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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상의 은혜' 제1권'에서 펌복된 만남! (눅 19:1-10)

by 【고동엽】 2022. 1. 19.

 '최상의 은혜' 제1권'에서 펌

 

복된 만남! (눅 19:1-10)

 

사람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서로 대화하고 상의하고 마음을 주고 받을 수 있는 상대가 있다고 하는 것은 중요하고도 행복한 일입니다. 그래서 사람에게는 이웃이 필요하고 친구가 필요하고 만남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세상에는 행ㅂ고한 만남도 있고 불행한 만남도 있습니다. 어떤 분은 사람을 잘 만나서 행복하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또 어떤 사람은 사람을 잘못 만나서 불행하게 살아가기도 합니다. 사람을 만나되 잘 만나야 합니다.
만남 중에서 뭐니 뭐니 해도 부모를 잘 만나야 합니다. 부모는 자식에게 일평생 동안 중대한 영향을 끼쳐 줍니다. 그래서 무엇보다도 좋은 부모를 만나야 합니다. 디모데는 경건한 어머니를 만나서 평생을 경건한 신앙인으로 살아갔습니다. 모세는 애국심이 특출한 어머니를 만나서 길이 빛나는 민족의 지도자가 될 수 있었습니다. 김유신 같은 이는 절도 있는 어머니를 만나서 그 유명한 화랑이 되었습니다. 율곡은 고결하고 정결한 인품을 지닌 어머니를 만나서 선비다운 선비가 되었습니다. 부모를 잘 만나야 합니다.
또 스승도 잘 만나야 합니다. 스승은 알게 모르게 자라나는 지성에 굉장한 영향을 주는 분입니다. 바울이 있었기에 디모데가 있게된 것입니다. 엘리야가 있었기에 엘리사가 있게 된 것입니다. 소크라테스가 있었기에 플라톤이 있게 된 것입니다. 플라톤은 원래 정치가가 되는 것이 꿈이었습니다. 그래서 정치가가 되려고 힘썼던 사람입니다.
그러던 그가 어느 날 소크라테스를 만나게 된 것입니다. 만나서 그와 이야기하는 과정에서 정치가가 되겠다던 꿈을 버리고 철학자가 되기로 마음을 고쳐 먹은 것입니다. 그래서 플라톤이 철학자가 된 것입니다. 얼마나 중요한 만남입니까? 그래서 스승을 잘 만나야 된다는 것입니다.
또 배우자도 잘 만나야 합니다. 배우자는 한번 만나면 평생토록 바꿀 수가 없는 상대입니다. 그래서 잘 만나야 합니다. 이 만남 중에서 제일 중요한 만남일 것입니다. 또 이웃도, 친구도 잘 만나야 합니다. 좋은 이웃과 좋은 친구를 만나서 그로 인하여 주님을 알게 되어 구원을 받게 된 사람이 많기 때문입니다. 이 같은 만남들은 얼마나 소중한 만남들입니까?

그런데 무엇보다도 소중한 만남이 또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 주님과의 만남입니다. 다른 사람 다 잘 만나도 주님과의 만남이 없으면 소용없는 일입니다. 눈먼 소경이 주님을 만났기에 광명을 찾았습니다. 베드로와 바울이 주님을 만났기에 사도가 되었습니다. 방탕자 어거스틴이 주님을 만남으로 구원을 받아 새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들이 주님을 만나지 못했더라면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그것은 우리들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님을 알지 못하였더라면 우리들의 지금의 모습은 어떠했겠습니까? 누구보다도 주님을 만나야 합니다.
그런데 성경을 보면 누구보다도 예수를 만나서 가장 크게 변화를 받은 사람이 있습니다. 그것은 본문에 나와 있는 삭개오입니다. 이 사람은 예수를 만나서 엄청나게 복을 받은 사람입니다.

 

1. 이 사람은 고독한 사람이었습니다.

 

이 사람은 친구가 없고, 이웃이 없는 사람입니다. 돈도 있고, 권세도 있고, 명예도 가지고 있었는데도 이 사람은 대화할 상대가 없었습니다. 여러분, 세상에서 따돌림을 받으며 살아가서는 안 됩니다. 아무리 많이 소유하고 살아도 사람들이 알아주지 않는 소유와 출세는 소용없는 일입니다. 외톨이처럼 고독한 것은 없습니다. 삭개오가 그랬습니다. 누구 하나 상대해 주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이웃이 없었습니다.

 

2. 또 이 사람은 갈증이 많았던 사람입니다.

