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δεδομένα 18,185편 ◑/उपदेश सामग्री 16,731편

무신론자의 죄 /시편 14:1-7

by 【고동엽】 2021. 12. 24.

무신론자의 죄
시편 14:1-7

옥스포드와 켐브리지에서 가르친 C.S 루이스 교수가 한 번은 그의 비서를 데리고 학교 캠퍼스 근교의 무덤공원을 산책하고 있었습니다. 비서가 갑자기 C.S 루이스 교수에 게 한 무덤의 비문을 가리키면서 선 생님, 이 비문을 보세요. 이 비문이 아주 흥미롭지 않습니까? 봤더니 그 비문에 이렇게 씌여져 있었다고 합 니다. 유언에 의하여 쓰여지다. 갈 곳을 모르는 무신론자가 여기에 누 워있다. 이 비서가 말하기를 선생님 재미있지 않아요? 이 때 C.S 루이 스는 매우 심각한 표정으로 이렇게 대답했다고 합니다. 재미라니? 이제 그는 갈 곳을 알지 않았겠나? 그리 고 너무 늦었지. 시편 14편 1절 말 씀을 보면 어리석은 자는 그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는도다. 하나님이 없다라고 주장하는 사람, 소위 무신론자를 가리켜서 혹은 무 신론을 가리켜서 어리석다라는 표현 을 썼습니다. 어리석다라는 말은 희 브리어의 본래 나발이라는 말입니 다. 나팔이 아니라 나발입니다. 실제 로 구약성경에 보시면 나발이라는 사람이 나오지요? 사무엘 상 25장에 나옵니다. 그가 다윗을 만났어요. 그 래서 다윗과 평화롭게 살자! 이런 제안을 했는데 이 나발이라는 부자 였기 때문에 혹시 다윗과 함께 살면 자기 재산에 축이 나고 손해가 되지 않을까 하여 그것을 거절합니다. 그 리고 다윗을 좀 악하게 대했습니다. 이것이 화근이 되어서 그는 스스로 파멸의 길을 걷게 됩니다. 그 아내 아비가일의 구명에도 불구하고 결국 그는 비참하게 죽습니다. 성경은 이 사람에 대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사 무엘 상 25장 3절에 보시면 그에 대 하여 그는 완악하고 악한 사람이었 다. 이름처럼 악한 사람이었다. 나발 이라는 말은 단순히 어리석다는 것 뿐만 아니라 악하다는 뜻을 동시에 갖습니다. 무신론은 단순히 어리석 을 뿐만 아니라 그것은 죄악입니다. 그래서 이 무신론자에 대해서 오늘 시편 14편 4절에 보시면 동시에 죄 악을 행하는 자라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도스토엡스키가 남긴 유 명한 말 가운데 만약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하나님이 존재하지 않는 다면 사람은 무슨 일이라도 할 수가 있다. 이것은 무서운 소리입니다. 하 나님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사람은 무슨 일이라도 할 수가 있다. 이것 은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말이라고 생각해요. 하나님이 없다. 이 말은 모든 질서, 모든 가치를 부정하는 선언인 것입니다. 그러면 구체적으 로 무신론은 어떠한 죄인가를 오늘 본문을 통해서 살펴보고자 합니다. 무신론은 어떤 죄일까요?

첫째로 그것은 양심을 거스리는 죄악입니다. 오늘 14편 1절은 이렇 게 시작합니다. 어리석은 자는 그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은 없다. 어 리석은 자는 자기 마음을 향해서 말 해요. 하나님이 없다. 자기의 마음을 지금설득하고 있는 것입니다. 왜 자 기 마음을 설득해요? 하나님이 없으 면 없다고 믿고 그냥 살면 되지? 자 기 마음과 싸우고 있는 거예요, 지 금 이 사람은. 어쩌면 자기 마음 깊 은 곳에서 신은 존재할 지 몰라, 하 나님은 계실지 몰라…마음의 외침을 들으면서도 그는 그것을 누르고 싶 어하는 고백일지도 모릅니다. 어리 석은 자는 자기 마음에 이르기를 하 나님이 없다 하는도다. 한 기독교 심리학자는 무신론자에 관해서 정확 히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그가 이렇 게 정의했습니다. 무신론자는 하나 님이 없다고 믿는 사람이 아니다. 자기 안에 각인된 하나님 의식과 더 불어 그 의식을 지우기 위해서 일부 러 싸우고 있는 사람이다. 하나님 의식이 있는데 그 의식을 없애 버리 려고 싸우고 있는 사람이 사실은 무 신론자이다.
