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상의 은혜! (엡 3:7-9)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이렇게 고백을 하고 있습니다.
7절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을 따라 내가 일군이 되었노라" 8절 "모든 성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보다 더 작은 나에게 이 은혜를 주신 것은 측량할 수 없노라"
사도 바울은 감사가 무엇인지를 알고 살았던 사람입니다. 그는 기쁨이 어디에서 나오는지도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성경 본문에서 이렇게 힘주어 고백하고 있습니다. "모든 성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보다 더 작은 나에게 이 은혜를 주신 것은 측량할 수가 없노라"
여기서 우리는 세상을 살아가면서 최상의 은혜를 발견해 내는 비결을 배우게 됩니다.
첫째는 나의 생활 속에서 아주 조그만 감사의 조건을 찾아내는 일입니다.
최상의 은혜는 나의 생활 속에서 아주 조그만 감사의 조건을 찾아내고, 아주 보잘것없어 보이는 축복의 조건을 찾아내서 그것으로 인해서 행복해 할 줄 알고, 감사할 줄 알고, 기뻐할 줄 아는 지혜를 가지는 것......이것이 최상의 은혜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하나님으로부터 구원을 받고 은혜를 받고 나서 고백하기를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은혜를 측량할 수가 없다."고 하였습니다. 은혜를 받고 보니 모든 것들이 감사할 뿐입니다. 큰 것은 큰 것대로 감사하고, 작은 것은 작은 것대로 감사했습니다.
심지어는 자신의 약함조차도 감사한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에베소 감옥에 갇혀 있으면서도 감사했습니다.
그는 감사의 원리를 알고 살아갔던 사람입니다. 최상의 은혜는 이렇게 아주 보잘것없는 것에서 기쁨을 찾아내는 지혜를 갖는 것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큰 것에만 눈길이 갑니다. 작은 것에는 마음이 가지도 않습니다. 관심조차 갖지 않습니다. 남의 집 아들 일등 하는 것만 눈에 보이고 내 아들 건강하게 자라는 것은 눈에 보이질 않습니다.
사실 일등 하는 것보다 건강하게 자라 주는 것이 몇 배나 더 좋은 일인데도 그것이 눈에 안 보입니다. 이렇게 설교하면 여러분들은 "아멘" "그렇습니다."하고 받아 수용해야 합니다. 그런데 요즘 어머니들은 그렇게 받아들이지 않고 말하기를 "일등도 하고, 건강도 하면, 더 좋지 않느냐"고 대답합니다.
현대의 어머니들은 이렇게 야무집니다. 이렇게 욕심이 많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살아가면 살아가기가 힘듭니다. 그리고 피곤합니다. 그러니까 누구보다도 많이 소유하고, 누리고, 살아가면서도, 마음은 여전히 공허한 것입니다. 어쩐지 마음이 허전합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은 그 마음속이 너무 빈약해서 감사함이 자리를 잡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기쁨과 만족함이 자리를 잡을 만한 여유가 없기 때문입니다.
남들이 큰돈을 벌어들인 것만 생각하기 때문에 우리 가정이 그동안 평안하게 살아온 것이 기억에 남지 않습니다. 사실 가정의 평안은 돈으로 살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그것을 잊어버리고 삽니다. 우리는 일상적으로 주어지는 은혜와 축복을 감사할 수 있어야 합니다. 작은 것에 감사할 수 없으면 큰 것이 주어져도 감사할 수가 없습니다. 작은 것의 소중함을 모르는 사람은 큰 것에도 소중함을 느끼지 못합니다.
유대인들은 자기들에게 주어진 유산이 소중한 줄을 몰랐습니다. 자기들에게 주어진 신앙이 얼마나 소중한 줄도 몰랐습니다. 그러고는 늘 애굽을 동경했습니다. 애굽의 막강한 힘이 부러웠습니다. 애굽의 찬란한 문화도 부러웠고 심지어는 애굽 사람들이 섬기는 눈에 보이는 신들도 신비스럽게 보였습니다. 그래서 마음을 모두 애굽에 두었습니다.
이런 백성에게 하나님은 선지자의 입을 통하여 말씀하시기를 "네 실로암을 업신여기지 말라."고 경고하셨습니다. 그런데도 유대인들의 마음속에는 답답하게 흐르는 실로암의 물줄기가 시원치가 않았습니다.
자꾸만 유유히 흐르는 나일강이 부럽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나중에 애굽의 문물을 수입합니다. 나중에는 애굽의 우상도 수입을 합니다. 이제는 유대인들의 정신 속에, 의식 속에, 생활 속에, 애굽적인 것이 가득 차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결국에 가서는 애굽의 물결에 빠져서 나라가 망해 버리고만 것입니다.
우리는 작은 것에 유의해야 합니다. 작은 것을 고마워할 줄 알아야 큰 것에도 고마워할 줄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옛말에 작은 죽음을 조심하라고 했습니다.
