택하심과 자녀 됨의 은혜
엡 1:3-6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
령한 복을 우리에게 주시되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
하나님은 이 세상을 지으셨습니다. 그리고 끊임없이 이 세상에서 조용히 섭리하십니다. 늘 공급하시고 보완하시고 치유하시고 사하시고 일용할 양식을 공급하여 주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어쩌면 주지 못해서 안달하십니다. 주신 것들이 대표적으로 몇 가지 있습니다.
에덴을 주심
자식에게 주려고 집을 잘 짓는 아버지처럼 에덴을 만들어 인간에게 주셨습니다. 얼마나 좋으면 에덴이라고 했겠습니까. 에덴이라는 말은 파라다이스 즉 천국이라는 말입니다. 그곳을 아담에게 주셨습니다. 특별한 배려이고 특대우입니다. 어떤 사람은 천국은 금과 은과 각종 보석으로 꾸며졌다고 말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그렇게 설교하는 목회자들도 있습니다. 그것은 참으로 큰 오해입니다. 천국까지 금은보석으로 꾸며졌다면 천국이 이 세상과 다를 바가 무엇입니까. 돈 좀 있는 사람은 온 집안을 금은보석으로 얼마든지 꾸며놓고 살 수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것이 무슨 천국입니까.
계시록을 보면 천국은 각종 금은보석으로 꾸며졌다고 표현한 구절이 있는데 그것은 사도요한이 환상을 통해서 보니까 천국이 마치 찬란한 금은보석으로 꾸며놓은 것처럼 보였다고 표현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에덴을 그렇게 만들어서 인간에게 주셨습니다. 그런데 인간이 그 파라다이스를 지키지 못해서 그만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지키지 못하면 잃게 되어 있습니다. 주는 것도 중요하지만 지키는 것은 더 중요합니다. 그래서 줄때는 먼저 지키는 방법을 가르쳐 주어야 합니다.
예수를 주심
하나님은 마지막에는 아들까지 주셨습니다. 주셔도 그 아들을 제물로 세상에 보내셨습니다. 하나님의 생각 속에는 온통 인간 사랑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래서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셨다”고 했습니다. 어떻게 아들을 제물 되게 하기 위해서 세상에 보낼 수가 있습니까. 그래서 그 하나님의 사랑을 모방하고 흉내 내고 따라갈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하나님이 마침내는 이 세상에 아들까지 주셨습니다.
복을 주심
하나님이 너무 많은 복을 주셨습니다.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복을 주셨습니다. 오늘 어떤 분들은 기독교에서 복을 말하면 잘못 된 것처럼 생각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오늘 기독교가 기복종교화 되고 있다고 말하는 신학자들과 목회자들이 있습니다. 그런 우려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기독교에서 복을 구하고 복을 말하는 것이 잘못되었다고 말하는 것은 더 잘못된 우려입니다. 기독교는 복을 받는 종교입니다. 성경을 보면 다 복을 주신다는 이야기입니다. 성경이라는 말은 약속의 책이라는 말이고 복음이라는 말은 복을 주신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것이 복이고 예수를 알고 구원받는 것이 복입니다. 복중에도 이런 복이 없습니다. 왜 복을 말하는 것이 잘못입니까.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너는 복의 근원이 되라”(창세기 12:2)고 했고 또 성경은 “네가 들어와도 복을 받고 나가도 복을 받을 것”(신명기 28:6) 이라고 했습니다. 그것도 하나님이 직접 하신 말씀입니다. 그리고 신약성경에서는 모두 신령한 영적인 복을 여러 곳에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너무 세상에서 말하는 것에 스스로 움츠리고 자신 없어 할 필요 없습니다.
또 어떤 분들은 기도할 때 “달라는 기도 좀 하지 말라“고 하는데 그 말도 참 잘못된 말입니다. 여러분, 달라는 기도 빼고 기도 해 보십시오. 기도가 성립됩니까. 어쩌다 이런 주장을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하나님은 자녀들이 달라고 기도하는 것을 매우 기뻐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구하고 간구하고 안 되면 부르짖으라”(마태복음 7:7)고 하셨습니다. 그것도 주님께서 직접 말씀하셨습니다. 자녀가 부모에게 무엇인가를 구하고 요청하는 것은 아주 자연스러운 모습입니다. 그것은 어쩌면 그리스도인의 생활 그 자체입니다.
