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울의 목회서신서 중에서 디모데전서3-4장
부제(副題) : “너의 진보를 나타나게 하라”
(딤전4:15)
1. 발표에 앞서서
최근들어서 교회의 진정한 참모습을 잃어가고 있다고 많은 사람들이 이구동성으로 말하고 있다. 같은 한 성령 한 하나님을 믿으면서 같은 기독교인들간에도 마치 다른 것을 믿는 것처럼 신앙안에서 다른 이질성을 가지고 서로를 평가하고 있는 것이다. 실제적으로 우리나라 대통령이 하나님을 믿는 장로출신인데, 그를 빗대어 혹자는 ‘MB식 기독교인’ 이라고 부르는 기독교식 신조어가 등장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것은 성경의 바른 지식에서 배우지 못한 결과라고 생각한다. 특히 교회의 여러 직임에 대한 이해부족과 이처럼 불러진 결과는 개인의 왜곡된 자의적 우상숭배적 신앙의 발로에서 나와진 것으로 보여진다.
이러한 우리 각 사람의 신앙의 위기적 상황에서 먼저, 사도 바울의 목회서신서 중에서 믿음의 참 아들 ‘디모데’에게 각별한 심정으로 편지한 본장(章)의 일부를 발췌하여 발표하게 된 영광을 본인이 갖게 되어 참으로 감사하다는 소감을 여러분들에게 먼저 밝히는 바이다. 왜냐하면, 필자(발표자)가 다루게 될 내용은 믿음의 아들 ‘디모데’에게 편지를 쓰는 이유가 분명히 언급되어 있고(딤전3장14절이하), 바울의 자상함이 그대로 묻어 있기 때문이다(딤전4장12절이하, 딤후1장3절이하). 그래서 마치 이것은 타국 땅에 멀리 가 있는 사랑하는 아들에게 보내는 아버지의 심정이 담긴 우리네 마음속의 글과도 같은 것이요. 더 나아가 유비적 관계로써 우리 참 하나님 아버지의 심정이 그대로 베어 있는 당부(권면)의 글이라서 매번 본문을 읽으면서 본인이 느끼는 감동은 각양으로 새로운 것이었기 때문이다.
디모데전서의 3장과 4장의 내용은 앞서서 공부한 디도서에서 교회의 ‘장로와 감독’ 그리고 ‘거짓교사’에 대한 가르침 중에서 다시 소개함으로써 교회의 바른 질서를 권면하고 있는데, 주요 내용은 ‘감독’, ‘집사의 자격‘과 ‘거짓교사에 대한 경계’를 거듭하여 소개하고 있다. 다만,이것들을 모두 발췌하여 다루는 것이 주어진 시간 및 성경적 지식의 한계(주해 등)를 느끼므로 여기서는 3장14절부터 4장16절까지만을 소개하여 발표하기로 하겠다. 오늘 발표 내용을 통하여 사도 바울이 권위본증(權威本證)으로 가졌던 사도적 성경적 교회의 바른 좌표와 이것을 터잡아 우리 성도의 구원의 실질이 무엇인가를 함께 충분히 배워 나갈 것으로 확신한다. 첨언하여, 사도 바울의 목회서신중 극히 일부 내용을 발췌하여 발표하는 것이니 만큼, 발표자 개인의 본 장에서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부분을 중심으로 몇몇의 주석 등 관련 책 내용을 약간 인용 전개하고, 그 외 발표자가 신학교에 들어와서 귀 동냥으로 열심히 주어들은 내용을 간단히 소개하면서 본 발표를 마무리 하고자 한다.
2. 디모데전서 3:14절~4:16절까지의 내용과 특징
14절에서 이제 바울은 편지의 붓을 잠깐 쉬면서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내가 속히 네게 가기를 바라나 이것을 네게 쓰는 것은”이라고 말한다. 이것은 디모데에게 가기를 희망하나 만일 지체되면 하나님의 집에서 어떻게 행하여야 할 것을 말하고 있다. 이것은 바울 자신이 갈 수 없는 무슨 이유가 있어, 사랑하는 영적 아들인 디모데에게 그리워 하면서 편지를 쓰고 있는 것이다.(고전4:17, 빌2:2, 딤후4:8-9, 딤후1:2)
15절에서 “만일 내가 지체(遲滯)하면 너로 하나님의 집에서 어떻게 행하여야 할 것을 얻게 하려 함이니 이 집은 살아 계신 하나님의 교회요 진리의 기둥과 터이니라”라고 지적하고 있음으로써 바울이 자주 사용하고 있는 은유적 표현으로(엡2:19-21), 교회의 교회됨을 언급하므로써 디모데가 그 집(헬;오이코스)에서 어떻게 행하여야만 하는가를 강하게 표현하고 있다. 교회를 ‘하나님의 집’(헬;오이코 데우)으로 표현한 것으로 견고한 터와 단단한 구조를 가진 ‘진리의 기둥’(헬;스튈로스)과 ‘터’(헬;헤드라이오마)를 말하는 것이다. 기둥은 교회가 진리를 받쳐주고 있음을 말하면서 동시에 터는 교회의 진리의 기초가 되며, 진리를 든든하게 받쳐주고 있음을 말하고 있다. 물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것이다.(고전3:11)
