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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을 기쁘시게 / 창 6:5-8

by 【고동엽】 2022. 1. 7.

하나님을 기쁘시게

 

 

창 6:5-8

 

 

 

땅 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사 마음에 근심하시

 

하시고 이르시되 내가 창조한 사람을 내가 지면에서

 

쓸어버리되 사람으로부터 가축과 기는 것과 공중의

 

새까지 그리하리니 이는 내가 그것들을 지었음을 한

 

탄함이니라 그러나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더

 

라.

 

 

 

자녀가 할 일은 부모를 기쁘게 하는 일입니다. 그것이 자녀가 할 가장 기본적인 일입니다. 자녀들이 그렇게 살아갈 때 성경은 잘되고 복을 받는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부모의 마음을 근심하게 하고 속을 썩이는 자식들이 많습니다. 그래서 부모들이 자식 낳은 것을 후회하기도 합니다. 제자의 할 일은 스승을 기쁘게 하는 일입니다. 어느 스승은 졸업 후 출세한 학생의 소식을 듣고 기뻐했습니다. 그렇게 성공한 제자의 모습을 배후에서 보는 마음까지도 행복했습니다. 그래서 다니며 자랑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그 제자가 학교로 찾아왔습니다. 이 스승은 반색하며 맞아주었습니다. 돌아가는 그에게 스승은 조심스럽게 물었습니다. “자네가 성공하는데 내가 성공요인을 조금이라도 제공했다고 생각하나” 스승의 역할이 결정적이었다는 말을 듣고 그 스승은 너무나 기뻐합니다. 그것이 스승의 보람이고 제자의 할 일입니다. 부모는 자식에게 감성과 공동체의 삶을 알게 해 주고 스승은 사회인식을 키워줍니다. 그리고 이 세상의 모든 만물과 식물들에게도 할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꽃을 피우는 일이고 열매를 맺는 일입니다. 그것이 주어진 할 일이고 사명입니다.

 

그러면 성도가 가장 먼저 할 일은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일입니다. 그것이 성도들에게 주어진 가장 큰 사명이고 할일입니다. 그것이 은혜를 입는 삶이고 복을 받는 삶입니다. 그래서 엡 5:10을 보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것이 무엇인가 시험하여 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을 기쁘게 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웃으시게 해야 합니다. 그 삶이 그리스도인들이 살아야 할 가장 복된 삶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나님이 기쁘시게 할 수 있습니까. 그 방법이 오늘 본문에 나와 있습니다. 본문에 보면 노아라는 사람이 나옵니다. 노아가 살던 그 시대는 극도로 타락한 세상이었습니다. 그 시대는 온 세상이 타락해서 파탄 중이었습니다. 모두 하나님을 외면하고 자기쾌락 충족을 위해서 살던 시대입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사람은 단 한명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슬퍼하셨습니다. 근심하셨습니다. 마치 자식을 낳고 그 자식 때문에 속을 썩는 부모처럼 슬퍼하셨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하나님은 사람을 만드신 것을 후회하셨습니다. 부모를 근심하게 하고 눈에서 눈물나게 하면 자식이 복을 받지 못합니다. 또 하나님을 근심하게 하고 슬프게 하면 저주를 받습니다. 그래서 결국 하나님은 이 세상을 물로 심판하시기로 작정하십니다. 당신이 창조하신 이 세상을 당신이 스스로 심판하시기로 작정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그 시대에도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 사람이 단 한사람 있었습니다. 그것이 노아입니다. 노아는 하나님께 기쁨이었습니다. 노아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 삶의 내용이 본문에 몇 가지로 나와 있습니다. 그 내용이 오늘 우리들이 생각해야 할 부분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함”

 

 

 

노아가 하나님을 사랑했던 마음은 아주 특출 났습니다. 그 시대를 살아가던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을 떠났습니다. 모두 하나님을 외면했습니다. 그런데 그때 노아는 하나님을 사랑했습니다. 창 6:9를 보면 “노아는 의인이었고 당대에 완전한 자였으며 하나님과 동했하였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시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일”입니다. 노아는 하나님을 사랑하였기 때문에 모두가 하나님을 떠날 때에도 “하나님 안에서” 살아갔고 모두가 하나님의 뜻을 저버리고 살아가는데도 노아는 “하나님의 뜻을 존중”며 살았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시대는 참으로 엉망이었습니다. 오죽했으면 당신이 지으신 이 세상을 당신 스스로 물로 심판하시기로 작정했겠습니까. 그런데 그 시대에도 노아는 하나님 안에서 살았고 하나님의 뜻을 존중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그 노아를 사랑하셨고 기뻐하셨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을 가장 기뻐하십니다.

