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과 담배, 교회와 신앙
[‘금주. 금연’에 대한 지나친 강조는 도리어 우상화되어 있다: 한국교회는 십계명을 가볍게 여기면서 주초(酒草)문제는 신앙의 기준이 되는 양 절대시하려는 경향이 있다. 교회의 직분자가 십계명 가운데 어떤 계명을 어기는 행위는 대수롭지 않게 여기면서도, 주초를 가까이 하는 행위는 결코 용납하지 못하는 것이 우리의 실정이다. 우리는 주초문제 보다 이웃의 것을 탐내는 ‘탐심’이 훨씬 큰 죄임을 깨달아야 한다(10계명 중 열번째 계명)]
한국교회에서는 술과 담배, 즉 주초문제가 마치 신앙의 중요한 기준이라도 되는 것처럼 되어 있다. 이러한 경향은 성경의 직접적인 교훈에 근거하기보다 한국교회의 전통에 따른 것이다. 하지만 어떤 경우라 할지라도 전통은 전통일 뿐 그 이상이 되어서는 안된다. 따라서 교회 내에서 술과 담배가 정도를 넘는 구속력을 가질 필요가 없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셨을 때 어리석은 유대인들은 그가 먹고 마신다며 신랄하게 비난했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바, 예수님이 행하신 맨 처음 이적은 가나 혼인잔치에서 물을 포도주로 바꾼 사건이었다. 그 때 그가 포도주를 만드신 것은 이적을 보이고자 함과 동시에 잔치에 참석한 사람들에게 술을 공급하기 위해서였다. 포도주가 떨어진 것을 아신 예수님께서 술을 만들어 사람들이 즐거운 시간을 가지도록 배려하셨던 것이다.
기독교 초기의 성도들은 술을 금기시하지 않았다. 고린도전서 11장에는 사도 바울이 고린도 교회를 향해, ‘어떤 이는 시장하고 어떤 이는 취함이라 너희가 먹고 마실 집이 없느냐’(고전11:21, 22. 참조)며 책망하는 것을 볼 수 있다. 바울은 술을 마시는 문제 자체를 탓한 것이 아니라 부유한 자들의 미숙한 태도를 질책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듯이 성경은 술 자체를 죄로 규정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해서, 음주(飮酒)는 아무런 문제가 될 것이 없으니 마음대로 마셔도 좋다는 말은 아니다. 우리가 기억해야 할 바는 예수님께서 술을 죄의 기준으로 삼지 않으셨다는 사실이다. 담배에 대해서도 이와 동일한 관점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흡연이 건강에 해롭기 때문에 죄가 된다고 말하는 것은 지나친 생각이다. 만일 육식(肉食)은 건강에 해로우므로 고기를 먹는 것이 죄라고 주장한다면 어떻게 말할 것인가? 물론 건강을 해치는 음식을 억지로 취할 필요는 없다.
술을 마시고 담배를 피우는 까닭은 대개 그것이 세속적인 즐거움을 취하는 방편이 되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들과 술자리를 마련하는 것은 술을 매개로 하여 즐기며 사귐을 가지고자하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그러나 하나님을 경외하는 성숙한 성도들은 더 이상 그런 것을 매개로 하여 쾌락을 추구하지 않는다.
한국교회에서는 주초문제로 인해 신앙을 근본적으로 오해하는 경향이 있다. 술과 담배가 마치 경건의 기준이라도 되는 양 단정 짓는 것이 일반적인 분위기이다. 물론 성도라 하면서 술 담배를 즐기는 사람이 있다면 그를 성숙한 신앙인이라 할 수 없다.
나아가 주초를 가까이 하지 않지만 성경의 교훈에 민감하지 않는 자라면 올바른 신앙인이 아니다. 오히려 술과 담배를 입에 대지 않으면서 경건한척하며 말씀과 교회를 가볍게 여기는 자들이 있다면 저들이 훨씬 무서운 죄를 범하고 있는 것이다. 술과 담배에 상관없이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올바른 깨달음과 순종이 없다면 결코 성숙한 성도일 수는 없다.
그러므로 성경의 율법적인 이유로 주초가 금지되어야 하는 것이 아님을 깨닫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진정으로 성숙한 신앙인이라면 술을 마셔도 죄가 되지 않지만, 잘못된 신앙을 가진 자는 술과 담배를 가까이 하지 않아도 올바른 신앙인이 될 수 없다. 성숙한 성도는 그 의미를 분명하게 이해하고 있어야 한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성숙한 신앙이란 목사, 장로, 집사 등 교회의 직분이나 개인의 종교적인 경험과 열정이 기준이 될 수 없다. 이 말은 계시된 성경말씀을 좇아 하나님을 진정으로 경외하는 가운데, 이 세상이 아니라 오직 영원한 천국에 소망을 두고 살아가는 참된 성도를 의미한다.
술과 담배를 멀리하는 행위와 교인들의 의로움 사이에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타락한 세상을 탐하는 것이 무서운 죄라는 사실을 깨닫는 자세가 중요하다. 우리는 사도바울이 로마서에 기록한 음식에 관한 교훈을 기억한다: “식물(食物)을 인하여 하나님의 사업을 무너지게 말라 만물이 다 정하되 거리낌으로 먹는 사람에게는 악하니라. 고기도 먹지 아니하고 포도주도 마시지 아니하고 무엇이든지 네 형제로 거리끼게 하는 일을 아니함이 아름다우니라”(롬14:20,21).