여기서 우리는 교회에 대하여 좀더 그 심오함의 의미를 살펴보기로 하겠다. 바울의 교회관은 15절에서와 하나님의 집으로 교회는 하나님의 가족이 모인 곳이어야 함을 전제하고 있다. - 권속(眷屬)의 공동체 또한 교회는 하나님의 살아계신 하나님의 교회, 즉 부르심과 초청없이는 도저히 형성되는 없는 하나님의 오직 주권적인 섭리에 의해 형성된 공동체인 것이다. 횐언하면, 이것을 ‘교회’ 밖으로 불러내다의 ‘엨클레시아’ 인 것이다. - 구원받은 공동체 마지막으로 교회는 하나님의 소유인 것이며, 본문에서와 같이 ‘진리(알레데이아)의 기둥과, 진리의 터’로서의 교회인 것이다. 이 의미는 기둥이 건물을 떠받치고 있듯이 교회의 책임은 예수 그리스도를 높이 들어 복음의 진리를 널리 전파하는 의미를 가지는 것이다. 아울러 교회는 불의와 비진리가 난무하는 세상에서 소금과 빛으로서의 이 세상에서 영적 진리의 수호자 노릇을 해야함을 나타낸다. 이러한 참 진리를 계속 지탱해 나갈 뿐만 아니라, 진리의 빛을 온 세상에 전해야 한다는 정당성을 시사하고 있다. - 복음전파의 공동체, 진리수호 공동체
이러듯 성경이 지적하고 있는 바에 따라, 오늘날 우리 교회의 모습은 과연 정당한 근거를 가지고 있는 지 점검하고 살펴 볼 필요가 있는 것이다. 혹여 살았다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실상은 죽은 ‘사데교회’와 같지는 않은 지 매우 두렵고 떨림으로 성경에 비추어서 다시끔 교정해야 할 것이다. 사도 바울은 소위 옥중 서신이라고 하는 그의 마지막 편지 글에서 (디모데후서)를 작성하면서 주님의 몸된 교회를 받들고 섬기는 성도 각 사람에게 다시 언급하면서 모든 진리를 옳게 분별하고 거짓된 가르침을 배격함으로써 복음의 진리를 지키며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임하도록 힘써야 함을 강조 하고 있기 때문이다.(딤후2:15)
16절에서 15절의 그 이유가 되는 구절을 말씀하고 있는 데, “크도다 경건의 비밀이여, 그렇지 않다 하는 이가 없도다”는 본서의 3장 1절(4장9절)에서와 같이 “미쁘다 이 말이여”과 같은 방식으로 다시한번 감탄사적 수사적 표현을 사용하고 있다. 이것은 ‘계시된 비밀’ 인 것으로 바울은 여섯 운율을 가진 초기의 신조적 찬송시나 찬송의 단편을 인용하고 있다.이 구절은 성육신, 부활에 의한 정당성 입증, 그리고 십자가와 부활, 승천에서 천사들과 인간들에게 보이신 것처럼, 그리스도의 영광을 받으신 인간성의 현현(顯現)이 바로 그것인 것이다. 이것이말로 우리의 경건(유세베이아)의 비밀이며, 우리의 구원의 계시된 비밀인 것이다. 다시 요약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한 하나님의 구원 계획의 비밀이 때가 차매, 하나님의 사람들에게 계시되었던 것이며, 바로 이 하나님께서는 교회를 통하여 그리스도 안에 감추어진 비밀을 계시하신 것이다. 교회 공동체가 붙잡고 있어야 할 진리에 대한 이 진술은 이제 오늘날 우리 교회가 보존하고 선포하도록 위임된 정당한 ‘비밀’인 것이다. (할렐루야!)
4장 1절에서 ‘그러나’(헬;데) 라고 말하고 있으므로써, 앞서서 언급한 내용에 대하여 부정적 내용을 전개하고자 하는 바울의 안타까운 심정이 담겨져 있다. 그러나, 이에 대한 해결책을 또한 함께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이제부터 본격적인 사도 바울의 목회를 위한 지침을 함께 읽어보기 하겠다. “그러나 성령이 밝히 말씀하시기를 후일에 어떤 사람들이 믿음에서 떠나 미혹케 하는 영과 귀신의 가르침을 좇으리라 하셨으니”(1절) “자기 양심이 화인 맞아서 외식함으로 거짓말하는 자들이라”(2절), “혼인을 금하고 식물을 폐하라 할 터이나 식물은 하나님이 지으신 바니 믿는 자들과 진리를 아는 자들이 감사함으로 받을 것이니라”(3절), “하나님의 지으신 모든 것이 선하매 감사함으로 받으면 버릴 것이 없나니”(4절),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거룩하여짐이니라”(6절)이상과 같이 바울은 교회에 다가올 위험들에 대하여 3절까지 언급하고 있으며, 이어서 6절까지 거룩함에 이르게 하는 말씀과 기도를 다루고 있다. 먼저 1절에서 3절까지의 내용은 영지주의에 대한 경계를 표현하고 있는데, 당시 풍미하던 이단 사상들에 대한 바울의 경계가 나타나는 부분으로서 특히 영지주의에 대하여 각별히 주의를 환기시키는 바울의 관심을 표현하고 있다. ‘미혹케 하는 영’은 당시 거짓과 위선과 거짓된 기적을 행사하며 육은 악하고 영은 선하다고 하는 영지주의에 대하여 말하였고, ‘귀신의 가르침’은 거짓 예언자들과 거짓 교사들은 진리를 가장한 귀신의 가르침을 말하며, 그럴 듯하게 보이고 그럴 듯하게 역사하는 그들은 사도들의 가르침과 대립하며 복음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에 도전 하였던 것이었다. 이들은 ‘양심에 화인을 맞아 외식하는 자’ 들이라고 사도 바울은 말하고 있다. 이들은 이와 같이 양심에 화인 맞아서 외식함으로 거짓말 하는 자들로 ‘혼인을 금하고 식물을 폐하라 할 터’라고 설명하고 있는데, ‘식물은 하나님이 지으신 바니 믿는 자들과 진리를 아는 자들이 감사함으로 받을 것이니라(4:3), 하나님의 지으신 모든 것이 선하매 감사함으로 받으면 버릴 것이 없다(4:4)’ 라고 변증하고 있는 것이다.
