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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정한 예배를 드리는 이! (요4:23-24)

by 【고동엽】 2022. 1. 4.
진정한 예배를 드리는 이! (요4:23-24)
  우리의 신앙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요? 기도일까요? 물론 기도는 정말 중요합니다. 기도없이는 아무 것도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헌금일까요? 물론 헌금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봉사일까요? 사랑일까요? 다 중요합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보다 예배입니다. 왜 예배가 가장 중요할 가요? 예배의 뜻은 <하나님을 섬긴다> 그런 뜻입니다. 대통령이 장관으로 자기 옆에 사람을 부르는 것은 자기를 도우라고 부른 것입니다. 대통령을 도우라고 부름받은 장관이 대통령을 돕지 못 하면 파면입니다.
하나님을 섬기라고 하나님은 사람을 창조하셨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섬기지 못 하면 버림받아야 합니다. 사람의 목적은 하나님을 섬기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예배하여야 합니다.
오늘 본문으로 들어 갑니다. 예수님께서 수가성이라는 동네를 지나실 때였습니다. 목이 마르셨습니다. 우물이 깊었습니다. 드레박이 없이는 물을 마실 수가 없었습니다. 누가 물을 길러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 때 한 여인이 물을 길러 왔습니다. 사마리아 여인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물을 달라고 하셨습니다.
그 여자가 말했습니다. <당신은 유대인으로서 어찌하여 사마리아 여자 나에게 물을 달라 하나이까>(요4;9) 이런 이야기 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아버지께 참으로 예배하는 자들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지니라>(요4;23-24)
얼마 전에 미국 워싱턴에 들어 가서 이런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크린턴 대통령 시절이 미국에서 가장 경제적으로 부흥하였던 시기였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역사상 가장 추잡한 소문을 낸 대통령이 크린턴 대통령이었다는 것입니다. 음란한 대통령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크린턴 대통령을 축복하셨습니다. 그 이유는 크린턴 대통령은 예배를 귀중히 여기는 이였기에 하나님이 그를 축복하신 것이라는 것입니다.
한번은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토요일 밤에 워싱턴에 눈이 3 m가 내렸습니다. 웬만한 집은 눈속에 파묻혔습니다. TV에서 방송이 되었습니다. 모두 움직이지 말라는 것입니다. 눈속에 묻히면 찾을 수가 없기에 죽는다는 것입니다. 집에서 TV로 예배를 드리라는 보도였습니다. 모두가 예배를 안방에서 드려야 했습니다.
그 때 크린턴 대통령은 이 교회 저 교회로 전화를 하였습니다. 예배를 드리는 교회를 찾은 것입니다. 그 때 워싱턴에 조그만 감리교회는 목사 주택과 교회와 붙어 있기에 목사님이 전화를 받고 “우리 교회는 나 혼자라도 예배를 드릴 것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목사님이 예배를 드리러 나가 보니 그 많은 눈을 헤치고 크린턴 대통령이 예배드리러 나와 앉아 있었습니다. 이렇게 예배를 중요시여기는 것을 하나님이 보시고 하나님이 크린턴 대통령을 축복하셨다는 소문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예배를 잘 드리는 사람을 축복하십니다.
오스트리아에 갔더니 기독교가 조상부터 뿌리깊게 자리잡고 있습니다. 그래서 주일에 장사하거나 일하는 이는 400만원 가량의 벌금을 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교회는 텅텅 비어 있었습니다. 수 천명 들어가는 교회에 30명 가량 앉아서 예배드리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예배가 살아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유럽이 점점 타락하고 있습니다. 예배가 살아지는 곳에는 하나님도 떠나십니다. 지금 온 세계는 중국을 주시하고 있습니다. 잠자는 사자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중국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중국은 예배가 살아나고 있습니다.
전 병욱 목사님이 쓴 글을 읽었습니다. 그가 중국에 갔더니 어떤 찬송가는 99절이었습니다. 이 찬송을 다 불렀습니다. 한참 걸렸습니다. 다 부르고 나 더니 은혜 스러우니 다시 한번 부르자고 말하는 데 하품을 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신나게 찬송을 부르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하나님은 예배를 잘 드리는 사람을, 예배를 잘 드리는 교회를, 예배를 잘 드리는 국가를 축복하십니다.
