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주제별 설교〓/설교.자료모음

자립성과 공생성 2

by 【고동엽】 2021. 12. 29.
 
처음 목록가기
 

자립성과 공생성 2 빌4:12~13 *원제목 : 홀로 더불어 2 of 3

 

 

 

그렇다면 이 중요한 <자립과 공생> 이 두 면을 우리가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겠습니다.

 

우리가 먼저 자립에 대해 생각해 보겠습니다.

자립하지 않는 자는 공생 할 수 없습니다.

자립하지 않는 자는 어쩔 수 없이 기생자가 되거든요

그러므로 자립이야 말로 공생의 동기요, 출발점입니다.

우리가 자립해야 한다고 할 때, 4가지 측면에서 조명해 볼 수 있습니다.

 

 

1. 첫 번째는 경제적 자립입니다.

 

누구든지 경제적으로 자립하지 못하면, 평생 누군가에게 해를 끼치게 마련입니다.

반드시 우리는 경제적으로 자립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오해가 없으시기 바랍니다.

 

경제적으로 자립해야 한다는 뜻은, 내가 필요한 만큼의 돈을

스스로 버는 능력을 갖추는 것을, 절대로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부자가 되는 것 자체가, 우리의 목적이 결코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에 따라서, 내가 부유하게 살 수도 있지만, 가난하게 살 수도 있습니다.

 

경제적으로 자립한다는 것은

내게 필요한 만큼의 돈을 스스로 버는 능력을 배양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경제적 상황에, 나를 맞출 줄 아는 것입니다.

이 능력을 기르지 못하면, 그리스도인들은 일평생 돈의 노예로 살게 됩니다.

 

제가 서울에서 처음 목회를 할 때, 3년 정도 되었을 때의 일입니다.

한 청년이, 제가 섬기는 교회에 나오게 되었습니다.

그 청년은 아주 가난 속에서 컸습니다.

혼자 열심히 공부를 해서, 서울 시내에 있는 명문대학에 입학했습니다.

 

입학과 동시에 운동권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복역을 하게 되었습니다.

출감했지만 학교에 복학 되지 않았습니다.

당시 사회적인 분위기로, 어디 제대로 된 회사에는 취직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가 얻을 수 있는 일자리라고는, 조그만 회사의 외판 사원 직이었습니다.

그런데 사랑하는 여인을 만나서, 갑자기 결혼을 하게 되었습니다.

 

아마 자기 경제적 능력이 그렇게 넉넉하지 못했기 때문에, 자격지심 상 허세가 필요했겠지요.

신문을 보고, 사채 광고를 보고 사채를 썼습니다. 그리고 결혼을 했습니다.

 

조그만 아파트를 전세를 내고 신혼살림을 막 꾸렸는데,

당시에 신문에 광고 나는 그런 사채 뒤에는, 폭력 조직이 있지 않습니까?

 

그가 사채를 쓴 돈은 1천만 원이 안 되는 돈이었는데,

불과 육 개월 만에 그 사람들의 계산에는

이자에 이자를 붙여 25백만 원이 되었습니다.

매일 갚으라고 협박입니다.

 

그런데 외판사원이 무슨 수익이 있습니까?

급기야는 폭력 조직에서 네가 만일 돈을 갚지 않으면 네 아내에게 위해를 가하겠다

고 협박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형제는, 자기가 사랑하는 아내이기 때문에

지금 살고 있는 생활수준을, 그 이하로 떨어뜨리고 싶지 않은 겁니다.

그대로 살고 싶은 겁니다. 그러면서 그 위기를 벗어나고 싶은 겁니다.

 

그래서 목사인 저를 찾아왔습니다. 그리고 부탁을 했습니다.

우리 교회가 헌금의 50%를 구제를 하니까,

대단히 미안하지만 그 구제의 대상에 저를 포함 시켜주십시오.

그래서 이 사채를 교회가 갚아 주시면, 제가 평생을 통해 갚겠습니다.’

얼마나 절박한 일입니까.

 

제가 그 얘기를 듣고 그 형제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형제여 만약 형제가 50이나 60세라면, 이 문제를 안건으로 제직회에 올려보겠습니다.

그런데 형제는 지금 20대입니다.

형제가 열심히 일을 하다가 빚을 진 것도 아니고, 허세를 부리다가 빚을 진 것인데,

이 난관을 형제 스스로 극복해 보지 못하면, 형제는 평생을 남의 도움 속에서 살아야합니다.

