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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강》 복음의 능력! (롬 1:16-17)

by 【고동엽】 2022. 2. 2.

《제5강》 복음의 능력! (롬 1:16-17)

 

본문의 주제는 '의인은 믿음으로 살아야 됩니다!'라는 주제입니다. ▶믿음의 사람들의 언어생활에 대하여 알아보겠습니다.
약1:26절 "누구든지 스스로 경건하다 생각하며 자기 혀를 재갈 먹이지 아니하고 자기 마음을 속이면 이 사람의 경건은 헛것이라"
혀와 마음은 다듬어져야 경건한 사람이 될 수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신앙은 훈련되어져야 합니다. 우리는 끊임없이 교육과 훈련을 통해서 우리의 신앙의 인격이 변화 받게 됩니다.
작은 사람들의 주제는 항상 남의 험담이고, 보통사람의 주제는 물질이며, 큰 사람의 주제는 항상 사명과 사상이랍니다. 속된 사람들은 큰 사람들의 험담이나 실수를 보고 대단히 기뻐합니다.
인간의 입술로 나오는 말은 대단한 능력이 동반됩니다. 말이 속에 있을 때는 생각이고, 입 밖에 나오면 말이 되고, 사람을 움직일 때는 행동이 됩니다. 그러므로 말의 실수는 인격 전체에 책임이 따름이다.
①말은 경건의 척도입니다. 약3:2절 "우리가 다 실수가 많으니 만일 말에 실수가 없는 자면 곧 온전한 사람이라" 영이 경건한 사람은 그 사람의 말도 경건합니다. 말이 경건하면 생활이 경건합니다.
②말은 곧 힘입니다. 철학자 하이데거는 '말은 곧 힘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야고보 사도는 약3:2절에서 "우리가 다 실수가 많으니 만일 말에 실수가 없는 자면 곧 온전한 사람이라"고 말하면서 말은 "굴레, 재갈, 키, 불, 죽이는 독, 샘, 나무" 등의 일곱 가지로 비유했습니다(약3:2-12). 이런 것들은 다 힘이 있습니다. 온 몸을 불사르며 죽이는 힘을 발휘합니다.
③말은 시간과 장소에 따라 의미가 달라집니다.
④말은 같은 말이라도 상대적입니다. 같은 말을 같은 장소에서 여러 사람이 들어도 각자의 생각(처지)에 따라 그 해석이 달라집니다. 말에는 양면성이 있습니다. 또 같은 말이라도 어떤 사람에게 하느냐에 따라서 달라집니다. 영적인 사람이 하는 말과 육적인 사람이 하는 말은 분명히 차이가 있어야 합니다.
⑤말이란 우리 인생에게만 준 하나님의 특별한 선물입니다. 인간이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4가지 큰 선물이 있는데, 각자의 '생명과,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과 말씀'입니다.
언어보다 큰 선물은 없습니다. 말은 하나님의 교통수단이고, 삶의 원동력이고, 신앙생활의 중심적 핵이기도 합니다.
⑥말은 하나님의 최대의 선물이면서도 최악의 도구이기도 합니다. 사실 언어 때문에 망하기도 하고, 그 언어 때문에 부흥하기도 합니다. 말 한마디로 천 냥 빚을 갚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말(언어)을 잘 다스려야 합니다. 믿음의 사람의 혀는 길들어져야 합니다.
▶우리 믿음의 사람들이 버려야 할 말들이 있습니다. ⑴허망한 말 ⑵하나님을 거역하는 말 ⑶과격한 말 ⑷아첨하는 말 ⑸더러운 말 ⑹희롱하는 말 ⑺비판하는 말 ⑻어리석은 말 ⑼강퍅한 말 ⑽중상모략(이간질)하는 말 ⑾소망이 없는 부정적이고 절망적인 말도 버려야 하고 ⑿사람들을 비난하지 말고 격려해 주어야 합니다.
말은 그 사람의 인격입니다. 말속에는 파괴력도 있고, 성취력도 있습니다. 말(언어)의 순화운동이 일어나야 합니다. 이런 사람이 주님의 복음을 전할 수 있고, 그 복음의 능력에 붙잡힐 수가 있습니다. /믿/ ◀제목소개▶


지난 시간에 16절까지 생각해 봤지만 조금 부족한 것 같아 다시 16-17절에서 하나님의 진리를 발견하려고 합니다.

