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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을 이기는 위로 /마가복음 14:32-42

by 【고동엽】 2021. 12. 24.

고통을 이기는 위로
마가복음 14:32-42


우리가 이 땅에서 삶을 산다는 것, 그건 어떤 의미에서는 고통의 연속입니다. 하나의 고통이 지나 가면 또 하나의 고통이 찾아오고, 한 종류의 고통이 지나 가면 또 다 른 종류의 고통이 우리에게 다가옵 니다. 우리가 경험하는 그런 고통에 는 매우 일상적이고 보편적인, 인간 이면 누구나 겪는 자질구레한 고통 이 있는가 하면 아주 예외적인 고 통, 잔인하고 충격적인 고통들도 있 습니다.
물론 우리가 기대하지 않게 우 리를 찾아 오는 고통을 겪을 수록 더 커다란 아픔을 우리의 삶의 장에 남길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또 어떤 경우에는 모르고 당하는 고통 은 차라리 잘 담담하게 겪어 갈 수 가 있지만, 다가올 고통을 우리가 다 미리 알고 있다면 그 고통을 겪 는것이 훨씬 더 불안하고 긴장이 되 고 더 큰 고통이 될 수가 있습니다. 또 우리가 겪는 고통에는 육체적인 고통도 있고 정신적 고통도 있습니 다.
근데 십자가를 앞둔 예수님의 경우, 십자가를 전후한 예수님의 고 통의 상황을 분석해 보면 문자 그 대로 최악의 고통을 겪으셨다고 말 할 수가 있습니다. 주님은 그가 겪으실 고통이 어떤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어요. 그 십자가의 잔인한 고통의 모든 모습을 주님은 아시고 보시고 그 고통을 향해 한 걸음 한 걸음 다가가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 고통은 비단 육체적인 고통뿐만 아니라 정신적인 고통을 동반하고 있었습니다.
오늘 본문에도 보시면 34절에 '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되었 으니...'그의 정신적 고통을 호소하 고 있습니다. 아마도 그것은 잠시 후에 십자가에 못박히셔야 한다는 그 육체적 고통보다도 더 심한 어떤 정신적 고통, 그 분이 죄인처럼 매 달려야 한다는 것, 죄인처럼, 죄를 모르신 그 분이 죄인이 되어 매달리 셔야 한다는 수치스러운 고통, 혹은 하나님 아버지에 의해서 일시적이 나마 죄를 짊어지고 그분의 심판을 경험하심으로써 하나님에게서부터 분리되어야 한다는, 버림을 받아야 하는 고통. 혹은 십자가의 상황을 앞두고 그가 사랑했던 제자들이 그 분을 버리고 도망감으로써 그분이 겪으셔야만 했었던 그런 배신의 고 통,이런 것들이 주님의 마음을 괴롭 히고 있었을 것입니다.
자, 중요한 것은 이런 고통을 예수님이 어떻게 직면하셨습니까? 예수님은 하나님이셨지만 동시에 우 리와 똑같은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따라서 인간으로서 예 수님도 이 고통 앞에 어떤 위로를 찾고자 하셨을 것입니다. 저는 오 늘 고통을 이기는 위로의 비밀. 그 비밀을 예수님에게서 배우고 싶어 요. 이런 견디기 어려운 고통이 우 리의 삶의 장을 엄습해 올 때 우리 는 어떻게 고통을 극복하고 승리할 것인가?