 

오늘 당장 집에 가서, 아내에게 사실을 털어 놓으십시오.

그리고 전세금 뽑아서 전세금부터 갚으십시오. 그리고 스스로 이 문제를 해결하십시오.

 

그 과정에서 하루세끼 밥을 먹지 못하면, 우리 집에 오십시오. 나하고 같이 먹읍시다.

잠 잘 곳이 없으면 제직회에 안건으로 올려서, 교육관 지하에 방을 한 칸 만들어 주겠습니다.

 

그러나 돈 문제는 혼자 해결해야 합니다. 그래야 사랑하는 아내의 남편으로,

미래에 태어날 자식의 아버지로 책임 있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감사한 것은 그 청년이 제 얘기를 고스란히 받아 드렸습니다.

그날 가서 아내에게 사실을 털어놓고, 전세 보증금부터 뽑아서 빚 갚았습니다.

 

하남으로 이사를 했는데, 당시 하남은 아직 시골이었습니다.

창문 하나 없는 토방 하나를, 전세 50만원에 월세 없이 빌렸습니다.

 

낮에는 사무실에 나가서 열심히 세일즈하고,

하남 근처 고속도로의 정체된 곳에서, 도로에서 물건을 판매했습니다.

 

그 이후에 저는 도속도로를 지나다, 그런 분들을 보면 그냥 보이지 않습니다.

그 나름대로 다 사연이 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렇게 그는 자기 힘으로 그 난관을 극복했습니다.

 

그 뒤 그 청년은 여러 번 저에게 얘기 했습니다.

목사님 그때 정말 감사했습니다.

돈을 주시지 않고, 제 스스로 극복할 수 있도록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성경구절 중에

빌립보서413절이 있습니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입시생 방에 가도 붙어있고, 사업가 방에 가도 액자에 담겨있고..

얼마나 좋은 말씀입니까. 모든 것을 다 할 수 있데요.

 

그런데 빌립보서 4:13절을 그렇게 좋아하시는 분들이

4:12절이 무슨 말씀인지 눈 여겨서 보지 않습니다. 우리는 문맥을 봐야 합니다.

 

내가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아노니

모든 일에 배부르며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연이어서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일을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4:13절을 오해하지 마십시오.

내게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말씀의 진의는,

여러분들의 욕심대로 마음 먹은 모든 일을, 다 할 수 있다는 뜻이 아닙니다.

 

내게 하나님께서 주시는 경제적 여건이 어떤 여건이든,

그 주어진 경제적 여건에 나를 맞출 줄 알겠다,

그런 의미에서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즉 풍부에도 처할 줄 알고, 비천에도 처할 줄 알겠다는 뜻입니다.

 

왜 그럴까요? 나의 어떠한 경제적으로 처한 상황에 나를 맞출 줄 알면,

나는 물질로부터 자유, 자립, 독립하는 자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를 쓰시지 않을 리 없습니다.

 

 

2. 두 번째는행동의 자립입니다.

 

쉽게 설명하면 내 일은 내가 하는 것입니다.

바꾸어 말해서 나와 관련된 일을, 남의 손을 빌려서 하지 않는 것입니다.

 

혹 여러분들 주위에, 신실한 불교 신자나 가톨릭 신자가 있으면

그분들이 식당에 모이거나, 집에서 모일 때 한번 가보십시오.

 

거의 다 현관에서 자기 신을, 반듯 반듯하게 벗어놓습니다.

저는 아직까지도 개신교 교인들의 모임이 있을 때

거기 참석한 모든 분들이, 신을 바르게 벗는 것을 본적이 없습니다.

반드시 누군가가 정리해 줘야합니다.

 

작년에 월드컵 열기로 세상이 떠들썩했습니다.

붉은 악마의 그 열정적인 응원, 그리고 시합이 끝나고 나면

그 붉은 악마들이 깨끗하게 뒷정리를 했을까요?

 

시청 앞은 온통 쓰레기장이었습니다.

그 응원단들 다 간 뒤에, 시청 청소부원들이 밤을 새우며 치웠습니다.

 

요즘 극장은 30대 이상은 잘 가지 않습니다.

극장은 거의 청년들이 가지요

여러분들 그 의자 밑을 보신 적 있지요? 종이 , 과자부스러기, 봉투 들, 쓰레기장입니다.

