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직 한길의 복
갈 1:6-10
다른 복음은 없나니 다만 어떤 사람들이 너희를 교란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하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우리나 혹
은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
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참 무더운 날씨입니다. 이 무더운 여름을 나는 방법은 피서를 가는 방법도 있고 시원한 집에서 쉬면서 수박을 먹는 방법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정말 이 무더위를 잊고 지나려면 한 가지 일에 몰두해 일하는 방법도 있을 것입니다. 저는 한 가지 일에 푹 빠져 일하는 사람들을 참 좋아합니다.
그런 일 가운데는 평생 도자기를 굽는 일을 들 수 있습니다. 이 일에 평생을 거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세상을 잊고 정성을 다해 만든 도자기를 가마에 넣고 목욕재개하고 불을 지피는 도공들의 마음가짐은 참으로 경건할 것입니다. 무더운 여름을 지나는 일만 해도 땀이 흐르고 인내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런데 그 여름에 불을 지피는 일을 한다는 것 자체만도 고역일 것입니다. 그런데 그 당사자들은 그렇게 흐르는 땀이 오히려 시원하게 여겨질는지 모릅니다. 그것이 기쁨으로 일하는 사람들이 느끼는 색다른 뜻입니다. 그렇게 구워낸 도자기를 하나씩 선별해서 조그만 티만 있어도 깨버리고 단 몇 개 완성품을 만들어 내어 놓는 기쁨은 그 본인 밖에는 느끼지 못할 것입니다. 그것이 기쁨이고 행복입니다.
한여름 무더위 속에서 수출물량에 밀려 휴가도 반납한 채 땀을 흘리며 일하는 행복도 이만저만이 아닐 것입니다. 이것이 나름대로 행복을 만들어 가며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무더위와 휴가를 잊고 온 정신을 쏟아 일할 수 있는 목적과 일과 사명을 발견한 사람은 그래서 행복한 사람들인 것입니다. 이렇게 살면 더위도 휴가도 땀도 문제가 아닙니다.
성경을 보면 그렇게 살아갔던 사람들이 참 많습니다. 그중에 세례요한이 있습니다. 세례요한은 오직 예수를 위한 삶을 살았습니다. 그는 예수를 위해서 태어났고 예수를 위해서 살다 예수를 위해서 죽었습니다. 그는 평소 입버릇처럼 한 말이 있습니다. “나는 그의 신을 들기 조차도 감당치 못하겠노라, 그는 보름달처럼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그믐달처럼 쇠하여야 하리라“. 얼마나 행복한 사람입니까. 이렇게 자신의 삶 전체를 매어놓고 매진할 수 있는 대상을 가진 것은 참으로 행복한 일입니다.
다윗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도 오직 하나님을 바라보며 살았던 사람입니다. 언젠가 그는 인구조사를 했습니다. 만일 외침이 있을 경우 칼을 들고 나가 싸울만한 사람이 얼마나 될까를 계수했습니다. 계수 결과 170만 명이 된다는 결과가 나왔습니다. 그는 내심 마음이 든든했을 것입니다. 나라를 지키는 국방력이 든든한 것입니다. 그때 갓 선지자가 찾아왔습니다. “하나님께서 노하셨소, 그러니 하나님이 주시는 벌을 받으시오, 3년 동안이 땅에 기근입니까?, 3개월 동안 적으로부터 도피생활을 하겠습니까?, 3일 동안 온역을 당하겠습니까?” 그때 다윗은 회개합니다. “내가 죄를 지었소, 내가 하나님을 믿지 못하고 사람을 믿으려 했으니 참으로 죄를 지었소. 이제 내가 죽을 찌라도 하나님의 손에 죽겠소, 그러니 하나님이 주시는 온역을 택하겠소.” 다윗은 언제나 그의 마음에는 하나님과 함께 하며 살았습니다.
본문에 나오는 바울도 그런 사람입니다. 그도 오직 예수 때문에 살았던 사람입니다. 그 예수 때문에 다 포기하고 그를 위해 일하고 그를 위해서 살아가는 삶을 행복해하고 즐거워하고 보람을 느끼며 일생을 투자한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이 진정 행복인 입니다.
