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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인의 값 ? 분명한 정체성 (롬 6:1-5,11)

by 【고동엽】 2022. 1. 27.

그리스도인의 값 ? 분명한 정체성 (롬 6:1-5,11)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
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라



어느 삼부자가 먹고 살기가 너무 어려워서 죽기로 마음을 먹었습니다. 그래서 높은 산에 올라가서 한참 아래 낭떠러지로 뛰어내렸습니다. 그런데 셋이 함께 뛰어 내렸는데 한 사람도 죽지 않고 살아났습니다. 왜냐하면 아버지는 제비족이었고 큰 아들은 비행 청소년이었고, 작은 아들은 덜 떨어진 놈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덜떨어졌다는 말은 덜 성숙하고 중심이 불분명하고 모자라다는 뜻입니다. 오늘은 덜 떨어진 사람들이 많습니다. 이것도 저것도 아닌 사람들, 생각도 태도도 분명치가 않은 사람들이 많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세상에 좋은 영향을 미치지 못할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은 세례 받으시는 분들도 있고 해서 말씀의 주제를 그리스도인의 분명한 정체성이라고 정했습니다. 여러분들 중에는 이미 세례를 받은 분들이 대부분일 것이고 오늘 세례받는 분들도 많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세례가 무엇입니까? 세례는 내 인생이 영적인생으로 전환되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고 세례는 오늘부터 내 인생의 소속이 완전히 하나님께로 귀속된다는 대내외적인 선언입니다. 이미 세례받은 분들은 이 점을 분명히 알았으면 합니다. 그리고 오늘 세례받는 분들은 이 의미를 분명하게 알고 세례를 받았으면 합니다. 그 말은 그동안 내가 신앙인으로서 좀 불분명했던 부분, 내 위치가 덜 떨어진 사람처럼 불분명한 내 신앙 자질이 꼭지가 똑 떨어지듯 분명해지는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말씀입니다.



