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안의 복음! (요 14:27)
사람의 욕구 가운데 가장 강하고 근본적인 욕구는 행복해지려고 하는 욕구입니다. 행복은 인생의 선 중에서 최고의 선이고, 목적 중에서도 최고의 목적입니다.
강물이 동으로 흐르건 서로 흐르건, 남으로 흐르건, 모두 바다로 흘러가듯이, 인간의 모든 행동도, 생각도, 뜻도 결국에는 행복이 있는 곳을 지향하게 되어 있습니다.
사람이 왜 부지런하게 일을 합니까? 왜 열심히 돈을 법니까? 왜 권력을 잡으려고 안간힘을 씁니까? 왜 사람이 신앙을 갈구하고 미를 추구합니까? 모두 좀더 행복해지려는 마음 때문입니다. 이렇게 행복은 인간의 모든 행동의 지향점입니다.
한문에 보면 "천하 귀일(天下歸一)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천하만물이 모두 결국에는 한 자릴 돌아간다는 말입니다. 그 하나가 무엇이냐 하면 곧 행복입니다.
그런데 이 같은 행복은 어디서 옵니까? 그것은 평안에서 옵니다. 그래서 행복이 곧 평안입니다. 평안 없는 행복은 없습니다. 이 평안을 헬라말로 "에이레네"라고 합니다. 평화라는 뜻입니다. 이 말의 동의어로서 히브리말로는 "샬롬"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의 뜻은 "평화와 안녕"입니다.
샬롬은 일반적으로 구약에서는 작별 인사를 할 때와 문안 인사를 할 때 사용했습니다. "당신에게 평안이 있기를 빕니다."는 뜻에서 인사 용어로 사용된 말입니다. 그런데 이 샬롬은 막연한 평안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나에게 임재하신 결과 나의 마음속에 임한 평안의 상태를 샬롬이라고 합니다.
또한 샬롬은 임무의 성취를 나타낼 때 사용하기도 했습니다. 일을 성취했을 때 오는 만족감, 기쁨, 완수의 감격을 말할 때 샬롬을 사용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관계가 손상되지 않았음을 나타내는 의미로도 사용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3년 동안 완전한 관계를 유지하셨습니다. 동료로서, 친구로서, 스승으로서, 제자들과 원만한 관계를 이루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하나님으로부터 자기에게 부여된 임무 성취의 날이 다가오고 있음을 아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여기서 완전한 샬롬을 외치고 계신 것입니다. 제자들에게 이 "샬롬"을 선물로 선사하고 계신 것입니다. "나의 평안을 너의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제자들도 사실은 수고를 많이 한 사람들입니다. 고향도 버리고, 배와 직업도 버리고, 아내와 헤어지고 주님을 따랐습니다. 이 같은 제자들에게 주님은 세상이 주는 평안이 아니라 영원한 평안을 선물로 주신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 같은 평안을 갖고 싶지 않으십니까? 여러분들도 세상이 주는 평안이 아니라 주님이 주시는 구체적이고도 영원한 평안을 누리시기를 기원합니다.
그런데 이와 같은 평안은 그냥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돈을 벌고, 집을 사고, 결혼을 하고, 출세를 했을 때, 그때에 오는 평안은 일시적인 것입니다. 시간이 조금 흐르면 그것도 별로입니다.
주님이 주시는 평안은 일시적인 평안이 아닙니다. 그것은 복음 안에서 주어지는 영원한 평안입니다. 이 같은 평안이 주어지려면 몇 가지 선행되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첫째는 거듭나는 일입니다.
다시 말해 평안이 주어지려면 주 안에서 새로 태어나야 합니다. 옛날의 내 생각이나 구태 의연한 나의 생활 태도를 가지고서는 주님의 평안이 주어지지 않습니다. 주어진다 해도 며칠을 유지하기가 어렵습니다. 내가 주 안에서 변화되고 거듭날 때만이 이 평안이 내게 주어집니다. 사람들은 평안을 찾아보려고 애를 씁니다.
여기도 가보고, 저기도 가보고, 이것도 해 보고, 저것도 해봅니다. 소용없는 일입니다. 그리고 평안의 출처는 그렇게 먼 데 있는 것도 아닙니다.
