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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로교인 되기

by 【고동엽】 2022. 1. 11.
장로교인 되기


장로교는 칼빈과 쯔빙글리와 그들의 추종자들에 의해 생겨났는데 스코틀란드에서는 장로교로, 스위스 네덜란드 독일에서는 개혁교회로 각각 알려지게 되었다. 장로교는 장로체제, 즉 장로들에 의한 치리를 교회의 통치체제로 받아 들였다. 그들은 성경에서 교회가 일인 통치와 같은 감독지배체제의 제도는 없다는 것을 올바로 인식했다. 그러나 그들은 성경을 뛰어넘어 장로를 두 종류, 즉 목사장로와 평장로로 구분하여, 신학교를 졸업하고 학위와 안수를 받은 목사장로에게만 성직자의 자격을 수여하고 모든 성례전을 주관할 권위를 부여했다.


그리하여 오늘날 장로교에서 목사장로는 담임목사가 되어 정해진 헌법에 따라 당회장, 제직회장, 공동의회장이 되어 전권을 장악하여 모든 권한을 행사하도록 되어 있다. 반면에 평장로는 평신도 가운데 여러 절차와 과정을 거쳐 투표에 의해 선출한다. 이와 같은 제도는 마침내, 교회내에 성직자와 평신도의 구분을 낳게 했다. 그 결과 장로교는 가톨릭교회처럼 주교와 신부 그리고 평신도와 같은 계급화를 똑같이 답습함으로서 비성경적 교회를 만들고 말았다.


장로교회는 노회와 총회와 같은 중앙지배체제의 조직을 만들어 교리나 치리 문제를 처리한다. 따라서 조직산하에 있는 교회들은 그런 조직의 결정 따라야 하고 그렇지 않을 경우에는 분리될 수 밖에 없어 또 하나의 새로운 분파가 생겨나게 된다. 국내의 장로교 역시, 목사들끼리 신학적, 교리적 차이를 내세워 조직의 결정에 따르지 않고 노회와 총회를 탈퇴하여 새로운 교단을 만들어 분열을 거듭해 왔다. 그리하여 원래는 한개의 교단이었던 장로교안에서만 100개 이상의 교단이 생겨나면서 한국 장로교는 전세계에서 최단기간에 가장 분열이 많은 교회로 알려지면서 세계의 개신교계를 깜짝 놀라게 하였다.


여기서는 먼저 교회사가들에 의한 칼빈의 장로교회의 장단점을 살펴보게 된다. 우선, 장점으로는 장로교는 전세계 개신교파 가운데 어느 교파보다도 건전한 신학과 함께 체계적인 자체교리를 갖추었다는 점이다. 그리고 단점으로는 첫 번째로 개인적인 거듭남의 체험이 강조되지 않았고 특히 모태교인의 경우 더욱 그러했다. 두 번째로 불신자를 위한 복음집회가 없다. 세 번째로 율법의 계명에 치중된 설교는 교인들에게 성령충만한 생활보다는 계명을 지키려는 노력에 의한 신앙생활을 추구하게 만들었다는 점 등이다.


그러면 장로교에 나타난 단점 가운데, 첫 번째인 거듭남의 체험과 모태교인에 대해 살펴보자. 예수님은 요한복음3장에서 니고데모에게 사람이 거듭나야만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고 말씀했다. 여기서 거듭남이란 ‘육적인 출생’이 아니라 ‘영적인 출생’을 말한다. 사람이 구원받고 천국가는 방법은 예수님 말씀대로 ‘영적인 출생’의 경험이 반드시 있어야 한다. 니고데모는 바리새인이며 이스라엘의 선생으로서 유대교를 믿는 모태신앙을 갖고 있었지만 거듭난다는 것이 무슨 뜻인지 몰랐다.


니고데모처럼 장로교인들 중에서도 모태신앙인 육적인 혈통을 내세우며 ‘영적인 출생’ 즉 거듭나는 체험을 도외시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장로교에서 ‘모태신앙 또는 모태교인’이란 말은 장로교인이 어머니 뱃속에서부터 교회에 다녔으며, 태어난 뒤에도 계속 어머니와 함께 교회에 나가면서 자연스럽게 장로교인이 되었다는 의미이다. 이러한 ‘모태교인’의 의미는 소위 ‘예정론’과도 관련이 있다. 장로교의 예정론은 “하나님께서 창세 전에 구원받을 자를 미리 택해 놓았다”는 교리 중에 하나이다. 그래서 모태교인들은 이 교리대로 하나님이 자신을 구원받을 자로 미리 택하였다고 믿고, 또한 택함을 받았기 때문에 장로교회에 다닌다고 믿고 있다.


