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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설교〓/설교.자료모음

박종순 목사 설교집 (11)

by 【고동엽】 2022. 1.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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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 차고 넘치는 교회

자료원 : 박종순 목사 충신교회 예장통합

구 절 : 슥 1:16-17

바벧론 포로에서 70년만에 귀환한 이스라엘 민족의 최대 과업은 무너진 성

과 성전을 재건하는 일이었습니다.

그 일을 앞장서서 추진하거나 이끈 선지자와 지도자들이 있었습니다. 그들

은 에스라,느헤미야,학개,스가랴 등이었습니다.

스가랴는 학개 선지자와 동시대를 살면서 예언활동을 폈습니다.

스가랴서의 내용은 크게 둘로 나뉩니다.

1-8장은 스가갸가 본 환상에 대하여,9장-14장은 예언에 관한 것입니다.

본문 16-17절은 70년만에 이스라엘 민족이 바벧론에서 예룻라렘으로 돌아

오게 된 이유와 예루살렘 성읍들이 받게 될 복에 대하여 예언하고 있습니

다. 그 내용을 구체적으로 살펴 보겠습니다.

 

1.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것은 하나님의 긍휼 때문이었습니다.

16절을 보면 "내가 긍휼이 여김으로 예루살렘으로 돌아왔은즉"이라고 했습

니다.

주전 586년 예루살렘이 바벧론의 침략으로 함락되면서 유다 민족이 포로로

끌려갔습니다. 그리고 70년동안 바벧론에서 포로생활을 해야 겠습니다. 유

다 포로들의 소망은 하루라도 빨리 해방되어 조국으로 돌아가는 것이었습니

다.그러나 자기들의 힘으로 해방되거나 자유를 얻는 것은 불가능 했습니다.

이유는 당시 바벧론은 세계 최대강국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신흥국가로

부상했던 페르시아의 고레스 왕이 주전 538년 바벧론을 멸망시키면서 유대

인들에게 해방을 주었고 즉시 예루살렘으로 돌아가 성전을 재건하도록 허락

했습니다.

이 사건을 스가랴 1:16은 "내가 긍휼히 여겼기 때문이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남이 해 주었을 때와 내가 해낼 수 없는 일을 도와

주었을 때의 고마움이나 감동은 비교할 수 없는 것입니다.

상상도 못했던 해방은 하나님의 섭리와 은혜였습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

이 그들을 긍휼히 보셨던 것입니다.

유다 민족이 바벧론 포로생활을 끝내고 고국으로 돌아올 수 있는 길은 두

가지 였습니다.

첫째는 싸워서 이기는 길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불가능했습니다.

둘째는 바벧론 왕이 특혜를 베풀어 주는 길입니다. 그러나 그것도 불가능

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페르시아를 일으켜 바벧론을 멸망시키시고 유다 민족을

해방시켜 주신 것입니다.

그러한 은혜는 비단 유다민족만 받은 것이 아닙니다. 나도 받았고, 여러분

도 받았습니다. 내 힘으로는 어림도 없었던 일들, 내 노력으로는 불가능했

던 그 일들을 하나님께서 해결 해 주셨습니다.

죄에서 건져 주셨고, 위기에서 보호해 주셨고, 시험에서 구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오늘까지 살게 해 주셨습니다.

우리는 흔히 내가 바라고 원하는 것을 성취했을 때 그것을 성공이나 축복

이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어떤 사람이 주택복권 10장을 매번 샀습니다. 그리고 당첨 되게 해 달라고

기도를 했습니다. 당첨만 되면 10의 5조는 하나님께 드리고 5조는 자기가

쓰겠다며 기도를 했지만 500장의 복권을 샀어도 당첨이 되지 않았습니다.

그는 "기도도 소용없고 쓸데없다"며 기도 무용론을 펴기 시작했습니다.이

기도가 옳은 기도입니까?

이태리의 경우 정초에 파는 복권을 30억 리라 짜리도 있습니다. 우리 돈으

로는 15억 정도가 됩니다.

그런데 그동안 30억 리라의 복권에 당첨된 40명을 추적했습니다.

 

 

 

놀라운 것은 단 한명도 잘 사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단명에 죽었거나 감옥

에 들어 갔거나 파산을 했습니다.

많다는 것이 무조건 좋은 것은 아닙니다. 40명의 이태리 복권 당첨자들의

경우만 보더라도 그들은 오히려 많이 가졌다는 것 때문에 불행해 졌습니다.

우리의 행복은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신다는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의 긍휼을 받으며 살고 있다는 것 그것이 은혜인 것입니다.

 

2. 그들이 돌아온 것은 하나님의 전을 건축하기 위해서였습니다.

16절을 보면 "내가 긍휼이 여김으로 예루살렘에 돌아왔은즉 내 집이 그 가

운데 건축 되리니 예루살렘 위에 먹줄이 치어지리라"고 했습니다.

그 뜻은 하나님께 그들을 긍휼히 여기시고 예루살렘으로 돌아오게 하셨는

데 그 이유는 예루살렘에 먹줄을 치고 무너진 성전을 다시 건축하게 하기

위해서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그 목적이 보다 거룩한 것이었습니다. 자기 집짓고 돈벌고 자

식낳고 70년 동안 억눌려 살았던 욕망을 터트리며 향락을 일삼기 위해 돌아

온 것이 아니었습니다.

우리에게는 두 가지 종류의 망각이 있습니다.

하나는 행복한 망각입니다.

지난 날의 불행했던 기억과 불쾌했던 감정들, 다시 말하면 더 이상 기억할

필요가 없는 것들을 잊어버리는 것은 행복한 망각입니다.

그러나 다른 하나의 망각은 불행한 망각입니다. 그것은 잊어선 안될 것들

을 잊어버리는 경우입니다. 예를 들면 지난 날 받았던 은혜라든지, 하나님

과의 약속이라든지, 가난하고 불행했을 때의 겸손한 자세라든지... 이런 것

들을 잊어버리는 것은 불행한 망각입니다.

그런 것들은 잊어버리면 안됩니다.

내가 오늘 왜 어떻게 여기에 있는가를 생각해 보십시다.

다시 말하면 나는 왜, 무엇 때문에, 살아 있으며 존재하는가를 생각해 보

아야 합니다.

돈벌고 잘 살고 일하고 놀고 먹고 마시는 것이 내가 존재하는 이유라면 예

수를 모르는 사람과 다를게 뭐가 있겠습니까?

70년 동안 유다 민족이 그토록 애타게 열망했던 예루살렘으로 돌아오도록

인도하신 하나님의 뜻이 성전 건축이었던 것처럼, 우리의 존재이유나 생존

이유도 보다 더 높고 신령한 데서 찾아야 하는 것이빈다.

그게 무엇입니까? 보다 더 값지고 귀한 것을 위해 나 자신의 삶을 드리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을 위해 나의 시간과 물질과 능력을 바쳐야

합니다.

