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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는 쓰레기 위에서도 노래한다! (행 16;22-25)

by 【고동엽】 2022. 1. 25.

새는 쓰레기 위에서도 노래한다! (행 16;22-25)

 

양평에서 목사님들 회의가 있었습니다. 회의를 마치고 유황 온천 목욕탕에 들렀습니다. 따뜻한 물속에 몸을 담그고 나니 기분이 좋았습니다. 그래서 나 혼자 흠잉으로 찬송가를 불렀습니다.

 

<나같은 죄인 살리신 주 은혜 고마워.....>

 

한 사람이 내 옆으로 오더니 살며시 물었습니다.

<교회 다니시나요?>

<목사입니다.> <그렇지요? 가만히 들어 보니 찬송가라 너무 좋았습니다. 나도 교회에 다닙니다.> 우리는 반갑게 인사를 나누었습니다. 기분좋게 목욕을 마쳤습니다. 그리고 음식점으로 와서 식사를 하는 데 그 사람이 들어 왔습니다. 식사를 마치고 계산하려고 하니까 그 분이 내고 나갔다는 것입니다. 알지도 못 하는 분이었습니다.

 

그리고 더욱 기분이 좋아서 숙소로 오는 데 쓰레기 더미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위에 새 한 마리가 앉아서 노래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 설교가 작성되었습니다.

 

<새는 쓰레기 위에서도 노래한다.>

 

얼마나 보기 좋았는 지 영감이 스쳐 지나갔습니다. 그 때 성경에 있는 믿음의 사람들은 쓰레기 위에서도 노래를 하는 사람들임을 알았습니다.

욥이 그렇습니다.

재산을 다 빼앗겼습니다. 자녀 10명이 한꺼번에 다 죽었습니다. 그리고 머리에서부터 발끝까지 악창이 났습니다. 그래서 잿더미에 앉아서 기와로 가려운 곳을 북북 긁고 있었습니다. 그 때 아내가 말했습니다.

 

<당신이 그래도 자기의 순전을 굳게 지키느뇨 하나님을 욕하고 죽으라>(욥 2;9)

 

그 때 욥은 잿더미에 앉아서 하나님을 찬양하였습니다.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대의 말이 어리석은 여자 중 하나의 말 같도다. 우리가 하나님께 복을 받았은즉 재앙도 받지 아니하겠느뇨>(욥 2;10)

 

잿더미에서 노래한 욥은 진실로 의인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은 노래할 수 없는 곳에서 노래한 바울 이야기입니다.

 

바울과 실라는 빌립보에서 전도하고 있었습니다. 귀신이 들려 귀신같이 점을 잘 치는 여자가 있었습니다. 그 여자를 데리고 있는 주인은 그 여자 때문에 엄청난 돈을 벌고 있었습니다. 재주부리는 곰을 가지고 돈을 버는 써커스 주인같이 수입원이 이 여자였습니다. 바울이 보니까 귀신에 사로잡혀 사는 생활이 너무나 비참하게 보였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외쳤습니다.

<내가 예수 이름으로 네게 명하노니 그에게서 나오라.>

귀신이 즉시 나왔습니다. 주인은 이제 더 이상 그 여자 때문에 돈을 벌 수가 없었습니다. 화가 나서 바울과 실라를 잡아 끌고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시장으로 갔습니다. 수많은 사람들 앞에서 외쳤습니다.

<이 자들은 우리가 믿는 로마 신을 섬기지 않고 다른 신을 섬긴다. 그리고 이상한 신을 전도한다.>

이 말을 들은 사람들이 벌떼처럼 모여 들었습니다. 그리고 무리가 일제히 일어나 옷을 찢고 몽둥이로 사정없이 쳤습니다. 그리고 깊은 감옥에 가두었습니다. 그리고 단단히 지키라고 명령하였습니다. 발에 착고도 단단히 채웠습니다..

깜깜한 밤이었습니다.

바울과 실라는 기도하고 찬송하였습니다. 하고 싶어서 한 것이 아니라 자율신경이 발동한 것입니다.

이 때 홀연히 지진이 일어났습니다. 옥터가 떨리기 시작하였습니다. 옥문이 열렸습니다. 착고가 저절로 풀어졌습니다. 간수가 자다가 보니 옥문이 열렸습니다. 틀림없이 죄수는 도망갔을 것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죄수를 놓친 간수는 사형입니다. 사형당할 것이 두려워 자살하려고 칼을 배에 댔습니다.

