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 목록가기 | 믿음 목록 돌아가기 |
믿음의 실상과 증거
마태복음11:1-6
설교방송 (설교본문)
지난 주 우리는 아주 좋은 수련회를 가졌습니다. 너무 좋은 곳에서 너무 좋은 프로그램을 통하여 참석했던 교인들이 모두 흡족해하는 참으로 좋은 수련회를 가졌었습니다. 교회를 시작하고 처음으로 하는 수련회였음에도 불구하고 1,000명이 넘는 교인들이 참석하여 성황을 이루었는데 이번 수련회가 좋았기 때문에 내년 수련회는 도대체 교인들이 얼마나 더 참석하게 될 것인가가 지금부터 염려가 됩니다. 그만큼 좋은 수련회였습니다.
많은 순서들이 다 좋았지만 아무래도 가장 좋았던 시간은 김명현 교수님의 창조론 강의였습니다. 과학자답게 아주 논리적이고 과학적이게 창조의 증거들을 제시함으로 그 동안 막연하게 하나님을 믿고 있던 우리들에게 얼마나 큰 도움이 되었는지 모릅니다. 그 동안 우리는 주로 목회자를 통해서만 설교와 강의를 들었었는데 목사 아닌 교수를 통하여 강의를 들으니 전과는 전혀 다른 감동과 은혜를 받을 수 있었습니다.
저는 김명현 교수님의 강의를 들으면서 과학자 뿐만 아니라 경제인과 정치인 그리고 예술가와 전문적인 직업인들이 자기들의 독특한 직업적인 안목을 가지고 성경을 풀어 강의를 한다면 얼마나 다양하고 놀라운 것을 우리가 들을 수 있을까하는 생각을 하였었습니다. 여러분들도 모두 자기의 전공과 직업을 통하여 남들에게 자신만이 줄 수 있는 은혜를 끼칠 수 있는 능력 있는 크리스천들이 다 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김명현 교수님은 과학자답게 창조의 증거들을 조목조목 제시해 주었습니다. 그와 같은 것들을 통하여 우리들은 그 동안 우리들이 믿어 왔던 하나님의 창조가 사실이라는 확신을 가질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사실 우리는 그와 같은 과학적인 증거들을 듣고 보기 전에도 하나님의 창조를 믿어 왔었습니다. 그와 같은 우리들의 믿음을 김명현 교수님은 농담 삼아 '대단한 믿음'이라고 이야기 해 주었습니다.
물론 보지 않고 믿는 믿음이 더 좋고 귀한 믿음이기는 하지만 그러나 보지 않고 믿는 믿음에는 두 종류의 믿음이 있을 수 있습니다. 첫째는 정말 확실한 믿음 때문에 볼 필요가 없어서 보지 않는 믿음이 있을 수 있고, 둘째는 사실에 대한 믿음이 없거나 관심이 없어서 그냥 보지 않고 믿는 믿음이 있을 수 있습니다. 두 번째의 경우는 정확히 이야기하면 '정말 믿는 믿음'이 아니라 '믿는다고 치자는 식과 수준의 믿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더 정확히 이야기하자면 그와 같은 믿음을 우리는 '맹신'이라고 부릅니다. 김명현 교수님이 '대단한 믿음'이라고 농담했던 그 믿음은 두 번째 믿음 즉 맹신을 의미했던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맹신은 막연한 믿음입니다. 그냥 습관적인 믿음입니다. 그와 같은 믿음은 힘이 없습니다. 능력이 없습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우리들 대부분의 믿음이 그와 같은 믿음입니다.
우리는 사도신경이라고 하는 신앙고백을 통하여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를 믿습니다'라고 고백을 합니다. 믿음은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믿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창조를 믿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창조 속에는 감히 우리의 이성으로는 다 감당할 수 없는 놀라운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 있습니다.
