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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설교〓/설교.자료모음

신의 성품에 참여할 자(1) (벧후 1:4-7)

by 【고동엽】 2022. 1. 4.
신의 성품에 참여할 자(1) (벧후 1:4-7)
  에릭 후롬은 <사랑의 기술>(The art of love)라는 책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그 사람을 사랑한다는 것은 그 사람속에 들어 있는 자기를 사랑하는 것이다. 자기 마음에 드는 것이 없으면 그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
우리나라 흘러간 유행가중에 이런 노래가 있습니다. <노란 샤쓰입은 말없는 그 사람이 어쩐 지 맘에 들어. 어쩐지 나는 좋아. 미남은 아니지만 씩씩한 생김생김 어쩐 나는 좋아. 어쩐지 맘에 들어> 그 사람이 마음에 들까요?
이 노래를 부르는 사람은 좋아 하는 것이 있습니다. 1. 노란 색을 좋아 합니다. 2. 말없는 것을 좋아 합니다. 3. 씩씩한 것을 좋아 합니다. 자기가 좋아 하는 요소가 그 사람속에 들어 있기에 그 사람을 좋아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어떤 사람을 좋아 하실까요? 하나님의 성품을 가진 사람을 하나님은 좋아 하십니다. 하나님은 신에 성품에 참예하는 사람을 좋아 하십니다. 하나님이 좋아 하시는 성품을 가진 사람을 하나님은 좋아 하십니다.
오늘 본문은 이렇게 시작하고 있습니다. <이로써 그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을 우리에게 주사 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너희로 정욕을 인하여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여 신의 성품에 참예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하셨으니>(4)
<신에 성품에 참예하는 자>라는 말씀이 눈에 들어 옵니다. 신에 성품은 어떤 것일까요? 기본적인 믿음에 7가 성품을 닮아 가는 것이 신의 성품에 참예하는 것입니다.
은행에 가면 돈을 얼마 저금할 것인지 얼마나 찾을 것인지만 묻습니다. 학력을 묻지 않습니다. 나이도 관계없습니다. 남녀도 구별이 없습니다. 건강 유무도 상관하지 않습니다. 다만 돈만 얼마 저금할 것인지 묻습니다.
우리가 천국문에 들어서면 하나님은 꼭 한 가지만 물으십니다. "너 예수님이 너의 죄를 사하여 주신 구세주인 것을 믿느냐?" <어느 대학 나왔느냐?> 묻지 않습니다. <세상에서 직업이 무엇이었느냐?> 묻지 않습니다. <몇 살 살다가 왔느냐?> 묻지 않습니다. <건강이 어떠냐?> 묻지 않습니다. <어느 나라에서 살다 왔느냐? 묻지 않습니다. 오직 믿음만 있으면 구원 받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언제나 말씀하셨습니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라" 그런데 이 믿음에는 7가지를 잘 더하여야 신에 성품에 참예하는 자가 됩니다. 믿음에는 더 하기를 잘 하여야 합니다.
어느 어머니가 아이를 데리고 교회에 갔습니다. 아들은 앞에 있는 십자가를 보더니 소리를 질렀습니다. "엄마! 저기 더하기 표가 있네" 그렇습니다. 십자가는 더하기입니다. 믿음은 더하기입니다.
다음과 같은 7가지가 신의 성품입니다. 베드로는 하나님의 성품을 잘 알려 주고 있습니다. <이러므로 너희가 더욱 힘써 너희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지식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경건을, 경건에 형제 우애를, 형제 우애에 사랑을 공급하라>(벧후1;5-7)
무지개는 7가지 색갈이 합하여 무지개가 됩니다. 도래미파솔라시 7음이 합하여 음악이 됩니다. 신의 성품은 다음 7가지 요소가 합하여야 합니다. 신의 성품을 하나 하나 살펴 보려고 합니다.


제1 성품 덕
덕이라는 말은 아레테라고 헬라어로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이 단어는 덕중에 최고의 덕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은 덕이 있으신 분이십니다. 십자가에 죽으시면서도 자기게 침을 뱉는 이를 위하여 기도하시는 덕은 최고의 덕입니다. <저들이 하는 일을 저들도 모르오니 용서하여 주옵소서> 이는 최고의 덕입니다.
