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레미야2:13 골로새서 3:22~25
B. C. 627-586년의 유대 나라에 예언자 예레미야가 있었다. 유다 백성들에게 예레미야의 경고는 철저하게 하나님의 진실하신 약속들과 관련된 촉구이다.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약속에 대하여 그들의 풍요로운 미래를 보증하고 있고 그러기 위해서는 유다에 대한 하나님의 뜻과, 도덕적 죄악상을 열거하고 하나님의 심판을 예고함으로 백성들의 회개를 촉구함에 주의한다. 그는 당시 백성의 의식 수준이 혼란에 혼란을 거듭해 가는 위기의 절정에 이르렀을 때 참된 삶의 가치를 외친 사람이다. 그로 인해 그는 많은 박해와 공격을 받기도 하였다. 그는 그 시대상을 가리켜 본문에 있는 대로 이렇게 말한다.
‘내 백성이 생수의 근원이 되는 나를 버리고 스스로 웅덩이를 파는데 물을 담을 수 없는 터진 웅덩이라’고 했다. 유다 백성이 하나님께 대하여 행한 두 가지 죄는 하나는 생명의 근원되는 하나님을 버린 것과 물을 저축하지 못할 정도로 죄악의 웅덩이를 파는 것이다. 그 웅덩이는 ‘터진 웅덩이’이다. 다른 번역자는 ‘밑이 빠져 새는 물통’이라 했다. 그 당시 백성들은 하나님의 뜻은 안중에도 없고 삶의 가치관은 돈이나 권력이나 출세나 성공 같은 것이었다. 그런 것은 모두 밑이 빠진 물통에 물을 붓는 것과 같다는 말이었음을 유의해 보는 것이다. 하늘의 뜻을 외면한 터진 웅덩이는 아무리 채워도 흘러 버리는 헛된 수고에 불과함을 일컫는 말이다.
그것은 실상 값없는 헛된 수고로 결국은 가진 것이 하나도 없음을 말함이다. 오늘의 우리의 현실에서 정치의 위기, 경제의 위기, 사회의 위기, 문화의 위기는 터진 웅덩이와 같은 것임을 일컫는다. 근대에 와서 급격한 사회변화의 물결 속에서 사회의 전반 분야가 특정 상황이나 문제에 부딪히게 되는 이유는 참된 가치 판단을 할 수 있는 능력을 상실하고 말았음을 알게 한다. 어느 시대에나 그 사회의 문제는 그 시대를 사는 사람의 가치관에 있음을 알게 한다. 그럼으로 어느 시대나 그 사회에 속한 사람이 문제가 된다. 시대는 언제나 사람의 인성(personality)과 개성(individuality) 모두를 갖춘 사람을 요구하는 시대이다.
인성은 일반적으로 말해서 사회성과 밀접한 관계에 연관되어 있고 개성은 이런 인성을 바탕으로 형성된 개인의 고유한 특성과 특징을 의미하기에 개성은 이 최소한의 바탕위에서 다른 사람과 구별되는 문양(文樣)이면서도 다양성속의 화해의 관계를 이루는 것이다. 그러므로 바울처럼 ‘나의 나됨’은 하나님의 은총으로 도덕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인정받을 수 있는 성품과 지성과 덕이 겸비한 사람이어야 함을 알게 하는 것이다. 특히 요즘처럼 어떤 특정 상황이나 문제가 표출 될 때 논리적이고 종합적인 비판적 합리성이 가치판단을 이루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그 가치판단을 할 수 있는 능력을 배제한 채 논쟁적인 이슈만을 고집하는 사람의 마음들을 우리는 보는 것이다.