 

어떤 한국 여행객이 로마 시내를 거닐고 있었습니다. 갑자기 덩치 큰 사내

들이 앞뒤로 막더니 마치 수사관인양 패스포트를 보자고 했습니다. 순간 깡

패라는 직감이 들었지만 상황이 험했기 때문에 지갑을 꺼내주었습니다. 지

갑 속엔 500불이 들어 있었습니다. 그들은 500불을 꺼내더니 마치 위조지폐

라고 가려내려는 듯 이리저리 살펴보면 요즘 위조화폐가 많다는등 너스레를

떠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다가 여행객 왼손목의 금빛 나는 로렉스 시계를 보더니 슬며시 500불

을 지갑에 넣어주며 위조지폐는 아닌것 같다면 손목의 시계를 보자고 하더

라는 것입니다.

순순히 풀어주었더니 이리저리 뜯어 보고 흔들어 보고 만져 본 후 이런 고

급 시계를 손목에 차고 다니면 위험하니 주머니에 넣어주겠다며 여행객 주

머니에 시계를 넣어 준후 어디론가 사라지는 것이었습니다. 주머니에 손을

넣어 시계를 꺼내보니 로렉스 시계는 가져가고 그 사람 손목에 차고 있던

시계를 넣고 갔더라는 것입니다.

 

총총히 사라져가는 그들 뒤에 대고 한국 여행객이 회심의 미소를 띠며 중

얼거린 말이 있습니다.

"뛰는 놈 위에 나는 놈 있다구". 그 로렉스 시계는 남대문 시장에서 구입

한 3만원 짜리 가짜였다는 것입니다.

저는 이 얘기를 듣고 처음엔 박장대소를 했습니다. 그리고 잠시 후 한참동

안 생각했습니다.

남의 것을 뻔뻔하게 탐닉하는 로마 사람, 위기를 모면하고 익살을 떠는 한

국 남자, 3만원 짜리 로렉스시계를 만들어 진짜처럼 국제 무대에 내놓는 한

국의 장인기술, 속고 속는 우리시대... 실로 만감이 교차했습니다.

왜 삽니까? 왜 여행을 합니까? 왜 일합니까? 왜 공부를 합니까? 왜 자식을

낳습니까? 왜 사업을 합니까?

 

그것들이 하나님과 상관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하나님이 나를 살려 주시고 보호해 주시는 이유는 하나님과 상관있는삶을

산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고 그 뜻을 따라 살라는 것입니

다. 그 뜻을 분별하고 하나님 중심으로 살아야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입

니다.

 

3. 넘치도록 다시 풍부하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17절을 보면 "만군의 여호와의 말씀에 나의 성읍들이 넘치도록 다시 풍부

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예루살렘이 회복되고 다시 차고 넘치는 복이 임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늘 기억하고 분명히 해야 될 사실이 있습니다. 그것은 차고 넘치는

회복과 복은 하나님이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복은 하나님을 생각하고 하나님의 일에 최선을 다하는 사람에게

임한다는 것입니다.

한국이 낳은 세계적인 음악인 가운데 정 명훈씨를 들 수 있습니다.

그는 현재 빠리 바스띠유 오페라의 상임 지휘자로 구라파 음악계의 거장으

로 주목받고 있습니다. 그가 한 말 중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음악인이 순

수하게 음악을 사랑하면 언젠가는 그가 사랑하는 음악이 돈과 명예와 인기

와 행복 등 모든 것을 가져다 줄 것이다. 그러나 음악인이 음악을 사랑하지

않고 그 음악이 가져다 줄 것들 예를 들면 돈, 명예, 인기, 따위 등을 사랑

하게 되면 음악은 그를 떠나게 될 것이다. 음악인은 음악 자체를 사랑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이 얘기는 그리스도인이 주님을 사랑하는 것과도 흡사합니다.

내가 하나님을 순수하게 사랑하고 섬기면 하나님은 나에게 성공과 명예와

인기와 돈을 가져다 주실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고 하나님

이 주시는 것들 예를 들면 돈, 명예,인기,행복 따위등을 사랑하면 하나님은

나를 떠나고 말 것입니다.

그렇다면 나는 누구를 사랑해야 하겠습니까? 돈이나 명예나 성공 때문에

하나님을 외면하고 산다면 하나님도 그 부산물도 나를 언젠가는 떠날 것입

니다.

 

본문을 주목합시다.

"나의 성읍들이 넘치도록 다시 풍부할 것이라".여기서 말하는 성읍은 예루

살렘과 유다 나라를 뜻합니다. 그리고 내 가정과 교회와 나라를 의미합니

다.

어떻게 해야 푸부하게 될 수 있습니까?

하나님의 일을 우선으로 생각하고 감당해야 합니다.

내가 하나님의 일을 맨 끝 순서에 놓고 틈나면 생각하고 여력생기면 감당

한다면 하나님도 나의 문제를 맨 끝 순서에 두실 것입니다.

이번 주간부터 새벽부흥회가 시작됩니다. 그리고 부흥사경회가 시작됩니

다. 이번 사경회는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축복의 기회입니다.

시간시간 참석합시다.

은혜를 갈망합시다.

가족이 함께 참석합시다.

시간을 지키고 늦지 맙시다.

기도로 준비합시다.

은혜는 준비한 만큼 받는 법입니다.

축복은 자기 그릇대로 받는 법입니다.

주님께 나오는 일과 은혜받는 일을 우선순위 1번에 둡시다. 은혜 못받고

은혜 잊어버리면 되는 것이 없습니다.

사업도, 장사도, 회사도 가정도 은혜 받아야 신장하고 평안하고 융성합니

다. 은혜 받기 위해 마련한 잔치에 빠지게 맙시다.

그리고 차고 넘치는 은혜와 축복을 받읍시다.

 

발행일 : 940313

분 류 :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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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 나중까지 견디는 사람들

자료원 : 박종순 목사 충신교회 예장통합

구 절 : 마 10:16-23

예나 지금이나 제일 무서운 것은 사람입니다. 마태복음 10장은 예수

님께서 열두 제자를 부르시고 다시 그들을 파송하신 기사입니다.

본문 16절을 보면 "보라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양을 이리 가운데 보냄

과 같도다"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제자들이 나가 전도해야 될 세상

과 거기 살고 있는 사람들이 이리와 같다는 것입니다. 팔레스타인 광

야를 쏘다니며 먹이를 사냥하고 상대를 만나면 무차별 공격을 퍼붓는

맹수인 이리와 같다는 것입니다.

팔레스타인 광야의 대표적인 맹수는 뱀,독수리,전갈,이리 등입니다.

그 가운데 이리는 사납고, 간교하고, 공격적인 맹수입니다.

그러나 그 어떤 맹수라도 사람보다 사납고 공격적인 것은 없습니다.

개를 훈련시키는 사람의 말을 빌리면 개는 훈련시키는대로 한다고 합

니다. 훈련받은 개는 제멋대로 행동하는 일이 없다고 합니다.단 미친

개는 예외라는 것입니다.

 

외국 서커스단에서 쇼를 하는 호랑이나 코끼리 그리고 사자 같은 맹

수들도 제멋대로 행동하거나 공격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런데 사람은 아무렇게나 행동하고 누구에게나 대들고 배신을 일삼

고 있습니다. 사람을 부정적으로 이해하려는 것이 마음 아픈 일이지만

20년을 교육받고 훈련받은 사람이 고작 하는 일이 사기,횡령,협잡,부

정, 폭력이라면 문제가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주님은 바로 그런 사람들이 살고 있는 세상으로 제자들을 보내시면서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양을 이리 가운데로 보내는 것 같다"고 하신 것

입니다.