 

삭개오는 욕심껏 가져 보았습니다. 온갖 방법을 다 동원해서 부를 이루었습니다. 그런데도 여전히 허전합니다. 가져 보면 무엇이 있을 줄 알았는데 가져 봐도 갈증만 더 했습니다. 삭개오라는 말은 원래 "순결"이라는 뜻입니다. 이름은 좋은데 그는 순결하지 못했습니다. 로마에 아첨해서 세리장까지 오른 사람입니다. 동족을 학대하고 착취하고 무자비하게 세금을 거둬서 부자가 된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에게 행복이 있을 리가 없습니다. 점점 더 목마를 뿐입니다. 고독해서 죽을 지경입니다.
그래서 삭개오는 견디다 못해서 예수님을 만나기로 했습니다. 지금의 고독함과 외로움과 목마름을 해결하는 길은 예수께 가는 길밖에 없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병을 고치려고 예수를 찾아갔습니다. 복을 받기 위해서 예수를 찾아갔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동기가 순수했습니다. 고민이 많아서 주님을 찾아갔습니다. 고독했기 때문에 예수를 만나기로 한 것입니다. 그래서 삭개오는 뽕나무에 올라갔습니다. 이 사람은 키가 작았습니다. 그는 지금까지 사람들 앞에 잘 나서지를 못했던 사람입니다. 키에 대해서만큼은 콤플렉스가 있는 사람입니다.
그런 그가 뽕나무에 올라갔습니다. 이것은 굉장히 용기 있는 결단입니다. 사람들이 그 모습을 보기라도 한다면 체면이 말이 아닙니다. 조롱하고 비웃을 것입니다. 상상을 해 보십시오. 세무서장이 뽕나무 위에 올라갔습니다. 부하 직원이라도 만나게 되면 무슨 꼴입니까?
그러나 삭개오는 예수님이 지나가실 시간에 맞추어서 나무에 올라갔습니다. 수모가 있어도, 조롱이 있어도, 자존심이 상할지라도, 먼발치서라도 주님을 보고 싶었습니다. 만나서 위로를 받고 싶었습니다. 얼마나 훌륭한 정신입니까?
우리는 체면 때문에 손해를 볼 때가 많이 있습니다. 체면 때문에 그 좋던 기회들을 많이 잃기도 합니다. 체면을 버리고, 자존심을 버리고, 솔직한 마음으로 주님을 만나려고 애쓰는 사람은 반드시 주님을 만나게 됩니다. 병 낫기를 위해서 간절한 마음으로 주님 앞에 나아갔던 혈루병자가 고침을 받았습니다. 눈을 뜨기 위해서 부르짖으며 주님께 나아갔던 소경이 눈을 떴습니다. 정결키 위해서 용기를 가지고 주님께 나아갔던 문둥병자들이 고침을 받았습니다.
바로 여기에 구원이 있고 은혜가 있습니다. 그래서 그것을 복음이라고 합니다. 주님을 만나고자 하는 사람에게는 꼭 만나주시는 분이 주님이십니다. 그래서 신앙 생활은 사모하는 생활입니다. 간구하는 생활이고, 기다리는 생활이고, 나아가는 생활입니다.

 

3. 삭개오는 행복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여러분, 행복이 무엇입니까? 칼 힐티는 행복은 서로 그리워하는 것, 서로 마주 보는 것, 서로 자기를 주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행복은 서로를 그리워하는 것입니다. 두 사람이 서로 그리워해야 그것이 사랑이고 행복입니다. 한 사람만 사랑하면 그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또 행복은 서로 마주 보는 것입니다. 나는 그를 보고 그는 나를 볼 때 그게 사랑이고 행복입니다. 나느는 그를 보는데 그는 딴 사람을 보고 있습니다. 그것은 사랑도 아니고 행복도 아닙니다.
또 행복은 자기를 주는 것입니다. 다 주는 것입니다. 마음도 주고, 정신도 다 주는 것입니다. 다 주고 난 후에는 자존심도 녹아 버리고, 체면도 녹아서 없어져 버리고 맙니다. 그러고 난 후에야 비로소 진짜 사랑이 나오고, 진정한 기쁨이 나오고, 피차간에 비밀이 없어지고, 욕심이 없어지는 것입니다. 이때 튀어나오는 말이 있습니다. 그것은 "이대로 죽어도 좋다."는 말입니다. 사람이 정말 행복해지면 죽음도 두렵지 않은 마음이 나온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행복입니다.