바울이 감옥에서 이런 모습을 보고 크게 소리를 질렀습니다.

<네 몸을 상하지 말라 우리가 다 여기 있노라.>

간수는 놀랐습니다. 지진, 저절로 그 든든한 문이 열린 것, 누구도 풀어주지 않으면 풀 수 없는 착고가 저절러 풀어진 것, 도망갈 수 있는 환경인 데 도망가지 않은 것등 모두가 놀랄 것뿐이었습니다.

간수는 벌벌 떨면서 바울앞에 가서 엎드리고 물었습니다.

<선생들아. 내가 어떻게 하여야 구원을 얻으리이까?>

바울이 말했습니다.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

사도행전 중심 말씀입니다.

간수는 바울과 실라를 자기 집으로 데리고 갔습니다. 그리고 음식을 차려 주었습니다. 바울이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결론적인 마지막 말씀입니다.

<저와 온 집이 하나님을 믿었으므로 크게 기뻐하니라.>

 

바울은 노래를 통하여 놀라운 역사를 창조하였습니다. 바울의 감옥 노래는 쓰레기 위에서 노래한 새들과 같은 노래입니다.

바울은 도저히 노래할 수 없을 때 노래하였습니다. 이 노래가 옥토에 지진을 주고 옥문이 열리게 하였습니다.

 

몇 년전에 이태리 관광을 할 때였습니다. 이태리에는 성악을 공부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성악 유학생들이 아르바이트로 가이드를 하는 것이었습니다. 목소리가 특이하였습니다. 그래서 우리 모두는 박수를 치면서 외쳤습니다.

<노래 한 곡 들려 주세요.> 그가 정색을 하고 말했습니다.

<나는 세 가지 조건이 없으면 노래를 하지 않습니다. 청중이 3000명이 넘어야 합니다. 돈을 주어야 합니다. 피아노가 있어야 합니다. 이 세가지중 하나만 없어도 안 합니다.> 찬 바람나게 말했습니다.

두 번 다시 말을 붙일 수 없었습니다.

이 분은 조건이 되어야 노래하지만 바울은 도저히 노래할 수 없는 상황에서 노래하였습니다.

 

바울은 지금 깊은 감옥에 갖혀 있습니다. 발을 차꼬에 꼭 묶어서 꼼짝 못 하게 하고 감옥에 넣었습니다.

아무리 죄수라도 감옥에 넣을 때에는 소위 쇠고랑을 벗기는 법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꽁꽁 묶어서 감옥에 넣었습니다.

앞으로 어떻게 될 지 막막할 때 바울은 노래하였습니다.

길이 없어 암담할 때 노래하면 하나님이 길을 열어 주십니다.

바울을 보면 우리가 노래하여야 할 이유가 분명합니다. 바울이 밤중에 감옥에서 그렇게 많이 맞고도 노래를 부른 것은 그만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이었을 가요?

 

1. 노래는 우리 인간의 존재목적이기 때문입니다.

무슨 물건이나 무슨 도구든지 만든 목적이 있습니다. 자동차는 달리라고 만든 것입니다. 시계는 시간을 가르쳐 주라고 만들었습니다. 종을 종소리를 내라고 만들었습니다. 다 목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사람을 왜 만드신 것일가요? 이사야는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신 목적을 너무나 분명하게 말해 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찬송하라고 사람을 창조하셨습니다.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의 찬송을 부르게 하려 함이니라>(사 43;21)

 

하나님을 찬송하라고 사람을 만들었기에 우리는 늘 창조목적에 맞게 찬송을 불러야 합니다. 하나님은 찬송을 받으시기를 기뻐하시는 분이십니다.

나는 찬송에 대하여 잊을 수 없는 기억이 있습니다. 지금은 돌아가신 김 삼손 장로님이 보훈 병원에 입원중이었습니다. 면회를 갔습니다. 6인 병실이었습니다. 환자들이 침대에 누워 있고 면회 온 이들이 여기 저기 많았습니다. 나는 우선 주변 사람들에게 찬송을 부르며 예배를 드리고 싶으니 잠시 동안만 양해하여 달라고 정중하게 요구하였습니다. 모두가 허락하였습니다. 나는 김 장로님에게 물었습니다.