영화 프로그램이 끝나면 청소부들이 치우는 것을 보십시오.

많이 배웠다는 청년들이 하는 짓입니다.

 

오늘날 우리나라의 입시제도가 병폐가 큽니다.

그 중에서 하나는 부모들이 공부만 하라는 것이지요.

명문 대학교에만 들어가라는 것이지요.

 

그래서 응당해야 할, 자기가 스스로 해야 할 일까지도,

부모가 대신해 주거나, 부모가 대신 결정해 줍니다.

어떤 봉사도 안 해도 됩니다. 그런 아이들이 청년이 되고, 어른이 됩니다.

 

내가 시내 어느 화장실에 들어갔는데 늘 휴지가 걸려있다면,

내가 집의 화장실에 들어갔는데, 타월이 반듯하게 걸려있다면

누군가가 걸어 놓은 것입니다.

 

그것을 감사하는 것이 아니라, 걸어두는 자가 내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기위해서는 반드시 행위의 자립이 이루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제 얘기를 드리는 것을, 양해하고 들어주십시오.

저에게는 사내아이들이 4명 있습니다.

그런데 어릴 때부터 저녁을 먹고 나면 반드시 설거지는

저를 포함하여 남자들 다섯 명이 돌아가면서 합니다.

 

어릴 때부터 여행을 갈 때 부모가 절대로 가방을 챙겨주지 않습니다.

스스로 챙겨야합니다. 그러면 실수가 있지요. 갔는데 어떤 아이는 팬티가 없습니다.

그러면 사흘 동안 한 벌로 지내야합니다. 그래야 그 다음부터 실수를 안 하거든요.

 

초등학교 때부터 용돈을 주는데, 문방구 사는 돈까지 포함해서 줍니다.

자기 용돈에서 학용품 사야 하는데, 과자 많이 사먹어 학용품 못 사면, 책임져야 합니다.

 

그렇게 키우는 이유는 한 가지입니다.

너 스스로 행위의 자립을 이루지 못하면, 평생을 남에게 도움을 주기는커녕,

남에게 민패만 끼치는 자가 된다는 것입니다.

.

 

3. 세 번째의 자립은 의식의 자립입니다.

 

이 세상에는 우리의 자립을 방해하는, 그릇된 풍조와 잘못된 관습, 문화들이 있습니다.

그 그릇된 풍조와 문화로부터 의식이 자립하지 아니하면

결코 바른 자립 인이 될 수 없고, 공생인도 될 수 없습니다.

 

예를 들어서, 어떤 그릇된 관습이나 문화가 있을까요?

그릇된 체면 문화가 있는데, 우리나라의 술 소비, 세계 1위입니다.

 

왜 멀쩡한 대학생들이 대학교에 들어가서 MT를 하는데,

왜 술 먹고 죽이고, 죽는 일이 있습니까? 못 먹는다. 안 먹는다. 는 소리를 못합니다.

 

안 먹는다 말하고, 왕따 당하기를 두려워합니다.

그 그릇된 풍조에서 의식이 자립하지 않는다면, 대한민국 문화 속에서

남자는, 교회 다니는 남자를 포함해서, 거의가 잠재적인 알코올 중독자들이 될 것입니다.

 

여기에도 남자 분들은 술 때문에 고민하시는 분들이 많이 계실 것입니다.

NO 할 수 있어야합니다.

 

내가 예수님을 믿으면서, 그 왕따가 두려워서, 내가 끌려간다면 잘못된 것이지요.

 

한국 카드신용 불량자 세계 1,

왜 그렇습니까? 그릇된 체면문화, 왜 서로 돈 내려고 싸웁니까?

돈이 있어서 돈 내려고 싸우지 않습니다. 허세입니다.

 

한국 명품판매 1, 가짜 명품 판매 1,

 

저는 스위스에서 3년을 살았습니다.

유럽 많은 나라를 가 보았습니다. 백화점에도 가 보았고요.

대한민국 백화점만큼 외제명품이 많지 않습니다.

왜 명품이 필요합니까? 허세입니다.

 

우리의 자립하지 못한 <의식> 가운데, 체면 문화가 있습니다.

그 체면 문화를 단절하지 못하고,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 청정하게 살아가겠다?

힘들겠죠.

 

그릇된 결혼 문화가 있습니다.

