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자 인생! (삼상 16:7)
본문 말씀의 제목을 "하자 인생"이라고 정하였습니다. 결점이 많은 인생이라는 뜻입니다.
엊그제 한 젊은이가 찾아왔습니다. 와서는 "나는 왜 세상에서 가진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습니까?" 하고 탄식을 합니다.
"배운 것이 있나, 유산이 있나, 재질이 있나, 가정적인 배경이 있나, 그렇다고 잘난 것도 아니고 나는 뭡니까?"하고 하소연을 합니다.
아마 직장을 얻으려고 단 보다가 걸리는 것이 많았던 모양입니다. 오늘날같이 능력 위주의 사회에서 그리고 자격증의 시대에서 뭔가 가지고 있는 것이 없는 사람은 자기 자리를 확복한다는 것이 어려운 일입니다. 아마 이 청년도 그래서 고민을 하고 낙심을 하다가 찾아 온 것 같습니다.
그래서 이 청년에게 몇 살이냐고 물었습니다. 21살이라고 합니다. 이 청년에게 진지하게 위로해 주었습니다. "너에게는 젊음이 있지 않니? 젊음이 가장 큰 자본이야, 젊음은 어느 유산보다도 훨씬 더 좋은 가능성이야, 네 손을 보아라, 그 튼튼한 손을 가지고 있으면서 무엇이 더 필요하니" 그리고 돌려 보냈습니다.
위로가 되었는지는 모르지만 아마 그 말을 이해하기까지는 좀더 아픔이 계속될 것입니다. 사람이면 모두 그 같은 생각을 하게 됩니다. 있는 사람은 있는 사람대로, 없는 사람은 없는 사람대로, 자기의 위치에서 그런 생각을 하게 마련입니다.
완벽하게 조건을 다 갖추었다고 해서 그것이 능사는 아닙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움직이시는 과정을 보게 되면 대개 완벽하다고 생각되는 사람은 사용하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대개 약점이 있는 사람, 좀 부족한 점이 있는 사람을 골라서 사용하시고, 일을 맡기십니다.
자격을 완벽하게 갖춘 사람, 완벽하다고 스스로 느끼는 사람은 부족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보다 더 큰 약점이 있습니다. 그것이 자만 의식이고, 교만 의식입니다. 그런 사람은 성실성이 없습니다. "나는 부족하다"하는 생각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이 훨씬 더 성실하고, 인간적이고, 삶의 모습이 더 진지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런 사람들을 통해서 일을 하십니다.
하나님의 생각은 사람들의 생각과 다릅니다. 판단도 사람의 판단과 다릅니다. 사람은 보이는, 어떤 나타나 있는 현상을 보고 판단을 합니다. 사람을 선택할 때도 좋은 조건을 지닌 사람을 고르고, 되도록 보이는 조건을 우선합니다. 배우자를 고를 때도 어떤 사람이냐를 보기 전에 그 사람이 무엇을 하는 사람이냐를 먼저 봅니다. 그래서 사람들을 모두 일류를 지향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생각은 우리의 이 같은 생각과는 너무나 다릅니다. 판단이 다르고 보시는 관점이 다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생각과 판단을 알아야 합니다. 알아야 그분으로부터 관심을 얻게 되고 은총을 얻게 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이렇습니다.
1. 하나님이 이스라엘이라는 공동체를 만드시기 위해서 한 사람을 필요로 하셨습니다.
그는 장차 하나님의 백성을 이끌어 가야 할 사람이기 때문에 보다 훌륭한 사람이어야 합니다. 그래서 뽑은 사람이 아브라함입니다. 그는 손색이 없는 사람입니다. 결단력도 있고, 꿈도 있고, 개척 의지도 있는 그런 사람입니다.
그래서 고향에서 잘 살고 있는 아브라함을 하나님이 불러 내셨습니다. 그리고는 그에게 약속하셨습니다. "내가 너에게 젖과 꿀이 흐르는 넓은 땅을 주겠다. 그리고 바다의 모래처럼, 하늘의 별처럼, 많은 자손을 주겠다."
이 같은 계획이 있다면 하나님은 아브라함처럼 그의 부인도 완벽한 사람을 선택했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자손을 모래처럼 많게 하시려면 우선 아이를 많이 나을 수 있는 여인이어야 합니다.
그래서 튼튼해야 하고, 다산할 수 있는 체질을 타고 난 여인을 골라야 합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의 부인은 하자가 많은 여인입니다. 우선 나이가 많습니다. 거기다 결정적인 하자는 아이를 못 낳는 여인입니다.
