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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원동력 /사 26:3-4

by 【고동엽】 2022. 1. 7.

삶의 원동력

 

 

사 26:3-4

 

 

 

주께서 심지가 견고한 자를 평강하고 평강하도록

 

지키시리니 이는 그가 주를 신뢰함이니라. 너희는

 

영원히 신뢰하라 주 여호와는 영원한 반석이심이

 

로다.

 

 

 

여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애장품은 향수일 것입니다. 이 향수는 값이 비싸지만 종류도 참 다양합니다. 향수 중 가장 좋은 향수는 발칸산맥의 고산지대에서 핀 장미꽃에서 추출한다고 합니다. 그것도 한밤중 12시에서 새벽 두시 사이에 핀 꽃에서 말입니다. 그때 핀 꽃에서 가장 향기로운 향기가 발산된다고 합니다. 그런데 태양이 뜨면 향이 40%나 감소한다고 합니다. 그리고 가장 좋은 향은 고래 기름에서 얻어지는데 그것도 병든 고래에서 얻어진다고 합니다. 병든 고래가 그 병든 몸을 추스르며 헤엄치는 동안 얼마나 고통을 수반하고 아픔을 동반하며 먹이를 찾아다니겠습니까. 최고의 향은 바로 그런 고뇌를 통해서 주어지는데 그렇게 얻어진 향을 앰버그리스(ambergris)라고 부릅니다.

 

여러분도 아시다 시피 병든 소에서 우황이 추출됩니다. 그리고 가장 좋은 바이올린의 재료는 식물이 생식할 수 없는 수목한계선 지점에서 자란 나무에서 얻어진다고 합니다. 거기서 숫한 풍상과 비바람과 눈보라를 맞아서 단련된 나무들이 바이올린을 만들기에 적합한 재료로 사용된다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거기서 향이 나오고 값도 비싼 내용물이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한결같이 외롭고 고뇌스럽고 아픔을 통하는 과정을 거쳤기 때문입니다.

 

저는 이것이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어진 값이고 의미이고 뜻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복을 받고 평안하고 형통하고 마냥 행복에 겨워 살게 하는 것이 아니고 주어진 역할을 수행하느라고 인내하고 때로는 고뇌하고 수고하는 삶 그것이 신앙인의 진정한 삶입니다. 거기서 신앙인의 향기가 나타나고 멋이 나타나고 내용 있는 삶이 나타나서 세상에 감동을 주고 하나님께 영광을 드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신앙인의 삶입니다.

 

본문을 보면 우리 마음에 확 와 닿는 말씀이 나옵니다. “주께서 심지가 견고한 자를 좋아하신다(사26:3).”고 했습니다. 여기 “심지가 견고하다”는 말은 “예체르 사무크” 즉 “마음이 견고하다”는 뜻입니다. 이를테면 환경이나 조건이나 입지에 따라 변하고 흔들리지 않는 중심 있는 삶을 말합니다. 이 말은 “하나님의 영광에 들어가고 참여할 자 누군인가”하면 “심지가 굳은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여기 심지가 굳은 사람은 “목적이 분명하고 마음이 오직 하나님께만 향하여 있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을 하나님이 좋아하십니다. 그리고 이런 사람은 이 세상에서도 좋아합니다. 왜냐하면 거기에 향이 있고 멋이 있고 뜻이 있고 중심이 있고 고상함이 들어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이 그렇게 살자 하고 다짐도 해 봅니다. 그런데 자꾸만 그 목적과 뜻이 흔들릴 때가 있습니다. 그만큼 심지가 견고하지 못해서 그렇습니다. 사람이 심지가 흔들리면 부질없는 것에 붙들리고 몰두하고 이렇게 이끌려 살아가게 됩니다. 예를 들면 이런 것들입니다.

 

 

 

“죄의식”

 

 

 

