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의 긴급상황에 대비하라! (요 18:33-40)
교우 한 분이 직장을 그만 둔 안타까운 사연을 들었습니다. 그는 얼마 전에 직장에서 승진하여 회사의 회계 업무 책임자가 되었던 사람입니다. 처음에는 굉장히 기뻤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가 해야 하는 일 중에 하나가 회장님과 사장님을 위해서 상당 규모의 비자금을 만들어야 한다는 것을 알고는 고민하게 되었습니다. 몇 달은 관행대로 일을 처리했지만, 예배와 제자 훈련을 통하여 깨닫게 하시는 주님의 마음을 외면할 수 없었습니다. 그 후 담임 목사님과 상담을 했고 기도하고 회사의 회장님과 사장님도 교인임을 알기에 용기를 내어 회장과 사장을 직접 만나보고 자신의 거취를 결정할 결심을 했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회장님, 사장님, 이제부터는 정직한 방법으로 이 회사가 운영되도록 일하게 해 주십시오. 하나님이 복을 주시도록 회사가 운영되기를 원합니다. 더 열심히 일하겠습니다. 도와주십시오." 그러나 결과는 너무나 실망적이었습니다. 그 면담 이후 곱지 않은 눈초리를 견디기 어려웠습니다. 모든 일에 따돌림을 받게 되고 결국 회사를 그만 두고 나왔답니다.
이 교우가 잘한 것일까요? 아니면 지나친 것일까요?
이런 경우를 들을 때, 어떤 분은 금방 명확하게 답이 내려지시는 분도 있겠지만, 마음이 복잡하고 불편하신 분도 계실 것입니다. 그런 때는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인가? 적당하게 타협을 하는 것이 어쩔 수 없는 일이 아닐까? 아니면 단호하게 하나님 말씀대로 나가면 실직한 다음에 하나님이 책임져 주시는 것이 아닐까?
하나님께서 오늘 분명히 마음을 정리해 주시기를 축원합니다. 내 마음이 정리되지 못했기 때문에 혼란스러운 사람은 그와 같은 일이 닥칠 때 하나님이 복을 주실 수 없는 길로 가게 되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 이 예화와 정반대의 길을 갔던 사람이 나옵니다. 빌라도입니다.
빌라도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는 판결을 한 사람입니다. 실제로 빌라도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냐? 거기에는 여러 가지 다른 의견이 있습니다. 빌라도가 예수님을 십자가 고난의 길을 가게 한 사람이라는 오명을 가졌지만, 실제로는 빌라도는 재판 중에 예수님이 무죄하다는 것을 알았고 나름대로 예수님을 살려보려고 애를 썼던 사람입니다.
빌라도가 로마 황제 가이사에게 보낸빌라도의 보고서라는 문서가 있습니다. 그 보고서의 마지막 결론은 이렇습니다.
"십자가 옆에서 십자가 처형 현장을 지휘하였던 백부장 말커스가 말한 것처럼, 저는 진실로 나사렛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었다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빌라도는 예수를 만나고 보통 사람이 아니라는 느낌을 받았고, 예수를 어떻게 하든지 살려보려고 모든 수단을 다 썼습니다. 유대 명절이 되면, 로마 총독의 권한으로 죄수 한 사람을 살려줄 수 있는 전례가 있는데 예수를 살리는 일에 이용하려고도 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살려주는 것이 어떠냐고 바리새인과 제사장들에게 제안을 했습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차라리 바라바라는 흉악범을 살려달라고 소리침으로 무산되었습니다. 빌라도로서는 전혀 예상치 못했던 일입니다.
요한복음 19장 12절에서는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빌라도가 예수를 놓으려고 힘썼으나”
그러면 빌라도는 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것입니까? 이유는 하나입니다. 빌라도의 정치적인 야망 때문입니다.
빌라도는 유대 총독이었습니다. 그러나 그에게는 더 큰 정치적 야망이 있었습니다. 그는 앞으로 더 넓은 지역을 담당하는 사람이 되고 싶었습니다.
그가 예수를 놓아주려고 했을 때, 무리들이 "이 사람을 놓으면 가이사의 충신이 아니니이다 무릇 자기를 왕이라 하는 자는 가이사를 반역하는 것이니이다” (요 19:12) 소리쳤을 때, 이 말은 그 어떤 말보다 빌라도에게 충격을 주었습니다. 지금 자신은 어떻게 하든지 황제 가이사에게 충성스러운 신하라고 하는 인정을 받아야 할 형편인데, 자신이 가이사에게 반역하는 일에 동참을 했다고 하는 말은 감당할 수가 없는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정치적 야망을 포기하면서까지 예수님을 살려줄 마음은 없었습니다.