청년들이 사회를 개혁 한다고 합니다. 실제로 개혁 의지도 있습니다.

그런데 청년들이 자기 문제에 있어서는, 간과합니다.

 

결혼하는 것 보면 알아요.

청년이 결혼하는데, 왜 아버지 거래처,

그 아버지 거래처 중에서도 누군지 얼굴도 기억나지 않는데

명함만 보고 청첩장 뿌리는 사람들,

 

그 이유가 뭐지요? 축의금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리고 하객이 많이 북적거리는, 성대한 결혼식을 열고 싶은 허례허식 때문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얼굴도 모르는 아버지의 거래처 사람들 끌어 모아서,

남의 돈으로 청년들이 새 살림을 시작합니다.

그것은 자기 수준을 넘어서는 일이지요.

 

그렇게 시작한 그 청년이 그렇게 살다가, 그 수준을 유지하며 살기 위해서,

공무원이 되었는데, 뇌물을 과연 다 뿌리칠 수 있을까요?

 

그 청년이 나이 들어가면서 사업을 하는데, 세금을 정직하게 낼 수 있을까요?

 

어떤 한분이, 자기가 다니는 교회 때문에, 늘 고민하는 분이 있었습니다.

저를 만나서 고민을 하시길래, 제가 그렇게 말했습니다.

아니 그렇게 싫으시면 교회를 바꾸세요.’ 그랬더니

안 된다는 겁니다. 왜 안 되느냐 했더니,

하도 내가 축의금낸 것이 많아서, 내 아들 장가 갈 때까지는 다녀야한다는 것입니다.

 

보십시오. 젊은이들이 결혼하는데 주로 토요일에 합니다.

그리고 아버지와 관련된 사람들이 다 와야 합니다.

 

한국에서는 많이 올수록 좋은 결혼식입니다. 국가적인 낭비가 엄청 나지요 .

세계 어디에도 없는 결혼 풍속입니다. 끊어져야지요.

 

제가 스위스에 있을 때, 한 청년이 제게 부탁을 했습니다.

그 청년은 한국의 모기업에 근무하면서, 스위스 파견 근무를 하며

제가 목회하던 제네바 한인 교회를 나왔는데,

 

그해 12월에 자기가 한국에 가서 결혼을 하는데,

저보고 한국에까지 가서, 결혼 주례를 해 달라는 것입니다.

스위스에 있는 저보고, 결혼주례 하기 위하여, 한국에 같이 나가자는 것입니다.

 

그 청년이 건전하고 중심이 바른 청년이었기 때문에

제가 그 청년한테 이렇게 말했습니다.

 

지금 말씀드린 이런 말을 쭉 하면서

형제 같은 젊은 인재들이 자기 문제를, 자기 문제부터 바로 하지 않고

우리나라의 미래가 밝아지겠습니까? 내가 부탁합니다.

 

만약에 한국 가서 결혼하면, 미리 결혼식하기 전에 촬영이라는 것 하지요?

그거 제일 싼 것이 수백 만 원입니다.

 

보통 교회당에서 결혼 예식을 치르는데,

예배당 하객석, 저 뒤에서 강대상 앞까지, 통로 의자를 백합으로 장식하면

꽃값 만 2백만 원입니다.

 

웬만한 사람들 예단비만 수천만 원씩 합니다. 형제도 그렇게 결혼하렵니까?

그렇게 결혼하면서, 그 주례를 나보고 해달라고 하렵니까?

 

제가 부탁합니다.

신랑 신부 부모님 설득해서, 부모님들만 모시고, 스위스에 와서 결혼하세요.

 

허세 다 빼십시오. 축의금 일체 받지 마십시오.

그리고 당신들 신랑신부 능력대로 가정을 꾸리고 시작하십시오.

그때에만 당신들이 자립정신을 잃지 않을 수 있습니다.”

 

이 청년이 한국에 가서, 신랑신부 부모님들을 설득했습니다.

그 청년의 아버지는, 평생을 외교관으로만 사신 분입니다.

평생 부조를 얼마나 많이 했겠습니까?

 

게다가 그분에게는 외동아들입니다. 아들 한명 밖에 없습니다.

그러면 고위공직에 있을 때, 평생 했던 부조금을, 다 긁어모을 때이지 않습니까?