사람은 과거의 흠이나 죄를 잊지 못합니다. 그래서 과거의 흠을 늘 생각에, 마음에 묻어두고 삽니다. 그러니까 떳떳함을 잃고 사는 것입니다. 그리고 어딘지 얼굴이 어둡고 마음이 무겁습니다. 그러면 결국 그런 기억들 때문에 삶을 손해 보고 사는 것입니다. 여러분, 신앙이 무엇입니까. 신앙은 그런 과거로부터 벗어나게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살인자 모세를 지도자로 탈바꿈 하여 사용하셨습니다. 겁쟁이 기드온을 용감한 용사로 만들어 사용하셨습니다. 그리고 가끔 보면 흉악한 깡패들도 불러서 새사람을 만들어 사용하시기도 합니다. 오늘 보면 옛날 깡패였던 사람들 가운데서 목회자가 된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1939년 평양신학교 강당에서 마펫(1864-1939)선교사 선교 40주년 기념식이 열렸습니다. 기념식을 다 하고 답사차례가 되었습니다. 마펫 선교사가 강단에 올라가 감회어린 표정으로 답사를 했습니다. “나는 턱에 깊은 상처가 있습니다, 어느 날 저녁 예배 인도하러 교회에 가는데 돌멩이가 날아와 제 턱을 쳐서 상처를 낸 것입니다. 평양의 깡패들의 소행이었는데 바로 그 깡패 중에는 지금 여기에 앉아있는 이기풍 목사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이기풍이가 그 후 회개하고 목사가 되었으니 나는 이 턱에 흉터가 났어도 기쁩니다.” 그때 온 장내에 박수가 터져 나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분입니다. 하나님은 과거를 따지지 않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은 그 과거를 사용해서 오늘 화려하게 활용하시는 분입니다. 그 점이 사람들과 다른 점입니다.

 

 

 

“원한, 분노의 마음”

 

 

 

또 신앙은 우리로 하여금 무한하게 자유하게 하는 은혜를 줍니다. 그래서 과거를 잊고 용서하게 해서 영적으로 정신적으로 마음으로 완전한 자유를 누리게 합니다. 그런데 이 복음의 목적에서 흐려지거나 흔들리게 되면 잊었던 원한도 미움도 되살아나게 됩니다. 그래서 과거에 입은 상처로부터 헤어나지를 못하고 용서를 통해서 얼마든지 헤어날 수 있는데도 마음에 두고 계속 고통의 나날을 보냅니다. 그것이 우리민족의 특성이기도 합니다. 우리민족은 한번 원수를 맺으면 풀지를 못합니다. 그래서 역사를 보면 악순환을 거듭하며 살아갑니다.

 

과거에 독일의 히틀러가 얼마나 잔학한 일을 저질렀습니까. 그때 수난 받은 이스라엘민족이 소름끼치는 수난을 당했습니다. 유대인들을 아우슈비츠 감옥에 가두어 놓고 600만 명을 잔학하게 죽였습니다. 그러니 유대인들 입장에서 보면 독일인들에게 얼마나 증오심이, 미움이, 원한이 있겠습니까. 그런데 오늘 독일은 진심으로 그 때의 역사를 사과했고 보상했고 직접 찾아가 눈물로 사죄했습니다. 1970년 독일의 브란트 수상이 유대인 추모비를 찾아가 그 앞에서 무릎을 꿇고 눈물 흘려 사과하고 사죄했습니다. 또 지난 2.2일 이스라엘과 수교 40주년을 기념해서 흐르스트 쾰러 독일 대통령이 이스라엘을 방문해서 의회에서 연설하면서 또 눈물을 흘리며 “과거 독일이 저지른 범죄를 부끄러운 마음으로 겸허하게 머리를 조아려 사과한다”고 과거사를 사죄했을 때 그때 이스라엘 의원들은 모두 기립해서 박수로 받아주었습니다. 그러니까 오늘 유대인들과 독일은 아무 문제없이 지내고 있습니다. 진심으로 사과했고 보상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오늘 한국과 일본의 관계는 참 불행한 관계입니다. 일본이 참 문제가 많은 나라입니다. 과거에 그렇게 못된 짓을 해 놓고도 솔직하게 사과한번 한 적이 없습니다. 보상은 전무한 상태이고 그 행동이 아주 야비합니다. 한일수교가 금년으로 60주년이 되는데 지금도 일본총리는 태평양 전쟁 시 1급 전범 4명을 군신으로 추앙하고 있는 야스쿠니 신사를 매년 찾아가 참배하고 있으니 이것이 얼마나 소인배들의 짓입니까. 동양 사람들이 서구사람들에 비해 이렇게 비합리적입니다. 과거를 시원하게 털고 사과하고 보상하면 끝날 것인데 끝까지 감추려하고 부정하려하고 회피하려 합니다. 그래서 일본이 오늘 국제적으로 강대국이면서도 대접을 못 받는 것입니다. 오늘 세계가 일본을 누가 인정해 줍니까.

