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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께 고리를 걸고 매달렸던 `갈릴리 사람`들

by 【고동엽】 2021. 12.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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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께 고리를 걸고 매달렸던 '갈릴리 사람'들 행10:37 08.10.12. 설교 녹취

 

 

 

갈릴리는 '고리'라는 뜻이며,

갈릴리 사람은 '고리처럼 매달리는 사람'으로 볼 수도 있다.

 

요한이 그 세례를 반포한 후에 갈릴리에서 시작되어

유대에 두루 전파된 그것을 너희도 알거니와 행10:37

 

 

과거에 모든 풍족함 가운데 <예루살렘 사람>처럼 살던 우리는

세계적인 경제난을 계기로 겸손한 <갈릴리 사람>으로 돌아와야 한다.

예수님은 <예루살렘 사람>들을 택하지 않으시고, <갈릴리>사람을 택하셔서

그 은혜와 사랑을 부어주셨다...

 

 

▲왜 하필 갈릴리에서 공생애를 시작하셨는가?

세례요한이 사역을 펼친 곳은, 요단강 하류 예루살렘 부근의 광야다.

그러나 예수님이 사역을 시작한 곳은, 정반대편인 요단강 상류 갈릴리였다.

 

일반적으로, 한 시대의 힘은 대도시에서 나온다.

정치, 경제, 교육, 문화적인 힘이 주로 대도시에 집중되어 있다.

 

이런 관점에서 세례요한이 사람들에게 세례를 베풀면서

사역을 <대도시 근처> 광야에서 펼친 것은 참으로 적절했다.

그렇다면 예수님도, 당신의 사역을 예루살렘에서부터 시작하시는 것이

더 타당했을 것이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 정 반대편인 갈릴리에서부터 사역을 시작하셨다.

당시 갈릴리는 이스라엘에서 가장 낙후되고 가난한 빈민들이 모여 살던 곳이었다.

갈릴리는.. 강원도 평창이나, 지리산의 산간벽지마을로 보면 된다.

 

왜 예수님이 갈릴리에서 사역을 시작하셨을까?

왜 예수님은, 그 넓고 넓은 이스라엘 사방 천지에서

하필이면 그 갈릴리에서부터 당신의 사역을 시작하셨는가?

 

 

◑마태와 누가의 말씀이 약간 다른 이유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 마5:3

 

너희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 것임이요 눅6:20

 

▲누가복음의 수신자는 데오빌로 각하였다.

누가의 진의는, 이런 의미이다.

데오빌로여!, 당신은 가진 것도 많고, 지식도 많고, 신분도 높습니다.

그래서 당신은 스스로 믿는 구석이 많습니다.

그러나 당신이 믿는 구석이 많은 만큼

하나님을 믿는 마음은 상대적으로 작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가난한 사람들은 자기에게 의지할 것이 없으므로

그들은 복됩니다.

그들은 오직 하나님 나라만 소망하는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없는 사람이 도리어 감사한다.

교우들 가운데, <지하실>에 세 들어 사는 교우들의 소원은

창문이 달린 지상으로 올라오는 것이다.

그래서 어떻게 해서 <지상층>으로 올라오게 되면,

이사 가서, 하나님께 감사의 눈물을 흘리는 모습을... 종종 본다.

 

그런데 <지상층>에서 늘 살던 사람들은,

자기 집에 창문이 달려 있다고 감사해서 눈물 흘리는 사람은... 없다.

방에 쏟아져 들어오는 햇볕, 집의 앞뒤로 원활한 통풍 때문에

감사해 본 사람 있으신가?

 

원래부터 <지상층>에 사는 사람들이, 집에 대해 더 많이 감사해야 하는데,

<지하층>에서 오래 고생한 사람들이, 집에 대해 더 많이 감사하고 있다.

이렇게 가진 것이 <많은> 사람들은... 어쩐지 하나님께 드리는 감사가 <적다.>

건강을 감사하는 자는... 건강이 적은 사람들이다.

물질을 감사하는 사람은... 물질이 모자라는 사람들이다.

은혜와 믿음에 감사하는 사람은... 심령이 가난한 사람들이다.

