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욱 많이 힘쓰라! (살전 4:1-2)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한 가지 중요한 생활의 목표가 있다면 그것은 "더욱 많이"라는 말일 것입니다. 예수를 섬기되 더 많이 섬기고, 예수를 위하여 살되 더 깊이 있게 살고, 세상에서 살되 더 열심히 사는 것,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의 원리일 것입니다.
본문에서는 더욱 많이 힘쓰라고 하였습니다. 이 날은 하나님이 기뻐하실 일을 위하여 더욱 많이 힘쓰라는 말입니다. 즉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하여 힘쓰라는 말입니다.
이것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궁극적인 생활의 목표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삶의 목적은 이렇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살아가는 데 있습니다.
그러면 구체적으로 무엇을 하여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입니까? 우리 그리스도인에게는 살아가면서 보다 더 많이 힘을 써야 할 본질적인 문제가 세 가지 있습니다.
첫 번째는 "예수님을 더 깊이 알기 위해서 힘쓰는 일"입니다.
우리가 깊이 있는 신앙인이 되려고 하면 무엇보다도 예수님에 대해서 깊이 알아야 합니다. 깊이 있게 알지 못하고 어렴풋하게 알기 때문에 온갖 오해가 발생되고, 그릇된 행동이 나오게 되고, 잘못되는 사람들이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를 깊이 있게 알지 못하기 때문에 주님의 뜻을 알 수가 없고, 그의 가르침을 잘못 이해하게 되고, 오히려 신앙의 깅에서 걸림돌의 역할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시기 전날입니다. 예수님이 지금 얼마나 번뇌하시는 시간입니까? 고난의 시간은 다가오고 있고, 그의 심정을 아는 사람은 없고, 무척이나 고뇌스러운 시간입니다.
이 때 제자들은 모여서 "우리 중에 누가 더 높으냐"하고 다투고 있습니다. 또 어느 제자는 주님께서 영광을 받으시게 되거든 나는 주님의 오른편에 그리고 내 동생은 주님의 왼편에 앉게 하여 주십시오. 하고 청탁을 하였습니다.
어째서 이 같은 어처구니없는 행동들이 나오는가 하면 예수님을 깊이 있게 몰라서 그렇습니다. 모르면 이렇게 되는 것입니다. 그들이 3년 동안이나 주님의 곁에서 배우고 가르침을 받았으면서도 주님을 모를고 있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한심한 노릇입니까?
모르면 잘못된 신앙의 모습이 나올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뿐이 아닙니다. 모르면 주님께 방해자가 되고 누를 끼치는 사람이 됩니다. 이것이 얼마나 큰 죄입니까? 그래서 오늘의 많은 그리스도인들 중에는 방해꾼도 있고, 훼방꾼도 있고, 십자가의 길에 걸림돌 같은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주님을 깊이 아는 일에 더욱 힘쓰라고 한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깊이 알려고 하면 먼저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관심을 가지고 말씀을 읽고 묵상하고 공부해야 합니다.
그러면 보다 더 깊이 있게 주님을 알 수 있고 주님을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때 비로소 주님을 이해하게 되고, 사랑하게 되고, 주님의 부름에 응답하게 되는 것입니다.
어떤 여인이 책 한 권을 사서 읽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이 책이 재미가 없습니다. 읽기는 읽어도 머리에 들어오지를 않습니다. 그래서 읽다가 포기하고 던져 버렸습니다. 그리고 얼마 후에 결혼을 하였습니다. 결혼하고 보니까 자신의 남편이 바로 그 지루한 책의 저자입니다.
그래서 그 책을 꺼내서 다시 읽어보았습니다. 그랬더니 그 책이 얼마나 재미가 있는지 앉은자리에서 다 읽었다고 합니다. 그 책이 왜 갑자기 재미있어진 것입니까? 그것은 관심입니다. 관심을 가지고 읽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쓴 책이라 애정을 가지고 읽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깊이 알려고 하면 관심과 애정을 가지고 그분의 글과 말씀과 교훈이 들어 있는 성경을 읽고 공부하고 묵상하여야 합니다.