본문 성경에서 바울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다른 복음은 없나니 ..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 찌어다, ... 내가 사람을 기쁘게 하랴 하나님을 좋게 하랴 내가 사람의 기쁨을 구하였더라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 아주 복음관이 분명하고 확실합니다. 이런 사람은 그 삶이 행복한 사람입니다. 행복은 어디서 주어지느냐 하면 살아가는 삶의 분명한 목적을 발견했을 때입니다. 그것을 사명이라 하고 목적이라 하고 뜻이라고 말합니다. 사람들이 행복론을 말하지만 보면 모두 피상적인 것들입니다. 얼마 있으면 시들어버릴 것들입니다. 그러니까 무엇인가 얻었는가 싶은데 얼마가지 못해 허탈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행복에는 필수 요소가 하나 있습니다.
“예수가 목적”
예수가 목적이어야 합니다. 예수 없는 행복은 그 생명이 짧습니다, 얼마 가지 못합니다. 이것이 필수입니다. 바울은 바울 되기 이전에는 여러 조건들을 우상처럼 여기며 살았던 사람입니다. 그래서 늘 자랑했습니다. 우월감을 가졌습니다. 사실 조건들은 사람이 살아가는데 참 유용한 것입니다. 좋은 가문은 인생을 살아가는데 엄청난 프리미엄을 선사합니다. 케네디가, 록펠러가, 카네기가 하면 미국의 3대 가문입니다. 그 가문에 속해 있다는 것만으로도 상당한 프리미엄이 주어져 있습니다. 좋은 학벌도 마찬가지입니다. 좋은 학벌은 세상에서 알아줍니다. 그래서 학벌은 오늘 사람들의 우상이 되어버렸습니다. 이런 조건들을 가지고 있으면 남들은 운동장 처음부터 뛰어야 하지만 중간에서 뛰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세상에서 조건들은 이렇게 좋은 역할을 합니다.
바울은 그에게 주어졌던 조건들을 그렇게 자랑하고 좋아했지만 그가 예수를 만난 후 그것을 미련 없이 버리고 전도자의 삶을 살아갑니다. 그런 그의 겉모습은 초라하게 보였지만 내심 그는 누구보다도 행복한 사람으로 살아가게 됩니다. 그것은 그가 새로운 목적을 발견하고 그 목적을 소지했기 때문입니다. 그 마음에 예수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진정한 복은 예수가 내 안에 함께 하는 삶입니다.
15세기 이태리 화가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42세 때 밀라노의 로드비치 공이 와서 예수의 최후의 만찬 모습을 그려달라고 요청했습니다. 그래서 다빈치는 혼신을 다해서 그림을 그렸습니다. 예수를 중심에 놓고 제자들을 좌우로 여섯 사람 씩 배열했습니다. 그림이 완성되자 친구에게 평가해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친구가 그림을 보더니 아주 감탄했습니다. 제자들을 예수님 좌우로 잘 배치했고 훌륭한 작품이라고 평가했습니다. 그러면서 무엇보다도 예수님 손에 든 은잔이 가장 아름답다고 칭찬했습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다빈치의 얼굴이 하얗게 변해버렸습니다. 그리고 붓으로 그림을 X자로 지워버렸습니다. 이에 놀란 친구가 “왜 아깝게 그림을 망쳐놓느냐”고 반문했습니다. 그때 이 다빈치가 이렇게 말합니다. “이 그림은 예수가 중심이 되어야 하는데 중심이 은잔이 되어버렸으니 실패작이다, 폐기처분할 수밖에 없다.”
이렇게 살아가는 사람이 행복한 사람입니다. 그 생애, 마음, 정신, 예술 혼, 삶의 목적이 예수가 중심이 되어 있기 때문에 이런 자신만만한 태도가 나올 수 있는 것입니다. 얼마나 행복한 사람입니까. 우리 생애에서 예수가 중심이 될 때 진정 행복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가 중심이 아니고 은잔이 중심이 되니까 불행해지는 것입니다. 우리 마음에 은잔이 중심이 되어 살면 예수는 액세서리로 전락합니다. 그러니까 10년 20년 예수를 믿었으면서도 그 예수가 내 인생에 별로 뜨겁게 다가오지 않는 것입니다. 행복은 예수를 중심으로 살아갈 때 주어지고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예수가 내 삶에 중심 이루는 삶”
예수는 주일날만 만나고 믿는 대상이 아닙니다.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이 주일날 와서 예배드리는 동안만 예수를 부르고 일주일 동안 잊고 살아갑니다. 그러니까 그 예수가 내 삶에 구체적으로 관여를 하지 않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의 삶에는 예수가 언제나 관여되어야 합니다. 예수를 언제나 앞세우고 예수가 언제나 내 생활의 중심부에 있어야 합니다. 그 삶이 신앙인의 삶입니다.