죽음에도 작은 죽음이 있습니다. 이를테면 게으름, 허송 세월, 과식, 폭주, 환락, 이런 것들이 작은 죽음입니다. 불평, 불만, 원망, 시기, 남의 탓, 이런 것들이 작은 죽음입니다.
이런 것들은 아무것도 아닌 것 같지만 이런 것들이 모이고 모이면 사람을 죽입니다. 사람을 좀먹고 갉아먹습니다.
고목나무가 넘어지는 것을 보십시오. 그 고목나무가 어느 날 갑자기 넘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오랜 세월 동안 비를 맞고, 눈을 맞고, 개미가 알을 슬고, 얼었다 녹았다 하는 이 작은 죽음들이 모이고 모여서 어느 날 이 거대한 고목나무가 쓰러지는 것입니다.
한 나라의 패망도 마찬가지입니다. 서구의 옛 제국들이 망한 것을 보면 어느 날 갑자기 망한 것이 아닙니다. 오랜 세월 동안 조그만 죽음들이 모여서 어느 날 제국이 소리 없이 무너지고 역사 속에서 사라지게 되었던 것입니다.
로마 제국이 그랬습니다. 토인비는 그 거대한 로마 제국이 망한 것은 "인간성의 쇠퇴에 있다."고 하였습니다. 이를테면 로마인들이 정신적으로 죽어갔기에 결국 그 나라가 망하게 된 것이라는 것입니다.
미래학자 슈펭글러는 장차 오늘의 서구 세계도 그렇게 망하고야 말 것이라고 예언을 하였습니다. 오늘의 서구인들이 그 좋은 유산과 문화를 소유하고 있으면서도 너무 무절제하게 살아가기 때문에 영이 타락하고, 정신이 타락하고, 도덕이 무너지고, 순수성이 쇠퇴해서, 결국에 가서는 로마 제국이 망했듯이 오늘의 서구 제국도 그렇게 망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오늘의 미국이 그렇습니다. 미국은 최첨단 과학 무기를 만들어 내는 나라입니다. 성능이 우수하고 정교하고 정확한 고가 품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무기를 다룰만한 사람이 없다는 데 있습니다. 오늘의 미국의 병사들은 이 같은 무기를 사용하는 사용 설명서마저도 해독하기가 어렵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공부를 하지 않아서입니다. 왜 공부를 하지 않느냐 하면 적당히 살자는 의식 때문입니다. 적당주의, 쾌락주의에 젊은이들이 물들어 있습니다. 실직을 해도 수당이 나옵니다. 가난해도 수당이 나옵니다. 늙어서 일을 못해도 수당이 나옵니다. 그런데 무엇 때문에 고민하면서 공부를 하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고등학생 가운데에도 애 엄마가 많다는 것입니다. 이 아이들이 학교에 가는 모습을 보면 가관입니다. 엄마 고등학생은 기저귀 가방을 들고 학교에 가고, 애비 고등학생은 유모차를 끌고 학교에 갑니다.
그러니 그들이 무슨 공부를 하겠습니까? 그들의 머리 속에 무슨 희망이 있고, 비전이 있고, 그런 가슴속에 무슨 꿈인들 자리 잡고 있겠으며, 그런 그들의 의식 속에 무슨 이상인들 자리 잡고 있겠습니까? 이 같은 작은 죽음들이 모이고 또 모이면 결국 한 개인만을 죽이는 것이 아니고 한 나라가 망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이 같은 작은 것들을 유념해야 합니다. 작은 은혜, 작은 축복을 귀중하게 여겨야 합니다. 이 작은 것들을 소중히 여기고 간직하는 생활을 하면 생활 마디마디가 감사할 뿐입니다. 그리고 작은 죽음, 작은 암적 요소가 무서운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이런 것들이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보이지만 이것들이 모이고 모이면 아주 무서운 파괴를 가져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늘 감사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가 아주 작은 것에도 감사할 수 있었던 것은 그 작은 것에서 하나님의 손길을 발견했기 때문이고 그 속에서 감사함의 질을 발견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이 내게 주신 은혜를 측량할 수가 없다고 고백한 것입니다.
둘째는 주님을 알게 된 것을 감사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무엇보다도 내가 주님을 알게 된 사실에 감사해야 합니다. 나는 내가 주님을 알게 되었고, 믿게 되었고, 거기다 지금 목사가 된 것이 너무나 감사할 뿐입니다. 나도 늦게, 나이를 먹은 후에 예수를 믿게 되었더라면 신앙을 갖기가 그리 수월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성격상 아주 쉽게 받아들였을 것 같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다행스러운 것은 나는 아주 어렸을 때, 아무것도 모를 그때, 어머니의 손에 이끌려서 교회를 다니기 시작하였고 경건한 예배에 참석하는 데 익숙해졌습니다. 그렇게 해서 아주 자연스럽게 신앙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것 때문에 나는 커 가면서도 신앙에 대한 갈등이나 회의 같은 것을 한 번도 느껴보지 않고 자라갈 수 있었습니다.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모릅니다. 그래서 나는 나의 어머니께 특별히 감사한 마음을 항상 가지고 있습니다.