 

▶16절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에게로다"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고 바울은 당당하게 선언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당시 초대 교회교인들이 복음을 부끄러워할 유혹이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첫째, 유대인에게 거리끼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신21:23절을 보면 "나무에 달린 자는 하나님께 저주를 받았음이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에 근거해서 유대인들은 십자가를 저주의 상징으로 여깁니다.
유대인들은 메시야는 승리와 영광을 드러내고 오실 영광의 주님으로 믿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십자가는 패배요 저주를 드러낸 상징적인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따라서 십자가에 달린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나타난 복음은 유대인들에게 더 이상 복음일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에게 복음은 거리끼는 것이 됩니다.
둘째, 헬라인에게 미련한 것이기 때문이다. 헬라인들이 볼 때 위대한 신이 자기의 대적 자들에 의해 십자가에 달려 죽임을 당했다는 사실은 한 마디로 말도 안 되는 것입니다. 자기의 대적과 싸워 패배한 신은 더 이상 신일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십자가의 복음은 헬라인이 볼 때 그 자체로 미련하고 어리석은 것으로 보였습니다.
이렇게 유대인이나 헬라인이 복음을 거리끼는 것으로 어리석은 것으로 생각하여 복음을 부끄러워할 수밖에 없는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복음을 자랑하려는 이유는 무엇인가?
복음이 모든 믿는 자들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라는 사실을 그가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자기가 실제로 신앙생활하면서 복음이 능력이 있다는 사실을 체험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는 본문에서 복음의 능력을 말하고 있습니다.
먼저 결론부터 말하자면 복음의 능력은 첫째는 구원이요, 둘째는 의롭다 함입니다. 더 쉽게 표현하면 누구든지 예수를 믿으면 구원과 의롭다함을 받게 됩니다. 이것이 바울이 설명하고 있는 복음의 진수입니다.
▶오늘 본문이 로마서 전장의 주제이며 요점입니다. 여기서부터 결론이 시작되며 동시에 바울이 하고자 하는 말씀의 골자입니다.
복음의 능력에 있어서 소극적으로는 구원이 있고, 적극적인 의미로는 의롭다 함을 받아서 의인이 되는 은혜가 있습니다. 겨우 구원만 받고 의롭다 함을 얻지 못하면 정말 부끄러운 일입니다.
내가 의인이 되어야 하나님 앞에 설 수 있지, 죄인 그대로 건져만 놓으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옛 말에 물에 빠진 사람 건져주었더니 보따리 내 놓으라는 말이 있습니다. 어처구니없는 말로 들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깊이 생각해 보면 일리가 있는 말입니다. 보따리를 찾아 주어야 먹고살지, 보따리는 찾아주지 않고 생명만 건져주면 어떻게 살아가라는 것입니까? 그러므로 살도록 도와주어야 합니다.
자살하겠다는 사람 살려 놓았으면 그 다음 문제까지도 보살피라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구원 다음에는 의롭다하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있어야 하나님 전에서 살수가 있습니다.
▶16절은 이렇게 시작됩니다.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것은 마치 승전가의 트럼펫을 부는 것과 같은 그런 모습입니다. 첫 마디가 승리를 선포하는 자제로 시작됩니다.
여기의 주제는 첫째는 나(자신)이며 둘째는 복음입니다. 이 말 속에는 아주 중요한 의미가 내포되어 있습니다. 복음은 나로부터 시작되어야 합니다. 내가 복음의 주인공이 되어야 합니다. 내가 주안에서 은혜 받고, 축복 받고, 능력 받고 살아야 합니다.
남이 은혜 받고, 축복 받고, 능력 받는 건 나하고 아무 관계없습니다. 신앙은 1;1 입니다.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나는' 하고 자신이 믿는 복음을 시작합니다.
▶복음이 무엇인가? 우리는 배웠습니다. 기쁜 소식, 복된 소식, 한 마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바울은 예수를 전하면서 놀라운 하나님의 능력과 은혜를 체험했습니다. 그래서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고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당시 이러한 선포는 굉장히 어려운 시대적 배경을 가지고 있습니다. 지금 바울은 이 편지를 로마 사람에게 쓰고 있습니다. 로마는 처음에 헬라 사람들에게 속해 있었습니다. 알렉산더 대왕이 온 세상을 지배하고 있었고, 그 다음에는 헬라 철학과 헬라 문화가 온 구라파를 지배하고 있었습니다.
헬라 철학과 문화는 인간을 존중히 여기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철학과 문화가 무효로 돌아섰습니다. 로마의 권력과 무력이 헬라문화를 전부 짓밟아 버렸습니다. 이것으로 인해 당시 사회는 큰 혼란이 왔습니다. 로마의 권력만이 통하는 세상이 되고 말았습니다.
인간의 이성을 소중히 여기는 철학, 즉 추상적인 철학이 무너져버리고 로마의 힘의 철학이 세상을 지배하게 된 것입니다.
오직 힘이 있는 자, 강자가 진리로 등장했으며 약자는 불의로 짓밟혔습니다. 한 마디로 힘의 철학이 세상을 지배하는 시대가 된 것입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바울은 "나는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고 외쳤습니다. 이 외침은 사실 외형적으로는 부끄러운 외침이었습니다. 왜냐하면 현실적으로 로마의 철학에 비추어 보면 이 복음은 아주 부끄러운 것, 보잘것없는 것이었습니다.
한 예로 예수님께서 재판을 받으실 때에 빌라도에게 "네가 진리에 속했으면 진리의 소리를 들을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때 빌라도가 "진리가 무엇이냐? 또 네가 말하는 것이 진리라면 최소한 너의 제자들만이라도 너와 함께 죽어야 하지 않느냐?"는 뜻으로 되물었습니다.
예수 혼자서 외롭게, 비참하게, 능욕과 수치를 당하며 이제 십자가에 죽을 형편인데 도대체 무엇이 진리인지 빌라도의 철학으로는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나는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는 말은 그 당시 상황에서 보면 엄청난 선언이었습니다. 힘의 철학에 속한 로마 사람들에게 골고다에서 힘없이 비참하게 죽어간 예수님의 사건은 아무 의미 없었고 기억조차 희미한 사건이었습니다.
당시 바울이 '나는 십자가를 자랑하고 복음을 자랑한다'는 것은 대 로마제국을 향하여 선전포고하는 것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을 뿐 아니라 복음이 능력이라고 외쳤습니다. 한 마디로 예수는 전적으로 권력이요, 예수만이 능력이요, 힘이라고 외쳤습니다. 로마를 상대로 한 이 말씀 한 마디는 엄청난 선언이었습니다.
▶바울이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는 그의 고백 속에서 또 다른 의미를 찾을 수 있습니다. 한마디로 바울은 복음 안에서 부끄러움 없이 살았다는 말입니다. 복음 안에서 합당한 생활을 했다는 말입니다.
사실 예수님을 따르는 자로서 제자답게, 성도답게 산다는 것은 얼마나 어려운지 모릅니다. 신앙생활이 얼마나 어렵습니까? 예수를 믿으면서도 어떤 사람들은 예수 믿는 것 자체를 부끄러워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면 안 됩니다. 우리도 바울처럼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맙시다. 자랑합시다. 사랑합시다. 외칩시다. /할/