끝을 알 수 없는 광대한 우주로부터 시작하여 그 끝을 알 수 없는 미세한 원자나 양자 그리고 생명체 속에 있는 세포나 유전자 정보에 이르기까지 창조자 하나님의 능력은 정말 우리의 상상을 초월하는 것입니다.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은 정말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이십니다. 그 하나님께서 이 온 우주와 만물을 창조하셨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믿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우리가 그와 같은 사실을 믿으면 그 믿음의 내용들이 그대로 우리의 삶에 나타난다는 사실을 여러분 아십니까?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으면 전능하신 하나님의 능력이 우주가 아닌 내 생명과 삶 속에 그대로 나타난다는 사실을 알고 계십니까? 그리고 그것이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 이유이며 목적이라는 사실을 알고 계십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을 믿으면 그 믿음으로 말미암아 창세기의 역사가 그대로 우리의 삶 속에서 재현하게 된다는 사실을 믿으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온 세상 보다 우리를 더 사랑하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창세기의 역사보다 더 큰 창조와 축복의 역사가 우리들 개개인의 삶 속에 나타나게 된다는 사실을 믿으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라고 하였습니다. 믿음은 보이지 않는 것이요 현재 손에 쥐어지지 않는 것이지만 그러나 믿음에는 반드시 실상과 증거가 나타난다는 것이 히브리서 기자의 믿음이었습니다. 믿음의 실상과 증거는 이미 하나님이 창조하신 우주 속에 나타나 있고 보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을 정말 믿고 확신하는 사람들의 삶 속에 나타나 있습니다.
하나님의 능력과 축복은 믿는 자에게만 나타납니다. 믿음이 없는 자에게 믿음의 실상과 증거가 나타날 수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실상과 증거를 가지고 판단할 수 있습니다. 남을 판단할 필요는 없으나 그와 같은 방식을 가지고 자기 자신의 믿음을 판단해 볼 수는 있습니다. 여러분들에게는 창조의 증거가 있으십니까? 믿음의 실상과 증거가 있으십니까? 여러분들이 예수를 믿고 살았기 때문에 받으신 믿음의 실상과 증거는 무엇입니까? 그 믿음의 실상과 증거를 우리는 흔히 '복'이라고 말하는데 예수를 믿어서 받으신 복은 구체적으로 무엇입니까? 그 복의 증거와 실상이 여러분들에게 있으십니까?
하나님이 말씀하시니 천지가 창조되었습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시면 역사가 일어납니다. 하나님이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었고, 예수님이 일어나라 말씀하시니 저는 자가 일어나 걷게 되었습니다.
세상에는 의지와 인격이 없기 때문에 그냥 하나님이 말씀하시면 그대로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를 의지와 인격이 없는 세상과 같이 창조하지 않으셨습니다. 우리에게는 인격과 의지 그리고 자유를 허락해 주셨습니다. 때문에 우리는 그냥 단순히 하나님이 말씀하심으로 역사가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그 말씀에 순종할 때 역사가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삶 속에 하나님의 역사가 나타나지 않는 것은 하나님이 말씀하시지 않으셔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우리가 순종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믿음은 말씀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말씀에 순종하는 삶이 없다면 그는 결국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이 없는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나지 않습니다. 입으로 주여 주여를 외치고 아무리 교회를 오래 다니고 봉사를 열심히 하여도 말씀에 순종하여 사는 진정한 믿음이 없는 자에게는 하나님의 역사가 나타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열매를 보아 그 나무를 안다고 하셨습니다. 우리의 삶 속에 나타난 하나님의 역사를 통하여 다시 말하여 믿음의 실상과 증거를 통하여 우리는 우리의 믿음을 판단할 수 있습니다.
세례 요한은 옥에서 자기의 제자들을 예수님에게 보내어 예수님이 과연 자신이 믿고 기다리고 있는 메시아 이신가를 알아보려 하였습니다. 그때 예수님은 오늘 본문의 말씀으로 요한의 제자들에게 말씀해 주셨습니다.
