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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설교〓/설교.자료모음

먼저 할 일 (2) 마 6:31-34

by 【고동엽】 2022. 1. 19.

먼저 할 일 (2)

 

마 6:31-34

 

그런 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

하시리라.

 

삶에는 요령이 필요합니다. 요령은 일을 쉽게 하고 효과를 극대화 시킵니다. 그리고 좋은 결과를 가져다줍니다. 어떤 분은 일을 아주 요령 있게 하는 분이 있습니다. 그래서 일에 효과가 있을 뿐 아니라 일과 삶에 질서가 있습니다. 시작이 좋고 진행과정이 좋고 결과가 좋습니다. 그것은 일에 요령이 있어서 입니다. 그런데 요령이 없는 분도 있습니다. 그래서 일에 순서가 없습니다. 언제나 바쁩니다. 바쁘지만 일에 효과가 없습니다. 일의 과정이 복잡합니다. 일에 요령이 없기 때문입니다. 요령이 없으면 효과가 없습니다. 그래서 삶에서 요령은 지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신앙생활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신앙생활에도 요령이 필요합니다. 먼저 할 일 먼저하고 후에 할 일 나중에 하는 것이 요령입니다. 신앙생활에도 순서가 필요합니다. 신앙생활에도 일시적인 일은 나중으로 돌리고 더 근본적인 일을 먼저 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근본적인 일부터 먼저 처리해 놓으면 뒤에는 저절로 순서가 맞습니다. 그런데 일시적인 일에 매달리다 보면 언제나 바쁘기는 한데 능률이 없고 효과가 삶에서 신앙에서 깊이가 없습니다. 그래서 신앙에 깊이가 없고 효과가 없는 것입니다. 삶에서 우선순위를 잘 선택하는 것은 지혜의 삶이고 요령 있는 삶입니다.

본문은 그리스도인의 효과 있는 삶을 강조하는 말씀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에도 요령이 있어야 합니다. 지혜의 삶이 필요합니다. 먼저 할 일 먼저하고 더 중요한 일은 더 중하게 여겨야 합니다. 오늘 읽은 본문말씀에서 그 점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사랑”

 

성경은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다고 전제합니다. 신앙인에게는 이 점이 먼저 선행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신앙인의 삶의 기초이고 근본이고 기준이 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십니다. 독생자를 보내시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셨습니다. 이 믿음이 전제되어야 비로소 신앙의 삶이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그때 비로소 우리에게서 헌신이 가능하고 순종이 이루어지며 신앙의 고백이 형성될 수 있습니다. 그 하나님의 사랑을 본문에서 예수님은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습니다. “들의 꽃을 보라, 공중의 새를 보라, 하나님이 저들도 먹이시고 입히신다.” 여기 공중의 새는 “까마귀”를 가리킵니다. 까마귀는 별로 정이 가지 않는 새입니다. 그럼에도 그 까마귀조차 사랑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리고 들의 꽃은 갈릴리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야생화 중의 하나일 것입니다. 아네모네 꽃이나 양귀비 그리고 붓꽃 중 하나일 것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들풀들은 꽃이 시들면 모두 들풀이 됩니다. 이 들풀은 아궁이에 던져져 불쏘시개로 타 버립니다. 불쏘시개는 별로 중요한 땔감도 안 됩니다. 가장 값없는 땔감입니다. 그래서 불쏘시개입니다. 하나님은 그것들도 사랑하신다고 했습니다. 그 말은 하나님은 이 세상에서 가장 하찮은 것들도 사랑하시는 하나님이시라는 말입니다.

그리고 말씀하시기를 “하물며 너희일까 보냐”(30)하고 환기를 시키고 있습니다. “하물며”라는 부사는 영어로 how much more 입니다. “더군다나”라는 말입니다. 마치 깨닫지 못하는 제자들을 꾸짖듯이 주님은 무엇을 먹을까 하고 염려하는 것은 “하나님을 불신하는데서 비롯한 염려”라고 지적하십니다. 고로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는 것은 “이방인이 구하는 것”(32)이라고 했습니다. 어쩌면 이방인은 영적 고아들입니다. 하나님을 모르는 불신자들입니다. 고아는 모든 것을 자신이 스스로 해결해야 합니다. 그래서 고아는 고독한 사람입니다. 여기 고아는 이방인을 가리킵니다. 그 말은 “너희는 고아가 아니지 않느냐”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이 사랑의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고백하는 삶이 신앙인의 삶입니다.