창세기 11:30을 보면 애초부터 불임 여인입니다. "사래는 잉태하지 못하므로 자식이 없었더라 " 지금부터 쌍둥이로, 그것도 연년생으로 낳아도 어려울 판인데 그런 희망이라고는 전혀 없습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아브라함 부부를 선택하셨습니다. 이 점부터가 사람의 생각과 다릅니다. 사람의 생각대로라면 먼저 대대로 아이를 많이 낳은 집안의 딸을 골랐을 것입니다. 그리고 생리적으로 다산 체질의 여인을 골랐을 것입니다. 그래야 좀 늦기는 했지만 지금부터라도 많이 낳게 해 보려고 시도할 것입니다.
또 이삭도 그렇습니다. 이삭은 아브라함이 100세에 가서 겨우 얻은 아들입니다. 지금 그들에게는 시간이 없는데도 이 아들을 결혼시키려고 애를 쓰다가 나이 40이 되었습니다. 가까스로 얻은 며느리가 리브라입니다.
이 여인도 하나님이 골라 뽑으신 여인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너무나 거창했습니다. 그랬으면 며느리라도 아이를 많이 낳을 수 있는 여인이어야 합니다. 그런데 이 여인조차도 불림 여인입니다. 이삭이 나이 40에 결혼을 하였는데 60이 되어도 아이가 없습니다. 도무지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 답답하기만 합니다.
창25:21절 "이삭이 그 아내가 잉태하지 못하므로 그를 위하여 여호와께 간구하매 여호와께서 그 간구를 들으셨으므로 그 아내 리브가가 잉태하였더니"
창25:26절 "후에 나온 아우는 손으로 에서의 발꿈치를 잡았으므로 그 이름을 야곱이라 하였으며 리브가가 그들을 낳을 때에 이삭이 육십 세이었더라"
사람들은 완벽을 좋아합니다 일류를 좋아합니다. 그리고 고루 갖춘 사람을 좋아합니다. 노력을 하되 완벽 하려고 노력을 합니다. 그러다가 뜻대로 안 되면 고민을 하고, 안달을 하고, 어떤 사람은 자살하기까지 합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의 생각은 사람의 방법과는 사뭇 대조적입니다. 지금 시간은 없고 할 일은 많은데 하고많은 사람들 가운데서 사라같이 하자가 많고, 리브가같이 결점이 있는 여인을 통해서 일을 하시려고 하십니다. 도무지 이해가 안 됩니다.
또 모세도 그렇습니다. 모세가 얼마나 위대한 사람입니까? 그는 업적을 많이 남긴 사람입니다. 그래서 지금도 사람들은 그를 칭송합니다. 모세를 생각할 때 우리는 그를 위대하고 훌륭한 사람으로 생각을 하게 됩니다.
출애굽을 할 때 그는 약 300만이나 되는 백성들을 이끌고 애굽을 빠져 나온 사람입니다. 그 많은 사람을 통솔한 지도자입니다. 그렇다면 그는 탁월한 능력을 지닌 지도자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사실 알고 보면 모세는 그렇게 탁월한 사람이 아닙니다. 그도 결정적인 하자가 많은 사람입니다. 그것은 바로 말을 잘할 줄 모르는 결점입니다.
하나님이 애굽으로 가라 하실 때 그는 감히 못 간다고 버텼습니다. 그것은 겸손이 아닙니다. 말을 할 줄 몰랐기 때문입니다. 그가 말을 못하는 것을 하나님도 인정하셨습니다. 광야에서 백성들이 불평을 늘어놓아도 모세는 그들을 효과 있게 설득하지 못했습니다.
지도자가 말을 못한다는 것은 자질의 문제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의 옆에 말을 잘하는 아론을 붙여 줍니다. 아예 아론을 보내시면 좋을 텐데 굳이 말 못하는 모세에게 가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은 이런 큰 일을 하시는 데 왜 이 같은 사람을 사용하셨는지 우리는 이해를 할 수가 없습니다. 정치를 하고 애굽으로 중대한 임무를 띠고 협상을 벌이기 위해서 떠나는 대사가 말을 못해서야 무슨 일을 할 수가 있습니까? 그런데도 하나님은 모세를 택해서 애굽으로 보내십니다. 이 점이 우리들의 생각과 다른 점입니다.
다윗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스라엘의 42명 왕 가운데서 다윗은 가장 탁월한 왕이었습니다. 그는 왕 중의 왕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기억하기로는 다윗은 기골이 장대하고 용모가 준수하고 용맹이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도 오해입니다.
