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은 시작을 무시한다! (마 21;28-32)
어느 집에 손님이 왔습니다. 어머니가 열심히 식사 준비를 시작하였습니다. 모두가 감동을 받았습니다. 같이 먹게 되었습니다. 엄마가 6살 된 아들에게 말했습니다.
<오늘은 네가 기도하렴.> 아들이 말했습니다.
<어떻게 기도해?>
엄마가 말했습니다.
<엄마가 평소에 기도하던 대로 해.> 아들이 기도를 시작하였습니다.
<하나님! 우리 집은 왜 귀찮은 손님이 자꾸만 오는 것일가요?>
시작이 좋았으나 끝이 안 좋았습니다. 그 모임은 이런 기도 하나로 분위기가 이상해지고 말았습니다.
끝은 시작을 무시합니다.
벌써 마지막 주일이 되었습니다.
오늘의 본문은 마지막 주일을 당한 우리에게 큰 교훈을 주고 있습니다.
어느 포도원 주인 아버지에게 두 아들이 있었습니다. 포도가 무르익고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은 포도가 익는 때가 되면 갑자기 폭풍우가 닥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래서 포도가 익으면 곧 따야 합니다. 그래서 두 아들에게 말했습니다.
<얘 오늘 포도원에 가서 일하라.>
<오늘> 당장 가서 포도원에 가서 일하라고 명하였습니다. 긴박성이 엿보이고 있습니다.
맏 아들은 간다고 하더니 결론은 안 갔고, 둘째 아들은 안 간다고 하더니 결론은 가서 일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처음부터 끝까지 모두 기쁘게만 하는 완전한 사람은 이 세상에 아무도 없습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의 마음을 상하지 않게 하고 일생을 지낸 이는 한 명도 없었습니다.
모세도 바울도 베드로도 다 하나님을 아프게 할 때도 있었습니다.
맏아들은 긍정하다가 결론은 부정이었고, 둘째 아들은 부정하다가 결론은 긍정이었습니다.
끝이 좋으니까 시작이 나빠도 문제가 없습니다.
끝이 안 좋으니까 시작이 좋아도 문제가 됩니다.
맏아들은 어떤 사람입니까?
맏아들은 알고 있으나 행함은 없는 사람입니다. 다 알고 있는 데 행할 줄 모르는 사람입니다.
맏아들은 말에 책임을 지지 않는 사람입니다. 편리하게 대답하여 놓고 후에 책임을 지지 않는 사람입니다.
맏아들은 장소에 따라서 마음이 변하는 사람입니다. 아버지앞에서는 순종하고 싶어서 <예> 하였으나 아버지를 떠나서는 마음이 내키지 않아서 거절하여 버렸습니다.
자극을 받을 때에는 결심을 하지만 조금 지나면 변해버리는 사람입니다.
환란을 당할 때에는 기도하고 열심히 하나님께 매달리다가도 환란이 지나고 나면 마음이 변해버리는 사람입니다.
맏아들은 처음은 좋았으나 나중은 나쁜 사람입니다. 처음에 사귈 때에는 싹싹하고 좋은 것 같은 데 점점 지나면서 안 좋아지는 사람입니다. 처음 예수를 믿을 때는 열정적이고 좋았는 데 세월이 지나면서 점점 식어지는 사람입니다.
둘째 아들은 어떤 사람입니까?
둘째 아들은 아버지 앞에서는 <싫소이다> 해 놓고 나중에 보니 포도원에서 일한 아들입니다.
둘째 아들은 남의 마음을 아프게 하고는 못 견디는 사람입니다. 둘째 아들은 아버지의 마음을 아프게 하고는 계속 마음에 걸렸습니다. 그래서 잠이 안 왔을 것입니다. 먹어도 배부르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드디어 포도원으로 갔습니다.
둘째 아들은 양심의 가책을 느끼고는 못 사는 사람이었습니다. 조금만 께름직한 것이 있으면 못 견디는 성격이었습니다.
둘째 아들은 깨달은 것은 행동으로 옮길 줄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실제적으로 깨닫자 말자 포도원으로 갔습니다.
둘째 아들은 세월이 가면서 점점 좋아지는 사람이었습니다. 마치 가나 혼인잔치의 포도주처럼 처음보다 나중이 더 좋은 사람입니다.
한 마디로 말하면 결론이 좋은 사람입니다.
이제 금년을 잘 끝내야 할 때가 되었습니다. 어떻게 끝을 맺어야 좋은 끝이 될가요?
이제 2008년도 끝입니다.
어떻게 2008년도를 끝내야 끝맺을 잘 하는 것일가요? 큰 아들처럼 끝내면 시작은 좋아도 안 좋은 끝입니다. 작은 아들처럼 하면 시작은 안 좋아도 좋은 끝이 됩니다.