▶그렇다면 복음에는 어떤 능력이 있는가? 하나님의 능력이 있습니다. /할/
여러분! 복음은 철학과 같은 어떤 단순한 사상의 체계나 논리가 아닙니다. 복음은 하나님의 힘이요, 능력이요, 권세입니다. 복음은 분명히 믿는 자를 변화시킵니다. 깡패가 회개합니다. 소매치기가 회개합니다. 술 주정쟁이가 바꿔집니다. 그뿐만 아닙니다. 예수 안에는 세상 안에서 '돈, 권력, 명예' 등 얻을 수 없는 영원한 생명의 즐거움이 있고, 영원한 평안이 있습니다.
현대무기 중 가장 큰 능력을 나타내는 것이 핵입니다. 김정일이가 이런 것을 만들어 장난하고 있습니다. 핵의 위력은 무서운 파괴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복음의 능력은 핵폭탄도 파괴시킬 수 없는 사람의 마음속에 숨어 있는 죄악의 아성을 단번에 무너뜨려 버린답니다. /얼마나 통쾌합니까?/
여기에 비해 세상의 종교나 윤리 도덕은 곡괭이로서 좋은 바위를 부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복음에는 핵폭탄의 위대한 능력이 들어있습니다. 이 사실을 체험한 예레미야 선지자는 렘23;29절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 말이 불같지 아니하냐 반석을 쳐서 부스러뜨리는 방망이 같지 아니하냐"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참으로 복음은 하나님의 능력이요, 힘이요, 생명이요, 위력입니다. 그토록 막강한 힘의 나라 로마제국도 복음 앞에 굴복하고 기독교를 국교로 삼았습니다. /믿어집니까?/