니이체라는 유명한 철학자가 하 나님은 죽었다, 신은 죽었다라는 선 언을 하지 않았습니까? 그가 말년에 미쳤어요. 그가 광기어린, 그 미침속 에서 그가 휘갈려 쓴 그가 낙서장처 럼 남겨진 메모지에는 이런 글이 남 겨져 있습니다. 신이여, 당신은 살아 있다. 나는 죽었다. 니이체 사실 그 는 자기 안에 있는 신의식과 더불어 한 평생을 싸웠던 불행한 철학자라 고 우리는 말할 수가 있습니다.
가끔 교회나 예수 믿는 사람들이 신앙을 다른 사람들에게 전달하고 싶어서 자기 건물의 위에다 기독교 적인 표어를 써 붙이기도 하고 또 교회당 위에다가 지나가는 사람들 보라고 우리가 복음적인 구호나 하 나님의 말씀을 써 붙이지 않습니까? 뭐, 경부고속도로 선상에도 기도할 수 있는데 왜 걱정하십니까? 이런 표시를 우리가 볼 수가 있지요. 한 무신론자가 이것을 흉내를 내서 자 기 나름대로 무신론을 선전하기 위 해서 자기 집 지붕 위에다가, 이것 은 미국에서 일어난 일인데, 자기 집이 길 가에 있었기 때문에 길 가 에 지나가는 사람 다 보라고 영어로 이렇게 써 붙여 놨다고 그래요. God is nowhere. 이 말은 신은 어 디에고 없다, 하나님은 아무데도 없 다. 크게 써 붙여 놨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조금씩 조금씩, 세월이 지나 가니까 끝의 자가, 페인트가 희미해 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어디서 부터 희미해지기 시작했느냐 하면 h자 부터 here가 희미해 졌어요. 그 러니까 그 앞에 있는 now하고 차별 화가 되기 시작했습니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보니까 뭐라고 썼는가 하 면 God is now here. 신은 여기에 있다. 하나님을 여기에 있다. 이렇게 써 붙여 놨단 말이지요. 이 광경을 보면서 곁에 있는 크리스챤들이 이 렇게 말했다고 그래요. 하나님은 정 말 sense of humor 가 있는 그런 하나님이시다. 이 사람의 선언을 바 꾸어 놓으셨습니다. 하나님은 여기 에 있다. 제가 언젠가 그 얘기를 드 렸습니다만 지금도 살아있는 사람인 데 미국의 무신론자들의 협회의 회 장을 지내는 매들린 오헤어라는 사 람이 있습니다. 이 사람이 미국에서, 공립학교에서 기도를 못하는 기도 금지 운동을 벌리는 사람인데 미국 중서부의 어떤 도시에서 그것을 재 판에 걸었다가 이 사람이 이겼어요. 자기는 질 줄 알았는데 뜻밖에 승소 를 했습니다. 그래서 공립학교에서 기도하지 말자, 이 사람이 승리를 해서 너무나 기뻐서 법정에서 갑자 기 이 사람이 소리치기를 Oh, my God! 하고 소리쳤습니다. 이 무신론 자가... 그래서 그것이 미국의 신문 에 회자가 되었어요. 어떤 신문은 조크를 하기를 무신론자가 영광을 하나님께 돌렸다.
