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 속하지 아니함을 설교자 이재철
말씀: 요한복음 17 : 13∼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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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년전 안식년 때, 중국을 여행하던 중 북경에 들렀을 때입니다. 4박 5일 동안 북경에서 체류하는 동안, 20대의 젊은 조선족 청년이 안내를 맡아 주었습니다. 김씨성을 가진 그 청년은 중국 지방대학을 졸업하고, 그곳에서 중국 공무원 생활을 한 그 지방의 엘리트였습니다. 마침 중국이 개방화를 추진하기 시작하자 젊은이로써 큰 웅지를 품고 수도 북경으로 진출하여, 세계적인 안목을 키우기 위해 여행사에서 일하는 전도 유망한 청년이었습니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하루종일 함께 지내다 보니 서로 친밀감을 느끼고 개인적인 이야기까지 나누게 되었습니다. 사흘째 되던 날, 함께 동행하셨던 장로님께서 그 청년에게, 중국에서 살고 있는 조선족으로써 자기 자신을 어느 나라 사람으로 인식하고 있는지를 물었을 때, 그는 의미 심장한 답변을 했습니다.
일제 시대 때 일제의 압제를 피해 할머니를 데리고 중국으로 이주한 할아버지는, 중국에서 청년의 아버지를 낳았고, 아버지는 중국에서 조선인과 결혼하여 바로 그 청년이 태어나게 된 것이었습니다. 청년이 태어날 때에는, 이미 2차 대전은 종결되고 모택동 주석이 중국대륙을 통일한 이후였습니다. 말하자면 그 청년은 태어날 때부터 중국의 국적을 가진 중국인으로 태어난 것이었습니다. 학교에서 중국말로 교육을 받았고 중국역사를 국사로 배웠으며, 모택동 사상을 신앙으로 삼으며 성장했습니다. 그렇기에 비록 집에서는 부모님과 조선말을 쓰는 조선족 출신이라 할지라도 그 자신이 중국 국적을 가진 중국인이라는 사실에 대해서는 한번도 회의를 품어본 적이 없었고, 또 회의 해볼 필요도 없었습니다. 살고 있던 지방을 떠나 북경으로 진출할 때까지도 그는 당당한 중국인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90년도에 서울에서 온 모 교수를 안내하던 중, 그 교수의 요청에 따라 마침 북경에서 열리는 한국과 중국의 축구경기를 관전하게 되었습니다. 청년으로써는 난생 처음으로 중국과 한국의 경기를 운동장에서 직접 관전하는 셈이었습니다. 그때까지만 해도 한국과 중국이 정식으로 수교하기 전이어서 북경에 사는 한국 교민이 거의 없었던 터라 관객은 온통 중국 사람들 일색이었고, 너무나 당연하게도 그들은 중국 팀에게 일방적인 응원을 하고 있었습니다.
한참 경기가 무르익어 한국팀과 중국팀이 일진일퇴를 거듭하고 있을 때 그 청년은 한순간 깜짝 놀라고 말았습니다. 중국인인 자기 자신이 중국팀을 응원하는 것이 아니라, 생전 처음보는 한국팀을 응원하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그 자신에게 대단한 충격이었습니다. 20 여년 동안 그 자신이 조금도 의심없이 받아 들여왔던, 중국인이란 자기 정체성에 대하여 회의를 갖기 시작한 최초의 순간이었기 때문입니다. 만약 그의 할아버지나 아버지가 중국여인과 결혼했더라면, 그날 그와 같은 충격적인 경험을 하지는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비록 중국 땅에서 살긴 했지만 그의 부모님도, 조부모님도 모두 순수한 조선인들이었기에 그의 혈관 속에 흐르는 피는 의심할 여지없는 100% 조선인의 피였던 것입니다. 단지 중국에 산다고 해서, 중국 국적을 가지고 있다고 해서, 그 자신이 중국인 일수는 없음을 깨달았던 것입니다.
그 이후에 청년의 인생 목표는 수정되었습니다. 필요한 만큼의 돈이 모아지면 한국으로 유학오고 싶다고 했습니다. 만약 그것이 여의치 아니하면 반드시 한국과 연관된 사업을 할 계획이라고 했습니다. 앞으로 오천년 조선 역사와 얼을 이어받은 단군의 자손으로 자기 정체성도 알지 못한채 중국땅에서 사는 수많은 조선인들에게 봉사하며 살아가기 위함이었습니다.