끝이 좋으면 시작은 무시됩니다.
어떻게 끝을 맺어야 할가요?
본질을 찾아야 찾아야 합니다.
아버지 말씀에 불순종하며 떠났던 둘째 아들이 포도원으로 돌아 왔습니다. 아버지는 아들이 포도원으로 돌아 오기를 바라고 있었습니다.
포도원으로 들어 가는 것이 본질입니다.
본질이 무엇입니까?
1. 말씀이 본질입니다.
아버지가 말씀하셨습니다.
<얘 오늘 포도원에 가서 일하라.>
말씀대로 포도원으로 들어가는 것이 본질입니다. 큰 아들은 말로는 본질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행동은 본질을 떠났습니다. 그러나 작은 아들은 말로는 본질을 떠났습니다. 그러나 행동은 본질로 들어 갔습니다.
본질로 들어가야 한다는 말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들어가야 한다는 뜻입니다.
요나가 그랬습니다.
하나님께서 니느웨에 가서 복음을 전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요나는 니느웨로 가기 싫었습니다. 원수 국가가 구원받는 것이 싫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 백성을 괴롭히는 원수들이 하나님의 축복을 받는 것이 싫었습니다. 그래서 다시스로 도망쳤습니다. 풍랑이 일어났습니다. 고래 뱃속에 들어갔습니다. 고래는 요나를 니느웨에 토하여 놓고 말았습니다.
본질로 들어 갔습니다.
하나님이 가기를 원하는 포도원으로 들어 갔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들어갔습니다.
본질로 들어가고 끝을 맺어야 합니다. 끝이 좋으면 시작은 무시됩니다.
본질로 들어가는 데에는 때가 있습니다. 포도가 다 떨어진 후에 가면 소용이 없습니다. 폭풍이 불고 난 후에 포도원으로 들어가면 할 일이 없어집니다.
본질로 들어가는 때가 있습니다. 너무 빨라도 안 됩니다. 포도가 익기 전에 들어가면 포도를 딸 수가 없습니다. 너무 늦어도 안 됩니다. 포도가 다 망가져 버렸습니다.
가룟 유다가 그랬습니다.
예수님을 은 30냥에 팔았습니다. 그리호 후회하였습니다. 은 30냥을 가지고 성전으로 가서 도로 물러 달라고 요청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미 때는 늦었습니다. 이미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 박히고 있었습니다. 가룟 유다는 은 30냥을 성전에 던져 버리고 나무에 목을 메고 자살하였습니다.
끝이 좋으면 시작은 무시됩니다.
끝이 좋으면 다 좋습니다.
결론이 좋으면 서론이 잘 못 되었어도 용서받을 수 있습니다.
어떻게 끝내는 것이 좋은 끝일가요?
하나님의 말씀으로 돌아 오고 끝나는 것이 가장 좋은 끝맺음입니다.
탈무드 이야기입니다.
닭고기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아주 중요한 식품입니다. 한 남자가 닭을 기르는 데 사업이 번창일로에 있었습니다. 사업이 잘 되자 행실이 좋지 않은 곳으로 흘러가고 있었습니다. 랍비가 방문하여 충고를 하였습니다. 그 남자가 말했습니다.
<랍비님! 걱정하지 마십시오. 나는 금요일마다 회당에 가고 날마다 성경을 읽습니다.>
랍비가 말했습니다.
<당신 매일 양계장에 간다고 닭이 되나요? 회당에 간다고 교인이 되나요?>
그렇습니다.
말씀으로 돌아 오는 것이 본질입니다.
2. 일이 본질입니다.
큰 아들은 일하겠다고 하고 놀고 있습니다. 작은 아들은 놀겠다고 하고 일하고 있습니다. 일하는 것이 본질입니다. 노는 것은 본질을 떠난 것입니다.
아버지의 일을 하는 것이 본질입니다.
예수님도 말씀하셨습니다.
<아버지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
일이 본질입니다. 10시간 춤 출 수는 없어도 10시간 일할 수는 있습니다. 일하는 것이 1본질입니다.
하와이의 어느 교회에 부흥회 가서 들은 이야기입니다.
년말에 당회에서 여선교회의에서 여선교 회장을 뽑았습니다. 회장으로 뽑힌 여자가 말했습니다.
<미안합니다. 내년도 우리 남편 사업이 너무나 바쁩니다. 일년 후에 추천하여 주시면 사명을 감당하겠습니다.> 완곡하게 거절하였습니다. 할 수 없이 다른 여자를 회장으로 뽑았습니다. 그 여성도는 말했습니다.
<내년도 남편이 사업을 새로 벌리려고 계획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일을 위하여 일년 더 미루자고 권하고 여선교 회장을 충성되게 감당하겠습니다.> 일년이 지났습니다.