본문을 보면 세가지를 당부하고 있습니다.

 

1. 지혜롭게 순결하라.

16절을 보면 "그러므로 너희는 뱀같이 지혜롭고 비둘기같이 순결하라

"고 하셨습니다.

이 당부는 세상을 살아가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시는 것입니다.

난폭하고 거칠고 간교하고 공격적인 사람을 이리로 비기는가하면 뱀과

비둘기를 들어 교훈하셨습니다.

뱀은 하등동물입니다. 그러나 최고의 고등동물인 인간을 넘어 뜨렸습

니다. 뱀은 다음과 같은 특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첫째 언제나 다니던 길로만 다닙니다.

둘째 한번 공격하기로 작정한 대상을 바꾸지 않습니다. 집요합니다.

셋째, 서두르지 않습니다. 신중합니다.

넷째, 통채로 삼켜 버립니다.

다섯째, 냉혈동물입니다.

여섯째, 치명적인 독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특성 때문에 뱀은 마귀의 사자로 이해되고 있는 것입니다.

배로 땅을 기어 다니는 하등동물이지만 그 지혜는 고등동물이 따르지

못합니다. 바로 그 지혜를 배우라고 하신 것입니다.

비둘기는 뱀과는 전혀 다른 이미지를 가진 동물입니다.

 

비둘기는 다음과 같은 특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첫째 목적지향적입니다.

한꺼번에 여러가지 사물을 복합시켜 보지 않고 한 가지만을 주시합니

다.

둘째, 평화적입니다.

다른 상대를 공격하거나 패거리를 지어 쪼아대는 일이 없습니다.

성경은 비둘기를 순결과 평화의 상징으로 그리고 성령의 상징으로 묫

사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지혜와 순결의 조화를 생각해야 합니

다. 뱀같은 지혜만 강조하다 도면 순수성이 결여되기 쉽고, 비둘기같

은 순결만 강조되다 보면 지혜가 모자라게 됩니다.

지혜와 순결을 마치 자동차와 두 바퀴처럼 한 축을 중심으로 함께 움

직이고 굴러가야 합니다. 지혜만 있으면 매끄럽고 순결만 있으면 속아

넘아가기 쉽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지혜롭고 순결한 양면성을 가져야 합니다. 그래야 이리

때 같은 세상을 헤쳐나갈 수 있고 그리고 그 세상을 향해 복음을 전할

수 있는 것입니다.

 

2. 사람들을 삼가라.

17절을 보면 "사람들을 삼가라 저희가 너희를 공회에 넘겨 주겠고 저

희 회당에서 채찍질 하리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선교해야 될 대상은 사람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그 사람들을

삼가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것은 사람이란 필요한 존재이면서 고통스

러운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개나 돼지나 소나 닭 때문에 속상하고 고통당하는 경우보다는 사람

때문에 속상하고 고통스럽고 손해보는 경우가 더 많습니다.

광야 40년 동안 모세의 행적을 살펴보면 이리나 전갈이나 독수리나

뱀 때문에 위기를 겪고 고통을 당했떤 적은 별로 없었습니다.

그러나 사람 때문에 고통받고 어려움을 겪은 것은 수를 셀 수 없었습

니다.

애굽의 바로 왕이 모세를 죽이려고 했습니다. 그의 형이었던 아론과

누이였던 미리암이 그를 괴롭혔습니다. 고라와 그의 일당들이 그를 괴

롭히고 반역하였습니다. 한마디로 사람들이 모세를 괴롭혔습니다.바울

의 경우도 예외가 아닙니다. 하나님을 모르는 이방인들이 그를 괴롭힌

것이 아니라 동족이며 선민인 유대인이 그를 괴롭혔습니다.

 

디모데후서 4:9 이하를 보면 의도적으로 바울을 괴롭힌 사람이 있었

습니다. 그는 구리장색 알렉산더였습니다. 금속세공업자인 알렉산더는

바울을 대적하고 사사건건 시비를 걸었습니다. 그는 바울의 장점을 덮

어두고 단점을 들추는데 열심이었습니다.

바울은 그에게 대하여 "주께서 그 행한대로 저에게 갚으리시니"라고

했고, "너도 저를 주의하라 "고 했습니다. 알렉산더는 바울의 목회 일

생동안 크나큰 가시였습니다.

40여년을 목회하다가 은퇴하신 어느 목사님이 쓰신 글 속에 [조심해

야 될 사람]이라는 항목이 있었습니다.

그분이 밝힌 조심해야 될 사람들은 다음과 같은 사람들입니다.

첫째 말이 많은 사람.

둘째, 앞에서 칭찬하고 뒤에서 흉잡는 사람.

셋째, 매사를 반대만 하는 사람 (부정적인 사람).

넷째, 성직을 소홀히 취급하는 사람.

다섯째, 의도적으로 남을 괴롭히는 사람.

여섯째, 겉과 속이 다른 사람.

일곱째, 성직을 감투로 생각하는 사람.

여덟째 남을 대접하지 않고 대접받기를 좋아하는 사람.

아홉째 세상을 사랑하는 사람.

열째 말로만 큰소리 치고 일은 하지 않는 사람.

이상에서 열거한 열가지 항목에 걸리지 않는 사람이 있을런지 의문입

니다.

사람 때문에 성공하고 행복해 지는 경우가 있는가 하면 사람 때문에

고통당하고 실패하고 손해보고 길이 막히는 사람도 있습니다.

 

로버트 슐러(ROBERT SCHULLER)목사는 네 종류의 사람이 있다고 했습

니다.

첫째는 노노 하는 사람입니다. (NO NO PEOPLE)

항상 안된다. 못한다고 머리 흔들고 소극적이고 부정적인 사람입니

다.

둘째는 요요하는 사람 (YO YO PEOPLE) 입니다.

줏대도 없고 소신도 없이 흔들리고 변덕스러운 사람입니다.

셋째는 블로우 블로우 하는 사람입니다 (BLOW BLOW PEOPLE):바람이

날리는 사람들.

생각도 크고 소리도 커서 떠들어 대지만 실제로 일을 해야할 때는 움

추려들고 뒤로 물러서는 사람입니다.

넷째는 고고 하는 사람입니다 (GO GO PLOPLE)

생각도 말도 크고 동시에 소신껏 밀고 나가는 사람입니다.

여러분은 어떤 사람입니까?

노노하는 사람, 블로우 블로우 하는 사람, 요요하는 사람들은 삼가해

야 할 사람들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친구가 좋다고 아무나 사귈 수는 없지 않습니까?

사람이 귀하다고 아무나 만날 수는 없지 않습니까?

노처녀가 결혼이 급하다고 아무나 배우자로 정할 수는 업지 않습니까?

 

[만남]은 그 사람의 평생을 결정합니다. 그러기에 선택과 결정은 신

중하고 지혜로워야 합니다.

재치 (TACT)와 만남(CONTACT)이라는 두 친구가 똑같이 사랑(LOVE)이

라는 처녀를 사랑했습니다. 그런데 접근 방법은 달랐습니다.

재치(MR.TACT)군은 현관에서 소녀의 부모를 만나 열심히 자기를 소개

하고 집안을 소개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만남(MR CONTACT)은 뒷문에서

소녀에게 사랑을 고백하며 구혼을 하고 있었습니다. 누가 결혼에 성공

했겠습니까?