 

▶이 복음에는 어떤 능력이 있는가?
①구원의 능력이 있습니다.
롬6;23절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안에 있는 영생이니라" /할/
우리의 영혼이 아담의 범죄로 하나님과 분리되어 영원한 지옥에 떨어진 존재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셔서 인간의 죄를 대신 짊어지게 하시고 그 무서운 십자가 형틀을 씌우셔서 골고다에 죽였습니다.
내 대신, 당신 대신 우리 주님이 죽어 주셨습니다. 그리스도의 죽음이 바로 우리를 살리고 구원시킨 사건입니다.
구원이란 무엇입니까? 죄의 결과인 형벌과 영원한 멸망에서 건짐을 받고 우리의 영혼이 구원을 받아 마지막 날에 우리의 몸이 부활하여 영원한 세계(천국)에서 영생을 누리는 것입니다.
구원! 엄청난 축복입니다. 사도바울은 구원 전의 인간들의 모습을 이렇게 절규하고 있습니다. 롬7;24절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누가 건져낼 수 있습니까? 25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여러분! 사망의 권세에서 우리 주님이 건져내셨습니다. /아멘!/
구원이란 죽어서 천국 가는 것으로 아는 사람이 많습니다. 틀림없이 천국 갑니다. 그러나 이 땅에서도 구원의 은혜가 임합니다. 뭡니까? 구원이란 자유 함을 말합니다. 구원은 자유, 즉 무엇으로부터 풀려나는 것을 의미합니다.
구체적으로 생각해보면, 물에 빠졌던 사람이 구출되면 그것이 구원이요, 병이 있던 사람이 낫게 되면 그것이 구원이며, 실패한 사람이 일어서는 것이 구원이요 자유와 해방을 의미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종노릇하다가 풀려났는데 그것이 구원입니다. 한마디로 어떠한 구속에서 풀려나고 건짐 받는 것이 이 땅에서의 구원입니다.
여러분! 지금 현재도 이 구원의 능력이 있다고 믿으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신앙은 믿음대로 되어집니다.