그래서 물을 가져다가 무리 앞에서 손을 씻으며 말합니다.
"이 사람의 피에 대하여 나는 무죄하니 너희가 당하라."
그러고는 바라바는 놓아주고 예수는 채찍질하고 십자가에 못 박히게 넘겨주었습니다.
오늘 처음에 말씀드렸던 어느 교우의 예화에서 아직 마음이 정리되지 않은 분들에게 묻습니다. 빌라도는 잘한 것일까요? 그는 자기의 정치적인 야망을 위해서 또 세상의 성공을 위해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받도록 내어 드렸습니다. 진리를 외면했습니다. 이것이 잘한 일일까요?
역사가 요세푸스에 의하면, 빌라도는 불과 몇년 후 로마 황제로부터 파면 당한 뒤 갈리굴라 황제 때 자살해 버리고 말았습니다. 진리를 못 박으면서까지 고수하려한 자리였지만 허망하게 날아가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더 고통스러운 것은 빌라도라는 이름은 저주받은 이름이 된 것입니다. 빌라도는 지옥에서 지금까지도 성도들이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당하사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당하사... 라는 신앙 고백 소리를 들으며 그만! 그만! 하며 울부짖고 있을 것입니다.
만약에 빌라도가 그들의 불의한 요구에 굴복하지 않고 당당하게 예수님을 풀어드렸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아마 유대인들은 다른 방법으로 예수님을 죽였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하나님께서 정하신 뜻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빌라도는 반역자를 살려주었다는 모함 때문에 파면을 당했을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빌라도는 역사에 남은 영원한 의인으로 기록되었을 것입니다. 지금 빌라도의 형편을 생각하면 하늘과 땅 차이입니다.
본문에서 빌라도는 자신은 몰랐지만 그 인생의 가장 긴급했던 상황에 처해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재판을 받으려고 빌라도 앞에 서셨습니다. 그러나 엄밀히 보면 빌라도가 예수님 앞에서 재판을 받는 순간이었습니다. 빌라도 생애에 가장 중요한 순간을 꼽으라면 바로 이 날 이 순간이었습니다. 빌라도의 운명이 바뀌는 순간이었습니다. 그는 영원히 사느냐 영원히 죽느냐 하는 운명이 바뀌는 순간이었는데 자기가 그 때에 있다는 사실을 몰랐습니다. 그는 생명의 주님이면서 동시에 심판주이신 예수님을 만난 순간이었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빌라도는 세상 욕심 때문에 진리에 대하여 눈이 멀어있었습니다. 진리이신 예수님을 보고도 전혀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고후 4:4) 그 중에 이 세상의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하게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치지 못하게 함이니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니라
빌라도는 진리 그 자체이신 예수님에게 진리가 무엇이냐? 고 질문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내가 진리를 증거하러 왔다”고 말씀하실 때 불쑥 던진 질문입니다. 그 순간이 빌라도에게는 정말 너무 너무 중요한 순간이었습니다. 영적으로 대단히 긴박한 상황이 벌어지는 때였습니다.
그러나 빌라도는 진리에 대하여 물었지만 진리에 대해 듣고 싶은 마음은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 질문을 던지고는 유대인들을 만나러 나가 버렸습니다.
그의 마음 안에 진리에 대한 갈망이 없었다는 증거입니다. 그 까닭에 진리와 영생이신 예수님과의 만남이 그에게 무서운 저주의 순간이 되었던 것입니다. 진리를 그저 호기심 정도로만 여겼습니다.
성도 여러분, 이것은 그대로 우리의 문제입니다. 우리 안에 진짜 진리에 대한 열망, 영생에 대한 갈망이 있습니까? 만약에 우리가 진리에 대하여 분명히 알지 못하고, 영생을 준비하지 못한 상태에서 이 세상에서 잘 되는 것이 오히려 화가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단순히 자녀들이 좋은 대학에 들어가고 세상에서 성공하고 출세하기를 원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사람들로부터 성공하였다고, 출세했다고 축하를 받을 수는 있습니다. 진리를 깨닫지 못하고 영생을 얻지 못한 채, 존귀한 자리에 앉는 것은 정말 두려운 일입니다.