그러면 어떤 예배가 참된 예배입니까? 어떤 예배가 참된 예배인가를 알기 위하여 어떤 예배가 참된 예배가 아닌가부터 알아 보아야 합니다.


1. 예배 출석이 예배가 아닙니다.
예배 시간에 예배드리는 현장에 앉아 있었으면 예배드린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이는 출석자이지 예배자가 아닙니다.
어느 장로님 아들이 교회 출석을 싫어 하였습니다. 장로님은 억지로 손을 잡고 끌고 다녔습니다. 그러던 중에 장로님이 외국으로 출장가게 되었습니다. 아들에게 말했습니다. “너 아버지가 없더라도 주일에는 꼭 교회에 가야 한다” “알았어요” “아빠가 전화로 확인한다” “알았어요” 월요일 아버지가 국제 전화로 아들에게 물었습니다.
“너 어제 예배드렸니?” “네” “누가 기도했어?” “늦게 가서 몰라요” “목사님은 무슨 설교하셨니?” “졸아서 몰라요” “헌금 기도는 누가했어?” “먼저 나와서 몰라요” 이것이 예배입니까? 장로님 아들은 예배에 출석한 것이지 예배를 드린 것이 아닙니다.
40대 아들과 60대 어머니의 대화를 들어 보십시오.
“어머니! 나는 예배드리기 싫은 세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 주일 아침은 늦잠 자고 싶어요. 둘째 장로님의 기도가 너무 길어요. 셋째 성가대의 불협화음이 싫어요”
어머니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배를 드려야 하는 세 가지 이유를 이렇게 말했습니다.
“첫째 예배는 선택이 아니라 의무다. 둘째 예배는 사람과 관계가 아니라 하나님과 관계다. 셋째 너는 담임 목사이까 결석하면 안 된다”
가인도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리고 바로 동생 아벨을 살인하였습니다. 인류 역사상 최초의 살인은 예배 후에 일어났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요. 예배를 드리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어떻게 드리느냐가 중요합니다. 예배 출석이 예배를 드리는 것은 아닙니다.


2. 사람 중심이 예배가 아닙니다.
예배의 중심은 하나님이지 사람이 아닙니다. 예배에서 나타나야 할 분은 오직 하나님 한 분입니다. 사람은 모두 숨어야 합니다. 사람이 나타나는 것은 예배가 아닙니다.
예를 들면 회갑 축하예배를 드립니다. 예배를 드리면서 하나님은 나타나지 않고 회갑을 맞은 사람이 주인공이 되면 예배가 아닙니다.
박사학위 축하 예배를 드리는 것을 종종 봅니다. 예배라는 말이 들어가면 하나님이 주인공이어야 하는 데 박사 학위를 받은 사람이 주인공이 됩니다. 그러면 이미 예배가 아닙니다. 차라리 <박사 학위 축하식>이라고 하면서 그 사람이 주인공이 되어야 합니다.
모든 기념예배가 그렇습니다. 사람이 주인공이 되는 예배는 예배가 아닙니다. 예배를 인도하시는 목사님은 예배 도중에 이상한 행동이 눈에 띄면 거기에 신경을 쓰느라고 실수하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대개 목사가 예배 때 실수하는 것이 이런 이유 때문입니다. 어느 목사님이 열심히 설교하는데 여 집사님 한 분이 일어났다 앉았다하며 두리번 두리번 하면서 사방을 살피는 것이었습니다. 목사님 눈에 거슬렸지만 교인들이 얼마나 왔나 수를 세어 보는 구나 하며 참았습니다.
예배 후에 여 집사님에게 왜그랬느냐고 물었더니 0집사 0집사가 그저께 곗돈 줄 날인데 아무 소식이 없어서 오늘 왔나 보려고 그랬다는 것입니다.
목사님이 물었습니다. “집사님 곗돈 받으러 온 것이요, 예배 드리러 온 것이요?” 그는 이렇게 대답하였습니다. “겸해서지요 뭐” 예배는 다른 것과 겸해져서는 안 됩니다. 이것은 예배가 아닙니다.