바로 이렇게 믿고 있는 ‘예정론’이 수많은 장로교인들을 지옥으로 몰아갔다. ‘모태교인’이란 비성경적인 용어이며, 오히려 ‘모태죄인’이 성경적인 용어라 할 수 있다. 시편 기자가 “내가 죄악 중에서 출생하였음이여 어머니가 죄 중에서 나를 잉태하였나이다(시51:5)” 라고 말한 것 같이 모든 사람은 죄 가운데에서 태어났다. 그리고 상술한 것처럼 예수님은 육적인 출생과는 별도로 영적인 출생이 필요하다고 말씀했다. 또한 요한복음 1장 13절에서도 구원은 부모에서 자녀로 이어지는 혈통을 통해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고 언급되어 있다.


물론 ‘예정론’도 성경적이며 틀린 말은 아니다. 하나님의 ‘예정하심’은 하나님의 주권에 속한 것이며 하나님의 일방적인 은혜이다. 그렇지만 인간의 편에서는 하나님의 예정하심도 있어야 하고, 또한 영적으로 거듭나기 위해서는, 개인자신의 의지적 결단에 의해 복음을 받아들이는 ‘믿음’도 요구된다. 사람이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고, 믿고 나서 거듭나게 되면, 나중에서야 비로소 이 두 가지, 곧 은혜와 믿음이 함께 역사했다는 사실을 이해하게 된다.


이러한 ‘은혜와 믿음’에 관해 가장 부합되는 성경말씀은 에베소서 2장에 가장 잘 나타나 있다.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엡2:8)” 여기에서 은혜는 하나님의 주권이자 소관이며, 믿음은 인간의 주권이며 소관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성경은 하나님의 예정하심과 인간의 자유의지에 따른 믿음을 모두 언급하고 있으므로, 한쪽만 옳다고 지나치게 주장하는 것은비성경적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두 번째로 장로교는 불신자를 위한 복음집회를 갖지 않는다. 그러나 성경에는 불신자를 위한 복음집회가 분명히 언급되어 있다(행13:42~49,살전1:8). 침례교나 감리교 그리고 초교파적인 세계적인 복음전도자들은 복음집회를 통해 불신자들에게 복음을 전해왔다. 예컨대 감리교의 창시자 존 웨슬리, 침례교 계통의 찰스 스펄전이나 빌리 그레이엄, 초교파적인 디엘 무디 등의 복음전도자들은 교회에서뿐만 아니라 야외에서나 큰 광장이나 체육관 등 장소를 가리지 않고 복음집회를 통해 전도를 했다.


그러나 장로교는 초창기부터 오늘날까지 교회안팎으로 ‘복음전도집회’라는 것이 없다. 장로교에서 ‘전도’라는 의미는, 일반적으로 목사들이 교인들에게 믿지 않는 사람들을 교회에 데리고 오라는 뜻으로 통하고 있다. 우리가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총동원전도주일’도 교인들로 하여금 사람들을 강권하여서라도 교회로 데리고 오라는 의미인 것이다.


장로교는 ‘복음전도집회’가 없는 대신, 각종 ‘심령대부흥회’라는 것이 있다. 예컨대 축복심령대부흥성회, 신년맞이 심령대부흥회, 춘계 추계 심령대부흥회, 추석 심령대부흥회 등이 그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부흥집회는 상기의 복음전도집회와는 그 성격이 근본적으로 다르다. 왜냐하면 복음전도집회는 복음전도자의 설교내용이, 불신자가 복음을 깨닫고 거듭나야 한다는 내용이지만, 심령대부흥회는 부흥목사의 설교내용이 신자와 불신자를 가리지 않고 누구든지 참석하여 은혜받고, 축복받고, 방언이나 병고침 등을 받으라는 내용인 것으로써 복음집회와는 그 차원이 완전히 다른 것이다.