그리스도인의 성공비결은 세상 사람들이 사람 만나고 조건 만나고 타

협하고 로비하고 있을 때 은밀한 곳에서 먼저 주님을 만나는 것이빈

다. 천번 만번 만나도 유익될 것이 없는 사람, 예수 믿고 경건생활하

는데 도움이 안되는 사람이라면 그 만남을 삼가는 것이 좋습니다.

주님께서도 [그 사람은 삼가라]고 했습니다.

 

3.염려하지 말라.

19절을 보면 "너희를 넘겨줄 때에 또는 무슨 말을 할까 염려하지말라

그때에 무슨 말할 것을 주시리니"라고 했습니다.

마태복음 6:31을 보면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본문 19절에서는 "무엇이라고 말할까 걱정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요

한복음 14:1이하를 보면 "장차 어디로 갈 것인가를 염려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베드로 전서 5:7을 보면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겨

버리라"고 했습니다.

먹는 것, 입는 것, 마시는 것, 말하는 것, 영원한 세계의 문제등 염

려하지 말고 주님께 맡겨 버리는 것이 성경의 교훈입니다.

이 지구상에 사는 사람들이 가장 널리 사용하는 단어는 오케이(OK)라

고 합니다. 그 다음으로 많이 사용하는 단어는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

까?

미국 하버드대학 안에 있는 비지니스 스쿨이 조사한 바에 따르면 미

국 사람이 콕(COKE)이라고 부르는 코카콜라는 것입니다. 전세계 195개

국에 코카콜라가 진출해 있다고 합니다. 이것은 UN회원국 184개국보다

많은 숫자입니다. 코카콜라를 가리켜 [미국 문화의 첨병] [자본주의의

우유]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전세계적으로 1초에 4만병,1시간이면 1억4천4백만병, 하루면 30억병

가량이 소비됩니다.

코카콜라가 세계를 점령하게된 비결은 제조비법,독특한 광고전략,기

업경영 철학, 그리고 전쟁과 권력을 철저히 이용하는 네가지라고 합니

다.

 

그러나 물만큼 그 소비량이 많은 것은 아니빈다. 코카콜라는 떨어져

도 살지만 물 떨어지면 살 수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전세계도처

에 물을 만들어 주셨습니다. 산 속에도, 바다 속에도 땅 속에서도 물

이 있습니다. [무엇을 마실까 염려하지 말라]는 주님의 당부는 헛소리

가 아닌 것입니다.

 

염려는 의심과 불신이 만들어 냅니다. 의심과 불신을 내쫓으면 염려

걱정도 함께 쫓겨난 것입니다. 본문의 결론을 찾겠습니다.

"나중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참고 인내해야 구원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어떤 사건이나 사람 때문에 염려하고 걱정하다가 신앙을 포기한다든지

주님을 떠나버린다면 구원을 받지 못합니다. 끝까지 참고 인내해야 합

니다.

물론 참고 견디는 그 고통은 클 것입니다. 아픔도 크고 외로움도 클

것입니다. 그러나 나중까지 견디어야 합니다.

기독교 신앙은 철저하게 인내가 요청됩니다.

주님이 고통과 십자가의 아픔을 참으셨던 것처럼 끝까지 참고 견디는

사람들에게 영광과 축복이 임할 것입니다.

"나중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아멘.

 

발행일 : 940227

분 류 :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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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 동서남북을 바라보라

자료원 : 박종순 목사 충신교회 예장통합

구 절 : 창 13:10-18

창세기 13장은 [선택]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교훈해 줍니다. 아브라함

과 조카인 롯은 점점 소유가 많아지면서 함께 살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양가의 종들과 서로 티격태격 싸우는 것이 잦아지게 되자 큰

아버지인 아브라함이 롯에게 주거지 선택권을 주었습니다.

 

13:9을 보면 "네 앞에 온 땅이 있지 아니하냐 나를 떠나라 네가 좌하

면 나는 우하고 네가 우하면 나는 좌하리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롯은

소돔과 고모라 지역을 선택했고 아브라함은 살고 있던 곳에 그냥 머물

게 되었습니다.

우린 여기서 롯의 선택과 아브라함의 처신이 주는 교훈을 찾아야 합

니다.

 

1. 롯의 선택

그것은 한 마디로 잘못된 선택이었고 성급한 결단이었습니다. 그는

큰아버지인 아브라함이 [너 먼저 선택하라]고 했을 때 일말의 주저도

없이 선뜩 소돔과 고모라 지역을 선택했습니다. 그곳은 훗날 하나님의

심판으로 멸망하고 말았습니다.

그의 선택이 왜 잘못 되었는가를 찾아 보겠습니다.

 

1) 눈으로 선택했습니다.

10절을 보면 "롯이 눈을 들어 요단들을 바라보았다"고 했습니다.

눈의 기능은 다양하고 경이적이긴 합니다만 그러나 제산적입니다. 전

체를 다 보진 못합니다. 가령 배우자를 선택할 때 눈으로만 결정한다

면 그 선택은 위험할 수밖에 없습니다. 눈은 색깔, 생김, 크기는 볼

수 있지만 인격이나 사상이나 신앙은 볼 수 없습니다.

 

창세기 6:2을 보면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

고 자기들의 좋아하는 모든 자로 아내를 삼는지라"고 했습니다.

신앙도 인격도 제쳐놓고 눈에 드는 여자,눈으로 보아서 이쁜 여자들

을 아내로 삼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결국 그것이 타락과 범죄의 원

인이 되었고 홍수심판의 원인이 된 것입니다.

 

창세기 3:6을 보면 하와가 뱀의 꼬임에 빠져 선악과를 따먹는 장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라고 했습니다. 여

기서도 [눈]이 문제가 됩니다. 눈으로 보고 결단했습니다.

눈이라고 해서 다 눈이 아닙니다. 진리를 보고 주님을 바라보고 영원

한 세계를 바라보는 눈이 좋은 눈입니다.

클라라 스카(MRS.CLARA SCOTT)여사가 1985년에 만든 찬송의 1절 가사

가 생각납니다.

"어두운 내 눈 밝히사 진리를 보게 하소서

진리의 열쇠 내게 주사 참 빛을 찾게 하소서

깊으신 뜻을 알고자 엎드려 기다리오니

내 눈을 뜨게 하소서 성령이여"

신령한 눈으로 사물을 보게 세계를 보고 역사를 보고 영원한 세계를

봅시다. 그리고 신령한 눈으로 주님을 바라봅시다.

 

2) 조건을 선택했습니다.

10절을 보면 롯이 눈으로 보고 선택한 곳의 조건이 열거되어 있습니

다. 그 조건이란 물이 온 땅에 넉넉했고, 여호와의 동산이었던 에덴동

 

 

 

산처럼 아름답고 애굽땅 처럼 비옥했습니다. 중동지방에서 물이 넉넉

하고 땅이 비옥하고 아름답다면 더 바랄 것이 없는 조건입니다.

롯은 바로 그 조건을 선택한 것입니다.

