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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립성과 공생성1 레19:9~10, 신23:24-25, 수5:10-12, 삼상17:17-18 2003.04.14.일부스크랩,녹취
◑한 유명인사, 자립성은 있었지만 공생성이 결여되다.
몇 해 전에 프랑스에서 가장 유명한 요리사로 알려진 ‘베르나 르와조’가 엽총으로 자살했습니다.
그것이 얼마나 충격적인 뉴스였던지, 프랑스는 정규방송을 갑자기 중단하고,
그의 자살사건을 뉴스 속보로 방송했습니다.
죽고 난 뒤에 TV의 각 방송사들이, 그에 대한 특집을 방영하기도 했습니다.
프랑스에서 생산되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타이어 회사인 ‘미쉐린 타이어’가 있습니다.
그 회사가 프랑스에 있는 모든 식당들을 매년 조사해서
식당들의 등급을 매기는 잡지를, 매년 초에 발간합니다.
베르나 르와조는, 그 잡지에서 27년 동안, 계속해서 별 3개를 받았습니다.
별 3개가 최고 등급의 좋은 식당입니다.
그런데 2004년 초에 발간된 그 미쉐린 잡지에
웬일인지 베르나 르와조의 식당이 별 1개로 강등 되었습니다.
별 2개가 없어진 것입니다.
결국 쉐프 르와조는 그 사실을 견디지 못하고, 자살을 한 것입니다.
프랑스는 세계에서 알아주는 미식가의 나라인데
그 나라에서 대통령에 버금가는 명성을 누리는 요리사의 자리를 27년간 지켰다고 하면
그가 자기 자신을 바로 세우는 데에는 탁월한 (자립성의) 능력을 지닌 자였음을
자타가 부정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사람은 누구나 나이가 들면 둔해지기 마련입니다.
나이가 들면 젊었을 때, 지닌 솜씨가 줄어들기 마련입니다.
비록 27년 동안 누렸던 별3개가 하루아침에 별 1개로 강등되었다 할지라도
그가 지니고 있는 그 기술로써 더불어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얼마든지 노년에 봉사하면서, 보람을 누리고 살아가는 (공생성의) 길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자기 자신을 세우는 데는 탁월한 자립성의 능력을 지닌 그였지만
다른 사람과 더불어 살아가는
공생성은 그 속에 결여 되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결국 그는 엽총 자살로, 자기의 생을 안타깝게 마감했습니다.
◑공생성만 있고 독립성이 없으면.. 사이비 집단 됩니다.
▲위와 정 반대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사이비 집단의 특징.. 전체는 있는데, 개인이 없습니다.
2000년 경에는 아프리카 우간다에서 사이비 종교 집단에 소속 되었던 235명이
그들의 예배당의 문을 걸어 잠그고 방화를 해서, 집단으로 자살한 사건이 있었습니다.
그 사건 이후에 유럽의 각 방송에서는, 사이비 종교를 특집으로 오랫동안 다루었습니다.
우리 기억에도 생생한 미국의 ‘인민사원 사건’이 그때 재조명 되었습니다.
수백명의사이비 종교 집단회원들이, 그 인민사원에서같이 자살했던 것을 기억하시지요?
미국의 사이비 종교 전문가인 마이클 셔먼 이라고 하는 학자는
오늘날 현재 미국 내에만 1,200개가 있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그 자체가 미국사회의 심각한 사회적 문제라는 것입니다.
우리나라라고 해서 사이비 종교의 무풍지대인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나라도 사이비 종교 집단과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약10여 년 전에 '오대양사건'이 있었습니다.
몇 년 전에는 소위 휴거라고 해서 온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집단들도 있었습니다.
사이비 종교 집단의 특징은, ‘교주 한 사람의 소리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바꾸어 말하자면 집단은 있는데, 전체는 있는데 더불어는 있는데
공생성은 있는데.. 개인성이 없습니다.
비단 사이비 집단뿐만 아니라 종교 집단이든, 기업 집단이든,
개인성이 말살되는 것, 즉 전체성만 갖게 되면,
그때 우리는 사이비 종교 집단과 같다고 말을 합니다.
거기에서는 개인성이 말살되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에는 개인성과 공생성이 공존해야 합니다.
▲우리 각자는, 이 세상에 있는 그 누구와도 대체 될 수 없는 절대적인 존재들입니다.
60억 인구 가운데에서 나와 똑같은 사람은 한사람도 없습니다. 나는 나 한사람 밖에 없습니다.
