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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에 접속된 내 인생, 매듭을 잘 지어야 왕상1;1~4, 고후4:18 2003.04.15.설교녹취
우리가 나이들어 갈수록 마지막 순간에, 더더욱 주님을 경외하는 것은 더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내 인생 전체를 규정하고
이 땅에 흔적으로 남기 때문입니다.. 라는 주제의 설교문.
인생은 짧지 않다에 계속 이어지는 설교문
◑내 인생은, 영원에 접속되어 있습니다.
▶여러분이 세상을 떠난 뒤에도, 여러분의 존재는 남습니다.
그리고 그 삶은, 이미 어제 그제 말씀드린 것처럼
살아있는 사람들의 삶에도 영향을 미칩니다. 미래에까지 영향을 미칩니다.
절대로 인생은 빌 허, 없을 무, 허무로 끝나지 않습니다.
이 사실을 알 때야만, 인간은 많은 삶의 족적을 남기기 위해서
그 중심이 진리를 향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인생에 대한 두 흐름을 보았습니다.
-한 흐름은 인생은 유수다. 살 같이 빠르다. 결과는 허무하다.
-또 하나의 흐름은 아니다. 인생은 유수가 아니다. 영원에 접속되어 있다.
그리고 그 인생은 진리를 따라 살기에는 충분히 길다는 것입니다.
내 인생의 그 결과는, 허무가 아니라, 반드시 영원 속에 살아남는 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하나님을 믿는다고 고백하면서도
구원이 결국 영원임을 깨닫지 못하면,
그래서 그의 중심이 영원에 접속되어 있지 아니하면
결국 그의 믿음은 이 세상 끝을 향한 믿음밖에 되지 않습니다.
그가 아무리 열심히 살아도 그에게 인생은 유수요,
살 같이 빠르고 끝난 뒤엔, 허무를 탄식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내가 영원에 접속 되었다고 생각해봅시다.
영원이 변합니까? 변치 않습니다. 그 영원 위를 내가 걸어가는 것입니다.
영원이 나를 스쳐가는 것이 아니라 내가 영원 위를 걸어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이 땅에 몇 년을 살든, 내 인생을
그 영원을 퍼 올리는 것으로 살아가게 됩니다.
영원에 속도가 있습니까? 없습니다.
그러므로 영원에 접속된 삶은, 결코 살 같이 빠를 수 없습니다.
영원에 끝이 있습니까? 없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이 영원 위를 바른 행보로 똑똑 걸어갈 때
나의 모든 삶의 족적은 영원한 흔적으로, 영원한 족적으로, 영원한 영상으로
축적되고 쌓이고 남게 되는 것입니다.
▶본래 인간은 죽지 않는 존재로 하나님께서 창조하셨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죄로 인해서 인간은 죽음을 보게 되었습니다.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지어다.’
말하자면 죄로 말미암아 인간은 영원을 상실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인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구원은
당연히 영원을 회복해주시기 위함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시고, 믿음의 조상으로 삼으시죠?
그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말씀입니다.
창17:7 내가 내 언약을 나와 너와 네 대대 후손의 사이에 세워서
영원한 언약을 삼고, (영원히) 너와 네 후손의 하나님이 되리라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약속이 영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복음에 약속하신 구원도, 당연히 ‘영원한’ 구원입니다.
▶주님이 오신 까닭이 세상에서의 부귀영화를 위함이 아닙니다.
만약 그것이 목적이 되면 결국은 허무로 끝나거든요.
영원을 주시기 위해 오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구원을 얻은 사도 바울은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우리의 돌아보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라.’ 고후4:18
사도 바울은 그 이후로 일평생 영원에 접속되어서 살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영원 위에서 하나님께서 맡기신 인생의 주체자로 살아갈 수 있었고
그에게 있어 인생은 결코 짧지 않았고,
그의 모든 삶의 족적은 성경이 되어 우리에게까지 남아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처럼 우리가 영원에 접속되어 있을 때
우리가 전혀 다른 차원의 인생을 살 수 있다는 것을 깨닫고 나면
우리는 여기에서 중요한 교훈을 얻게 됩니다.