그렇게 하면 주님을 더욱 깊이 있게 알게 되고 만나게 되고 접하게 됩니다. 그때에야 비로소 주님의 제자가 되는 것이고 주님의 생각을 품게 되는 것이고 그 같은 생각과 정신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이 그리스도인인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더욱 힘쓰라고 한 것입니다. 우리는 무엇보다도 주님을 깊이 알기 위해서 힘써야 합니다.
두 번째는 "주님을 더 사랑하기 위해서 힘쓰는 일"입니다.
주님을 깊이 아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주님을 더 사랑하도록 힘써야 합니다. 여러분은 주님을 정말로 사랑한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습니까? 그동안 우리는 말로는 많이 사랑하여 왔습니다. "아골 골짝 빈 들에도 복음 들고 가오리다" 하고 찬송도 힘있게 불렀습니다.
주님의 뜻대로 살겠다고 다짐도 했고 기도도 많이 했습니다. 그런데 지금 생각해 보면 모두가 말뿐이었음을 고백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은 비단 우리들뿐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가장 사랑하셨다는 베드로도 예수님이 지켜보시는 앞에서 배반하였습니다.
그것도 한 번도 아니고 세 번씩이나, 맹세까지 하면서 배신한 것입니다. 가룟 유다도 입장이 불리해지니까 스승을 팔아먹었습니다. 데마는 옛 생활을 잊지 못해 전도의 길에서 그만 옛 생활로 돌아가 버리고 말았습니다.
여러분, 정말 주님을 사랑하십니까? 우리는 무엇보다도 주님을 더 깊이 알기 위하여 힘써야 하고, 주님을 더 많이 사랑하기 위하여 노력하여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어진 가장 큰 사명입니다.
주님을 모르고, 주님을 사랑하지 못하면, 그는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그는 신앙인은 될 수 있을지는 몰라도 그리스도인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이 일에 더욱 힘쓰라고 당부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주님을 사랑하는 것을 무엇으로 알 수 있습니까? 그것은 말만으로는 안 됩니다. 수고가 뒤따라야 합니다. 주님을 위해서 땀을 흘려야 합니다. 수고를 아끼지 말아야 합니다. 손해를 감수하여야 합니다.
예수님을 위하여 시간도 손해를 보고, 물질도 손해를 보고, 개인적인 행복도 좀 손해를 볼 줄 알아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주님 때문에 결혼도, 개인적인 행복도 포기했습니다.
모세는 하나님을 위해서 공주의 아들이라는 자리도 내놓았습니다. 나 때문이라면 술도, 취미도, 오락도 버릴 수가 없지만 주님 때문이라면 그 이상의 것도 과감하게 버릴 수가 있다는 이 손해 의식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고 나서야 "내가 주님을 사랑합니다."하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앙입니다.
역사적으로 보면 주님을 사랑한 사람들이 많습니다. 하나밖에 없는 자기의 목숨까지 버린 순교자들도 있습니다. 그 중에는 주기철이라는 목사님이 있습니다. 그 분은 경상도 사람입니다.
그는 경상도 사나이답게 우직하리 만큼 주님을 사랑하다가 죽었습니다. 그느 일제 시대에 신사참배를 거부한다고 체포되어 고문을 받았습니다.
첫 번째 고문은 온몸을 묶은 다음에 천장에 매달아 놓았다가 갑자기 시멘트 바닥에 떨어뜨리는 고문입니다. 그러면 온몸이 부서지고 깨지고 피투성이가 됩니다. 그래서 그의 이름이 주기철입니다.
이름의 뜻 그대로 주님을 위해서 철저하게 붉은 피를 흘린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그래도 말을 듣지 않으니까 2차 고문을 합니다. 2차 고문은 입만 남겨 놓고 온 몸의 구멍을 반창고로 막은 다음에 물 속에 집어 넣는 고문입니다.