이 말은 진리를 가진(아는) 자는 즉 진리 가운데 있는 자는 하나님이 창조하신 것들을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고 받아야 함을 알고 있는 것이고, 4절에서 원문에서는 “호티” 즉 “왜냐하면” 하나님의 지으신 모든 것이 선하다는 사실을 알고 감사함으로 버릴 것이 없음 알고 주신 것들을 오직 감사함으로 받아야 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감사’ 리는 단어는 ‘유카리스티아’ 라는 단어로 바울 서신에서 주로 사용하는 단어인데, 그리스도인의 삶에 있어서 가장 기본적이고 영원한 요소가 바로 이 ‘감사’ 즉 ‘유카리스티아’라는 사실을 보여준다(엡5:20, 골3:17, 살전5:18) 모든 것을 감사함으로 받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며 그분을 경외하는 마음을 나타내는 것이다.(롬12;1)
다시한번 5절에서 헬라어 원문에서는 “가르”라는 접속사를 사용함으로써 ‘왜냐하면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를 통해서 성결하게 되기 때문이다’ 라고 결론 내리고 있다.하나님이 지으신 모든 것을 감사함으로 받을 때 아무것도 버릴 것이 없음을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를 통해 성결하게 되기 때문이다 라고 말한다. 그 이유가 바로 접속사 ‘가르’(왜냐하면... 때문이다 - because) 에서 그 이유를 찾을 수 있다. 오늘날 성도들은 사실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 분의 이름과 하나님의 성령안에서 씻음과 거룩함과 의롭다 하심을 얻은 존재들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성도들의 의와 구원일뿐 아니라 그들의 거룩함이시며, 그분 안에서 그들이 참 하나님께 대하여 거룩하게 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이다.(디도서 3장 5절에서 지난번에 공부한 바 있음)
본 구절의 논외(論外)에서 한가지 중요한 사실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6절 말씀에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함으로 인하여 성도가 가져야 할 기독교적 성경적 세계관을 확인할 필요가 있다. 5절의 ‘하나님의 지으신 모든 것이 선하매’ 라는 구절에서 창세기의 창조사역과 피조물의 관계성을 되돌아 볼 수 있고, 모든 것이 선하다 것에서 모든 피조물 유형과 무형의 것들이 이러한 창조의 원리에 따라 구속, 즉 회복의 관점으로 변혁되어야 할 것이다. 여기서는 시간 관계상 각설(却說)하면서 다루지 않고 다음에 좀 더 구체적으로 정리하여 발표하기로 하겠다.
이제 4장 6절에서 10절까지는 건전한 교리와 올바른 삶에 있어서 경건에 이르는 연습을 말씀하고 있는 것으로 성경구절을 인용하면, ‘네가 이것으로 형제를 깨우치면 그리스도 예수의 선한 일군이 되어 믿음의 말씀과 네가 좇은 선한 교훈으로 양육을 받으리라’(6절), ‘망령되고 허탄한 신화를 버리고 오직 경건에 이르기를 연습하라‘(7절), ’육체의 연습은 약간의 유익이 있으나 경건은 범사에 유익하니 금생과 내생에 약속이 있느니라‘(8절), ’미쁘다 이 말이여, 모든 사람들이 받을 만하도다‘(9절), ’이를 위하여 우리가 수고하고 진력하는 것은 우리 소망을 살아 계신 하나님께 등이니 곧 모든 사람 특히 믿는 자들의 구주시라‘(10절).4장 6절 말씀은 주의 일꾼은 형제(아델포스)를 깨우침에 대한 의무가 있는 것으로 모든 성도는 주의 좋은 일꾼이어야 함을 말하고 있다. 이때 믿음의 말씀으로 양육되어야 하며, 진리를 실천할 수 있도록 양육해야 한다. 특별히 진리를 잘 가르쳐 교육해야 하는데, 선한 교훈으로 형제의 사랑으로 가르쳐야 한다.
7절과 8절을 함께 보면, 경건(유세베이아)의 유익을 말씀하고 있는데, 범사에 유익하고 현재는 물론하고 미래까지 신령한 축복까지 약속하는 것은 오직 경건밖에 없음을 바울은 강조하고 있다. 경건은 진리와 더불어 우리의 삶을 살아가는 절대적인 필수의 덕목으로 기독교 윤리 전반의 일괄적으로 포괄된 내용이다. 이것은 망령된 일을 버려라(7절a), 허탄한 신화를 버려라(7절b) 거짓된 교훈을 버리고 망령된 생활을 버리고 그 다음에 나오는 ‘오직 경건에 이르기를 연습하라’(7절c)는 명령어조를 사용함으로 사도 바울은 강하게 표현하여, 권면하고 있는 것이다. 경건이란 다시 언급하지만, 성도의 ‘거룩한 삶’ 그 자체를 말하는 것이다. 오늘날 ‘영성이 있는 삶’ 이라든가 또는 영성기도, 관상기도가 교회안에 많이 게토화(Ghetto)되어있다. 8절에서 육체의 연습은 약간의 유익이 있다고 하나, 경건은 범사에 유익하다고 말씀하고 있다. 금생과 내생에 약속이 있다 라고 더 적극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이말의 뜻이 무엇인가 하면, 바울은 조심스레, 현재적으로 제한된 유익을 가진 육체적인 연습과 무한하고 영원한 유익을 가진 영적인 연습 사이의 유비를 이끌어 내고 있는 것이다. 운동선수는 경기의 상을 위하여 자신의 몸을 훈련시킨다. 하지만, 그 효과들은 현재적 삶뿐만 아니라 내세의 삶에 대한 약속을 지닌 경건을 향한 영적인 훈련과 비교했을 때, 순간적이고 제한된 유익으로 보인다. 그래서 ‘아타나시우스’는 7절, 8절을 이렇게 인용했다고 한다. “이제 영혼이 악한 견해를 추종하지 않을 때 겸비해지며, 미덕을 먹고 살게 된다. 왜냐하면 미덕과 악덕은 영혼의 양식이며, 그것은 자신의 의지에 따라, 이 둘 중의 하나를 먹을 수도 있고, 둘 중의 하나에 마음을 기울일 수도 있다. 만일 영혼이 미덕을 향하여 마음을 둔다면, 그것은 미덕과 의와, 절제와, 온유, 인내에 의해 양육될 것이다”(Letter I, Easter 5. p. 508)
기왕에 10절까지 주해, 설명하면, 그래서 이 경주는 역사로부터 분리된 것이 아니다. 현재 역사속에서 펼쳐진 하나님의 구원하시는 목적과의 관계에서 조명된다. 현재적인 수고와 애씀은 의미심장한 목표를 향해 움직이기 때문이다. 도래하는 희망 위에 강렬하게 마음을 쏟으며, 모든 이에게 구원을 주시는 믿음으로 응답하는 모든자들을 진정으로 구원하시는 살아 계신 하나님 안에 기초를 두고 있는 것이다. 모든 사람에게 받을 만한 미쁘신(헬;피스토스) 주의 말씀은 첫째, 생명력이 있기 때문이고, 둘째는 소망이 있으며, 셋째는 말씀은 능치 못함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범사에 경건의 연습을 하라고 말씀하고 있고, 이것은 바로 금생과 내생에 약속이 보장되어 있다고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9절의 모든 사람 이라는 말씀 속에서 바울은 디모데 개인에게 향하는 권면의 차원이 아니라, 모든 세대, 모든 이들에게 향하는 선포라 할 것이다. 물론, 이 때의 ‘모든 사람’은 하나님의 택자로서 말이다.