주일에 빠지는 일이 없는 권사님이 웬일인지 주일 예배에 나타나지 않았다. 목사님은 무슨 일이 있나 싶어 불러서 물었습니다. “이웃 교회에 가서 예배드렸습니다.” “이웃교회요” “네, 그곳에 볼일이 있어서요” “무슨 볼 일?” “목사님께서도 아시다시피 우리 막내 아들 며느리감을 구하고 있지 않습니까? 누가 소개하기를 소프라노 하는 두 번째 아가씨가 참하다고 해서 볼겸 그 교회에 갔었지요” 이 말을 들은 목사님이 한마디 하셨습니다. “그러면 예배를 드리러 간 것이 아니라 예배와 선을 보러 그러니까 구경하러 가셨었군요?” 이것은 예배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주인공이 되지 않는 예배는 예배가 아닙니다. 그러면 어떤 예배가 참된 예배일까요? 한 마디로 말씀드립니다.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예배가 참된 예배입니다.
예배는 보는 것이 아니라 드리는 것입니다. 예배보러 간다는 말 자체가 틀린 말입니다. 어느 자매님의 상담입니다. “목사님! 저는 예배를 드려야 하는 데 예배를 보고 있습니다. 목사님을 보고, 성가대를 보고, 꽃꽂이 한 것을 보고, 장로님이 기도하는 것을 보고 있습니다. 어떻게 하면 예배를 보지 않고 드릴 수가 있을 가요?”
어떻게 하면 예배를 보지 않고 신령과 진정으로 드릴 수가 있을 가요? 이 질문에 대하여 킬케콜이 명쾌한 대답을 주고 있습니다.
킬케콜은 관객과 배우 비유로 예배를 보는 자와 드리자는 구별하고 있습니다. 관객은 연극을 보는 자요, 배우는 연극을 드리는 자입니다. 예배에서 우리 모두는 배우처럼 드리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예배를 드릴 때 관객은 꼭 한 분 하나님밖에 없습니다.
우리 모두는 예배를 드리야 하고 하나님 한 분만이 예배를 보시는 것이 참된 예배입니다. 우리는 드리는 자요, 하나님은 보시는 분이십니다. 배우는 드리는 이요, 관객은 보는 이입니다.
그러면 배우가 가져야 할 자세를 살펴 보아야 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예배를 드릴가에 대한 해답을 얻을 수 있습니다.
1. 배우는 늦지 않습니다. 배우가 늦는 연극은 없습니다. 배우가 늦으면 연극이 되지 않습니다. 예배에 늦으면 이미 예배를 드리는 것이아닙니다. 보는 것입니다. 이것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를 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예배시간에 늦는 사람들은 이제부터 “나는 예배를 드리는 자가 아니라 보는 자다”라고 인정하여야 합니다.
2. 배우는 일찍 가지 않습니다. 배우가 일찍 가버리면 연극이 될 수가 없습니다. 배우가 가버린 연극이 어디 있습니까? 배우는 연극을 다 끝낸 후에 숙소로 돌아 갑니다. 이것이 연극을 드리는 자세입니다. 먼저 가면 안 됩니다. 이것은 예배가 아닙니다.
3. 배우는 졸지 않습니다. 배우가 졸면 연극이 되지 않습니다. 관객은 졸아도 표시가 나지 않습니다. 배우가 졸면 연극이 될 수 없습니다. 우리는 배우가 졸면서 연극하는 것을 볼 수가 없습니다. 예배시간에 조는 이는 예배를 드리는 이가 아니라 예배를 보는 이입니다. 세례 요한이 소속되어 있던 쿰란 공동체는 예배 시간에 조는 이에게는 한 달 간 예배시간에 출석하지 못 하는 규정을 두었습니다. 조는 이는 예배를 드리는 사람이 아닙니다.
4. 배우는 연극의 내용을 분명히 파악합니다. 배우는 대사를 암기합니다. 그리고 분명히 연극의 흐름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관객은 대사 몇 개 쯤 못 들어도 괜찮습니다. 예배를 드리는 사람은 설교 내용을 정확하게 파악합니다.
집에 돌아가서 예배를 드리지 못 한 사람에게 전달할 수 있을 정도로 정확하게 파악하여야 예배를 드리는 사람입니다. 무슨 말을 하였는 지 모르는 사람은 예배를 드린 사람이 아니라 예배를 본 사람입니다. 그 날 예배 내용을 모두 정성을 다 하여 파악하여야 예배를 드린 사람입니다.