"소경이 보며 앉은뱅이가 걸으며 문둥이가 깨끗함을 받으며 귀머거리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
예수님은 실상과 증거로 자신을 설명하려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당신이 행하신 일과 능력을 가지고 자신을 증거 하려 하셨습니다. '열매를 보아 나무를 안다'는 당신의 말씀의 표현대로 자신을 설명하고 증거 하셨습니다. 얼마나 당당하신 모습인지 이루 말로 다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시면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믿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사는 믿음의 사람들에게는 그 역사가 그 사람의 생활과 삶 속에 구체적으로 나타났습니다. 그래서 그와 같은 역사를 체험한 사람들은 다음과 같은 간증과 고백을 찬송으로 부르며 살았습니다.
"구주 예수 의지함이 심히 기쁜 일일세. 허락하심 받았으니 의심 아주 없도다. 예수 예수 믿는 것은 받은 증거 많도다. 예수 예수 귀한 예수 믿음 더욱 줍소서"
이 찬송과 간증 속에는 '믿음'과 우리가 흔히 축복이라고 부르는 '믿음의 증거' 그리고 그 축복 때문에 더욱 더 생기는 '믿음의 욕심'이 표현되어 있습니다. 이 찬송을 작사하신 분은 믿음의 맛을 아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참으로 안타까운 것은 그 믿음의 맛을 알고 예수를 믿는 사람들이 생각밖에 그다지 많지 않다고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에게는 믿음의 증거가 있으십니까? 여러분들은 믿음이 맛을 아십니까? 여러분들에게는 믿음의 욕심이 있으십니까? 믿음의 맛을 알기 때문에 생기는 주림과 목마름이 있으십니까? 하나님은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에게 배부름의 축복을 주시겠다고 말씀하셨는데 여러분에게 그와 같은 배부름이 있으십니까? 다시는 갈 하지 않는 생수의 복을 주시겠다고 하셨는데 여러분들에게 그와 같은 시원함이 있으십니까?
영락교회에서 고등부를 지도할 때 학생들에게 '우리 나라에는 하나님의 말씀을 연구하는 연구소는 많은데 그 말씀을 실험하는 실험소가 적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연구만 하지 말고 한번 그것이 사실인지 아닌지 실험하는 정신으로 예수를 믿어보자'는 내용의 설교를 하였었습니다.
몇 년 후 그 설교를 들은 아이들이 대학부가 되었을 때 '스티그마'라는 신앙 써클(동아리)를 만들었습니다. '스티그마'라는 말은 우리말로 '흔적'이라는 말인데 사도바울이 갈라디아서 6장 17절에서 사용하신 말씀입니다. "이 후로는 누구든지 나를 괴롭게 말라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가졌노라"
아이들은 그 써클을 만들면서 제가 전에 했던 설교를 그대로 인용하였습니다. "우리 나라에는 하나님의 말씀을 연구하는 연구소는 많으나 그 말씀을 실험해 보려고 하는 실험소가 적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면 그것을 실험하십시다. 그리고 그 실험의 결과를 흔적처럼 몸에 지니고 사는 사람이 되십시다"
'스티그마' 회원을 모집하면서 써 놓았던 저들의 글을 저는 지금도 잊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우주 만물을 창조하셨기 때문에 이 우주 만물에는 창조의 증거가 있습니다. 흔적 즉 스티그마가 있습니다. 그것을 사도바울은 그것을 로마서 1장 20절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고 있습니다.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되나니 그러므로 저희가 핑계치 못할지니라"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상에 하나님의 흔적이 남아 있듯이 예수를 믿는 사람들에게는 예수의 흔적이 남아 있습니다. 예수의 흔적은 좁은 길과 십자가라고 하는 고난을 통하여 생겨나지만 그 결과는 면류관과 영광과 축복으로 영원히 우리의 삶 속에 자랑스럽게 남게 됩니다.
세상에 가장 불쌍한 것은 평생 예수를 믿으면서도 예수 그리스도의 흔적이 없는 사람입니다. 축복의 증거와 간증이 없는 사람입니다.