하나밖에 없다고 하는 것은, 그 의미가 절대적이라는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 각자 각자가 절대적인 한사람으로 존재하지만,
그러나 나 혼자 살 수 있는 것은 절대 아닙니다.
타인과의 관계(공생성) 속에서만 살아갈 수 있게 되어 있습니다.
바로 지금 우리 자신들의 모습이,
공생성을 떠나서는 살 수 없음을 스스로 증명하고 있습니다.
▲자, 보십시오. 제 머리를 다듬는 이발소가 세상에는 있어야합니다.
안경을 만들어 주시는 분이 있어야합니다.
양복천을 만들고, 양복을 만들고, 이 천을 유통시키는 분이 계셔야 합니다.
넥타이를 만드는 분이 계셔야지요. 와이셔츠, 구두 등
지금 우리가 오늘 이 자리에 입고 있는 모습만 보더라도
수많은 사람들의 공생의 결과로 우리가 있는 것입니다.
만약 그 공생이 없다면, 우리는 내일이라도 당장 원시인으로 되돌아가게 됩니다.
이처럼 우리의 삶에는 홀로의 면과 더불어의 면
다른 언어로 표현한다면, 자립의 면과 공생의 면이 함께 공존하게 되어 있습니다.
▲어느 쪽이 더 중요한가? 둘 다 똑같이 중요합니다.
만약에 홀로의 면이 강조되면.. 그 사람은 유아독존이 됩니다. 남을 몰라요.
스스로 유아독존이 되는 사람은, 그 인생 자체가 타인을 해치는 흉기에 불과하게 됩니다.
그러나 더불어 공생이 강조되면.. 그것은 획일주의 전체주의 전제주의가 됩니다.
무서운 것이지요.
히틀러의 나치즘, 일본의 천황주의, 다 무서운 획일주의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삶에서, 자립성의 면과 공생성의 면은
두 비중이 똑같게 균형을 이루지 않으면 안 됩니다.
바로 자립성과 공생성의 이중성은
성경이 일관되게 우리에게 요구하는 삶이기도 합니다.
◑시혜자의 법칙, 수혜자의 법칙 .. 공생성을 위한 것
▲구약에 의하면 하나님께서는 토지를 소유한 사람들에게 명령하신바가 있습니다.
레위기19:9-10 “너희가 너희의 땅에서 곡식을 거둘 때에,
너는 밭모퉁이까지 다 거두지 말고, 네 떨어진 이삭도 줍지 말며,
네 포도원의 열매를 다 따지 말며, 네 포도원에 떨어진 열매도 줍지 말고
가난한 사람과 거류민을 위하여 버려두라. 나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이니라.”
이를테면 시혜자의 법칙입니다. 은혜를 베푸는 사람의 법칙입니다. *베풀 시, 은혜 혜
왜 하나님께서 "너희들이 다 거두어서 창고에 보관하라.
그리고 타국인이나 고아나 과부가 찾아오면 너희들이 나누어 주라"
왜 이렇게 명령하지 않으십니까? 왜 그대로 버려두라고 하십니까?
만약에 내가 그것을 창고에 거두어서, 잘 계산해서 분류를 한다고 하십시다.
아무리 분류를 한다 한들, 내 창고에 일단 거두어들이면
그 다음부터는 찾아오는 사람들에게, 내가 인심 쓰는 거예요. 내가 공치사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애당초 너희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수혜자/ 은혜를 입는 사람은, 마구 가서 자기 마음대로 해도 좋은가?
그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시혜자에게 법칙이 있듯이, 하나님께서는 수혜자의 법칙도 내려주셨습니다.
신23:24-25 "네 이웃의 포도원에 들어갈 때에는 마음대로 그 포도를 배불리 먹어도 되느니라.
그러나 그릇에 담지는 말 것이요
네 이웃의 곡식밭에 들어갈 때에는 네가 손으로 그 이삭을 따도 되느니라.
그러나 네 이웃의 곡식밭에 낫을 대지는 말지니라."
이것이 수혜자의 법칙입니다.
네가 살다가 곤고함에 처했느냐? 네가 살다가 어렵느냐? 한끼 먹을 것이 없느냐?
그러면 아무 포도원이나 들어가서, 배불리 한 끼를 해결해라. 그러나 그릇에 담아가면 안 된다.
네가 지금 망했느냐?
네가 다시 재기 할 때까지, 다른 사람의 밭에 들어가서 이삭을 따먹어라.
