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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적이 있는 삶 /수 24:14-18

by 【고동엽】 2022. 1. 7.

목적이 있는 삶

 

 

수 24:14-18

 

 

 

너희가 섬길 자는 오늘 택하라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

 

 

 

오늘 실직자가 많아져서 걱정입니다. 그래서 오늘 실직자들을 일컫는 말들이 많습니다. 한때는 화백(화려한 백수)이라고 부르더니 마포불백(마누라도 포기한 불쌍한 백수)이라는 말로 발전했습니다. 그러더니 이제는 장노라는 말이 생겼습니다. 장기적으로 노는 사람이란 뜻입니다. 그리고 이제는 목사라는 말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목적 없이 사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엊그제 어느 모임에 설교 중에 이런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 이야기에 감명을 받았습니다. 금년이 성수대교가 무너진 지 10주년이 된다고 합니다. 그 사건이 있고 10년이 흐른 뒤 뒷이야기를 들어보니 그 희생된 가족 중에 어느 부모는 자살한 부모도 있고 병으로 세상을 떠난 부모도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중 한 여학생의 이야기가 우리들 가슴을 뭉클하게 합니다. 그 여학생은 아침 식사를 하고 나갔는데 한 시간도 안 되어 싸늘한 시체로 돌아왔습니다. 그 여학생의 아버지는 딸의 가방 속에서 일기를 발견합니다. 그 딸의 일기장에는 이런 글이 쓰여 있었습니다. “나는 장차 불구자들을 위해서 살 것이다, 그리고 나는 장자 그들의 손발이 되어주고 지팡이가 되어 주리라“. 이 여학생은 일찌감치 미래에 대한 확고한 의지와 목적과 뜻을 마음에 품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꿈과 목적을 이루지 못하고 사고로 목숨을 잃은 것입니다.

 

그런데 그 딸의 아버지는 딸의 생각을 가상하게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 딸의 죽음으로 받은 보상금 전액을 그 딸의 학교에 장학금으로 내 놓았습니다. 그런데 그 장학금을 받아 공부한 아이들이 커서 여러 곳으로 나아가 직장생활을 하는데 그중 몇 명이 장애인들을 돌보는 시설을 만들고 그 장애인의 집 정원에 이 여학생의 동상을 세우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여학생은 죽어서도 그의 마음에 품고 있었던 뜻과 목적을 이룰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 이야기를 들으면서 “사람은 마음에 어떤 생각, 어떤 뜻, 어떤 목적을 가지고 사느냐 하는 문제는 참으로 중요한 것이구나.” 하는 것을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여러분은 마음에 어떤 목적과 뜻과 생각을 가지고 살아가십니까. 그 뜻을 품는 것은 우리들이 할 일이지만 그 마음에 품은 뜻과 목적을 이루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다. 그래서 율곡은 한국 젊은이들에게 고하는 글에서 젊은이는 모름지기 입지를 세우라고 했습니다.

 

미국에서 남북전쟁이 끝나던 날 두 병사가 고향으로 돌아갑니다. 가다가 언덕에 있는 교회를 발견하고 한 병사는 들어가 기도하고 가자고 했고 또 한 병사는 빨리 가서 술이나 마시자고 했습니다. 그리고 둘은 헤어졌습니다. 그 일이 있고 나서 몇 십 년이 흘렀습니다. 그중 술이나 마시자고 하던 친구는 알코올중독자가 되어 범죄를 저질러 감옥에 있었는데 어느 날 이 친구가 신문을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보니까 함께 집으로 돌아오다 교회를 보고 기도하고 가자하던 그 친구는 대통령이 되어 오늘 취임식을 한다는 것입니다. 그 친구가 미국의 22대 대통령이 된 클리블랜드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지으셨습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실 때 그냥 만드신 것은 아닐 것입니다. 인간은 적어도 뜻을 품고 목적을 가지고 살아가도록 지으셨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시간을 주셨습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70년, 80년, 90년의 시간을 주셨습니다. 그런데 그 시간을 운영하는 것은 전적으로 내가 할 일입니다. 그 운영에 따라 나의 인생의 모습이 달라집니다. 어떤 사람은 중년의 나이에 입지를 세우고 세상을 위해 할 일을 다 하는 사람이 있고 어떤 사람은 중년의 나이에 서울역 대합실에서 노숙을 하고 있습니다. 삶의 목적을 잃으면 그 삶이 이렇게 혼돈되어 나타나게 됩니다.