11절에서는 비교적 짤막한 구절이다. 그런데, 이것은 앞의 모든 것을 ‘명하고 가르치라’는 명령법을 사용함으로 매우 엄숙한 말씀이다. 이것은 말씀을 맡은 목회자의 권위와도 상관이 있는 것으로 디모데의 나이가 그리 많지 않은 연소한 나이임에도 사도 바울은 강하게 지도하고 있는 것이다. 복음을 믿고 경건에 이르기 위해 수고하고 진력하는 것은 하나님의 명령임을, 초대 교회 당시 하나님의 사자로서 교회의 모든 사람에게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것을 하나님의 권위(헬;엨수시아) 명할 수 있었던 것이다. 또한, 바울은 말씀에 순종할 것을 명할 뿐만 아니라, 가르치라고 즉 설득시키고 이해시키라고까지 한다. 헬라어로 가르치라는 말은 ‘디다스케’라는 말로 목회자는 가르치는 일에 능통해야만 함을 강조하고 있다. 사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위대한 선생이었지 않은가? 예수님께서는 기독교의 과제가 가르침, 즉 교육에 있음을 말씀하셨다(마28;20)
이제 4장 12절부터 16절까지 살펴보기로 하겠다. 이 장은 목회의 지도력의 은사와 책임을 강조하는 것으로 디모데는 ‘읽는 것과 권하는 것과 가르치는 것에 착념’ 하는데, 그의 목회 역량들을 총동원 하도록 요청받았다. 물론, 교회 지도자 특히 목회 사역자들은 성경과의 부단한 대화를 유지해야만 하는 것으로 12절에서와 같이 ‘오직 말과 행실과 사랑과 믿음과 정절에 대하여 믿는 자에게 본이 되라’라고 말씀하고 있으므로, 목회자는 먼저 자신이 했던 충고를 따라야 한다는 것이다. 참고로 “리처드 백스터”(Richard Baxter)는 이 구절과 관련하여 “네가 네 혀로 말한 것을 네 삶으로 철회시켜 버리지 않도록” “자신을 삼가라” 라고 가르쳤다. 디모데에게 주어진 영적 은사가 초대교회 당시에 장로들이 그에게 안수할 때, “예언”과 함께 수반되었음을 알 수 있다.(14절, 딤전1:18, 행6:6) 또한, 디모데는 그가 나이(삼십에서 삼심오세로 추정)가 어린 목회자이었음에 불구하고 업신여김을 당하지 안했을 것으로 확신한다. 이것은 12절의 믿는 자들에게 본이 되었으며, 읽는 것과 권하는 것과 가르치는 것에 착념하였기 때문이다. 타인들의 구원이 관계된 곳에서 권위를 가지고 명령하고 조정하는 것으로 오직 믿는 자들의 본을 보임으로 가능했기 때문이다.
15절, 16절을 살펴보면서 마무리 하도록 하겠다. ‘이 모든 일에 전심전력하여’...구원하리라‘ 라고 말씀하고 있는데, 여기에서 ’모든 일‘은 6절에서 14절까지 바울이 디모데에게 말한 모든 권면의 내용을 가리키며, 목회자 디모데에게 전심 전력하여 수행해 나가야 할 일들임을 분명하게 제시하고 있다. ’전심전력‘ 이라는 말은 헬라어로 ‘멜레타’ 라는 말로 원래의 뜻은 ‘걱정하다, 관심을 가지다’ 라는 의미이다. 그런데, 이 뜻이 점점 ‘근실히 집행하다‘, 또는 ’연습하다‘ 라는 말로 쓰이게 되었다. 본절에서는 바울은 이 모든 일에 정신적, 영적 훈련을 통해 디모데의 마음과 생각에 가득 채워져서 그가 이 모든 일에 전적으로 헌신하기를 촉구하고 있는 것이다.사도 바울이 디모데에게 강력히 명령하고 있는 것은 배교의 위험을 막아내기 d위해서 힘써야 할 일, 즉 스스로의 진보를 위해 계속 정진하며, 말씀 전파 사역에 최선을 다할 것을 명령하고 있는 것이다. 바울이 디모데에게 바라는 것은 단순한 일꾼이 아닌 ’그리스도의 선한 일꾼‘ 이 되는 것이었음으로 전심 전력을 다하는 것이었다.
3. 발표를 마치면서
이상과 같이, 목회에 대한 책임이 얼마나 막중한 것인가를 우리는 본문에서 살펴보았다. 사도 바울은 이 편지를 쓰면서 목회적 본래 목적을 상기시키며, 그 소명을 다시 일깨우고, 그것을 성취하도록 책임을 부여하면서 강력한 명령화법으로 자신의 믿음의 아들 디모데에게 글을 쓰고 있는 것이다. 루터는 디모데의 목회에 대한 소명을 말하기를, “진정한 소명이 있는 곳에는 우리 주 하나님께서 당신의 말씀으로 실패하도록 하지 않으시기 때문에 그것은 교리와 같이 중요한 것”으로 여겼다고 말했다.
디모데의 소명은 자신이 구했거나, 노력해서 얻은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그것은 수여된 것이다. 장로의 회에서 안수 받음으로 그의 본래적인 헌신은 “많은 증인 앞에서”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필자(발표자)기 말하려고 하는 것은 바로 이것이다. 목회는 특별히 선택되어진 특권이다. 그래서 보다 어려운 것이지만, 한편으로는 이 보다 더 쉬울 수가 없다. 왜냐하면, 선택자가 하라고 하는 명령대로만 하면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교회의 머리되시는 주님만을 바라보면서....목회적 소명으로 인하여 우리 모두는 부르심을 받았고 또 앞으로 받을 것이다. 디모데를 살펴봄으로써 우리의 진보(進步)를 더 한 층 전진하길 바란다. 믿음의 아름다운 진로를 향하여, 모든 일에 전심전력으로 우리의 소망을 하나님께 바라보면서 진보합시다.
“이 모든 일에 전심 전력하여 너의 진보를 모든 사람에게 나타나게 하라”
(딤전4장15절)
" Take pains with these things; be absorbed in them, so that your progress will be evident to all."
