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조와 비전의 하나님!
창 1:1-5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 하나님이
이르시되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었고 빛이 하
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아이들은 궁금한 것이 많습니다. 그래서 자꾸만 묻습니다. “나는 어떻게 태어났어요?”, “이 세상은 어떻게 만들어졌어요?”, “나는 왜 여자로 태어났어요?”. 아이들이 질문을 한이 없이 합니다. 그것은 당연한 질문입니다. 이것은 어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른들도 궁금한 것이 많을 수밖에 없습니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어디에서 왔으며 어디로 가는 것일까?”. 생각해 보면 참 궁금한 일입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에게 성경 창세기가 주어진 것은 참으로 다행한 일이고 행복한 일입니다.
성경 창세기는 이 세상의 근원과 시작과 처음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창세기는 이 세상의 모든 것의 근원과 기원과 시작을 규명해 주는 책입니다. 그리고 창세기는 하나님과 세상과의 관계를 그리고 세상과 나와 하나님과의 관계를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창세기를 보면 단순히 이 세상의 모든 사물을 창조했다는 것만 말씀하지 않고 그 배후를 보면 더 깊은 질서도 법칙도 길도 창조하셨다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세상 창조
창세기 1:1절을 보면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로 시작합니다. 이것은 창세기가 말하고자 하는 대원칙을 선포한 것입니다. 기독교 신앙은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라는 지점에서 시작되고 발원됩니다. 느헤미야 9장6절을 보면 “하늘과 하늘의 하늘과 일월성신과 땅과 땅위의 만물과 바다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지으신 이에게 경배하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요한계시록 14장7절을 보면 “하늘과 땅과 바다와 물들의 근원을 만드신 이를 경배하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는 것입니다. 그 말은 “하나님이 나를 창조하셨다”는 말입니다. 나는 상상도 하지 못하고 있을 때, 나는 계획조차도 없을 때 하나님은 나를 창조하셔서 내 부모에게 나의 양육을 맡기신 것입니다. 참으로 오묘한 일입니다. 그렇게 해서 내가 세상에 태어났고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가 시작된 것입니다.
어느 어린 아이가 할아버지에게 물었습니다. “이 세상을 하나님이 창조 하셨지요?”, “그렇지”, “그럼 할아버지도 하나님이 창조 하셨겠네요?", “물론이지”, “그럼 나도 창조 하셨겠네요?”, “물론이지”, 그러자 아이가 말했습니다. “하나님 요즘 솜씨 참 좋아졌어요.” 하나님은 지금도 창조를 계속하고 계십니다. 우리의 믿음은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는 말에서 시작되고 출발됩니다. 이것이 전제되어야 나의 믿음의 삶이 시작됩니다. 그리고 이 전제를 신뢰할 때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가 설정됩니다.
질서와 법칙의 창조
하나님이 이 세상을 창조하실 때 또 그 배후를 움직이는 질서도 법칙들도 창조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질서의 하나님이십니다. 이 세상의 삶의 내용을 보면 그 배후에 질서도 길도 법칙도 함께 창조되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하나님은 세상을 만드시면서 세상을 구성하고 운영되는 모든 질서와 법칙도 함께 창조하셨습니다. 빛을 창조하셨지만 빛만 창조하신 것이 아니고 빛을 구성하는 모든 법칙도 질서도 함께 창조하셨습니다. 또 인간을 창조하셨지만 몸만 창조하신 것이 아니고 몸을 구성하는 모든 질서도 함께 창조하셨습니다. 인체를 들여다보면 몸속에는 가는 핏줄로 이어지게 몸이 움직이고 운영되도록 하셨습니다. 그래서 인체를 보면 아주 복잡하게 만들어졌지만 서로 충돌하지 않고 아주 질서정연하게 움직이고 있습니다.
몸속에서 피가 한 바퀴 도는데 46초가 걸립니다. 자동차 한대가 움직이는데 부품이 만 3천개로 조립되어 있습니다. 747 제트기는 3백만 개의 부품으로 만들어졌고 우주왕복선 5백만 개의 부품으로 조립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인간의 몸 안에 있는 세포조직은 25조 개의 가느다란 혈관과 세포로 조직되어 있다고 합니다. 입속에 있는 혀에만 9천개의 미각 세포가 들어 있어서 기능을 발휘해서 움직이고 있습니다. 얼마나 신비한 일입니까. 하나님은 이 세상의 커다란 우주인 하드웨어도 창조하셨지만 자세히 보면 아주 작은 세밀한 조직과 질서인 소프트웨어도 창조하셨습니다.