 

이제 금주 수요일부터 제 14차 사순절이 시작됩니다. 이제 앞으로 40일 동안 특별 새벽기도회를 가지게 됩니다. 금년 사순절 동안은 나 자신을 발견하는 시간으로 가져보려고 합니다. 나 자신을 집중적으로 조명해 보고 하나님 앞에 서 있는 나는 누구인가를 깊이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나는 얼마나 중요한 존재인가? 나의 할 일은 무엇인가? 나는 과연 왜 태어났는가? 하나님이 나를 세상에 보내셨다면 나에게는 과연 어떤 목적이 주어졌단 말인가? “ 이런 문제들을 가지고 심각하게 생각하고 기도하다가 이 사순절이 끝날 즈음에는 내가 온전한 목적을 지닌 사람으로 주님께 봉헌되는 그런 시간을 가져보려고 합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위대한 지도자 여호수아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갑자기 모세가 죽고 그 지휘권을 여호수아가 받습니다. 여호수아는 최선을 다해서 백성들을 이끌고 가나안에 들어갑니다. 들어가서 땅을 분배하고 안정을 이룹니다. 그리고 여호수아도 마침내 그의 인생의 종말이 가까웠을 때 백성들에게 마지막으로 이렇게 말합니다. “이제는 여호와를 경외하고 온전함과 진실함으로 그를 섬기라, 너희 조상들이 애굽에서 섬기던 신들을 잊어버리고 여호와만 섬기라“하고 다짐 시킵니다. 그리고 이렇게 재 다짐시킵니다. “만일 여호와를 섬기는 것이 좋지 않게 생각되거든 다른 신들을 섬겨도 좋다, 너희들이 다 그런다 해도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만을 섬기겠노라“. 그때 백성들이 대답합니다. “우리가 결단코 여호와를 버리고 다른 신들을 섬기지 않겠습니다, 우리 여호와는 우리를 여기까지 인도하신 하나님이시니 그러므로 우리도 여호와만을 섬기리니 그는 우리 하나님이시이다“.

 

이 마지막 대화에서 우리는 아주 분명하고 확실한 목적과 목표가 무엇인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얼마나 분명하고 확신이 있습니까. 사람이 살아가는 데는 이런 분명한 중심과 뚜렷한 목적이 중요합니다. 그러면 그것이 신앙이든지, 일상적인 생활이든지, 직장에서 일하는 삶이든지 아주 분명해 집니다. 그래서 우리는 살아가면서 신앙인으로서 적어도 네 가지 질문에 답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 질문에 확신 있게 답할 수 있다면 성공적인 신앙의 인생을 살 수 있습니다. 오늘은 여러분들에게 우리의 신앙의 삶을 더 확실하게 하기 위해서 네 가지 질문을 하겠습니다. 여러분은 이 질문에 스스로 대답해 보시기 바랍니다.

 

 

 

“나의 삶의 목적은 무엇인가”

 

 

 

사람들은 한 가지씩 목적을 두고 살아갑니다. 어떤 사람은 그것이 돈일 수 있습니다. 이런 사람은 물질이 목적이고 우상입니다. 그래서 이런 사람은 물질에 대한 신앙이 대단합니다. 또 어떤 사람은 일이 목적일 수 있습니다. 이런 사람은 일에 매여 살아갑니다. 눈만 뜨면 일만 합니다. 쉴 여유도 없습니다. 일의 노예로 살아갑니다. 그러면서 놀고 쉬는 사람들을 욕합니다. 또 어떤 사람에게는 취미가 목적일 수 있습니다. 이런 사람은 취미에 집착합니다. 몰두합니다. 다른 것은 생각도 하지 않습니다. 그런가 하면 어떤 사람은 성에 도취되어 살아가는 사람이 있습니다. 오직 성과 쾌락에 미쳐 살아갑니다. 그런 사람도 있습니다. 오늘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렇게 어떤 것 중 하나를 목적삼아 살아갑니다. 말하자면 그것이 그 사람들의 신앙이고 믿음입니다.

 

그런데 우리 신앙인들은 그런 것에 목적을 두고 살아가기에는 너무 허전합니다. 우리에게는 더 흔들리지 않고 분명한 목적이 있어야 합니다. 아사왕은(대하 14:4) 백성들에게 “삶의 중심을 하나님께 두라”고 했습니다. 사도바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옵시며 너희가 사랑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지게 하라“고 (엡3:17) 했습니다. 여호수아는 오늘 본문에서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만을 섬기겠노라“라고 말했습니다.