예수님을 보기 위해서 간절한 마음으로, 사모하는 마음으로 뽕나무 위에 올라가 있는 삭개오를 보십시오. 그는 자존심도, 체면도 다 던져 버렸습니다. 그리고 지나가는 주님을 그리워하는 눈빛으로 내려다보았습니다. 그런데 나무 밑을 지나가시던 주님이 고독함과 외로움과 갈증으로 찌들어 있는 삭개오를 올려다보셨습니다. 눈과 눈이 마주쳤습니다. 마음과 마음이 통했습니다. 그 순간이 체험의 순간입니다. 하나가 되는 순간입니다.
주님은 삭개오의 눈 속에서 그의 고독함을 보셨습니다. 그의 갈증을 보셨습니다. 그의 외로움도 보셨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삭개오에게 사랑의 손길을 내미셨습니다. "내가 오늘 밤에 네 집으로 가서 유하여야 하겠다." 그 순간 삭개오의 가슴 속에 뭉쳐 있던 온갖 외로움과 고독함과 갈증들이 다 풀어지고 말았습니다. 그러고는 그의 가슴 속에 온갖 기쁨과 소망과 행복함이 넘쳐나기 시작하였습니다. 이것이 주님을 만나는 기쁨입니다. 이것이 바로 복음의 능력입니다.
여러분 중에 지금 고독한 분이 있습니까? 심각한 갈증을 느끼고 있는 분이 있습니까? 왜 없겠습니까? 현대인은 모두 고독한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현대인들은 하고많은 갈증의 노예들입니다. 이시간 주님의 눈을 쳐다보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의 눈이 주님의 눈길과 마주치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삭개오의 가슴이 녹아져 내려오듯이 여러분들의 온갖 고민과 근심과 외로움과 갈증들이 녹아질 줄로 믿습니다. 이것이 축복이고 은총입니다.

 

4. 자신이 죄인인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끝나 버리면 안 됩니다. 여기서 한 발짝 더 나가야 합니다. 삭개오는 주님의 눈과 마주치는 순간 큰 빛을 보았습니다. 의의 태양이신 주님의 찬란한 빛에 비추어진 자신의 모습은 너무나 초라한 모습이었습니다. 죄투성이의 모습이었습니다. 도적중의 도적이었습니다.
지금까지는 자기 자신이 그렇게 큰 죄인인 줄은 몰랐습니다. 자신이 그렇게 교활하고 이기적인 사람인 줄도 몰랐습니다. 그런데 그 빛에 비추어진 자신의 모습을 보았을 때 말이 아니었습니다. 엉망진창이었습니다. 추하고 그렇게 초라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주님 앞에 엎드려 고백하였습니다. "내 재산의 절반을 가난한 내 동포에게 나누어 주겠습니다. 그리고 도적질한 것에는 4배를 갚겠습니다."
여러분, 눈을 들고 위를 보시기 바랍니다. 신앙 생활은 위를 올려다보는 생활입니다. 위를 쳐다보면 의의 태양이신 주님의 빛에 비추어지는 자신의 남루한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그 모습을 본 사람은 절대로 교만할 수가 없습니다. 남의 흉도 볼 수가 없습니다. 누구를 탓할 수도 없습니다.
사람이 왜 교만합니까? 그것은 위를 보지 못해서입니다. 빛 되시는 주님을 보지 못해서 그렇습니다.

여러분, 젊은이들이 자주 다니는 음식점이나 찻집을 찾아가서 유심히 보십시오. 거기에는 한가지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실내가 어둡다는 것입니다. 환한 전깃불을 끄고 촛불을 켜 놓습니다. 그 촛불도 그냥 두지 않고 빨간 유리병으로 씌워 놓습니다. 그러고는 그곳에서 식사를 하고, 차를 마시고, 이야기를 하고 그럽니다. 거기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어둠침침한 촛불 앞에 마주 앉으면 모두가 미남 미녀로 보여지기 때문입니다.
밝은 곳에서는 미인 되기가 어렵습니다. 너무나 적나라하게 자세히 보여지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희미한 촛불 아래서는 어지간한 약점은 다 감추어져서 대부분은 미인처럼 보이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어두운 곳에서는 모두 의인입니다. 모두 감추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적당히 묻혀 버리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교만해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찬란한 빛에서 속속들이 다 드러나게 되면 그 앞에서 누가 의인이라고 할 수 있습니까? 그 앞에서는 모두 자신이 죄인임을 깨닫게 될 뿐입니다.
삭개오가 지금까지 그렇게 살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교만했습니다. 무자비했습니다. 인색했습니다. 그러면서도 그는 자신이 죄인인 것을 몰랐습니다. 그런데 그가 위를 보고 주님을 보게 되자마자 그때 비로소 그의 눈에는 굶주리고 있는 동족이 보였고, 이웃이 보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재산의 절반을 선뜻 내어 놓은 것입니다.
이것이 만남에서 오는 축복입니다. 주님을 진정으로 만나게 되면 이 같은 복이 오게 됩니다. 예수, 그래서 예수는 모든 것의 해결사이고 궁극적인 목적인 것입니다. 어거스틴이 변화를 받은 후에 고백하기를 "예수는 나의 전부, 나에게서 예수를 빼고 나면 아무 것도 없다. 그는 나의 생명, 나의 전부이다."라고 고백하였습니다.
이 시간 이 예수를 만나시기를 바랍니다. 이미 만나신 분은 오늘 더 새롭게 만나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그분이 주시는 기쁨과 감사와 용기를 가지고 돌아가시기를 바랍니다.

출처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글쓴이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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