사업을 돕겠다고 하던 회장을 거절한 여성도 남편의 사업은 형편없이 기울어지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회장으로 충성스럽게 하나님의 일을 감당한 회장 남편의 사업은 정신없이 번창하고 있었습니다.
일이 본질입니다.
내가 하나님의 일을 하여 드리면 하나님은 내 일을 하여 주십니다.
하나님께서 첫 사람 아담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흙으로 돌아갈 때까지 얼굴에 땀을 흘려야 먹을 것을 먹으리니 네가 그 것에서 취하심을 입었음이라>(창 3;19)
일하는 것이 본질입니다.
일하고 끝내는 것이 가장 좋은 끝입니다. 일하리라고 결단하고 끝내는 것이 가장 좋은 결론입니다.
3. 구원이 본질입니다.
오늘 이야기의 핵심이 있습니다.
예수님 당시에 하나님을 잘 믿는다고 자부하는 서기관 바리새인들이 있었습니다. 이들은 말로는 기가 막히게 하나님의 잘 섬기는 이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실제 행동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외식하는 이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세리와 창녀들은 행동은 하나님을 떠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회개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남모르게 하나님께 죄송스럽게 생각하고 하나님께 미안하게 생각하는 이들이었습니다. 그리고 이들이 뒤늦게나마 깨닫고 하나님 앞으로 돌아 오고 있었습니다. 이런 모습을 보고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세리들과 창기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리라. 요한이 의의 도로 너희에게 왔거늘 너희는 저를 믿지
아니하였으되 세리와 창기는 믿었으며 너희는 이것을 보고도 종시 뉘우쳐 믿지 아니하였도다.>
포도원은 하나님의 나라라고 예수님이 비유로 말씀하셨습니다.
포도원에 들어 왔다는 것은 구원받은 것을 의미합니다. 구원받는 것이 최종 결론입니다.
지난 주간 나는 북경 신학교에 가서 233기 성막 쎄미나를 하고 돌아 왔습니다. 중국에 들어가서 성막 쎄미나를 많이 하였습니다. 다른 곳에서는 자유롭지 못 하였습니다. 중국의 종교법이 있습니다. 다른 나라 목사들이 가서 강의나 설교를 못 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대문을 잠그고, 건물 문을 잠그고, 교실문을 잠가야 합니다. 세 번 잠그고 강의하다가 중국 공안원이 온다는 정보가 있으면 빨리 학생 자리에 가서 앉아야 합니다. 그리고 중국 교수가 강의하는 척 하여야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학생중에서 고발하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벌금을 나누어 먹기 때문입니다. 들어 와서 보니 우리 교회에 와서 부흥회를 인도하였던 목사님 그렇게 걸렸습니다. 그래서 500만원 벌금을 내고 풀려 나왔습니다. 그러나 이번에 성막 쎄미나는 완전히 공인된 것이었습니다.
전혀 불안하지 않았습니다.
마침 내 책이 중국어로 번역되어 출판되었습니다. 모두 내 책을 자기 나라 말로 가지고 공부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 교회를 지은 조 정해 목사님이 학장으로 있는 신학교입니다. 나는 그 곳에서 중국 선교 비젼을 보았습니다. 조 목사님이 내내 나와 함께 있으면서 말했습니다.
<강 목사님!
머릿돌 교회가 안 된 것이 나에게는 큰 축복이었습니다. 만일 머릿돌 교회가 잘 되었으면 나는 지금 여기 중국에 선교하러 와 있지 않을 것입니다. 나는 한국에서 한기총 회장 하려고 애썼을 것입니다. 그리고 총회장 되려고 정치하였을 것입니다. 총회장은 천국에 못 갑니다. 구원을 받지 못 합니다. 교회 정치가 좋은 것이 아닙니다. 나는 지옥에 갈 지도 모릅니다. 나는 머릿돌 교회가 안 된 것을 지금에 와서 축복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갈보리 교회가 대신에 우리 머릿돌를 갈보리가 잘 길러 주셔서 너무나 감사하고 있습니다. 갈보리 교회는 잘 되어 나갈 것입니다. 고마워요.>
우리에게 가장 본질은 구원입니다. 구원보다 더 본질은 없습니다.
우리는 누가복음 19장에서 삭개오를 만나게 됩니다. 삭개오는 세리장이입니다. 오늘날로 말하면 세무서장입니다. 당시 이스라엘에서는 가장 세금을 많이 거두는 곳이 여리고였습니다.