그러나 낫으로 마구 쳐가면 안 된다.. 그 한 끼만 해결하라는 것입니다.
왜 하나님께서 수혜자들에게 "너 맘대로 먹으라." 그렇게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왜 그 한 끼만을 해결하도록 하십니까?
이유는 간단합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너 하고 싶은 대로 다하라' 그러면, 그 사람이 뭐가 될까요?
분명히 거지가 될 것입니다.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께서는, 결코 우리를 거지로 살기를 원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어떤 상황에서든지,
우리가 스스로 홀로 서는, 자립하는 사람들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네가 어려우냐? 남의 도움을 받으라.
그러나 자립하는 것을 잊지 말라."
이것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명령인 것입니다.
◑길갈에서 비로소 ‘자립성’을 회복한 히브리 백성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4백년 동안 노예생활을 끝내고, 출애굽 했습니다.
풀 한포기, 물 한 방울 없는 광야를 거치면서 40년 동안
하늘에서 만나와 메추라기를 내려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먹이셨습니다.
우리는 그 만나와 메추라기를 대단히 동경합니다.
그래서 기도할 때, 오늘도 만나와 메추라기를 내려달라고 기도합니다만..
이스라엘 백성들이 40년 광야의 방랑생활 끝에
드디어 요단강을 건너서 가나안땅으로 입성했습니다.
그리고 길갈에 도착해서, 그 땅에서 난 소산을 먹었습니다.
여호수아 5장10-12.
“또 이스라엘 자손들이 길갈에 진 쳤고, 그 달 십사일 저녁에는 여리고 평지에서 유월절을 지켰으며
유월절 이튿날에 그 땅의 소산물을 먹되 그 날에 무교병과 볶은 곡식을 먹었더라
또 그 땅의 소산물을 먹은 다음 날에 만나가 그쳤으니, 이스라엘 사람들이
다시는 만나를 얻지 못하였고, 그 해에 가나안 땅의 소출을 먹었더라.”
그들은 그 해에 가나안 땅에서 나는 것을 먹었습니다.
이스라엘백성들이 그 땅에 들어가서, 그 땅의 소산을 먹기 시작한 날부터
만나와 메추라기는 끝났습니다.
그 이후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다시는 만나와 메추라기를 보지 못했습니다.
그 다음부터는 어떻게 해야 먹고 살았습니까?
땀 흘려 씨 뿌리고 추수해야만 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게으르고, 태만하고,
무책임한 사람으로 내버려두시지 않고,
땀 흘리며, 스스로 자립하는 인간으로, 세워주시는 하나님의 뜻이요,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바로 ‘길갈’이란 이름의 뜻이 바로 "굴러간다"는 것입니다.
400년 동안 이집트에서 노예생활 했다는 수치가 굴러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지방의 이름을 "길갈"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40년 전에, 노예생활에서 이미 해방되었습니다.
그런데 40년이 지나서, 길갈에 가서야, 비로소 노예의 수치가 벗어났다는 것입니다.
무엇하면서 부터요? 바로 자립하면서 부터입니다.
여러분 한 인간이 이 세상에 태어나서
진실로 하나님과 사람들 앞에서 자립하지 아니하면, 홀로 설줄 모르면,
그는 수치 속에 있는 자가 됩니다. 왠지 아십니까?
누구이든 스스로 홀로 설 수 없는 자는, 결코 더불어 살 수 없습니다. 공생 할수 없습니다.
스스로 설 수 없는 자는 공생이 아니라, 기생을 하는 자입니다.
기생하는 자는 수치스러울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내가 스스로 설 때부터, 한 인간으로서의 가치가 발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자립은, 자립 그 자체가 목적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바로 자립은 바로 공생, 그 더불어 살기 위함인 것입니다.
◑요셉의 공생성
요셉은 사랑하는 형들의 시기로 인해 팔리지 않습니까?
종살이, 옥살이를 통해서 끝까지 하나님 앞에서 신앙을 지키며 자기를 비웠다가
하나님에 의해서 국무총리로 세움을 받습니다.
정말 자기를 홀로 세우는데 탁월한 사람이었지요.
그런데 나중에 기근 때문에 양식을 사기 위해서, 자기 형들이 자기 앞에 나타났을 때
‘당신들이 나를 팔았지?’ 라고 형들에게 복수하지 않았습니다.