천체를 보십시오. 얼마나 복잡하고 미묘합니까. 그럼에도 질서 정연하게 이 우주가 돌면서 서로 충돌하지 않습니다. 그것이 창조의 질서입니다. 물은 높은데서 낮은 데로 자연스럽게 흐르게 하셨습니다. 바다 물이 많지만 그 많은 바다물이 육지로 넘치지 않게 하셨습니다. 햇볕이 뜨겁지만 그러나 햇빛이 이 세상을 태우지 않게 하셨습니다. 하늘에 무수한 별들이 널려 있지만 그 별들이 땅으로 쏟아지지 않게 하셨습니다. 땅속에는 물과 바닷물과 석유가 혼재되어 있지만 그러나 서로 질서를 지켜 자기가 있어야 할 곳에 머물러 있게 하셨습니다. 그것이 이 우주의 질서입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질서와 법칙을 만들어 놓으셨습니다. 우리 인간은 그 질서를 지키며 존중하며 살아야 합니다. 성경은 또 그 질서를 지키라고 강조하십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오늘에 와서 인간들이 이 질서를 무시하고 지키지 않았습니다. 그 결과 이 세상의 질서가 흔들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니까 해가 독을 뿜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 온난화가 발생하고 기류에 일대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하였습니다. 앞으로 이 세상에 엄청난 재앙이 일어날 것입니다. 뿐만 아니고 인체의 질서도 파괴시켰습니다. 인체도 질서정연 하게 움직이던 것이 술로 담배로 마약으로 알코올로 질서를 망가트려서 각종 무서운 질병이 발생하였습니다. 물이 자연스럽게 흐르던 것을 사람들이 무분별하게 개발해서 물이 넘치지 말아야 할 곳으로 넘치고 있습니다. 질서를 안 지키면 이렇게 됩니다. 이러다 언젠가는 또 질서를 무시하고 지키지 않은 일로 인해서 엄청난 재앙이 이 땅에 타나날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하나님이 세우신 자연과 인생의 법칙을 존중하고 지켜야 합니다. 열매 맺기를 원하는 사람은 수확의 법칙을 존중해야 합니다. 건강하기를 원하는 사람은 건강의 법칙을 존중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만드신 질서와 법칙을 무시하는 것은 곧 하나님을 무시하는 것입니다. 철야기도를 열심히 하고 높은 곳에서 뛰어 내려서는 안 됩니다. 그것은 중력의 법칙을 만드신 하나님을 무시하고 만홀히 여기는 행동입니다. 내가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면 하나님이 만드신 질서와 법칙을 존중해야 합니다. 질서와 법칙을 무시하는 것은 하나님을 무시하는 일입니다.
안전위한 법칙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 이렇게 질서와 법칙을 만드신 뜻에는 몇 가지 진리가 들어 있습니다. 하나는 안전입니다. 하나님이 허락하신 법칙과 원리는 모두 우리로 하여금 복을 받게 하기 위함입니다. 하나님의 복은 법과 질서의 삶을 통해서 안전의 통로로 우리에게 다가오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세상의 모든 법칙을 존중해야 합니다. 그 삶에 안전이 보장되고 복을 받는 통로의 역할을 하게 됩니다.
또 하나는 사랑입니다. 이 질서와 법속에 사랑이 들어있습니다. 사랑은 법이고 질서입니다. 서로 사랑하면 서로를 보호하고 믿고 행복을 만들고 안전한 삶과 인생이 주어집니다. 그런데 사랑이 사라지면 다 잃게 됩니다. 사랑의 원리를 생각해 보십시오. 전혀 관계가 없는 두 사람이 만나 사랑이 싹이 틉니다. 그렇게 사랑하게 되면 서로를 돌보게 됩니다. 그리고 사랑을 키우고 행복을 가꾸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서로의 부족한 부분을 보완하면서 행복한 가정으로 만들어 나갑니다. 얼마나 신비한 일입니까. 이 사랑의 원리를 하나님이 창조하셨습니다.