그 청년은 오늘도 여전히 중국땅에서 중국 국적으로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자신의 정체성을 바로 확인한 이상, 그의 몸속에 흐르고 있는 피가 결코 중국인의 피가 아니요, 중국인의 피일 수도 없다는 사실을 깨달은 한, 그의 몸이 비록 중국 국적을 갖고 중국땅에서 거하고 있다고 할지라도 그의 정신과 마음만은 예전처럼 중국에 예속되지 않을 것입니다. 오히려 시간이 흘러가면 갈수록 그와 똑같은 피를 소유한 사람들이 살고 있는 이 대한민국을 더더욱 향하게 될 것입니다. 내가 누구인지, 즉 나의 정체성을 바르게 인식한다는 것은 이래서 중요합니다. 이 인식 여부에 따라 인생의 목표와 방향, 가치와 의미가 전혀 달라지는 까닭입니다. 참된 그리스도인의 신앙 역시 자기 정체성의 인식으로부터 시작됩니다.
하나님을 믿는 그리스도인이라고 해서 천상의 세계, 구름 위에 사는 것은 아닙니다. 그리스도인들 역시 이 세상 속에서 세상에 두발을 딛고 세상의 국적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과 그리스도인 사이에는 적어도 외적으로는 아무런 차이가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16절을 통하여 주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내가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같이, 저희도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였삽나이다"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속에서 일하고 먹고 자고 살고 있지만, 그러나 세상에 속한 사람들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리스도인이란,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간의 죄값을 대신 치루어 주시기 위해 십자가 위에서 흘리신 피, 바로 그 보혈 안에서 새로운 생명을 얻은 자인 까닭입니다. 다시 말해 우리 영혼의 혈관 속에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흐르고 있는 것입니다. 중국 국적을 작고 중국 땅에 살고 있긴 하지만, 그 몸속에 우리와 똑같은 한국인의 피가 흐르고 있는 그 청년이 100% 중국에 예속된 중국인이 될 수 없듯이 그리스도의 보혈 속에 거하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의 국적을 갖고 세상속에서 살고 있다고 해서 세상에 속한, 세상의 사람들이 될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몇 주 동안 함께 살펴본 본문 14절과 15절의 의미를 더 구체적으로 알 수 있습니다.
"내가 아버지의 말씀을 저희에게 주었사오매 세상이 저희를 미워하였사오니, 이는 내가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같이, 저희도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을 인함이니이다. 내가 비옵는 것은 저희를 세상에서 데려 가시기를 위함이 아니요, 오직 악에 빠지지 않게 보전하시기를 위함이니이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영원한 진리의 말씀, 참된 생명의 말씀을 주셨음은, 당신의 십자가 죽음을 목전에 둔 최후의 순간에 당신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좁게는 제자들에서부터 넓게는 우리 모두를 위하여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였음은, 우리로 하여금, 세상에 살고 있긴 하지만 그러나 세상에 예속된 세상의 사람들로 전락치 않게 해 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세상에서 아무리 부귀 영화를 누렸다 할지라도, 세상에 속한 사람에게 세상이란, 그의 숨이 멎는 순간 무덤 이상의 의미를 갖지는 못하는 것입니다. 세상에 속한자란 세상을 출발점인 동시에 종착역으로 삼는 자인데 어찌 무덤 이상의 가치를 부여할 수 있겠습니까?
세상에 살지만 그러나 세상에 예속됨이 없이 예수 그리스도에게 속하는 자가 될 때, 우리는 세상의 무덤을 뛰어 너머 영원한 생명의 길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이런 의문이 제기됩니다. 우리가 세상에 속하지도 속할 수도 없는 자들이라면 왜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하루라도 빨리 세상으로부터 하나님께로 데려가시지 않습니까? 왜 주님께서는 "내가 비옵는 것은 저희를 세상에서 데려 가시기를 위함이 아니요, 오직 악에 빠지지 않게 보전하시기를 위함이니이다" 하고 하나님께 기도 드리십니까? 더욱이 본문 18절을 통해 "아버지께서 나를 세상에 보내신 것 같이, 나도 저희를 세상에 보내었다"고 말씀하심으로써, 오히려 우리로 하여금 세상 속에서 적극적으로 살게 하십니까?
그것은 세상에 속하는 세상의 사람이 되게 하심이 아니라, 세상에 예속되어 세상의 노예된 자들을 일깨워 진리를 따르는 자들이 되도록 그들을 돕는 주님의 도구로 쓰시기 위함입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인들이란 어떤 자이어야 하겠습니까? 세상의 국적을 갖고 세상 속에서 살지만 결코 세상에 예속됨이 없이, 세상의 노예된 자들을 일깨워 진리로 인도하는 그리스도의 제자로서의 자기 정체성을 분명하게 인식하고 있는 자들――그들이 바로 진정한 그리스도인들입니다. 이 정체성을 바르게 인식하고 있는 사람이 그리스도인으로서의 바른 삶을 영위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본문 19절을 통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또 저희를 위하여 내가 나를 거룩하게 하오니 이는 저희로, 진리로 거룩함을 얻게 하려 함이니이다"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셨던 주님께서는 무엇보다도 먼저 당신 자신을 거룩하게 하는데에 당신 자신을 거셨습니다. 주님께서 이 땅에 오셨음은 이 세상에 속하기 위함이 아니라, 이 세상에 속한 자들을 구원해 살리시기 위함이라는 그리스도로서의 자기 정체성을 바로 알고 계셨던 까닭입니다.