 

우리가 삶의 목적을 하나님께 두면 그 하나님은 우리 삶의 중심에 항상 임재 하여 계실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내 안에 와 계심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그것은 예배생활을 통해서 알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내 중심에 와 계신다면 나는 예배를 기뻐하는 사람이 될 것입니다. 그렇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이 내 중심에 와 계시지 않으면 내가 예배를 경하게 여길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 말은 하나님이 내 중심에서 밀려났다는 말이 됩니다. 그렇게 되면 내 마음에는 온갖 잡념들로 가득 찰 것이고 그 인생은 목적을 잃은 채 방황 대며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나는 어떤 성품의 사람이 되어야 하는가.”

 

 

 

리들이 예수님의 제자가 되려면 우선 좋은 성품을 가져야 합니다. 좋은 성품을 가지려면 두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하나는 타고나는 방법입니다. 이것은 축복입니다. 또 하나는 후천적으로 훈련해서 만드는 방법입니다. 사람은 훈련으로 얼마든지 개조될 수 있습니다. 노력하고 힘쓰면 내 성품이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이 얼마나 많이 일하느냐 보다 우리들이 어떤 사람인가를 더 소중히 여기십니다. 천국에서는 세상에서 어떤 직업을 가지고 있었느냐를 중시하는 것이 아니고 어떤 성품으로 살았느냐를 더 중시합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이러므로 너희가 더욱 힘써 너희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지식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경건을, 경건에 형제우애를, 형제우애에 사랑을 공급하라”(벧후 1:5-7)고 했습니다.

 

우리는 세상에서 얼마나 많이 돈을 벌었느냐, 얼마나 출세했느냐, 얼마나 잘 생겼느냐 하는 것도 중시해야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내가 얼마나 그리스도와 같은 성품을 쌓았느냐 하는 문제에 더 힘써야 합니다. 하나님 나라에서는 그것을 따질 것입니다. 적어도 하나님 나라에서는 얼마나 부자냐, 성공했느냐, 출세했느냐를 따지지 않을 것입니다. 너희는 얼마나 주님을 닮은 삶을 살았느냐 그것을 따질 것입니다. 여러분의 성품은 얼마나 주님을 닮은 채 살아가고 있습니까. 부부는 오래 살면 닮는다고 합니다. 얼굴도 닮고 식성도 닮고 마음도 닮아갑니다. 그래야 합니다. 부모와 자식은 어디라도 닮은데 가 있습니다. 참 묘합니다. 신앙생활도 깊이 하게 되면 주님을 닮게 되어 있습니다. 그중에서도 특히 성품이 닮습니다. 그것이 변화된 삶입니다. 그 닮은 힘이 세상을 구원하고 변하시키고 치료하고 하나님의 뜻을 펼칠 수 있습니다.

 

 

 

“내 삶을 어디에 투자해야 하는가.”

 

 

 

한마디로 섬기는 삶에 투자해야 합니다. 우리는 주님의 제자들입니다. 우리는 세상을 살면서 섬기는 삶을 살도록 지음 받았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세상에서, 가정에서, 교회에서, 사회에서 기여해야 하고 감당하고 섬겨야 할 부분은 어떤 것이 있는가를 늘 생각해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고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다”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말씀하기를 “내가 너희를 택한 이유는 너희가 가서 열매를 많이 맺고 너희 열매가 항상 있게 하기 위해서였다“(요 15:16)고 했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삶의 목적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섬김의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그렇게 살 때 이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뜻을 이룰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삶에 향기가 좋습니다. 그리고 감동이 주어집니다. 우리는 누군가를 섬기도록 지음 받았습니다.

 

작가 세르반테스가 24세 때 전쟁에 나가 부상을 당해서 불구의 몸이 됩니다. 그리고 58세 때는 모함을 받아 감옥에 갇힙니다. 감옥에서 만난 죄수들은 한결같이 비통해하고 낙심하며 자포자기의 삶을 살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 사람들을 어떻게 하면 기쁘고 재미있게 해 줄 수 있을까를 생각했습니다. 세르반테스는 순전히 죄수들에게 소망을 주고 기쁨을 주려고 글을 쓴 것이 돈키호테라는 책입니다. 그런데 그 책이 불후의 명작이 된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들이 이 세상에서 할 일입니다. 이 섬기는 일이 최상의 신앙인의 삶입니다. 그 섬김의 삶은 예수의 성품을 닮아서 하는 일입니다.

 

 

 

“나는 어떤 도구로 사용되어야 하는가.”