 

▲반면에 마태복음의 수신자는 가난한 유대인들이었다.

그래서 마태는, 그 가난한 자들에게 심령이 가난한 자가 복이 있다고 증언했다.

 

단지 가난하다고만 해서, 저절로 물질을 초월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가난하기 때문에, 물질에 더 눈이 멀어서, 탐닉하거나 집착할 수 있다.

가난하기 때문에, 물질에 관한 한, 더 마음이 완악해 질 수도 있다.

 

마태의 진의는 이런 의미다.

여러분들이 단지 가난하다는 이유만으로, 복된 것은 결코 아니다.

먼저 너희의 심령이, 마음이 가난해져야 한다.

너희의 마음이 가난해지지 않으면, 너희의 곤궁함이

너희를 누구보다도 완악한 사람으로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갈릴리 사람이기 때문에... 주님을 간절히 찾게 되다.

 

▲‘가난한’ 사람이 하나님을 의지한다.

‘가난한 심령, 가난한 마음’이란.. 자기 자신을 의지하지 않는 마음이다.

경제적 빈부에 상관없이

더 이상 자기 자신을/자기 자신의 소유를,

의지하지 않는 마음이다.

 

그 마음은, 철저한 자기 절망으로부터 비롯된다.

자기 자신에 대해서, 자기 자신이 지닌 것에 대해서

철저하게 절망한 사람의 마음만

더 이상 자신을 의지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만 신뢰하게 된다.

 

▲예수님이, 이스라엘의 그 많은 동네 중에서

유독 갈릴리를 당신 사역의 시발점으로 삼으셨던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예루살렘의 상류층들은, 복음이 절박할 이유가 전혀 없었다.

그들의 학력, 경력, 재력, 종교적 권력들이

자기 자신들의 기득권을 안전하게 지켜줄 수 있으리라 믿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갈릴리 사람들의 경우는 전혀 달랐다.

이스라엘의 북쪽 끝자락에 자리 잡고 있는 갈릴리는

당시 가장 낙후되고 가난한 빈민들이 모여 살던 동네였다.

 

갈릴리 호수 주변에 띄엄띄엄 자리 잡고 있는 동네마다

빈민촌 아닌 곳이 없었다.

그 갈릴리 사람들에게 지닌 것이 있다면,

대대로 물려받은 가난, 무지, 질병 등이었다.

 

그들은, 자신을 지킬 수 있는 힘, 능력, 경제력 등이 전혀 없었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들의 삶의 곤고함으로부터 구원해줄

메시야를 대망하고 또 대망했다.

그 이외에는 다른 방도가 전혀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스스로 가진 것이 많다는 예루살렘 사람들을 제쳐놓고

자신에게 믿을 것이 아무 것도 없기에

오직 메시야만을 대망하는 사람들이 모여 있는 갈릴리를

예수님이 당신 사역의 시발점으로 삼으신 것은... 너무나 당연했다.

 

▲이사야의 예언이 성취되었다고 선포하시다.

 

이사야 9:1~2

전에 고통 받던 사람 (갈릴리 사람들) 에게는 (후에) 흑암이 없으리로다.

옛적에는 여호와께서 스블론 땅과 납달리 (즉, 갈릴리) 땅이 멸시를 당하게 하셨더니

후에는 해변 길과 요단 저쪽 이방의 갈릴리를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흑암에 행하던 백성이 큰 빛을 보고

사망의 거늘진 땅에 거주하던 자에게 빛이 비취도다. 마4:15~16

 

갈릴리 사람들이 얼마나 가난하고, 무지하고, 얼마나 비천했으면

그들은 같은 동족으로부터도, 멸시 받는 고통 속에서 살았다.

 

한 마디로, 그들은 철저하게

자기 자신의 처지에 대해서 절망한 사람들이었다.

자기들에게서는 도무지 어떤 희망, 소망이 없다는 것을

일상에서 날마다 쉽게 확인할 수 있었다.

 

그래서 그들에겐 흑암이 있을 수 없었다.

그들이 자기에게 절망하면 하는 만큼 하나님을 더욱 의지했고

그들의 중심을 아시는 주님께서

그 갈릴리로

진리와 사랑과 생명의 빛으로 임해 주셨기 때문이다.