그리스도인이 어떤 자인지 자기 정체성을 분명하게 깨닫고 있는 자만이, 무엇보다 앞서 자기 자신을 진리 안에서 거룩하게 세우는 일보다 더 시급한 일이 없음을 알고 진력하게 됩니다. 그때에만 이 세상 속에서 살되 결단코 세상 속에 빠짐없이, 오히려 세상에 속한 자들을 진리로 인도해 내는, 그리스도인에게 주어진 이 두 가지의 책임을 동시에 다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앞에서 언급한 그 청년이 중국에서 살지만 중국에 예속됨이 없이, 오히려 중국에 살고 있는 수많은 조선족들에게 바른 민족 정신과 얼을 심어 주기 위해 무엇보다도 먼저 한국에 유학 와서 한국을 제대로 알기 원하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아모서 5장 14절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명령하고 계십니다.
"너희는 살기 위하여 선을 구하고 악을 구하지 말지어다"
살기 위해 선을 구하되 악을 구하지 말라는 이 말을 뒤집으면 변함없이 악을 추구하는 자는 반드시 죽는다는 의미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악의 종착역은 무덤이기에 무덤을 뛰어 넘을 도리가 없으니 어찌 악을 추구하는 것이 결국에 죽음이 아닐 수 있겠습니까?
다같이 세상 속에 동시에 살되, 세상에 속하지 아니한 자와 예속된 자의 결정적인 차이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세상이 아니라 진리에 속하는 자는 이 세상을 뛰어넘어 영원한 삶을 위해 끊임없이 진리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선을 추구하는 자요, 세상에 예속된 자는 오직 세상 속에서 더 잘 먹고 더 잘 입고 더 잘 살기 위해 불의를 주저치 않고 악을 불사하는 자들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관 속에 드러 눕는 날, 이 세상이 어찌 그들에게 공동묘지 이상의 의미와 가치를 안겨 줄 수 있겠습니까? 바로 그처럼 세상을 종착역으로 삼아 공동묘지를 향해 질주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사실조차 깨닫지 못하고 있는 자들을 돕기 위해, 이 세상에서 그들과 함께 동 시대에 살도록 명령받은 그리스도의 제자들인 것입니다. 우리가 가장 먼저 우리 자신을 거룩하게 가져야 할 이유도, 어떤 경우에든 진리 안에서 선을 추구하는 본이 되어야 하는 까닭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빌립보서 4장 8절을 통해 바울이 이렇게 권면하였습니다.
"종말로 형제들아, 무엇에든지 참되며 무엇에든지 경건하며 무엇에든지 옳으며 무엇에든지 정결하며 무엇에든지 사랑할 만하며 무엇에든지 칭찬할 만하며, 무슨 덕이 있든지 무슨 기림이 있든지 이것들을 생각하라"
이것은 너무나 당연한 권면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 자신이 이와 같은 사람이 되지 아니하고서는, 세상에 속한 사람들을 인도해 내기는커녕, 세상 속에 침몰할 수 밖에 없습니다. 사도 바울이 이처럼 당당하게 권면할 수 있었던 것은, 그 자신 스스로를 먼저 진리 안에 거룩하게 세웠던 자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는 빌립보서 4장 9절을 통해 자신 있게 말하고 있습니다.
"너희는 내게 배우고 받고 듣고 본 바를 행하라. 그리하면 평강의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계시리라"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사도 바울이 세상 속에 살되 세상에 예속되지 않고 오히려 진리로 자기를 가꾸어 세상에 빠진 자들을 바르게 인도해 내오고 그리스도인으로서 자기 정체성을 확립해 갈 때 평강의 하나님이, 하나님의 평강이 그와 함께 하셨다는 사실입니다.
참된 평강과 영원한 기쁨은 자기 정체성을 인식하고 확립하는 삶 속에만 자리를 잡습니다. 내가 그리스도인임에도 불구하고 내적인 평강과 기쁨을 소유하지 못하고 있다면,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자기 정체성을 인식치 못했거나, 인식하고서도 그것을 확립하려는 삶을 추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자기가 누구인지도 알지 못하는데, 자기의 삶이 잘못 되었음을 알고 있는데 어찌 그 속에 참된 평강, 영원한 기쁨, 변함없는 소망이 가능하겠습니까?