5. 배우는 감정을 줍니다. 감정을 주는 이가 배우요, 감정을 받는 이가 관객입니다. 배우는 울리고 관객은 웁니다. 배우는 웃기고 관객은 웃습니다. 배우는 슬프게 하고 관객은 슬퍼합니다. 감정을 줄 줄 아는 이가 배우입니다.
예배시간에 감정을 줄 줄 알아야 예배를 드리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을 만나는 감격에 흥분할 줄도 알아야 합니다. 벅찬 감격에 소리를 지를 줄도 알아야 합니다. 너무 좋아서 박수를 칠 줄도 알아야 합니다. 손을 들고 찬송할 줄도 알아야 합니다.
배우는 행동합니다. 관객은 구경만 합니다. 나는 LA에 있는 포도원 교회에 가서 예배를 드린 적이 있습니다. 거룩한 무질서를 달라는 기도를 하고 예배가 시작되었습니다.
예배 시간이 보통 4시간입니다. 목사님은 정장을 하지 않았습니다. 티셔스를 입고 올라가 같이 찬양을 합니다. 온 교인들이 하나가 되어 즐겁게 찬양을 합니다. 완전 찬양의 도가니입니다. 그러다가 통성 기도를 합니다. 정말 거룩한 무질서의 도가니입니다.
딩굴며 기도하는 사람, 방언으로 기도하는 사람, 일어서서 기도하는 사람, 앉아서 기도하는 사람, 엎드려서 기도하는 사람, 손을 들고 기도하는 사람, 각양 각색입니다. 거룩한 무질서의 예배입니다.
조용히 앉아서 축구를 구경하던 수만명이 공을 골에 넣고 나면 야단 법석을 하는 것과 같습니다. 일어서서 모자를 던지고, 손수건을 흔들고 야단들입니다. 예배도 마찬가지입니다. 감정을 줄 줄 아는 이가 예배를 드리는 사람입니다.
6. 배우는 아무렇게나 옷을 입지 않습니다. 배우는 배우의 옷이 있습니다. 그러나 관객은 자기가 입고 싶은 대로 옷을 입습니다. 아무렇게나 옷을 입고 예배하는 사람은 예배를 드리는 사람이 아니고 예배를 보는 사람입니다. 좋은 옷을 입으라는 것이 아니라 정성스럽게 입어야 합니다.
대통령을 만나러 간다면 옷에 한번 정도 신경을 쓸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을 만나는 예배를 드릴 때에는 옷에 신경을 써야 합니다. 배우는 옷에 신경을 씁니다.
7. 배우는 관객을 만족케 하는 데 온 정신을 집중합니다. 배우의 존재 목적은 관객을 만족시키는 데 있습니다. 관객을 실망시키는 배우는 배우로서 가치가 없습니다. 배우의 생명이 길지 못 합니다. 그러나 관객들에게 인기가 있으면 배우의 생명은 길게 됩니다.
그러나 관객은 배우를 통하여 만족을 얻고 싶어합니다. 나는 몇 달 전에 <난타> 뮤지컬을 관람하였습니다. 그야말로 난타입니다. 식당에서 일어난 일입니다. 식당에서 일하는 이들이 각각 자기가 가지고 있는 주방 도구를 가지고 막 두드리는 뮤지컬입니다.
칼을 가진 요리사는 칼로 배추 무를 막 잘라 버리는 장면입니다. 그릇을 가진 사람을 그릇으로 막 부서져라 두드립니다. 물병으로 난타하는 이도 있습니다. 관객들로 하여금 가지고 있는 스트레스를 모두 시원스럽게 풀고 가게 합니다. 나오면서 모두 웃으며 통쾌하게 나옵니다. 그러니까 몇 년 동안 난타를 공연할 때마다 만석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배우는 관객들을 만족시켜야 합니다.
드리는 예배는 하나님을 만족하게 하는 데 최선을 다 하여야 합니다. 드리는 예배는 드리는 데 즐거워야 합니다. 나는 이야기만 들었습니다.