그 형들에게, 요셉은 이렇게 말합니다. 창세기45:7-8
“하나님이 큰 구원으로 당신들의 생명을 보존하고 당신들의 후손을 세상에 두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니
그런즉 나를 이리로 보낸 이는 당신들이 아니요, 하나님이시라.
하나님이 나를 바로에게 아버지로 삼으시고, 그 온 집의 주로 삼으시며
애굽 온 땅의 통치자로 삼으셨나이다.”
바로 요셉은 자기가 국무총리가 된 것은, 자기 자신만의 영광을 위함이 아니라
더불어 살게 하시기 위한 목적이 있었음을 알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자립성과 공생성은 성경의 핵심 이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마22:37.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38.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39.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뭐죠?
하나님 앞에서 내가 스스로 홀로 서는 것입니다. 자립성입니다. :38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 뭐죠?
더불어 살아가는 것입니다. 공생성입니다. :39
하나님과 나와의 개인적인 만남이 있어야합니다. 즉 신앙적 자립성이 있어야 합니다.
-아침에 왜 해가 뜨는가?
바로 하나님께서 나를 위해서 해를 뜨게 하시는 것입니다.
-왜 오늘밤에 달이 빛을 발하는가? 하나님께서 내 길을 지켜 주시기 위해서
-왜 오늘도 인적이 드문 산속에 이름 모를 꽃이 피었나? 나를 위해서..
-왜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셔서 보혈을 흘리셨는가? 나를 살리시기 위해서..
이렇게 하나님과 나의 개인적인 관계가 깊이 맺어져야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가 맺어지면
더불어 살아가는 사람과의 관계, 공생성이 더 깊어지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 앞에서 내가 홀로 깊이 서 있을수록
그분의 은혜를 생각할 때마다
더불어 사는 나의 폭은 더욱 커지고 깊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그때부터는,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가 되시는 것입니다.
▲구약 시편을 보십시오.
모두 ‘나의’ 하나님이십니다. (시23편 등) -자립성-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가르쳐주신 기도는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로 시작하십니다. -공생성-
'하나님은 나만을 위한 구원자가 아니라, 저분을 위한 구원자이시기도 하구나.
오늘 우리에게 일용한 양식을 주시고 나만 배부르고
내 자신만 잘 되었다고 복 받는 것이 아니라
더불어 살아가는 모든 자들을 위해서
내가 하나님의 도구로 쓰임 받도록 하시려고 나를 구원하셨구나.'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가 클수록, 하나님 앞에서 내가 자립하는 인간이 될수록,
사도 바울의 고백처럼 헬라인이나, 야만인이나, 지혜 있는 자에게나,
어리석은 자에게나, 나는 빚진 자가 되는 것입니다..
남보다 더 윤리적이지도 못했고, 타인보다 더 정직하지도 못했던 나를
왜 하나님께서 구원해 주시고 세워주셨는가?
한 사람 이라도 더 많은 사람과, 그리스도 안에서 더불어 살게 하시려고.. 입니다.
◑다윗의 자립성과 공생성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그 용모와 신장을 보지 말라. 내가 이미 그를 버렸노라.
나의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
그러면 다윗의 중심 속에 무엇이 들어있었기에
하나님께서는 다윗만을 당신의 도구로 쓰셨습니까?
▲사무엘이 이새의 집에 도착 했을 때
일곱 아들은 다 집에 있는데, 막내 다윗은 집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또 아들이 있는가? 있다면 어디 있는가?’ 물었을 때
이새가 이렇게 대답합니다.
‘또 사무엘이 이새에게 이르되 네 아들들이 다 여기 있느냐
이새가 이르되 아직 막내가 남았는데 그는 양을 지키나이다.’ :11
다윗은 첫째 아들 둘째 아들이 아닙니다. 제일 말째아들입니다.
일곱 형들이 모두 편안하게 집안에 앉아 있는 그 시간에
다윗은 홀로 벌판에서 양들을 지키고 있습니다.
다윗은 이미 이때 홀로 양을 지킬 정도로
자립적인 인간이 되어 있었습니다.
이번 어쩔 수 없이 자기 순번이 돌아와서
한번만 어쩔 수 없이 나가서 양을 지켜준 것이 아닙니다.
▲이 이후에 골리앗이 쳐들어오지요?
이스라엘에 많은 장군이 있었지만, 골리앗의 위협을 보고 겁이 나서
아무도 나가 싸우지 못합니다. 이것을 보고 다윗이 자원하지요?
사울 왕이 자원자가 있다는 말을 듣고 기뻐서 불러드립니다. 보니까 청소년인겁니다.
