 자신 역시 같은 일을 행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남을 판단하는가? 남이 잘못한 것은 보고 손가락질 한 사람도 결국 같은 일에 빠지고 맙니다.
나는 절대로 저 친구처럼 배신 안 해! 나는 절대로 바람 안 피워! 큰 소리 쳤던 사람도 결국엔 그 죄에 빠져 허덕거리는 것을 우리는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남을 판단하는 그 판단으로 자기 자신을 스스로 판단해야 하고 정죄해야 합니다.
속담에 '자식 기르는 사람 남의 자식 말 못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남의 자식 잘못하는 것을 보고 "부모가 어떻게 교육시켰기에 저 모양이야" "쌍놈이야" "못된 놈" 정죄합니다.
그런데 이제 자기 자식을 키워보니 마치 살얼음 위에 걸어가는 것 같습니다. 정말로 자기 자식이지만 분명 마음대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언제 내 자식이 죄를 질지, 언제 사고를 칠지, 눈만 뜨면 자식 걱정입니다.
자식 키우는 사람이 남의 자녀를 흉보고 난 후 나중에 자기 자식이 그런 일을 저질렀을 때가 되면 자기 말로 자기 자식을 정죄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남을 비판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이제 우리 믿음의 사람들은 악으로 남을 비판하지 맙시다. 다른 사람의 잘못을 보고 선의로 권면하는 것과 기도해 주는 것이 우리 믿는 자의 도리입니다.
▶2절 "이런 일을 행하는 자에게 하나님의 판단이 진리대로 되는줄 우리가 아노라"
그렇습니다. 세상에는 참된 판단이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판단은 진리대로 행합니다.
법정의 판사는 죄를 판단할 때에 헌법에 의하여 소신대로 판단해야 합니다. 그런데 법관이 뇌물을 받고 눈감아 주는 경우가 많습니다. 지금은 국민의 정부라 많이 시정되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아직도 사법부가 저울추를 바로 세우지 못하고 있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법은 정확합니다. 하나님은 최고의 심판주가 되시며, 사람을 정죄하되 진리 가운데로 하고 사람을 심판해도 진리대로 하시기 때문에 언제나 공정합니다.
단5장을 보면 바벨론의 느브갓네살 왕의 아들 벨사살이 왕이 되면서 자기 아버지보다 더 교만하여 하나님을 모독했습니다.
벨사살이 하루는 연회를 배설하고 흥겹게 놀다가 별안간 예루살렘 성전에서 탈취해온 성전 기물을 가져오라고 하더니 그 그릇에다 술을 부어 마시면서 하나님을 모독했습니다.
이때 왕의 맞은편 벽에 손이 나타나 글을 썼는데 "메데 메데 데켈 우바르신" 왕을 하나님의 저울로 달아보니 함량미달이란 뜻입니다. 그래서 메데와 바사의 신생국에 나라를 넘겨주게 되었습니다.
시편 기자는 "진실로 천한 자도 헛되고 높은 자도 거짓되니 저울에 달면 들려 입김보다 경하리로다"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진리의 심판대의 저울에 달면 인간은 누구를 막론하곤 배운 사람, 못 배운 사람, 잘난 사람, 못난 사람, 부한 사람, 가난한 사람, 누구를 막론하고 모든 인간은 입김보다 가벼운 존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진리대로 판단하십니다. 진리는 곧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약1:23절에서 하나님의 말씀의 도인 성경은 '심령의 거울'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에 말씀은 심령의 거울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거울로 나를 비쳐야 합니다. 남을 비취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들은 자꾸 남을 비춥니다. '아무개가 저래서는 안 되는데, 성경에 저렇게 하면 안 된다고 했는데'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나를 비춰보고, 나를 책망하고, 판단하고, 질책하는데 사용하십시오. 그래서 새롭게 결단하고 믿음으로 달려가게 될 줄 믿습니다. /아멘!/
남을 판단하면 그 사람도 십자가의 심판을 피할 수가 없습니다. 마12:37절 "네 말로 의롭다 함을 받고 네 말로 정죄함을 받으리라"
▶3절 "이런 일을 행하는 자를 판단하고도 같은 일을 행하는 사람아 네가 하나님의 판단을 피할 줄로 생각하느냐"
"이런 일을 행하는 자를 판단하고도 같은 일을 행하는 사람아!" 똑같다는 것입니다. 당시의 유대인들을 예를 들어서 생각을 해봅니다. 저들은 이방 사람들이 우상을 숭배한다고 판단했습니다.