 

그런데 네 말이 맞다. 너 그렇게 시작해야 한다.’ 허락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양가 부모님이 스위스에 오셔서, 주일 예배 끝난 뒤에 결혼식하고,

교회에서 평소에 밥 먹는 대로 먹고, 교회에서 케이크 준비한 것 자르고,

서울 근교의 단칸방에서 신혼을 시작했습니다.

 

청년 여러분, 단언합니다.

이 그릇된 결혼 문화, 여러분들이 끊지 않고

여러분들이 개혁 운운 하는 것은 자신을 속이는 것입니다.

 

그릇된 성 혼동 문화, 벗어나야합니다.

일본을 잘 아시는 분은 아시겠지만, 지금 일본에서는 대 기업 중견 사원 가운데에

여자임직원이 점점 더 늘어갑니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일본에 있는 거의 모든 젊은 세대는 모두 마마 보이입니다.

아버지는 아침 일찍 직장에 나가서, 하루 종일 일 보시고

아이는 하루 종일 집에서 엄마하고 계속 컸잖아요.

 

그리고 유치원, 초등학교, 중학교.. 거의 다 여선생님들입니다.

그러니까, 여자 상사 밑에서.. 자기 생활이 익숙해진 것입니다.

 

이 청년들이 대학을 졸업하고 회사에 들어갔는데

남자 상사 밑에서는, 불안해서 일을 못하는 겁니다.

여자 상사가 있어야, 정서적으로 편한 것입니다.

그래서 대기업에는 여자 중견사원들이 늘어납니다. 그래야 회사가 안정되니까요.

 

그래서 일본의 미래를 걱정하는 사람들은

바로 <일본 남성의 여성화>

일본의 미래를 얼마나 심각하게 해칠까? 일본의 미래를 걱정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일본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며칠 전에 프랑스에서 발간된 이라는 잡지에서

'남성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보도 된 것이 한국에도 그대로 전제되었지요.

뭐라고 되어있습니까?

 

여성의 비위만 맞추는 환관들만 있다.’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왜요? 미국의 사내들도 다 마마보이거든요.

서양의 사내들도 다 마마보이입니다.

 

우리나라도 똑 같습니다. 자식 한두 명 낳으면서 다 집에서 맘마보이로 자랐습니다.

유치원가면 선생님들 다 여성이지요. 초등학교 선생님들 절대 다수가 다 여성입니다.

 

초등학교 다니는 제 아이의 숙제에 이런 숙제가 있었습니다.

집에 가서 봉숭아로 손톱에 물을 들이고 와라. 이것이 사내아이에게 준 숙제입니다.

 

그래서 제 아내가, 선생님께 정중하게 편지를 썼습니다.

선생님께서 내어주신 숙제의 의도는 잘 알겠습니다.

제 아이에게 그 봉숭아가 손톱에 물들여진다는 것을 잘 가르치겠습니다.

그러나 제 아이에게 물은 들이지 않겠습니다.

저는 제 아이를 사내로 키우고 싶습니다. 이해해 주십시오.’

 

여러분, 남자가 필요할 때를 위해서 바느질을 배우고, 요리를 배우는 것은 있을 수 있는 일입니다.

그러나 손톱에 봉숭아물을 들인다는 것은 생각해 볼 문제입니다.

 

한국에서 오늘도 보도에 났더군요.

요즘 한국에서 연상의 여자와 결혼하는 것 보편적으로 되어 가는데

이제는 재혼하는 여자도 상관없다는 말이지요. 연상의 여인, 이것은 뭘 얘기합니까?

그릇된 성 혼동이 생겨난 것입니다.

여자가 나 보다 나이가 많은 여자 밑에서만 내가 편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형상대로 사람을 만드시되 남자와 여자를 만드셨습니다.

남자는 남자이어야 하고, 여자는 여자 이어야합니다.

이것을 혼동하고, 무시해서 내 자식을 키우면,

하나님께서 쓰시는 자립인도 될 수 없고, 공생인도 될 수 없습니다.

 

로마서122절 말씀이 우리에게 이렇게 명령합니다.

너희는 이 세대를 본 받지 말고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오직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며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라.’

 

그릇된 이 세대의 관습을 본받지 말라는 것입니다.

의식적으로 자립하라는 것입니다.

 

이세상의 그릇된 문화로 부터 자립하지 않고,

우리가 진리의 수호자로서, 이 세상에 설 수 있다는 것도 불가능한 것입니다.