인간이 아무리 하나님을 자기 마 음속에서 지워버리려고 해도 지울 수 없는 어떤 신의식이 우리의 마음 밑바탕에 남아 있습니다. 로마서 1 장 20절에는 이것을 이렇게 설명합 니다. 하나님의 능력과 신성이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되 나니 저희가 핑계치 못할지니라. 우 리 안에 하나님을 아는 증거들이 있 다 이 말입니다. 하나님을 알되 하 나님으로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 치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 망하여 지고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 졌도다 이 말씀이 계속되면서 로마 서 2장에 가면 2장15절에 하나님없 이, 하나님 모르고 살아가는 이방인 들에 대해서 이방인들은 양심이 하 나님의 율법을 나타낸다. 이런 말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양심이 하나님 의 율법을 나타낸다. 양심! 하지 말 아야 돼, 이건 안 하지… 우리 마음 속에 이런 양심이 하나님의 법이다. 하나님이 우리 마음속에 주신 하나 님의 법이다. 법은 법의 제정자없이 는 주어질 수 없잖아요. 양심이 어 디에서 나왔겠습니까? 흥미로운 것 은 양심이라는 단어가 희랍어에서 본래의 두 개의 단어의 결합입니다. 누구 누구와 더불어 안다. 영어에도 conscience라고 그러는데 con, 더불 어 함께 안다. 하나님이 주신 것이 라 하나님과 더불어 안다. 하나님과 더불어 아는 것이다.
임마누엘 칸트라는 유명한 철학 자가 그런 말을 하지 않았습니까? 저 하늘에는 무수히 별들이 반짝이 고 내 마음에는 양심의 도덕율이 빛 나고 있다 우리 안에서 소리치는 것 이 있어요. 하나님의 음성이 계속 들려옵니다. 그런데 무신론은 뭡니 까? 무신론은 이런 양심의 증거를 거스리는 것이다. 따라서 무신론은 양심의 증거를 묵살하고 거슬리는 부자연스러운 죄악인 것입니다. 부 자연스럽다. unnatural한 죄가 바로 무신론의 죄악인 것입니다. 무신론 은 어떤 죄일까요?

둘째로 무신론의 정체, 그것은 자기의 죄를 합리화시키는 죄인 것 입니다.
다시 한번 1절을 읽겠습니다. 14 장 1절 어리석은 자는 그 마음에 이 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도다 저희 는 부패하고 소행이 가증하여 선을 행하는 자가 없도다 3절도 보세요. 다 치우쳤으며 함께 더러운 자가 되 고 선을 행하는 자가 없으니 하나도 없도다 시편 14편 3절의 말씀은 유 명한 로마서 3장에서 또 인용되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다, 하나도 없 다. 사람은 다 죄인이다. 자, 무신론 얘기를 하다가 왜 시편 기자가 이 얘기를 하고 있을까요? 지금 시편 기자는 무신론자의 어리석음을 증거 할 때 지적인 오류를 반박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무신론의 오류를 도덕 적인 오류속에서 찾고 있습니다. 도 덕적인 오류의 반증을 들고 있어요. 다시 말하면, 쉽게 말하면 이런 얘 기입니다. 왜 무신론을 주장합니까? 사람들이? 하나님이 없다고? 자기 마음속에 있는 죄악을 은폐하기 위 해서다. 자기 마음속의 죄를 은폐하 고 그 죄를 합리화시키기 위해서 사 람들은 무신론을 주장하는 것이다. 이것이 시편 기자의 말씀이에요. 무 신론이라는 이 철학적 체계가 가진 가장 커다란 딜레마와 난점이 있다 면 윤리를 어떻게 할 것인가? 도덕 을 어떻게 할 것인가? 라는 문제예 요. 나름대로 무신론자들이 고민하 면서 요즘 무신론자의 윤리 뭐 이런 책들도 나왔더라구요. 그런데 읽어 보면 아주 논리의 근거가 빈약합니 다. 그것은 모래 위에 세운 누각에 불과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부정 했을 때 절대 가치를 부인하고, 그 리고 절대자를 부인해 버렸을 때 남 는 것은 상대화된 사람과 사람 사이 의 계약밖에는 남지 않습니다. 윤리 가 세워지기가 어려워요. 그래서 무 신론이 포교되는 사회, 무신론이 지 배하는 사회는 도덕이 말살되고 그 리고 도덕적인 건강이 상실되는 사 회가 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이런 사회의 아주 분명한 징후가운 데 하나는 뭐냐하면 반드시 크리스 챤들이 핍박받아요. 무신론자의 세 계속에서는 하나님의 백성이 어려움 을 당할 수가 있습니다. 자, 본문의 4절을 읽겠습니다. 죄악을 행하는 자는 다 무지하뇨 저희가 떡 먹듯이 내 백성을 먹으면서 여호와를 부르 지 아니하는도다 무신론자들에게 있 어서는 하나님을 증거하고, 하나님 과 더불어 사는 사람들이 곁에 있다 는 것이 거추장스럽습니다. 그러니 까 하나님 백성을 핍박할 수 밖에 없어요.