그럼으로 지금 이 사회는 어느 문제에 부딪히면 찬성과 반대의 의견으로 나뉘어 절대적인 자기주장만 능사인양 고집하는 작태는 우리 모두를 적대 감정으로 만들고 있음을 아는 것이다. 종국에는 이것은 예레미야의 말대로 하나님의 심판의 웅덩이를 얻는 것이다. 독일 사람들이 예로부터 생활철학으로 살아 온 말을 빌리면 ‘사람은 자기 자신에 대해 성실’이라는 것이다. 이 말은 인간 모두에게 요구되는 생활태도라고 믿는다. 자기 자신에게 항상 성실하고 다른 이에게 진실한 삶을 보여주는 것은 사회를 밝게 하는 시금석이 되는 것이다. 자기의 양심과 신념, 진실에 속이지 않고 양심이 명령하는 바에 따라 생활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세상에는 흔히 자기 일은 선반에 올려놓고 남의 일만 헐뜯는 사람이 적지 않다. 자기 자신에 성실한 사람만이 남의 불성실을 비난할 수 있고 또 그럴 때에만 그 비난은 수긍이 가고 받아들여질 수 있는 것이다. 요즘 세태를 곁들어 보면 자기는 비민주적이면서 남의 비민주적인 것을 비난하고 그 비난은 비난을 위한 비난에 그치는 것이며 비난이 목적하는 바는 실현 될 수 없는 것이다. 오히려 자기 자신에 대해서는 성실하면서 남의 잘못에 대해서는 아량을 보여 주며 진실을 말해 주는 자세는 존경받는 생활 자세이며 영향력을 지닌 몸가짐이라 할 수 있다. 이것이 터진 웅덩이를 메우는 것이다.
맹자(孟子)도 ‘진기심자 지기성야(盡其心者知其性也)’라 했다. ‘마음을 다하면 본성을 안다’는 말이다. 진(盡)은 성(誠)을 생각하게 한다. 성(誠)은 충(忠)으로도 통할 수 있다. 내 마음이 선을 향해 정성을 다하는가? 이렇게 진기심(盡其心)은 나에게 질문한다. 성(誠)은 진실이 곧 사실임을 뜻한다. 있는 그대로일 뿐 덜거나 더하지 않는 마음이면 성(誠)이다. 그런 성에 의지해 생각하고 행동하면 충(忠)이라 한다. 그래서 성(誠)을 하늘의 길이라고 한다. 하늘의 길이 선행인 것임을 알게 한다. 그러므로 마음을 다하라 함은 선(善)을 행함에 마음을 다 쏟으라 함이다. 마음을 다하라 그러면 본성을 안다.
그것이 지기성(知其性)이다. 본성(本性)은 존재하는 이치이다. 맹자는 그 이치를 선(善)이라고 했다. 나는 선한 존재이지 악한 존재가 아님을 알아야 한다. 그러면 본성을 안다. 그러면 바로 진기심이 지기성 으로 통한다. 나는 성실한 인간인가? 아니면 적당히 모면하려는 인간인가? 스스로 가늠하는 인간이 되어야 한다. 신약 본문의 내용은 당시 로마 사회는 노예제 사회였다. 사회적 모순에 반감을 가진 노예들은 주인의 가정을 파괴하고 노예에 의해 빚어지는 강간이나 살인이 빈번 하였다. 노예제도는 당시 심각한 사회문제로 대두되어 교회에서도 노예와 상전 사이의 갈등이 표면화 되었다. 그래서 주종간의 윤리가 심각하게 되었다.
여기에 바울은 성실의 의미를 갖게 하는 것이다. 세상에 자기가 주인 인양 행세 하려는 자들에게 그리스도 안에서 새 사람 된 자들의 새로운 질서를 권유한다. 인간은 상호 책임적 존재임을 알게 하고 삶의 기준을 그리스도에게 두어야 함을 알게 한다. 바울은 골로새 교회를 혼란케 한 그리스도의 인성(人性)혹은 신성(神性)을 통해 그리스도는 만물의 중심이요 으뜸으로서 인간 구속을 위해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이요 동시에 참 인간임을 강조했다. ‘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을 다하여 주께 하듯 하고 사람에게 하듯 하지 말라. 오직 주를 두려워하여 성실한 마음으로 하라’는 본문의 말씀이 마음에 와 닿는다. 성실한 인간은 하늘을 안다.