예수님의 덕은 <원수까지도 사랑하라>는 한 마디로 표현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덕이 있으신 분이시기에 덕이 있는 사람을 좋아 하십니다. 덕을 가지는 것이 신의 성품에 참예하는 것입니다.
무엇이든지 정도가 있습니다. 최고 지선의 덕을 아레테라고 말합니다. 용장보다는 지장이 낫고 지장보다는 덕장이 낫다고들 합니다. 그만큼 사람들은 사람들에게서 덕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
덕은 인격의 최고의 요소입니다. 사람은 덕스러워야 합니다. 조선조 명종 때 정승인 상진(尙震)은 관대하고도 도량이 넓은 사람을 가지고 있고 덕스러운 이로 잘 알려져 있었습니다. 그래서 남의 흉을 보는 적이 없었습니다.
어느 날 사랑방에서 누군가 다리 하나가 짧은 사람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상진은 말했습니다. <허허! 다리 하나가 짧다고 말할 것이 아니라 다리 하나가 길다고 말해야 하는 것이요>
하나님의 성품은 덕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덕스러운 사람을 좋아 하십니다. 말에서 덕이 나오는 것입니다. 학생이 싸웠을 때 선생님이 하시는 말들을 재미있게 모아 놓은 글이 있습니다.
국어 교사 : 주제도 모르고 쯧쯧쯧 영어 교사 : Oh! no! stop! 수학 교사 : 분수를 알아라, 분수를 음악 교사 : 말리지는 못할망정 서로 장단 맞추냐 윤리 교사 : 서로 배려하고 타협할 줄 알아야지 진로담당 교사 : 너희들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려고 그러니? 양호 교사 : 또 다쳤니? 또 다쳤어? 어휴~ 체육 교사 : 그것도 싸움질이라고 하냐? 국사 교사 : 조상님들 보기 부끄럽지도 않니? 세계사 교사 : 너희들이 싸운다고 이 세상이 달라지냐! 물리 교사 : 힘으로 싸우는 게 최고가 아냐 생물 교사 : 벌레만도 못한 놈들 반장 : 자꾸 싸우면 선생님한테 이른다 부반장 : 야! 반장이 선생님한데 이른대 말에는 인격이 들어 있습니다.
삼국지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정확한 이야기는 기억에 없지만 대략 다음과 같은 이야기입니다. 궁중에 대신들이 모여 파티를 한창 진행하고 있을 때였습니다. 왕비도 나와 있었습니다. 그런데 파티 도중에 불이 꺼졌습니다. 캄캄하여졌습니다.
그 때 어둠속에서 왕비의 비명 소리가 들렸습니다. "누가 나를 끌어 안고 입을 맞추고 있다" 왕비옆에 있던 대신이 왕비를 끌어 안고 있는 남자 상투를 빨리 칼로 잘라 쥐고 외쳤습니다. "왕비 마마! 걱정하지 마십시오. 불을 키면 그 놈을 잡을 수 있습니다. 그 놈의 상투를 내가 쥐고 있습니다. 상투가 잘린 놈이 범인입니다. 그 놈은 사형입니다" 그리고 불을 키려고 하였습니다.
그 때 왕비가 소리를 질렀습니다. "불을 키지 말라. 그리고 각자 자기 상투를 잘라라" 왕비의 명령이라 모두가 어둠속에서 자기 상투룰 자른 후에 불을 켰습니다. 꼼짝없이 잡힌 범인을 용서하여 주었습니다. 이것이 덕입니다.
하나님의 성품은 덕입니다. 예수님 앞으로 간음한 여인을 끌고 온 적이 있습니다. 모세의 율법은 간음한 여인이 현장에서 잡히면 재판이 필요없이 돌로 쳐 죽이라고 정하고있습니다. 사람들 손에는 돌이 들려져 있었고 얼굴에는 살인의 빛이 찬란하게 빛나고 있었습니다. 이들은 당당하게 말했습니다.
<선생이여 이 여자가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혔나이다. 모세는 율법에 이러한 여자를 돌로 치라 명하였거니와 선생은 어떻게 말하겠나이까>(요8;4-5)
예수님이 죽이라 하면 그 여자는 현장에서 죽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지금까지 원수까지 사랑하라고 가르친 말씀이 무효가 됩니다. 그 때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요8;7)
이 말을 듣고 모두 양심의 가책을 받아 들고 있던 돌을 하나하나 버리고 가버렸습니다. 예수님이 땅에 글을 쓰다가 일어나서 보니 아무도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그 여자에게 조용히 말씀하셨습니다.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요8;11)
예수님은 덕이 있으신 분입니다. 예수님의 성품은 덕입니다. 신의 성품에 참예하려면 덕을 가져야 합니다.