여러분, 하나님께 염치없어 말고 마음껏 요청하고 기도하고 부르짖으십시오. 우리는 하나님께 염치없어야 하고 뻔뻔해야 하고 그러면서도 당당해야 합니다. 자녀들이 부모에게 얼마나 뻔뻔하고 염치없고 당당합니까. 그러니까 자녀입니다. 이웃집 아이들이 그렇게 당당하고 뻔뻔할 수 있습니까. 오히려 하나님께 죄송해 하고 염치없어 하는 것이 교만이고 자만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쉬지 말고 기도하고 간구하고 찾고 두드리고 부르짖으라고 하셨습니다. 다만 우리는 여기서 한 가지 생각할 것은 너무 값싼 복을 구하고 너무 이생적인 복에 집착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복은 물론 이생적인 복도 주셨지만 더 중요한 아주 근본적인 복을 주셨습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그런 근본적인 복을 말씀합니다. 본문 3절을 보면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을 우리에게 주셨다”고 했습니다. 그 복의 내용이 4절에 나와 있는데 하나는 “우리들이 하나님으로부터 택하심을 받은 복”이고 또 하나는 “하나님의 자녀 삼으심의 복”입니다. 복중에서 이 두 가지 복이 가장 근본적이고 신령한 복이라는 것입니다. 주석자 아미테이지 로빈슨(Armitage Robinson)은 바울 서신중 백미“라고 했고 윌리엄 바클레이 (William Barclay)는 “인간의 언어로 기록된 글 중 가장 성스러운 글” 이라고 말하고 “서신서들 중에서 여왕”이라고 했습니다. 그만큼 이 내용들은 신령한 은혜를 다루고 있고 하나님의 가장 큰 은혜인 자녀 됨과 하나님으로부터 택하심을 받은 내용을 집중적으로 다루고 있습니다.
서양의 한 신학자가 한국교회를 돌아보고 돌아가는 길에 “한국교회는 너무 값싼 은혜만 구하고 있다”고 평가했습니다. 그 말은 한국교회의 교인들은 너무 이생적이고 현재적인 복을 구하고 가장 근본적인 신령한 복들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근본적인 복이 우리들이 하나님의 자녀 됨의 복이고 자녀로 택함 받은 것이 복인데 그 점을 너무 소홀히 여긴다는 말입니다. 복에 대해서 문제가 된다면 이 부분이 문제가 됩니다. 그동안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너무 이생적인 복을 구하는 경향이 있었습니다. 이 부분을 지적할 때 우리는 수긍해야 합니다. 우리는 보다 더 소중하고 근본적인 복이 중요하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복들
먼저 깨달음의 복을
이 깨달음의 복이 참 중요합니다. 하나님이 이것을 복의 내용으로 우리에게 주십니다. 아무리 많은 것을 주어도 깨닫지 못하면 그것은 복이 아닙니다. 그것을 당연히 여기고 마땅히 주어질 것으로 여긴다면 그것은 복이 아닙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단잠을, 건강을, 식욕을 복인 줄 모릅니다. 그것이 얼마나 큰 복입니까. 그것을 모르면 잃고 난 후에 알게 됩니다. 단잠을, 식욕을, 건강을 잠시중단 당해 보아야 그것이 얼마나 소중한 복인 것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깨달음의 복을 먼저 주십니다.