(시 49:20) 존귀하나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멸망하는 짐승 같도다
존귀한 자리에 있었지만 그가 진리를 깨닫지 못했다면 멸망하는 짐승과 같다는 것입니다. 빌라도가 차라리 총독이 아니었다면, 빌라도가 차라리 사형 언도를 내릴 수 있는 재판권을 가진 사람이 아니었다면, 아마 빌라도는 이런 저주를 받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여러분은 영적으로 준비된 사람입니까?
여러분, 빌라도만 아니라 우리도 죽느냐 사느냐? 하는 긴급한 상황에 처할 때가 있습니다. 진리를 갈망하는 마음으로 영적으로 깨어있지 하지 못하면 그러한 순간이 영원히 무너지는 순간이 됩니다. 그러므로 항상 진리이신 예수님을 갈망하는 마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요한복음에서 말하는 진리는, 우리 모두가 영원히 멸망할 죄인이라는 것과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셔서 독생자 예수님을 우리에게 구주로 보내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예수님을 통하여 구원을 받으며 하나님께 나아가게 된다는 것입니다.
요 14:6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이 진리에 굳게 서고, 진리이신 예수님을 갈망하는 사람은 복있는 사람입니다. 그는 어떤 긴박한 상황에서도 주님의 인도를 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한국이 낳은 대표적인 기독교인 중에 '손양원' 목사님이 계십니다. 그에게 유명한 일화가 많이 있지만, 가장 대표적인 일은 1948년 10월 27일 '여수 순천 반란 사건' 때 동인과 동신, 두 아들을 공산주의자 청년에게 동시에 잃었을 때, 그 슬픔을 딛고 십자가의 용서로 자기 두 아들을 죽인 그 청년을 양자로 삼은 일입니다. 그리고 두 아들의 장례식 때, 목사님은 그 자리에서 일어나 열 가지 감사의 인사를 드렸다고 합니다.
이 일은 남북 통일을 위하여 기독교 복음이 어떤 역할을 할 것인가를 보여주는 예표가 되는 사건입니다.
지난 주간 남북 청소년들을 위한 영어 캠프가 대전에서 있었습니다. 마지막 시간에 두 학생의 간증이 있었는데. 한 학생은 남한 학생이었고 또 한 학생은 탈북 청소년이었습니다. 십자가 복음 안에서 통일이 이루어짐을 보여주었습니다.
손양원 목사님은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었습니까? 그가 평소에 늘 진리이신 주님을 사모하며 사셨기 때문입니다.
손양원 목사님이 지은 복음성가 중에 '주님 고대가'라는 복음 성가가 있습니다.
1. 낮에나 밤에나 눈물 머금고 내 주님 오시기만 고대합니다. 가실 때 다시 오마 하신 예수님 오 주여 언제나 오시렵니까.
2. 고적하고 쓸쓸한 빈 들판에서 희미한 등불만 밝히어 놓고 오실 줄만 고대하고 기다리오니 오 주여 언제나 오시렵니까.
3. 먼 하늘 이상한 구름만 떠도 행여나 내 주님 오시는가 해, 머리들고 멀리멀리 바라보는 맘 오 주여 언제나 오시렵니까.
4. 내 주님 자비한 손을 붙잡고 면류관 벗어들고 찬송 부르면 주님계신 그 곳에 가고 싶어요 오 주여 언제나 오시렵니까.
5. 신부되는 교회가 흰옷을 입고 기름 준비 다해 놓고 기다리오니 도적같이 오시마고 하신 예수님 오 주여 언제나 오시렵니까.
6. 천 년을 하루같이 기다린 주님 내 영혼 당하는 고난 볼 수 없어서 이 시간도 기다리고 계신 내 주님, 오 주여 이 시간에 오시옵소서.
손양원 목사님은 항상 진리이신 주님을 갈망하셨기 때문에 그의 인생의 가장 긴박한 상황에서 십자가의 주님을 따름으로 한국 교회를 살렸고, 이 민족을 살렸습니다.
그러나 영적인 긴급 상황은 죽느냐 사느냐 하는 위기의 순간만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만나게 되는 순간은 어느 누구에게나 그 인생의 최대 사건입니다. 가장 긴박한 순간입니다.
어린 나이에 부모님을 따라 교회에 나간 날이 예수님을 만난 날이 될 수도 있습니다. 스미스위글스워스 목사님입니다. 청소년 때 참석했던 집회 때일 수도 있습니다. 스탠리죤스 선교사입니다. 평범한 기도회일 수도 있습니다. 목사님이 말씀하신 것도 아니고 평신도 사역자가 로마서 서문을 읽어내려가는 기도회에 참석했던 웨슬리목사님이 거기서 예수님을 만납니다. 길을 가다가 예수님의 영이 임할 수 있습니다. 무디 목사님입니다. 어느 목사님이 보낸 편지 한 통으로 예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존하이드 선교사입니다. 병으로 쓰러졌을 때 읽었던 성경 구절 하나가 기억하면서 예수님을 만나기도 했습니다. 허드슨테일러 선교사입니다.
