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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단을 쌓는 인생 /창세기 12:4-9

by 【고동엽】 2021. 12. 24.
제단을 쌓는 인생
창세기 12:4-9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면서 우리의 생존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세가지가 있다면 입을 옷, 먹을 양식, 그리고 살아가야 할 집이라고 할 수 있습니 다. 이것을 우리가 의식주라고 합니 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북한에서 는 아마도 먹을 양식에 대한 양식의 필요가 입는 옷보다도 훨씬 더 우선 한다는 그런생각 때문에 그런지 몰 라도 표기하는데 보니까 의식주라고 하지 않고, 식의주라고 표기를 하더 라구요. 식의주. 먹는게 훨씬 더 중 요하다 그거겠죠. 어쨌든 먹을 양식, 입을 옷, 살아가야 할 집 없어서는 안될 우리의 인생의 생존의 세가지 요소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 런데, 우리가 만약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을 만날 수 있는 기회가 있 다면 아브라함에게 우리의 인생의 생존의 절대적으로 필요한 요소가 무엇입니까?라로 묻는다면 아마도 아브라함은 주저함이 없이 이런 대 답을 할 것 입니다. 첫째는 제단이고, 둘째는 장막이라 고 대답을 할 것입니다. 제단과 장 막. 우리가 본문에 7절을 보시면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 가 라사대 내가 이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라 하신지라 그가 자기에게 나 타나신 여호와를 위하여 그곳에 무 엇을 쌓았어요? 단을 쌓고 그랬어 요. 8절에 ‘거기서 벧엘 동편 산으 로 옮겨 거기에 무엇을 쳤다고 했습 니까? 장막을 치니 그랬습니다. 서 는 벧엘이요 동은 아이라 그가 그 곳에서 여호와를 위하여 다시 단을 쌓았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제 단과 장막. 아브라함이 가는 곳마다 그는 제단을 쌓았고, 장막을 쳤습니 다. 장막은 주거지이지요. 우리가 살 아야 할 집입니다. 그런데 중동지방 에 있어서 장막이라는 것은 텐트라 는 것은 일시적인 주거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실은 텐트보다는 좀더 영구한 혹 은 반영구적인 주택형태가 중동땅에 도 존재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 구하고 지금도 우리가 만약 여러분 이 성지를 포함해서 중동을 방문한 다면 ‘베드윈족’이라는 족을 만나 게 됩니다. 양떼를 끌고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는 아직도 현대에도 존재하 고 있는 유목민의 형태인데, 그들은 늘 포터블 형태의 천막을 가지고 한 장소에서 다른장소로 이동하는 것을 볼수가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에게 있어서 천막이라는 것은 장막이라는 것은 결코 사치품이 아니라 필수품 입니다. 그런데 오늘 성경이 나타난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은 상당히 부자였던 사람이었습니다. 자기가 원한다면 천막보다는 좀더 나은 집 의 형태를 가질수도 있었습니다. 그 러나 그는 장막으로도 만족하였던 것으로 보여집니다. 우리가 히브리 서 11장 저 유명한 믿음의 장에서 보면 이런 기록이 있습니다. 믿음으 로 저가 즉 아브라함이 외방에 있는 것같이 약속하신 땅에 우거하여 동 일한 약속을 유업으로 함께 받은 이 삭과 야곱으로 더불어 자기 자손들 과 더불어 그 장막에 우거하였으니 장막에 살았으니 그래서 장막에 산 이유를 히브리서 11장 10절이 보시면 이렇게 기록합 니다. 이는 즉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경영하시고 하나님이 지으실 터가 즉 하나님이 예비하실 천국이 있음 을 바라보았기 때문에 그는 장막으 로 만족했다. 하나님이 나를 위해서 영원한 천국을 준비하셨다 그것을 확신했기 때문에 아브라함은 내가 이 천막을 가져도 나는 만족한다 이 런 마음으로 그가 장막에 거했던 것 으로 보여집니다. 그러나 아브라함 에 있어서 이 장막못지 않게 아브라 함의 인생에 있어서 참으로 중요한 또 하나의 필요가 있었다면 그것은 제단입니다. 그것은 장막보다도 훨 씬 아브라함에게 더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었던 것이 바로 제단입니다. 장막이 아브라함의 육신적 필요를 대표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제단이라 는 것은 아브라함의 영적 필요를 대 표하는 것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제단은 아브라함에게 있어서 하 나님과의 믿음의 표현이요, 하나님 과의 교통의 자리였던 것입니다. 아 브라함은 가는 곳마다 그의 발길이 닿는 곳마다 아브라함은 여러 차례 제단을 쌓은 것으로 성경에 여러 차 례 기록이 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 의 인생은 제단을 쌓는 인생이었다 고 할 수 있습니다. 제단을 쌓는 인 생. 어떤 신학자는 아브라함의 인생 을 가리켜서 제단의 실존이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제단의 실존. 오늘날 우리는 구약시대가 아닌 신 약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우리는 구 약시대처럼 문자 그대로 제단을 이 렇게 문자적으로 쌓을 필요는 전혀 없습니다. 십자가 사건 이후에 엄격 하게 말하면 우리에게 제단은 더 이 상 필요한 것은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러분이 신약성경을 읽어 보면, 신약성경은 제단은 강조하지 않지만 제사는 계속적으로 강조합니 다. 예컨대 “너희 몸을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그 다음에 우리가 하나님께 찬미의 제사를 드리자” 이렇게 성경이 강조합니다. 자, 그렇 다면 신약적으로 말하자면 이 제단 을 쌓는다는 것은 우리에게 무엇을 뜻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저는 그것을 예배의 삶에다 비교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오늘날도 여전 히 주님을 예배해야 되잖아요. 제단 을 쌓고 하나님을 예배한다. 왜 예 배가 필요합니까? 여러분! 우리가 이 땅에 살면서 예배가 필요한 이유 가 어디에 있어요? 우리는 이 질문 에 대한 대답을 오늘 본문에 나타난 아브라함의 역사적 현장에서 그 대 답을 찾고 싶은 것입니다. 왜 우리 는 아직도 제단을 쌓을 필요가 있을 까요?
