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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안의 복음! (2) (몬 1:4-7)

by 【고동엽】 2022. 1. 19.

평안의 복음! (2) (몬 1:4-7)

 

이 시간에는 "평안의 복음"이라는 제목으로 두 번째 말씀을 드리려고 합니다. 본문 말씀을 보면 사도 바울은 빌레몬이라는 사람을 극구 칭찬하고 있습니다.
여기 나오고 있는 빌레몬이라는 사람은 원래 골로새 사람으로 부자였고 인품이 좋은 데다 온화한 성품, 거기다 원만한 인격을 고루갖춘 사람으로 아주 점잖은 신사였습니다.
빌레몬은 사도 바울이 3차 전도 여행 때에 에베소에 가서 집회를 하게 되었을 때 그 집회에 참석하였다가 회심해서 전도된 사람입니다. 은혜를 받고 골로새로 돌아온 빌레몬은 그때부터 열심히 신앙 생활을 하였고 전도 생활을 하다가 에바브라와 함께 자기 집에서 예배를 드리기 시작하였습니다. 이것이 나중에 골로새 교회가 된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골로새 ㅣ교회를 그렇게 사랑했고 애착을 가졌던 것입니다.
그러고는 그때부터 빌레몬이 기도 생활을 열심히 하고 은혜가 충만해서 경건한 모습과 함께 그에게서는 신앙적인 인품과 온화함이 풍겼고, 그의 얼굴에는 천국을 보는 것과 같은 평화와 평안함이 나타나고 있었다고 합니다. 선천적으로 지니고 있던 온화한 인품에다 하나님의 은혜가 주어지고 영적인 충만함이 더해지게 되니까 빌레몬은 완전한 평화의 사신과 같은 성스러움까지 지니게 된 것입니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서 목회를 하는 동안 여러 가지 갈등으로 고민을 많이 하였다고 합니다. 그리고 고린도 교회 안에는 파벌이 많이 있어서 거기에서 오는 여러 가지 문제들 때문에 속이 많이 상했다고 합니다. 바울은 그때마다 위로 받기 위해서 빌레몬을 찾아가곤 했습니다.
가서 빌레몬의 그 화평한 얼굴과 은혜가 충만해 있는 얼굴을 보면 위로가 되었고 격려가 되었다고 합니다. 그만큼 빌레몬의 얼굴은 평안함과 평화의 모습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본문 7절에서 "성도들의 마음이 너로 말미암아 평안함을 얻었으니 내가 너의 사랑으로 많은 기쁨과 위로를 얻었노라."고 칭찬을 하고 있습니다.

 

1. 우리들이 신앙 생활을 오래 하게 되면 바로 이런 모습이 만들어 져야 합니다.

 

신앙 안에서 살아가던 빌레몬의 얼굴에 평화의 모습이 나타나고, 성스러움이 풍기고, 경건한 모습이 만들어지듯이 우리드의 얼굴에서도 이 같은 모습이 이루어져야 합니다.
사람이 살아가는데 있어서 얼굴은 굉장히 중요한 부분입니다. 얼굴은 추천장과 같은 것이고 마음은 신용장과 같은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은 먼저 얼굴을 아름답게 가꾸어야 합니다.
얼굴은 내면의 세계를 비추어 주는 거울입니다. 나의 내면의 상태가 건강하면 얼굴의 모습도 좋아집니다. 사람이 배가 부르면 얼굴에 만족함이 나타나듯이 나의 심령에 은혜가 가득하고 감사함이 가득 담겨 있으면 나의 얼굴에는 만족함과 기쁨의 모습이 나타나게 되어 있습니다. 얼굴은 내면을 비추어 주는 거울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내 속이 병들어 있으면 아무리 좋은 화장품으로 화장을 하고 별 방법을 다해서 가꾸어도 밖으로 나타나는 병색은 감출 수가 없습니다. 내 마음속에 불만이 가득 들어 있으면 그 얼굴에서는 어두운 모습과 불만족스러움이 나타날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모습으로 오래 살아가게 되면 그 얼굴은 어두움과 불만스러운 얼굴로 굳어져 버리게 됩니다. 그러면 그 다음에는 고쳐지지 않습니다. 링컨은 사람이 나이 40이 되면 자기 얼굴에 대해서 책임을 져야 한다고 했습니다.
나이 40세 이전의 얼굴은 부모가 준 얼굴 그대로입니다. 타고난 얼굴은 나이 40세까지는 그대로 유지된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나이 40이 넘으면 부모가 준 얼굴은 남지 않고 자신이 살아온 모습대로 얼굴이 새롭게 만들어진다는 말입니다.