 

이것은 우리민족도 마찬가지 입니다. 일본이 그렇게 비겁하게 책임을 회피하면 우리민족이라도 과거를 털고 일어나야 합니다. 그리고 과거로부터 우리도 벗어나고 미래를 향해서 나아가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민족도 과거의 상처를 곱씹고 마음에 묻어두는 기질이 있습니다. 그런 마음을 가지고 있는 한 우리민족이 이 세상을 훨훨 날지 못하고 어딘지 어두운 마음을 지닌 채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마음을 품고 살면 가장 손해 보는 것은 자신입니다. 상처를 입힌 사람은 자기가 한 일을 잊고 살아갑니다. 그래서 가해자는 마음이 편한 것입니다. 그런데 상처를 가진 사람은 그곳으로부터 탈출하지 못하고 과거를 붙잡고 괴로움 속에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인정받기 위한 삶”

 

 

 

사람은 남을 위해서 살아갈 때가 참 많습니다. 아이들은 부모에게 인정받으려고 안간힘을 씁니다. 그런데 부모의 기대는 한이 없습니다. 부모는 내 적성, 생각, 희망과는 상관없이 나에게 기대를 충족시켜 달라고 조릅니다. 자식이 아무리 잘해도 부모의 기대를 충족시키기는 참 어렵습니다. 그러다 보니까 아이들이 지치고 때로 이루지 못하면 자살하는 것도 그 때문입니다. 또 직장에서 인정받으려고 상사로부터 인정받으려고 뛰어다닙니다. 밤늦게까지 일하며 몸 망가지는 줄 모르고 일하다가 어느 날 병들고 그래서 회사로부터 퇴출당합니다.

 

그러니 얼마나 무의미한 삶입니까. 그러고 나서 비로소 인생에 대해서 눈을 뜨고 생각해 보니 남는 것은 후회뿐입니다. 나의 인생은 모두 지나가버렸습니다. 내 인생은 이제 껍데기만 남았습니다. 그래서 목적이 분명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목적을 분명히 하고 살아가면 몇 가지 주어지는 은혜가 있습니다.

 

 

 

“삶의 의미가 분명해짐”

 

 

 

사람은 밥 먹고 일하고 잠을 자면 살아지는 존재가 아닙니다. 사람은 의미와 보람과 뜻과 소망이 충족되어야 살아지는 존재입니다. 사람은 내가 할 일이 무엇이며 내게 주어진 사명이 무엇인가를 알고 실행해야만 살아지는 존재입니다. 거기서 삶의 목적과 의미와 보람과 뜻과 소망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목적을 잃은 사람은 소망도 없어집니다, 세상에 좋은 것이 없어집니다.

 

여러분, 실연한 사람을 보십시오. 세상에 좋은 것이 없습니다. 다 싫습니다. 죽고 싶습니다. 소망을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때로 자살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한창 연애에 불이 붙은 사람을 보십시오. 이 세상이 다 자기 것처럼 보입니다. 삶이 재미가 있고 기쁨이 있고 즐거움이 있습니다. 죽기는 왜 죽습니까. 왜 그렇습니까. 목적을 발견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목적은 소망인 것 입니다.

 

 

 

“삶의 단순함”

 

 

 

삶의 목적이 분명하면 내가 할일과 말아야 할 일을 명확하게 구분하고 살아가게 됩니다. 그래서 삶이 명쾌해지고 분명해지고 간단해집니다. 그 삶이 복잡할 이유가 없어집니다. 갈등도 주저함도 줄어듭니다. 무속을 섬기는 분들은 마음이 복잡합니다. 여러 신을 섬기다 보니 얼마나 복잡하겠습니까. 그래서 성경을 보면 아덴 사람들은 “알지 못하는 신에게(행17:23)“라는 제단도 만들어놓고 섬겼다고 했습니다. 여러 개 신들을 섬기다가 제물을 드릴 때 혹시 그중 한 개가 빠지면 동티날까봐 그러면 해코지 할까봐 혹시 모르니까 알지 못하는 신에게 라는 제단을 만들어 놓고 제물을 드렸다고 했습니다.

 

그러니 마음이 얼마나 복잡하겠습니까. 그래서 옛날 무속을 믿던 사람들은 보름 때 명절 때가 되면 밥을 지어 윗목 아랫목 윗방 아랫방 심지어 화장실 까지 다 갖다 놓았습니다. 그러다 혹시 빠진 곳이 있을까 봐 마루에다 놓기도 했습니다. 그러던 사람들이 예수를 믿게 되면 얼마나 신앙생활 잘하는지 모릅니다. 왜냐하면 이제는 하나님 한분만 믿으면 되니까 마음이 편안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잘 믿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신앙을 가지면 무엇보다도 생활이 단순해집니다. 우리의 삶의 목표가 분명해지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삶의 목표가 “오직 하나님”이기 때문에 삶이 단순해지고 명료하게 되고 분명해지게 됩니다. 이것이 신앙생활이 주는 은혜입니다.