(1 Timothy 4:15)
▶질문 : 현재 우리가 속해 있는 교회는 어느 정도 올바른 성경적 신앙에서 목회적 삶을 구현해 나가고 있는가?(사역자들에게).............(*)
부제(副題) : “너의 진보를 나타나게 하라”
(딤전4:15)
1. 발표에 앞서서
최근들어서 교회의 진정한 참모습을 잃어가고 있다고 많은 사람들이 이구동성으로 말하고 있다. 같은 한 성령 한 하나님을 믿으면서 같은 기독교인들간에도 마치 다른 것을 믿는 것처럼 신앙안에서 다른 이질성을 가지고 서로를 평가하고 있는 것이다. 실제적으로 우리나라 대통령이 하나님을 믿는 장로출신인데, 그를 빗대어 혹자는 ‘MB식 기독교인’ 이라고 부르는 기독교식 신조어가 등장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것은 성경의 바른 지식에서 배우지 못한 결과라고 생각한다. 특히 교회의 여러 직임에 대한 이해부족과 이처럼 불러진 결과는 개인의 왜곡된 자의적 우상숭배적 신앙의 발로에서 나와진 것으로 보여진다.
이러한 우리 각 사람의 신앙의 위기적 상황에서 먼저, 사도 바울의 목회서신서 중에서 믿음의 참 아들 ‘디모데’에게 각별한 심정으로 편지한 본장(章)의 일부를 발췌하여 발표하게 된 영광을 본인이 갖게 되어 참으로 감사하다는 소감을 여러분들에게 먼저 밝히는 바이다. 왜냐하면, 필자(발표자)가 다루게 될 내용은 믿음의 아들 ‘디모데’에게 편지를 쓰는 이유가 분명히 언급되어 있고(딤전3장14절이하), 바울의 자상함이 그대로 묻어 있기 때문이다(딤전4장12절이하, 딤후1장3절이하). 그래서 마치 이것은 타국 땅에 멀리 가 있는 사랑하는 아들에게 보내는 아버지의 심정이 담긴 우리네 마음속의 글과도 같은 것이요. 더 나아가 유비적 관계로써 우리 참 하나님 아버지의 심정이 그대로 베어 있는 당부(권면)의 글이라서 매번 본문을 읽으면서 본인이 느끼는 감동은 각양으로 새로운 것이었기 때문이다.
디모데전서의 3장과 4장의 내용은 앞서서 공부한 디도서에서 교회의 ‘장로와 감독’ 그리고 ‘거짓교사’에 대한 가르침 중에서 다시 소개함으로써 교회의 바른 질서를 권면하고 있는데, 주요 내용은 ‘감독’, ‘집사의 자격‘과 ‘거짓교사에 대한 경계’를 거듭하여 소개하고 있다. 다만,이것들을 모두 발췌하여 다루는 것이 주어진 시간 및 성경적 지식의 한계(주해 등)를 느끼므로 여기서는 3장14절부터 4장16절까지만을 소개하여 발표하기로 하겠다. 오늘 발표 내용을 통하여 사도 바울이 권위본증(權威本證)으로 가졌던 사도적 성경적 교회의 바른 좌표와 이것을 터잡아 우리 성도의 구원의 실질이 무엇인가를 함께 충분히 배워 나갈 것으로 확신한다. 첨언하여, 사도 바울의 목회서신중 극히 일부 내용을 발췌하여 발표하는 것이니 만큼, 발표자 개인의 본 장에서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부분을 중심으로 몇몇의 주석 등 관련 책 내용을 약간 인용 전개하고, 그 외 발표자가 신학교에 들어와서 귀 동냥으로 열심히 주어들은 내용을 간단히 소개하면서 본 발표를 마무리 하고자 한다.
2. 디모데전서 3:14절~4:16절까지의 내용과 특징
14절에서 이제 바울은 편지의 붓을 잠깐 쉬면서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내가 속히 네게 가기를 바라나 이것을 네게 쓰는 것은”이라고 말한다. 이것은 디모데에게 가기를 희망하나 만일 지체되면 하나님의 집에서 어떻게 행하여야 할 것을 말하고 있다. 이것은 바울 자신이 갈 수 없는 무슨 이유가 있어, 사랑하는 영적 아들인 디모데에게 그리워 하면서 편지를 쓰고 있는 것이다.(고전4:17, 빌2:2, 딤후4:8-9, 딤후1:2)
15절에서 “만일 내가 지체(遲滯)하면 너로 하나님의 집에서 어떻게 행하여야 할 것을 얻게 하려 함이니 이 집은 살아 계신 하나님의 교회요 진리의 기둥과 터이니라”라고 지적하고 있음으로써 바울이 자주 사용하고 있는 은유적 표현으로(엡2:19-21), 교회의 교회됨을 언급하므로써 디모데가 그 집(헬;오이코스)에서 어떻게 행하여야만 하는가를 강하게 표현하고 있다. 교회를 ‘하나님의 집’(헬;오이코 데우)으로 표현한 것으로 견고한 터와 단단한 구조를 가진 ‘진리의 기둥’(헬;스튈로스)과 ‘터’(헬;헤드라이오마)를 말하는 것이다. 기둥은 교회가 진리를 받쳐주고 있음을 말하면서 동시에 터는 교회의 진리의 기초가 되며, 진리를 든든하게 받쳐주고 있음을 말하고 있다. 물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것이다.(고전3:11)