고통을 이기는 위로 그 첫번 째 비밀은 친구들과 함께 하는 것입 니다. 저는 고통을 이기는 가장 중 요한 비밀 중에 하나는 친구 들과 함께 함이라고 생각 합니다. 32절 본문은 이렇게 시작을 합니다. '저 희가 겟세마네라 하는 곳에 이르매' 그 다음 33절 같이 읽어요. '베드로 와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고 가실 새..' 예수님이 겟세마네 동산에 십 자가를 지시기 전날 밤,그 겟세마네 동산을 가시면서 베드로와 야고보 와 요한을 데리고 가셨습니다. 왜 데리고 가셨을까요? 우리는 어떤 내가 고통스런 것을 겪게 되면 그 것을 남한테 보이기 싦어하죠. 우리 동양권의 문화는 체면문화가 많기 때문에 내가 고통을 당하면 다른 사 람에게 보이고 싶지 않습니다. 내가 홀로 겪겠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 습니다. 그런데 왜 제자들을 동반했 느냐 말이죠. 겟세마네 동산에. 아 마도 최악의 고통을 이기는, 극복하 는 비밀을 그 모본을 제자들에게 가 르치고자 하는 어떤 의도도 있었다 고 할 수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저 는 그 보다도 단순하게 더 인간적으 로 접근하고 싶어요. 예수님도 사람 이셨기 때문에 이런 외로움을 당하 시면서 외로움의 상황, 고독한 상 황, 그리고 고통스런 상황을 이제 직면하시면서 위로받고 싶어 하셨 다. 그래서 친구들과 함께 더불어 있고싶어 하셨다. 제자들을 친구삼 아 그 고통의 밤을 함께 지내고 싶 어 하셨다. 저는 이렇게 생각하고 싶어요.
여러분, 우리가 언제 친구를 알 아볼 수가 있습니까? 고통을 당할 때. 그들이 보여주는 반응을 봄으 로써 우리는 친구를 알 수가 있습니 다. 고통은 우정의 테스트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영국 격언에 보면, 선경은 친구를 만들지만, 역경은 친 구를 시험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역 경은 친구를 시험한다. 로마의 철 학자 키케로도 고난을 만나야 진정 한 친구들을 우리는 알아본다. 라는 말을 남겼습니다. 유명한 과학자였 던 퀴리 부인은 역경에 처할 때 우 리들은 진정한 친구들의 숫자를 세 어 볼 수가 있다. 친구가 많은 것 같지마는 내가 고통을 당할 때, 역 경을 만날 때 비로소 내 진짜 친구 가 몇명이냐? 진정한 친구를 우리는 세어 볼 수가 있을 것입니다. 잠언 17장 17절에도 '친구는 사랑이 끊이 지 아니하고 형제는 위급한 때에 남 아있다.' 다시 말하면 내가 정말 위 기를 만났을 때 그때 우리는 친구를 알아보고 형제를 알아 볼 수가 있다 는 사실입니다.
세계 2차 대전이 남긴 이런 감 동적인 일화 하나가 있습니다. 미 국 같은 마을에 살던 친구 두 사람 이 전쟁에 징집되었습니다. 그래서 같이 훈련을 받고 공교롭게 같은 부 대에 배치되어 같은 저선에서 싸우 게 되었습니다. 어느 날도 작전 도 상에서 친구 하나가 참호를 나갔다 가길을 잃었어요. 그리고 포탄이 나르기 때문에 자기 참호로 돌아 오지 못한체 고립되어 있었습니다. 자, 그 모습을 바라보고 친구를 잃 어버린것을 안 또 한 사람의 친구가 그대로 견디지 못하고 막 포탄이 날 아 오는데 나가려고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분대장이 막았습니다. 지 금 나가면 너도 위험해 진다. 그러 나 분대장의 시선이 다른데로 쏠린 틈새를 이용해서 그는 재빨리 자기 의 참호를 나와서 친구가 고립된 그곳을 향해 포복해 계속 기어 가기 시작했습니다. 마침내 고립된 친구 에게 접근해서 그 친구를 붙들고 들 쳐 업고 그는 다시 참호로 돌아옵니 다. 파편이 튀는 조각 속에 그도 상 처를 입고 피를 흘리면서 친구를 데 리고 참호로 데리고 왔을 때 이미 친구는 숨을 거둔 후였습니다. 분 대장은 야단을 칩니다. 이런 병신같 은 이 바보같은 이 네 친구는 이미 죽었다. 