정체성 혼란시대

오늘을 불확실성의 시대라고 합니다. 그 말은 오늘 이 시대는 확실한 것이 한 가지도 없다는 말입니다. 다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우리의 미래가 불확실하다”는 것 뿐입니다. 나머지는 모두 불확실합니다. 그래서 오늘을 가리켜 불확실성의 시대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은 한 가지 더 불분명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이 정체성이 모호하다는 것입니다. 이도 저도 아닌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누구냐” 하고 질문을 던지면 확실하게 대답하기가 어렵습니다.
외국에 일찍 이민을 간 청소년들은 모두 정체성의 혼란을 겪습니다. 외모는 동양인이고 한국인입니다. 그런데 말이나 생각이나 문화는 모두 외국인입니다. 외국에서 오랜시간 동안 자라왔기 때문입니다. 그때 이 청소년이 조금 성장하게 되면 정체성의 혼란을 겪게 됩니다. “나는 외국인인가? 한국인인가?”라는 고민에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부모들이 이 문제에 대해서 확고하게 “너는 한국인이다. 그러니 한국말을 해야 한다”고 어려서부터 한국말과 생각을 분명하게 가르쳐 준다면 아이가 성장해서도 정체성의 혼란이 적어질 것입니다. 그리고 “나는 한국인이다”라는 정체성을 가지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어느 부모는 한국말을 하면 영어 발음이 나빠진다고 해서 영어만 사용하게 하는 부모들도 있습니다. 그렇게 자라면 성장해서도 한국말을 전혀 못하게 됩니다. 그러면 그 아이가 어떤 현상에 내 몰리게 될까요. 그 아이가 자기 모습과 같은 한국 아이들 속으로 찾아갔는데 말이 통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따돌림을 받습니다. 그때 이 아이는 언어가 같은 미국 아이들 속으로 가게 됩니다. 그런데 그 아이들과 말은 통하는데 외모가 다릅니다. 그러니까 거기서도 따돌림을 받습니다. 그때 이 아이는 “나는 도대체 누구인가”라는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서 심각하게 고민을 가지게 될 것입니다.
오늘은 성(性) 정체성에 대해서 혼란을 겪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내 몸은 분명 남자인데 내 속에서는 자꾸 여성성이 꿈틀거리고 있습니다. 반대로 겉은 여자인데 내 속에서는 남성성이 꿈틀거리고 있습니다. 그러면 그는 “나는 여자인가? 남자인가?”라는 혼란을 겪게 될 것입니다. 그 혼란 속에서 힘들어 하다가 결단해서 성전환 수술을 받고 남자가 여자가 되고 여자가 남자가 되기도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인들도 정체성의 혼란을 겪을 수 있습니다. 내 신앙이나 내 신앙고백이 불분명하거나 확신이 없으면 똑같은 정체성의 혼란을 겪게 될 수 있습니다. 신앙인이 매주일 예배를 드린다면 나는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중심있는 고백을 분명하게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주일 예배를 자주 빠지고 어쩌다가 교회 나와 예배를 드리게 된다면 “나는 하나님의 백성이다” 라고 자신있게 고백하기가 어려질 것입니다. 이 불분명함 이것이 자신의 정체성을 흔들어 놓게 됩니다.
오늘 읽은 본문은 정체성의 혼란을 겪는 이 문제에 대해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도바울이 로마서에서 이 말씀을 할 당시에는 율법주의자들이 극성을 부리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에서 이미 죽으시고 부활하셨습니다. 우리 모두가 그 은혜로 구원받고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래서 이 시대는 은혜의 시대입니다. 율법시대는 지나가고 은혜로 구원받는 시대가 활짝 열렸습니다. 그런데 은혜시대가 왔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율법으로 할례를 받아야 한다고 강조하는 율법주의자들이 나타난 것입니다. 그들은 성도들의 신앙의 초점을 흐리게 만들었고 고민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성도들이 이 복음에 대해서 모호함을 느끼고 혼동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성도들은 “나는 은혜로 구원을 받았는데 다시 할례를 받아야 하는가?” 하고 혼란스러워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때 사도바울은 그 사람들을 향해 우리는 이미 예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을 통해 그의 부름을 받았고 구원받은 그리스도인들 임을 가르쳤습니다. 그럼에도 율법주의자들은 아직도 율법이 유효하기 때문에 할례를 받아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그래서 성도들이 “은혜인가? 율법인가?” 하고 대 혼란을 겪게 된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정체성 강조

사도바울은 로마서 5장에서 로마교회 성도들에게 그리스도인은 은혜로 구원받은 것이라는 명제를 분명하게 제시하고 있습니다. 5장 1절에서는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라고 말씀합니다. 그리고 2절에서는 “또한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니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고 말씀합니다. 그런데 지금 와서 할례를 받아야 한다는 말에 흔들리게 되면 이는 은혜가 아니라 행위로 구원받는다는 율법주의자들의 주장에 순종하는 일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구원은 율법으로 받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로 받는 것이라는 점을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믿고 따르는 사람이 그리스도인이라는 점도 사도바울은 분명히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그리스도인의 정체성 문제가 나옵니다. 그러면 은혜로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하면 정체성이 분명하게 살아야 한다는 점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세상에 무엇으로 내가 그리스도인이라는 것을 보여줄까 고민해야 합니다. 그 고민가운데 착한 행실이 열매가 되기도 해야 합니다. 그런데 그것만이 아닙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와 상관없는 사람들도 더 잘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은 내 정체성을 분명하게 확립하여 살아가야 합니다. 그것을 보여주며 살아야 합니다. 그런데 그 완전한 정체성이 무엇입니까. 그것이 “나는 하나님의 백성이다”라는 확신입니다. 이것을 분명히 하는 삶이 그리스도인의 삶입니다. 그러면 “나는 하나님의 백성이다”는 표시가 무엇입니까? 그것이 바로 세례라는 것입니다.