아무리 급하지만 너처럼 어린 청소년을 보낼 수는 없겠다.. 그랬더니
왕에게 다윗이 사무엘상17:34-35을 통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다윗이 사울에게 말하되 주의 종이 아버지의 양을 지킬 때에
사자나 곰이 와서 양 떼에서 새끼를 물어 가면
내가 따라가서 그것을 치고, 그 입에서 새끼를 건져내었고
그것이 일어나 나를 해하고자 하면, 내가 그 수염을 잡고 그것을 쳐 죽였나이다.’
어쩔 수 없이, 울며 겨자 먹기로 가서, 한번 당번을 선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나가서 양을 지키며, 맹수가 오면, 겁이 나서 도망가는 것이 아니라
곰이든 사자든 맨 손으로 잡고 싸워서 이길 정도로, 다윗은 자립적인 인간이었습니다.
이것은 단순히 다윗이라고 하는 인간이, 자립성을 타고 태어났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이후에 골리앗과 일대일로 대결을 벌이지 않습니까?
그때 다윗이 골리앗을 향해서 한 말을 사무엘상 17:45절이 말해줍니다.
‘다윗이 블레셋 사람에게 이르되 너는 칼과 창과 단창으로 내게 나아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곧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나아가노라.’
바로 다윗은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을 향한 신앙으로 자립하는 청년이었습니다.
▲그러면 다윗에게 이처럼 자립성 만 있었던가? 그렇지 않습니다.
이제 방금 말씀 드린 것처럼 골리앗이 이스라엘을 쳐들어 왔을 때
이새의 여덟 아들 중에서, 1~3째 아들이 그 전쟁에 참전하게 됩니다.
어느 날 아버지가 전쟁에 나간 세 아들에게, 먹을 것을 보내줄 필요가 생겼습니다.
사무엘상17:17-18, ‘이새가 그의 아들 다윗에게 이르되 지금 네 형들을 위하여
이 볶은 곡식 한 에바와 이 떡 열 덩이를 가지고 진영으로 속히 가서 네 형들에게 주고
이 치즈 열 덩이를 가져다가 그들의 천 부장에게 주고 네 형들의 안부를 살피고 증표를 가져오라.’
전장에 있는 세 아들에게 뭘 보냈느냐하면 곡식 한 에바, 한 에바는 열두 되입니다.
떡 열 덩이, 우리말로 ‘떡’이라 하니까 조그만 한 것 같지요?
유대인들의 떡은 조그만 하지 않습니다. 큰 덩어리이죠.
그걸 칼로 베어서 나누어 먹지 않습니까?
치즈 열 덩어리 요즘처럼 슬라이스 된 치즈를 얘기하지 않습니다.
그들의 치즈 역시 덩어리입니다. 상당한 무게입니다.
여러분, 전쟁은 벌판에서 치릅니다. 민가에서 멀리 떨어져있지요.
곡식 한말 두되, 치즈 열 덩어리, 떡 열 덩어리를 메고 가려고 하면, 보통 일이 아닙니다.
그런데 분명히 이새에게는 아들 8명이 있습니다.
세 아들이 참전했다 할지라도, 이새에게는 5 아들이 남아 있습니다.
그런데 위에 있는 아들들에게 이 일을 명령하지 않고
이새는 이 일을 말째인 다윗에게 시켰습니다.
아버지는 아는 겁니다.
다윗만 이런 명령에 군소리 없이 예스 할 것을 아는 것입니다.
바꿔 말하면 아버지는 다윗만이, 그 속에 가장 큰 공생성이 있음을 알았습니다.
아버지의 명령이기도 하지만, 자기의 형들을 위해서라면
어떤 일이라도 할 자기의 아들을 알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윗은 두말하지 않고 순종합니다.
▲그 뿐만이 아닙니다. 골리앗을 이겼습니다.
그 뒤에 사울 왕이 다윗을 자기 라이벌로 봅니다. 그래서 죽이려고 합니다.
다윗이 어쩔 수 없이 숨어 다녀야만 합니다.
사무엘상 22:1-2 ‘그러므로 다윗이 그 곳을 떠나 아둘람 굴로 도망하매
그의 형제와 아버지의 온 집이 듣고 그리로 내려가서 그에게 이르렀고
환난 당한 모든 자와 빚진 모든 자와 마음이 원통한 자가 다 그에게로 모였고
그는 그들의 우두머리가 되었는데 그와 함께 한 자가 사백 명 가량이었더라.’