과거, 18세기 전반부터 50여년 동안 계속된 ‘대각성 운동’이라 불리는 신앙부흥운동은 영국과 미국의 복음적 부흥과 함께 교회생활과 사회전반에 걸쳐 크나큰 영향을 끼쳤다. 그 당시에 조지 화이트필드는 죄와 심판과 지옥을 경고하면서 중생의 복음을 전했고, 존 웨슬리는 은혜에 의한 믿음을 강조하는 구원의 복음을 전했다. 그리고 조나단 에드워드는 오직 믿음으로만 의롭다 함을 얻는 복음의 진리를 전했다. 이들은 공통적으로 ‘중생에 관한 복음’을 전함으로써 영혼들이 구원을 받는 것을 가장 큰 목적으로 삼았다.


이처럼 대각성 운동의 핵심은 복음전도를 통한 ‘영혼구원’에 있었다. 그러나 국내의 여러 교파에서 오랫동안 행해져 왔던 ‘심령부흥회’는 예나 지금이나 신자나 불신자를 가리지 않고 누구나 은혜받고 축복받고 병고침받는 것 등이 그 목적이다. 이러한 국내 여러 교파의 심령부흥회집회는 18세기 근대교회사에 나타난 대각성운동과는 그 차원과 성격이 완전히 다를뿐만 아니라 성경에 나타나지도 않는 희한한 모습과 형태를 가진 비성경적인 한국식 집회이다. 이런 집회는 복음집회도 아니며 말씀집회도 아닌 한국식 특유의 종교집회인 것이다.


한국기독교총연합회(한기총)는 창립 20주년을 맞아 2009년 3월 전국 200여개의 기독교연합회 회장단과 함께 “영적대각성운동”을 전개하기로 결의했다. 이 운동의 목적은 한국교회가 과거보다 양적으로나 질적으로 쇠퇴되어, 위기에 처해 있어 새롭게 각성하여 부흥시키자는 운동이다. 그리하여 다섯가지 결의사항을 내세웠는데, 첫째는 한국사회에 만연한 불의와 부도덕은 우리의 책임이며 회개해야 할 것. 둘째는 교회연합과 일치운동을 통해 사회적 통합과 국민화합을 이루자 등등. 한마디로 그 내용들은 영혼구원이 목적이 아닌 사회복음의 내용이 주류였다.


한편, 무엇 때문에 장로교에는 복음집회라는게 존재하지 않고 그 대신 심령부흥회라는 것이 있는지 살펴보게 된다. 먼저, 국내 장로교는 초창기부터 교회에 복음집회라는 것이 없었고, 대신에 분기별로 한국식 심령부흥회가 있어왔고, 평상시에는 교회에 예배밖에 없었다. 여기서 예배란, 일반적으로 목사가 교인들에게 열심히 하나님을 믿고 섬기라는 교훈적인 설교를 듣는 것을 말한다. 둘째는 장로교 교리인 ‘예정론’에 따라 믿을 사람은 하나님이 교회에 나오도록 인도하신다고 생각하여, 별도의 복음전도집회의 필요성을 느끼지 않는다. 셋째는 대부분의 목사들이 중생의 체험이 없어 중생이 무엇인지 몰라 중생의 복음을 전할 수 없었던 것이다.


이러한 상황은 오늘날에도 변하지 않고 계속되고 있는 실정이다. 특히 장로교 목사들은 예배, 즉 설교시간에 전하는 말씀내용이 자기네 교인들을 대상으로 주로 교훈적인 말씀을 전한다. 이러한 경우 자기네 교인들은 목사의 설교 내용이 자신들을 위한 가르침인 것을 알지만, 새로 참석한 중생의 체험이 없는 사람들은 그것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설교 내용을 알게 모르게 자신들에게 적용하게 된다. 그래서 시간이 지나다 보면 중생도 하지 않은 채, 그 교회의 교인이 되어 기독교 신자인양 교회생활을 해 나가는 것이다.


세 번째로 장로교인들은 성령충만한 역동적인 신앙보다는 교리에 얽매인 율법적인 신앙생활을 해 나가는 경향이 강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목사들은 교인들에게 ‘주일성수’와 함께 교회력에 따른 절기준수 그리고 십계명 지키기와 ‘십일조 납부’ 등을 강조해 왔다. 주일성수와 관련해서는 주일은 구약의 안식일에 해당한다고 가르치면서 “주일을 성별하여 하루종일 언행을 삼가며, 주의 종인 목사를 위하여 기도하며, 공중예배를 마친 후에도 남은 시간을 성경공부와 찬송 그리고 구제나 전도 등을 하면서 예배를 통해 받은 사랑과 은혜가 생활에 이어지도록 해야 한다.”


