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고상한 목적
빌 3:5-12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
이라.
사람은 행복해지기 위해서 노력합니다. 행복은 사람들이 추구하는 가장 보편적인 목적입니다. 그래서 행복해질 수 있다면 사람들은 물불을 가리지 않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무엇을 해야 행복해지고 무엇을 해야 즐겁고 기쁘고 만족하냐 그것이 문제입니다. 세상에서 얻어지는 행복의 조건들은 그 생명이 길지 못하다는데 문제가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늘 불만족하며 살아갑니다. 행복의 조건이 주어졌는가 하면 곧 변해버리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성경을 보면 그 해답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 행복한 삶의 내용이 “예수를 알고 살아가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예수를 알고 살아가는 것이 근본적이고 본질적인 복입니다. 본문을 보면 “그리스도를 알고 사는 것이 가장 고상한 삶”이라고 했습니다. 사도바울은 “예수를 알고 난 후에 그동안 소중히 여기던 것들을 다 미련 없이 버렸다”고 고백했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예수를 알게 되면 구원받고 천국이 주어지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그런 엄청난 은혜 말고도 우리들이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 의미 있는 삶을 살고 뜻있는 삶을 살게 하는 은혜의 조건을 주십니다. 우리는 그것을 소중한 줄 알고 살아가야 합니다.
나를 발견하고 나를 알게 되는 은혜
내가 예수를 깊이 알게 되면 무엇보다도 나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와 종말을 깊이 알게 됩니다. 그러니까 인생의 근본을 이해하게 되고 깨닫게 되고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얼마나 큰 복입니까. 여러분, 사람이 자기의 근본을 알고 뿌리를 아는 것처럼 중요한 일도 없습니다. 우리가 예수를 알아야 나의 뿌리를 알고 미래를 알고 운명을 알 수 있습니다. 사람은 자신의 뿌리, 근원, 존재를 알게 되는 것도 중요하지만 자신이 가는 앞길을 알고 산다는 것이 더 중요한 일입니다. “나는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가”, 이것처럼 초보적이면서도 근본적인 물음이 또 어디 있습니까. 사람들이 이것을 모르니까 삶을 회의하고 비관하고 때로 포기도 하는 것입니다.
요즘 보면 참 불행한 일들이 자꾸만 일어나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세상을 비관하다가 달리는 차에 뛰어들어 죽습니다. 그래서 기관사들이 이 사람들 때문에 노이로제에 걸려있다고 합니다. 불가항력적으로 달리는 전철에 뛰어들면 본의 아니게 내가 사람을 죽이게 되는 것입니다. 내가 모는 차에 사람이 치여 피 흘리고 죽었다 생각해 보십시오. 그 순간의 참상을 목격하는 순간 다시는 차를 몰고 싶은 마음이 없을 뿐 아니라 “내가 운전하는 전철에 사람을 치여 죽였다“하는 마음 때문에 평생 자책감을 떨쳐버릴 수가 없을 것입니다. 그러니 이런 불행이 세상에 어디 있습니까.
예수는 살리는 영을 가지신 분입니다. 죽어가던 사람도 예수를 만나면 살아나게 되어 있습니다. 예수는 살리는 하나님이십니다. 예수를 만나게 되면 이런 소망이 주어집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회복이 영이십니다. 예수를 만나면 회복의 은혜가 주어집니다. 기운이 회복됩니다. 삶이 회복됩니다. 부활의 은혜가 주어집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 예수를 만나고 나서 그토록 소중히 여기던 것을 미련 없이 버린다고 고백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를 아는 가장 고상한 지식을 얻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를 알면 먼저 나를 알고보고 발견하게 되는 은혜를 입게 됩니다. 이것이 복입니다.
예수를 알면 인생이 따뜻함
예수를 알게 되면 또 내 인생이 따뜻해집니다. 여러분은 그것을 느끼지 않습니까. 고아는 배가 고파도 울지 않습니다. 울어보아야 누구하나 알아줄 사람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고아는 좀처럼 울지 않습니다. 우는 대신 스스로 살아갈 길을 모색하느라 정신이 없습니다. 언제나 삶을 걱정해야 합니다. 모든 것을 내가 알아서 해야 합니다. 그러니 그 인생이 얼마나 차갑고 우울하고 어둡고 고독하겠습니까.