그리고 너도 죽어가고 있다. 이것이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단 말 이냐? 이때 그 죽은 친구를 들쳐 업고 왔던 친구는 분대장을 바라보 며 이런 말을 남겼다고 합니다. 분 대장은 그 의미에 대해서 말씀하셨 지만 무슨 소용이 있느냐? 무슨 의 미가 있느냐고 친구는 이미 죽었고 저도 부상을 입었으니 무슨 의미가 있느냐고 말씀하시지만, 분대장님 은 제가 친구를 죽기 직전에 만났 을 때 제 친구의 얘기를 듣지 못하 셨지요. 네 친구가 뭐라고 그랬나? 내 친구가 이렇게 말하더군요. '짐, 나는 네가 올 줄 알았어. 짐, 나는 네가 올 줄 알았어.' 그게 친구예 요. 친구입니다. 친구는 고통의 순 간에 더불어 함께 있어 주는 것입니 다. 저는 예수님이 그 제자들에게 서 친구를 기대하셨습니다. 이 고 독한 순간, 이 고통스런 순간, 내일 이면 십자가를 지셔야하는 그 어두 움이 닥쳐오고 있는 그 밤에 제자들 을 친구삼아 그 동산에 함께 있기 를 원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이 제 자들은 친구 역할을 제대로 감당하 지 못했죠? 제자들은 어떻게 반응했 습니까? 제자들의 반응 37절에 보시 면 '돌아오사 제자들이 자는 것을 보시고' 우리 한 시간 동안만좀 깨 어 있어 함께 기도하자, 같이 좀 대 화를 나누자. 이 외로운 밤, 이 고통 스런 밤 주님은 대화를 요구하셨고 기도를 요구하셨지만 제자들은 잠들 어 있었습니다. 어찌하여 자느냐? 제자들은 친구 역할을 못하는 거예 요. 그러나 이 복음서의 기사를 묵 상하면서 우리를 놀라게 만드는것은 바로 이것입니다. 제자들은 친구 지 못했지만, , 친구의 자격이 없었 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여전히 그들의 친구가 되기를 원하 셨다는 사실입니다. 또 본문의 상 황과 같은 사실을 다루고 있는 요한 복음의 기사를 보시면 요한복음 17 장이 겟세마네 동산의 기도입니다. 그런데 그 직전에 마지막 대화를 나누면서 다락방에서 요한 복음 15 장에 보시면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 하십니다. 진정한 친구는 친구를 위해서 목숨을 버린단다. 나는 너희 들의 친구야. 라고 주께서 말씀하십 니다.
여러분의 곁에 좋은 친구가 없 어 외롭다고 느껴지시는 상황이 있 습니까? 제가 방법을 말씀 드리죠. 그렇다면 여러분이 누군가의 친구가 되어 주십시요. 저는 이따금식 어 떤 장례식을 집례하면서 어떤 장례 식은 너무나 견디기 어렵도록 쓸쓸 한 장례식이라고 느껴지는 순간이 있습니다. 너무나 쓸쓸한 장례식. 사 람들이 없어요. 물론 알리지 못한 상황, 예외적인 상황이 있을 수는 있어요. 그러나 대부분 쓸쓸한 장례 식의 뒷 얘기를 우리 부목사님이나 이런 분들께 들어보면 그 분이 평 소에 다른 사람을 찾지 않는 사람이 예요. 다른 사람의 고통에 둔감한 사람, 다른 사람의 아픔에 대해서 둔감했던 사람, 나중에 자기가 가 장 고독했던 상황에 찾아오는 사람 이 없는 모습을 볼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초상집에 가는 것이 잔치 집에 가는 것보다 낫다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인생은 고통의 연속입 니다. 그러나 고통을 극복하면서 어떻게 의미에 찬 삶을 살아 갈 수 가 있을 까요? 제가 좋아하는 우리 시대의 탁월한 크리스챤 카운슬러 요, 의사였던 스위스의 폰 트루니 에가 쓴 책에 보면 이런 말이 있습 니다. 당신이 배우자와 더불어 마음 이 통할 수가 있다면 당신의 아내, 당신의 남편과 더불어 마음이 통할 수 있는 애정의 관계를 가질 수가 있다면 그리고 당신의 동성 가운데 서 마음이 통할 수 있는 몇명의 친 구, 내가 무슨 얘기를 해도 나를 비판하지 않고 내 얘기를 들어 줄 수 있는 몇명의 친구만 있을 수 있 다면 당신의 인생의 장에서 아무리 폭풍우가 요란해도 당신은 그 폭풍 우를 뚫고 나갈 수가 있을 것입니 다. 