그러나 곳은 조건이나 환경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어떤 돈 많은 재벌의 총수가 있었습니다. 그는 건강과 장수를 위해

물은 제주도 한라산의 생수를 공수해다가 마셨고,쌀이나 채소는 직접

무공해 재배로 먹었고, 생선은 남태평양에서 잡은 것을 먹고, 그리고

보신을 위해 가장 좋은 것들을 먹고, 마셨습니다. 그러나 100년도 못

살고 세상을 떠났습니다.

장수, 건강, 행복의 비결은 환경이나 조건이 결정하는 것이 아닙니

다. 물론 썩은 물보다는 생수를 마시고, 중금속 오염된 쌀을 먹는 것

보다는 무공해 쌀을 먹는 것이 건강과 장수의 조건이 됩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행복이나 건강이 결정되는 것은 아닙니다.

물맑고, 공기 좋고, 경치 좋기로 친다면 노르웨이나 오스트리아, 스

웨덴, 덴마크 그리고 호주, 뉴질랜드, 미국 등을 꼽을 수 있을 것입니

다. 그러나 그 나라 사람들에게 행복한가, 만족한가를 물으면 그들은

고개를 좌우로 흔듭니다. 그리고 후진국보다 자살자 수가 몇 십배 더

많습니다.

 

롯이 선택했던 소돔과 고모라의 경우 물이 넉넉한 만큼 죄도 넉넉했

습니다. 먹거리 볼거리가 많은 것만큼 타락과 범죄도 많았습니다. 그

래서 결국 유황불로 멸망을 당한 것입니다.

이 사건은 돈만 있으면 만사가 형통이라는 사람들과, 환경문제만 해

결되면 지상은 낙원이 될 것이라고 믿는사람들이게 크나큰 경종을 울

려줍니다.

 

가난한 시골 젊은이가 열심히 공부해서 모 명문대학 법대에 진학했습

니다.그리고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고 대학원에 진학했습니다. 그리

고 사법고시에 응시하여 3년만에 합격했습니다. 그는 내세울 것 없고

가난한 자기네 집안이 싫었습니다. 그래서 장가만은 명문집안으로 가

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떵떵거리고 세도부리며 살고 싶었습니다. 어느

날 중매가 들어왔습니다. 돈많은 회장의 손녀 딸이며, 그 재벌 계열회

사의 사장의 장녀였습니다.

그녀는 일류대학은 아니지만 대학을 나왔고, 나이는 남자보다 다섯살

위인 노처녀였습니다. 얼굴은 살짝 곰보였고 고등학교 때 입은 교통사

고로 턱 밑에 흉터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사고로 왼쪽 팔이 약간 굽어

있었습니다. 결혼 조건은 내개의 열쇠와 은행 통장을 준다는 것이었습

니다.

 

50평 아파트 열쇠, 자동차 열쇠, 별장 열쇠, 금고열쇠 그리고 예금통

장을 주겠다는 것입니다.

가난한 젊은이에게 더없는 조건과 환경이었습니다. 신부감은 맘에 들

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조건을 선택하기로 하고 결혼을 했습니

다.

그가 그녀와 지금 행복을 누리며 살고 있을 것인가 불행해졌을 것인

가를 상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보다 조건을 더 중요시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신앙보다 조건

을 더 찾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잘못입니다.

본문 13절을 보면 롯이 선택한 그곳을 가리켜 "소돔 사람은 악하여

여호와 앞에 큰 죄인이었더라"고 했습니다.

물이 넉넉하고 아름답고 비옥한 그곳이었지만 거기 사람들이 악했기

때문에 불심판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흔적도 없는 곳이

되고 만 것입니다.

롯은 잘못된 선택 때문에 패가망신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아내도

죽었고 재산도 불타버렸습니다. 선택을 잘 해야 합니다.

 

2. 아브라함의 경우를 생각해 봅시다.

1) 말씀을 순종했습니다.

그는 선택을 자신의 의지나 판단으로 하지 않고 하나님의 계시에 의

존했습니다. 다시 말하면 떠나라면 떠나고, 머물라면 머물고, 바치라

면 바쳤습니다.

창세기 12:1-4을 보면 하란을 떠나라는 말씀 한마디에 즉시 고향을

떠났습니다.

창세기 14:20을 보면 즉석에서 십일조를 드렸습니다.

창세기 22장을 보면 외아들 이삭을 하나님께 번제로 바쳤습니다.

그는 눈으로 보고 머리로 생각하고 이해득실을 따져가며 판단하지 않

았습니다. 그리고 자기 멋대로 선택을 하지 않았습니다. 말씀을 순종

했고, 그 뜻을 따라 모든 것을 결정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신앙이 무엇이며, 순종이 무엇인가를 배우게 됩니다.

롯은 자신의 의지와 결정에 순종했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자신의

의지와 사고와 결정을 하나님의 뜻에 맞추고 순종했습니다.

 

미국 어느 교회에 목사님이 부임했습니다. 그 교회는 3천여 명이 모

이는 교회였습니다. 부임 첫 주일예배가 끝나고 나자 할머니 한분이

찾아와 인사를 하더니 "목사님 수고가 많으시겠습니다. 수천명 교인들

의 마음을 다 맞추시려면 얼마나 고생이 많으시겠습니까?"라고 말했습

니다.

 

다음 주일 그는 교인들에게 말했습니다. "여러분 저는 수천명이 넘는

여러분의 비위나 마음을 맞춰주기 위해 이 교회에 부임한 것이 아닙니

다.

만일 저더러 3천여 명의 비위를 낱낱이 맞추라한다면 저는 이 교회를

떠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제 말을 순종하고 따른다면

저는 생명 다해 일할 것입니다. 그리고 저는 예수 그리스도에게 저를

맞추기 위해 최선을 다할 것입니다"라고

하나님께 나를 맞춰가며 삽시다.

롯은 세상조건에 자신을 맞추었지만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뜻에 자신

을 맞추었습니다. 이것이 참 믿음이고 순종입니다.

 

2) 하나님을 선택했습니다.

아브라함의 신앙은 하나님이 주시는 복이나 조건들을 선택한 것이 아

니라 하나님 자신을 선택했습니다.

이 신앙이 바로 성숙한 신앙입니다. 환경이 나빠지고 조건이 악화되

고 난관이 앞을 가로 막는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을 주님으로 선택한 사

람은 원망하거나 쓰러지지 않습니다.

그러나 롯과 같은 사람은 조건이 나빠지고 환경이 불리해지면 금방

신앙을 포기하고 하나님을 떠납니다.

앞에서 얘기했던 젊은이의 결혼 뒷일을 말씀드리겠습니다. 본래 애정

없는 결혼이었습니다. 설상가상으로 정권이 바뀌면서 처가집 가운이

기울고, 회사가 부도가 나서 쓰러졌습니다. 그리고 그는 6개월만에 아

내와 이혼을 하고 말았습니다.

우리는 분명히 우리의 선택과 목적을 정해야 합니다.

왜 많고 많은 종교 가운데 기독교를 선택했습니까?

왜 수만개의 교회 가운데 충신교회를 선택했습니까?

병을 고쳐준다는 약속 때문입니까?

부자가 되게 해 주겠다는 약속 때문입니까? 아니면 직업을 주고 직장

을 주고 회사를 일으켜 주겠다는 약속 때문입니까? 아닙니다. 그런 것

들 때문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좋아서 선택한 것입니다.