여기서 우리는 교회에 대하여 좀더 그 심오함의 의미를 살펴보기로 하겠다. 바울의 교회관은 15절에서와 하나님의 집으로 교회는 하나님의 가족이 모인 곳이어야 함을 전제하고 있다. - 권속(眷屬)의 공동체 또한 교회는 하나님의 살아계신 하나님의 교회, 즉 부르심과 초청없이는 도저히 형성되는 없는 하나님의 오직 주권적인 섭리에 의해 형성된 공동체인 것이다. 횐언하면, 이것을 ‘교회’ 밖으로 불러내다의 ‘엨클레시아’ 인 것이다. - 구원받은 공동체 마지막으로 교회는 하나님의 소유인 것이며, 본문에서와 같이 ‘진리(알레데이아)의 기둥과, 진리의 터’로서의 교회인 것이다. 이 의미는 기둥이 건물을 떠받치고 있듯이 교회의 책임은 예수 그리스도를 높이 들어 복음의 진리를 널리 전파하는 의미를 가지는 것이다. 아울러 교회는 불의와 비진리가 난무하는 세상에서 소금과 빛으로서의 이 세상에서 영적 진리의 수호자 노릇을 해야함을 나타낸다. 이러한 참 진리를 계속 지탱해 나갈 뿐만 아니라, 진리의 빛을 온 세상에 전해야 한다는 정당성을 시사하고 있다. - 복음전파의 공동체, 진리수호 공동체
이러듯 성경이 지적하고 있는 바에 따라, 오늘날 우리 교회의 모습은 과연 정당한 근거를 가지고 있는 지 점검하고 살펴 볼 필요가 있는 것이다. 혹여 살았다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실상은 죽은 ‘사데교회’와 같지는 않은 지 매우 두렵고 떨림으로 성경에 비추어서 다시끔 교정해야 할 것이다. 사도 바울은 소위 옥중 서신이라고 하는 그의 마지막 편지 글에서 (디모데후서)를 작성하면서 주님의 몸된 교회를 받들고 섬기는 성도 각 사람에게 다시 언급하면서 모든 진리를 옳게 분별하고 거짓된 가르침을 배격함으로써 복음의 진리를 지키며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임하도록 힘써야 함을 강조 하고 있기 때문이다.(딤후2:15)
16절에서 15절의 그 이유가 되는 구절을 말씀하고 있는 데, “크도다 경건의 비밀이여, 그렇지 않다 하는 이가 없도다”는 본서의 3장 1절(4장9절)에서와 같이 “미쁘다 이 말이여”과 같은 방식으로 다시한번 감탄사적 수사적 표현을 사용하고 있다. 이것은 ‘계시된 비밀’ 인 것으로 바울은 여섯 운율을 가진 초기의 신조적 찬송시나 찬송의 단편을 인용하고 있다.이 구절은 성육신, 부활에 의한 정당성 입증, 그리고 십자가와 부활, 승천에서 천사들과 인간들에게 보이신 것처럼, 그리스도의 영광을 받으신 인간성의 현현(顯現)이 바로 그것인 것이다. 이것이말로 우리의 경건(유세베이아)의 비밀이며, 우리의 구원의 계시된 비밀인 것이다. 다시 요약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한 하나님의 구원 계획의 비밀이 때가 차매, 하나님의 사람들에게 계시되었던 것이며, 바로 이 하나님께서는 교회를 통하여 그리스도 안에 감추어진 비밀을 계시하신 것이다. 교회 공동체가 붙잡고 있어야 할 진리에 대한 이 진술은 이제 오늘날 우리 교회가 보존하고 선포하도록 위임된 정당한 ‘비밀’인 것이다. (할렐루야!)
4장 1절에서 ‘그러나’(헬;데) 라고 말하고 있으므로써, 앞서서 언급한 내용에 대하여 부정적 내용을 전개하고자 하는 바울의 안타까운 심정이 담겨져 있다. 그러나, 이에 대한 해결책을 또한 함께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이제부터 본격적인 사도 바울의 목회를 위한 지침을 함께 읽어보기 하겠다. “그러나 성령이 밝히 말씀하시기를 후일에 어떤 사람들이 믿음에서 떠나 미혹케 하는 영과 귀신의 가르침을 좇으리라 하셨으니”(1절) “자기 양심이 화인 맞아서 외식함으로 거짓말하는 자들이라”(2절), “혼인을 금하고 식물을 폐하라 할 터이나 식물은 하나님이 지으신 바니 믿는 자들과 진리를 아는 자들이 감사함으로 받을 것이니라”(3절), “하나님의 지으신 모든 것이 선하매 감사함으로 받으면 버릴 것이 없나니”(4절),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거룩하여짐이니라”(6절)이상과 같이 바울은 교회에 다가올 위험들에 대하여 3절까지 언급하고 있으며, 이어서 6절까지 거룩함에 이르게 하는 말씀과 기도를 다루고 있다. 먼저 1절에서 3절까지의 내용은 영지주의에 대한 경계를 표현하고 있는데, 당시 풍미하던 이단 사상들에 대한 바울의 경계가 나타나는 부분으로서 특히 영지주의에 대하여 각별히 주의를 환기시키는 바울의 관심을 표현하고 있다. ‘미혹케 하는 영’은 당시 거짓과 위선과 거짓된 기적을 행사하며 육은 악하고 영은 선하다고 하는 영지주의에 대하여 말하였고, ‘귀신의 가르침’은 거짓 예언자들과 거짓 교사들은 진리를 가장한 귀신의 가르침을 말하며, 그럴 듯하게 보이고 그럴 듯하게 역사하는 그들은 사도들의 가르침과 대립하며 복음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에 도전 하였던 것이었다. 이들은 ‘양심에 화인을 맞아 외식하는 자’ 들이라고 사도 바울은 말하고 있다. 이들은 이와 같이 양심에 화인 맞아서 외식함으로 거짓말 하는 자들로 ‘혼인을 금하고 식물을 폐하라 할 터’라고 설명하고 있는데, ‘식물은 하나님이 지으신 바니 믿는 자들과 진리를 아는 자들이 감사함으로 받을 것이니라(4:3), 하나님의 지으신 모든 것이 선하매 감사함으로 받으면 버릴 것이 없다(4:4)’ 라고 변증하고 있는 것이다.