 

 

 

“하나님을 신뢰함”

 

 

 

사람도 자기를 믿고 신뢰해 주는 것을 기뻐합니다. 어느 가게에 갔는데 마침 지갑에 돈이 모자랐습니다. 그래서 망설이고 있는데 다음에 주고 그냥 가져가라고 합니다. 미안해서 전화번호라도 적어 놓으라고 하는데도 알겠으니 그냥 가라고 합니다. 나를 믿어주는 그의 마음이 그렇게 고마웠습니다. 그래서 그 가게를 늘 이용합니다. 나를 믿어주고 신뢰해준다는 것은 그만큼 기쁜 일이고 행복한 일입니다.

 

이것은 하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을 신뢰하는 일 그것을 하나님이 또 기뻐하십니다. 노아는 전적으로 하나님을 신뢰했습니다. 때로 이해되지 않는 일에도 노아는 전적으로 하나님을 믿고 신뢰하여 실행에 옮겼습니다. 한번은 하나님이 노아에게 산꼭대기에 올라가서 그곳에서 배를 만들라고 하였습니다. 배도 그냥 배가 아니고 길이가 137m, 무게가 2만 톤짜리 3층으로 배를 만들라고 하십니다. 여러분, 그것이 납득이 가는 일입니까. 그 명령을 받고 산위에서 노아가 배를 만듭니다. 그러니 사람들이 얼마나 조소하고 비웃었겠습니까. 그것도 참을 수 있었는데 내면에서 올라오는 내적 회의감은 참기가 어려웠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노아에게 있을 수도 없는 일을 하라고 요구하십니다. 그러니 얼마나 실행하기 어려운 일입니까.

 

그런데 노아는 묵묵히 그 일을 다 해냈습니다. 자그마치 노아는 120년에 걸쳐서 그 배를 만들어 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신뢰하는 전적인 믿음이 없이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노아가 그렇게 하나님을 사랑하고 신뢰했습니다. 그러니까 그 시대 노아 혼자서 고고하게 흔들림 없이 자신의 길을 걸어갈 수 있었을 것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문제가 있다면 그것은 너무 계산적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스펄젼은 “인간이 하나님 앞에서 할 일은 계산적으로 믿는 것이 아니고 절대 믿음을 갖는 것이다, 계산은 하나님이 하신다“고 했습니다. 오늘 전적인 믿음이 요구되는 시대입니다.

 

성경에 보면 이런 전적인 믿음의 모습이 나옵니다. 그것이 백부장의 믿음입니다. 마태복음 8장을 보면 백부장이 예수께 찾아와서 지금 하인이 죽을병에 걸렸으니 고쳐주십시오 하고 간구했습니다. 예수께서 그러면 네 집으로 가자고 하셨습니다. 그랬더니 백부장이 이렇게 말합니다. “아닙니다, 그런 수고는 안하셔도 됩니다, 다만 말씀만 하십시오, 그러면 내 종이 낫겠사옵니다.” 이것이 절대 믿음입니다. 그러니까 예수께서 그를 얼마나 칭찬하십니까. 하나님은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을 기뻐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요소가 하나님을 믿고 신뢰하는 일입니다.

 

 

 

“순종할 때”

 

 

 

창 6:22를 보면 “노아가 그와 같이 하되 하나님이 자기에게 명하신 대로 다 준행하였더라”고 했습니다. 이것이 순종입니다. 순종은 명령을 그대로 따르고 지시하신 대로 그대로 다 행하는 자세입니다. 노아는 도저히 따를 수 없는 명령을 받았지만 믿음으로 그대로 다 실행합니다. 그러니까 노아는 대단한 순종의 사람입니다. 만일 오늘 그런 명령이 우리들에게 주어진다면 어떤 현상이 일어나겠습니까. 그랬다면 말이 참 많았을 것입니다. 모두 기가 막혀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노아는 그대로 다 순종했습니다. 그러니까 거기에 기적이 일어났고 하나님의 뜻이 일어났던 것입니다.