사무엘상 16장을 보면 하나님이 사무엘에게 "가서 이새의 아들에게 기름을 부어 왕을 삼으라"고 명령하십니다. 그래서 사무엘이 뿔에 기름을 채워 가지고 갑니다. 가면서 사무엘이 상상을 합니다.
"하나님께서 왕으로 택하신 사람이니 얼마나 잘 생기고 기골이 장대할까, 얼마나 잘났으면 하나님이 왕으로 선택하셨을까?" 혼자서 상상을 하면서 길을 가고 있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사무엘에게 주의를 주십니다. "용모와 신장을 보지 말라, 나는 중심을 보는 여호와니라."
이 말씀은 지금 택할 왕이 보잘것이 없는 사람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니 크게 기대하지 말라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도착해 보니 모두 준비를 하고 대기하고 있습니다.
첫째 아들을 면접했습니다. 잘났습니다. 기골이 장대합니다. 이만하면 왕의 자격이 충분해 보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지시가 없습니다.
그래서 둘째 아들을 면접합니다. 그도 손색이 없어 보입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의 응답이 없습니다.
셋째 아들도 훌륭합니다. 그러나 그에게도 응답이 없습니다. 4,5,6,7번째도 다 좋은 아들인데 하나님의 응답이 없습니다. 이상합니다. 아들들을 다 만나 보았는데도 하나님의 지시가 없습니다.
알고 보니 그들말고 말 째 아들이 하나 더 있습니다. 그런데 그의 아버지가 보아도 그는 왕감이 못 됩니다. 그래서 아예 들에서 양을 치고 있는 것을 불러들이지도 않은 것입니다. 그 아들이 다윗입니다. 다윗은 몸집이 왜소했고 형들에 비해서 너무나 부족했습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굳이 그를 불러다가 기름을 부으라고 하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사람을 선택하시는 방법입니다. 사람의 생각과는 너무나 대조적입니다. 사람들은 키를 보고, 생김새를 보고, 학벌을 보고, 외모를 봅니다. 그래서 나중에 가서야 눈물짓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이렇게 해서 하나님은 무지한 사람을 들어서 유식한 사람을 부끄럽게 하시고, 가난한 사람을 들어서 부한 사람을 부끄럽게 하시고, 못난 사람을 들어서 잘났다고 교만한 사람들을 부끄럽게 하십니다.
그뿐이 아닙니다. 사도 바울도 그렇습니다. 사도 바울은 성경 속에 나오는 인물 가운데서 가장 위대한 신앙인 가운데 한 사람입니다.
그는 우선 배경이 좋은 사람입니다. 로마 시민권자입니다. 당시 다소라는 작은 도시에서 태어나 예루살렘으로 유학을 한 부잣집 아들입니다. 또 당시 가장 명성이 있던 가말리엘 밑에서 수학을 하였고, 헬라 철학에 능통했던 사람입니다.
거기다 베냐민 지파이고, 어려서 할례를 받은, 나무할 데 없는 조건을 갖춘 사람입니다. 그러면 그는 과연 완벽한 사람입니까?
아닙니다. 그도 하자가 많은 사람입니다. 고린도후서 10:10을 보면 당시 사람들이 바울을 "그가 쓴 글을 읽으면 무게가 있는데 그는 직접 만나 보면 약한 체구에, 왜소한 키에, 말은 어눌했다."고 평했다고 쓰고 있습니다.
바울이 얼마나 말을 못했는가를 사도행전 20장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전도 여행을 마치고 귀로에 드로아에 들러 하룻밤을 묵게 됩니다. 내일 떠나야 하기 때문에 그 날 반에 집회를 갖게 됩니다.
사람들이 많이 와서 창가에까지 걸터앉게 되었는데 그 날 밤 설교를 하는데 언변이 없어 얼마나 지루하고 재미없게 하는지 창틀에 걸터앉아 있던 유두고라고 하는 청년이 졸다가 그만 떨어져 죽는 사고가 발생하였습니다. 사도 바울의 어눌한 말솜씨가 사람들을 졸게 만들었고 지루하게 만들었을 것입니다.
바울 자신도 자신의 이 같은 약점을 알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고린도후서 11:6에서 말하기를 "내가 비록 말에는 졸하나 지식에는 그렇지 않다."고 했습니다. 거기다 생김새도 바울의 행적이라는 책을 보면 그의 모습을 이렇게 소개했습니다. "작은 키에, 대머리였고, 눈썹은 순악질 여사처럼 일자 눈썹이고, 아주 두꺼운 돋보기를 썼다."고 했습니다.