◑인생은 마무리가 중요합니다.
그 교훈이란, 인생의 전 과정 중에서 중요치 아니한 과정이 어디 있겠습니까만,
그러나 인생의 마무리는, 매듭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다는 교훈입니다.
시작도 굉장히 중요합니다.
시작이 중요한 까닭은 전체의 성격과 방향을 정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마무리가 더 중요한 까닭은, 전체의 수준과 질을 나타내기 때문입니다.
내가 아무리 바른 방향으로 갔다 할지라도
마무리가 바르지 못하면,
그것은 모래위의 집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여러분 만약에 박정희 대통령의 인생이, 역으로 진행되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그분이 5.16으로 대한민국의 3권을 장악한 뒤에
처음에는 완전히 권력의 시녀로 살다가
나이가 든 뒤에는 정말 국민에 봉사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고
국가와 민족을 위하여 선정을 베풀다가
좋은 후계자에게 권력을 이양하고 자신의 임기를 마쳤습니다..
인생이 그렇게 마무리가 좋았더라면 그분의 평가는 어땠겠습니까?
완전 국가적 영웅으로, 지금보다 백 배 더 존경을 받았을 것입니다.
가룟 유다의 인생이 거꾸로 (마무리가 좋게) 진행되었다면 어땠겠습니까?
그가 처음 주님을 만나서는 다른 제자들처럼 주님의 신통력으로
자신의 욕망을 성취하기 위하여 온갖 재주를 부리다가
나중에 마무리에, 크게 돌이켜서
정말 주는 그리스도시여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인격적으로 깨달은 뒤에
그 주님을 위하여 자기 인생을 맡겼더라면,
가룟 유다의 인생에 대한 평가는, 전혀 달라졌을 것입니다.
많은 국민들로부터 존경받는 박정희 대통령은
여러 가지 공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말년의 그는, 마무리가 좋지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충복인 정보부장의 총에 맞아 서거했습니다.
그래서 그의 평생의 모든 공까지도, 그 과에 상당부분 덮여버리고 말았습니다.
(지금 ‘마무리가 중요하다’는 주제를 말씀드리는 중에
민감한 정치지도자 문제를 거론하게 된 것을 양해 바랍니다.
거론된 인물보다, ‘마무리가 중요하다’는 주제에, 더 주목해 주시기 바랍니다.)
인생의 매듭은 이처럼 중요합니다.
◑자기 인생의 마무리를 잘 한 다윗
오늘 본문은 다윗의 인생 마지막 순간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다윗은 어렸을 때부터, 자립성과 공생성이 넘쳐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다윗을, 이스라엘 역사의 지평을 흔드는 당신의 도구로 쓰셨습니다.
그러나 다윗의 일평생이 순탄했던 것만은 아닙니다.
다윗의 나이가 70이 되어서, 죽음을 목전에 두고 있습니다.
바로 자기 인생을 마무리하는 시점이에요.
그런데 다윗 주위에 있는 중신들이 다윗왕이 너무 연로하셔서 잠자리가 추울테니
임금님의 이불을 따듯하게 해줄 동녀를 한 명 구해드리자.
이것은 유대 사람들이 유별나거나, 다윗 중신들이 유별나서 하는 짓이 아니라
인류 역사를 보면 모든 나라에 다 있었던 제도입니다. 우리나라에도 있었습니다.
그 체온으로 자기 체온을 덮이는 겁니다. 바꿔 말하면 인간 난로인 셈이죠.
그런데 중신들이 아무 여자나 데리고 온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스라엘 사방 경내에 아리따운 동녀를 구하다가
가장 예쁜 여자 아비삭을 뽑아서 왕께 데려왔습니다.
그런데 본문 왕상1;1~4의 단락이 이렇게 끝납니다.
‘왕이 더불어 동침치 아니하였더라.’
이스라엘에서 가장 아름다운 처녀를 심히 아름다운 처녀를 뽑아서
방에 넣어드렸음에도 불구하고, 왕이 동침치 않았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성경을 볼 때 언뜻 생각하면, 이 부분은 없어도 좋을 것 같습니다.
