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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료 18,185편 ◑/자료 16,731편

무엇 때문에 믿는가?*이재철 목사

by 【고동엽】 2021. 12.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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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 때문에 믿는가?
글/이재철 목사
• 인도의 지성 타고르가 e '기한잘리'라는 작품이 있다. '기반잘리'는 '신끼I 바치는 노래'라는 뜻
인데, 그 중에 이런 내용의 시가 있다. 나는 마을 길로 이집 저집움 구걸하며 다녔습니다. 그 때
갑자기 님의 황금마자가 멀리서 마지 꿍저럼 나타났습니다. 나의 회망이 부풀어 오르기 시작했
습니다. 이제 나의 昔운은 끌났다고 생각했습니다. 님이 내게 베풀어 주실 식몸과 재화를 기대하
며. 나는 님이 타고 있는 황금마자룸 기다렸습니다. 드디어 황금마차가 내앞에 명추어 섰습니다.
님과 시선이 마주치자 님은 미소물 지으시면서 내러오셨습니다. 나는 내 생애 최고의 행운이 다
가오고 있음을 느꼈습니다. 그 때 느닷없이 님은 오른손을 내미시며 말씀하셨습니다. '그대는 내
게 무엇을 주려고 왔는가?_ 아! 거지에게 구걸묻 하시려고 님이 손을 내미시다니, 그건 얼마나
님다운 농담입니까! 여하론 나는 얼떨평해하며 장시 명하니 서 있다가, 그제야 내 전대에서 작디
작은 낟알 하나를 꺼내어 님에게 드렸습니다.
그것을 받아든 님은 내건! 아무 것도 주시지 않고, 그남 띠나 버리고 알았습니다. 그러나 그 날도
저울어 갈 즈융, 바닥 위로 내 자루g 空었율 때에, 그 초라한 누더기 속에서, 작디작은 황금 한
낟알을 발견하게 될 줄이야! 그 때 나의 놀라움과 뉘우침이 얼마나 컸겠습니까? 나는 땅을 치면
서 울었습니다. 님에게 나의 전부풀 바칠 마옴율 가졌더라면,얼마나 좋았올까, 후회하면서 말입
니다. (후략)
자기에게 집착하는 마용, 타인옳 위한 마용보다는 누구를 만나든지. 그 사람움 자기 욕망의 도구
로 삼고자 하는 마용을 렇어 버리지 못했을 때, 그토옥 기다리고 기다리던 님움 만났지만 이 걸
인이 얻을 수 있었던 것은, 고작 왕금 낟알 한 개였다. 그래서 이 걸인은 님묻 만난 후에도 평생
걸인처럼 살아갈 수밖에 없었다. 진리품 앞에 놓고서도 진리의 지배콜 받으려 하기보다는, 끊임
없이 자기 욕망울 위해서 진리물 자신의 도구로 상으려 하는 사랑들. 자기 자신에게 집착하러는
스스로의 마음을 떨쳐 버리지 못하는 사람들은, 한평생 진리의 부스러기만 얻을 뿐, 계속 진리의
걸인으로. 영혼의 거지로 살아갈 수밖에 없다.
그러기에 믿융은,이처럼 자기 욕망과 이기심에 집착하고자 하는 마용을 갈아엎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믿융이 시작되는 곳은 언제나 우리의 마용이다. 한때 젊은 시절, 자신에 대한 집착의
마음을 떨쳐 버리지 못해 욕망의 노예가 된 재, 귀하디귀한 S용을 허망하게 탕진해 버렸던 솔로
몬은,그래서 이렇게 고백하고 있다. 무롯 지길 만한 것보다 더욱 네 마옹을 지키라. 생영의 근원
이 이에서 남이니라••성경 장언 4장 23접 알씀
솔로몬은 뒤늦게나마 믿용이 마용에서부터 시작된다는 것묻 알고, 자기에게 집착하고자 하는
마음을 갈아옆었다. 그리고 그 순간부터 영혼의 걸인 갑던 송로온의 의미 없는 삶은 중단되었다.