첫째로, 그것은 우리가 감사의 삶 을 살아야 할 것이기 때문에 그렇습 니다. 감사의 삶을 위해서요. 오늘 본문에서 아브라함이 왜 단을 쌓았 는가? 아브라함이 제단을 쌓았던 그 motive 동기를 우리는 주목해서 볼 필요가 있습니다. 다시 본문의 7절 로 돌아가겠습니다. 7절 보겠어요. 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 나 가라사대 내가 이 땅을 네 자손 에게 주리라 하신지라” 하나님이 그렇게 말씀하셨죠? 약속하셨죠? 그러자 “그가 자기에게 나타나신 여호와를 위하여 그 곳에 단을 쌓 고” 단을 쌓는 아브라함의 마음, 심경. 어떤 심경이었을까요? 우리가 지난 시간에 5절 살펴 보았죠? 5절 복습 하겠습니다. 같이 읽을까요? 5 절 다같이 시작! “아브람이 그 아 내 사래와 조카 롯과 하란에서 모은 모든 소유와 얻은 사람들을 이끌고 가나안 땅으로 가려고 떠나서 마침 내 가나안 땅에 들어 갔더라” 자, 아브라함이 마침내 어디에 들어왔어 요? 마침내 가나안 땅에 도달했습니 다. 성경이 간단히 말하지만 아브라 함이 약속의 땅 가나안에 도달하기 까지 얼마나 많은 역정이 필요했습 니까? 천신만고의 그 여행을 통해서 마침내, 마침내 아브라함은 그 가나 안 땅에 도달했습니다. 감사했을 거 예요. 그죠? 하나님! 감사합니다. 마 침내 제가 약속의 땅에 도달했군요. 그러나 가나안 땅에 도달했지만 가 나안 땅이 저절로 아브라함의 땅이 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아브라함 은 그 땅을 이제부터 자기의 땅으로 만들어가야 합니다. 이거 보통 문제 가 아니거든요. 숙제가 아니거든요. 그때 7절에 보시면 하나님이 아브라 함에게 나타나신 거예요. 그 타이밍 을 맞춰서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셨습니다. 그리고 어떻게 말 씀하십니까? “내가 이 땅을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라” 하나님이 이 렇게 약속하셨습니다. 그러자 단을 쌓거든요. 하나님이 너와 네 자손에 게 이 땅을 주겠다라고 약속을 하신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그 약속을 믿 은 것입니다. 믿었을 때 아, 정말 이 땅이 내 땅이 되는구나! 어땠겠어요 마음속에. “감사합니다. 하나님! 이 땅을 주시는군요.” 그래서 아브라 함이 단을 쌓는 거예요. 그래서 이 제단은 감사의 제단입니다. 감사의 표현으로써 그 제단이 쌓아졌고 아 브라함이 주 앞에 나아갔던 모습을 볼 수가 있습니다. 여러분! 지금도, 오늘도 동일하게 우리가 예수 믿고 하나님 앞에 나오면 자, 우리가 성 경을 읽기 시작합니다. 자, 진지하게 우리가 성경공부도 하고, 성경을 읽 기 시작하면 뭘 부딪칩니까? 이 말 씀 속에서 날 향한, 우리를 향한 하 나님의 약속을 발견하게 됩니다. 하 나님 우리에게 약속을 하세요. 그 약속들을 발견하게 됩니다. 많은 약 속들이 있습니다. 성경에 하나님의 약속이 있어요. 아, 이게 다 나를 위 한 약속이구나. 풍성한 삶을 약속하 십니다. 내가 너에게 생명을 준다. 영원한 생명을 준다. 풍성한 생명을 준다. 이 땅에서의 약속, 그리고 우 리의 삶이 다할 때 저 영원한 천국 에 대한 기업의 약속. 우리가 이 약 속을 참으로 믿는다면 어떤 심경일 까요? 없어요? 느낌이 없습니까? 느낌이 없는 인생이십니까? 아, 감 사합니다. 하나님! 그 감사를 어떻 게 표현하면 좋아요? 그것이 예배예 요. 예배. 주님을 향한 감사를 드리 는 것입니다. 사랑을 고백하는 것입 니다. 감사의 표현. 