편집상, 이 단락을 빼도, 성경의 흐름에 아무 상관 없습니다.
본문의 직전 문맥은, 사무엘하의 끝부분, 즉 사울의 인생이 마무리되는 내용이고,
본문 직후 문맥은, 왕상1:5, 학깃의 아들 아도니야가 왕이 되었다..
차라리 본문의 단락(왕상1:1~4)을 빼는 것이, 더 연결이 자연스럽습니다.
그런데 왜 이런 돈키호테식의 이야기가 삽입되어있는가요.
중요한 것은, 이 이야기가 없으면, 다윗의 삶이 “마무리”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마무리”라는 단어가, 이 설교의 키워드입니다.)
▶앞서 말씀드렸듯이, 하나님께서 그처럼 다윗에게 은혜를 베풀어주셨지만
다윗이 일평생 하나님께서 의롭게만 산 것은 아니었습니다.
한 순간 그도 권력과 정욕의 노예가 되죠.
남의 아내를 훔쳐서 동침을 하죠. 그 여인이 아이를 갖자,
그 남편을 불러서 거짓 알리바이를 만들려고 합니다.
뜻대로 되지 않자 그 남편을 죽여 버립니다.
하나님 앞에서 패륜적인 죄를 서슴지 않았습니다.
그 죄로 인해서 얼마나 이스라엘이 소용돌이 치게 됩니까.
바로 다윗의 큰 아들 압논이, 이복 여동생 다말을 불러다가 강간해버리죠.
왜요? 아버지가 한대로. 배운 대로 하는 겁니다.
그 다말의 오빠 압살롬이 기회를 호시탐탐 노리다가
자기 여동생을 성폭행하고 버린 압논을 칼로 죽여 버리죠.
아버지가 한대로 배운대로 하는 겁니다.
내친 김에 그 아들이 자기 아버지를 죽이겠다고 쿠데타를 일으켰죠.
엄청난 소용돌이에 빠졌습니다.
만약 본문의 부분이 없이, 다윗의 인생이 거기에서 끝났다고 합시다.
어쩌면 다윗은, 마무리를 못 지은, 마무리가 흐지부지하게
그 인생이 끝났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박OO대통령처럼 말입니다.
그런데, 지금 성경은 무엇을 보여주고 있는가요?
인생을 매듭지는 말년의 다윗은
이스라엘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인을, 방안에 넣어주었음에도 불구하고
옛날 우리야의 아내 밧세베와 범하던 그 성적인 범죄에 대해서는
완벽하게 하나님 앞에서 바로 서서, 자기를 지키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부분이야말로 다윗의 명예회복이요,
이 부분이야말로 다윗이 하나님 앞에서 실수한 잘못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그 인생의 매듭이 바르게 되었음을
우리에게 전해주는 하나님의 메시지가 되는 것입니다.
바로 이 부분 때문에 다윗은,
지금 우리가 아는 바대로, 존경받는 다윗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마치는 말
여러분, 우리가 한 평생 주님을 모시고 주님과 동행하는 삶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나이들어 갈수록 마지막 순간에 더더욱 주님을 경외하는 것은 더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내 인생 전체를 규정하고 이 땅에 흔적으로 남기 때문입니다.
가나의 혼인 잔치가 어떠했습니까?
처음에 내놓은 포도주보다, 나중에 주님께서 물로 만드신 나중 포도주가 좋았습니다.
어떻게 가능하죠? 그곳에 주님께서 계셨기 때문입니다.
우리 인생이 그와 같아야 하는 것입니다.
처음의 내 인생보다, 주님으로 인해 변화된 나중의 내 인생이
훨씬 더 아름답고, 존경스런, 향기 나는.. 그런 인생이 되어야 하는 겁니다.
내가 주님과 동행만 하면 내 인생은 갈수록 향기롭게 되어있습니다.
나의 능력이 아니라 그분에 의해서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인생의 매듭을 더 잘 지어야 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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