성경 마태복용 21장 6절에서 17절율 보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제자듣과 함께 예루살렘으로 입성
하시는 장면이 나온다. 예루살램 성으로 입성하시는 예수 그리스도몸 예루살램 주민둘이 얼마나
반겼던지. 온 성이 소동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여기서 '소동했다'고 하는 단어 •세이오 oeUi’는, 지축이 튼들렀다는 뜻이다. 온 예루살렘 주민들
이,에수 그리스도률 향해 얼마나 영광«던지, 그營의 환호성으로 인해,예루살렘의 지축이 른들
렸다는 말이다. 여기에서 유심히 관찰해 블 핑요가 있다. 지금 예수 그리스도깨서는 자신이 왕이
심을 나타내기 위하여 나귀콜 타고 입성하고 개시다.
그런데 그분이 타고 있는 나귀는 큰 나귀가 아니라, 어린 나귀 새끼에 空과하다. 에수께서는 금
실로 짜인 곤종포콜 입고 계시지 않다. 같임리 가난한 빈민의 옷을 그대로 입고 계시다. 예수님
은 왕의 문양이 새겨진 안장을 &고 앉아 계시지 않다. 가난하기 착이 없는 무리들이 갈아 놀은
겉옷을 안장 삼아 깥고 앉아 계시다. 예수님이 탄 나귀가 걸어가는 길 위에 왕의 신분을 나타내
는 붉은 양탄자가 말려 있지 않다.
그 곳 역시 예루살램의 비천한 무리묻이 알아 둔 남루한 옷둘이 널리 있움 뿐이다. 사람들은 예
수님을 향하여 황금 색종이콜 뿌리지 않았다. 단지 나웃가지묻 른둘고 있옳 뿐이다. 자세히 살펴
보면 볼수표 그 모습은 마치 코미디의 한 장면 같다. 그런데도 놀랍게도 예루살렘 주민 중에 누
구 한 사람도,그 코미디 갈은 장면을 보고서 야유톨 하는 사랑은 없다. 만약에 지금 이와 같은
행렬이 우리 앞을 지나가면서 그 중의 한 사랑이,"내가 인류콜 구원함 메시아다"라고 말한다면
어떻게 하겠는가? 두말 할 것도 없이 정신병자콜의 행일로 블 것이다.
그러나 예루살렘 주민둘은 놀답게도 그 같은 행색의 예수님을 향해,'호산나',기금 우리를 구원
해 달라'고 지죽이 흔들릴 정도로 열광하고 있다. 그렇다면 그들은 정알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신
지 알았기 때문에, 혹은 믿융이 좋았기 때문에 이처럼 코미디 같은 예수님의 행렬을 보고도 열광
한 것인가? 불행히도 그렇지 않다. 그것은 이처럼 옆광있던 예루살램 주님들이 불과 닷새 후에
똑같이, 소리콜 지르며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아 죽인 사실을 보면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이콜은 그저럼 용색한 예수 그리스도의 행얻율 향해 왜 열광하고 환호성을 질렀던가?
그것은 예루살렘 주민들 모두 마치 •기탄장리•의 시(分》속에 나오는 걸인처럼, 자신둘의 욕망어!
집착하고 있었기에, 그듈의 욕망에 찬 마용이 여!수 그리스도의 허상움 빚었기 때문이다. 그들이
열광했던 대상은, 예수 그리스도의 실상이 아니라. 그듐의 탐욕적인 마용이 만둘었던 예수 그리
스도의 허상이었다.
시(許) 속의 걸인이 님울 만나기 전 님에 대해 허상옳 가지고 있었던 것처럼 망이다. 이 걸인은
님에 대해 허상을 지녔던 자신의 잘못움 뉘우침 증 아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예루살렘 주민듈온.