그러면서도 자기들은 사람이 만든 조상의 유전을 지키느라고 하나님의 계명을 마음대로 범했습니다. 이방인들이 우상을 숭배함으로써 하나님의 계명을 범하는 것이나, 유대인들이 사람이 만든 조상의 유전을 지킨다고 하나님의 계명을 어기는 것이나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다를 바가 없습니다. 똑같은 죄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남을 판단하고 자기도 같은 일을 행하면 어떻게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있겠는가?" 반문합니다. 우리는 쉽게 남을 판단하고도 자신은 판단 받지 않을 줄로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런데 본문은 남을 판단하면 하나님께서도 당신을 판단하신다고 말씀합니다. 그렇습니다. 다른 사람이 범죄 한 것을 판단하고 정죄하는 것은 자신이 같은 죄를 범하면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없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외모로 보고 판단하지 않으시고 그 행위가 진리에 맞느냐 맞지 않느냐에 따라 판단하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어긋나는 것은 누구를 막론하고 반드시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됩니다.
▶바울이 본문 1-3절에서 말하고 있는 논리는 아주 간단하고 분명합니다. 삼단논법으로 되어 있습니다. 첫째, 사람이 죄를 지으면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다. 둘째로, 남을 판단하는 자도 똑같은 죄를 짓고 있는 것이다. 셋째로, 결론은 그러므로 남을 판단하는 사람에게도 하나님의 심판은 임할 수밖에 없다. 사도 바울이 지금 이것을 말씀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4절 "혹 네가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너를 인도하여 회개케 하심을 알지 못하여 그의 인자하심과 용납하심과 길이 참으심의 풍성함을 멸시하느뇨"
'혹'이란 말은 우리가 잘못 생각해서란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셨기 때문에 우리를 인도하여 죄지어 넘어지고, 쓰러질지라도 회개하도록 하기 위해 오래 참고 기다리시는 줄을 모르고 하나님께서 잊어버렸다" 생각하기 쉽습니다.
여러분! 사람이 하나님 앞에 잘못한 것이 많이 있으나 당장 하나님의 심판이 내려지지 않는 것은 인자하신 하나님께서 자비와 긍휼를 베풀어 그 사람이 회개하기를 기다리시는 기간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기간이 다 차도록 회개치 않으면 하나님의 심판이 임합니다.
노아의 홍수 때를 기억하세요! 죄악의 관영 함을 보시고도 120년 동안 꾸준히 인내를 가지고 참으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죄를 회개하기를 참고 기다리십니다. 하나님은 인자하신 분이십니다.
시103:8절 "여호와는 자비로우시며 은혜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 하시며 인자하심이 풍부하시다"고 했습니다. 여기 세 가지 단어에 주목하셔야 합니다. '자비, 은혜, 인자'입니다.
자비는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고, 은혜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값없는 선물이며, 인자는 부드럽고 너그러운 마음을 가리킵니다.
구약의 사람들은 하나님을 무서운 하나님으로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가까이 하기 힘든 하나님으로 알고, 매일 때리시고 진노하시는 하나님으로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믿음의 사람 다윗은 하나님을 자비, 은혜, 인자가 풍성하신 하나님이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물론 하나님은 공의의 하나님이십니다. 죄를 용납지 않으시고, 죄를 벌하시는 공의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나 그 죄를 회개하기만 하면 우리 하나님은 인자하심과 용서하심과 참으심이 풍성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집나간 탕자가 깨닫고 돌아올 때, 얼싸안고 반겨주는 사람의 모습입니다. 우리를 용서하여 주십니다. 하나님께서 인간들에게 강압적으로 예수 믿으라고, 회개하라고 할 수 있는 능력이 없어서 참고 기다리시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천사들을 이 땅에 보내시고 밝은 대낮에 뇌성번개로 번쩍 치면서 하나님의 음성이 천지를 진동하면서 회개하라고 강압적으로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 편을 택하지 않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런 회개는 진정한 회개가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마음의 중심을 보시는 분이십니다.