미국에 크렌샤 크리스챤 교회(Crenw Christian church)가 있답니다. 헌금시간이 길기로 유명한 교회입니다. 예배 순서중에 헌금 시간이 되면 모두 헌금 봉투를 꺼내 들고 옆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눕니다. 십일조 얼마를 하게 된 동기, 감사 헌금을 드리는 명목을 이야기하면 옆 사람이 그런 이유로 감사헌금을 드리느냐고 감탄하면서 같이 축하하여 줍니다.
때로는 기도제목을 적은 헌금 봉투 들고 기도제목을 이야기하면 옆 사람이 그 사람을 위하여 기도하여 주기도 합니다. 10분 가량이 이런 시간을 가진 후 헌금 위원이 헌금함을 가지고 다가 오면 헌금위원에게도 이 헌금을 드리게 된 동기를 이야기하면 헌금 위원들이 헌금을 받으면서도 또 기도하여 줍니다. 사로 격려하고 기도하며 헌금을 드립니다.
헌금시간이 감격과 흥분의 시간입니다. 예배를 드리러 온 사람들이기에 드리는 시간을 즐겁게 여깁니다. 우리나라 성도들은 예배를 드리러 오는 것이 아니라 오면서부터 은혜를 받으려고 합니다. “오늘 하나님께 예배를 드려야지”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오늘 은혜를 받아야지”라고 마음 가짐을 가지고 오게 됩니다.
이제부터는 예배를 하나님께 드리러 온다는 마음으로 바뀌어야 합니다. 예배의 관객이시고, 예배의 주인공이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에 온통 정신을 집중시켜야 합니다.
나는 얼마전 우리 연회에서 생긴 일을 기억합니다. 연회를 보통 2일간 합니다. 그 중에 여러 안건이 처리됩니다. 그리고 일년 동안에 돌아 가신 목사님들의 유가족을 모시고 합동 추도 예배를 연회원들과 함께 드리는 순서가 있습니다.
미리 순서가 나갑니다. 그 시간이 되면 유가족들이 몰려 옵니다. 그런데 그 때까지 회의 안건이 끝나지 않았습니다. 의견이 일치되지 않아서 격론을 벌리면서 서로 삿대질까지 하면서 싸우던 중에 유가족들이 몰려 들었습니다.
그 때 감독님이 말씀하셨습니다. “회원 여러분! 추도 예배를 드리는 시간입니다. 유가족들이 다 오셨습니다. 회의를 잠시 중단하고 유가족들과 함께 추도예배를 드리고 회의를 속개하겠습니다” 모두가 회의를 중단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리고 회의석을 치우고 강대상을 옮겨 놓고 예배위원들이 등단하고 예배를 정중하게 드렸습니다. 싸우던 분위기가 엄숙한 추도예배 분위기로 바뀌었습니다. 유가족들의 울음소리는 분위기를 더욱 숙연하게 하였습니다. 예배를 마쳤습니다. 그리고 유가족들이 회의장을 떠났습니다.
그리고 다시 회의가 속개되었습니다. 서서히 잠시 추도예배 전 분위기가 살아 났습니다. 다시 싸움판이 되었습니다. 이것이 진정한 예배일까요? 하나님께 예배를 드렸으면 하나님의 성품이 임재하여야 하는 것이 아닐 가요?
예배 전에 싸우던 마음을 용서를 빌고, 용서를 하고 예배를 드려야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예배가 되지 않을 가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예배가 되는 데 온 마음이 집중되어야 드리는 예배가 됩니다. 그렇습니다. 배우같은 예배는 드리는 예배이고 관객같은 예배는 보는 예배입니다.
배우는 어떤 마음을 가집니까? 1. 드리는 예배는 배우같이 늦지 않습니다. 2. 드리는 예배는 배우같이 일찍 가지 않습니다. 3. 드리는 예배는 배우같이 졸지 않습니다. 4. 드리는 예배는 배우같이 연극의 내용을 분명히 파악합니다. 5. 드리는 예배는 배우같이 감정을 줍니다. 6. 드리는 예배는 배우같이 아무렇게나 옷을 입지 않습니다. 7. 드리는 예배는 배우같이 관객을 만족케 하는 데 온 정신을 집중합니다.  
출처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글쓴이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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