여러분 지금 다윗은 절대 권력을 지닌 사울 왕이, 특공대 3천명을 구성하고
무슨 일이 있어도 죽이려고 하는 대상입니다.
그 옆에 있는 것 자체가 화를 당할 수 있는 것 입니다.
그런데 그 숨어 다니는 다윗에게, 아버지와 형님들이 찾아왔습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억울하고 원통한 일을 당한 사람들 4백 명이 찾아왔습니다.
우리가 당신 곁에 있다가 화를 당할지언정, 당신과 함께 사는 것이
우리 속이 편하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어느 천지에 가도, 누구 곁보다도 당신 곁에 있어야
우리가 편히 살겠다는 것입니다.
다윗의 공생성의 크기를 보여 줍니다.
22:3 ‘다윗이 거기서 모압 미스베로 가서 모압 왕에게 이르되
하나님이 나를 위하여 어떻게 하실지를 내가 알기까지
나의 부모가 나와서 당신들과 함께 있게 하기를 청하나이다. 하고’
다윗은 지금 사울의 칼날을 피해서 이리저리 도망 다니는데
자기 앞에 자기를 거두어 달라고, 사람들이 수백 명이 나타났습니다.
‘내 코가 석자인데 무슨 말인가?’ 라며 그들을 내팽개치지 않았습니다.
다 받아 줬습니다.
뿐만 아니라 자기 아버지를 위해서, 적국 모압 왕을 찾아가서
그 모압 왕에게 무릎을 꿇고, 자기 아버지를 부탁 했습니다.
여러분, 필리핀의 마르코스가 그 막대한 돈을 들고 비행기를 타고 하와이로 도망갈 때
고향에 있는 노모를 모시고 갔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까?
아니요. 혼자 도망갔습니다.
그 노모는 죽는 날까지 아들을 그리다가 혼자 죽었습니다.
루마니아 독재자의 차우세스크가, 왕처럼 군림하면서 살다가
도망 갈 때에 아버지를 데리고 나갔다는 말을 들은 적 있습니까?
민중들에게 내 아버지가 위해 당할지 모르니까
적국 대통령에게 전화를 해서 ‘내 아버지 좀 받아주십시오’ 라고
전화했다는 얘기 들은 적 있습니까? 없습니다.
자기 아내만 데리고 도망 가다가, 믿었던 군인 총에 맞아서 즉사했습니다.
그런데 다윗은 자기 코가 석자인데도 불구하고 ‘왜 왔습니까?’ 화내지 않고
자기 아버지를 위해서 적국의 왕에게 무릎을 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다윗의 중심을 보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속에 있는 자립성 과 공생성을 보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를 통하여 이스라엘의 역사의 지평을 새롭게 하셨음은
너무나 당연한 귀결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마치는 말
그렇다면 우리는 여기에서 대단히 중요한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하나님 앞에 순종하므로 역사의 지평을 새롭게 하는 믿음의 여인 룻의 증손자로
이새의 아들 여덟 명이 태어났다고 하는 것은
그들이 아무 노력 하지 않고 얻은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생각을 해보십시오. 노력한다고 룻의 증손자로 태어날 수 있습니까?
그건 그야말로 하나님께 거저 받은 은혜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로 부터 그저 은혜를 받은 8명의 아들 들 중에서
하나님 앞에서 (자립성과 공생성으로) 바른 응답을 드린 자는.. 다윗 밖에 없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를 쓰셨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모두 노력하지 않고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여기에는 아무런 차이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다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라고 해서
하나님으로부터 똑같이 쓰임 받는 도구가 되는가? .. 그것은 절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더욱 신뢰하시는 도구가 분명히 있고
신뢰하시지 않는 도구가 분명히 있습니다.
구원받은 우리 가운데에 하나님께서 쓰시는 당신의 도구,
룻이나 나오미나 다윗처럼 쓰시는 당신의 도구는 따로 있는 것입니다.
그것을 전문적인 용어로 ‘제2의 소명’이라고 합니다.
첫 번째 부르심은 죽음과 죄 가운데서 우리를 부르신 하나님의 구원
우리는 거저 받았습니다.
그러나 우리 가운데에 당신의 도구로 다시 부르시는 ‘제 2의 부르심’을 받는 자들이 있습니다.
누가 받겠습니까? 해답은 얻었습니다.
자기 속에 자립성과 공생성으로 응답하는 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를 통해서 역사하시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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