임진왜란 때 일본에 끌려간 조선 도공의 후예로써 일본 도자기 계의 대명사인 사쓰마야키의 14대 주인인 심수관씨가 지난 4일 서울에서 감동적인 강연회를 가졌습니다. 그가 초등학교 입학식을 마치고 돌아 왔을 때 그의 아버지는 수관 소년을 작업실로 부르더니 구슬 만한 흙덩어리를 뭉쳐 도자기를 빚는 물레 위에 올려놓고 바늘 하나를 조심스레 그 중심에 꽂았습니다. 그리고 물레를 돌리면서 무엇을 느끼는 지를 물었습니다. 수관 어린이가 물레는 도는데 바늘은 움직이지 않는다고 대답을 하자 아버지가 기다렸다는 듯 말했습니다. "움직이는 물레 속에서 움직이지 않는 중심을 찾는 것이 앞으로 너의 인생이다" 그때 수관 어린이는 아버지의 그 말뜻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성장한 뒤에는 끊임없이 기술을 연마하라는 뜻으로 이해하였습니다. 그리고 나이가 들어서야 그것은, 타국에 끌려온 조선도공의 피와 얼을 이어 받은 조선인의 후손으로써 확립하지 않으면 안될 자기 정체성에 대한 가르침임을 비로소 깨닫게 되었습니다. 임진왜란의 패자로 눈물을 흘리며 일본으로 끌려간 조선 도공들이 무려 400년 동안이나 타국에서 자기 정체성을 잃지 않고 살아올 수 있었던 것은, 대대로 전해 내려오는 `움직이는 물레 속의 움직이지 않는 중심을 찾으라'는, 이 한마디의 가르침 덕분이라고 했습니다.
참된 신앙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신앙이란 움직이는 세상 속에서 움직이지 않는 진리의 중심을 찾아야 하는 것이요, 그것은 자기 정체성의 인식과 확립에서부터 시작됩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참된 평강과 기쁨의 삶을 진정으로 소망하십니까? 이 세상에서 사람을 살리는 생명의 사람이 되기를 정말로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우리가 세상에 살되 결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라 진리 속에 속한 자란 우리의 정체성을 분명히 인식하고 우리의 영혼 속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흐름을 기억하고 의미도 없이 돌아가는 세상을 좇아 돌다가 욕망의 현기증에 빠져 후회하며 쓰러지는 자가 되지 마십시오.
움직이는 세상 속에서 움직이지 않는 진리의 중심을 찾아 그 중심에 바로 여러분의 중심을 맞추십시오. 그때부터 놀라운 새 생명의 역사가 여러분들의 삶속에 한없이 펼쳐질 것입니다. 진리와 신앙은 가장자리의 문제가 아니라 언제나 중심의 문제임을 잊지 마십시오. 가장자리는 가변이나 오직 중심만은 불변인 까닭입니다.
기도 드리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사도바울이 타고 가던 배가 지중해에서 유라굴로 태풍을 만났습니다. 모든 것이 흔들리고 부숴지고 요동을 칩니다. 그 소용돌이 속에서 사람들은 이리저리 휩쓸리고 죽음의 공포에 떨며 아우성을 칩니다. 그러나 사도바울은 조금도 흔들림이 없었습니다. 그 역시 태풍속에 있었지만 태풍에 속한 사람이 아니라, 요동치는 태풍속에서 움직이지 않는 진리의 중심에 서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 모든 것은 사도바울이 평소 자기 정체성을 바르게 인식하고 확립하는 삶을 살았기 때문이였습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그 태풍속에서 나의 섬기는 바 나의 속한바 하나님이 구원해 주실 것을 믿노라 외쳤고, 진리의 중심에 선 사도바울 한 사람을 통해 그 태풍속에서 276명 모두가 구원을 얻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세상에 살지만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오히려 세상에 빠진 자들을 이끌어 내는 안내자가 되어야 한다는 우리의 정체성을 바르게 인식하며 확립하는 자들이 되게 해 주십시오. 의미도 없이 돌아가는 세상을 쫒다가 욕망의 현기증으로 더 이상 쓰러지지 말게 하소서. 움직이는 세상속에서 움직이지 않는 진리의 중심을 찾아 그 중심에 우리의 중심을 맞추게 하소서.
그리하여 우리의 삶이 진정 평강과 기쁨이 충만한 삶이 되게 하시고, 우리의 삶을 통하여 날마다 새 생명의 역사가 일어나게 하옵소서. 아 멘
출처 : 주님의 시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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