 

“먼저 할 일”

 

그리고 주님은 먼저할일을 먼저 하라고 하십니다. 신앙인들이 먼저 할 일이 몇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는 일”(33)입니다. 그 나라와 의의 삶은 이미 산상수훈에서 다 밝히셨습니다. 산상수훈에서 그리스도인의 할 일과 삶의 내용과 삶의 중심을 이미 다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을 먼저 하라고 하십니다. 그렇게 살면 “이 모든 것을 더 하시겠다”(33)고 하셨습니다. 더 하시는 내용은 영혼의 만족함과 영적인 평안을 주시겠다는 약속입니다. 신앙인에게 가장 큰 복은 영적인 만족함이고 영적인 평안입니다. 초대교회 시대의 교부 오리겐은 이 말씀은 예수께서 제자들에 “가장 중요한 것을 추구하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조그만 것을 덤으로 주시리라, 하늘의 것을 추구하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세상의 것도 덤으로 주시리라“고 말씀하신 것이라고 풀이했습니다.

우리민족은 참으로 열정적입니다. 촛불 집회하는 것을 보십시오. 누가 시켜서 할 일입니까. 우리민족에게는 이런 열정이 있습니다. 오늘 우리들이 기도하는 것도 참 열심히 합니다. 철야기도도 하고 금식기도도 합니다. 산 기도도 열심히 명절 때 그리고 휴일 때 산 기도원을 가보면 가득 가득 채워져 있습니다. 참으로 신비할 정도입니다. 너무 진지하고 열심입니다. 그런데 문제가 하나 있다면 그 열심 있는 기도가 모두 너무 일시적인 소모품을 구하는 기도에 치우쳐 있고 얻어도 임시적인 것들이라는 점입니다. 그 모습을 보고 어느 신학자가 “한국교회는 너무 값싼 은혜만 구한다”고 지적하였습니다. 그래서 본문에서 주님은 “그것은 이방인이 구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신앙인들은 구할 때 영적인 양식을 구해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은 덤으로 세상의 것들도 주십니다. 그런 경우를 잘 이룬 사람이 솔로몬입니다. 솔로몬은 왕이 되자마자 하나님께 일천번제를 드렸습니다. 그 기도가 하나님 마음에 합당한 기도였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근본적인 것을 구하는 솔로몬에게 세상적인 것들도 덤으로 주셨습니다. 그것이 신앙생활의 요령입니다.

또 “내일 일을 위해 염려하지 말고 내일 일은 내일 염려하라”(34)고 하셨습니다. 이것이 우리들이 먼저 할 일입니다. 우리는 오늘 닥친 일만도 극복하기에 힘이 겹습니다. 내일 일까지 오늘 가져와 염려하기에는 우리의 삶이 너무 피곤합니다. 이것이 우리의 악습이기도 합니다. 오늘 염려만 해도 힘에 겨운데 내일의 염려와 어제의 염려까지 잊지 않고 모아서 오늘 걱정하며 염려를 합니다. 그러니까 우리의 삶이 그만큼 피곤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제자들에게 “내일 일은 내일 염려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날의 괴로움은 그날로 족하라”고 하셨습니다. 여기 “그날의 괴로움”은 갑자기 우박이 떨어져 정성들여 가꾸어 놓은 농작물을 망쳐 놓았을 때 농부들이 겪는 절망상태를 의미합니다. 농부들에게 그 고통이 얼마나 크겠습니까. 그래서 “그날 괴로움은 그날로 족하라”고 하셨습니다. 오늘도 고통스러운 일인데 내일의 고통까지 끌어와 오늘 염려하기에는 감당하기가 어렵다는 말씀입니다. 여기서 내일을 강조하신 것은 내일의 주인공이 고통당하는 내가 아니고 내일 섭리하실 하나님을 가리킵니다. 그러니까 내일은 하나님께서 섭리하시고 해결하실 것을 믿으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날의 염려로 족해야 합니다.