우리 주위에는 그와 같은 스티그마를 가지고 예수를 믿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 스티그마 때문에 확신을 가지고 예수를 믿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 확실한 믿음 때문에 축복의 스티그마를 매일 매일 새롭게 몸과 삶에 새기며, 그것을 즐기며, 이 땅에서도 천국을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예수 예수 믿는 것은 받은 증거 많도다' 찬송하며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예수로 나의 구주삼고 성령과 피로써 거듭나니 세상에 있는 내 영혼이 하늘의 영광을 누리도다' 찬송하며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흔적이 몸에 직접 나타난 사람들도 있습니다. 불치의 병에 걸렸다가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치유함을 받은 그 흔적을 지니고 예수를 믿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저들은 참으로 복 받은 사람들입니다. 병이 나았기 때문에도 복을 받았지만 사실 그것은 별로 대단한 것이 아닙니다. 정말로 대단하고 감사한 것은 저들이 그와 같은 체험을 통하여 하나님께 대한 확신을 갖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치유보다 중요한 것은 확신입니다.
제게 그와 같은 흔적은 별로 없습니다. 그러나 저에게는 그보다 더 중요한 흔적이 있습니다. 그것은 몸에 나타난 흔적이 아니라 생각과 삶에 나타난 흔적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그 분의 말씀, 그 분의 철학과 삶의 식이 저의 온 삶을 바꾸어 놓으셨습니다. 불완전하지만 제 생각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흔적이 있습니다. 턱없이 부족하지만 그래도 제 목회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흔적이 있습니다. 부끄러울 정도이지만 그래도 제 가정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흔적이 있습니다. 제 삶 속에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흔적은 마치 겨자씨와 같아서 너무나 보잘것이 없지만 겨자씨와 같은 믿음으로 인해 남겨진 예수 그리스도의 흔적은 겨자 나무처럼 커져서 새가 깃들만큼 되었습니다. 그 믿음으로 말미암아 남과 비교하면 별 것 아니지만 나 자신을 놓고 생각해 보면 감히 이룰 수 없는 성공을 삶의 전반에 걸쳐서 이루게 되었습니다.
제 삶에 나타난 크고 작은 모든 성공과 축복은 모두가 다 예수 그리스도의 흔적입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다른 분들도 마찬가지이지만 김동호가 이만큼 된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제게는 정말 인간적으로 자랑할만한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지금 인간적으로 당당하고 자랑스러웠던 그 누구도 부럽지 않습니다. 제 삶의 잔을 넘치게 채우는 모든 은혜와 축복은 다 그리스도 예수의 흔적입니다.
저는 예수님께서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하여 하신 "소경이 보며 앉은뱅이가 걸으며 문둥이가 깨끗함을 받으며 귀머거리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는 말씀이 그렇게 잘 이해가 될 수 없습니다. 그 말씀이 그대로 다 저에게 일어난 것이기 때문입니다.
맹인과 같았던 제가 지금은 봅니다. 구상이라고 하는 시인이 '말씀의 실상'이라고 하는 시에서 표현 한 것에 전적으로 동의 합니다.
'영혼의 눈에 끼였던 무명의 백태가 벗어지며, 만유일체가 말씀임을 깨닫습니다. 노상 보아 오던 손가락이 열 개 인 것도 이적에나 접한 듯 놀라웁고 봄에 피는 개나리 꽃도 부활의 시범을 보는 듯 사뭇 황홀합니다'
손가락이 열 개인 것이 이적처럼 보이면, 봄에 피는 개나리꽃이 부활의 시범으로 보이면 삶이 황홀해 지지요.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그런데 제 눈에도 그와 같은 것들이 보입니다. 그래서 제 삶도 참 황홀합니다.