예수 그리스도가 자신콜이 생각했던 것과는 다른 사람이라는 것윤 알았윤 때에, 뉘우치기는커
녕, 오히려 실상인 예수 그리스도동 죽여 버리고 알았다. 자신들의 마움이 만든 허상이 진짜라고
착각했기 때문이다. 바로 이것이 십자가의 사건이다. 예수 그리스도깨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툴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콜 지고,나콜 종율 것이니라. - 성경
마태복음 16장 24절 말씀
이 말씀을 뒤집으면, 아무리 예수 그리스도로 따라간다 합지라도, 자기 집착의 마융을 먼저 부
인하지 아니하고서는 절대로, 바른 크리스전이 원 수 없다는 의미이다. 왜 그런가? 자기에게 집
착하는 자신의 마융을 부인하기 전까지는,에수 그리스도의 실상을 만날 도리가 없기에, 끊임없
이 에수 그리스도의 허상을 빚어 내는 우호 범합 수밖에 없는 까닭이다.
사탄이 무엇인지 아는가? 머리에 뿔움 당고 있는 도깨비인가? 예수 그리스도의 허상을 만드는
자가 있다면 바로 그 사람이 사탄이다. 왜 그런가? 예수 그리스도의 허상옳 만드는 사람은 곧 예
수 그리스도의 실상을 죽여 버리기 때문이다. 기이사라 빌립보에서 예수님은 제자듈에게 이렇게
움으셨다. ••너희는 나콜 누구라 하느냐?_ 그 몸용에 베드로가 나섰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그 신앙고백이 얼마나 위대했던지, 예수님은 베드로의 그 신앙 고
백 위에 주님의 교회를 세우실 것을 약속하셨다.
그리고 이제 주님이 누군지 제자듈이 알았기에 주님께서는 그 후에 있윤 일, 즉 예루살렘에서 못
박혀 돌아가실 수난율 예고하셨다. 성경 마태복옴 16장 22절은, 그 때 베드로가 예수님을 붙들고
이렇게 간(諫:간하다)했다고 증거하고 있다.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에게 미치지 아
니하리이다. - 성경 마태복융 16장 22질 말씀
여기에서 '간했다'는 동사, '에피티마오'hnTiMdw》는 꾸짖었다는 말이다. 이제 방금. 당신은 하나
님의 아들이요,구원자시라 고백했던 제자가, 어찌 감히 스승을 불잡고 꾸짖율 수가 있는가? 어
띨게 제자가 스含에게 호통을 칠 수 있단 말인가? 그것은 베드로가 하나님의 아들이신 메시아
는, 인간에 의해 결코 못박허 주을 수 없다고 속단했기 때문이다. 알하자면 그 순간 베드로의 마
융은, 자신의 판단에 대한 집착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허상을 만들고 있었던 것이다.
그때 주님께서는 베드로콜 향해서 이업게 임씀하셨다.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룹 넘
어지게 하는 자로다." 왜 주님깨서 베드로콜 사탄이라고 매도하셨움까? 그것은 그가 예수 그리
스도의 허상을 만듈어 예수 그리스도의 실상율 짓발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베
드로플 향해 _너는 나콜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라고 하신 양씀의 뜻은. •너는 나의 실상을 파괴
하는 자'란의미이다.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신 예수님께서 제임 먼저 무엇음 하셨는지. 성경 마태복움 21장 12절이 이
렇게 밝혀 주고 있다. 에수깨서 성전에 들어가사,성전 안에서 머매하는 모든 자물 내어쫓으시
며. 돈 바꾸는 자콜의 상과, 비좋기 파는 자콜의 의자音 줄러업으시고. - 성경 마태복음 21장 12
절 말씀
예수님이 제일 먼저 하신 일은,에루살S 성전으로 들어가신 일이었고, 성전에 콜어가서서 제
일 먼저 하신 일은, 그 성전에 있던 모든 장사꾼둘올 내어쫓으시고, 그둘의 의자와 장사판을 둘
러옆으신 것이었다. 성경은 우리의 마용읗 가리켜, 성전이라 부르고 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
콜 바르게 믿고자 하는 자들, 진리g 따르는 자둘이 제일 면저 해야 할 일이란, 성전 된 자신의
마융을 먼저 둘러엎는 일임을 일깨워 주고 있다. 둘러엎는다는 것은 완전히 뒤집는다는 말이다.