이 말은 진리를 가진(아는) 자는 즉 진리 가운데 있는 자는 하나님이 창조하신 것들을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고 받아야 함을 알고 있는 것이고, 4절에서 원문에서는 “호티” 즉 “왜냐하면” 하나님의 지으신 모든 것이 선하다는 사실을 알고 감사함으로 버릴 것이 없음 알고 주신 것들을 오직 감사함으로 받아야 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감사’ 리는 단어는 ‘유카리스티아’ 라는 단어로 바울 서신에서 주로 사용하는 단어인데, 그리스도인의 삶에 있어서 가장 기본적이고 영원한 요소가 바로 이 ‘감사’ 즉 ‘유카리스티아’라는 사실을 보여준다(엡5:20, 골3:17, 살전5:18) 모든 것을 감사함으로 받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며 그분을 경외하는 마음을 나타내는 것이다.(롬12;1)
다시한번 5절에서 헬라어 원문에서는 “가르”라는 접속사를 사용함으로써 ‘왜냐하면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를 통해서 성결하게 되기 때문이다’ 라고 결론 내리고 있다.하나님이 지으신 모든 것을 감사함으로 받을 때 아무것도 버릴 것이 없음을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를 통해 성결하게 되기 때문이다 라고 말한다. 그 이유가 바로 접속사 ‘가르’(왜냐하면... 때문이다 - because) 에서 그 이유를 찾을 수 있다. 오늘날 성도들은 사실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 분의 이름과 하나님의 성령안에서 씻음과 거룩함과 의롭다 하심을 얻은 존재들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성도들의 의와 구원일뿐 아니라 그들의 거룩함이시며, 그분 안에서 그들이 참 하나님께 대하여 거룩하게 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이다.(디도서 3장 5절에서 지난번에 공부한 바 있음)
본 구절의 논외(論外)에서 한가지 중요한 사실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6절 말씀에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함으로 인하여 성도가 가져야 할 기독교적 성경적 세계관을 확인할 필요가 있다. 5절의 ‘하나님의 지으신 모든 것이 선하매’ 라는 구절에서 창세기의 창조사역과 피조물의 관계성을 되돌아 볼 수 있고, 모든 것이 선하다 것에서 모든 피조물 유형과 무형의 것들이 이러한 창조의 원리에 따라 구속, 즉 회복의 관점으로 변혁되어야 할 것이다. 여기서는 시간 관계상 각설(却說)하면서 다루지 않고 다음에 좀 더 구체적으로 정리하여 발표하기로 하겠다.
이제 4장 6절에서 10절까지는 건전한 교리와 올바른 삶에 있어서 경건에 이르는 연습을 말씀하고 있는 것으로 성경구절을 인용하면, ‘네가 이것으로 형제를 깨우치면 그리스도 예수의 선한 일군이 되어 믿음의 말씀과 네가 좇은 선한 교훈으로 양육을 받으리라’(6절), ‘망령되고 허탄한 신화를 버리고 오직 경건에 이르기를 연습하라‘(7절), ’육체의 연습은 약간의 유익이 있으나 경건은 범사에 유익하니 금생과 내생에 약속이 있느니라‘(8절), ’미쁘다 이 말이여, 모든 사람들이 받을 만하도다‘(9절), ’이를 위하여 우리가 수고하고 진력하는 것은 우리 소망을 살아 계신 하나님께 등이니 곧 모든 사람 특히 믿는 자들의 구주시라‘(10절).4장 6절 말씀은 주의 일꾼은 형제(아델포스)를 깨우침에 대한 의무가 있는 것으로 모든 성도는 주의 좋은 일꾼이어야 함을 말하고 있다. 이때 믿음의 말씀으로 양육되어야 하며, 진리를 실천할 수 있도록 양육해야 한다. 특별히 진리를 잘 가르쳐 교육해야 하는데, 선한 교훈으로 형제의 사랑으로 가르쳐야 한다.
7절과 8절을 함께 보면, 경건(유세베이아)의 유익을 말씀하고 있는데, 범사에 유익하고 현재는 물론하고 미래까지 신령한 축복까지 약속하는 것은 오직 경건밖에 없음을 바울은 강조하고 있다. 경건은 진리와 더불어 우리의 삶을 살아가는 절대적인 필수의 덕목으로 기독교 윤리 전반의 일괄적으로 포괄된 내용이다. 이것은 망령된 일을 버려라(7절a), 허탄한 신화를 버려라(7절b) 거짓된 교훈을 버리고 망령된 생활을 버리고 그 다음에 나오는 ‘오직 경건에 이르기를 연습하라’(7절c)는 명령어조를 사용함으로 사도 바울은 강하게 표현하여, 권면하고 있는 것이다. 경건이란 다시 언급하지만, 성도의 ‘거룩한 삶’ 그 자체를 말하는 것이다. 오늘날 ‘영성이 있는 삶’ 이라든가 또는 영성기도, 관상기도가 교회안에 많이 게토화(Ghetto)되어있다. 8절에서 육체의 연습은 약간의 유익이 있다고 하나, 경건은 범사에 유익하다고 말씀하고 있다. 금생과 내생에 약속이 있다 라고 더 적극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이말의 뜻이 무엇인가 하면, 바울은 조심스레, 현재적으로 제한된 유익을 가진 육체적인 연습과 무한하고 영원한 유익을 가진 영적인 연습 사이의 유비를 이끌어 내고 있는 것이다. 운동선수는 경기의 상을 위하여 자신의 몸을 훈련시킨다. 하지만, 그 효과들은 현재적 삶뿐만 아니라 내세의 삶에 대한 약속을 지닌 경건을 향한 영적인 훈련과 비교했을 때, 순간적이고 제한된 유익으로 보인다. 그래서 ‘아타나시우스’는 7절, 8절을 이렇게 인용했다고 한다. “이제 영혼이 악한 견해를 추종하지 않을 때 겸비해지며, 미덕을 먹고 살게 된다. 왜냐하면 미덕과 악덕은 영혼의 양식이며, 그것은 자신의 의지에 따라, 이 둘 중의 하나를 먹을 수도 있고, 둘 중의 하나에 마음을 기울일 수도 있다. 만일 영혼이 미덕을 향하여 마음을 둔다면, 그것은 미덕과 의와, 절제와, 온유, 인내에 의해 양육될 것이다”(Letter I, Easter 5. p. 508)
기왕에 10절까지 주해, 설명하면, 그래서 이 경주는 역사로부터 분리된 것이 아니다. 현재 역사속에서 펼쳐진 하나님의 구원하시는 목적과의 관계에서 조명된다. 현재적인 수고와 애씀은 의미심장한 목표를 향해 움직이기 때문이다. 도래하는 희망 위에 강렬하게 마음을 쏟으며, 모든 이에게 구원을 주시는 믿음으로 응답하는 모든자들을 진정으로 구원하시는 살아 계신 하나님 안에 기초를 두고 있는 것이다. 모든 사람에게 받을 만한 미쁘신(헬;피스토스) 주의 말씀은 첫째, 생명력이 있기 때문이고, 둘째는 소망이 있으며, 셋째는 말씀은 능치 못함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범사에 경건의 연습을 하라고 말씀하고 있고, 이것은 바로 금생과 내생에 약속이 보장되어 있다고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9절의 모든 사람 이라는 말씀 속에서 바울은 디모데 개인에게 향하는 권면의 차원이 아니라, 모든 세대, 모든 이들에게 향하는 선포라 할 것이다. 물론, 이 때의 ‘모든 사람’은 하나님의 택자로서 말이다.