귀머거리와 같았던 제가 지금은 듣습니다. 다윗이 시편 19편에서 고백한 고백을 저는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이 그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내는도다. 날은 날 에게 말하고 밤은 밤에게 지식을 전하니, 언어가 없고 들리는 소리도 없으나 그 소리가 온 땅에 통하고 그 말씀이 세계 끝까지 이르도다"
언어가 없는 것 같고 들리는 소리가 없는 것 같으나 온 땅에 가득한 하나님의 음성이 들릴 때 느껴지는 감동과 감격이 제게도 있습니다. 남이 못 보는 것을 보고 남이 듣지 못하는 음성을 듣는 기쁨이 제게도 있습니다. 뇌성마미 환자로 평생을 불편한 살고 있는 송명희 시인이 '나'라고 하는 찬양 속에서 고백한 고백을 저는 이해할 수 있습니다.
'나 가진 재물 없으나, 나 남에게 있는 건강 없으나, 나 남이 가진 지식 없으나, 나 남이 없는 것 있으니, 나 남이 못 본 것을 보았고, 나 남이 듣지 못한 음성 들었고....'
나병 환자와 같았던 제가 지금은 깨끗한 그릇으로 귀한 하나님의 일에 쓰임 받고 있습니다. 하나님께 쓰임 받는 기쁨과 행복을 어떻게 표현해야 여러분들이 알 수 있을까요? 세상에서 가장 기쁘고 행복한 일이 하나님께 쓰임 받는 것입니다. 그런데 세상에는 하나님께 쓰임 받지 못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하나님이 쓰시지 않으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쓰임 받기를 두려워하고 싫어하기 때문에 그렇게 된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래서 세상에는 쓸데없는 돈 많은 사람, 쓸데없이 똑똑한 사람, 쓸데없이 출세한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돈과 지혜와 권력보다 중요한 것은 그것이 과연 하나님께, 그리고 하나님을 위하여 제대로 사용되고 쓰여지는가 하는 것입니다. 세상에는 저보다 돈 많은 사람, 저보다 똑똑하고 출세한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저는 그런 사람들이 별로 부럽지 않습니다. 그것은 제가 하나님께 쓰임을 받고 있기 때문입니다.
죄로 말미암아 죽을 수밖에 없었던 제가 살았습니다. 그냥 죽지 못해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생명이 충만한 삶을 살고 있습니다. 영원히 죽지 않을 영생의 삶을 살고 있습니다. 이 땅에서도 천국을 사는 구원의 삶을 살고 있습니다. 이 모든 축복이 다 예수 그리스도와 그를 믿는 믿음에서부터 왔습니다. 저에게도 부족하지만 그리스도 예수의 흔적이 있습니다. 저에게도 천지를 창조하신 전능하신 하나님의 흔적이 있습니다. 그 증거가 있습니다.
말씀을 마치려고 합니다. 하나님은 천지만물을 창조하신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이십니다. 그 하나님을 믿으면 그 창조의 역사가 우리의 삶과 생활 속에 그대로 실상과 증거로 나타납니다. 흔적으로 남습니다.
그와 같은 실상과 증거는 믿음으로만 얻을 수 있습니다. 아무리 교회 오래 다녀도 예수를 믿지 않으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살지 않으면 그와 같은 복을 받을 수 없습니다. 사랑하는 높은 뜻 숭의교회 교인 여러분, 예수 잘 믿는 사람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사도 바울과 같이 예수 그리스도의 흔적을 몸과 삶에 지니고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들이 다 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아멘.
'◑δεδομένα 18,185편 ◑ > उपदेश सामग्री 16,731편' 카테고리의 다른 글
밤하늘도 파랗다 / 시 27:1-4 (0) | 2021.12.25 |
---|---|
마 16:13-20 반석 위에 세운 교회 / 김동호 목사 (0) | 2021.12.25 |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 / 마 5:6 (0) | 2021.12.25 |
세상의 빛 / 마 5:13-16 (0) | 2021.12.25 |
마 10:1-15 세상을 바꾸는 교회 / 김동호 목사 (0) | 2021.12.25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