링컨이 대통령이 되었을 때 어떤 사람이 사람 하나를 써 달라고 추천을 하였습니다. 링컨은 그 사람을 만나서 그의 얼굴을 보고서는 한마디로 거절하였습니다. 그 이유는 그의 얼굴이 맘에 들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얼굴에 진실성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 얼굴에 진실성이 없다는 것은 그 사람의 생활이 진실하지 않다는 말입니다. 생활이 진실하지 않으니까 그의 얼굴에 진실성이 있는 모습이 만들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링컨은 사람이 나이 40이 되면 자기 얼굴에 대해서 책임을 져야 한다고 말한 것입니다.
여러분, TV에 나오는 강도나 살인자의 얼굴을 유심히 보시면 그 얼굴에 진실성이라고는 하나도 없습니다. 그들의 모습을 보면 뉘우치거나 회개하는 빛이 전혀 없습니다. 그들의 얼굴에 잔인함만 나타날 뿐입니다. 그들의 삶에 진실이 없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세상을 탐욕스럽게 살면 그 순전하고 깨끗하던 얼굴은 없어지고 탐욕이 가득 배인 추한 얼굴로 변해 버리고 맙니다. 사람이 심술과 시기와 욕심으로 얼룩진 생활을 하게 되면 그 얼굴은 심술과 살의가 들어있는 얼굴로 만들어집니다. 그래서 사람의 얼굴은 그 사람이 살아간 그대로 얼굴이 만들어진다는 말입니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가 예수님의 "최후의 만찬" 그림을 그리려고 하는데 예수님의 얼굴 모습이 떠오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도시로, 큰 교회로, 수도원으로 예수님 같은 얼굴을 찾아보려고 돌아다녔지만 찾지를 못했습니다.
그러다가 다빈치가 다니던 시골 조그만 교회에 가게 되었습니다. 그곳에서 예배를 드리는데 성가대 석에 앉아서 성가를 부르는 청년 하나가 그 얼굴이 얼마나 은혜에 힘입어 아름다운지 "저게 예수님의 얼굴이다."하고 열심히 그 얼굴을 그렸습니다.
그리고 그림을 마감하면서 가룟 유다의 얼굴을 그려야 하는데 그 얼굴이 떠오르지가 않습니다. 그래서 또 찾아 다녔습니다. 술집으로, 형무소로, 깡패 소굴로 3년 동안을 찾아 다녀 보았지만 없습니다.
어느 날 지쳐서 길을 가도 있는데 길에 어떤 사람이 술에 취해 쓰러져 있는데 그 얼굴을 보니까 그게 바로 가룟 유다의 얼굴과 같습니다. 그래서 열심히 그리고 있는데 그때 그 주정뱅이가 깨어났습니다.
보니까 누가 자기 얼굴을 열심히 그리고 있습니다. 그는 "왜 내 얼굴을 그리느냐"고 화를 냅니다. "당신의 얼굴이 꼭 가룟 유다의 얼굴과 똑같이 생겨서 그리고 있다." 그 말을 듣고 이 사람이 대성 통곡을 합니다.
그는 "3년 전에는 내 얼굴이 예수님의 얼굴과 같다고 열심히 그려 가더니 내가 좀 방탕하고 주정뱅이가 되고 나니까 내 얼굴이 가룟 유다 같다고 하니 내 인생이 한심하다."고 하면서 통곡을 하였다고 합니다. 그 사람이 아무리 좋은 얼굴을 타고났다고 해도 내 속에 무엇이 들어 있느냐에 따라서, 그리고 내가 어떻게 살아가느냐에 따라서 나의 얼굴이 달라진다는 말입니다.
이 말은 사람이 좀 못생긴 얼굴로 태어났다 하더라도 인생을 살아가기에 따라서 후천적으로 얼마든지 품위 있는 얼굴을 만들어 갈수 있다는 말입니다. 빌레몬이 그런 경우입니다.
사람이 내면의 세계를 밝게 하고 마음과 생활 속에 성스러움과 경건함을 품고 은혜를 간직한 채 살아가게 되면 화평함의 얼굴이 만들어지고 평화를 간직한 얼굴이 창조된다는 말입니다.
이 얼굴은 성형 수술을 해서 만들어지는 얼굴이 아닙니다. 아무리 좋은 솜씨로 얼굴을 뜯어고치고 수술을 잘 해도 깊은 곳에서 풍겨 나오는 그 평화로움과 만족스러움의 분위기만큼은 만들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도 생활을 하고 경건한 마음과 깨끗한 마음을 지니고 살아가라는 말입니다. 그러면 비록 나이는 들고 주름살이 생기고 생활이 궁해서 살아가기가 좀 어렵기는 해도 그 얼굴에서 평화로움이 나타나고 온화함이 깃든 경건한 얼굴이 만들어진다는 것입니다.
빌레몬의 얼굴이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얼굴입니다. 그 얼굴이 모든 사람들에게 기쁨을 준 얼굴입니다. 그 얼굴이 사도 바울을 비롯해서 많은 사람들에게 위로를 주고 화평을 주고 평안을 주었던 그런 얼굴입니다. 이 얼굴이 바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얼굴인 것입니다.]
우리 신앙인들은 먼저 얼굴을 가꾸어야 합니다. 얼굴은 마음의 거울입니다. 그 마음속에 무엇이 들어 있느냐에 따라서 얼굴의 모습이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신앙인들은 묵상을 하고, 기도 생활을 하고, 언제나 감사한 마음을 품고 살아가야 합니다.
집에 가셔서 여러분들의 얼굴을 조용히 그리고 자세하게 들여다보십시오. 여러분의 얼굴에서 여러분들의 현재의 삶의 모습이 나타날 것입니다.