아브라함이 그때 그 감사의 심경을 제단을 쌓고 주님 앞에 나아갔던 것처럼 오늘 동일하 게 우리는 예배를 통해서 하나님 앞 에 이 감사의 마음을 드리는 것입니 다. 그 다음에 보시면요, 8절에 “거 기서 벧엘 동편 산으로 옮겨 장막을 치니” 장막을 치니. 살아야 할 집 을, 장막을 치게 된 것입니다. 가나 안 땅에 와서 처음으로 장막을 쳤을 때 그 심정이 어땠을까요? 뭐 대단 한 집은 아니지만, 뭐 반영구적인 집도 아니고 그냥 텐트에 불과한 것 이었지만 드디어, 마침내 가나안 땅 에 들어와서 장막을 갖게 되었을 때 “하나님! 정말 감사해요” 여러분 자그마한 전셋집이지만, 뭐 큰 평수 도 아닌 전셋집이지만 여러분 마음 속에서 이런 심정을 가져봤어요? 하 나님! 정말 감사해요. 이 집을 주셔 서, 참, 살아야 할 집을 주시니 감사 합니다. 그런 마음 있습니까? 감사 합니다. 그러면 옆에 집은 몇 평인 데 이게 뭐가 감사하냐고. 아마 우 리가 그럴지 모르죠. 우리가 감사를 잃어버리는 마음, 감사의 정신이 고 갈되는 가장 중요한 이유가 있다면 우리가 삶의 단순성을 상실하기 때 문이라고 생각해요. 인생에 대한 단 순성, 삶에 대한 단순성. 정말 아브 라함의 감사, 아브라함의 제단의 배 후에 있었던 중요한 삶의 동기, motive가 있었다면 아바라함의 삶 의 단순성이었다고 저는 생각합니 다. 인생이 너무나 복잡해지기 시작 하면, 그리고 다양한 욕구가 분출되 면 우리의 마음속에서 이 감사의 정 신이 고갈됩니다. 아무것도 감사하 지 않아요. 그러나 단순해진다면 평 수가 문제가 아니에요. 하나님! 정 말 감사해요. 살 집이 있고 주님 섬 기고 인생을 보람 있게 살 수 있으 면 됐죠. 하나님! 너무 너무 감사해 요. 찬양을 받으세요. 찬송가 가사가 생각나지 않습니까? 찬송가 490장인 가요? “내 영혼이 은총 입어 중한 죄 짐 벗고 보니 슬픔 많은 이 세상 도 천국으로 화하도다” 3절인가요? “높은 산이 거친 들이 초막이나 궁 궐이나 내 주 예수 모신 곳이 그 어 디나 천국이니” 저는 우리 한국을 대표하는 유명한 부자를 내 일생에 서 한 15분 정도 만나본 적이 있습 니다. 지금은 돌아가셨습니다만 그 분이 일본에 암 수술하러 가기 직전 에 제가 뵙어요. 제가 이 절호의 찬 스에 제가 평소에 늘 묻고 있었던, 묻고 싶었던 질문이 있었습니다. 그 래서 이렇게 질문 했어요. “회장 님! 평안하세요?” 전 그분의 대답 을 내 평생 잊어버리지 못 할거예 요. 저를 빤히 쳐다보면서 “평안이 라뇨? 요즘은 아침에 눈을 뜨면 초 조하고 불안하오. 요즘 아침에 눈을 뜨면 아주 초조하고 불안하오” 저 는 그때 그 분이 하나도 부럽지 않 더라고요. 너무 너무 불쌍하게 보이 는 거 있죠? 속으로 그랬습니다. 겉 으로는 안 그랬지만. 내가 낫다. 훨 씬 낫다. 제가 그 분을 위해서 기도 해 드리고 간단히 복음을 전한 적이 있어요. 여러분! 뭐 많이 가져야, 소 요가 있어야 그것이 우리 마음속에 감사의 심정을 주는 것은 아니에요. 우리 삶이 단순해지면,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를 맺게 되면 여러분, 어 디서든지 감사의 이유를 찾습니다. 이런 사람들이 또한 드릴 수 있는 예배, 그 예배에 감격이 있어요. 하 나님을 위한 찬양, 감사가 드려지는 인생. 저는 한 평생, 특별히 밝아온 새천년의 첫해를 맞이하는 여러분 가운데 이런 감사의 정신이 충만하 여 어디가든지 이런 감격의 제단을 쌓고 주 앞에 드려질 수 있는 그런 찬양이, 감사가 넘치는 삶이 되시기 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왜 제단을 쌓아야 합니까? 감사의 삶, 그 감사의 삶을 표출하기 위해서 우 리에게는 제단이 필요한 것입니다. 자, 왜 이 제단이 필요했는가?