최고 최상의 신앙은 조건이나 환경 다 빼앗겨도 하나님으로 만족하고

감사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사람, 그 신앙이라야 하나님의 끝없는

은총과 복이 임하는 것입니다.

본문이 그것을 설명해 줍니다.

아브라함이 받은 축볼은 참으로 큰 것이었습니다.

 

1) 하나님이 함께 해 주셨습니다.

14절을 보면 "롯이 아브라함을 떠난 후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

르시되"라고 했습니다. 혈육인 롯과 환경과 조건이 아브람을 떠난 뒤

하나님이 아브람에게 다가오셨습니다. 다시 말하면 눈에 보이는 조건

들은 그를 떠났지만 그 조건들을 다스리시고 만드시는 하나님이 그에

게 오신 것입니다. 이보다 더 큰 축복이 어디 있겠습니까?

 

2) 복을 주셨습니다.

15절-17절을 보면 "이 땅을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라.""네 자손을 땅

의 티끌같게 하리라"고 했습니다. 중요한 것은 롯에게는 땅을 주신다

는 약속이 없다는 점입니다. 그리고 롯의 후손에게는 그 번영을 보장

하지 않으셨다는 점입니다.

하나님을 선택하고 하나님께 자신을 맞췄던 아브라함은 땅도 받았고,

건강도 받았고, 아들도 받았습니다. 그리고 신령한 축복도 받아서 예

수 그리스도가 그 가문에서 태어났습니다.

 

여러분!

눈에 보이는 조건 때문에 흔들리지 맙시다. 환경이 변했다고 원망하

지 맙시다. 조건만 바라보고 조건만 따르다가 예수 버리지 맙시다.

조건이나 환경은 사라져도 예수 그리스도는 영원히 나와 함께 하신

다는 것을 확신합시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눈을 들어 동서남북을

바라보라"고 눈을 들어 동서남북을 창조하신 하나님을 바라보라는 것

입니다.

그리고 동서남북에 편만한 하나님의 능력을 바라보라는 것입니다.

소돔과 고모라만 바라보지 맙시다.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 봅시다.

 

발행일 : 940220

분 류 :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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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5

제 목 : 전진합시다

자료원 : 박종순 목사 충신교회 예장통합

구 절 : 히 10:35-39

 

 

불교는 산속의 종교, 기독교는 거리의 종교라고 합니다. 그것은 불교

의 경우 입산,수도,득도,성불에 중점을 두기 때문이며, 기독교의 경우

에는 현실,역사,삶 구원에 중점을 두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불교를 명상과 사색을 중요시하는 정적인 종교라고 한다면 기

독교는 변화와 중생과 전진을 중요시하는 동적인 종교라고 할 수 있습

니다.

 

본문은 당시 고통당하는 그리스도인들에게 그들이 지녀야 할 신앙생

활의 태도가 어떤 것이어야 하는가를 교훈한 말씀입니다. 특히 뒤로

물러가서는 안된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고통이나 실패나 박해

같은 여건들이 그리스도인의 신앙생활을 위협하더라도 그런 것들 때문

에 뒤로 물러서면 안된다는 것이 본문의 교훈인 것입니다. 본문의 교

훈이 어떤 것인가를 찾아 보겠습니다.

 

1. 담대해야 상을 받습니다.

 

35절을 보면 "그러므로 너희 담대함을 버리지 말라 이것이 큰 상을

얻느니라"고 했습니다. 34절을 보면 그 당시 기독교인들이 예수 믿는

다는 이유 하나 때문에 옥에 갇히고 재산을 빼앗기고 직장에서 쫓겨나

는 일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런 것들 때문에 용기를 잃어버리거나

믿음을 포기해 버리면 상을 얻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11:6을 보면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

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찌니라"고 했습니다.

본문 35절과 11:6을 연결시키면 담대한 믿음으로 하나님을 찾고 하나

님께 나아가기를 힘쓰는 사람들에게 상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시험이

나 실패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것들을 담대한 믿음으로 이

기면 상이 임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상은 두가지 특징을 갖

고 있습니다.

 

첫째는 하나님께서 주신다는 것입니다.

최고의 영예와 상은 대통령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받는 상은 하나님

이 주시는 상입니다. 최고의 상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세계의 지성인들이 받기를 소마하는 상이 있습니다. 그 상이 바로

노벧상입니다.

노벧(Alfred Bernhard Nobel)은 스웨덴의 화학자이며 발명가였습니

다.

1863년 폭약을 발명하고 공장을 설립하여 폭약을 제조하기 시작했습

니다.그런데 그 과정에서 공장이 폭파되어 동생과 종업원 4명이 희생

되는 비운을 겪게 되었습니다. 그는 그 후 폭약 때문에 갑부가 되었

고, 그의 유언을 따라 1901년 노벧상 제도를 만들어 시상을 해 나오고

있습니다. 그는 1895년 11월 27일 유언장을 통해 "인류 복지에 가장

구체적으로 공헌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라"며 자신의 유산 3100만 크

로나를 스웨덴 왕립 아카데미에 기부했습니다.

 

상은 물리,화학,생리,과학,문학 ,의학 및 경제, 평화 부분에 걸쳐 시

상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나라는 아직 한 사람도 수상자가 없습

니다. 시상식은 매년 12월 10일 스웨덴 국왕이 임석한 가운데 진행되

며 수상자에게는 금메달과 22만 달러 정도의 상금을 줍니다.

그러나 용기와 인내로 자신의 믿음을 지킨 사람들이 받는 상은 하나

님이 주십니다. 노벧상과는 비교도 할 수가 없습니다. 천군천사가 부

르는 승리의 노래 속에서 하나님이 상을 베풀어 주십니다.

얼마나 영광입니까?

저는 몇년 전 스톡홀름을 방문했을 때 노벧상 시상식장에 들어가 보

았습니다. 텅빈 방에서 상을 받는 흉내를 내면서 장차 받을 상을 생각

해 보았습니다.

 

둘째 영원한 상입니다.

노벧상이나 올림픽상은 지상에서만 그 가치와 영예가 인정되는 상입

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주시는 상은 영원한 상입니다. 그영광과 가치

가 영원히 인정되고 평가받는 상입니다.

영원한 상이란 없어지지 않는 상, 녹슬지 않는 상, 그 가치가 영원히

존속되는 상인 것입니다.

 

2. 인내해야 약속을 이룹니다.

36절을 보면 "너희에게 인내가 필요함은 너희가 하나님의 뜻을 행한

후에 약속을 받기 위함이라"고 했습니다.

인내는 그리스도인이 지녀야할 가장 소중한 품성입니다. 나아가 인간

이 지녀야 할 품성이기도 합니다.

짐승도 단번에 성을 내거나 단번에 자기 감정을 표현하지 않습니다.

하물며 사람이라면 인내할 줄 알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태리가 낳은 세계적인 바이얼리니스터 니꼴로 파가니니 (Niccolo

Paganini)가 어느 날 연주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연주도중 바이

얼린 줄 하나가 끊어졌습니다. 숨을 죽이고 있던 청중들은 깜짝 놀랐

습니다. 그는 조금도 당황하지 않고 남은 세줄로 연주를 계속했습니

다. 그러다가 한 줄이 또 끊어졌습니다. 그러나 그는 당황하지 않고

침착하게 두 줄로 연주를 계속했습니다.