 

신앙생활에서, 그리고 주님을 따르는 삶에는 이런 순종이 요구됩니다. 그런데 이런 순종이 요구될 때는 때로 모험도 인내도 수고도 필요해집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지시가 나올 때는 거기에 자세한 설명이 없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순종의 모습을 보면 무조건의 순종을 요구하십니다. 그래서 이 길을 가는 것이 힘들고 어려운 것입니다.

 

보십시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고향을 떠나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는 아무런 설명이 없습니다. “어디로 얼마만큼 가면 어떤 사람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니 그를 만나면 너를 인도할 것이다“라는 말이 없습니다. 그냥 떠나라는 말만 있습니다. 그러면서 성경에서는 순종하라는 말씀을 많이 합니다. 시 100:2를 보면 “기쁜 마음으로 순종하라”고 했습니다. 사무엘은 사울에게 “하나님은 제물보다 순종을 좋아하신다(삼상15:22)”고 했습니다. 요 14:15에서는 “나의 계명을 지키라”고 했습니다. 신앙인에게 한 가지 아주 훈련된 의식이 필요하다면 그것은 순종하는 자세입니다. 이 순종이 하나님을 기쁘게 합니다.

 

 

 

“감사할 때”

 

 

 

하나님을 감동시키는 요소 중 또 하나는 감사입니다. 이 감사는 예배생활을 통해서 표현됩니다. 노아는 언제나 예배생활을 소중히 여겼습니다. 노아는 홍수 전에도 제단을 쌓았고 홍수 후에도 제단을 쌓았습니다. 창 8:20을 보면 홍수 후에 노아가 가족과 함께 홀로 살아남습니다. 홍수가 그치자 노아가 제일 먼저 한 일이 하나님께 번제를 드리는 일이었습니다. 그런 삶이 노아로 하여금 하나님 안에서 살아가게 하였고 하나님의 계명을 기쁨으로 순종하게 하였던 동기가 되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 감사의 삶을 기뻐하십니다. 그래서 예배에는 말씀도 있고 기도도 있지만 반드시 찬양과 제물을 드리는 감사가 들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 감사의 삶은 그냥 하고 싶다고 되는 일이 아닙니다. 감사의 삶은 생각이나 발상이 전환되어야 만 주어지는 것입니다. 우리는 살아가는 동안 고정관념에 빠져 살아갑니다. 그렇게 살아가면 그 삶에 감사하고 찬양하고 살아갈 수가 없습니다. 생각도 발상도 의식도 전환해야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자살” 이라는 문구를 보면 사람들은 우선 끔찍하다고 생각부터 합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의례히 모든 글을 읽을 때 왼쪽에서 오른 쪽으로 읽습니다. 그것이 아주 고정된 관념입니다. 그러니까 “자살”입니다. 글은 오른 쪽에서 왼쪽으로도 읽을 수 있습니다. 그러면 “살자”입니다. 이 고정관념이 사람으로 하여금 틀을 벗지 못하게 하고 생각을 열지 못하게 만듭니다.

 

보십시오. 어느 처녀가 퇴근하고 집에 오는 길에 강도를 만나 다 빼앗기고 손가락의 반지까지 뺏겼습니다. 집에 돌아와 불평불만을 늘어놓았습니다. “재수 없다, 그 많은 사람 중에 왜 하필 내가 강도를 만났냐”하며 불평불만을 털어놓았습니다. 참 재수 없는 일입니다. 사람이 그렇게 생각하는 한 억울함이나 분노 그리고 불만을 해소할 수가 없습니다. 그 생각이 바로 고정관념입니다. 그 생각을 전환하지 않으면 결코 그 일로 인해서 감사할 수가 없습니다. 딸의 원망과 불평하는 소리를 듣다못해 어머니가 한마디 했습니다. “손가락 안 다친 것을 감사해라, 네 손가락은 그냥 있지 않느냐, 반지야 또 사면되지만 손가락이 잘렸으면 어떻게 할 뻔 했냐“.