②죄악을 멸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사9;2절 "흑암에 행하던 백성이 큰 빛을 보고 사망의 그늘진 땅에 거하던 자에게 빛이 비취도다"
롬6;14절 "죄가 너희를 주관치 못하리니 이는 너희가 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음이니라"
죄악이 관영한 이 세상에 복음만이 죄악을 멸하고 인류의 모든 잘못된 것들은 복음으로만 고칠 수 있습니다.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요11:25-26절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돈(금)이 아무리 귀하다고 하지만 죽은 사람을 살릴 수 없습니다. 지금은 고인이 된 정주영 회장님은 '죽은 큰아들 몽필이를 살릴 수 있다면 전 재산을 내 놓겠다'고 했습니다.
지식이 아무리 좋아도 생명을 연장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복음의 빛이 한번 비취는 그곳에는 생명의 약동함이 있습니다.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는 이 복음이 '루터'로 하여금 종교 개혁을 이루게 했습니다. 로마서는 복음서 중에 복음이요, 바울의 서신 중에서도 최대의 걸작입니다.
세계의 역사는 로마서가 만들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세계사에서 기독교를 빼 놓을 수 없으며 기독교사에서 바울을 빼 놓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③이 복음은 변화의 능력이 있습니다.
이 세상은 시시각각, 이모저모로 아리고 쓰린 일들이 많습니다. 바다의 풍랑이 거치는 날이 없듯이 이 세상은 수고와 걱정과 근심의 순풍이 그칠 날이 없습니다. 그러나 복음 안에는 하나님의 위로와 화평함이 임하게 됩니다. 풍랑 속에서도 우리를 담대하게 하십니다. 문제 속에서도 우리에게 안정함을 주십니다.
시편기자는 시편23편에서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서도 건져 주시는 하나님을 찬양했고, 원수의 목전에서 상을 베푸시는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복음을 다시 한번 정리합니다.
복음은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이 능력 속에는 죄인을 구원하는 능력이 있고, 죄악을 멸하는 능력이 있고, 그래서 사람을 새롭게 하는 신 창조의 능력이 있습니다. 이 복음 안의 능력은 절망한 인생을 영원한 소망으로, 가난한 인생을 부요케 하는 능력이 있고, 가정을 새롭게 하고 사회를 새롭게 하는 능력이 있으며, 미움을 사랑으로 변화시키는 능력이 이 복음 안에 있습니다.
이런 모든 능력이 어떤 사람에게 나타나는가? 복음을 믿고 순종하는 사람들 속에서 역사 합니다. /할/ 여러분!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말고, 자랑하며 전하십시다.

 

▶17절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독일의 마틴 루터가 천주교의 신부로서 사명을 갖고 로마에 갔을 때 그의 나이 30대의 꽃다운 나이였습니다.
그가 동료 신부들과 같이 '스칼라 상타'라는 계단을 무릎으로 올라가는 중이었습니다. 이 계단은 28층으로 되어있는데, 예수님이 빌라도에게 고난을 당하시면서 올라가신 계단인데, 주님이 부활하신 후에는 천사들이 로마로 옮겼다며, 누구든지 이 계단을 무릎으로 한번 오르내리면 15년 간의 죄가 용서를 받는다고 하는 터무니없는 조작전설이 카톨릭 안에 있습니다.
루터가 반쯤 올라갔을 때 평소에 읽고 은혜를 받았던 롬1:17절의 말씀이 캄캄한 밤중에 샛별처럼 그의 마음을 밝혀 주었습니다.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그는 즉시 헛된 고행을 중지하고 뛰어 내리고 말았습니다. 이것이 바로 천주교의 비 성경적인 점이구나 생각하고 95개조의 항의문을 만들어 단독으로 로마 교황청에 도전하여 마침내 종교개혁의 위대한 금자탑을 세웠습니다.
▶루터는 개혁 당시 95조항을 내세우고 3대 원칙을 전했습니다.
①사람이 구원받는 것은 율법을 지키거나, 선행이나 공로에 의해서가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피의 공로를 믿음으로만이 가능한 것입니다.
②성경만이 신앙의 행위의 표준이요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③신부에게 고해성사를 해서 죄 사함을 받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를 믿음으로 죄 사함을 받으며, 예수 그리스도 만이 우리의 구원자이십니다.

