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난의 의미와 성도
우리 자신을 포함한 성도들에게 있어 생각지 않았던 시련과 고난이 다가오는 일이 종종 있다. 너무 힘들어서 겪는 본인도 고통스러워하지만 주변에서 그를 바라보는 이들도 안타깝다. 생각해 보건데, 고난 또는 시련의 의미에 대해 우리의 잘못으로 인해 연단 혹은 시련이 오게 되므로 이런 것들이 전혀 없는 것이 정상적인 신앙생활이라고 생각하는 이들이 의외로 많은 듯하다. 과연 그러할까? 연단이 전혀 없는 사람, 그렇게 살아가는 사람이 있을까. 아니, 과연 연단은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지닐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모든 시련은 우리의 잘못을 교정하는 회초리의 역할도 하지만 그것을 통해 성도의 성화 과정에 반드시 필요한 섭리적 목적도 있다. 인간의 죄성은 꺼지지 않는 불과 같으며 설사 거듭난 성도라 할지라도 예외가 아닌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근본적인 원인에 대해 살펴보고 자신에게 닥친-닥칠 수 있는- 고난에 대해 묵상해 보는 것은 많은 유익이 있으리라 생각한다.
먼저 많은 이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하늘 아버지께서는 우리의 잘못에 대해 교정하고 죄악에서 떠나도록 하시기 위해 시련을 주시는 경우가 있다. 수많은 성경말씀이 이같은 입장을 지지하는 것이 사실이다. 시편 107편 17절 ‘미련한 자들은 그들의 죄악의 길을 따르고 그들의 악을 범하기 때문에 고난을 받아’, 시편 119편 67절 ‘고난당하기 전에는 내가 그릇 행하였더니 이제는 주의 말씀을 지키나이다’ 등이 이같은 입장을 견고히 하는 기반이 된다. 성도의 잘못에 대해 하나님께서 방치하시지 않는 것이 합당하다. 그러한 채찍을 통해 성도는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잘못을 깨닫는다. 그리고 그 잘못의 자리에서 떠나게 된다. 이러한 하나님의 채찍이 없다면 우리는 얼마나 그릇 행하면서 그 속에서 자신의 죄를 먹고 마시며 살 것인가. 이러한 채찍을 통해 우리를 교정하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감사하지 않은가.
하지만 성경에는 꼭 이같은 고난의 이유만 나오는 것은 아니다.
히브리서 12장 11절에 ‘무릇 징계가 당시에는 즐거워 보이지 않고 슬퍼 보이나 후에 그로 말미암아 연단 받은 자들은 의와 평강의 열매를 맺느니라’는 말씀이 있다. 또 욥기 23장 10절에도 ‘그러나 내가 가는 길을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순금 같이 되어 나오리라’라고 말씀한다. 연단을 통해 얻게 되는 유익을 표현하는 적절한 말이다. 사실 고통을 겪을 때는 너무 힘들고 어려워 제발 이곳에서 벗어나기를 간구하게 되지만, 연단의 기간이 끝나고 나면 우리는 그 시간들이 참으로 유익했다는 것을 깨닫곤 한다. 아마 우리 모두는 이러한 섭리적 경륜을 경험하며 살아가고 있을 것이다.
이와 관련해 먼저 생각해 볼 것은 우리가 고통스러운 연단의 시간들을 통해 우리의 실체를 돌아보고 자신의 추함과 연약함, 나태함, 무능함을 절실히 깨닫게 된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연단은 분명 하나님의 선물이다. 우리는 자신의 비참한 실체를 보면서 하나님 앞에서 겸손해지며 그분의 은혜와 긍휼을 구하게 된다.
무능하고 부패한 인간에게 있어 이같은 근원적인 복은 없다. 하나님의 영광(사랑과 공의 등)과 함께 자신의 악함과 추함, 죄악 됨을 직시하는 자만이 근본적인 구원의 길로 접어들 수 있다. 물론 이러한 참된 복은 하나님의 창세전 선택으로 이뤄지는 것이다. 날마다의 삶속에서 거울처럼 자신을 돌아보게 되는 성도는 하나님의 은혜받은 자로서 마땅하지만 그것이 무능하고 부패한 인간본성으로 불가능한 일이기에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고통의 시간들을 통해 우리 자신을 직시하게 하시는 것이다. 고난을 통해 우리는 자신과 하나님의 은혜를 바라보게 된다. 우리 자신과 하나님의 은혜는 고난을 통해서 더욱 선명하게 보이는 법이다. 고난을 통해 우리 자신에게 절망하고 하나님께 대해서 소망과 감사와 찬양을 드리게 하시는 하나님은 분명 은혜로우신 아버지시다.
또 연단의 시간들을 통해 우리는 더욱 강해진다. 연단을 통해 하나님의 보호하심과 함께하심을 경험하고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과 은혜로 인해 앞으로 우리가 직면할 문제들에 있어서도 우리가 견디고 승리하게 됨을 알게 된다. 예전엔 작은 어려움과 연단 앞에도 어찌할 바를 몰라 했지만 이젠 어지간한 어려움과 고통은 힘들게 느끼지 않는다. 연단을 통해 강해졌기 때문이다. 어제 나와 함께 하여 주셨던 하나님께서 오늘과 내일도 나와 함께 해 주시리란 것을 확신하며 살아간다. 이처럼 교회된 우리들은 하나님을 배우고 알며 살아가는 삶속에서 하나님의 신실하심과 전능하심을 깨달아가며 더욱 하나님을 신뢰하고 경외하는 법을 배운다. 그렇기에 연단을 통해 성도들은 참되신 하나님을 더 깊이, 더 온전히 알아간다고 할 수 있다. 과연 그러하다면 연단을 통해 당신을 알아가게 하시는 하나님은 은혜로우시며 그의 백성들은 참으로 복되다.
동시에 연단의 시간들은 우리를 더욱 정결하고 순수하게 만든다. 특히 우리는 오직 하나님만 바라보는 신앙적 성숙을 연단과 눈물의 시간들을 통해 얻게 된다. 불순물들은 연단의 불속에서 태워지고 더욱 순수한 모습으로 남는다. 하나님만 의지하고 그 이름과 영광을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믿음은 안락한 소파나 온 몸이 노곤해지는 온천에서 이뤄지는 것이 아니라 거친 광야와 험준하고 깊은 골짜기를 힘겹게 걸어가는 가운데 확고해진다. 마치 힘겨운 운동을 통해 근육이 생기고 더욱 강해지는 것처럼 말이다. 우리가 이런 분명한 의식을 가지게 될 때 우리는 우리에게 다가온 고난과 시련의 시간들을 불평과 낙담으로 보내지 않게 될 것이다.
그렇다. 앞서 살펴본 것처럼 연단은 우리 모두에게 반드시 필요한 것이기에 비록 괴롭고 힘들더라도 우리는 연단의 시간들을 감사하면서 보낼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이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들만이 경험하는 삶의 역설이며 기쁨이다. 오늘날 우리 교회들은 이러한 삶의 역설에 대해 과연 어떻게 가르치고 있는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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