 

▲가난이 결과적으로 은총이었다.

그러므로 결과적으로 그들이 같은 종족으로부터 멸시를 받을 만큼

고통스러운 삶을 살았던 것은 크나큰 하나님의 은총이었다.

바로 그 고통으로 인해 그들은 하나님만을 소망하는

가난한 심령의 소유자가 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예수님께서 잘나고 똑똑한 예루살렘 사람들을 다 제쳐 놓으시고

무식하고 가난하고 비천한 갈릴리 사람들을 당신의 제자로 삼으셨던 이유도

바로 이것이었다.

 

만약에 그 제자들이 예루살렘 사람들처럼 스스로 <지켜야> 할 것이 많았던들,

그들은 자신의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의 제자가 되려 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될 수도 없었을 것이다.

 

그들은 모두 멸시와 고통의 땅 ‘갈릴리 사람들’이었기에

예수님을 쫓는 제자들이 될 수 있었다.

 

▲히브리어로 ‘갈릴리’는 <고리>를 뜻한다.

따라서 누구든지 더 이상 자신을 신뢰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만을 신뢰하면서

스스로 자기 자신을 하나님께 매어다는 ‘고리’가 되는 사람이라면

그는 누구든지 갈릴리 사람이 될 수 있다.

 

그 위대한 사도 바울은 결코 멸시의 땅인 갈릴리에서 태어나서 성장한

갈릴리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헬라문화권의 대도시 길리기아 다소 출신이었다.

또한 예루살렘에서 수학한 엘리트 중의 엘리트였다.

 

그는 자기 자신의 능력을 전폭적으로 신뢰하는 자기 신념의 소유자였다.

하지만 그가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그 자신이 그동안 의지해왔던 자신의 것들이란

하나님 앞에서 한낱 배설물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래서 그는 그 순간부터 자신을 의지하던 자만을 버리고

자기 자신을, 갈릴리 사람들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의지하고,

그분께만 매달리는 ‘고리’가 되었던 것이다.

주님께서는 <갈릴리 사람>이 된 사도바울을 통해.. 인류의 역사를 새롭게 하셨다.

 

▲예수의 제자라고 무조건 <갈릴리 사람>은 아니다.

반드시 가난하고 비천하고 무지한 사람들만

참된 제자가 될 수 있는 것은 결코 아니다.

 

가룟유다는 (가룟, 수15:25의 그리욧)

은 삼십에 눈이 멀어,

예수 그리스도께 거는 ‘고리’가 되려고 하지는 않았다.

 

3년을 동했으면서도 진리를 십자가에 못 박는

가장 치욕스런 인간으로 전략하고 말았다.

 

▲하나님께 가까이함이 내게 복이라

내가 주 여호와를 나의 피난처로 삼아 주의 모든 행적을 전파라리이다. 시73:28

 

내 삶의 고통과 고달픔으로 인해

더 이상 자기 자신을 신뢰하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께 ‘고리’가 되어 그 분께 매달리고,

그분을 (시편 기자처럼) 가까이하는 사람은... 정말 복된 사람이다!

 

▲마치는 말

지금 세계적인 경제난으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고통 받고 고달파지고 있다.

이것은 우리가 <갈릴리 사람이 될> 절호의 기회이다.

우리가 그 무슨 부족함으로 인해 고통을 겪고 있다면,

지금이야말로 그 고통으로 인해

더 이상 나를 신뢰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만 신뢰하는

가난한 심령을 소유할 때이다.

 

그 부족함으로 인해

부족함이 없는 하나님께

우리 자신을 내다는 ‘고리’

즉 ‘갈릴리 사람’이 될 절호의 기회이다.

 

그 경제적 부족함의 고통으로 인해

복음과 진리의 가치와 의미를 새롭게 할 때이다.

 

지금 주님은 우리를

<예루살렘 사람>으로 살도록 내버려 두시지 않으시고,

<갈릴리 사람>이 되도록 우리를 내모시고 있다...

 

<08.10.12. 인터넷설교에서 발췌 *원 제목 : 갈릴리에서

 

출처 : 냉수 한 그릇
글쓴이 : 김지윤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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