두 번째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승리의 삶을 위해서, 승리의 삶을 살아야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브 라함이 제단을 쌓았던 또 하나의 중 요한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는 감사 한 마음 때문이었고, 마침내 우리를 여기 가나안 땅에 도달시킨 하나님, 그리고 이 가나안 땅에 들어와서 자 그마한 천막이지만 살아야 할 곳을 주신 사랑하는 주님! 아, 정말 정말 감사해요. 그것이 제단을 쌓는 첫번 째 동기였고요. 둘째는 저는 능력의 삶, 혹은 승리의 삶을 위해서 저는 아브라함이 이 제단을 쌓았던 것으 로 보여집니다. 자, 우리가 본문의 6 절을 다같이 읽겠습니다. 다같이 시 작! “아브람이 그 땅을 통과하여 세겜 땅 모레 상수리나무에 이르니 그 때에 가나안 사람이 그 땅에 거 하였더라” 가나안 땅에 들어간 이 후에 성경의 기자는 아브람이 지금 부터 직면해 가야 할 새로운 삶의 모습을 묘사하면서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6절의 마지막 부분에 보 시면 “가나안 사람이 그 땅에 거하 였다” 이 표현이 왜 등장했을까요? 아브람이 약속된 가나안에 왔지만 그 땅이 저절로 아브람의 땅이 되는 것은 아니란 말이에요. 거기에는 이 미 그 땅을 선점하고 살고 있었던 가나안 사람들이 있었어요. 혹은 블 레셋 사람들이라고 보통 말합니다. 이 블레셋이란 말을 영어로 말하면 ‘Philistines’ 오늘날 ‘팔레스타 인’이란 단어가 거기서부터 나온 거예요. 본래 원주민이죠? 가나안 땅의 원주민들, 그 사람들이 거기에 있었다. 왜 이 사실을 보도합니까? 심상치 않은 이 보도. 가나안 사람 들이 거기에 있었다. 이제부터 그 땅을 자기의 땅으로 소유하기 위해 서는 가나안 사람들과의 일전이 불 사한 상태를 보여주고 있는 것이에 요. 가나안 사람들이 거기에 있었다. 아브람은 두려웠을 것입니다. 위축 됐을 것입니다. 어떻게 여기 이미 이 땅을 선점하고 살고 있는 저 사 람들과 더불어 직면하면서 여기서 우리의 땅을 일구고 하나님의 기업 을 이 땅에서 일구어 나갈 것인가? 얼마나 불안했겠어요? 자, 그랬을 때 하나님이 나타난 거에요. 이런 배경에서 다시 7절을 읽어 보겠어 요. 그 정확한 타이밍에 여호와께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 가라사대 뭐라 고 말씀하십니까? “내가 이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라” 이것은 아브 라함이 어떤 의미의 약속으로 들려 왔을까요? 이 땅은 네 땅이 될거야. 염려하지 마라. 두려워 하지 마라. 자, 이 말씀을 듣고 아브라함이 뭘 했습니까? 단을 쌓았다. 단을 쌓았 다. 다시 말하면, 아! 하나님이 나를 도와주시겠구나. 하나님이 나를 틀 림없이 도와주시겠구나. 또 이 약속 은 승리의 약속이었습니다. 하나님 의 승리의 개런티를 받으며 아브라 함은 용기가 생겼을 것입니다. 그래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면, 주께서 도 와주신다면, 나에게 나타나신 그 하 나님이 함께 하신다면 이 땅은 약속 대로 우리의 땅이 될 것이다. 다시 말하면, 이 단을 쌓을 때 아브라함 의 마음 속에서는 바로 그 가나안의 삶에 직면할 수 있는 새로운 에너지 가, 용기가 아마 용솟음 치고 있었 을 거예요. 그것이 제단의 의미예요. 제단을 쌓은 중요한 동기. 여기서 아브라함은 권능을 체험하고, 하나 님의 능력을 체험하면서 가나안 땅 에 살아갈 수 있는 새로운 능력을 공급 받으면서 승리로운 발걸음으로 벌떡 일어설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저는 이것이 제단의 의미라고 생각 해요. 제단을 쌓았던 곳, 장소가 아 주 재밌는데요. ‘세겜’이라는 곳 이었어요. 가나안 땅의 세겜. 6절에 보시면 아브람이 그 땅을 통과하여 ‘세겜 땅’ 그랬습니다. 세겜 땅. 세겜이란 말이 히브리어론 본래 어 깨란 뜻입니다. 어깨. 이런 지명에다 지나치게 불필요한 의미를 부여할 필요는 없지만 흥미로운 사실이에 요. 세겜이 어깨라는 뜻입니다. 우리 말의 뉘앙스하고 아주 비슷한 뜻이 있는데 여러분, 옛날에는 제가 어렸 을 때만 해도 그런 말을 많이 썼는 데 어깨하면 뭘 의미합니까? 어깨. 저 사람 어깨야.그러면 아주 힘 있 는 사람을 연상하게 됩니다. 그것은 능력의 상징. 아브람은 바로 이 세 겜 땅에서 제단을 쌓고 이 가나안 땅에 삶에 직면할 수 있는 에너지 를, 능력을 공급 받을 수 가 있었던 것입니다. 사랑하시는 여러분! 