여러분은 준비되어 있습니까?
언제 어떻게 주님이 우리를 찾아오실 지 모릅니다.
톨스토이의 소설 중에 구두장이 할아버지의 꿈 이야기가 있습니다.
이 할아버지는 늘 예수님을 만나고 싶어했습니다. 어느 날 꿈에서 예수님께서 나타나셔서 말씀하셨습니다. 내일 네 집에 가겠다. 이 할아버지는 너무 기뻐서 음식을 준비하고 기다렸습니다.
그러나 낮이 되도록 주님은 오시지 않았습니다. 낮에 거지 한 사람, 그 뒤에 청소하는 할아버지, 저녁 무렵에 사과 장수 아주머니가 다녀갔을 뿐입니다. 그들은 모두 너무 추워하고 배 고파해서 준비한 음식을 그들에게 다 드리고 말았습니다. 하루가 다 지나고 쓸쓸히 잠자리에 든 할아버지의 꿈에 다시 예수님이 나타나셔서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오늘 네게서 세 번이나 잘 대접을 받았다.
아직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지 못한 사람도 진리가 무엇인지 갈망을 갖고 살아야 합니다.
만약 빌라도에게 영원에 대한 갈망, 진리에 대한 갈망이 있었다면 예수님께서 어떻게 그를 구원하지 않으실 수 있었겠습니까? 어떻게 그를 지나가실 수 있었겠습니까? 안타깝게도 빌리도에겐 예수님을 만나는 순간에 그 마음에 세상 욕망 밖엔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는 생명의 주님을 만난 순간이 심판의 순간이 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여러분을 찾아오십니다. 어느 순간에 여러분 앞에 오십니다. 당신은 예수님의 신부입니까? 아니면 아직도 예수님이 돈, 성공, 명예와 저울질하게 되는 대상입니까? 주님에 대한 갈망을 가진 사람은 예수님을 만납니다.
예수님은 나의 생명, 나의 주님, 나의 신랑이라고 고백함으로 나아가십시오.
우리가 정말 주님을 갈망하는 마음이 있을 때 주님이 우리에게 오십니다. 너무나 평범하게 지나갈 것 같은 모든 순간들이 주님이 우리를 만나주시는 순간임을 깨닫게 됩니다.
오늘 이 시간은 더욱 그렇습니다. 이제 우리가 성찬식을 합니다.
성찬식은 주님이 아주 드러내놓고 예수님을 만나는 복을 주시는 시간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살을 먹고 예수님의 피를 마시면서 주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이 예수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주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고 내 안에 계신 것을 나로 알게 하신 시간입니다.
성도 여러분, 주님, 어디 계십니까? 왜 나를 이렇게 홀로 내버려 두십니까? 왜 내게 응답하지 않으십니까? 왜 내게 말씀하시지 않으십니까? 그런 심정인 분이 있으십니까? 오늘 이 시간 주님이 여러분을 찾아오시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이 그 갈망과 소원을 내려놓지만 않는다면 여러분의 평범해 보이는 삶 속에, 여러분의 인생 가장 중요한 순간에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고 친밀히 주님을 아는 복을 여러분이 받아 누리게 되실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마음에 세상 염려와 근심, 또는 세상 성공을 향한 욕심을 두고 있다면 주님이 여러분을 찾아오시는 순간을 놓져버리게 됩니다. 오히려 그런 일에서 여러분은 말할 수 없는 영적인 침체를 경험하고 심지어 빌라도와 같이 버림받은 자가 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이제 성찬을 받기 위해서 기도하겠습니다. 만약에 이 시간에 준비되지 않은 사람이 있습니까? 오늘 하나님께 예배 드리러 왔지만 아직까지 마음에 주님을 만나는 준비가 되지 않으신 분이 있습니까? 이 시간에 준비하십시오.
예수님, 제가 주님을 갈망합니다. 제가 주님의 십자가를 붙잡습니다. 인격적으로 예수님을 만나기를 원합니다. 나의 생명이시고 주님이신 예수님, 제게 역사해 주시옵소서. 제 눈을 뜨게 해주시옵소서. 나와 함께 계시는 주님을 바라보게 해주시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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