▶신, 구교의 차이점은?
①신교는 성경만을 신앙과 행위의 표준으로 삼습니다. 구교는 성경 뿐 아니라 교회 전통, 교황의 말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습니다. 교황이 신앙 문제나 행위 문제에 대해서 확정하는 것은 곧 하나님의 말씀으로 봅니다.
②신교는 예수 그리스도 만을 속죄 자로 믿습니다. 구교는 성모 마리아를 속죄 권능이 있다고 믿고 성자를 믿습니다.
③신교는 죽은 자는 천국과 지옥으로 간다고 믿으며, 구교는 연옥(중간 지점)을 믿습니다.
④신교는 성경 말씀과 교훈을 중심으로,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를 드립니다. 그러나 구교는 예배의식을 존중히 여기며 여러 사람이 만든 상 앞에서 기도를 드리며 미사를 중히 여깁니다. 미사는 성경에 없습니다.
⑤신교는 집사로부터 장로를 택할 때 투표를 합니다. 구교는 신부가 기관장을 세웁니다.
⑥천주교회를 한 국가로 봅니다. 교황청과 성 베드로 성당이 있는 바티칸은 전 세계에 있는 로마교회의 주권자인 동시에 바티칸 국의 왕국입니다. 교황청은 각 나라에 바티칸 국의 대사를 보냅니다. 그러나 영국과 미국은 바티칸을 한 나라로 인정하지 않고 한 교회로 인정합니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이 말씀은 16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하셨는데 그 이유는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헬라인들은 '의'란 인간의 타고난 특성으로 보았습니다. 그래서 발전시켜 나가야할 네 가지 덕목 즉 '지혜, 절제, 용기, 그리고 의 가운데 하나'로 보았습니다.
그리고 유대인들은 율법을 잘 지킴으로 의를 얻을 수 있다고 보았습니다. 당시 헬라인들이나 유대인들은 자기들의 의를 내세워 자기들의 의인임을 드러내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롬10;3절에서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를 복종치 않았다"고 이들의 문제를 지적했습니다. 그러면서 롬3:10절에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고 선언했습니다. 따라서 인간이 구원을 받으려면 인간의 의로는 불가능하고 오직 하나님의 의로만 가능하다고 천명했습니다.
그리고 바울은 복음에 나타난 하나님의 의는 오직 믿음으로만 받을 수 있다고 선언하면서 그는 오직 믿음으로만 살 것이라고 강조했습니다.

▶여기서 '의'는 언약 개념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헬라어 '디카이오쉬네'란 말로 이 말은 히브리어 '체덱'에서 왔습니다.
이 단어는 윤리적 개념이 아니라 '언약 개념'입니다. 즉 성경이 말씀하는 의는 도덕적 기준에서 흠이 없는 상태를 말하는 것이 아니고, 약속을 맺은 양자의 관계 속에서 자기의 의미와 책임을 다하는 것을 말합니다. 결국 성경에서 말하는 의는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판결이 나는 개념을 말하는 것입니다.
창17:7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셨습니다. "내가 내 언약을 나와 너와 네 대대 후손의 사시에 세워서 영원한 언약을 삼고 너와 네 후손의 하나님이 되리라" 이 약속을 지키시기 위해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복을 내리셨고, 저들이 죄를 범한 뒤에 회개하면 그들을 회복시켜주셨습니다.
이런 하나님의 구원 행위를 하나님의 의라고 여러 곳에서 말씀하고 있습니다(출9;27/삼상12:7 등). 결국 하나님의 의란 자신의 연약 백성에 대한 언약적인 신실하심을 말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의는 자주 '인자와 성실'이라는 말로 정의되기도 합니다(시98;2-3).
오직 이 의는 하나님을 믿을 때만이 덧입을 수가 있습니다. 그러면 의를 덧입는 믿음이란 무엇인가? 하나님의 약속을 철저하게 신뢰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다음 두 가지로 정리할 수 있는데, 첫째는 십자가상에서 나타난 구원의 약속을 믿는 것, 즉 십자가의 죽으심을 통해 우리의 죄를 용서하심과 우리와의 관계를 회복하신다는 사실을 믿어야 하고, 둘째는 약속을 지키며 사는 것을 말합니다.
그 옛날 노아가 120년 간 그 약속을 믿으며 방주를 짓는 삶을 살았던 것처럼, 하나님의 약속을 지키며 살아야 합니다. 즉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사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럼 의가 무엇인가? 구약에 계시되었던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사51;5절 "내 의가 가깝고 내 구원이 나갔은즉 내 팔이 만민을 심판하리니 섬들이 나를 앙망하여 내 팔에 의지하리라"
롬3;21-22절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여러분! 하나님의 의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의가 아니면 왜 인류구원이 불가능합니까? 그것은 인간 시조인 대표자 아담에게 명하신 행위계약을 파기했기 때문입니다.
창2;17절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이 행위계약을 인간 편에서 일방적으로 어기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축복관계에서 끊어지고 영적 죽음이 왔으며, 영과 육이 분리되는 죽음이 왔고, 영원히 버림받는 내세 지옥의 형벌인 둘째 사망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롬3;10절에서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행위 계약을 없앨 수가 없습니다. 왜? 하나님의 속성(공의의 하나님)은 변함이 없으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행위 계약을 어긴 죄 값으로 당하는 형벌은 변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행위 계약은 그대로 두시면서 인류에게 영생의 축복을 주시기 위해 다른 법을 세웠는데, 그것이 바로 죄 없는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셔서 인간의 불순종으로 인한 죄를 예수 그리스도께서 순종하심으로 우리의 모든 죄를 청산케 하시고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케 하사 하늘에 오르게 하시고 에덴동산보다 더 나은 하늘 낙원에 들어가는 길을 열어주시고 그것을 얻는 조건으로 믿기만 하면 인간의 첫 시조 아담이 범죄 하기 전 보다 더 나은 몸으로 부활시켜 영생을 약속해 주셨습니다.
이것을 가리켜 '은혜 계약'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영과 육을 구원해 주시기 위하여 하나님의 의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약속대로 인류에게 보내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누구를 막론하고 복음에 나타난 하나님의 의, 곧 예수를 믿어야 영원히 살 수 있습니다. /믿/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하나님의 의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영생 얻는 길은 오직 믿음 뿐이라고 강조하는 말입니다. 그리고 이 의는 차별이 없음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16절에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에게로다"라는 말씀은 하나님의 의가 차별이 없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첫째도, 둘째도, 셋째도 구원은 믿음으로만 가능하다는 말입니다. 바울은 이것을 가르치기 위해 구약 합2:4절의 말씀을 인용한 것입니다.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할/