제2 성품 지식
하나님의 두 번째 성품은 지식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다 아시는 분이십니다. 심지어 머리털까지 몇 개 인지 다 알고 계시다고 하였습니다. 자기 머리이지만 자기 머리털이 몇 개 인지 아는 사람은 이 세상에 한 명도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모든 사람의 머리털도 세실 수 있으십니다. 그리고 중심을 아시는 분이십니다. 지식이란 헬라어로 그노스라고 합니다. 아무리 믿음이 있고 덕이 있다고 하더라도 지식이 없으면 잘못 가기가 쉽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그랬습니다. 바울은 예수님에 대한 지식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예수 믿는 이들을 죽이는 것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래서 열심히 예수믿는 이들을 핍박하였습니다. 그러나 다메섹에서 예수님을 만나고 나니 그것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에 대한 지식이 전혀 없었었음을 고백하게 됩니다.
지식이 없는 열심은 철로가 없는 기차같아서 아무대로나 가게 됩니다. 그래서 바로 믿으려면 지식이 있어야 한다고 베드로는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솔로몬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너희가 은을 받지 말고 나의 훈계를 받으며 정금보다 지식을 얻으라>(잠8;10) <사특한 자는 입으로 그 이웃을 망하게 하여도 의인은 그 지식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느니라>(잠11;9) <지혜 있는 자는 강하고 지식 있는 자는 힘을 더하나니>(잠24;5)
이같이 지식이 더 하여야 믿음은 믿음으로 완전하게 됩니다. 그래서 믿음에 지식을 더하여야 합니다. 그래서 호세아 선지자는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그의 나오심은 새벽 빛같이 일정하니 비와 같이,땅을 적시는 늦은 비와 같이 우리에게 임하시리라 하리라>(호6;3)
우리 나라 속담에도 아는 것이 힘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아는 것이 힘입니다. 한나는 하나님을 알되 낙망하지 않고 끝까지 기도하면 이루어 주시는 하나님으로 알고 있는 것이 힘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18년동안 아이를 낳지 못 하였어도 실망하지 않고 끝까지 기도하였습니다. 아는 것이 힘이었습니다.
히스기야는 불치병에 시달리고 있었습니다. 그 때 당시 최고의 선지자 이사야가 와서 하나님의 예정은 당신을 하늘 나라로 데리고 가시려고 하는 것이니 죽을 준비를 하라고 일러 주었습니다. 그러나 히스기야는 하나님은 아무리 예정하고 계시더라도 기도하면 예정도 바꾸어 주시는 하나님으로 알았습니다.
이렇게 아는 것이 힘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낯을 벽으로 향하고 눈물로 기도하였습니다. 하나님은 히스기야가 하나님을 알고 있는 그대로 예정을 바꾸어 주시고 15년의 생명을 더 연장시켜 주셨습니다. 아는 것이 힘입니다.
아브라함이 100살에 난 이삭을 모리아산에서 번제로 바쳤습니다. 그럴 힘이 어디에서 나온 것일까요?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정확하였기 때문입니다.
그 때 이삭을 잡아 하나님께 번제로 드린다 할 지라도 하나님은 이삭을 통하여 민족을 이룬다고 하셨으니 부활시켜 주실 것을 믿었기에 이것이 힘이 되어 이삭을 바쳤다고 성경은 밝히 말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시험을 받을 때에 믿음으로 이삭을 드렸으니 저는 약속을 받은 자로되 그 독생자를 드렸느니라. 저에게 이미 말씀하시기를 네 자손이라 칭할 자는 이삭으로 말미암으리라 하셨으니 저가 하나님이 능히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생각한지라 비유컨대 죽은 자 가운데서 도로 받은 것이니라>(히11;17-19) 하나님의 성품은 지식입니다.
작년 이 때 나는 이스라엘에 들어가서 한 달을 지냈습니다. 9월 11일 쌍둥이 빌딩 폭파 사건을 사건 한 복판에서 본 셈입니다. 온통 이스라엘이 수라장이었습니다. 예루살렘 곳곳 마다 비상이었습니다. 자고 일어나면 뉴스는 어디에서 몇 명이 죽었다는 뉴스였습니다.