하나님이 만드신 질서와 법칙은 우리에게 안전과 행복을 주시기 위해서 주어진 것입니다. 이 질서는 중앙선과 같은 것입니다. 중앙선을 이탈하면 곧 바로 큰 사고가 나고 파괴가 주어지고 다 잃게 됩니다. 모든 피조물은 한번 태어나면 스스로 존재하는 존재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매 순간 애프터서비스를 하십니다. 우리는 스스로의 힘으로 살아가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것은 착각입니다. 자세히 알고 보면 모든 피조물들은 매순간 하나님에 의해서 새롭게 생명력을 보충 받고 보존되어 생명력을 지탱하며 살아가는 존재들입니다.
비전도 창조
하나님이 이 세상의 보이는 것만 창조하신 것이 아니고 비전도 꿈도 창조하셨습니다. 성경을 보면 가득히 꿈으로 비전으로 채워 놓으셨습니다. 그래서 성경을 비전의 책이라고 말씀합니다. 위인들은 하나같이 이 성경을 통해서 꿈을 전수받고 비전을 얻어 후에 위인들이 되었습니다. 본문을 보면 세상을 창조하신 후 아담에게 분부하셨습니다. “이 세상에 충만 하라, 정복하라, 다스리라”, 이것이 하나님이 성경 속에서 창조하신 비전이고 꿈이고 환상입니다. 하나님의 세계는 뻗어나가고 발전하고 향상하고 전진하고 왕성하게 움직여 나가는 섭리입니다.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12명의 제자들을 불러서 훈련을 시키십니다. 그 12명이 120명으로, 유대와 사마리아로, 로마로, 유럽으로, 마침내는 전 세계로 퍼져 나갑니다. 그것이 하나님 나라의 특징입니다. 그래서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정복하고 충만한 역사가 일어납니다. 아주 작은 겨자씨는 땅에 심겨지면 커서 새들이 깃드는 큰 나무로 성장합니다. 박 씨 하나는 작은 것이지만 땅에 심으면 온 지붕을 덮습니다.
우리는 이 눈을 가져야 합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하늘의 별처럼, 땅의 모래처럼 창대하리라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리고 젓과 꿀이 흐르는 땅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또 너는 복의 근원이 될 것이라고 비전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비전의 하나님입니다. 오늘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 눈을 가져야 합니다. “성령이 임하시면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고 하셨습니다. “너희가 지금은 고기를 잡지만 이제부터는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리라”고 하셨습니다. 바울은 상상도 하지 못했지만 성령은 바울에게 “로마로 가서 전도하라”는 환상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비전의 하나님이십니다. 오늘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 환상을 가져야 합니다. 이 세상을 “다스리라, 정복하라, 충만 하라” 이것이 하나님이 주시는 꿈이고 비전입니다.
그 말은 이 넓은 세상을 개척하라, 꿈을 펼치라는 말씀입니다. 얼마나 원대한 꿈과 비전과 환상입니까.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우리는 이 꿈을 모릅니다. 그래서 안목도 좁고 자기 안에 갇혀 살 때가 많습니다. 그 결과 가족 간에, 형제간에 아옹다옹하면서 다투며 살아갑니다. 이웃 간에 조그만 이해관계 때문에 티격태격 하면서 살아갑니다. 자신의 일이 잘 안 풀린다고 삶을 저주하고 비관하고 때로는 삶을 포기하는 일도 발생합니다.
하나님 중심의 삶
느헤미야 9장6절을 보면 “하늘과 하늘의 하늘과 일월성신과 땅과 땅위의 만물과 바다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지으시고 보존하시는 하나님을 경배하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요한계시록 14장7절을 보면 “하늘과 땅과 바다와 물들의 근원을 만드신 이를 경배하라“고 했습니다. 그 말은 하나님을 중심으로 살라는 말씀입니다. 즉 모든 것의 중심은 하나님이라는 말씀입니다. 모든 삶에는 중심이 있습니다. 그 중심이 무시되면 흔들리게 되고 분열과 갈등을 찾아오게 되어 있습니다.