당시 가장 부요한 곳이었습니다. 갈릴리 호수에서 흐르는 요단강이 여리고 근처를 흐르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과일, 농업이 가장 잘 되던 곳이었습니다. 그래서 세금을 가장 많이 거둘 수 있는 곳이었습니다. 또 있습니다. 당시 인구가 가장 많은 곳을 살기 좋은 갈릴리 호수 주변이었습니다. 그래서 통행이 가장 많은 곳이었습니다. 통행세도 가장 많이 거두어 드리는 곳이었습니다. 그래서 여리고 세무서는 이스라엘 전체에서 가장 생기는 곳이 많은 곳이었습니다. 여리고 세무서장 자리는 가장 황금의 자리였습니다. 그 곳에 세무서장이 삭개오였습니다. 돈을 많이 벌었습니다. 부자였습니다. 그러나 그가 뽕나무에서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삭개오가 말헸습니다.
<내 재산의 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남에게 토색한 것이 있으면 4배나 갚겠나이다.>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라. 인자가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라>(눅 19;9-10)
삭개오는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는 구원받으면서 모든 물질을 포기하였습니다. 그 동안에 모은 모든 것을 다 포기할 수 있었습니다.
구원이 본질입니다.
우리는 구원받았습니다.
이 세상에 생명보다 귀한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1972년 10월 12일 적설로 뒤덮인 안네스 산정에서 우루과이 럭비팀 16명이 탑승한 비행기 추락사고가 있었습니다. 비행기도 행발 불명이었고 사람들도 행방불명으로 생사를 알 수가 없어서 궁금해 하였습니다. 그런데 70일 후에 한 사람의 생존자가 발견되었습니다. 우루과이 온 나라가 그 뉴스로 덮였습니다. 나중에 알고보니 동료들의 눈위에 있기에 썩지 않는 시신을 뜯어 먹고 살았던 것이었습니다. 사람들은 아연실색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태연하게 말했습니다.
<이것은 오직 고깃덩어리다. 저들의 영혼은 육체를 떠나 하나님과 함께 천국에 있다. 땅에 남아 있는 것은 단순한 시체로 우리들이 집에서 먹고 있는 소고기와 다를 바 없다. 이것은 이미 사람이 아니다.>
이 다음에 수많은 사람들중에 천국에서 생명을 보는 사람이 몇명이나 될가요? 대단한 뉴스거리가 될 것입니다.
또 심리학에서는 구사일생을 의미하는 용어로 생피에리즘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이 생긴 유래가 있습니다.
1902년 5월 서인도 열도에서 화산이 폭팔하여 3만명의 주민이 사는 생피에르시를 용암으로 덮어버렸습니다. 당시 그 섬은 섭씨 800도의 수증기속에 있었기에 생물이라고는 풀 한포기 살 수 없었고 조그만 미생 곤충이라도 살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속에서도 유일하게 살아남은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지하 감옥에 갇혀서 교수형을 기다리던 살인범 오귀스트 시파리라는 흑인이었습니다.
이 기적으로 그는 사면을 받고 <생피에르의 죄수>라는 영화에 출연함으로서 유명하여 졌습니다. 그리고 1929년에 죽을 때까지 생피에르의 감옥속에서 사람들에게 이렇게 살았다고 들어 앉아 직접 방문객들에게 보여줌으로서 큰 돈을 벌었습니다.
구사일생이 아닌 삼만사 일생으로 알려졌습니다.
소돔과 고모라가 멸망될 당시의 인구는 일만명으로 알려졌습니다. 일만사일생으로 롯의 가정만 구원을 받았습니다.
사람들에게 가장 귀한 본질은 생명입니다.
끝이 좋으면 시작은 무시하여도 좋습니다. 이 본문의 본질은 생명입니다.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세리들과 창기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리라. 요한이 의의 도로 너희에게 왔거늘 너희는 저를 믿지
아니하였으되 세리와 창기는 믿었으며 너희는 이것을 보고도 종시 뉘우쳐 믿지 아니하였도다.>
그렇습니다.
끝은 시작은 무시합니다.
큰 아들은 처음에는 포도원에 간다고 하다가 안 갔습니다. 둘재 아들은 안 간다고 하였다가 갔습니다. 끝이 좋으면 시작은 무시되었습니다. 포도원으로 간 것이 결론이었습니다.
포도원으로 간 결론이 무엇입니까?
말씀으로 돌아간 것이 좋은 끝이었습니다.
일하러 간 것이 좋은 결론이었습니다.
구원받은 것이 제일 좋은 결론이었습니다.
이런 이야기 하나 드리고 마치려고 합니다.
어느 날 부부가 아내의 신앙문제로 크게 다투었습니다. 남편이 참다못해 소리쳤습니다.
<당신 것 모두 가지고 나가!> 그 말을 듣고 아내는 큰 가방을 쫙 열어 놓았습니다. 그리고 눈을 보며 말했습니다. <여기 들어가! 당신은 내 꺼야.>
시작은 안 좋아도 끝이 좋으면 좋습니다. 끝은 시작을 무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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