여러분, 철학자 니이체가 가장 영향을 끼친 정치가가 누군지 아십 니까? 히틀러예요. 히틀러는 바로 니이체에게서 철학적인 감동을 받고 그것을 실천에 옮긴 정치가입니다. 결과가 어때요? 600만명의 유대인 을 무참하게 학살했습니다. 유대인 만 학살당한 것이 아니예요. 아주 소수의 히틀러 정권에 아부했던 기 독교인들 빼 놓고는 수 많은 크리스 챤들이 또한 히틀러의 지배아래서 죽어갔습니다. 그래서 예외없이 무 신론이 성횡하는 곳에서 기독교의 가치가 저하되고 기독교인들이 핍박 을 받는 사례가 나타날 수 밖에 없 습니다. 재미있는 것은 제가 미국에 살면서 보니까 낙태 운동, 낙태를 찬성하느냐? 반대하느냐? 미국에서 아주 핫 이슈인데 무신론자들은 자 연스럽게 낙태운동, 낙태지지 운동 에 앞장을 서고 있습니다. 생명 살 상운동에 앞장을 서고 있는 것이예 요. 그래서 무신론은 부자연스러운 죄일 뿐만 아니라 그것은 부도덕한 죄악인 것입니다. 무신론은 죄인 것 입니다.

세 번째로는 한걸음 더 나아가서 무신론은 심판의 두려움에서 도피하 는 죄악입니다. 무신론은 부도덕할 뿐만 아니라 그것은 무책임합니다. 우리가 창세기의 기사에 보면 성경 에 자, 아담과 하와, 첫 사람이 범죄 했을 때 하나님이 아담을 찾아와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아담아, 아담 아 네가 어디에 있느냐? 자, 아담의 대답이 뭐예요? 내가 두려워하여 숨 었나이다. 두려움이 그가 숨게 된 동기라고 말합니다.
아주 흥미로운 것은 현대 무신론 의 원조 역할을 했던 철학자에 한 사람이 있고, 심리학자에 한 사람이 있습니다. 철학자는 포이에르 바하 라는 철학자고, 심리학자는 프로이 드라는 유명한 심리학자가 현대 무 신론의 원조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두 사람이 같은 논고를 제시했습니 다. 뭐냐하면? 왜 종교가 생긴 줄 아느냐? 사람들의 마음의 두려움 때 문이다. 그 두려움에서 위로받고 싶 어서 자기를 보호할 수 있는 신을 사람들이 만들어 낸 것이다. 신이 인간을 만든 것이 아니고 사람이 신 을 만들었다. 그리고 이러한 것에 근거에는 뭐냐하면 사람들의 wishful thinking, 원하는 생각, 아! 신이 있으면 좋겠다. 그래야 보호를 받는다. 그래서 사람들이 신을 만들 어 낸 것이다. 이것이 현대 수많은 지성인들을 매료시킨 무신론의 가장 중요한 근거가 된 것입니다. 소위 투사의 원리, projection의 원리에 있어서 신이 있으면 좋겠다 그래서 사람들이 신을 만들어 놓은 것이다. 그리고 그 밑바탕의 동기에는 두려 움이 있다. 이런 지적을 했어요. 그 런데 저는 이러한 논고에 대한 정반 대의 반증이 가능하다고 생각해요. 자, 죄인들은 자연히 자기들이 범한 죄나 악 때문에 심판을 두려워할 수 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죄인들에게 죄인들에게 제일 거추장스러운 것이 신이 있다는 것이 거추장스러운 거 예요. 그래서 무신론자들도 똑 같이 신이 없으면 좋겠다. 이런 생각하는 것 아니에요? 신이 없으면 좋겠다! 저는 반대로 왜 무신론이 생긴 줄 아느냐? 그것은 신이 없으면 좋겠다 는 바램 때문에 무신론이 생긴거란 말이지요. 똑같은 두려움이에요. 그 러나 무신론자들은 그 두려움이 자 연의 두려움에 국한을 시킵니다. 사 람들이 자연에 대한 공포, 두려움 이러한 것들 때문에 신을 만들어 낸 것이다.