세례

그래서 사도바울은 3절에서 이 세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은 줄을 모르느냐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다.” 이 말씀은 “나는 하나님의 분명한 백성이다” 라는 점을 세상에 과시하는 방법이 바로 세례라는 것입니다.
세례는 두가지 기능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는 내가 죽고 다시 사는 뜻입니다. 세례란 내가 예수의 죽음과 예수의 부활과 연결되는 것입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세례를 받을 때 물에 완전히 잠기게 했습니다. 오늘날로 말하면 침례입니다. 침례는 내가 완전히 물에 잠기는 것입니다. 물에 내가 완전히 잠기는 것은 내가 완전히 죽는 것입니다. 이전의 옛사람이 사라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물로 다시 나오는 것은 죽었던 내가 예수로 말미암아 다시 태어난다는 부활을 의미합니다. 그 때에 나는 새 사람이고 예수와 연합된 사람이 됩니다. 그것을 가리켜 바울은 3절에서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라고 표현한 것입니다. 세례는 물에 완전히 잠기는 의식입니다. 완전히 물에 잠긴다는 의미는 “내가 이제부터 예수께 완전히 잠긴다”는 뜻입니다. 내가 예수께 잠긴다는 말은 내가 예수의 십자가 죽음에 잠긴다는 말이고, 내가 예수의 부활에 완전히 잠긴다는 말입니다. 이 의식을 갖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을 분명히 하는 것입니다.
여기 잠긴다는 말은 내가 예수 안에 완전히 잠겨서 나는 사라지고 예수의 체질로 재탄생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마치 녹슨 쇠붙이를 용광로 속에 넣으면 쇠붙이가 완전히 녹아서 새로 정화된 쇳물이 되어 나오는 것과 같은 의미입니다. 내가 세례를 받음으로 예수께 완전히 잠기게 된다는 것은 세례를 받을 때 내가 가지고 있던 모든 불순물들을 모두 다 빼내고 예수의 죽음과 부활만을 간직한 완전히 새로운 정체성을 지닌 새 생명으로 다시 태어나 나오게 된다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3-8절에서 연속으로 “예수와 함께”, “합하여”, “연합하여” 라는 말들을 8번이나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 말은 내가 예수와 함께 하나가 되었다는 의미를 강조하는 말입니다. 세례는 예수와 연합하고 합하여 하나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니까 세례는 내가 예수안에 깊숙이 빠져 예수와 하나가 된다는 말입니다.
오늘 세례받은 분들은 이 사실을 분명히 기억할 수 있었으면 합니다. 그리고 오늘 세례받는 분들은 이 의미를 새롭게 인식하기를 바랍니다. 이제 우리는 예수와 함께 죽고 다시 살아난 사람들입니다. 여기 죽는다는 말은 예수님처럼 똑같이 육체적으로 죽는 것이 아니고 우리가 세례받음으로 죄에 대해서 죽는 것을 말합니다. 6절에서는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의 옛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죽어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노릇하지 아니하려 함이라”고 말씀합니다. 이는 내가 세례를 받고 난 다음에 더 이상 죄가 나를 지배하지 못하도록 내 인생이 변화받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고 이제부터 하나님에 대해서 전혀 다른 차원의 인생으로 살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그것이 우리의 정체성입니다. 그때부터 하나님은 죄에 대해서는 죽고 하나님에 대해서는 날마다 살아나도록 나를 도우시는 것입니다.
또 하나 세례는 나 자신을 향해 그리고 이 세상을 향해 선포하는 예식입니다. “나는 이제부터 하나님의 세계에 들어갑니다.” “이제부터 나는 하나님 편에 소속됩니다.” 즉, “나는 이제부터 내 영혼, 내 인생, 내 미래를 모두 하나님께 위탁하는 삶을 살아갈 것입니다”라고 선포하는 것입니다. 또 “나는 이제부터 하나님의 사람입니다” 라고 선포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3장을 보면 이렇게 새로운 삶을 시작하는 것을 “거듭남”(1-15)이라고 표현합니다.