예루살렘 성전이 자신의 욕망에 집착하는 장사꾼듣로 가득 자 있옳 때. 예루살렘 성전에는 더 이
상 하나님의 능력이 임합 수가 없었다. 그러나 주께서 그듈옳 모두 내어쫓으시고 장사판을 둘러
옆었을 때 비로소, 그 성전에 하나님의 눙력이 임하여 소경이 눈옳 뜨게 되었고, 저는 자둘이 걷
게 되었고, 어린아이듈의 온전한 찬미가 율려 퍼졌다고 성경은 전해 주고 있다. 자기 진착어! 빠
진 자신의 마음, 자기 욕망과 자기 이기심으로 온통 뒤덮여 있는 자신의 마움이, 꿀러엎어질 때
에만 우리는 진리의 동로가 될 수 있고. 빛이 될 수 있고,소금이 될 수가 있다.
성경 마태복음 13장에 보면 씨 뿌리는 비유가 나온다. 길가에 원어진 씨. 돌발에 떨어진 씨. 그
리고 가시떨기 위에 떨어진 씨는, 열매융 맺는 것 갈았으나, 이내 다 죽어 버리고 말지만, 옥토에
떨어진 씨는 100배, 60배, 30배의, <3매營 멋논다논 이야기다. 여기서 들발과 옥토의 차이는 무
엇인가? 옥토는 갈아엎어진 곳, 완전히 뒤집어진 곳을 의미한다. 뒤진어진 곳에서만 진리는 열매
를 맷는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분들은 지금 무엇 때문에 교회에 나오고 있는가? 무엇 때문에 예
수 그리스도콜 믿는가?
진리콜 예수 그리스도플 자기 욕망 성쥐의 도구로 삼기 위해서 아닌가? 만약에 그렇다면 그대
듈이 일평생 수없이 많은 소유품 얻는다 함지라도, 그대둘은 •기탄장리•에 나오는 걸인저럼, 한평
생 영론의 걸인, 마용의 거지로 살아같 수밖에 없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심령이 가난한 자
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회 것임이요. - 성경 마태복용 5장 3연 말씀
마음이 가난하다는 것과 마음이 걸인이라는 것은 절대로 같은 의미가 아니다. 내 마g율 철저
하게 부인했을 때, 내 마음을 쿨러 업었을 매에야, 비로소 그의 마움은 비어 있는 가난한 마음이
된다. 바로 그렇게 비어 있는 마음에만 하나님 나라의 진리는 재워질 수 있다. 그러나 자신의 마
음을 갈아엎지 못한다면, 우리는 한평생 진리의 열매롤 얻지 못하는 영혼의 거지, 마음의 걸인으
로 살아갈 수밖에 없다. 오音 이 시대는 더 이상 자기 집착에 빠진 붕의한 삯꾼을 소위 세속적인
영울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오늘 이 시대는 오직 진리 안에서 자기귿 부인함 중 아는 자,자신의 마용을 비우는 자, 그래서
철저하게 진리의 지배콜 받기 원하는 진리의 한 사랑을 필요로 하고 있다. 가울이 되면 낙엽이
진다. 낙엽이 저야 그 이등해에 새 잎이 등아난다. 사랑들은 모두 잎이 명어진다고 말을 한다. 그
것은 떨어지는 임을 중심으로 생각한 것일 뿐. 나무의 입장에서 생각하면 다론 표현이 가능해진
다. 잎이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나무가 잎옳 버리는 것이다.