<무슨 찬송을 하나님께 드리고 싶어요?>

김 장로님이 대답하였습니다.

<참 아름다워라를 불러 주세요.>

나는 당황하였습니다. 병실에서 지금 고통 중에 있는 환자들앞에서 <참 아름다워라>라고 찬송을 부른다는 것이 맞지 않는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나는 다시 물었습니다.

<장로님! 왜 하필이면 참 아름다워라를 부릅니까? 다른 찬송가를 고르세요.>

그 때 장로님이 말했습니다.

<목사님! 병실에 누워 있으니까 하나님이 창조하신 밖에 자연이 보고 싶어서 이 찬송을 부르면 마음이 시원하여질 것같아서예요. 거냥 불러 주세요.>

그래서 우리는 모두 참 아름 다워라를 불렀습니다. 나는 크게 부르지 못 하고 조그만 소리로 불렀습니다. 킥킥거리려고 웃음을 머금은 집사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지금 생각하여 보니 일리가 있는 이야기였습니다. 너무 답답하여 자연을 보고 싶고 하나님의 아름다운 창조물을 상상하고 싶어하는 장로님의 심정을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것같았습니다.

주변 사람들이 병실에서 저런 찬송을 부르는 교인들 처음 보았다고 욕할지라도 분명한 것이 있습니다. 찬송은 하나님 들으시라고 부르는 것이 사람들으라고 부르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찬송을 부를 때 하나님만 영광 받으시면 그만입니다. 사람들은 비웃어도 하나님이 기뻐하시면 만족하여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찬송을 불러 달라고 창조하셨기에 우리는 늘 하나님을 위하여 찬송을 불러 드려야 합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아예 밤낮 찬송만 부르며 먹고 사는 사람을 임명하고 그들은 일과가 아예 찬송이었습니다. 그래서 성전에서는 찬송소리가 늘 끊어지지 않았습니다. 너무나 하나님의 마음을 잘 아는 이들이었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었습니다. 하나님의 명령을 어겼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지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을 찬송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시편기자는 찬송을 회복하라고 말해주고 있습니다.

 

<성도들은 영광 중에 즐거워하며 저희 침상에서 기쁨으로 노래할지어다>(시149;5)

 

찬송을 회복하는 것이 신앙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찬송을 찾는 것이 믿음을 찾는 것입니다. 찬송을 입술에 담는 것이 하나님을 마음에 모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찬송을 부르라고 창조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새벽마다 저녁마다 서서 하나님을 찬송하였습니다. 아침 저녁 늘 찬송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일과는 찬송으로 시작하여 찬송으로 끝났습니다. 이들은 늘 악기를 사용하여 마음껏 즐겁게 하나님을 찬송하였습니다.

 

<새벽과 저녁마다 서서 여호와께 축사하며 찬송하며 또 안식일과 초하루와 절기에 모든 번제를 여호와께 드리되 그 명하신 규례의 정한 수효대로 항상 여호와 앞에 드리며 또 회막의 직무와 성소의 직무와 그 형제 아론 자손의 직무를 지켜 여호와의 전에서 수종드는 것이더라>(대상 23;30-32)

 

찬송만 부르는 것도 제사라고 히브리서 기자는 우리에게 전하여 주고 있습니다.

 

<이러므로 우리가 예수로 말미암아 항상 찬미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리자. 이는 그 이름을 증거하는 입술의 열매니라>(히13;15)

 

하나님은 우리 인간 피조물은 하나님을 노래하라고 창조하셨습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늘 하나님을 노래하여야 합니다. 하나님을 노래하는 것이 바로 찬송입니다.

바울은 노래하였습니다.

 

2. 기도보다 노래가 더 영적으로 좋은 자산이기 때문입니다.

본문은 이렇게 말해주고 있습니다.

 

<한 밤중에 바울과 실라가 기도하고 하나님을 찬송하매 죄수들이 듣더라>(24)

 

처음에 바울과 실라는 기도하였습니다. 그리고 나중에 찬송을 불렀습니다. 가관이었을 것입니다. 죄수들이 다 들을 정도였습니다.