어느 권사님이 교회주변을 떠나지 못하고 살았습니다. 그래서 새 집을 짓게 되었습니다. 그때 이 권사님은 문을 열면 곧 바로 교회가 보이도록 지었습니다. 집의 방향이나 조건은 따지지도 않았습니다. 그렇게 지었다는 것도 중요한 일이지만 그 마음, 생각, 생활 속에 예수가 가득 채워져 있다는 것이 더 중요한 일입니다. 그렇게 살면 말이나 마음 그리고 생각과 언어에 예수가 흠뻑 들어있게 됩니다. 그것이 그 사람을 행복하게 하는 요인입니다.
1623년 청교도들이 드디어 미국 땅에 도착했습니다. 도착하자 제일 먼저 교회를 건축했습니다. 이곳까지 온 목적이 진정 하나님께 예배하고 마음껏 신앙생활 하기 위해서 왔습니다. 당연한 일입니다. 그리고 학교를 세웠습니다. 자신들도 중요하지만 이곳에서 영원히 살아갈 후손들을 길러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학교를 건축했습니다. 그러고 나서 사람들은 자기 집을 지었습니다. 집을 짓는데도 3가지 법칙을 고수해서 지었습니다.
하나는 교회를 중심으로 돌려가며 짓는 일이었고 창문은 문만 열면 교회가 한눈에 들어오도록 짓는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길을 닦을 때는 모든 길은 교회로 통하도록 길을 내었습니다. 그러니 그 삶이 얼마나 즐거움과 행복이 주어졌겠습니까. 그 정신, 마음, 생각을 가지고 살아가는 삶이 예수와 함께 살아가는 삶입니다. 행복한 삶은 그렇게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사람들은 너무 허황된 목적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때로는 목적을 잃어버리고 부수적인 것에 목을 매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니까 갈등이 오고 때로 세월이 흐른 후에는 허탈감에 빠지는 것입니다. 보십시오. 어떤 사람이 지하철을 타기 위해서 지하로 내려갑니다. 그때 목이 말랐습니다. 그래서 자판기에서 캔 음료수를 뽑으려고 1000원짜리 돈을 넣었습니다. 잔돈이 쏟아져 내려왔습니다. 이분이 쏟아진 동전을 주워 확인하려는 순간 전철이 들어왔습니다. 그래서 잽싸게 전철을 타고 동전을 세어보니까 800원 맞았습니다. 그런데 음료수는 그냥 두고 온 것입니다. 오늘 사람들이 이렇게 살아갑니다. 목적은 잊고 부수적인 것에 골몰하다 보니까 여전히 갈증은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람들의 오늘을 아주 약게 살기는 사는데 그 삶에 저 깊은 곳에서 솟아나오는 진정한 행복이나 기쁨을 모르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모험의 용기“
신앙생활은 깨달음의 생활이 아닙니다. 그것은 수양종교에서 강조하는 말입니다. 수양종교에서는 아침에 도를 닦으면 저녁에는 죽어도 좋다고 강조합니다. 그런데 기독교는 깨달았으면 곧 바로 행동하라고 강조합니다. 깨달았으면 행동해야 하고 희생해야 하고 모험이 뒤따라야 합니다. 그래야 그곳에서 기적이 일어납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신앙은 아는 신앙수준을 넘지를 못합니다. 그래서 알기는 많이 아는데 결단을 못하고 희생을 주저하고 모험을 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그 신앙이 무미건조한 신앙으로 흐르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가 살아서 뜨겁게 나의 삶에 다가오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물이 나오질 않습니다. 영적 체험이 없습니다. 감격이 없습니다. 그래서 20년씩 신앙생활 했는데도 변화가 없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미건조한 신앙입니다.