이 때 예루살렘 거리에는 관광객이라고는 찾아 보기 어려울 때였습니다. 이런 때 우리는 적진인 아랍진영도 다녔습니다. 솔로몬이 1,000번제를 드린 기브온 산당을 군대가 진을 치고 있었습니다. 나는 그들에게 다가가서 말했습니다. "우리는 한국인입니다. 당신들 전쟁과 상관없습니다. 아무리 군대가 지키고 있는 곳이지만 우리를 구경하게 하여 주십시오"
그들은 내게 말했습니다. "맞다. 당신들은 우리 적이 아니다. 들어가서 돈을 쓰고 나와라" 우리는 그 어느 때보다 안전하게 관광을 하였습니다. 줄 설 필요도 없었습니다.
아브라함이 살아던 곳인 브엘쉐바에 가니 관광객이 없어서 박물관 문을 닫아 놓고 있었습니다. 나는 전화로 박물관 직원을 불러 내어 우리만 구경을 하였습니다. 갑옷도 입어 보았습니다. 박물관장이 직접 설명하여 주었습니다. 전시되어 있는 옛날 칼을 꺼내어 박물관장님과 칼싸움도 하였습니다.
저들은 우리 적이라는 것을 알고 전쟁중이었지만 그들에게 접근하여도 된다는 지식이 힘을 더하여 주었습니다. 지식은 힘입니다. 지식은 신의 성품입니다. 그렇기에 성경을 공부하여야 하고, 호세아 말대로 하나님을 힘써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알면 능력이 됩니다.


제3 성품 절제
절제는 헬라어로 엥크레이아라고 표현하였습니다. 엥크레이아라는 말은 자기 조절이라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의 성품은 절제입니다. 베드로의 귀를 자른 말고의 귀를 고쳐 주시는 것은 최고의 절제입니다. 자기 조절능력입니다. 하나님은 자기를 조절할 줄 알고 자기를 절제할 줄 아는 이를 좋아 하십니다.
모세도 믿음이 누구 못지 않게 충만하였으나 혈기가 있었습니다. 절제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사람을 죽이는 일까지 일어났습니다. 자기 조절을 못 하는 이는 믿음이 있더라도 실패하기가 쉽습니다. 10년 동안 정성껏 쌓아 놓은 교회를 한번 혈기로 다 흐트러뜨리는 이들이 있습니다. 모으기는 힘들어도 흩으러 뜨리기란 순식간입니다.
미국에서 일어난 일입니다. 아내가 홧김에 가출하였습니다.몇 일만 기다리면 다시 들어 올 것입니다. 그런데 그 순간의 화를 참지 못 하여 자식 둘을 저수지로 데리고 가서 묶어 빠뜨려 죽이고 자기도 죽으려다 구조대에 구조되었습니다. 자기 조절이 없습니다. 위기 관리 능력이 없습니다. 화를 처리할 줄 모릅니다. 감정의 폭팔을 제어할 능력이 없습니다.
믿음이 있더라도 절제가 없으면 믿음이 빛을 발하지 못 합니다.무엇이든지 절제가 있어야 합니다.조금 모자라도 조금 남아도 문제입니다.
그러면 왜 절제하여야 할까요?
(1) 시험에 들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절제하지 못 하면 마귀가 틈타게 된다고 바울은 말해 주고 있습니다. <서로 분방하지 말라 다만 기도할 틈을 얻기 위하여 합의상 얼마 동안은 하되 다시 합하라 이는 너희의 절제 못함을 인하여 사단으로 너희를 시험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고전7;5)
부부가 기도하려고 떨어져 사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그러나 너무 오래 떨어져 살면 절제하지 못 하여 시험에 들지 모르니 적당하게 떨어져 살라고 바울은 말하고 있습니다. 절제하지 못 하면 시험이 듭니다.무엇이든지 넘치거나 모자라면 문제가 됩니다.절제가 있어야 합니다.
노아는 과음(過飮)이 문제였습니다. 하와는 과식(過食)이 문제였습니다. 아간은 과욕(科慾)이 문제였습니다. 무엇이든지 지나치면 안 됩니다.절제하여야 합니다.
(2) 승리하기 위해서입니다. 우리는 모든 면에 승리하여야 합니다. 그런데 승리하려면 절제하여야 합니다. 절제없이 승리가 없습니다.