그러나 성경에는 재미난 얘기가 있어요. 우리 갈릴리 바다를 여행하 던 예수님의 제자들이 갈릴리에 풍 랑이 일어나자 두려워합니다. 분명 히 자연에 대한 두려움이 있지요. 자, 예수님이, 배 안에 계시던 예수 님이 나와서 풍랑아, 잠잠하라! 풍 랑을 잠잠케 했을 때 제자들이 또 두려워합니다. 이번 두려움은 어떤 두려움일까요? 단순히 자연에 대한 두려움, 환경에 대한 두려움 정도가 아니예요. 이 자연을 정복하신 한 분에 대한 두려움, 이건 신에 대한 두려움이예요. 이것은 가장 근원적 인 경외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무 신론자들은 결국 그 심판에 대한 두 려움속에서 무신론이라는 이론을 만 들어 그 이론의 체계속으로 도피해 버리는 것이다. 그래서 한 신학자는 무신론을 가리켜서 그것은 죄인들의 자기 방어술 혹은 죄인의 변장술이 라고 말합니다. 그것은 무책임한 것 입니다. 자기 죄로부터 도피하기 위 해서 그는 무신론의 영역속으로 들 어가는 것입니다. 자, 이런 얘기가 오늘 본문에도 나와요. 5절을 다같 이 읽겠습니다. 저희가 거기서 두려 워하고 두려워하였으니 하나님이 의 인의 세대에 계심이로다. 왜 두려워 하느냐? 성경은 더 근본적인 두려움 은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에 두려워 하는 것이다. 하나님 계시니까 두려 워하고 회개하면 되는데 두려워하고 두려움을 카바하고 합리화하기 위해 서 무신론을 만들어 거기로 도피해 버리는 것이다, 이 말이지요. 제가 이런 말씀을 드리면 여러분 가운데 어떤 사람들은 아, 그것은 나하고는 상관없다. 나는 교회당 나오고, 나는 예수 믿고, 나는 하나님 믿으니까. 그러나 저는 정말 문제가 교회당안 에 있는 무신론자들이 문제라고 생 각해요. 교회당 안에 있는 무신론자 들. 적지 않게 있습니다. 무신론 가 운데도 실천적 무신론이라는 것이 있어요. 실천적 무신론자는 하나님 소리도 잘 해요, 찬양도 부를 수 있 습니다. 기도도 몇 마디 할 수 있습 니다. 그런데 어떻게 하느냐? 그 사 람이 살아가는 삶의 모습을 보니까, 가정 생활할 때 보니까 하나님이 없 는 것처럼 가정에서는 살아요. 교회 당에서는 하나님 믿는 것 같은데 가 정에 가 보니까 하나님 없는 것처럼 남편 대하고, 아내 대하고, 자식 대 하고… 또 직장생활 할 때, 중요한 결정할 때 하나님이 없는 것처럼 결 정하고, 하나님이 없는 것처럼 살고, 하나님이 없는 것처럼 사업하고, 하 나님이 없는 것처럼 속이고… 이것 이 실제적 무신론자예요. 실제로는 무신론자란 말이지요. 중요한 것은 무엇입니까? 어떻게 무신론자에서 해방될 수 있을까요? 무신론의 죄악 을 어떻게 극복할 수 있습니까? 그 대답은 간단합니다. 하나님께로 돌 아오시면 됩니다. 그런데 하나님도 두려움을 이용할 수가 있지만 마귀 도 두려움을 이용할 수가 있어요. 그래서 마귀는 자꾸만 하나님을 두 려워 할 존재로만 부각시킵니다. 하 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은 필요한 일 이에요. 그러나 하나님은 두려움의 존재만은 또 아닙니다. 마귀는 계속 두려움의 존재처럼 부각시켜서 그 앞에 가면 큰 일 날것처럼 그래서 하나님으로부터 피하게 만듭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앞에 돌아오면 어떤 일이 생길까요? 자, 6절을 다 같이 읽겠습니다. 너희가 가난한 자 의 경영을 부끄럽게 하나 오직 여호 와는 그 피난처가 되신다. 돌아오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앞에 오는 사람 들에게 하나님은 뭐가 되신다고요? 피난처가 되어 주신다. 하나님은 우 리를 받아주신다. 이 말이에요.