여러분들도 그런 생각을 가지고 계실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어떤 과정을 거쳐서 주님을 알게 되었든 지간에 지금 여러분들이 예수의 사람들이 되었다고 하는 것은 그 어떤 것보다도 감사한 일입니다. 농부가 밭에 씨를 뿌렸다고 해서 다 결실 하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씨는 길가에 떨어져서 새들이 먹어 버립니다. 어떤 씨는 돌짝 밭에 떨어져서 자라지 못하고 죽습니다. 겨우 옥토에 떨어져야 결실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보면 떨어진 씨 중에서 겨우 사분지 일만이 결실 한다는 이야기가 됩니다.
우리들이 사천만 우리 백성 중에서 천만의 그리스도인 가운데 속하게 된 것이 축복입니다. 그 천만 중에도 명색만 신자인 사람이 많습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충성되게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사람이 된 것, 이것은 어쩌면 기적입니다.
하나님을 믿고 싶어도 믿어지지가 않아서 못 믿는 사람이 얼마입니까? 믿었다가도 도중에 떨어져 나가는 사람이 얼마입니까? 그런데도 오늘 내가 하나님 앞에 나와서 예배를 드리는 사람이 되었다는 것은 분명 축복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이 같은 것들을 생각하면 할수록 감사했던 모양입니다.
그는 고백하기를 "모든 사람 중에 지극히 작은 자보다 더 작은 나에게 이 은혜주신 것을 측량할 수가 없다."고 하였습니다. 이것이 감사입니다. 여러분, 여러분들에게 오늘이 있기까지에는 그냥 넘겨 버릴 수 없는 하나님의 은총과 축복이 있었음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모세를 부르신 과정을 보십시오. 하나님이 모세를 부르신 것은 그의 나이 80세 때입니다. 그렇지만 그를 80세에 부르시기 위해서 하나님은 그가 태어날 때부터 섭리하셨습니다.
그가 때어나자마자 나일강에 버려진 일, 갈대 상자 속에 넣어져 떠내려가는 것을 바로의 공주의 손으로 건져내게 하신 일, 궁중에서 교육받고 자라는 일, 살인하고 미디안 광야에서 40년 동안을 고되게 훈련을 받는 일 등 이것이 우연한 일들입니까? 하나님은 그를 80세에 부르시기 위해서 그의 삶 마디마디 속에서 섭리하신 것입니다.
여러분들도 태어나서 오늘 이 시간까지는 많은 사건이 있었을 것입니다. 기뻤던 일, 슬펐던 일, 병들었던 일, 암담했던 일 등, 그러나 그런 일들이 있었으므로 오늘의 여러분들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감옥에 있으면서도 찬송을 불렀습니다. 주님을 핍박하고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하고 동족을 괴롭혔던 자신이 주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고 거기다 사도가 되었으니 이것이 보통의 일입니까? 그런 사실을 생각하면 이것은 너무나 기적 같은 일이고 감격스러운 일입니다.
그래서 감옥에 앉아 있으면서도 찬송을 부를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은혜가 은혜인 줄을 알았기 때문에 이렇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최상의 은혜입니다.
바울은 이 같은 은혜 속에서 살아간 사람입니다.
셋째로 내가 주님의 일꾼이 되었다는 것을 감사하는 것입니다.
은혜를 주신 것뿐만 아니라 주님을 위해서 일할 수 있게 된 것이 더욱 감사한 일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내가 그리스도의 일꾼이 되었다."하고 기뻐했습니다. 아마 주님의 제자가 되고 사도된 것을 바울처럼 기뻐하며 좋아했던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어떤 어머니는 어린 아이가 다니는 학교를 위해서 일을 해주느라고 열심입니다. 매일같이 학교로 출근을 합니다. 언제 보아도 바쁩니다. 그런데 그에게 구역 예배를 드리자고 하면 바빠서 못하겠다고 일언지하에 거절합니다.
그런 분은 "내가 주님의 일꾼이 되었다"하고 기뻐하는 바울의 그 기쁨이나 그 심정을 모릅니다.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러기에 그런 사람은 세상에서 재미를 찾고 있는 것입니다.
신앙이 깊어지려고 하면 무엇보다도 우리 주님을 깊이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주님을 깊이 있게 사랑해야 합니다. 그런 후에는 드리기에 힘써야 합니다. 마음도 드리고, 정신도 드리고, 모든 것을 드리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의 생활 속에 주어지는 아주 조그만 은혜들도 커다란 은헤로 알게 되는 복을 받습니다. 그때에 우리의 생활 속에는 비로소 감사함이 스며들게 되고, 기쁨이 마음속에 자리 잡게 되고, 보다 더 귀한 것을 귀하게 여기는 지혜가 주어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최상의 축복입니다.
그 래서 사도 바울은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주의 은혜의 선물을 따라 내가 일꾼이 되었노라 모든 성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보다 더 작은 나에게 이 은혜를 주신 것은 측량할 수가 없도다." 이것이 은혜를 은혜로 알고 살아가는 최상의 그리스도인의 삶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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