바울은 이 말씀을 갈3;11절에서 "의인이 믿음으로 살리라"고 인용했습니다.
●이스라엘의 우화 가운데 '새들의 불평'이라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모든 동물의 창조를 끝냈을 때 새들이 불평하기 시작했습니다. 새들은 "짐승들에게는 무거운 짐을 안 주셨는데 왜 우리 새들에게만 짐을 지워서 이렇게 걷기도 힘들게 하십니까?"라고 투덜거리며 창조주에게 불평을 늘어놓았습니다.
그러나 잠시 후에 용기 있는 독수리가 먼저 어깨에 붙은 그 무거운 것을 움직여 보았습니다. 그랬더니 온몸이 갑자기 가벼워지면서 공중을 날 수가 있게 되었습니다. 물론 그 부착물은 짐이 아니라 하늘을 날 수 있는 은총의 선물인 날개였던 것입니다.
믿음은 바로 이런 것입니다. 믿음은 우리에게 큰짐으로 다가오는 것 같지만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짐으로 준 것이 아니라 우리를 더욱 하나님의 사람답게 살게 하기 위해서 주신 은총의 선물입니다.
▶바울 사도가 전도여행을 하던 중에 병이 생겨 갈라디아 지방에 가서 지내게 되었습니다. 그곳에서 지내는 동안에도 바울은 복음전파에 힘써 여러 곳에 교회까지 세우게 되었습니다. 그 후 그곳을 떠났는데 바울이 떠나가자 갈라디아 지방에 이상한 신앙을 가진 자들이 들어와 교인들을 미혹하였습니다. 갈라디아 교회를 미혹케 하는 자들은 두 부류의 사람들이었습니다.
하나는 유대주의적 기독교인들로서 그들은 예수를 믿는 것만으로는 구원을 얻을 수가 없고 반드시 할례를 받고 율법을 지켜야 된다고 설파했습니다. 그런가 하면 다른 부류의 사람들은 영지주의자들로서 예수를 믿으므로 영이 구원을 받았기 때문에 육적으로는 무슨 일을 하든지 아무 상관이 없다고 가르쳤습니다.
이 두 가지 거짓 사상이 갈라디아 교회를 어지럽히고 기독교 신앙을 변질시켜 바울이 전한 은혜의 복음은 다시금 유대교의 형식주의로 되돌아가거나 영과 육을 극단적으로 구분하는 이원론에 빠질 위험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이런 갈라디아 교회의 문제에 대한 바울은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살아야'한다고 가리켰습니다. 이 가르침은 오늘 저와 여러분들에게도 해당되는 말씀입니다. 이제 우리는 믿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왜? 구원의 능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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