오늘 험악한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 들. Challenge와 Stress와 그리고 많은 Presser를 직면하고 있는 여러 분이 이 땅에 살면서 어디에서 능력 을 얻습니까? 어디에서 힘을 얻습니 까? 저는 그것이 예배의 자리라고 생각해요. 예배가 줄 수 있는 최대 의 축복. 내가 예배 나올 때만 해도 좀 처진 모습으로 힘없이 나왔지만 우리가 찬양을 부르면서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고 또 기도를 드리면 서 내 마음을 쏟아 내면서, 그리고 내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면서 자, 예배 끝나고 나갈 때 어떤 심정이 듭니까? 예배 딱 끝나 고 나갈 때가 중요해요. 어떤 사람 은 여전히 처진 무기력한 모습으로 나가는 사람도 없지 않아 있어요. 그러나 또 어떤 사람은 예배 참석하 고 달라졌어요. 변화됐어요. 새 힘이 생겼어요. 성령을 체험했어요. 하나 님의 음성을 들었어요. 삶을 살 수 있는 에너지를 얻었어요. 새로운 재 귀의 능력이 생겼습니다. 갑자기 얼 굴이 확 펴지면서 그래, 주님이 함 께 하셔. 다시 일어나서 당당하게 세상을 향해서 나아가는 모습을 보 세요. ‘할렐루야!’ 저는 그것이 진정한 예배자의 모습이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예배자의 모습. 저는 예배 가 살면 우리 인생이 산다고 믿습니 다. 여러분 믿습니까? 한번 따라 해 보세요. “예배가 살면 인생이 산 다” 예배가 살아나야 내 인생이 살 아나요. 예배에서 은혜를 받으면, 성 도들은 예배의 자리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지 못하면 어디에서 위로를 받아요. 어디에서 새 힘을 얻어요. 어디에서 꿈을 꿔요. 인생의 Presser와 Stress와 그리고 수많은 역경을 직면하고, 그리고 극복해 나 갈 수 있는 삶의 능력을 얻는 자리, 그것이 저는 바로 예배의 자리이어 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오늘 우리가 제직들이 헌신을 드리는 그런 순간 입니다. 저는 봉사자들이 빠지기 쉬 운 함정이 자, 예배를 잘 드릴 수 있도록 주변에서 봉사하는 많은 사 람들이 필요하죠. 정말 필요해요. 근 데 봉사를 하다 보면 지쳐요. 어느 순간이 지나가다 보면 지쳐 버립니 다. 그래서 저는 금년 초에 저희 교 회 사역자들, 또 저희 교회 스텝들 과 함께 예배를 드리는 자리에서 이 런 말씀을 나눴습니다. 우리 교회가 예배가 한번이 아니니까 한 7번쯤 되니까 우리 봉사자들도, 또 우리 모든 목회자들도 그 예배 한번은 다 잊어버리고 예배에 정말 열중해 보 자. 우리가 살아야, 내가 살아야 다 른 성도들을 섬기고 또 다른 사람들 을 세워 줄 수 있으니까 한번쯤은 좀 완전히 예배에 집중을 하자. 그 때는 안내도 잊어버리고 예배에 전 적으로 빠져보자. 그래서 거기서 힘 을 얻고, 거기서 능력을 얻고, 거기 서 힘을 얻고 성령 충만을 얻고 다 른 예배의 자리에서는 봉사자의 자 리에 서서 봉사하고. 이런 받는 은 혜가 없이 예배의 자리에서 체험하 는 성령의 체험과 하나님의 그 기름 부으심을 체험하지 못하고 그냥 봉 사 일변도로 빠지게 되면은 그 봉사 가 오래가지 못해요. 지쳐 버려요. 꺾여 버려요. 그래서 오늘 어떤 분 은 7시 반 예배, 어떤 분은 9시 반 예배, 우리 사역자들이 다 아주 중 간에 혹은 앞에 나와서 예배를 드리 기로 했어요. 한번은 우리도 정말 집중해서 찬양을 드리고, 기도하고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하자. 왜? 예 배가 살아야 내가 사니까. 내가 살 아야 봉사를 할 수 있으니까. 예배 의 자리, 이 제단의 자리는 매우 중 요한 것입니다. 아브람이 가나안 땅 에 들어가자마자 앞으로 길게 벌여 질 삶의 치열한 전투, 그 전장에서 그가 승리자로 설 수 있기 위하여 그에게 말씀하시는 하나님, 하나님 의 약속의 말씀을 받으며, 그리고 승리의 말씀을 확인하면서, 하나님 날 도와주시죠 저는 믿습니다라고 제단을 쌓았을 때 그 제단에 임하시 는 하나님의 목소리를 듣고 하나님 의 능력을 체험하고 일어섰던 아브 람! 가나안 땅을 향한 아브람의 행 군, 아브람의 전진, 아브람의 능력은 바로 이 제단에서 이루어진 줄 믿습 니다. 그런 의미에서 저는 금년 한 해 밝아온 새천년에 여러분의 발걸 음마다 여러분 인생의 한 복판 속에 무엇보다 제단 쌓는 일이 우선되기 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능력 의 삶을 위하여, 그리고 승리로운 삶을 위하여 제단을 쌓아야 되요.