또 사람이 집이 있고 가족이 있다고 다 그 인생이 따뜻한 것이 아닙니다. 다 있어도 예수를 모르면 살아가다 고달프고 어렵고 힘들고 몸이 아프고 슬퍼도 기도를 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에게는 기도할 대상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람이 예수를 모르고 살면 인생이 춥고 삶이 고독하고 그 인생이 외로운 것입니다.
사람이 세상을 자신 있게 산다는 것은 복입니다. 누군가 내 등 뒤에서 나를 밀어주고 인도해주고 안내해주는 대상이 있다는 것은 복중의 복입니다. 그것이 없으니까 그 삶이 늘 불확실하게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늘 삶이 막연하고 막막하고 희미하고 미래가 불확실한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을 불확실성의 시대라고 말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내 뒤에 누군가 확실한 후견인이 있고 나를 보살펴 주는 분이 있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그렇다면 얼마나 자신 있는 삶을 살겠습니까. 그 인생이 얼마나 따뜻하고 포근하고 안정되고 자신감 있고 든든하겠습니까. 그 삶이 예수와 함께 하는 신앙인의 포근하고 따듯한 삶인 것입니다.
어떤 어린 아이가 주일날 어머니 심부름 하다가 교회에 가는데 시간이 좀 늦었습니다. 그래서 뛰어갑니다. 가면서 “제발 늦지 않게 해 주세요, 빨리 뛸 수 있게 힘주세요”하고 기도하면서 뛰었습니다. 시간 안에 가까스로 교회문턱에 도착하자마자 그만 앞으로 넘어졌습니다. 그때 이 아이가 손을 툭툭 털면서 “그렇다고 떼밀 것 까지는 없어요”하고 말했습니다. 이 아이는 예수를 아는 아이였습니다. 그러니까 뛰면서도 예수님과 대화할 줄 알았습니다. 잘 뛸 수 있도록 힘을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예수를 알고 믿음을 가지고 산다는 것이 이렇게 중요한 것입니다. 내가 예수를 바로 알고 산다는 것은 이렇게 소중한 것입니다. 예수를 바로 알면 그 예수가 나의 앞길과 현재와 미래와 나의 운명까지도 모두 인도자가 되어주십니다. 그렇게 살아갈 때 우리의 인생이 행복해지고 따뜻해지고 부드러워지고 향기가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우리가 정말 예수를 알되 껍데기로 알지 않고 이론으로 알지 않고 체험으로 안다면 정말 행복한 삶을 살수 있습니다. 그런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그리스도인입니다.
최근 읽은 신앙서적 가운데 이런 책이 있습니다. 그 책 이름은 “빽이 도대체 누구야”라는 책입니다. 33세난 다니엘 명라는 분이 쓴 책입니다. 한국에서 아버지의 사업실패로 미국으로 이민을 갔습니다. 가서 처음에는 상당한 고생도 했겠지요. 그런 가운데 잘 자라서 일류대학에서 회계학을 전공했습니다. 졸업을 하고 취업하려는데 미국에서 최상위 회계법인 6개 가운데 4곳에서 입사제의를 받았습니다. 이 일류법인에 입사만 하면 미래와 장래가 보장된다고 보아도 됩니다. 그 4개 법인 중에는 미국에서 모든 회계학 전공자들이 취업하고 싶어 하는 아서 아더 앤더슨이라는 회계법인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4개중 취업회사를 선택하는데 망설일 이유가 없습니다. 당연히 모든 회계사들의 꿈인 초일류회사인 앤더슨을 택하면 됩니다. 그런데 이 분이 면접을 마친 후에 고민에 빠졌습니다. 이 회계법인들은 모두 연봉이 많은 대신 하루 평균 12시간씩 일을 해야 하고 주일도 쉴 수가 없습니다. 그 말은 주일을 지키지 못한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고민입니다. 이 분은 독실한 크리스천입니다. 일을 지키지 못한다니 그것은 말도 안 됩니다. 그래서 이분이 고민을 했습니다. 많은 연봉과 장래보장과 초일류 회계법인으로 결정하느냐 아니면 또 다른 곳을 찾아야 하느냐 하고 고민을 했습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그 처지가 내 입장이라면 여러분은 어떻게 하겠습니까. 