마테를링크라는 작가가 "파랑새"라는 아동극을 발표했습니다. 그 내용을 보면 가난한 나무꾼의 두 남매가 행복을 준다는 파랑새를 찾아 이곳 저곳을 헤맵니다. 추억의 나라, 밤의 나라, 죽은 이의 나라, 미래의 나라 할 것 없이 멀고 먼 나라까지 찾아다닙니다.
그런데 그 파랑새는 어디에 가 봐도 없습니다. 그래서 이 두 남매는 지쳐서 집으로 돌아옵니다. 집에 와서 보니까 그렇게 찾아 헤매던 그 파랑새가 자기 집 새장 속에 들어 있습니다. 행복은 먼 곳에 있는 것이 아니라 아주 가까운 데 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거듭난 사람에게는 행복과 평안이 그보다 더 가까운 곳에 있습니다. 그곳이 마음입니다. 행복과 평안은 마음속에 감추어져 있습니다. 이 감추어진 평안은 사람이 주 안에서 거듭날 때만 움직이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이 평안이 움직이게 하기 위해서 거듭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주님을 만나고 나서 거듭났습니다. 그러고는 모든 것이 변화되었습니다. 생각도 변화되고, 정신도 변화되고, 의식도 변화가 되었습니다. 그러고 나서, "나는 지금까지 모든 것을 미련 없이 버리노라. 이제부터 나는 주님만을 위하여 살기로 했다."하고 고백을 합니다. 그는 주님을 알고 나서 지금까지 그렇게 소중하게 여기던 모든 것들이 아무것도 아니었던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 후 그는 신들린 사람처럼 주님을 위해서 지칠 줄 모르며 살아갔습니다. 고난이나 죽음 따위는 그에게 있어서는 아무것도 아니었습니다. 있다면 오직 예수밖에 없었습니다.
우리들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가끔 탄식할 때가 있습니다. 우리는 "왜 이렇게 세상 살기가 고달프냐.", "왜 세상 살아가기가 이렇게도 지겨우냐"하고 때로 탄식을 하기도 하고 한숨을 쉬기도 합니다. 거듭나지 못해서 그렇습니다. 주 안에 깊이 들어오지 못해서 그렇습니다. 주님이 주시는 힘이 나에게 구체적으로 입혀지지 않고, 전달되지 않아서 그렇습니다. 내 힘과 재주만을 가지고 살아가자니까 별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참 평안은 외부에서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들은 모두 외부에서 오는 평안을 찾으려고 동분서주하고 있는데 그렇게 해서 얻는다 해도 그것은 잠깐이라는 것입니다. 근본적인 평안은 바로 내 마음속에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것은 주 안에서 거듭날 때만 주어지는 내 마음속의 평안, 이 평안이 오늘 여러분들에게 주어지기를 기원합니다.
둘째는 삶의 목적이 분명해야 합니다.
루이제 린저라는 작가가 "왜 사느냐고 묻거든" 이렇게 대답하라고 했습니다. "나는 분명히 해야 할 일이 있기 때문이다." 분명히 할 일이 있는 사람은 탄식할 겨를이 없습니다. 내가 하는 일이 정당하고, 일에 확신이 있는 사람은 그가 할 일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행복할 수가 있습니다.
세 사람의 석공이 대리석에 예수 상을 조각하고 있습니다. "지금 무엇 때문에 그렇게 힘든 일을 하고 있습니까?" 하고 물었더니, 첫 번째 사람이 "죽지 못해서 이 일을 하고 있습니다." 하고 대답을 합니다.
두 번째 사람은 "돈을 벌기 위해서 일을 하고 있습니다."라고 대답합니다. 이런 사람들은 이 일을 통해서 결코 기쁨을 얻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세 번째 사람의 대답은 달랐습니다. "나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해서 이 일을 하고 있습니다." 적어도 이런 사람에게는 품삯이 문제가 아닙니다. 그 일에 기쁨을 느끼는 것이고, 그 일이 힘들수록 마음에는 더욱 벅찬 평안이 자리를 잡게 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그래서 기뻐했던 것입니다. 예수를 해야 할 일이 분명히 있었기 때문에, 예수 때문에 매를 맞을 때는 더 감사를 느꼈고, 옥에 갇히게 될 때는 오히려 찬송이 나올 수 있었던 것입니다. 목적을 알고 그 목적을 위해서 살기 때문에 하루 하루를 재미있게 살아갈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니 사도 바울 같은 사람의 입에서 "왜 세상 살아가기가 이렇게 고달프냐."하는 탄식이 나올 수 있겠습니까? 이것이 세상을 살아가는 방법입니다.