그 다음에 세 번째로 제단을 쌓아 야 할 중요한 이유가 있습니다. 그 것은 증거의 삶을 살아야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증거의 삶을 살아가기 위해서. 아브람에게 있어서 바로 제 단이라는 것은 어떤 의미를 갖습니 까? 제단에 설 때 마다 나에게 말씀 하시는 하나님. 하나님의 살아계심 을 확인합니다. 하나님의 임재를 확 인합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살아계 시지 않다면 예배가 무슨 의미가 있 겠어요? 왜 어떤 사람의 예배에는 감동이 없을까요? 어떤 사람의 찬양 속에는 가슴에 뛰는 고백이 없을까 요? 기도하는 내 마음 속에 아무 설 레임도 없어요. 그것은 하나님의 살 아계심을 확신하지 못하거나, 하나 님의 임재의 체험의 열기 때문에 그 래요. 내가 하나님의 임재를 확인할 수록 우리 가운데 계신 하나님, 살 아계신 하나님, 내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 내 찬양을 열납하시는 하나 님, 하늘과 땅을 지으신 하나님, 그 리고 이 온 우주만물가운데 운행하 시는 하나님, 그 살아계신 하나님의 임재를 확신한다면 그 하나님 앞에 드려지는 우리의 찬양. 좀 달라지지 않겠어요? 우리의 기도. 여러분! 좀 달라지지 않겠어요? 자, 아브람에게 있어서 제단을 쌓는다는 것은 그 하 나님이 살아계신 것, 그 하나님을 만난 것을 증거하는 일종의 증거의 단이었습니다. 그래서 아브람은 가 는 곳마다 제단을 쌓습니다. 아브람 이 지나간 곳에는 항상 제단이 남아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어떤 느낌 을 가졌을까요? 자, 여기서 누군가 가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구나. 다른 사람도 하나님의 이름을 기억합니 다. 아브람이 가는 곳마다 제단이 세워지고 그 제단이 있는 곳마다 사 람들은 하나님을 기억합니다. 바로 이 제단의 세워짐은 하나님 나라의 영토의 넓어짐을 의미하고 있었던 거예요. 하나님의 영토의 넓어짐을 말해주고 있었던 것입니다. 아브람 은 제단을 한 장소로 만족하지 않았 습니다. 본문에서도 두 번 쌓은 거 예요. 그렇죠? 한 번이 아니죠? 네, 일단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세겜에 서 단을 쌓고 그 다음에 또 8절에 보면 어디에서 단을 쌓습니까? 거기 서 벧엘 동편 산으로 옮겨 장막을 치고 나서, 자기 집을 만들고 나서 서쪽은 벧엘이고 동쪽은 아이였는데 그가 그곳에서 여호와를 위하여 단 을 쌓았고, 자기가 장막을 만든 다 음에 또 단을 쌓았습니다. 장막을 만든 다음에. 그래서 장막 가까운 곳에 있었을 거예요. 아마도 그 단 은 장막을 위한 단이었다라고도 할 수가 있습니다. 좀 바꾸면 이렇게 말할 수가 있습니다. 가정제단이라 그럴까요? 자기집에도 제단을 쌓는 거예요. 집을 지어놓고 ‘하나님, 제 가 여기에서도 여호와의 이름을 부 를께요. 어떤 사람이 교회의 예배시 간에는 하나님께 예배해요. 그러나 집에 가서는 예배하지 못하는 사람 이 있어요. 저는 여러분이 여러분의 집에도 제단이 있기를 바랍니다. 여 러분이 집에서도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고 거기서도 하나님을 찬양할 수가 있어야 해요. 찬양이 있는 가 정, 기도가 있는 가정, 거기 하나님 의 나라가 임하는 거예요. 그래서 크리스챤들은 제단을 갖고 다녀야 하는 거예요. 저는 여러분들이 여러 분들의 직장에 가서도 제단을 쌓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의 직장 에도 제단이 있어야 해요. 어떤 사 람은 정말 주님을 향한 열정과 비전 을 가진 사람, 그 사람이 가는 곳마 다 예배가 생겨요. 성경공부가 생겨 요. 