가정의 중심은 아버지가 아닙니다. 아버지는 바깥사람이기 때문에 중심이 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가정의 중심은 어머니인 것입니다. 어머니는 안사람입니다. 아버지가 아무리 못났어도 어머니가 중심이 있으면 그 가정은 든든히 서 갈 수 있습니다. 그래서 아내입니다. 어머니입니다. 언어를 보면 어머니가 가정의 중심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계집’, ‘가시내’, ‘에미나이’ 모두 욕이 아니고 우주의 근원을 나타낸 말입니다. ‘아내’는 ‘안에 있는 사람’이 진화한 말입니다. ‘계집’은 쌀 껍데기를 벗겨 내면 겨가 있습니다. 그 겨가 쌀을 둘러싸지 않으면 자랄 수가 없습니다. 어머니, 아내는 그 겨의 역할을 합니다. 그래서 처음에는 여자를 ‘겨집’이라고 했지만 후에는 ‘계집’으로 음운이 변화한 말입니다. 이 말은 여성이 생명을 품는 존재로 인식한 말입니다. ‘에미나이’는 북쪽에서 사용하는 말로 ‘어미로 태어난 이’라는 뜻이고 ‘가시내’는 ‘가시나이’의 준말로서 ‘가시’는 옛말에 ‘아내’를 뜻하고 이 ‘가시’가 나중에 ‘각시’로 변합니다. 그리고 부부를 ‘가시버시’라고 했는데 여기서 ‘버시’는 오늘의 ‘벗’이라는 뜻으로 가장 친한 사이인 부부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가시’는 왜 ‘아내’인가 하면 ‘가시’는 ‘갓’ 이라는 뜻이며 ‘갓 태어난. 갓 시집온 갓난아이’라는 뜻입니다.
엄마도 아이가 태어나서 최초 발음 시 ‘엄’자가 나온다고 해서 엄마입니다. 거기다 존재의 높임말인 ‘니’자를 합쳐서 ‘어머니’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나중에는 이 ‘니’가 더 높아져서 ‘ㅁ’ 자를 붙여 ‘어머님’이 되었습니다. 그러다 이 ‘어머니’가 줄여져서 ‘엄니, 엄마’가 되었고 높이면 ‘어머님’이 되고 낮추면 ‘l’가 떨어져 나가 ‘엄마’가 됩니다. 어머니는 모든 삶의 중심입니다. 그래서 살아가다가 고달프면 아버지 보다 어머니를 먼저 생각합니다. 또 살아가다가 어느 순간 놀라면 ‘엄마’하고 부릅니다. 그 말은 어머니가 삶의 한 중앙에 서 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놀라면 ‘어머머’ 하는데 그 말이 ‘어마마마’로 발전하여 대왕대비의 호칭이 되었습니다. 결국 이 세상의 모든 근원은 아내, 어머니에게서 시작된다는 말입니다.
한 가정의 중심이 이렇게 아내, 어머니에게서 시작된다면 이 우주의 중심은 하나님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살아가다가 어려운 일을 만났을 때에 어머니를 찾듯이 살아가다가 가장 어려운 일을 만났을 때에 사람들은 하나님을 찾게 되어있습니다. 그것은 이 우주의 중심이 하나님이라는 뜻입니다. 사람이 가장 편안한 곳, 가장 평안했던 곳이 어머니의 자궁속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가장 외로울 때 잠자는 모습이 자궁 속에 있었던 때의 그 모습으로 모두 웅크리고 옆으로 누워 외로워합니다. 그리고 살아가다가 어렵고 고독할 때 모두 어머니를 찾고 어머니에게로 달려가려고 합니다. 그것은 인간의 삶의 중심이 어머니이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인간의 영혼이 가장 편안함을 느끼는 곳이 하나님의 품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삶에서 궁극적인 자리에 놓이게 되면 모두 하나님을 찾습니다. 그리고 죽은 후에는 그 영혼이 모두 하나님께로 돌아갑니다. 그것은 이 우주의 중심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이 세상을 창조하셨습니다. 만물만 창조하신 것이 아니고 질서도 법칙도 정신도 아울러 창조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질서를 존중해야 합니다. 그때 우리의 삶에 안정이 보장됩니다. 열매 맺는 삶이 주어집니다. 사랑의 삶이 만들어집니다. 그런데 그 질서를 무시하고 살면 안전도 사라집니다. 재앙이 주어집니다. 대가를 치르게 됩니다. 외로움이 몰려옵니다. “하나님과 함께”, 그것은 창조의 대 원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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