그때 세번째 줄이 날카로운 소리를 내며 끊어졌습니다. 그는 잠시 연

주를 멈추더니 한 손으로 바이올린을 높이 치켜들며 "줄 하나와 파가

니니"라고 외쳤습니다. 그리고는 다시 노련한 솜씨로 연주를 했습니

다.

 

그의 연주가 끝나자 관중들은 우뢰같은 박수를 보냈습니다. 포기하면

안됩니다. 인내가 없으면 성공할 수 없습니다. 세줄이 끊어지고 단 한

줄만 남았더라도 그 한줄 믿음으로 성공을 연주해 낼 수 있는 용기와

인내가 필요한 것입니다.

암놈 펭귄이 알을 낳으면 숫놈 펭귄이 날개로 덮고 따뜻하게 하여 새

끼가 나오게 한다고 합니다.

최소한 두달동안 먹지도 않고 영하 40도의 한냉과 싸우며 시속 40km

의 강풍을 견뎌 낸다는 것입니다.

생각해 보면 인간의 인내란 너무나 나약하고 무력합니다.

신앙인의 인내도 예외가 아닙니다. 참을성도 없고, 기다릴 줄도 모릅

니다. 조그만 괴로워도 짜증내고, 약간만 고통스러워도 신경질을 내는

가 하면 쉽게 절망하고 포기해 버립니다.

크리미어 전쟁 당시 부상으로 다리를 잘라야 하는 병사가 있었습니

다. 나이팅게일이 그 병사에게 "최대한 용기를 갖고 아픔을 참아야 된

다"고 말하자 그 병사는 막대리를 하나 달라고 했습니다.

그 병사는 막대기의 끝부분을 입으로 깨물면서 수술이 끝날때까지 단

한마디도 소리를 지르지 않았습니다. 수술이 끝난 후 막대기를 보니

끝 부분이 거의 짓뭉개져 있었습니다.

이 이야기는 우리에게 의미깊은 교훈을 줍니다.

고통이나 좌절로 아픔을 겪을 때 실패나 절망으로 괴로움을 당할 때

우리가 붙잡을 것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입니

다.

이유는 십자가보다 더 억울한 사건도, 십자가보다 더 쓰라린 아픔도,

십자가보다 더 골깊은 상처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십자가를

붙들때 우리에게 평화와 위로와 소망과 승리가 임하기 때문입니다.

인내하지 못하면 약속을 이루지 못합니다.

인내해야 소망을 성취할 수 있습니다.

인내해야 영원한 구원을 이루게 됩니다.

 

3. 전진해야 기뻐하십니다.

38절을 보면 "뒤로 물러가면 내 마음이 저를 기뻐하지 아니하리라"고

했습니다.

뒤로 물러간다는 말의 뜻은 "철회하다","뒤로 끌다"라는 것입니다.

뒤로 물러가는 사람은 자신의 목적이나 계획을 쉽게 철회해 버리는 사

람입니다.

그리고 남을 뒤로 끌어 내리는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뒤로 물러가는

사람은 자신도 주저않고 남도 끌어내리는 사람입니다.

굼벴이도, 지렁이도, 개미도 앞으로 갑니다. 하루살이도 앞으로 날아

갑니다. 자동차도, 비행기도, 사람도 앞으로 갑니다. 부산 목포는 20

시간, 대전은 10시간이 걸렸다고 합니다. 20시간이 걸려도 목적지인

고향을 향해 앞으로 갔기 때문에 가족을 만나고 명절을 지킬 수 있었

습니다.뒤로 가는 것은 30분도 지겹고 힘이 듭니다.

 

이스라엘 민족의 경우를 보면 애굽을 떠나 40년만에 가나안 땅에 도

착했습니다. 참으로 지루하고 험난한 여정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떠났던 애굽으로 되돌아 가자고 대들었고 소리쳤습니다.

출애굽기 14:12을 보면 홍해 앞에 선 이스라엘이 애굽으로 돌아가는

것이 광야에서 죽는 것보다 낫겠다고 소리치며 저항했던 사건이 기록

되어있고, 출애굽기 16:3을 보면 신광야에 이른 그들이 광야에서 굶어

죽는 것보다는 애굽의 고기 가마 곁에서 실컷 먹다가 하나님의 손에

편히 죽는 것이 좋을 뻔했다고 원망하는 장명이 기록되어 있스빈다.

그들은 전진에는 관심이 없고 되돌아가는 궁리에 바빴습니다.

세 종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하나는 과거 지향적인 사람입니다.

늘 옛날 생각하고 말하는 사람, 지난 날의 향수와 미련에 사로잡혀

사는 사람을 말합니다.

이런 사람들이 모인 곳엔 "과거에","소시적에","나 어렸을 때"라는

말이 일상어로 사용됩니다.

 

둘은 현실주의자들입니다.

오늘 여기가 제일인 사람들입니다. 이들에게 과거가 필요없듯이 미래

도 필요없습니다. 이들은 수단과 한탕주의와 단발적인 삶에 만족하고

현싫을 엔조이하는 사람들입니다.

어는 언론사에서 압구정동을 서성대는 젊은이들을 붙잡고 [꿈이 뭣니

까]라는 질문을 던졌다고 합니다. 그 물음에 대한 대답은

"꿈이요?"

"왜 꿈을 꿔요?"

"오늘 저녁 디스코텍에 가는 것예요"

"그런거 몰라요"

"여기 있잖아요 (엄지손가락을 보이며)"라는 것들이었다고 합

니다. 의외로 현실주의자들이 많습니다. 예수를 믿는 것도 당장 오늘

나한테 무슨 복이 떨어지느냐, 나한테 득되는게 뭐냐,유익한게 뭐냐를

따집니다. 그들은 바로 현실주의자들인 것입니다.

 

셋은 미래지향적인 사람들입니다.

다시 말하면 뒤로 물러서지 않고 전진하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애굽에 보내시고 열가지 재앙을 내리시며 이스라

엘을 애굽에서 나아오게 하신 것은 그들로 가나안이라는 미래지향적

복지를 향해 전진하도록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걸핏하

면 뒤로 되돌아갈 궁리를 했던 것입니다. 그 때마다 하나님은 그것을

싫어하셨고, 기뻐하지 않으셨습니다.

히브리서 10:28은 "뒤로 물러가면 내 마음이 저를 기뻐하지 않는다

"고 했습니다.

부산을 가기로 했으면 24시간이 걸려도 한발짝씩, 그리고 시속 10킬

로의 속도라도 부산을 향해 가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신앙생활을 시작했으면 힘들고 느리고 괴롭더라도 뒤돌아

서거나 중단하면 안됩니다.

범죄심리학자들은 범죄자에겐 귀소본능이 있다고 합니다. 그것은 자

기가 죄지은 현장을 남몰래 둘러보고픈 마음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

나 신앙인은 전진해야 합니다. 불행했던 과거, 불미했던 지난날 상처

였던 그 사건, 죄짓고 살았던 과거로 되돌아가면 안됩니다.

우리의 최종 목적지는 영원한 가나안입니다.

되돌아가면 목적지에 못갑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저를 기뻐하지 않습

니다.

애굽으로 돌아가기를 노래불렀던 이스라엘은 애굽으로 못갔고 가나안

땅에도 못들어 갔습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산 교훈이 됩니다.