이는 만물이 존재하는 모습을 말함이며 숨통이 통하는 것이 삶임을 알게 하는 것이다. 하늘을 거역하는 죄는 자기 숨통을 조이는 것이 된다. 숨구멍을 막는 짓을 하지 말아야 한다. 숨구멍을 트는 것이 성(誠)이다. 사랑하면 통하고 미워하면 막힌다. 정직하면 통하고 속이면 막힌다. 베풀면 통하고 빼앗으면 막힌다. 수수하면 통하고 꾸미면 막힌다. 이러한 삶을 엮어가는 것이 명암(明暗)이 아닌가 한다. 두루두루 더불어 어울려 산다는 마음이 성실함이다. 이 마음은 닫힌 마음을 열기도 하고 서로 화해할 줄도 안다. 삶을 통하게 하고 삶을 막히게 하지 말아야 한다. 이것이 삶을 사랑하는 방법이요 사람이 살아가는 길이다.
오늘의 우리 사회는 혼란의 틈을 노리는 형태를 보고 우려하는 마음을 갖는다. 먼저 앞장서서 솔선수범해야 할 사람이 순수성을 잃고 물량적 욕구 충족과 세속적 목적의식에서 순수성을 망각한 함부로 행동 하는 것을 본다. 성실해야 할 인간이 자기 자신을 기만하여 진실을 외면하는 비진실성은 터진 웅덩이에 물 붓기나 마찬가지이다. 사회전반이 이러한 작태로서 연계하여 너도 나도 거짓과 불의로 누벼 가고 있다. 이것은 신뢰회복과 안정과 화해로의 길이 아니고 ‘터진 웅덩이’처럼 마냥 수고도 없이 상실해 버리는 결과가 되고 만다. 성실과 진실이 통하는 사회 그것은 우리 모두의 소망인 것이다.
우리 사회는 믿을 수 없는 인간과 믿고 살 수 없는 세상이 되어 버렸다. 이것은 하나님의 질서를 거역하는 길이며 인간의 길에서 역행하는 현상이다. 인간이 인간답게 살아가도록 하기 위해서는 믿을 수 없는 세상을 믿고, 믿고 사는 세상으로 바꾸도록 기도해야 한다. 신학자 폴 틸리히는 현대를 일컬어 세 가지 말로 표현한다. ‘깨어진 공동체’ ‘소외된 인간’ ‘조각난 사람들’로 표현 한다. 이 세 가지 말을 종합해 보면 현대를 ‘터진 웅덩이’로 표현함 일 것이다. 바울은 그리스도의 부름에 합당하게 서로 하나 되는 일에 힘쓸 것을 당부한다. 그리고 바울은 공동체를 이루는 방법으로서 겸손하고 온유하며 관용하고 인내하고 오직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좇아 행하라고 하심에 유의한다.
삶의 자리에서 구원은 소박하면서도 구체화 한다. 삶이 놓여 있는 그 자리에 실존적 상황과 사회적 조건과 역사적 정황을 전제하고 구원이 절실히 요구되는 어려움의 상황에서 구원의 현재성은 구원 자체의 인간적인 성격에서 그대로 드러나야 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예컨대 물에 빠진 사람에게는 물에서 건지는 것이고 병에 걸리는 사람에게는 그 병이 낫는 것이며 먹을 것이 없어 굶주린 사람에게는 밥을 먹는 것이고 목마른 사람에게는 물이 구원일 것이다. 갇힌 자에게는 해방이, 눌린 자에게는 자유가, 빼앗긴 사람에게는 제 몫을 찾는 것이, 짓밟힌 사람에게는 일어서는 것이, 인권을 잃은 자에게는 인권을 되찾는 것이 구원일 것이다.
이런 시대에 삶의 구원을 일반화 시켜 말하면 인간화로 하나님의 구원의 실현이라 할 것이다. ‘터진 웅덩이’가 되어버린 이 사회에 인간스러움의 작업은 무엇인지 조금은 알 것 같다. ‘예수 믿고 사람 되자’라는 말은 조금은 아는 것인가 한다.
출처/배성산 목사 설교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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