감당함의 복
아무리 좋은 것이 많이 주어져도 감당하지 못하면 그것도 복이 아니고 재앙입니다. 지식의 복을 받았는데 그 지식이 그만 교만해지고 하나님을 부인하는 지식으로 사용되었다면 그 지식은 복이 아니고 재앙이고 저주입니다. 가난하던 사람이 어느 날 큰돈을 벌었습니다. 벼락부자가 되었습니다. 그것이 복입니까. 그 사람이 그 많은 돈을 관리하고 감당할 능력이 있습니까. 그래서 오히려 타락의 도구가 될 것입니다. 갑자기 어느 날 복권을 탄 사람이 성공할 것 같습니까. 통계를 보면 하나같이 복권을 탄 사람 99%가 타락했다고 합니다. 가난할 때는 열심히 일하고 가족을 사랑하고 성품도 좋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돈이 많아지고 복권이 당첨되어 벼락부자가 되었다면 그 부자가 노동의 맛을 알 것이고 질서의 삶을 살 것입니까. 감당함의 복, 그것은 하나님이 주시는 복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로 하여금 어느 날 갑자기, 많이, 높이, 크게 만들지 않으십니다.
만족함의 복
만족함은 양이나 부피에 있지 않습니다. 양과 부피에 너무 집착하게 되면 만족함을 모르게 됩니다. 그러면 귀한 것이 주어져도 만족함도 모르고 귀함도 모르고 복인 줄도 모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주시는 복은 만족함과 기쁨과 즐거움이 뒤따릅니다. 좋은 것을 받아 누리는 것, 그것이 주어짐에 만족해하는 것, 그 마음이 진정한 복입니다. 복을 아는 사람은 잃어버리지 않습니다. 빼앗기지도 않습니다. 놓치지도 않습니다.
복을 전달하는 복
복을 받는 것도 누리는 것도 주어진 복에 대해서 만족해하는 것도 중요한 복입니다. 그런데 그 보다 더 중요한 것은 복을 나누고 전하는 복입니다. 창세기 14장19절을 보면 제사장 멜기세덱이 아브라함에게 복을 빕니다. “천지의 주재시여,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여 아브라함에게 복을 주옵소서.” 야곱이 요셉의 인도로 애급에 가서 바로를 만납니다. 그 자리에서 야곱이 “바로에게 축복”(창세기 47:10) 했습니다.
저는 목사가 된 것을 감사할 때가 있습니다. 제가 “복을 기원하는 사람“이 된 것 때문입니다. 목사에게는 축도권이 주어졌습니다. 축도는 복을 선포하는 권능입니다. 얼마나 복된 일입니까. 축도할 때마다 아쉬움도 있습니다. 천주교에서는 예배를 마치고 사제들이 “....성도들에게 함께 하시기를 축원합니다”하면 성도들이 일제히 “사제에게도”합니다. 그런데 여러분들은 “아멘” 하고 그냥 돌아갑니다. 그래도 좋습니다. 내가 복을 선포하고 기원하고 축도한다는 것이 내게는 여간 복이고 은혜가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은 복을 선포하는 사람들입니다. 복을 나누고 전하고 베풀고 선언하고 축원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누구의 집에 가거든 먼저 복을 빌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네가 빈복이 상대방이 받지 않으면 그 복이 네게로 돌아 올 것“(마태복음 10:13)이라고 했습니다. 복을 선포하십시오, 복을 나누십시오, 그 삶이 복을 받는 삶입니다.
하나님의 성품회복의 복
이마도 이 복이 가장 큰 복일 것입니다. 내가 주 안에서 부름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면 가장 먼저 주어지는 복이 잃어버렸던 하나님의 성품을 되찾는 일입니다. 얼마나 큰 복입니까. 내안에 하나님의 성령이 임재하시면 그 성령이 내 안에서 변화를 일으켜 나는 없어지고 하나님의 성품을 이어받아 점점 성숙해 가는 내 모습, 얼마나 큰 은혜이고 복입니까. 신앙인은 그렇게 해서 성숙해져가고 익어가고 여물어 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하나님의 성품을 닮아가는 복은 누구에게 주어지는가 하면 감사하는 사람에게 주어집니다. 신앙생활에서 감사함의 삶은 참 중요한 자질입니다.