 

 

 

나는 하나님을 알리는 도구로 사용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나의 존재의 이유이고 목적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사명이 주어졌다면 그것은 전도하는데 있습니다. 나의 삶을 통해서 하나님이 세상에 전달되고 느껴지도록 사는 것이 우리의 삶의 목적입니다. 전도하는 일이 가장 중요한 일이라면 우리는 그 일을 주저해서는 안 됩니다.

 

부모는 자녀들에게 가장 좋은 것을 주려고 안달합니다. 부모들이 자녀들의 진학을 위해서 노력하는 것을 보면 참 처절할 정도입니다. 자녀들이 장차 굶지 않고 고생하지 않고 살게 하려고 재산을 모아서 물려주려고 안달하는 것을 보면 또 처절할 정도입니다. 자기는 먹지도 못하고 아꼈다가 송두리째 물려줍니다. 그런데 정작 더 중요한 영혼의 문제에 대해서는 무감각하다면 순서가 뒤바뀌고 우선순위가 뒤바뀐 것입니다. 그래서 본문에서 여호수아는 백성들에게 추상같이 명령합니다. “너희는 오늘 선택하라, 너희는 이방신을 좇든지 아모리 족속의 신을 좇든지 결정하라,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 얼마나 확신 있는 고백입니까. 이런 확신 있는 고백은 전염됩니다. 큰 영향을 미칩니다. 죽어가는 사람을 살려냅니다. 흐리멍덩한 신앙도 확신 있는 신앙으로 만들어 줍니다. 그러니까 백성들이 대답하기를 “우리가 결단코 여호와를 버리고 다른 신을 섬기지 않겠습니다, 우리 여호와는 우리를 여기까지 인도하신 하나님이시니 그러므로 우리도 여호와만을 섬기리니 그는 우리의 하나님이시니 이다.”

 

윌리엄 부스가 한 때 전당포를 운영했습니다. 하루는 술주정뱅이가 찾아왔습니다. 보기에도 불쌍했습니다. 그래서 “예수 믿으세요.”하고 전도를 했습니다. 그랬더니 술주정뱅이가 뚫어지게 쳐다보더니 “내가 당신처럼 예수를 믿고 부활을 믿고 천국을 믿는다면 당신처럼 그렇게 소신 없이 예수 믿으라고 말하지는 않겠소. “하고 돌아갔습니다. 부스는 그 말에 충격을 받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신앙을 일신시키는 계기로 삼습니다. 그러고 나서 그는 마침내 열정적인 전도자가 되어 구세군을 창시하게 됩니다.

 

우리는 언젠가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이 다 되면 인생을 끝내고 하나님의 부름을 받을 것입니다. 그 시간이 되면 참으로 엄숙할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그 시간을 미리 맛보게 하기 위해서 유서를 미리 써보는 프로그램이 있고 관에 미리 들어가 누워보는 프로그램도 있습니다. 가끔 그런 생각을 해 봅니다. “내가 내 인생을 다 끝내고 내 장례식 때 사람들은 나를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 사람들은 나를 성공한 인생을 살았다고 할 것인가, 아니면 실패한 인생을 살았다고 말할 것인가“ 그것이 궁금할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사실 엄밀히 생각해 본다면 그 보다 더 중요한 것은 내가 죽은 후에 장례식에서 ‘나는 어떤 사람이었다. ‘ 라는 말을 듣는 일 보다 우리의 삶에 대해서 하나님은 어떻게 보시겠는가 하는 것이 더 중요한 문제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왜냐하면 우리의 삶의 목적은 사람이 아니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이 세상을 다 살고 하나님께 가면 하나님은 이런 질문을 하실 것입니다. “당신은 일생을 예수중심으로 살았습니까.” “당신은 예수님의 성품을 닮으려고 노력했습니까.” “당신은 누군가를 섬기는 일을 해 보았습니까.” “당신은 예수께서 분부하신 메시지를 전하려고 힘써 보셨습니까.” “당신은 세상에서 누군가를 예수의 사랑을 가지고 사랑해 보셨습니까.” 그 외에도 더 많은 질문들이 있을 수 있을 것입니다.

 

사람은 목표를 향해서 살아가는 존재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지으실 때 그런 존재로 지으셨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나는 목표를 향하여 달려간다.”고 했습니다. (고전9:26) 여호수아는 “나와 내 집은 여호와만을 섬기겠노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지으셨습니다. 창조하셨습니다. 그리고 이 세상에 보내셨습니다. 그것은 목적을 가지고 살라고 보내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목적이 있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이고 주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신 목적이기도 합니다.

출처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글쓴이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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