당시 사도바울의 라이벌은 아볼로였습니다. 그는 그 시대의 대 웅변가였고 가는 곳 마다 화려한 박수와 환호를 받았습니다. 그에 비하면 바울은 너무나 초라하고 가난하고 빈약한 전도자입니다. 또 바울이 사울 때 동료였던 바리새인들이나 제사장들은 지금 모두 출세해서 당당한 자리에 올라 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지금 아주 초라한 거리의 전도자의 삶을 살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바울은 이렇게 외칩니다. “나의 나 됨은 하나님의 은혜로라.” 바울의 이 선언은 너무나 깊이 있는 선언이기 때문에 그 말속에 담겨진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기가 어렵습니다. 바울의 그 고백 속에는 진정한 만족함과 행복함과 즐거움이 배어 있습니다. 무한한 자유함과 진정 행복함의 고백이 서려 있습니다. 그것은 그 삶에 예수가 완전히 정복한 결과입니다. 그의 삶에 예수가 완전히 점령하고 지배하고 붙잡고 있기에 가능한 고백입니다.
이것이 행복한 삶입니다. 행복은 이렇게 잡히는 것입니다. 정복당하는 것입니다. 덜 정복당하면 용기도 힘도 자신감도 없습니다. 완전히 잡히고 정복되고 매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앙생활은 순전히 용기이고 확신이고 자신감의 생활입니다. 그런 모험이 주어질 때 그 사람에 신앙적인 기적이 일어나고 체험이 수반되어 나타나는 것입니다.
어떤 분이 사업을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고민이 있습니다. 그것은 주일날 일을 해야 하는가 하는 문제 때문입니다. 어떤 직업은 주일날 매상이 갑절이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런 경우에는 주일을 쉬기가 어렵습니다. 그래서 갈등을 했습니다. 이 단계가 갈등의 단계입니다. 시험의 단계입니다. 하나님은 그런 때 “이렇게 하라” 하고 결정하도록 힘으로 밀어주시지 않습니다. 그 사람이 스스로 결단내릴 때 까지 고민을 감당하도록 놓아두십니다. 그 고민과 갈등은 나의 몫입니다.
이분이 고민하다가 과감하게 주일날은 문을 닫기로 했습니다. 주일에 주문이 오면 다른 곳으로 안내해 주었습니다. 그리고 문에 “주일은 쉽니다“라는 문구도 써 붙였습니다. 이것은 보통 사람들은 쉽게 결정내리지 못하는 일입니다. 이분은 과감하게 손해 볼 것을 각오했습니다. 그것은 순전히 용기요 자신감이요 손해를 감수하겠다는 결단에서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렇게 결정하고 나니까 평안이 찾아오고 평화가 찾아왔습니다. 마음이 아주 홀가분해졌습니다. “나도 예수 때문에 손해를 감수했다”는 승리감이 찾아왔습니다. 그것이 예수와 함께 하는 삶입니다. 그가 그렇게 결단내릴 수 있었던 것은 그 삶에 예수께서 함께 하셨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입니다. 행복은 그렇게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내가 모험하고 내가 극복하고 내게 주어지는 시험을 극복하고 이길 때 찾아오는 것입니다.
그렇게 예수 때문에 손해를 각오하고 감수하고 결단 내리면 그 예수님이 살아 계시다면 그냥 계시겠습니까. 그냥 계시다면 살아계신 주님이 아닐 것입니다. 얼마 후 정부기관에서 찾아왔습니다. 와서 이렇게 말합니다. “당신에 대해서 소식 들었습니다, 주일날 매상을 포기하고 중심을 가지고 쉴 정도면 어떤 일도 책임 있게 할 것으로 믿습니다. 일을 줄 테니 최선을 다해 주십시오.” 그래서 이 분이 정부공인사업체로 인정받아 크게 기업체를 이루었다고 합니다. 이것이 차별화된 신앙입니다. 신앙의 세계에는 언제나 희생이 따르고 용단이 따르고 보상이 따릅니다.
사도바울은 복음 전도하는 일에 누구도 감당할 수 없을 만큼 자신감에 차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단들이 들어와 복음을 흐려놓고 있습니다. 그때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다른 복음은 없나니 ...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 할지라도 우리가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들의 기쁨을 구하였다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 이 확신이 복음이 주는 기쁨과 행복함을 주는 원천입니다. 이런 은혜가 함께 하시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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