11절에서는 비교적 짤막한 구절이다. 그런데, 이것은 앞의 모든 것을 ‘명하고 가르치라’는 명령법을 사용함으로 매우 엄숙한 말씀이다. 이것은 말씀을 맡은 목회자의 권위와도 상관이 있는 것으로 디모데의 나이가 그리 많지 않은 연소한 나이임에도 사도 바울은 강하게 지도하고 있는 것이다. 복음을 믿고 경건에 이르기 위해 수고하고 진력하는 것은 하나님의 명령임을, 초대 교회 당시 하나님의 사자로서 교회의 모든 사람에게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것을 하나님의 권위(헬;엨수시아) 명할 수 있었던 것이다. 또한, 바울은 말씀에 순종할 것을 명할 뿐만 아니라, 가르치라고 즉 설득시키고 이해시키라고까지 한다. 헬라어로 가르치라는 말은 ‘디다스케’라는 말로 목회자는 가르치는 일에 능통해야만 함을 강조하고 있다. 사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위대한 선생이었지 않은가? 예수님께서는 기독교의 과제가 가르침, 즉 교육에 있음을 말씀하셨다(마28;20)
이제 4장 12절부터 16절까지 살펴보기로 하겠다. 이 장은 목회의 지도력의 은사와 책임을 강조하는 것으로 디모데는 ‘읽는 것과 권하는 것과 가르치는 것에 착념’ 하는데, 그의 목회 역량들을 총동원 하도록 요청받았다. 물론, 교회 지도자 특히 목회 사역자들은 성경과의 부단한 대화를 유지해야만 하는 것으로 12절에서와 같이 ‘오직 말과 행실과 사랑과 믿음과 정절에 대하여 믿는 자에게 본이 되라’라고 말씀하고 있으므로, 목회자는 먼저 자신이 했던 충고를 따라야 한다는 것이다. 참고로 “리처드 백스터”(Richard Baxter)는 이 구절과 관련하여 “네가 네 혀로 말한 것을 네 삶으로 철회시켜 버리지 않도록” “자신을 삼가라” 라고 가르쳤다. 디모데에게 주어진 영적 은사가 초대교회 당시에 장로들이 그에게 안수할 때, “예언”과 함께 수반되었음을 알 수 있다.(14절, 딤전1:18, 행6:6) 또한, 디모데는 그가 나이(삼십에서 삼심오세로 추정)가 어린 목회자이었음에 불구하고 업신여김을 당하지 안했을 것으로 확신한다. 이것은 12절의 믿는 자들에게 본이 되었으며, 읽는 것과 권하는 것과 가르치는 것에 착념하였기 때문이다. 타인들의 구원이 관계된 곳에서 권위를 가지고 명령하고 조정하는 것으로 오직 믿는 자들의 본을 보임으로 가능했기 때문이다.
15절, 16절을 살펴보면서 마무리 하도록 하겠다. ‘이 모든 일에 전심전력하여’...구원하리라‘ 라고 말씀하고 있는데, 여기에서 ’모든 일‘은 6절에서 14절까지 바울이 디모데에게 말한 모든 권면의 내용을 가리키며, 목회자 디모데에게 전심 전력하여 수행해 나가야 할 일들임을 분명하게 제시하고 있다. ’전심전력‘ 이라는 말은 헬라어로 ‘멜레타’ 라는 말로 원래의 뜻은 ‘걱정하다, 관심을 가지다’ 라는 의미이다. 그런데, 이 뜻이 점점 ‘근실히 집행하다‘, 또는 ’연습하다‘ 라는 말로 쓰이게 되었다. 본절에서는 바울은 이 모든 일에 정신적, 영적 훈련을 통해 디모데의 마음과 생각에 가득 채워져서 그가 이 모든 일에 전적으로 헌신하기를 촉구하고 있는 것이다.사도 바울이 디모데에게 강력히 명령하고 있는 것은 배교의 위험을 막아내기 d위해서 힘써야 할 일, 즉 스스로의 진보를 위해 계속 정진하며, 말씀 전파 사역에 최선을 다할 것을 명령하고 있는 것이다. 바울이 디모데에게 바라는 것은 단순한 일꾼이 아닌 ’그리스도의 선한 일꾼‘ 이 되는 것이었음으로 전심 전력을 다하는 것이었다.
3. 발표를 마치면서
이상과 같이, 목회에 대한 책임이 얼마나 막중한 것인가를 우리는 본문에서 살펴보았다. 사도 바울은 이 편지를 쓰면서 목회적 본래 목적을 상기시키며, 그 소명을 다시 일깨우고, 그것을 성취하도록 책임을 부여하면서 강력한 명령화법으로 자신의 믿음의 아들 디모데에게 글을 쓰고 있는 것이다. 루터는 디모데의 목회에 대한 소명을 말하기를, “진정한 소명이 있는 곳에는 우리 주 하나님께서 당신의 말씀으로 실패하도록 하지 않으시기 때문에 그것은 교리와 같이 중요한 것”으로 여겼다고 말했다.
디모데의 소명은 자신이 구했거나, 노력해서 얻은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그것은 수여된 것이다. 장로의 회에서 안수 받음으로 그의 본래적인 헌신은 “많은 증인 앞에서”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필자(발표자)기 말하려고 하는 것은 바로 이것이다. 목회는 특별히 선택되어진 특권이다. 그래서 보다 어려운 것이지만, 한편으로는 이 보다 더 쉬울 수가 없다. 왜냐하면, 선택자가 하라고 하는 명령대로만 하면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교회의 머리되시는 주님만을 바라보면서....목회적 소명으로 인하여 우리 모두는 부르심을 받았고 또 앞으로 받을 것이다. 디모데를 살펴봄으로써 우리의 진보(進步)를 더 한 층 전진하길 바란다. 믿음의 아름다운 진로를 향하여, 모든 일에 전심전력으로 우리의 소망을 하나님께 바라보면서 진보합시다.
“이 모든 일에 전심 전력하여 너의 진보를 모든 사람에게 나타나게 하라”
(딤전4장15절)
" Take pains with these things; be absorbed in them, so that your progress will be evident to all."
(1 Timothy 4:15)
▶질문 : 현재 우리가 속해 있는 교회는 어느 정도 올바른 성경적 신앙에서 목회적 삶을 구현해 나가고 있는가?(사역자들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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