신앙 안에서 살아갈 때 이 불평하는 마음이 참 문제입니다. 어떤 사람을 보면 너무 불평을 많이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 불평하는 사람은 언제나 뒤에서 불평을 합니다. 그래서 불평하는 사람들은 모두 뒤에 모여 있습니다. 또 그 사람들은 서로 잘 뭉칩니다. 뭉쳐서 불평하고 원망하고 비난합니다. 이렇게 불평을 많이 하는 사람을 보면 몇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우선 시간이 많습니다. 사람이 할 일 없으면 불평을 하게 되어 있습니다. 바쁜 사람은 불평할 시간도 여유도 없습니다. 또 불평거리를 찾아내는 통찰력이 있습니다. 참 특수한 달란트이고 은사입니다. 불평을 잘 하는 사람은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을 찾아내는 재능이 있습니다. 이런 불평 자는 4중고를 겪게 됩니다. 하나는 불평할 때 축복을 누리지 못합니다. 얻은 복도 잃어버립니다. 또 불평하는 사람에게는 축복은 고사하고 고통이 찾아옵니다. 그리고 후회도 찾아옵니다. 살아가는데 후회는 지옥과 같은 것입니다. 지옥의 분위기는 후회의 장소와 같습니다. 그래서 지옥에 가면 “걸걸”하는 소리가 요란하다고 합니다. 할걸, 말걸, 끊을걸, 포기할걸, 봉사할걸, 순종할걸 등. 이 소리는 고통의 소리요 후회의 소리입니다. 또 하나의 고통은 하나님께서 가까이 안하신다는 점입니다. 하나님뿐이 아니고 사람들도 가까이 안합니다. 불평하는 마음은 사탄이 주는 마음입니다. 그래서 불평하는 마음에는 은혜가 임하지 않습니다. 임했던 은혜도 다 까먹게 됩니다. 감사는 하나님의 성품을 회복한 마음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누구십니까. 한마디로 표현하면 하나님은 은혜 베푸시기를 좋아하시는 분이십니다. 주시기를 좋아하시는 분이십니다. 누구에게나, 자격 유무를 따지지 않고 은혜를 베푸시고 주십니다. 그래서 성경을 보면 하나님으로부터 은혜를 입고 복을 받은 사람들의 이야기로 가득 차 있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을 만남으로 변화된 사람들의 이야기로 꾸며져 있습니다.
이렇게 복을 주시는 이유
그 이유가 6절에 나와 있습니다.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신 이유는 하나님을 찬송하게 하기 위함이고 우리에게 복을 주시는 이유도 하나님을 찬송하게 하기 위해서(에베소서 1:6)입니다. 왜 찬송하게 하시는가 하면 더 주시기 위해서 입니다.
자녀가 부모에게 감사하고 영광되고 자랑거리가 되면 부모는 흥분하고 감격합니다. 그러면 다 주십니다. 제자가 스승에게 감사하고 은혜에 보답하고 사회에서 사랑받는 사람이 되면 스승도 흥분합니다. 가는 곳 마다 제자 자랑과 칭찬을 아끼지 않습니다. 성도들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감사하며 살아가면 하나님도 흥분하십니다. 성경에 보면 하나님이 흥분하시는 모습이 탕자 아버지의 모습을 통해서 표현했습니다. 아버지가 침이 마르도록 아들자랑을 하였는데 그 아들이 집을 나가고 병들어 돌아왔을 때 동네 사람들에게 부끄러움도 모르고 방탕하고 재산 탕진한 것을 생각도 안하고 집에 돌아온 것만으로도 반가워서 버선발로 뛰어 나가 맞아들이고 동네 사람들을 다 불러 모아 잔치를 베풀며 흥분하는 그 탕자의 아버지의 심정을 아십니까. 그것이 하나님의 심정이고 마음입니다. “내게 영광 돌려라, 내게 바치라, 주일을 지켜라, 나를 사랑하라”고 하시는 것은 모두 하나님만을 위해서가 아닙니다. 더 주시려고, 더 은혜 베푸시려고, 더 가까이 오시려고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신령한 복을 우리에게 주시되 ...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이는 그가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 주께 영광 돌리는 삶이되시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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