또 먼저 할 일은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일”입니다. 그 삶은 “하나님의 섭리를 믿고 그 뜻에 순종하는 삶”을 말합니다. 때로 우리에게 고난이 오기도 합니다. 그때 그 고난은 재수가 없어서 내게 온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것으로 받아서 이겨내는 것입니다. 그리고 때로 축복이 올 때도 있습니다. 그때는 내가 잘해서 성공했다고 생각하기보다 이것조차도 하나님이 주신 것으로 알고 하나님께 영광과 감사하는 삶을 살아가면 됩니다. 또한 우리에게 하나님께로부터 할 일이 주어지면 그렇지 않아도 바빠 죽겠는데 할 수 없다고 하기 전에 그 일도 하나님께로부터 주어진 것으로 알고 순종하고 충실하게 이행하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사명이 주어지면 그 사명까지도 우리의 인생을 활용해서 최선을 다해서 감당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삶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아주 간단하고 명료합니다. 하나님을 말 그대로 믿으면 됩니다. 신뢰하고 순종하며 주신 뜻을 이루기 위해서 최선을 다하며 살아가면 됩니다. 신앙인에게도 때로 고난이 없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도 질병에 걸려 앓게 되고 실패하고 낙오하고 좌절도 주어집니다. 그 때에 우리들이 꼭 생각할 것은 하나님은 반드시 합동해서 선을 이루시고 좋은 결과를 주신다는 믿음입니다. 그때 우리는 우리에게 주어진 상황을 이겨낼 수 있고 기쁨으로 감내할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 사실을 믿지 못할 때는 그 상황을 이겨내기가 참으로 어렵습니다. 그래서 때로 안달하고 한숨 속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게 됩니다. 그 삶을 바라보시는 하나님은 기분이 좋을 수가 없을 것입니다. 주님은 그 점을 잘 아십니다. 그래서 주님은 노기찬 음성으로 책망하시듯이 “너희는 왜 의심하느냐”고 물으신 것입니다.

부모가 자식에게 “너는 걱정하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때는 부모를 믿어야 합니다. 그런데 믿지를 못하고 뒤에서 조바심한다면 부모는 기분이 나쁠 것입니다. 내일 먹을 것을 부모가 다 준비하니까 걱정하지 말라고 했는데도 아이들이 “내일 무엇을 먹고 살까”하고 한숨을 짓는다면 부모들이 볼 때는 참으로 가소로울 것입니다. 성경은 여기서 한 가지 방법을 제시하시기를 “먼저 할 일을 하라”고 하셨습니다. 먼저 하나님의 섭리를 신뢰하고 믿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때 하나님은 우리들을 통해서 섭리하시고 세상에서 할 일을 다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 점을 믿고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저는 철저하게 하나님께 제 인생을 맡기고 살아가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아마도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그런 자세로 살아갈 것입니다. 그것이 건강한 신앙인의 모습입니다. 살아갈 때 때로 일이 잘 안될 때는 걱정이 앞설 때도 있습니다. 두려움이 올 때도 있습니다. 그래도 맡기고 살아가려고 노력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그럴 때 마다 저의 삶에 지금까지 좋은 결과를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제가 먼저 할 일을 하나님을 향한 더 깊은 봉헌의 삶을 살아가는 일입니다. 저는 하나님께 봉헌하는 생활이 참으로 행복합니다. 그래서 새 돈이 생기면 먼저 하나님께 헌금으로 드리고 싶어집니다. 돈이 조금 모아지면 뭔가 목적을 세워 드리고 싶어집니다. 저는 그런 삶이 나 자신에게 무한한 행복을 줍니다. 하나님도 그런 저의 마음을 아십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알아주시는 것이 내 눈에 선하게 보입니다. 그래서 나는 나의 진로나 나의 삶이나 나의 미래에 대해서 걱정을 하지 않습니다. 안하는 이유는 지금까지 나의 삶을 인도하셨던 하나님께서 나의 미래의 삶에도 그렇게 인도하실 주실 줄을 믿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그동안도 나의 삶을 전적으로 도우셨습니다.

우선 건강의 복을 주셨습니다. 이만하면 건강한 것 아닙니까. 지난 40여 년 동안 목회생활 하는 가운데 몸이 아파서 새벽기도를 못하고 주일설교를 못한 적이 없습니다. 특별하게 건강하지는 않지만 사역을 충실하게 이룰 만큼은 건강합니다. 누우면 잠이 옵니다. 잠에서 깨어나면 새벽예배 시간입니다. 얼마나 큰 은혜입니까. 깊은 잠은 영적인 복을 얻어야 주어지는 것입니다. 이 잠은 약을 먹고 자는 잠과 격이 다른 잠입니다. 영적인 은혜를 입어 자는 잠과 망각의 잠은 다릅니다. 망각의 잠은 예배 때에도 쏟아지는 잠입니다. 잠에도 칼라가 있습니다.