옛날 이스라엘 땅, 팔레스타인 땅 안에는 소위 도피성이라는 것이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그 당시 사회 에서 최고의 어떤 극형이 뭐냐하면 물론 사형인데 사형을 이 사회속에 서, 어떤 법 제도안에서 집행하기 보다도 사형선고를 내고 사람을 바 깥으로 보내버려요. 그런 제도가 있 었어요. 그러면 누구라도 이 사람을 죽일 수가 있어요. 돌을 들어서 이 사람을 어디서든지 죽여도 상관이 없는 판결을 받는 사람들이 있었어 요. 자, 이것 큰 일이지요? 어디 가 서 내가 어떻게 맞아 죽을 지 몰라 요. 그러나 이런 사람들에게 꼭 한 가지 살 수 있는 방법은 하나밖에 없습니다. 도피성으로 가는 거예요. 하나님은 그 당시에도 이런 사람들 에게 살 길을 마련하기 위해서 도피 성 제도를 준비했어요. 그래서 도피 성을 노크하면 문이 열려요. 성주가 나와서 welcome! 이 사람의 범죄에 도 불구하고 이 사람을 받아줍니다. 그를 용서합니다. 그를 먹입니다. 그 에게 자유를 줍니다. 그 안에서, 성 안에서. 그리고 그 사람을 새롭게 만듭니다. 도피성 제도가 있었어요. 여러분! 지금도 도피성이 있다는 것 을 아세요? 우리의 범죄, 따라서 하 나님의 진노를 피할 수가 없는 우리 의 상태에도 불구하고 그 곳으로 달 려가기만 하면 거기에서 용서를 경 험하고, 거기에서 내가 인생이 새로 와질 수가 있는 나의 피난처가 있다 는 사실을 아십니까? 그가 누구일까 요? 하나님이, 예수가 우리의 피난 처인 줄 믿습니다. 예수안에 들어오 면 거기에 자유가 있습니다. 거기에 용서가 있습니다. 거기에 구원이 있 습니다. 그러니까 뭐예요? 도망가려 면 무신론으로 도망가지 말고 어디 로 도망가요? 하나님께로 도망치시 기 바랍니다.
제가 PC통신 유머란에 보니까 이런 유머가 올라와 있어요. 박찬호 가 화가 나서 야구 게임하다가 미국 선수 하나 이단 옆차기로 차 버렸잖 아요? 그 친구 하고 화해하기 위해 서 술을 한 잔 마셨답니다. 술을 한 잔 마시면서… 그런데 술 한 잔 마 시니까 미국 선수가 맞은 것이 화가 나니까 야구 방망이를 들고 일어나 서 박찬호를 두드리려는 순간 박찬 호가 소리를 쳤답니다. 여러분, 그 미국 선수의 이름을 아세요? 피하자 예요. 피하자! 그러면서 도망갔어요.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듣는 사람이 있 어요.
두 가지 도망가는 방법이 있어 요. 죄를 범했을 때 사람들이 그 죄 를 가지고 무신론이라는 이론속으로 도망가서 하나님은 없어 이러고 살 아가는 방법이 있고, 그러나 죄를 범했을 때 죄를 인정하고 하나님이 예비하신 도피성안에 들어와, 예수 안에 들어와 용서를 체험하고 구원 을 체험하는 방법이 있습니다. 여러 분은 어디를 선택하시겠습니까? 우 리가 하나님을 거절할 때, 예수를 거절할 때, 구원을 거절할 때 이 사 람은 결국 하나님의 심판을 그리고 하나님의 영원한 진노를 피할 수가 없습니다.