미국의 대통령을 지낸 지미 카터씨가 여름 휴가 때 단기 선교사로 선교지를 방문했습니다. 여행 삼아 떠난 것이 아닙니다. 휴가를 보내기 위해서 간 것도 아닙니다.
그는 선교지에 선교사 사택을 짓는 일을 하기 위한 목적으로 근로 선교사로 지원하여 망치와 톱을 들고 선교지를 방문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고는 휴가 기간을 선교지를 방문해서 노동을 함으로써 시간을 보낸 것입니다.
미국의 대통령을 지낸 사람이 그런 결단을 내리게 되기까지 그리 쉬웠겠습니까? 그렇지만 그 같은 결단을 내릴 수 있는 마음을 지닌 그가 얼마나 행복한 사람입니까? 그 같은 마음을 지니고 살아가는 사람이 행복을 말할 수 있고 평안을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 안에서 확실하게 거듭날 수만 있다면 이 세상은 한번 살아볼 만한 가치 있는 세상입니다.
셋째는 주님이 나의 주인이 되어야 합니다.
참 평안은 내가 주님에게 완전히 매여 있을 때 찾아오는 것입니다. 나의 소속이 분명해야 합니다. 나의 주인이 주님이면 주님에게 내가 꼼짝할 수 없을 만큼 붙잡혀 있어야 합니다. 느슨하면 안 됩니다. 풀어져도 안 됩니다.
사도 바울의 고백처럼 사랑의 쇠사슬로 매여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내가 스스로 주님의 종이 되고, 내가 자원해서 스스로 매이는 것, 이것이 행복입니다.
옛말에 "한 사람에게 매이는 것이 가장 큰 자유인 것을 아는 사람만이 결혼할 자격이 있다."고 했습니다. 한 사람에게 매이고, 한 여자에게 매이는 것을 불편스럽게 생각하는 사람은 결혼하면 안 됩니다.
한 사람에게 완전히 얽매이고 한 가정을 섬긴다고 하는 것이 무한한 자유라는 것을 아는 사람만이 누구를 사랑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내가 누구에게 매인다는 것, 그것도 스스로 매인다는 것, 이것이 얼마나 고귀한 자유입니까? 매일 뿐만 아니고 미쳐야 합니다.
몸은 매였는데 마음은 따로 돌아가면 그것은 불행입니다. 무한한 자유는 매이고 미칠 때 주어집니다. 몸만 매이는 것이 아니고 정신까지 함께 매이고 미쳐야 정말 자유를 누릴 수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에게 매이고 주님을 위해서 미쳐야 합니다. 몸만 매이는 것이 아니고 마음도 정신도, 심지어는 나의 운명까지도, 그의 손에 매어 놓아야 합니다. 그래야 바울처럼 "나는 이제 죽어도 좋고 살아도 좋다."라고 고백을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과 이렇게 매이면 나에게서 주님의 모습이 나타나고 나에게서 주님의 음성이 나타납니다.
여러분, 교향악을 들어보십시오. 모든 악기가 각각 다르고 저마다 제소리를 내지만 가만히 들어보면 사실은 하나의 소리만이 나올 뿐입니다. 내 소리가 저 소리도 되고 저 소리가 내 소리로도 들립니다. 내 소리가 네 소리를 돕고 네 소리가 내 소리와 어울려서 공존 공화의 화음을 창조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연합의 원리입니다. 우리가 주님과 함께 매이면 우리들에게서 주님의 소리가 나오고 우리들에게서 주님의 모습이 나타나게 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신앙 생활의 신비입니다.
여러분, 주일날이 되거든 부부가 아이들을 차에 태우고 어디 가지말고 교회로 꼭 나와 예배를 드리십시오. 부모님이 계시면 부모님까지 함께 하나님 앞에 나와서 온 가족이 한 의자에 앉아서, 함께 기도하고, 함께 찬송하면서, 함께 예배를 드리십시오.
이것이 이 세상에서 여러분들에게 주어진 축복 가운데 가장 큰 축복인 것을 믿으십시오. 그리고 돌아갈 때는 따로따로 가지말고 온 가족이 함께 외식을 하십시오. 또 집에 가서 저녁상을 받게 되거든 아이들과 함께 둘러앉아 하나님께 감사의 기도를 하고 잡수십시오. 내 집을 주시고, 가족을 주시고, 믿음의 가정을 만들어 주신 것을 감사하십시오.