나의 것임에도 붉구하고, 내게 속한 것임에도 g구하고, 나무는 때가 되면, 미련 없이 버릴 것을
버릴 줄 안다. 그렇게 해서 그 다용 해에,더 중만한 생명으로 재워진다. 업류 도공과 삼류 도공
의 차이가 무엇인지 아는가? 상류 도공은 자기가 만든 작풍이 아까워서 만드는 대로 다 시장에
내다 파는 사람이다. 그래서 그가 만드는 것은 모두 싸구려일 수밖에 없다. 반면에 일류 도공은
아무리 아까워도 완벽한 작풍이 나을 때까지 수십 번, 수백 번이라도 깨어 버린다. 그렇게 해서
설령 그가 1년에 단 하나의 작풍밖에 만들지 못한다고 할지라도,그것은 위대한 예슬작풍으로
이 땅에 오래도록 남게 되는 것이다.
일류 소설가와 삼류 소설가의 자이가 무엇인지 아는가? 삼류 소설가는 자기가 취재한 것, 자기
가 알고 있는 것은 아까워서 하나도 버리지 못한다. 어떻게 해서든지 자신의 소설 속에 그 모든
것을 다 표현하려고 한다. 그래서 초점이 흐려지고 신만해진다. 무슨 말을 하려는 것인지 알 수
가 없다. 반면에 일류 소설가,일류 시인은 아는 것이 수없이 많용에도 불구하고,버릴 줄 알고
포기할 줄 아는 사람이다. 그둘은 절제된 언어로 필요한 것만움 표현하기에, 원고지 위에 써 내
려가는 모든 글들이 위대한 작풍으로 남게 되는 것이다.
아무리 아름다운 대리석이 있다 합지라도 대리석 그 자제로 내버려 두면, 그것은 단순한 돌덩이
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예슬가가 다둥으면 그것은 위대한 예습작품이 된다. 대리석옳 다듬느
냐 다등지 않느냐에 따라 단순한 들명이로 존재하느냐,아니면 시간과 공간윤 초월한 작풍으로
남느냐가 결정되는 것이다. 다동는다는 것은 버현 것營 버리는 것, 즉 자기 부인윤 의미함은 재
론의 여지도 없다. 모세는 미디안 광야에서 40년 동안이나 자신을 다동고 부인하는 법을 배웠다.
다윗은 근 10년 동안이나 사을 왕의 칼돌 피해 다니면서 자기音 다폼고 부인하는 법을 배웠다.
사랑하는 여러분! 지금부터 여러분들도 자신에게 집착하고자 하는 마옹을 다둥는 법을 배워야
한다. 여러분들이 지금부터 자신의 마용움 다둥는 5욷 론련하지 않는다면, 나이가 많아졌을 때
어찌 타인을 위한 넉넉한 거옥이 원 수 있겠는가? 지금은 자신의 욕망대로 살면서 어떻게 10년,
20년 후연, 진리의 통로가 정 수 있다고 장담함 수 있겠는가?
자기플 부인할 줄 아는 참된 믿용은 자신의 마용 속에서 시작된다는 것움 알아, 자신의 마옴옳
진리 앞에서 비옮 즐 아는 자에게만, 그 인생이 온종 왕금 갑은 가지로 승화립 수 있으며, 바로
그 인생을 통해서만 하나님의 위대한 새 역사가 변져& 것이다. 그 까망울 아는가? 그대들이 비
우고 다듬은 바로 그 빈 마용 속에 주님깨서 역사하시기 때문이다.
-즐저: 이재철 목사님의 저서 '청년아 올더라도 뿌려야 한다' 中에서一®.
에수가좋다오
글을 보시고 스3업 하시기 전에 그냥 가지 마시고 땟글로 따뜻한 소갑으로 감사들 표하는 그리스도인이 됩시다.

출처 : ╋예수가좋다오
글쓴이 : (一麥.)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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