그러면 물을 실컷 마셔서 배가 불러 옵니다. 그러면 눈이 튀어 나올까봐 반창고를 눈에다 이중 삼중 붙여 놓습니다. 그렇게 4년 동안을 보냈습니다.
여러분 순교자에게는 죽음이 무서운 것이 아니고 시간이 무서운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으로부터 독자 이삭을 잡아 바치라는 신탁을 받고 나서 아들을 잡아 제사를 지내기 위하여 사흘 길을 걸어갑니다.
당장에 잡아 바치라고 했으면 오히려 쉬웠을 것입니다. 아들을 데리고 모리아 산까지 가야 하는 그 3일 길이 피를 말리는 시간입니다. 시간이 더 아픈 고문입니다.
주기철 목사! 시간이 자꾸만 갑니다. 생각했던 것보다 죽음의 시간이 자꾸만 지연되어 갑니다. 그래서 "주님 이러다가 마음이 약해져서 순교를 못할까 그것이 걱정됩니다."하고 기도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때마다 사모가 면회를 옵니다. 와서 남편의 모습을 보는 부인의 심정은 아팠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오자마자 남편에게 하는 첫 마디는 "여보, 당신은 꼭 순교를 해야 합니다."였다는 것입니다. 마음이 약해질까 봐서입니다. 이 말은 쓸데없이 마음이 약해지면 안 된다고 다그친 말입니다.
그도 여자인데 왜 위로의 말 한마디 하고 싶지 않았겠습니까? 퉁명스럽게 한마디하고 돌아가는 아내를 보고 주기철 목사가 마지막 한마디 한 말이 있습니다.
"여보 나 따뜻한 숭늉 한 그릇 마시고 죽고 싶소." 그리고 이틀 후에 죽었습니다. 그는 마지막에 죽어가면서 "주님, 내가 주님을 사랑합니다. 이제 내 영혼을 받으소서."라고 기도하고는 장엄하게 순교하였다는 것입니다.
이 같은 사람에게 하나님은 무엇을 아끼시겠습니까? 이것이 주님 사랑입니다. 여기에 백분지 일만큼이라도 주님을 사랑하고 나서 "주님, 나에게 복을 주세요."해야 그 기도가 합당한 기도가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성경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하여 더욱 힘쓰라고 한 것입니다.
세 번째는 "더 많이 드리기 위해서 힘써야"합니다.
신앙 생활은 봉헌하는 생활입니다. 우리는 이미 받을 것 다 받았기 때문에 드리는 생활을 하여야 합니다. 주님을 위해서 시간을 드리고 땀을 드리고 나의 정신과 마음과 뜻과 물질을 드려야 합니다.
신앙 생활은 나의 모든 것을 기꺼이 드리는 헌신의 생활입니다. 주님은 이미 우리를 위해서 다 주셨습니다. 영광도, 보좌도, 생명도 다 우리를 위해서 아낌없이 버리셨습니다. 이제는 우리가 드리고 봉헌할 차례입니다.
신앙인들이 참 기쁨을 얻는 순간은 나의 모든 것을 봉헌하고 드릴 때입니다. 행복한 마음을 뜻을 둔 곳에 마음을 다 기울여 일할 때 우러나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복을 받고 싶은 마음은 간절한데 드리는 마음은 그렇게 인색할 수가 없습니다.
주일 하루를 드리는 데도 그렇게 힘겨워 할 수가 없습니다. 주일 하루가 아니고 한 시간입니다. 일주일에 이 한 시간을 드리는 데도 그렇게 핑계가 많습니다. 그러니까 자꾸 흔들립니다. 자주 넘어집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은 기도 생활이 없고 말씀을 읽고 공부하고 묵상하는 시간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바치고 드리고 헌신하는 삶도 없습니다. 그러니 어디에서 힘이 나오고 어디에서 정신이 나오겠습니까? 그래서 숫자로는 이 땅에 그리스도인이 천만 명이 넘는다고 하지만 제 구실을 다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신앙뿐이 아닙니다. 우리 민족은 여러 면에서 기초가 약합니다. 오늘 돈 좀 벌었다고 살아가고 있는 모습들을 보십시오.