 

2. 그리고 모습도 가꾸어야 합니다.

 

사람이 오래 살게 되면 자신의 모습이 만들어집니다. 학교의 선생님은 "나는 선생님입니다."하고 말하지 않아도 이미 그의 모습에서 선생님의 모습이 나타납니다.
장로님은 "나는 장로입니다." 하고 말하지 않아도 그의 모습에서 신앙 생활을 하고 있는 장로의 모습이 나타납니다. 이것은 숨길 수가 없습니다.
창기는 "나는 창기가 아닙니다. "하고 변명을 해도 자신이 창기인 것을 숨길 수가 없습니다. 그의 모습과 걸음걸이와 자태 속에 이미 음란이 배어 있습니다. 그래서 창기는 아무리 고상한 옷을 입혀 놓아도 그가 지닌 모습에서 고상함이 나오지를 않습니다.
그 몸에서 지혜로움과 슬기로움과 지성미와 내적인 고상함이 전혀 풍기지를 않습니다. 그 사람의 내면의 세계가 음란으로 가득 차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여성들 가운데는 착각을 하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비싼 옷을 입으면 고상하고 멋이 있는 줄 알고 살아가는 여성들이 많습니다. 그래서 16만원 하는 스타킹을 신고, 790만원 하는 원피스를 해 입고, 950만원 하는 투피스를 해 입고, 6,000만원 하는 밍크코트를 해 입고 하는데, 이것은 착각도 보통 착각이 아닙니다.
고상함과 품위는 만들어지는 것이지 입어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속이 비어 있는 사람을 화려한 옷으로 감싼다고 해서 그것이 감추어집니까?
만들어야 합니다. 가꾸어야 합니다. 내면의 세계를 먼저 가꾸고 다듬어야 합니다. 거룩함을 품고, 지성미를 갖추고, 깨끗한 마음을 품고 살아가게 되면 아무것이나 걸치고 다녀도 그 모습에서 고상함이 풍기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 신앙인들이 외모에 너무 치중을 하고 내면의 치장에 소홀히 하고 둔감해 하는 것은 잘못입니다. 신앙인은 먼저 내면에 세계를 가꾸어야 합니다. 아름다운 마음과 거룩한 마음을 품고 살아야 합니다. 은혜로 우리의 심령을 채워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의 겉모습은 고상하고 경건함이 흐르는 모습으로 저절로 만들어질 것입니다.
바로 빌레몬이 그렇게 해서 자신의 모습을 아름답게 가꾼 대표적인 사람입니다. 그는 신앙 안에서 경건의 정신을 품고 살아갔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품고 살아갔습니다. 그러니까 그의 모습에서 거룩함이 풍기고 경건함과 고상함이 나타나게 된 것입니다.
우리 신앙인들은 영원한 것을 사모해야 합니다. 순간적인 것들은 오래가지도 못할뿐더러 그 생명이 길지도 못합니다. 우리는 마음에 잔잔함과 따뜻함을 간직하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오늘날의 사람들은 모두 뜨겁고 화끈하고 예쁘고 아주 매력적인 것을 좋아하는데 그런 것들은 한결같이 오래가지를 못합니다.
모나리자의 웃음을 보십시오. 보고 또 보아도 싫증이 나지 않습니다. 그것은 그 웃음이 은은하고 그 웃음 속에 진실함이 배어 있기 때문입니다. 두 번 보고 나서 싫증이 나는 웃음은 참웃음이 아닙니다. 그 웃음은 사람을 유혹하는 웃음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무엇보다도 먼저 나의 모습을 가꾸어야 합니다. 모습을 만들어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들의 두 번째 할 일입니다.

 

3. 또 삶의 모습도 가꾸어야 합니다.