신우회가 생겨요. 직장이 바뀌어 요. 이것이 하나님의 나라를 넓혀 가는 사람의 모습이에요. 하나님의 나라를 넓혀 가는 모습. 신앙생활의 테스트는 교회당 안에 제한되지 않 습니다. 교회당 바깥에서도 내가 증 거의 삶을 살수가 있느냐. 가정에서 도. 이런 것은 아브람이 장막을 만 들었던 장소가 매우 흥미롭다고 생 각했습니다. 자, 아브라함이 장막을 쳤던 장소가 어디였습니까? 8절에 보면 벧엘과 아이사이였어요. 자, 8절. 거기서 벧 엘 동편 산으로 옮겨 장막을 쳤는데 서쪽에는 벧엘이 있었고 동쪽은 아 이였다. 그 사이에 장막을 쳤어요. 재미있는 것은 벧엘이라는 이 말의 뜻이 무엇입니까? 여러분, 아시죠? 벧엘. 베이트 엘이라는 뜻인데, 하나 님의 집이라는 뜻입니다. 벧엘은 하 나님의 집. 그런데 아이라는 말의 뜻은 어른이 되기 전의 아이? 그런 아이가 아니 구요. 아이라는 뜻은 폐허의 무더기 라는 뜻이에요. 폐허의 무더기. 황폐 한 곳, 아주 황폐한 곳. 그 사이에다 가 장막을 치고 제단을 만들었어요. 저는 아주 이것이 흥미롭다고 생각 해요. 한쪽에는 하나님의 집을 상징 하는 벧엘이 있고, 한쪽에는 폐허, 잿더미를 상징하는 아이가 있었어 요. 저는 우리의 가정이 하나님의 집일 수도 있고, 천국일 수도 있고, 폐허의 잿더미일 수도 있어요. 여러 분의 집에 가서, 심방가서 쭉 냄새 를 맡아보면 대충 알 수 있어요. 집 안을 근사하게 decoration을 해도 찬바람이 쌩쌩불고, 어딘가 폐허처 럼 느껴지는 집안이 있어요. 뭐 그 렇게 집안이 큰 평수도 아니고, 자 그마하지만 집안에 딱 들어가면 아 주 천국같이 느껴지는 집이 있어요. 그 차이가 뭘까요? 저는 그 차이가 제단의 차이라고 생각해요. 제단이 있는 곳, 찬양이 있는 집안, 여호와 의 임재가 있는곳, 하나님을 향한 사랑과 예배가 있는 곳. 저는 그런 가정이 천국인줄 믿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살아계신 임재가 없고, 성 령의 기름 부으심이 없는 곳. 아무 리 화려한 집안에 살아도 그곳은 지 옥이예요. 허무의 잿더미.. 허무의 잿더미.. 그것이 재단이 만들어 놓은 거예요. 여러분의 가정에 제단을 만 드시길 바랍니다. 여러분의 직장에 도 제단을 쌓기 바랍니다. 저는 여 러분의 발걸음이 미치는 곳마다 하 나님의 나라를 확장시키는 놀라운 역사가 있기를 바랍니다. 그것이 바 로 증거의 삶입니다. 증거의 삶.. 저 유명한 화란의 크리스챤 할머니 코리 텐 붐의 전기에 보면 이런 간 증이 있습니다. 그가 히틀러의 나치 독일의 수용소에 붙들려 들어갔을 때 이런 기도를 드립니다. 이분이. 하나님, 여기서도 하나님만 예배할 수 있다면 저 불평하지 않을 께요. 여기서도 하나님만 예배할 수 있다 면 불평하며 살지 않겠습니다. 이렇 게 딱 기도했는데, 감방안에 갑자기 이가 많아지는 거예요. 여기에서 예 배하게 해 달라고 했는데, 이가 많 아지면 예배하기가 힘들어 지잖아 요. 하나님. 이가 많으면 어떡해요. 그런데 이상한 일이 벌어지기 시작 해요. 그게 뭐냐면, 간수가 오지를 않아요. 이가 많은 감방이라고 소문 이 나니까, 거기에 가면 이가 오른 다고 생각하니까 간수들이 아예 그 감방을 버려두는 거예요. 그래서 그 감방은 간수들의 눈초리로부터 자유 를 얻고, 아주 안전한 공간이 되기 시작했어요. 마음대로 떠들어도 상 관없고, 찬송해도 상관없고, 기도해 도 상관이 없어요. 거기에서 코리 할머니는 열심히 전도를 합니다. 많 은 사람들이 예수를 믿어요. 그들과 더불어 말씀을 나눕니다. 기도합니 다. 조금씩 조금씩 찬송을 부르고 작은 목소리로 찬양을 부르기 시작 합니다. 드디어 이렇게 말하기 시작 합니다. 코리 이분이. 이것은 작은 감방, 이들로 말미암아 간수와 모든 지키는 사람들로부터 자유로웠던 이 공간은 드디어 천국이 되기 시작했 다. 천국이 되기 시작했다. 