이것이 주님께 매이는 생활입니다. 비록 셋방에서 살아간다고 할지라도 그렇게 살면 그곳이 주님이 계신 천국입니다. 주님은 그런 가정을 사랑의 줄로, 하나님의 축복의 쇠사슬로, 더욱 힘이 있게 졸라매실 것입니다. 이렇게 매이고 또 매이는 것이 최고의 축복인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살아가는 것이 별것입니까? 우리에게 그럴 마음이 없엇 그렇지 마음만 있으면 얼마든지 은혜 가운데서 살아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살아가기만 하면 어디라고 탄식이 나옵니까? 한숨이 어디에서 나옵니까? 그래서 주님이 나의 주인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주님께 우리는 매여야 합니다. 몸만이 아니라 정신도, 마음도, 모두 매여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주님께 미쳐야 합니다. 그때 우리에게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한 하늘이 주는 평안이 찾아오는 것입니다.
넷째는 내세관이 확립되어야 합니다.
사람이 종말에 대해서 불확실하면 천하없어도 평안이 없습니다. 자기 집이 없는 사람은 어딘가 모르게 불안한 마음으로 살아가듯이, 분당으로 일산으로 뛰어다니느라고 허둥대고 살아가는 것처럼, 미래와 내세와 천국이 확립되지 않은 사람은 세상을 자신 없이 허둥대며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몸이 조금만 아파도 덜컥 겁이 납니다. 가까웠던 친구 하나만 죽어도 온몸에 힘이 쭉 빠지는 경험을 하게 됩니다. 모두 내세가 확립되지 못해서 그렇습니다.
사도 바울의 마음속은 복음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그의 머리 속은 천국으로 꽉 차 있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어디에 가서 입만 열면 복음이 술술 나왔습니다. 그리고 입만 열면 예수, 부활, 십자가, 천국에 대한 말이 술술 터져 나왔습니다. 바울에게는 오로지 복음뿐이었습니다.
사느냐, 죽느냐 그 따위 문제들에 대해서는 관심조차도 없습니다. 사람이 병들었다, 죽었다 그런 것에도 관심이 없습니다. 오로지 복음입니다. 저 사람의 복음이 확실하냐, 아니냐 그것만이 관심일 뿐입니다.
우리는 바로 이점을 분명히 해야 합니다. 돈을 벌었느냐, 못 벌었느냐 그것은 그렇게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좋은 학교에 갔느냐, 못 갔느냐 그것도 근본적인 문제가 될 수 없습니다. 무엇보다도 그에게 믿음이 있느냐, 없느냐가 중요한 일입니다.
여러분들이 집에서 아이들에게 무엇에 대해서 첫 번째 관심을 나타내십니까? 아이들은 어른들의 눈치를 생각보다 더 잘 알아차립니다. 우리 어머니는 학교 성적을 최고 우선으로 여긴다든지, 교회 생활을 더 소중히 여긴 다든지를 아이들은 너무나 잘 압니다.
그래서 우리 어머니는 나의 신앙과 영적인 성장에 가장 관심이 많으시다 는 것을 확실하게 보여 주어야 합니다. 한마디로 우리 어머니는 믿음을 제일로 여기신다는 것을 아이들이 알게 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 우리 어머니는 돈을 제일 좋아한다든지, 아버지와 싸울 때는 극성이다라는 식으로 인식이 되면 그 다음에 아무리 예수 잘 믿으라고 해도 소용이 없습니다.
이제 결론을 짓겠습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뭐니 뭐니 해도 평안입니다. 마음의 평안, 정신과 영적인 평안, 신앙의 평안, 하나님과의 평안, 주 안에서의 평안, 이 평안은 세상에서 얻어지지 않습니다.
여러분, 헛수고하지 마십시오. 혹시 세상에서 얻어진다 해도 그것은 일시적인 것입니다. 주님이 주시는 평안이 참 평안입니다. 그런데 이 같은 평안은 그냥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거듭나야 합니다. 분명한 것은 목적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주님께 매여야 합니다.
그리고 내세관이 확립되어야 합니다. 이렇게 되면 하늘이 주시는 참 평안이 우리의 마음 가득히 채워지는 것입니다. 이 평화가 이 시간 여러분들에게 주어지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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