<내가 복음을 위하여 모든 것을 행함은 복음에 참예하고자 함이라. 운동장에서 달음질하는 자들이 다 달아날지라도 오직 상 얻는 자는 하나인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너희도 얻도록 이와 같이 달음질하라. 이기기를 다투는 자마다 모든 일에 절제하나니 저희는 썩을 면류관을 얻고자 하되 우리는 썩지 아니할 것을 얻고자 하노라>(고전9;23-25)
하나님의 성품은 절제입니다. 하나님은 절제하는 사람을 축복하시고 사랑하십니다.


제 4성품 인내
하나님의 네 번째 성품은 인내입니다. 하나님은 오래 참으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오래 참으시는 분이라고 베드로는 말해주고 있습니다. <주의 약속은 어떤 이의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치 않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벧후3;9)
믿음에는 인내가 더 하여져야 참된 믿음이 됩니다. 인내는 원어로 휴포모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휴포모네라는 인내를 크리소스돔은 <미덕의 여왕>이라고 불렀습니다. 미덕중에 가장 큰 미덕은 인내입니다. 인내보다 더 큰 미덕은 없습니다. 모든 일에 참는 것이 가장 큰 미덕이라는 말입니다.
성경은 예수님의 인내야 말로 인내의 극치라고 말해주고 있습니다.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 고통을 끝까지 참으셨던 그리스도의 인내가 온전한 인내라고 히브리서 기자는 말하고 있습니다.
<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경주하며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저는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히12;1-2)
예수님은 최악의 고통을 디딤돌로 삼으시고 영광의 건너편으로 넘으셨습니다. 미드라쉬 이야기입니다. 모세는 천사를 통해 하나님이 자기를 데려가시려는 계획을 알았습니다. 모세는 원을 그려놓고 그 원 밖으로 나가지 않고 515번을 기도했습니다.
하늘에 모세의 기도소리가 상달되자 하늘에서는 비상에 걸렸습니다. 하나님 귀에 모세의 기도가 들리지 않도록 문을 잠그는 소동이 일어났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모세가 그렇게 간절하게 그리고 그렇게 끈기있게 기도하는 것을 알았습니다.
천사들에게 모세를 데려오라고 했더니 천사들은 그렇게 기도하는 모세를 데려올 수 없다는 표정들이었습니다. 할 수 없이 하나님은 모세와 타협을 하셨습니다.
“네 장례에 내가 꼭 참석할 터이니 너는 내게 오기를 두려워 말아라” 모세는 하나님의 이 약속을 받고 기도를 포기하였습니다. 인내롭게 515번이나 기도하는 모세의 인내는 하나님의 성품입니다. 하나님은 참는 자를 좋아 하십니다.
세상을 살아가면서 정말 참기 어려운 일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참을 수 없는 것도 참는 것 휴포모네입니다. 참을 수 있는 것을 참는 것은 인내가 아닙니다.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입니다.
나는 지난 주간 철원 성소 기도원에 가서 집회를 인도하고 돌아 왔습니다. 그 곳에 한 분의 간증을 들었습니다. 목사님이 심방 가니까 할머니, 어머니, 딸이 모두 과부입니다. 그리고 어린 딸이 있습니다. 4대 여자만 앉아 있습니다. 내역을 물었습니다. 14대째 딸 하나만 낳고 남편은 죽었다는 것입니다. 가문에 흐르는 저주입니다. 목사님이 기도하는 데 그 가정을 마귀가 용수철같이 밧줄로 꽁꽁 묶어 놓고 있었습니다.
목사님은 이것이 이 가문을 묶고 있는 저주의 흐름임을 알았습니다. 매일 그 가정과 함께 3시간을 기도하였습니다. 용수철같이 매고 있는 저주가 끊어진다는 확신이 올 때까지 기도하기로 하였습니다. 하루에 3시간씩 그런 환상을 보일 때까지로 정하고 기도하였습니다. 피눈물나는 기도였습니다.
드디어 하나님께서 어느 날 기도하는 데 뚝하면 끊어지는 것을 보여 주셨습니다. 참고 끝까지 하는 자에게는 승리가 있습니다. 인내는 하나님의 성품이기에 인내하는 자는 하나님의 성품에 참예하는 사람이 됩니다.
출처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글쓴이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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