▶4절에서는 하나님의 속성 몇 가지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①하나님은 인자하신 분이십니다.
'인자'라는 말은 '부드럽고 친절한 마음'입니다. '자비, 긍휼, 친절'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사랑은 죄인 된 인간을 불쌍히 여기는 긍휼하심입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죄인들을 불쌍히 여기시며 오래 참고 회개하고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②우리를 인도하시는 분이십니다.
'너를 인도하여' 죄의 길에서 의의 길로 인도하십니다. 사망의 길에서 생명의 길로, 질병에서 건강으로, 실패와 좌절에서 성공으로, 승리로 인도하시는 분이십니다. 다윗은 시23:2-3절 "그가 나를 푸른 초장에 누이시며 쉴만한 물 가으로 인도하시는 도다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 도다"
③우리를 회개케 하시는 분이십니다.
99마리 양보다 길 잃은 한 마리를 기다리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속에 회개의 영을 부어주어 회개할 수 있도록 하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회개의 영을 주옵소서!" 기도해야 합니다.
④모든 것에 풍성하신 하나님이십니다.
"그의 인자하심과 용납하심과 참으심의 풍성함" 한량없이 넓고 풍성하신 하나님의 사랑은 오늘도 죄를 용서하시고 세리와 죄인이라 할지라도 참으시고 기다리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사랑만 풍성하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축복도 풍성하십니다. "너희 일을 넓게 펴라! 내가 채우리라!"
▶5절 "다만 네 고집과 회개치 아니한 마음을 따라 진노의 날 곧 하나님의 의로우신 판단이 나타나는 그 날에 임할 진노를 네게 쌓는 도다"
무슨 말입니까? 복음을 받아들이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복음을 방해하면서도 무사하리라고 생각하느냐는 것입니다. 천만에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는 것은 무엇을 쌓아가고 있다는 것입니까? 진노를 쌓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은행에 가서 적금을 부을 때를 생각해보십시다. 정해진 기간 동안 매달 얼마씩 일정 금액을 적립을 하면 나중에 목돈으로 돈을 타게 됩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지금 복음을 방해하는 사람들은 나중에 정해진 때에 한꺼번에 타게 될 하나님의 무서운 진노를 쌓아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정해진 때가 언제입니까? 하나님께서 정하신 그 날입니다. 진노의 날입니다. 하나님의 의로우신 판단이 무섭게 나타나는 날입니다.
우리가 적금을 들 때 매달 부은 금액이 많으면 많을수록 나중에 많이 타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복음을 받아들이지 아니하는 사람들에게 임할 하나님의 진노의 양은 무엇에 따라서 결정이 된다는 것입니까? 두 가지가 있습니다. 고집과 회개치 아니하는 마음입니다. 고집 피우지 말라는 것입니다. 고집을 피우면 피울수록 나중에 임하게 되는 하나님의 진노는 더욱더 많아진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회개치 아니한 마음을 따라서, 회개치 아니한 정도에 따라서 하나님의 진노의 양도 달라진다고 했습니다.
①고집하는 자: '고집, 완고, 완악'이란 말은, 마음이 오직 불신으로 가득 찬 사람을 말합니다.
세상에는 고집 때문에 망한 사람이 많습니다. 현명한 사람은 고집을 부릴 때와 참을 때를 압니다. 부모님에게 고집 부려 봤자 매만 법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 고집 부려 봤자 심판대 앞에서 음부로 떨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②회개하지 않는 자: 회개는 인간의 마음이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것을 말합니다. 군대용어로 '뒤로 돌아 갓!'입니다.
지금까지 내가 가고 있던 이 고집스러운 죄와 사망의 길에서 180도 뒤로 돌이켜 생명과 은혜를 주시는 하나님께로 향하는 것입니다.
현대인들도 하나님의 최후의 심판을 무시합니다. 괜히 겁준다고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최후의 심판은 지금도 다가오고 있습니다. '토마스 아킴버스'는 "지옥불의 연료는 죄 밖에 없다. 육체를 따라 죄를 짓는 것은 지옥불의 연료를 더욱 많이 저축하는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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