사랑하시는 여러분, 하나님의 임재 가 있는 그곳, 하나님을 향한 찬양 과 기도가 있는 그곳에 천국이 임하 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저는 이어 새로운 천년에 여러분의 삶 가운데 하나님의 거룩한 임재와 더불어 함께 살아가는 삶, 여러분의 발걸음이 미치는 곳마다 하나님의 나라의 권세있는 영토가 확장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것이 제단을 쌓는 삶이예요. 어떻게 우리는 제단을 쌓을 수가 있 습니까? 우리가 이런 제단을 쌓는 삶을 위하여 마지막으로 강조하고 싶은 것은 이 제단앞에 올려놓을 제 물이 있어야 하는 거예요. 그것은 구체적인 헌신을 말합니다. 가나안 땅에 들어와서 아직도 해야 할 많은 과제앞에서 그동안 역경의 삶을 살 아왔던 아브라함에게 제단을 쌓는 일은 번거로운 일이었음에도 불구하 고, 시간을 요구하고, 물질을 요구하 는 것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아브라함 이 기쁘게 제단을 쌓았고, 거기에 제물을 올려 놓았습니다. 그는 제단 의 가치와 의미를 알았기 때문입니 다. 헌신은 구체적이어야 합니다. 여 러분이 제단을 쌓는 삶을 살기위해 서는 시간을 좀 내야 해요. 시간을.. 가정에서 식구들과 함께 시간을 좀 내고 찬양을 드리고 말씀도 나누고, 그리고 구체적으로 헌신을 드리고 하나님 앞에 자신을 드리기로 결단 하고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 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의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 사로 드리라. 거기에 보면 너희의 마음을 드리라 하지 않고 네 몸을 드리라고 했어요. 마음을 드리라고 했으면 마음 드렸다고 하면 되는데 네 몸을 산제사로 드리라. 우리 몸 의 헌신의 구체적인 상징은 우리의 시간과 물질이라고 생각합니다. 시 간을 바치지 못하는 사람, 그리고 물질을 드리지 못하는 사람. 그 헌 신은 사기입니다. 별로 의미가 없어 요. 구체적인 헌신. 내가 정말로 가 치있게 여기는 그 일을 위하여 내가 정말 내 삶을 드리고, 시간을 드리 고 물질을 드려 전능하신 하나님과 이웃들을 섬기고 봉사할 수 있느냐. 인생을 다 살고 나면 우리가 얼마나 벌었느냐 이것 하나도 중요하지 않 아요. 어떻게 쓸수가 있었느냐, 무엇 을 위하여 썼느냐 그것만이 중요합 니다. 우리의 헬렌켈러 전기에 읽어 보면, 그가 어느날의 고백을 기록하 고 있어요. 장애인들에게 가장 큰 고통이 무엇이냐, 그것은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생각이다.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생각이다. 나는 기도 한다. 나와 같은 장애인도 해야 할 일이 너무나 너무나 많다는 것을 증 명하는 삶을 살고 싶다. 하나님, 나 를 써 주시옵소서. 나를 써 주시옵 소서. 하나님은 그녀를 쓰셨습니다. 88세가 되도록 살았던 헬렌켈러. 볼 수 없고, 들을수 없고, 말할 수 없음 에도 불구하고, 쓰임을 받을 수 있 었던 그녀의 생애을 보면서, 사랑하 시는 여러분. 이런 사람도 쓰임을 받을 수 있었다면, 저와 여러분이 왜 쓰임을 받을 수 없겠어요. 만약 내가 정말 기쁘게 거룩하신 주 의 제단앞에 내 육체를, 내 존재를 올려놓고, 내 시간과 내 정성과 그 리고 내 달란트를 바쳐 전능하신 하 나님을 섬기기로 결단한다면 헬렌켈 러를 쓰셨던 하나님, 여러분과 저를 쓰시는 한해가 될 줄로 믿습니다. 그 하나님의 임재가 임하는 한해가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하십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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