그리고 그것이 여러분의 아들이이라면 어떻게 조언하겠습니까. 이것은 우리 신앙인이라면 마땅히 고민해야 할 일입니다. 이 고민이 이 책이 주는 메시지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을 살면서 영적싸움을 해야 하는데 그 싸움이 바로 이런 결단의 싸움입니다. 이 싸움을 잘 싸워야 선한 싸움에서 승리할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때 미국에서 순위 6번째인 쿠퍼스 & 라이브랜드 회계법인 회사에서 만나자는 연락이 왔습니다. 면접관이 이렇게 말합니다. “자네가 우리 회사에 와서 일하면 좋겠는데 어떤 조건이면 오겠느냐.” 그때 이분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크리스천인데 주일에는 출근해서 일할 수가 없습니다, 주일은 예배드릴 수 있도록 보장해 주시면 생각해 보겠습니다.” 얼마나 자신의 주관이 분명하고 뚜렷합니까. 오늘은 이런 사람을 사람들이 좋아합니다. 물론 하나님도 좋아하시고요. 그랬더니 그 말을 듣고 이 면접관이 아주 흔쾌하게 승낙을 해 주었습니다. 알고 보니까 그분도 크리스천이었습니다. 그래서 이 젊은이가 그 자리에서 마음을 결정합니다. 그리고 나와서 친구들에게 이 사실을 알립니다. 그랬더니 모두 너 제정신이냐, 너 정신 나간 것 아니냐 하고 말했습니다. 그도 그럴 수 있습니다.
여러분, 이것이 신앙인의 삶입니다. 이것이 신앙인의 결정이고 신앙인이 할 수 있는 선택의 기준이고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의 방법이고 장래를 결정하고 판단하는 기준입니다. 이런 마음 이런 삶의 자세를 하늘에서 주님께서 아신다면 그 마음을 얼마나 기쁘게 받으시겠습니까. 하나님은 이런 사람을 기뻐하십니다. 그런데 사람은 앞날을 한치 앞도 내다 볼 수 없는 한계가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세상을 길게 보고 하나님의 뜻을 구하며 살아야 합니다. 이 분이 그렇게 결정하고 직장생활을 하는데 인간인지라 조금은 아쉽다 하는 마음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일류회사인 아더 앤더슨 회사가 2001년에 엔론사건이라는 회사의 회계부정사건에 휘말려서 문을 닫고 말았습니다. 이런 불행한 일이 어디 있습니까.
그런데 이 사람이 결정해서 다니던 순위 6위였던 이 회사는 98년에 순위 5번째 프라이스 워터하우스라는 회사와 합병해서 지금은 첫 번째 순위에 오른 회사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통쾌한 일입니까. 그러니까 성경은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뜻을 구하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삶은 언제나 지금 현재는 손해 보는 것 같은 생각이 듭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고 난 후에 보면 그것이 옳은 길이었고 옳은 판단이었습니다. 그래서 시간이 흐른 후에 비로소 이런 통쾌한 감격을 느끼게 되고 이런 은혜를 경험하고 만나고 이루는 삶이 신앙인의 삶입니다.
그래서 이분이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나는 꼴찌를 선택했지만 하나님은 그 꼴찌를 일등으로 만들어 주셨습니다”. 이것이 신앙인의 삶의 기적이고 하나님의 섭리이고 능력입니다. 그러니 그 인생이 얼마나 행복하고 따뜻하고 즐거운 삶입니까. 내가 진정으로 예수를 알고 그 주님의 뜻을 이루며 살려고 힘쓸 때 주님은 우리에게 이렇게 다가오십니다.
세상을 보는 눈이 열림
예수를 알게 되면 또 한 가지 주어지는 은혜가 내 눈이 넓게 열린다는 점입니다. 그 열린 눈으로 세상을 보고 이웃을 보고 내가 할 일을 발견하게 되고 보통 때 보지 못하던 뒷면의 세계까지도 보게 되는 안목을 가지게 됩니다. 이것이 신비한 일입니다. 내가 예수를 알면 무엇보다도 너를 보는 눈이 뜨이게 됩니다. 그래서 평소에는 관심도 없던 너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게 됩니다. 그래서 함께 살고 섬기며 살고 돕고 나누며 살아가게 됩니다.