그리고 교회가 제정한 교회력에 따른 절기, 예컨대 “대림절, 사순절, 고난주간, 부활절, 주님의 승천주일, 삼위일체주일” 등을 지켜 의미 깊은 예배가 되도록 힘쓴다. 또한 십계명을 준수하며 십일조를 반드시 납부하고 그 외 각종 헌금도 납부하도록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등등. 이렇게 하는 것이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것이며, 하늘나라의 상급과 함께 이땅에서도 수십배로 축복을 받는 길이다고 가르친다. 이와 같이 장로교 목사들은 교인들에게 구약의 율법을 교인들에게 적용시키면서, 한편으로 자신들은 구약의 제사장처럼 행세해 왔던 것이다. 이상의 것들이 장로교의 단점들로서 학자들에 의해 비성경적인 것으로 여겨져 왔던 것이다.


장로교 헌법에는 교인의 정의를 “교인은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일체이신 하나님을 믿는 자들인데 그리스도인이라 부른다”라고 씌어 있다. 거듭난 신자들의 입장에서 이러한 “장로교 교인의 정의”를 살펴 볼 때 여기에 나타난 심각한 오류를 보면서 놀라움을 금할 수가 없다. 여기에서 장로교는 삼위일체를 믿는 자들을 교인이라고 정의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가톨릭 신자들도 삼위일체를 확실히 믿고 있고, 기독교 이단 종파들 중에서도 일부는 삼위일체를 믿고 있다. 그렇다면 장로교인이나 가톨릭교인나 기독교 이단교인이나 무엇이다를 바가 있단 말인가.


장로교 헌법을 만든 사람들은 현직목사 외에도 장로교 목사자격증을 가진 교수나 신학박사들이 대부분이다. 이런 사람들이 ‘교인의 정의’를 단지 삼위일체를 믿는 자들이라고 정의를 내렸다니 정말 기가 막힐 일이고, 그들이 과연 신학교 교수나 박사가 맞는지 그 자격이 의심스러울 정도다. 명색이 장로교의 최고 신학자들이 이 모양이니 한국장로교도 갈 때까지 간 느낌이 들지 않을 수 없다. 이러한 사람들 역시 중생이 의심되는 지도자들이며, 교인들 또한 그런 자들에게 배우고 있느니 ‘중생’과는 거리가 멀 수 밖에 없을 것이다.


바로 이러한 점에서 대부분 한국장로교인들의 “중생체험의 실종”과 함께, 왜 장로교에 ‘복음집회’가 존재하지 않고 또한 교인들 가운데 ‘중생의 체험’에 관한 질문에 대해서는 대부분 입을 열지 않거나 엉뚱한 답변을 하는지 그 이유를 알 수 있는 것이다. 대체로 장로교인들은 교회에 빠지지 않고 잘 다니고 봉사도 하며 십일조도 잘 내고 직분도 잘 감당하면서 교회생활을 잘 하면 죽어서 천국에 가지 않겠느냐고 믿는 사람들이 많다. 그러나 성경은 사람이 거듭난 적이 있는지 없는지, 즉 “영적출생의 여부”에 따라 천국과 지옥이 결정된다고 예수님은 말씀하셨다.


교회의 헌법에 나타나 있는대로 삼위일체를 믿기만 하면 장로교인이 되기는 어렵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사람이 거듭나지 않으면 천국에 들어갈 수는 없다. 그러기 위해서는 장로교 헌법에 따라 비성경적인 교리를 전하는 영적으로 소경된 인도자인 목사의 말을 믿어서는 안될 것이다. 그리고 올바른 복음의 진리를 깨닫기 위해서는 성경에서 직접 해답을 찾거나, 아니면 구원의 진리를 제대로 전하는 성경적인 교회를 찾아야만 올바로 복음을 깨닫고 거듭나서 천국에 들어 갈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장로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은 장로교 헌법에 나타난 장로교인이 되기를 거부하고 거듭난 그리스도인이 되는 길을 찾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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