미친 사람이라고 그랬을 것입니다.

기도하고 찬송을 불렀습니다.

기도 단계 위에 노래를 부르는 단계가 하나 더 있음을 알려 주고 있습니다. 노래는 능력입니다. 기도보다 더 큰 능력입니다.

찬송은 능력입니다. 찬송을 부르면 하나님이 기뻐하시기에 하나님이 능력을 주십니다. 그래서 활기찬 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야고보 사도는 우리에게 이렇게 말해주고 있습니다.

 

<너희 중에 고난당하는 자가 있느냐 저는 기도할 것이요 즐거워하는 자가 있느냐 저는 찬송할지니라. 너희 중에 병든 자가 있느냐 저는 교회의 장로들을 청할 것이요 그들은 주의 이름으로 기름을 바르며 위하여 기도할지니라.

믿음의 기도는 병든 자를 구원하리니 주께서 저를 일으키시리라 혹시 죄를 범하였을지라도 사하심을 얻으리라. 이러므로 너희 죄를 서로 고하며 병 낫기를 위하여 서로 기도하라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많으니라.

엘리야는 우리와 성정이 같은 사람이로되 저가 비 오지 않기를 간절히 기도한즉 삼 년 육 개월 동안 땅에 비가 아니 오고 다시 기도한즉 하늘이 비를 주고 땅이 열매를 내었느니라>(약5;13-18)

 

고난 중에 찬송을 부르면 하나님께서 비를 오게도 그치게도 하여 주시겠다고 하셨습니다. 찬송은 능력입니다.

바울과 실라 이야기는 이를 우리에게 보여 주고 있습니다. 노래를 부를 때에 지진이 일어났습니다,

저절로 그 든든한 문이 열린 것, 누구도 풀어주지 않으면 풀 수 없는 착고가 저절러 풀어졌습니다.

노래는 능력입니다.

사울이 악신에 걸려 병들었습니다. 의사들이 와서 약을 지어 주니까 병에서 나은 것이 아닙니다. 다윗이 사울 앞에서 수금을 타면서 찬송을 불렀더니 악

신이 떠나고 사울의 병은 상쾌하게 나았습니다(삼상16;23)

 

어느 분이 입신하여 마귀 나라에 가보았습니다. 마귀가 믿는 성도들로부터 빼앗은 전리품들이 진열되어 있었습니다. 그는 마귀에게 물었습니다.

<이 중에 가장 귀한 것이 무엇입니까?>

마귀가 대답하였습니다.

<이것입니다.>

마귀가 가리키는 물건은 다윗왕이 사용하던 수금이었습니다. 사울왕이 아플 때 낫게 하려고 찬양할 때 사용하던 비파였습니다. 가장 능력있는 악기라고 하였습니다. 자기들이 성도들에게 빼앗은 전리품중에 가장 귀한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마귀는 성도들에게 찬양을 빼앗으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습니다.

이런 환상을 본 이가 바로 미국의 포도원 교회를 세운 쟌 윔블 목사님입니다. 나는 그가 인도하는 예배에 참석하여 보았습니다. 티샤스를 입고 강대상에 올라가 찬양을 두 세시간 계속 불렀습니다. 그리고 기도하고 찬송하고, 찬송하고 기도하는 것을 반복하는 것이 예배였습니다.

노래는 능력입니다.

기도보다 능력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노래를 불렀습니다.

 

성 프란시스에게도 이런 이야기가 들려 오고 있습니다.

프란시스가 구원의 체험을 하고 얼마 되지 않아서 겪은 이야기입니다. 어느 날 그는 길을 가다가 우연히 문둥병 환자를 만났습니다. 순간적으로 마음에서 갈등이 일어났습니다.

마음 한 쪽에서는 말합니다.

<그에게 다가가서 기도하여 주어라.> 그러나 다른 한 쪽에서는 말합니다.

<문둥 환자에게서 병이 전염되면 어떻게 하려고 하느냐? 모르는 척하고 가거라.> 그는 잠시 갈등하다가 결국 두려운 마음이 이겨서 문둥 환자를 그냥 지나쳐 가버렸습니다.

조금 걷다가 그는 마음이 께름직하여 물었습니다.