여러분, 세상에 가장 불행한 사람은 혼자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오직 나만의 삶을 위해서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일생을 자신만을 위해서 살아갑니다. 매사 혼자서 오직 나만을 위하여 살아갑니다. 그래서 누굴 위해서 기부금을 내본 적이 없습니다. 정말 봉사하고 위한 삶을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데 그 삶에 얼마나 큰 기쁨이 있는데 그것을 모르고 살아갑니다. 그것은 예수를 몰라서 그렇습니다.
서울 강남에 아파트 6채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 17만 명이나 된다고 합니다. 이분들은 모두 집값을 올리는데 직간접적으로 관여했을 것입니다. 이분들은 남들은 집이 있건 말건 내 집 값만 올라가는 것이 꿈이고 관심이고 목적일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이 세상에서 나누고 주고 함께 살고 더불어 살아가는 삶에서 주어지는 행복한 마음을 알겠습니까. 그러니까 이 사람들은 집이 몇 채씩 있어도 참 불행한 사람들입니다. 겉에서 보면 많이 가지고 있어서 좋겠구나 하고 생각되겠지만 실상은 참 불행한 사람들입니다. 진정한 부요함은 소유에 있는 것이 아니고 주는데 있다는 것을 알 수 없습니다. 우리나라는 이 주는 기부문화가 참 미숙합니다. 그러니까 소유함으로 만족하려고 하지 기부함으로 누리는 은혜와 기쁨과 행복을 모르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래도 우리 한국에 기부문화를 일으킨 것은 기독교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교회에 헌금하는 생활을 통해서 이 기부문화가 어느 정도 정착되게 되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매주일 교회에 나오며 헌금하고 11조 드리고 선교헌금 드리는 이 헌금생활을 통해서 주고 나누고 드리는 이 기부훈련을 받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 이것이 보통 훈련인줄 아십니까. 믿지 않는 사람들은 그리스도인들이 11조 드리는 것을 보고 놀랍니다. 당연히 드리고 나누는 일을 해보지 못한 사람들로서는 놀랄 일입니다. 그래서 정부가 발표한 각종 기부금액을 보면 기독교가 단연 으뜸입니다.
2002년도에 홍수가 나서 전국을 쓸어갔을 때 각종 단체에서 수재의연금을 거두었는데 그 통계를 보면 불교는 1,300개 사찰에서 모은 것이 13억원이었습니다. 천주교는 57개 성당에서 거둔 것이 3천 5백만 원이었습니다. 그런데 기독교는 4,875개 교회에서 거둔 것이 53억원이었습니다. 또 대구지하철 참사 때 모금된 성금을 보아도 마찬가지입니다. 불교는 439개 사찰에서 모은 것이 3억 9천만 원이었고 천주교는 42개 성당에서 모은 것이 2억 2천만 원이었고 기독교는 3,567개 교회에서 모은 것이 34억 5천만 원이었습니다. 그리고 북한 돕기에 참여한 기부금 내용을 통일부가 집계한 통계를 보면 불교가 13억 3천만 원으로 3.5%였습니다. 천주교가 14억 3천만 원으로 3.8%였습니다. 그런데 기독교는 352억원으로 92.6%에 해당합니다.
우리들이 예수를 알고 살아간다는 것이 얼마나 생각이 열리고 눈이 열리고 마음이 열린 채 살아가고 있는지 알아야 합니다. 예수를 알면 세상이 보입니다. 옆 사람이 보입니다. 예수를 알면 내가 할 일이 무엇인지를 알게 됩니다. 그래서 오늘 읽은 본문을 보면 바울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그동안 내가 유익하게 여겼던 것을 모두 해로 여긴다, 왜냐하면 내가 예수를 알게 된 것이 무엇보다도 가장 고상한 지식이기 때문이다. 고로 나는 그동안 내가 소중히 여겨오던 것들을 모두 배설물로 여긴다. 그러므로 나는 예수께 더 잡히려고 달려간다”고 했습니다. 이렇게 살아가는 것이 그 시대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의 삶의 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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