 

그것입니다. 그것이 생각의 전환입니다. 말 그대로 손가락이 잘렸으면 어떻게 할 뻔 했습니까. 생각을 조금만 바꾸면 똑같은 사건을 놓고도 그렇게 감사할 수가 없습니다. 그렇게 생각을 바꿀 때 감사가 오고 찬양이 오고 기쁨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시는 것이 감사의 삶입니다. 내가 감사한 마음을 가지고 살아갈 때 우선 내가 기쁘고 감사해 집니다. 내 마음에 기쁨과 감격과 감사가 가득 채워집니다. 그리고 그 감사한 마음은 전염됩니다. 너에게로, 세상으로 전염됩니다. 그래서 이 세상이 건강한 세상으로 발전됩니다. 내 삶의 주변과 나와 함께 하는 사람들 모두가 함께 감사하고 거기서 변화가 일어나고 기적도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감사와 찬양의 삶을 기뻐하시는 것이다.

 

 

 

“건강한 삶을 살 때”

 

 

 

자녀들이 건강하게 자랄 때 바라보는 부모나 할아버지 할머니들의 마음이 얼마나 기쁩니까. 그 자녀들이 커서 이 세상에서 건전한 정신을 가지고 삶을 살아갈 때 그 모습을 바라보는 부모들의 마음이 또 얼마나 기쁘고 감사합니까. 그 부모의 마음이 꼭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이 땅의 그리스도인들이 그렇게 건강한 마음과 건전한 정신과 뜻을 가지고 이 세상을 열심히 살아갈 때 그 삶을 하나님이 기뻐하십니다.

 

우리의 부모들은 모두 아들딸이 커서 장차 큰 사람이 되고 유명하고 위대한 사람이 되는 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우리 부모들의 바람과 소망은 자식들이 평범하게 그러면서도 이 세상에서 건전한 삶을 행복하게 살아가는 것, 그 모습을 기뻐하십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마음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도 이 세상의 자녀들이 이 세상에서 그렇게 건전하고 아름다운 정신과 마음을 가지고 이웃과 더불어 감사하며 건강하게 살아가는 것을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여러분들에게 어느 날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셔서 “너는 고향을 떠나라, 아들을 바치라” 하시듯 그런 요구는 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그리고 너는 나를 위해서 순교하고 피를 흘리라는 그런 요구도 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때로 그런 사명이 아주 소수에게 주어지는 일이 있을 뿐입니다.

 

펄벅이 쓴 “어머니의 초상”이라는 책을 읽어보면 그런 대목이 나옵니다. “나의 어머니는 22세 때 결혼해서 선교사인 아버지를 따라 중국에서 선교를 했다. 나의 어머니는 굶주림과 생명의 위협 속에서 일곱 자녀를 낳았다. 그중 네 명은 어머니 앞에서 죽었다. 그러나 어머니에게서 우리는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을 보지 못했다. 그분은 우리를 기쁘게 해 주려고 자주 노래를 불렀고 낡은 옷에 무늬를 놓아 새 옷처럼 만들어 우리에게 입혀 주셨다. 우리는 그것을 새 옷처럼 입고 노래를 부르며 자랐다“.

 

얼마나 건강한 삶입니까. 이 삶이 건강한 삶의 모습입니다. 건강한 삶은 몸이 무쇠같이 감기도 안 걸리고 살아가는 것이 반드시 건강한 삶은 아닙니다. 건강한 삶은 정신과 영과 마음이 아주 건전하고 반듯하고 하늘의 뜻에 순종하며 매일 매일을 감사하며 살아가는 그 삶이 건강한 삶입니다. 하나님은 그런 삶을 보시고 기뻐하십니다. 그러면서 그 하나님은 오늘 우리들이 이 세상에서 그렇게 살아가기를 원하시고 그 삶 속에서 하나님이 세상에 나타나고 표현되고 증명되는 그런 삶을 원하시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의 목적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입니다. 우리는 그 일을 위해서 지음 받고 태어났습니다. 그렇게 살아가면 세 가지 축복이 주어집니다. 하나는 내 삶이 복을 받습니다. 그리고 세상이 건강해집니다. 그 삶은 또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영광을 받으십니다. 그래서 성경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살라고 강조하십니다.

출처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글쓴이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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