무분별한 사치와 방종, 끔찍한 범죄들과 사회 비리 현상, 돈만 있으면 다 되는 줄 알고 살아가고 있는 몰지각한 사람들, 이 같은 모습들은 모두 정신이 약하고 의식이 부족하고 기초가 약한 데서오는 현상들입니다. 돈은 있는데 그 돈을 효과 있게 사용할 줄 아는 의식이 없습니다. 그래서 방종으로 치닫는 것입니다.
집을 짓는 것을 보아도 순식간에 지어 놓습니다. 그러고는 1년도 못가서 금이 가고, 비가 새고, 지반이 내려 앉습니다. 길을 포장하는 데도 1주일도 못 가서 땜질이 시작됩니다. 왜 이렇습니까? 기초가 약해서 그렇습니다. 일하는 데에 성실성이 없습니다. 진지하지가 못합니다.
여자들이 화장하는 것도 그렇습니다. 일본의 화장품은 기초 화장에 역점을 두고 화장품을 개발해 낸다고 합니다. 그래서 일본의 화장품은 기초 화장품이 주류라고 합니다.
이 같은 화장품은 얼굴에 바르면 은은하게 기초를 든든히 해주기 때문에 일찍부터 효과를 주고 주름을 미연에 방지해 줍니다. 이것이 화장품이 하는 일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화장품은 포장요 화장품 일색이라고 합니다. 메이컵에 아주 능합니다. 밖에 다 바르는 데 아주 좋습니다. 기초는 약한 데 겉에 바르는 것은 아주 진하고 화려합니다.
그 결과 화장을 했을 때는 그럴 듯한데 집에 가서 벗기고 나면 딴 얼굴이 되고 맙니다. 그래서 여자들이 갑자기 누가 찾아오는 것을 싫어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땅에 그리스도인이 천만이나 된다고 하지만 대다수의 사람들은 이 같은 사람들입니다. 그냥 들떠 있습니다. 부풀어 있을 뿐입니다. 바쁘기는 왜 또 그렇게 바쁩니까? 매일 보면 뛰어 다닙니다.
그러니 성경 한 장 읽을 시간이 있습니까? 그 말씀을 읽고 나서 묵상하고 생각할 여유가 있습니까? 겉에서 보면 모두가 열심히 있어 보이고 그럴 듯하게 보이기는 하는데 정작 속을 들여다보면 있어야 할 영감이 없습니다. 용기가 없습니다. 영감도 없고, 용기도 없으니, 액션이 이루어질 수가 없습니다. 그 같은 사람에게 십자가를 지라고 하면 그가 십자가를 질 수 있겠습니까?
여러분, 영적인 힘이 무엇입니까? 내가 은혜를 힘입고 내가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연구하고 묵상하게 되면 그 말씀을 통해서 내 중심에 변화가 일어나게 되는데 그렇게 되면 내 안에서 힘이 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이 힘을 영적인 힘이라고 합니다.
성경은 이 힘을 "성령의 능력"이라고 하였습니다. 이 힘을 지니고 살아가게 될 때 주님을 사랑하게 되고, 주님을 위해서 헌신하게 되고, 드리게 되고, 수고하게 되는데, 이 힘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을 그리스도인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본문에서 더욱 힘쓰라고 한 것입니다. 그럼 무엇을 위하여 힘쓸 것입니까? 우리 그리스도인은 적어도 세 가지를 위해서 힘써야 합니다. 그것은 주님을 보다 더 깊이 알기 위해서 힘써야 합니다.
주님을 더 사랑하기 위하여 힘써야 합니다. 또한 주님께 더 많이 드리기 위하여 힘써야 합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 주님은 우리에게 가까이 오시고 더 큰 힘을 더하여 주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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