 

 

 

“삶의 초점이 모아짐”

 

 

 

목적이 분명한 사람은 힘이나 에너지, 시간을 허비하지 않습니다. 아주 효율적으로 사용하고 투자하며 살아갑니다. 그것은 삶의 초점이 맞추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삶의 초점이 흐려지면 부질없는 잡념에 사로잡히기 쉽습니다. 그러면 많은 고민들과 걱정들에 둘러싸여 살아가게 됩니다. 사람들이 하는 걱정들 중에 80%는 일어날 수 없는 쓸데없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12%는 나와 상관도 없는 일이라고 합니다. 그중 8%만이 진정 걱정할 일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그 8% 마저도 걱정하고 고심한다고 될 일이 아니고 궁극적으로 하나님이 해결해 주셔야 가능한 일들이라고 합니다. 삶의 초점이 퍼져있기 때문에 부질없는 걱정과 근심들로 쌓인 채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다 경험해 보셨듯이 볼록렌즈로 햇빛을 받으면 열이 한곳으로 모아집니다. 그러면 불을 일으킬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열을 평면 유리로 모으면 절대로 불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빛이 퍼져있고 분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목적이 분명하면 이렇게 모든 마음과 생각과 뜻과 계획들이 한곳으로 모아집니다. 그러니까 그 삶이 아주 단순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게 모아진 삶은 아주 강해지고 힘이 나올 수밖에 없습니다.

 

예를 들면 사도바울이 예수를 알고 난후 삶의 초점이 예수에게로 집중됩니다. 그의 관심과 생각 속에는 오직 예수뿐입니다. 그래서 그는 고백합니다. “나는 이제부터 예수만 알기로 작정했다(고전2:2)”, “그동안 소중하게 여기던 모든 것을 미련 없이 버리노라(빌3:8)”, “누구든지 나를 괴롭게 하지 말라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가지노라(갈6:17)”, “나는 죽어도 좋다, 살아도 좋다, 그러나 더 사는 것이 좋다, 왜냐하면 복음을 전할 수 있으니까(롬14:8)” 이 얼마나 강력한 사람입니까. 삶의 초점이 하나로 모아지면 이렇게 강력한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삶의 동기 유발”

 

 

 

이렇게 목적이 분명해지게 되면 열정적인 삶이 뒤따르게 됩니다. 그러나 목적이 불분명하면 열정도 소멸되어 버립니다. 오늘 할 일이 분명하면 아침에 춥고 잠을 더 자고 싶어도 일찍 일어나게 됩니다. 그리고 아무리 추워도 집을 나서게 됩니다. 목적이 세워졌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목적이 불분명한 사람은 날씨가 추워지면 잠자리가 자꾸만 붙잡습니다. 붙잡으면 못 일어납니다. 일어나려고 애를 써도 박차고 일어날 수 있는 의지에 힘이 빠져버립니다. 그래서 의미 없는 별 것도 아닌 것들이 우리를 붙잡고 지치게 해서 그냥 누워버리게 됩니다.

 

우리는 이렇게 살아가다가 어느 날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게 될 날을 맞을 것입니다. 그때 주님은 우리들이 살아온 생에 대해서 조사하실 것입니다. 성경은 “우리 각자는 하나님 앞에 서게 될 날을 기억하라”고 (롬 14:10,12)말씀합니다. 그때 하나님은 이렇게 물으실 것입니다. 하나는 너는 이 세상에서 무엇을 하였느냐“하는 물음입니다. 그때 하나님은 어느 교회, 어느 교파, 어떤 직분을 가졌었느냐는 질문은 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분명한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사랑을 입고 은혜를 입은 우리들이 이 세상을 어떻게 살았느냐고 물으실 것입니다.

 

또 하나는 내가 너에게 준 선물을 어떻게 사용했느냐고 물으실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것이 얼마나 많습니까. 은사, 재능, 시간, 기회, 재물, 능력 등 모두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것들입니다. 그것을 어디에다 어떻게 사용했느냐 하고 물으실 것이 분명합니다. 그 물음에 답할 수 있도록 살아가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인생입니다. 그 물음에 답할 수 있기 위해서 목적을 가지라는 것입니다.

출처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글쓴이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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