<주님. 제가 문병 환자를 그냥 지나쳤습니다. 그것이 잘못입니까?>

주님이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왜 그냥 지나쳤느냐?>

그는 솔직하게 대답하였습니다.

<그에게서 문둥병이 옮겨질가 두려웠습니다.>

이 때 주님의 음성이 또 들렸습니다.

<너는 그 더러운 나환자보다 더 깨끗하냐? 너는 전에 그 문둥병자보다 더 더러운 죄인이었다. 그런데 나는 그런 너의 모습을 그대로 받아주고 사랑했단다.>

그 순간 프란시스는 문둥병자보다 더 추하고 더러운 죄인이었던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는자기에게 주님이 찾아오셔서 사랑으로 받아주셨다는 사실을 다시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뒤돌아 섰습니다. 문둥병자가 있는 그 곳으로 달려 갔습니다. 그에게 입을 맞추었습니다. 그리고 축복기도를 하여 주었습니다.

다시금 나환자에게 돌아가서 그에게 입을 맞춘 다음에 기도하며 찬양하며 축복을 해주었습니다. 그 후 성 프란시스는 마지막 숨을 거둘 때까지 끊임없는 사랑의 순례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마지막 죽는 순간에 말했습니다.

<나의 사랑, 나의 전부이신 예수님이시여!> 그리고 하나님에게로 갔습니다.

노래는 능력입니다.

기도보다 능력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노래를 불렀습니다.

 

3. 노래는 마지막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노래는 해결책이 없을 때 마지막 방법입니다. 기도하고 노래를 불렀습니다.

하다가 하다가 안 되면 마지막으로 안 되면 사용하는 방법이 노래였습니다. 노래후에 사용한 방법이 없었습니다.

바울은 지금 발이 묶여 있습니다. 간 밤에 일어날 수 없을 정도로 맞았습니다. 깊은 옥입니다. 인간의 힘으로는 도저히 어쩔 수가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이 때 바울이 마지막으로 하나님께 간구한 방법이 노래였습니다.

하나님은 옥문을 열어 주셨습니다.

 

역대하 20장에 여호사밧 왕의 전쟁사는 노래로 이긴 전쟁으로 인류 역사에 오래 오래 남아 있을 것입니다.

그 이야기는 다음과 같습니다.

암몬 자손과 모압과 세일산 사람들이 하나가 되어 이스라엘을 쳐들어 왔습니다. 연합군이었습니다. 도저히 이길 수가 없었습니다. 이 때 여호사밧 왕은 마지막 방법으로 노래를 불렀습니다.

여호사밧 왕이 외쳤습니다.

 

<이에 백성들이 일찌기 일어나서 드고아 들로 나가니라 나갈 때에 여호사밧이 서서 가로되 유다와 예루살렘 거민들아 내 말을 들을지어다. 너희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를 신뢰하라 그리하면 견고히 서리라 그 선지자를 신뢰하라 그리하면 형통하리라>(대하 20;20)

 

그리고 찬양대를 앞에 세웠습니다. 그리고 노래하게 하였습니다. 성경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백성으로 더불어 의논하고 노래하는 자를 택하여 거룩한 예복을 입히고 군대 앞에서 행하며 여호와를 찬송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께 감사하세 그 자비하심이 영원하도다 하게 하였더니

그 노래와 찬송이 시작될 때에 여호와께서 복병을 두어 유다를 치러 온 암몬 자손과 모압과 세일산 사람을 치게 하시므로 저희가 패하였으니>(대하 20;22-23)

노래로 이긴 전쟁입니다.

하나님께 찬양하며 노래하는 것은 하나님께 간구하는 마지막 수단입니다.

 

불쌍한 창녀 이야기입니다.

가정이 어려워서 몸을 팔아 생계를 유지하던 창녀가 스트레스에 시달리다가 간암에 걸렸습니다. 복수가 차서 남산 만하게 되었습니다. 이제는 백약이 무효였습니다. 어떤 전문 의사도 고치지 못 하는 불치병으로 기울고 있었습니다. 이제는 포기상태였습니다. 목사님이 마지막 심방을 갔습니다.

그리고 영혼만이라고 구원시키려고 예수님 영접을 권유하였습니다. 창녀가 말했습니다.