세례 후의 삶

“내가 오늘 세례를 받는다” 라는 말은 나의 삶이 오늘부터 달라진 삶을 살아가겠다는 의지의 표현이 나타나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제부터 하나님에 대해서 다른 차원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의 또 다른 정체성이기도 합니다. 미국에 이민을 가면 몸은 한국인이지만 속은 미국인이 됩니다. 이렇게 되면 정체성의 혼란 때문에 고민이 길어지게 됩니다. 그 때는 내가 미국인이 되든지 한국인이 되든지 빨리 결정을 해야 합니다. 그래야 내 삶이 분명하게 표현된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말만 그리스도인인 상태에 오래 머물게 되면 정체성에 대해서 고민이 길어지게 되고 모호한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그 때는 빨리 결정할수록 좋습니다. 그 결정이 세례받는 일니다. 내가 세례를 받는다는 것은 이미 나는 하나님에게 속한다는 결단이 세워졌다는 말입니다. 세례는 이미 전에 내 마음이 결단하고 다짐되었다는 표시이고 선언입니다. 고로 내가 오늘 세례받음은 내 인생은 이제부터 하나님의 품속에 깊숙이 들어가 하나님을 의존하는 하나님의 사람이 되겠다는 의지의 표현입니다. 이 지점에서 비로서 안정과 평화와 일치를 이루는 은혜를 입게 되고 내 정체성이 분명해지는 은혜도 얻게 되는 것입니다. 그때 나는 비로서 성령께서 내 삶을 인도하고 도우시며 이끄시는 삶을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결혼을 몇일 앞둔 사람들은 대부분 마지막 갈등을 겪게 됩니다. ‘이 사람하고 결혼하면 정말 행복할까, 아닐까?’ 하는 고민입니다. 그 고민은 결혼식 전날까지 계속 됩니다. 그러다가 결혼식을 올리게 되면 그 갈등은 사라지게 됩니다. 왜냐하면 결혼식과 동시에 내 소속이 분명해졌기 때문입니다. 갈까 말까 망설일 때가 갈등이 가장 심할 때입니다. 이 집을 살까 말까 할 때가 갈등이 심할 때입니다. 그때 빨리 결단을 내리면 마음이 평안해집니다. 세례는 그런 의미가 있습니다. 내가 세례를 받습니다. 이는 내 마음에 “이제 나는 하나님의 사람이된다” 라는 결단을 내렸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세례는 고백이고 선포이고 내 정체성을 분명히 하는 예식입니다. 오늘 이 시간 여러분은 스스로를 향해서 질문해 보십시오. “나는 과연 지금 하나님의 사람으로 그리고 자녀로 또한 백성으로 살아가고 있는가?,” 또 오늘 세례 받는 분들은 “나는 오늘부터 분명히 하나님께 소속한다”라는 정체성을 분명히 해 보십시요. 덜 떨어진 사람처럼 어중간하고 불투명하고 불확실한 삶을 살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복을 받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값이 없기 때문입니다.
인삼이 왜 귀하고 비쌉니까? 그것은 값이 있기 때문입니다. 인삼은 스스로 탁월한 효능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래서 인삼입니다. 그러면 인삼은 심은지 얼마 후에 캐야 최고의 효능을 가진 안삼입니까. 인삼은 심은지 6년째 되었을 때 캐야 합니다. 그 인삼을 6년근이라고 해서 최고의 값을 인정받습니다. 그렇다면 산삼은 언제 캐야 최고의 값을 인정받습니까. 산삼은 보는 즉시 캐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 값이 너무 크기 때문에 그냥 놔두면 다른 사람이 금방 캐 갑니다. 그만큼 스스로가 값을 지니고 있기 때문입니다. 값을 지니고 있다는 말은 이렇게 소중한 일입니다. 산삼의 정체성은 이 탁월한 효능입니다. 그러면 그리스도인의 값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그리스도인으로서 분명한 정체성을 지키며 살아가는 일입니다. 값을 유지하고 나는 하나님의 자녀라는 중심을 지키고 살아가는 삶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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