1차 전도 여행 때에는 바나바와 함께 동행을 하였는데 루스드라라는 곳에 가서는 앉은뱅이를 고쳐서 낫게 했습니다 그랬더니 원주민들이 바울과 바나바를 신이라고 하면서 와서 절을 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바나바를 쓰스신이라고 불렀고 바울을 허메신이라고 불렀습니다. 쓰스신은 신중의 신이고, 신중에서도 왕 신인 제우스신입니다. 바나바가 잘 생겼기 때문에 그를 그렇게 부른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을 향해서는 허메신이라고 불렀습니다. 허메신은 심부름하는 신입니다. 바울이 왜소했기 때문에 바나바의 심부름꾼 정도로 보였던 모양입니다.
거기다 그의 몸에는 병까지 있습니다. 그가 지닌 병이 지독한 안질이라고도 하고 혹자는 간질병이라고도 합니다. 확실한 것은 알 길이 없지만 사도 바울이 병약했던 것만은 사실입니다.
그래서 그는 나중에 "나는 나의 약함을 자랑한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다른 사람을 다 놓아두고 이같이 바울을 택하여 사용하십니다. 오히려 그를 더욱 약하게 만들어 놓으시고 약한 중에 사용하십니다.
그를 얼마든지 건강하게 만들어 주신 후에 사용하실 수도 있는데 약함을 그대로 놓아두시고 일을 하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일하시는 방법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생각과는 전혀 다르다는 것입니다.
2. 하나님이 쓰시는 사람은 충성스러운 사람입니다.
그러면 왜 하나님은 이 같은 하자 인생만을 골라서 사용하십니까? 그렇다면 하자가 있다고 다 사용하시는 것입니까? 그것은 아닙니다 거기에는 하나의 중요한 기준과 자격이 있습니다. 그것이 충성입니다. 진실함입니다. 그리고 중심입니다. 사도 바울이 얼마나 진실하고 충성스러운가를 보십시오.
사도행전 14장을 보면 바울이 여행을 하는 중에 루스드라에 들어갑니다. 바울이 그곳에 와서 복음을 전한다는 소식을 들은 안디옥과 이고니온에 살고 있는 유대인들이 몰려 왔습니다. 그리고 온갖 방해를 다 합니다. 나중에는 돌로 쳐서 바울을 실신시킵니다. 사람들은 바울이 죽은 줄로 알고 동구 밖에 버리고 돌무더기를 쌓아 놓습니다.
한참 후에 깨어난 바울은 돌무더기를 헤치고 일어나 부러진 다리를 이끌고 성 안으로 들어갑니다. 성 안에서는 제자들이 모여 앉아 장례식을 치를 걱정을 하고 있습니다.
14:20에 보면 이튿날 바울은 그 몸으로 더베로 떠납니다. 루스드라에서 250리나 떨어진 곳입니다 차도 없고 길도 좋지 않은 길을 걸어서 갑니다. 그 몸으로 며칠 쉰다고 누가 뭐라고 할 것입니까? 모두 가지 못하도록 말렸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고집스럽게 다리를 절면서 길을 떠납니다. 왜냐하면 복음 전파를 위해서입니다. 복음을 잔파하는 일이라면 자신의 몸을 아끼지 않았던 바울입니다. 이와 같은 열정으로 바울은 1차 여행 때는 2천km를 도보로 걸어다니며 복음을 증거하는 신실한 전도자였습니다. 그리고 끝내 그는 순교하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택하시고, 모세를 부르시고, 다윗을 사용하시고, 바울을 택하여 복음 전파하는 일에 사용하신 배경에는 이와 같은 충성심과 중심을 보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일을 하시는 데 완벽한 사람을 택하여 쓰시지 않습니다. "나는 완벽하다"하고 생각하는 사람에게는 이와 같은 충성심과 진실함과 진지함이 없습니다
대개 보면 스스로를 완벽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이기주의자입니다. 자기 위주입니다. 그런 사람은 신앙 생활을 하여도 자신에게 유리한 대로 믿고 움직입니다. 그래서 그런 사람은 큰일을 못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복된 사람은 "충성스러운 마음을 지닌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환경이나 외모를 초월해서 이런 사람을 좋아하십니다. 이 같은 마음을 품고 살아가는 것, 그것이 축복의 인생입니다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 이것이 하나님께서 인생을 보시는 관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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