어떤 술꾼이 예배에 참석해서 잠에 골아 떨어졌습니다. 목사님이 설교를 해도 막무가내 입니다. 그래서 목사님이 큰 소리로 “천국에 가고 싶은 사람은 일어나 보세요” 했습니다. 그러자 그 술꾼을 빼고는 모든 성도들이 일어섰습니다. 그래도 깨어나지 않자 목사님은 “지옥에 갈 사람은 일어나 보세요” 하고 책상을 치며 큰 소리로 말했습니다. 그러자 이 술꾼이 큰 소리에 놀라 벌떡 일어났습니다. 일어나 보니 자기 혼자 서 있었습니다. 얼마나 민망했겠습니까. 그래서 말하기를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지금 서 있는 사람은 목사님과 나뿐이군요”하고 말했다는 것입니다. 잠에도 격이 있습니다. 수준이 있습니다. 평안한 깊은 수면은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의 잠입니다. 축복의 잠입니다. 잠뿐 아니고 먹고 마시는 생활이 참으로 즐겁고 행복합니다. 음식이 참 맛이 있습니다. 소화가 참 잘 됩니다. 그리고 먹어도 살이 안찝니다. 그래서 맘껏 먹고 맛을 즐깁니다. 축복입니다.

하나님은 진로에도 복을 주셨습니다. 저는 미래에 “나는 어디로 가야하나“ 하는 그런 걱정은 하지 않고 살아왔습니다. 저의 미래는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대로 따왔고 앞으로도 따라갈 것입니다. 사람이 미래의 일을 일일이 걱정하면서 어떻게 살겠습니까. 지난날 인도하신 것을 보면 미래에도 선한 길로 인도해 주실 것을 의심하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저는 나의 미래의 삶에 대해서 그리고 운명에 대해서조차 조금도 걱정이 없습니다. 두려움도 없습니다. 그것은 지난날 나와 함께 해 주신 하나님의 인도를 전적으로 믿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삶이 복된 삶입니다.

또 목회에도 복을 주셨습니다. 우리교회는 목회하기가 결코 쉬운 교회가 아닙니다. 우리교회는 이론이 참 많은 교회입니다. 간단한 교회가 아닙니다. 교회의 입지도 그리 좋은 교회가 아닙니다. 교회성장학에서 지적하는 성장하는 교회요소는 하나도 없는 교회입니다. 그럼에도 줄지 않고 매년 조금씩이라도 부흥하고 있습니다. 모두 하나님이 주신 은혜입니다. 일터의 복은 그 어떤 것보다도 소중한 은혜입니다.

본문에서 주님은 대단한 메시지를 주고 계십니다.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 하시리라, 내일 일은 내일 염려하고 오늘 괴로움은 오늘로 족하라.” 사람이 살아가는데 왜 걱정이 없고 염려가 없이 살아 갈 수가 있겠습니까. 그럼에도 주님은 걱정하지 말고 염려하지 말라고 강권하면서 말씀하고 계십니다. 왜냐하면 아무 소용이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염려와 걱정은 모두 부질없는 것들입니다. 아무 효과가 없는 키를 한자나 크게 할 수 있나 보라고 주의를 주신 주님의 말씀과 같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시간에 할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내가 어떻게 하면 더 주님께로 가까이 갈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내가 더 깊은 마음으로 주님을 섬기고 헌신하고 주님의 뜻을 이룰까”를 위해서 염려하는 일입니다. 그것이 우리들이 먼저 할 일입니다. 우리는 이 일을 위해서 걱정하고 염려할 수 있어야 합니다.

신앙인의 삶은 심은 대로 거두는 삶입니다. 농부는 심은 대로 거두는 사람들입니다. 그것은 진리입니다. 땅은 심은 대로 결실을 줍니다. 심은 만큼 소득을 줍니다. 신앙인의 삶도 심은 대로 내일 가장 좋은 열매로 주십니다. 심은 사람에게는 기대가 있습니다. 심은 사람에게는 기다림의 은혜와 희망이 있습니다. “내가 심었으니 무슨 꽃이 필 것인가, 어떤 아이가 태어날 것인가, 천국에서 어떤 상을 받을 것인가, 어떤 결과가 주어질까” 하는 기대가 있습니다. 그래서 심는 것입니다. 신앙인의 삶은 오늘 심고 내일 가꾸고 모레 거두는 삶입니다. 그래서 심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입니다. 심는 사람에게는 그런 행복이 있습니다. 본문에서 주님은 우리에게 바로 그런 메시지를 주고 있습니다. 거두는 축복이 있기를 기원합니다.

출처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글쓴이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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