 

 

4. 마지막으로 영적인 자립입니다.

 

반드시 우리 한 사람 한사람 개개인은, 하나님 앞에서 영적으로 자립해야합니다.

우리에게 있어서 교회생활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주일날 선포되는 목사님의 설교말씀을 통해서, 구역 성경공부를 통해서

여러분들이 배우는 것은, 삶에 대한 총론입니다.

 

그 총론에 대한 각론의 적용은, 여러분 각자가 하셔야합니다.

그런데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각론까지 만들어 주는 것을 먹기 원합니다.

 

잊지 마십시오.

여러분께서 영적으로 자립하지 못하시면,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특정 목회자의 노예가 되어서 살아야 합니다.

 

저는 작년 일 년 동안, 세계 많은 곳을 다니면서 많은 청년들을 만났습니다.

그들과 대화하는 가운데, 거의 절대 다수의 청년들이

영적으로 자립해 있지 못하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고민하는 내용이 똑같습니다.

학교 수업, 혹은 내 직장 일과 교회 일을, 어떻게 병행해야 할 것인가?

교회의 행사가 있는데 안 가면 이것이 죄가 되는가?

 

지금 내가 박사 논문을 써야 하는데, 회사 일도 해야 하는데,

이것은 하나님의 일이 아닌가?

 

내가 학업을 계속 할 것인가?

직장을 계속 다닐 것인가?

아니면 신학교 갈 것인가?

 

내가 지금 사귀는 여자와 결혼을 할 것인가? 말 것인가?

고민하는 문제들이 똑 같았습니다.

 

목회자는 말씀의 전문가들입니다.

말씀으로 시대를 해석합니다.

말씀으로 어떤 삶이 바른 삶인지, 총론으로 가르쳐줍니다.

 

그렇다면 크리스천 비즈니스맨이, 사업장에서 어떻게 살아가야 할 것인가의 전문가는

목회자가 아니라, 여러분 자신이 되어야합니다.

그 분야에서는 오히려 목회자가, 여러분들에게 물어야합니다.

 

형제님은 크리스천 비즈니스맨으로 도대체 성경 말씀을 어떻게 적용시키고 사업을 하십니까?’

하나님을 믿는 학자로서, 강단에서 어떤 자세로 살아가야 할 것인가

전문가인 학자 여러분이어야 합니다.

 

교회는 주차장이 아니라 주유소입니다.

주유소는 기름을 넣기 위해서 갑니다. 차를 세워 두기 위함이 아닙니다.

기름을 넣은 뒤에는, 각자가 목적지를 향해서 열심히 달려 가야합니다.

 

여러분들 각자 각자는, 이 세상에서 그리스도의 종으로서 살아가기 위하여

필요한 영적인 힘을 공급받기 위해서, 영적 주유소인 교회에옵니다.

 

여기에서 하나님의 영력을 공급받은 뒤에

여러분의 삶의 현장에서, 여러분들 스스로 적용하면서 나아가야 합니다.

 

그때에만 여러분들 스스로가, 여러분들의 삶의 전문가가 될 수 있고,

여러분의 삶의 터전에, 새로운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저는 많은 청년들로부터 제가 이러이러한 상황에 있는데,

이러이러한 사유가 있는데, 신학을 하여야할까요, 말까요?’ 이런 질문을 받습니다.

 

상대가 청년이 아니라, 40대나 50대라도 상관없습니다.

저는 누구든 그런 상담을 하시는 분들에게 대답은 똑같습니다.

하지 마십시오.’

왠지 아십니까?

 

정말 하나님의 소명을 받은 자라면, 타인과 의논이 불필요합니다.

내가 정말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는데

누구와, 일면식도 없는 누구와 상담을 한다는 것입니까?

내 인생의 전문가는 나인데, 내가 누구와 상담을 한다는 것입니까?

 

그래서 신학교 갈 것인가, 말 것인가? 이미 물었다는 자체가 소명이 없는 것이며,

영적으로 자립을 못했다는 것입니다.

신학교에 가서는 안 되는 것이지요.

영적인 자립은 이처럼 중요합니다.

 

자립은 공생을 위함이라고 그랬지요?

지금까지 자립에 대해 4가지를 살펴 보았고요,

이제부터는 공생에 대해 4가지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다음 호에)

 

출처 : 냉수 한 그릇
글쓴이 : 김지윤 원글보기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