한국에서는 법 제도가 판사님, 검사님 이런 분들이 판사, 검사 하 시다가 그 다음에 옷을 벗으시면 변 호사를 하시지요. 그런데 미국에 가 보니까 거꾸로예요. 반대예요. 변호 사를 먼저해요. 변호사를 하다가 변 호사를 잘 하면 그 다음에 판사가 됩니다. 저는 그게 더 좋은 것 같아 요. 경험하고 그 다음에 제대로 판 결할 수 있는 판사가 되요. 그런데 미국의 한 변호사님이 계셨어요. 젊 은 변호사인데 아주 의협심이 강하 고 특별히 미성년자들을 돕는 그런 변호사였습니다. 이 분이 무료 변론 을 많이 했다고 그래요. 그래서 소 위 미성년자로서 범죄한 젊은이들을 많이 도왔어요. 특별히 한 소년을 열심히 도왔습니다. 석방을 시켰습 니다. 또 재범하고 또 들어왔어요. 또 무료 변론을 해 주었습니다. 그 리고 타이르고 설득하고 올바로 살 도록 도왔습니다. 나갔어요. 그런데 또 들어왔어요. 세 번씩이나 무료 변론을 통해서 그 젊은이를 잘 도왔 습니다. 세월이 흘러 갑니다. 이 변 호사가 판사가 되었습니다. 판사가 되어서 어느 날 보니까 그 젊은이, 자기가 도왔던 그 젊은이가 또 왔단 말이지요. 자, 자기를 도와준 변호사 가 판사가 된 것을 보고 얼마나 반 가왔을까요? 이 사람이 이번에는 사 람을 죽였어요. 그래서 사형에 합당 한 죄목을 짊어지고 있었어요. 그래 서 자기가 잘 아는 이 판사에게 호 소를 합니다. 판사님, 한 번만 더 옛 날처럼 저에게 기회를 주십시요. 이 때 판사가 뭐라고 그랬을까요? 형제 여, 젊은이, 내가 변호사였을 때 나 는 당신을 돕고자 했습니다. 그리고 당신을 도왔습니다. 당신은 나의 충 고를 거절했습니다. 또 범죄하고, 또 범죄했습니다. 오늘 나는 당신을 변 호사로 만나는 것이 아니라 판사로 서 나는 당신을 만나고 있습니다. 지금 나에게 필요한 것은 공정한 판 결뿐입니다. 당신은 사형이요!
여러분! 여러분이 예수님을 두 번 만날 수 있다는 것을 아세요? 지 금 예수님 앞에 오시면 예수님은 변 호사로서 우리를 만나주십니다. 우 리를 변호해 주시고, 우리를 용서해 주시고, 우리를 구원해 주시고, 우리 를 새롭게 해 주시는 하나님…그러 나 만약 예수 그리스도를 거절하면 어느 날 우리는 그 그리스도를 심판 의 주님으로 만날 것입니다. 그 때 에는 구원의 희망이 없습니다. 그러 나 아직은 길이 열려 있습니다. 6절 에 보시면 너희는 가난한 자의 경영 을 부끄럽게 하나 오직 여호와는 그 피난처가 되시도다 이스라엘의 구원 이 시온에서 나오기를 원하는도다… 지금은 구원의 시간입니다. 지금은 은혜의 때입니다. 지금은 구원의 문 이 열려 있습니다. 이 날 그 분앞에 나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내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을 나의 하나 님으로 삼고 그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면 새로운 삶이 시작될 것입니 다. 그러나 그 하나님을 거절하는 자에게는 그 어느 날 기회가 사라진 채 심판자로서의 그 분앞에 서야 할 날이 있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요. 우 리의 희망의 시간은 오직 지금 뿐입 니다. 아직 문이 열려 있을 때 도피 성안으로 뛰어 들어 오십시오. 예수 안에 들어오십시요. 예수 안에서 당 신은 새로와질 수 있을 것을 믿으시 길 바랍니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