[‘금주. 금연’에 대한 지나친 강조는 도리어 우상화되어 있다: 한국교회는 십계명을 가볍게 여기면서 주초(酒草)문제는 신앙의 기준이 되는 양 절대시하려는 경향이 있다. 교회의 직분자가 십계명 가운데 어떤 계명을 어기는 행위는 대수롭지 않게 여기면서도, 주초를 가까이 하는 행위는 결코 용납하지 못하는 것이 우리의 실정이다. 우리는 주초문제 보다 이웃의 것을 탐내는 ‘탐심’이 훨씬 큰 죄임을 깨달아야 한다(10계명 중 열번째 계명)]
한국교회에서는 술과 담배, 즉 주초문제가 마치 신앙의 중요한 기준이라도 되는 것처럼 되어 있다. 이러한 경향은 성경의 직접적인 교훈에 근거하기보다 한국교회의 전통에 따른 것이다. 하지만 어떤 경우라 할지라도 전통은 전통일 뿐 그 이상이 되어서는 안된다. 따라서 교회 내에서 술과 담배가 정도를 넘는 구속력을 가질 필요가 없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셨을 때 어리석은 유대인들은 그가 먹고 마신다며 신랄하게 비난했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바, 예수님이 행하신 맨 처음 이적은 가나 혼인잔치에서 물을 포도주로 바꾼 사건이었다. 그 때 그가 포도주를 만드신 것은 이적을 보이고자 함과 동시에 잔치에 참석한 사람들에게 술을 공급하기 위해서였다. 포도주가 떨어진 것을 아신 예수님께서 술을 만들어 사람들이 즐거운 시간을 가지도록 배려하셨던 것이다.
기독교 초기의 성도들은 술을 금기시하지 않았다. 고린도전서 11장에는 사도 바울이 고린도 교회를 향해, ‘어떤 이는 시장하고 어떤 이는 취함이라 너희가 먹고 마실 집이 없느냐’(고전11:21, 22. 참조)며 책망하는 것을 볼 수 있다. 바울은 술을 마시는 문제 자체를 탓한 것이 아니라 부유한 자들의 미숙한 태도를 질책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듯이 성경은 술 자체를 죄로 규정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해서, 음주(飮酒)는 아무런 문제가 될 것이 없으니 마음대로 마셔도 좋다는 말은 아니다. 우리가 기억해야 할 바는 예수님께서 술을 죄의 기준으로 삼지 않으셨다는 사실이다. 담배에 대해서도 이와 동일한 관점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흡연이 건강에 해롭기 때문에 죄가 된다고 말하는 것은 지나친 생각이다. 만일 육식(肉食)은 건강에 해로우므로 고기를 먹는 것이 죄라고 주장한다면 어떻게 말할 것인가? 물론 건강을 해치는 음식을 억지로 취할 필요는 없다.
술을 마시고 담배를 피우는 까닭은 대개 그것이 세속적인 즐거움을 취하는 방편이 되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들과 술자리를 마련하는 것은 술을 매개로 하여 즐기며 사귐을 가지고자하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그러나 하나님을 경외하는 성숙한 성도들은 더 이상 그런 것을 매개로 하여 쾌락을 추구하지 않는다.
한국교회에서는 주초문제로 인해 신앙을 근본적으로 오해하는 경향이 있다. 술과 담배가 마치 경건의 기준이라도 되는 양 단정 짓는 것이 일반적인 분위기이다. 물론 성도라 하면서 술 담배를 즐기는 사람이 있다면 그를 성숙한 신앙인이라 할 수 없다.
나아가 주초를 가까이 하지 않지만 성경의 교훈에 민감하지 않는 자라면 올바른 신앙인이 아니다. 오히려 술과 담배를 입에 대지 않으면서 경건한척하며 말씀과 교회를 가볍게 여기는 자들이 있다면 저들이 훨씬 무서운 죄를 범하고 있는 것이다. 술과 담배에 상관없이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올바른 깨달음과 순종이 없다면 결코 성숙한 성도일 수는 없다.
그러므로 성경의 율법적인 이유로 주초가 금지되어야 하는 것이 아님을 깨닫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진정으로 성숙한 신앙인이라면 술을 마셔도 죄가 되지 않지만, 잘못된 신앙을 가진 자는 술과 담배를 가까이 하지 않아도 올바른 신앙인이 될 수 없다. 성숙한 성도는 그 의미를 분명하게 이해하고 있어야 한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성숙한 신앙이란 목사, 장로, 집사 등 교회의 직분이나 개인의 종교적인 경험과 열정이 기준이 될 수 없다. 이 말은 계시된 성경말씀을 좇아 하나님을 진정으로 경외하는 가운데, 이 세상이 아니라 오직 영원한 천국에 소망을 두고 살아가는 참된 성도를 의미한다.
술과 담배를 멀리하는 행위와 교인들의 의로움 사이에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타락한 세상을 탐하는 것이 무서운 죄라는 사실을 깨닫는 자세가 중요하다. 우리는 사도바울이 로마서에 기록한 음식에 관한 교훈을 기억한다: “식물(食物)을 인하여 하나님의 사업을 무너지게 말라 만물이 다 정하되 거리낌으로 먹는 사람에게는 악하니라. 고기도 먹지 아니하고 포도주도 마시지 아니하고 무엇이든지 네 형제로 거리끼게 하는 일을 아니함이 아름다우니라”(롬14: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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