<나같은 죄인도 예수님이 받아 주시나요?>

목사님이 말했습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예수님 십자가 옆에서 죽은 강도도 죽기 직전에 예수님을 영접하고 천국에 갔답니다.> 창녀는 눈물을 주르륵 흘리면서 말했습니다.

<나 예수님 믿겠습니다.> 목사님과 심방 대원들은 창년에 불룩한 배위에 손을 얹었습니다. 그리고 찬송을 불렀습니다.

 

<나같은 죄인 살리신 주 은혜 고마워.....>

 

모두가 눈물 바다였습니다. 그 때 갑자기 복수가 터졌습니다. 피가 천정까지 튀었습니다. 벽이 온통 피투성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때부터 창녀는 서서히 낫기 시작하였습니다. 결국 고침받았습니다.

노래는 문제 해결에 마지막 수단입니다.

바울과 실라도 온통 앞 뒤가 막혀 있는 상황에서 기도하고 노래하였습니다. 하나님이 해결시켜 주셨습니다.

문제가 가로막혀 있나요?

노래 부르세요.

하나님을 향한 노래는 능력입니다. 마지막 수단입니다.

 

지난 주간 김 이걸 목사님이 카자크스탄에서 와서 우리 교회를 찾아 왔습니다. 몇 년전에 카자크스탄 가라간다에 가서 성막 쎄미나를 한 적이 있습니다. 쏘련 목사님들이 1000 여명, 평신도들이 4000여명 참석한 대단한 집회였습니다.

내 성막 교과서를 완역하여 출판하여 첫 쎄미나였습니다. 그런데 요즈음에 문제가 생겼습니다. 그 곳에 회교도들이 기독교가 그렇게 번성하는 것을 보고 위기 의식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김 이걸 목사를 간첩으로 몰았습니다. 그리고 5천명 들어가는 교회를 짓기 위하여 아내 아리엘의 은행 구좌에 돈을 세계 각국에서 보내 주었는 데 공금 횡령으로 몰아서 재판중에 있다는 것입니다.

목사님이 강대상에서 설교 도중에 말했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인간적인 배경이 없습니다. 돈도 없습니다. 해결할 길도 없습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이 하나가 있습니다. 기도뿐입니다. 40일 금식기도할 사람들은 시작하십시다.>

그리고 제안을 하였습니다. 270명이 40일 금식기도를 하였습니다. 금식하며 기도하며 찬양하였습니다.

그리고 나서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그들을 괴롭히던 6명이 원인도 모르게 죽어 버렸습니다. 아무도 원인을 알 수가 없습니다. 나는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서 아마도 역사상 270명이 같이 40일 금식기도를 드린 것은 처음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새는 쓰레기 위에서도 노래합니다.

우리는 아픔속에서도 노래하여야 합니다. 기도와 찬양은 마지막 방법입니다.

 

그렇습니다.

새는 쓰레기 위에서도 노래합니다. 우리는 바울과 실라처럼 노래하면 하나님이 함께 하여 주십니다.

왜 노래하여야 할가요?

1. 하나님을 노래하라고 하나님이 우리를 창조하셨기 때문입니다.

2. 노래는 기도보다 더 능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3. 노래는 문제 해결의 마지막 수단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이야기 하나 드리고 마치렵니다.

어느 목사님에게 사업하는 사람이 부탁하였습니다.

<믿음 좋고 착실한 여자 사무원 하나 구해 주세요.>

<급료는요?>

<월 300만원입니다.> 목사님은 너무 좋은 자리라고 생각되었습니다. 머리를 빨리 스치고 지나가는 믿음 좋은 처녀가 있었습니다. 가정도 어려운 데 조그만 직장에서 혹사당하면서 월급 100만원 받고 있는 믿음좋은 처녀였습니다. 그래서 주일 예배를 마치고 불러서 말했습니다. 그 처녀가 말했습니다.

<목사님! 저 고맙지만 안 가겠습니다.> <왜?>

<저는 지금 직장을 다니는 이유가 그 직장인들에게 모두 전도하려고 다니고 있습니다. 거의 다 되었습니다. 안 좋은 직장이지만 즐기고 있어요.> 쓰레기 위에서도 노래하는 새같은 처녀였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사람들에게 크신 축복으로 보상하실 것입니다.

출처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글쓴이 : 덕유산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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