 

사람이 가장 아름다울 때가 언제냐 하면 열심히 일하고 있을 때라고 합니다. 사람이 열심히 일하며 살아가는 모습은 참 아름답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열심히 일하는 모습을 지닌 사람으로 삶의 모습이 가꾸어져야 합니다.
무슨 일이든 열심히 하는 사람,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그래서 잠언을 보면 근면하고 열심히 일하라고 여러 번 말씀하고 있습니다.
어느 대학생이 아르바이트를 하느라고 무와 배추를 힘겹게 걸머지고 이 집 저 집으로 땀을 흘리면서 열심히 뛰어다니며 배달을 하고 있습니다. 그 청년의 몸에서 땀 냄새가 물씬 풍깁니다. 그 모습이 얼마나 귀하게 보였는지 모릅니다. 얼마나 대견한지 그런 그의 정신이 고맙기까지 했습니다.
요즘 젊은이들이 그런 궂은 일을 하려고 합니까? 그 청년을 자세히 알지는 못하지만 그 모습만으로도 그의 정신을 알 수 있었고 마음과 생각을 알 수 있었습니다. 그 모습을 통해서 사람들에게 기쁨을 주고 자신에게 기쁨을 줄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 일입니까?
그런데 열심히 일하는 사람의 가장 아름다운 곳이 손이라고 합니다. 비싼 크림을 바르고, 메니큐어를 칠하고 매일 같이 다듬고, 도려내고, 고양이 발톱처럼 새빨갛게 칠하는 그 손이 아름다운 것이 아닙니다. 그런 손은 열심히 일하는 사람들에게는 대단한 실례입니다.
심방 가면 어떤 집은 부엌이 다 보입니다. 옛날에는 부엌이 잘 안 보였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거실이고 부엌이고 따로 없습니다. 거실에 앉아 있으면 지금 부엌에서 무엇을 하는지 다 보입니다. 보면 시뻘건 고무 장갑을 끼고 음식을 만드는데 그 장갑을 보면 음식 맛이 뚝 떨어집니다.
그 무지막지한 시뻘건 장갑을 끼고 음식을 만들고 있으니 그 음식이 무슨 맛이 있겠습니까? 음식이란 손으로 만지고 주무르고 해야 그 손에서 설명 못할 그 뭔가가 나와서 음식의 맛을 내는 것인데 고무 장갑을 끼고 만든 음식을 먹자니 좀 비참해지는 기분이 듭니다. 손을 그렇게 아꼈다가 이 다음 어디에 쓰려고 그럽니까?
나는 지금도 잊을 수 없는 손을 본 적이 있습니다. 그 손은 아주 아름다운 손이었습니다. 몇 년 전에 한국의 고아원을 찾아왔던 인도 켈커타의 테레사 수녀의 손입니다. 고아원에 들러서 고아들과 함께 식사를 하기 위해서 두 손을 모아 기도하는 손을 크게 찍어 놓은 것을 신문에서 보았습니다.
그 손은 여자의 손이 아니라 마치 원숭이의 발가락 같았습니다. 마디가 굵고 거칠고 일을 너무 많이 해서 일그러진 손입니다. 얼굴에는 주름살이 너무 많이 패여서 온통 줄무늬 투성이입니다. 그런데 그 마디가 아주 굵게 뭉쳐진 그 손이 그렇게 성스럽게 보일 수가 없습니다. 누가 그 손을 보고 흉측하다고 할 것입니까?

얼굴에 주름살이 생길까봐서 웃고 싶어도 웃지를 못하는 오늘의 여성들, 너무 우스워서 웃으려면 할 수 없이 얼굴을 손으로 잡고 웃는 여인들, 무엇이 정말 아름다움입니까? 무엇이 진정한 인간의 참모습입니까?
빌레몬은 사랑이 넘치는 그런 사람이었다고 합니다. 그의 이름 "빌레몬"은 "사랑의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그는 성도들에 대한 애정이 남달랐다고 합니다. 그는 당대에 부자였는데도 불구하고 노예들과 언제나 함께 똑같이 땀을 흘리며 일하는 그런 사람이었다고 합니다. 그 같은 빌레몬의 모습에서 바울은 크게 감명을 받았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빌레몬의 사랑을 특별히 강조하고 있습니다. "형제여, 성도들의 마음이 너로 말미암아 평안함을 얻었으니 내가 너의 사랑으로 많은 기쁨과 위로를 얻었노라."

결론을 짓겠습니다. 그리스도인은 그 시대의 정신입니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의 정신을 몸에 품고, 지니고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은 그의 몸에서 그리스도의 모습이 나타나야 합니다. 그 모습은 경건함과 성숙함을 지닌 영적으로 평안한 모습입니다.
이것을 빌레몬이라는 사람이 잘 이루어냈습니다. 그의 모습에서는 완전한 그리스도인의 모습이 새겨졌습니다. 그것은 그가 주님의 은혜를 마음에 품고 말씀과 신령함과 주님의 정신을 언제나 사모하고 살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참된 그리스도인의 모습입니다.

출처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글쓴이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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