주님 바라보고 전진합시다. 곁을 보고 사람보다 사건보고 경치보면 전

진못합니다.

주님이 최종 목표이며 영원한 세계가 최종 목적지입니다.

뒤로 물러가지 맙시다.

계속 전진합시다.

 

발행일 : 940213

분 류 :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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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6

제 목 : 빛이 있으라

자료원 : 충신교회 박종순목사

구 절 : 창 1:1-5

 

*** 빛이 있으라! ***

 

충신교회:박종순목사

 

성경본문:창1:1-5.

인간이 제 아무리 정교하고 아름다운 작품을 만든다고 해도, 하나님의

창조에는 비할 수 없습니다.

창세기 1장은 하나님게서 우주 삼라만상을 창조하신 사역에 대한 기록

입니다.

새해를 맞이하면서 특히 3-5절을 주목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가라사대 빛이 있으라 하시매 빛이 있었고, 그 빛이 하나님

보시기에 좋았더라. 하나님이 빛과 어두움을 나누사 빛을 낮이라 칭하

시고 어두움을 밤이라 칭하시니라." 는 말슴 속에서 찾아야 할 몇가지

진리가 있습니다.

 

1.첫째날 빛을 창조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빛을 창조하시기 전의 형편을 2졸이 다음가 같이 설명합

니다.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신은

수면에 운행하시니라."

이 말슴의 의미는 이미 하나님께서 땅을 창조하셨으나, 아직 그 땅에

는 생물이 살 수 있다든지, 조직된 형태를 갖추고 있지 못했다는 것이

라고 주경가 스콜필드는 말했습니다.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있었기 때문에 제일 먼저 있어야 할 것이빛

이었습니다. 빛은 그만큼 중요한 것입니다.

빛이 아니면 혼돈고, 공허도 흑암도 해결될 수 없습니다.

빛이 없다면 제 아무리 아름다운 경치라고 해도 볼 수 없습니다. 마음

의 빛이 꺼진 사람들이 겪는 불행은 더욱 심각합니다. 마음의 빛, 마음

의 등불이 꺼지면 아무런 가치도 의미도 없습니다. 인생 자체가 의미있

고, 가치있으려면 빛이 꺼지지 않아야 합니다.

진리의 빛과 양심의 빛과 생명의 빛이 꺼지면 온 세상이 어두워질 것

입니다. 온통 세상이 어두워지면 세상은 무질서가 판을 치고, 혼돈과죄

악이 날뛰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빛 없이는 못사는 존재들입니다. 우리는 모든 것을 밝혀주고,

드러나게 하고 볼 수 있는 빛을 창조하신 하나님게 감사드려야 합니다.

 

2. 빛이 있으라 하시매 빛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말슴으로 빛을 창조하셧습니다. 우리가 여기서 깨달아야

할 것은 하나님은 말씀하시는 인격적 존재라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은빛

뿐만 아니라 모든 창조를 말씀으로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빛 뿐만 아니라 모든 창조를 말씀으로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가라사대"라는 말이 창세기 1장에만 9번이나 반복되고 있으

며, 성경전체 속에는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것은 한마디로 기독교가 말씀의 종교라는 증거입니다.

그래서 요한복음1:1을 보면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고 했습니다.

보다 중요한 것은 "빛이 있으라"는 한마디 말씀에 빛이 있게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말씀의 능력을 그 한마디 속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사람들이 가지는 힘이나 권력은 부패하기도 하고, 무엇을 명령해도 그

대로 실현되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영원한 절대자이신 하나님께서 원하시고, 빛이 있으라, 하늘이

있으라, 바다가 있으라고 말씀하시면 그대로 다 창조되었습니다. 즉 하

 

 

 

나님의 말씀은 곧 실재였습니다. 거기에는 지체됨도 없었고, 고려됨도

없이 말씀과 동시에 실재가 나타난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잔잔하라, 고요하라." 는 말씀 한마디로 성난 파도를 잔

잔케 하셨습니다. 죽은지 나흘이나 되는 나사로의 무덤을 찾아가신 주

님께서 무덤 속을 향하여 말씀하셨습니다.

"나사로야 나오너라"

 

이 말씀 한마디에 나사로가 수족을 동이고, 천으로 얼굴을 감싼채 무

덤 속에서 걸어 나왔습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면 그대로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능력이 있습

니다. 우리가 성경을 믿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말슴 한마디로 천지를 창조하시고, 자연을 다스리며,

인간의 모든 행사를 지배하신다는 사실 앞에서 감사를 드리고 위로와용

기를 얻어야 합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살아계신 하나님이시며, 말씀하시는 인격이시며,

다스리시고, 지배하시는 능력의 하나님이십니다.

바로 그 하나님께서 지금 나와 함께 계시고, 나를 지키시고, 보호하시

는 것입니다.

 

3. 낮과 밤을 나누셨습니다.

빛 때문에 밝음과 어두움, 낮고 밤이 나누어졌습니다. 빛을 낮이라

칭하시고, 어두움을 밤이라 칭하셨다는 것은 주야가 시작되었다는 것입

니다.

어떤 사람은 낮은 하나님이 지배하시고 , 밤은 사단이 지배하게 되었

다는 말을 합니다. 그러나 시편 24:16을 보면 "낮도 주의 것이요. 밤도

주의 것이라." 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낮이건 밤이건 하나님이 지으셨

으므로 하나님의 시간입니다. 문제는 하나님의 날과 시간과 물질을 인

간들이 제멋대로 죄짓고 악을 행하는 데 쓰고 있는 점입니다.

낮이 가면 밤이 오고, 밤이 지나면 낮이 오는 것이 창조의 질서입니다.

밤만 계속되는 것도, 낮만 계속되는 것도 축복이 아닙니다.

인생도 비슷한 이치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낮을 기쁘고 성공으로 채워

진 시간이라 하고, 밤을 어둡고 ,힘들고,괴로운 일들로 채워진 시간이라

고 해보십시다. 어떻게 인생이 밝고 기븐 낮시간만 계속 될 수 있겠습니

까? 어둡고, 괴롭고, 침울한 고통과 절망의 밤도 있을 수 있습니다. 그

러나 그것은 한정된 시간입니다. 밤이 지나면 아침이 오는 법입니다.

본문 5절 하반절을 주목하십시다.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 이는 첫째날이라."는 말씀의 뜻은 밤이 지나

고 아침이 되니 하루가 지났다는 뜻입니다. 밤이 지나면 아침이 되고,12

월이 가면 새해가 오는 것은 자연 법칙입니다.

우리가 말씀 한마디로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 안에 머물러 살기만 한

다면 어떤 고난과 고통의 밤중에 처해 있을지라도 새아침의 광명을 맞게

될 것입니다.

어둡고, 침울하고,고민으로 굳게 닫혀 있는 내 마음 속에 빛을 받아 들

입시다. 답답하고 복잡한 내 집 창문을 열고, 주님의 빛을 받아 들입시

다.

뭔가 뜻대로 되지 않고, 속상하고 그래서 산다는게 재미가 없는 내 인

생 속에 "빛이 있으라"고 말씀하시는 주 하나님의 능력을 소유합시다.

그리고 91년 한해를 빛을 따라서 살아나갑시다.

 

발행일 : 940215

분 류 :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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