이것은 얼마나 탁월한 진단입니 까? 인생의 장에서 아무리 우리가 폭풍우와 먹구름을 경험한다 할 지 라도 내가 사랑하는 남편과 아내와 더불어 마음 통하는 애정의 관계를 가질 수 있다면 그리고 내 동성 친 구들 가운데 몇사람 내가 무슨 얘 기를 해도 내 마음 속의 얘기를 받 아주고 들어주고 함께 할 수 있는 친구 몇 사람만 있다면 나는 인생 의 어떤 폭풍우도 뚫고 나갈 수가 있다. 저는 이것이 진실이라고 생각 합니다. 예수님은 그런 위로를 찾 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제자 들은 실격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 하고 주님은 그들의 친구가 되기를 기뻐하셨습니다. 사랑하시는 여러분, 인생은 홀로 걷기에는 홀로 가기 에는 너무 고독한 인생입니다. 여러 분 주변에 좋은 친구를 가지시기 바랍니다. 없다면 여러분이 좋은 친 구가 되어 주시기 바랍니다. 이 좋 은 친구를 찾을 수 있는 가장 적합 한 상황이 저는 교회라고 생각이 되 요. 교회 안에서 모든 사람이 내 친 구가 될 수가 없지만, 그러나 교회 안에서 몇 사람, 정말 마음이 통하 고 함께 기도할 수 있고 함께 인생 의 고통을 나눌 수 있는 친구 몇 사람만 사귀어도 여러분의 교회 생 활은 후회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해 요. 여러분 주변에 그런 친구를 주 시기를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함께 하는 친구들, 우리는 그들을 통해서 인생을살아갈 수 있는 에너지를 얻 습니다. 그래서 저는 마을 목장 이 란것들이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선 교회 모임. 같은 연령 또래의 모임, 목장 이런데 참여해야 친구가 사귀 어지지 주일 날 왔다가 사라지고 그 래서 친구가 사귀어지기 힘들죠.
고통을 이기는 위로의 비밀, 두번 째 비밀이 있다면 하나님과 함 께 하는 것을 배우는 것입니다. 하 나님과 함께 하는 것. 여러분 친구 가 나를 위로하는 것 중요한 일입니 다. 필요한 일입니다. 그러나 친구들 사이의 위로에는 언제나 한계가 있 다는 사실도 기억하십시다. 사람이 사람을 위로할 때 거기에는 항상 한 계가 있을 수가 있습니다. 때로는 우리가 어떤 사람을 위로할 목적과 의도를 가지고 접근해서 말을 나누 지만 결과적으로는 내가 상대방에게 상처를 입히는 경우도 있어요. 마 음은 그렇지 않은데. 위로하는 기 술이 없어서 우리의 의도와는 정반 대로 내가 남들에게 상처를 입히기 도하도 또 남들이 나에게 상처를 입 히는 경우들도 우리는 경험할 수가 있습니다. 그 전형적인 실례가 바로 욥의 친구들의 경우라고 할 수가 있 습니다. 위로한다고 하지만 오히려 상처를 더해 주었습니다. 이럴 때 어떻할까요? 이럴 때 어디로 갈까 요? 이럴 때 누구를 의지할까요?
자, 본문에 보시면 예수님의 제자들이 별로 예수님에게 친구의 입장에서 주님에게 도움이 되어주지 못하는 상황에서 주님이 취한 태도 를 주목해 보십시오. 35절에 보시 면 '조금 나아가사 땅에 엎드리어'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같은 기 사를 누가 복음에서 읽어보시면 누 가 복음 22장 41절에 보시면 '저희 를 떠나 '제자들을 떠나, 제자들이 함께 기도하지 못하고 마음을 함께 알아주지 못하고 친구가 뭐예요? 한문에 친구를 나타내는 말 가운데 지기라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지 기. 나를 알아준다 그런 뜻입니다. 나를 알아 준다. 내 고통을 알아주 고 내 마음을 알아주는 것이 친구 예요. 그런데 예수님의 제자들이 잠들어 있습니다. 이 심각한 상황에 서 잠들어 있어요. 친구가 될 수 없었어요. 그러나 주님은 그것 때문 에 모든 것을 포기하거나 좌절하지 않으셨습니다. 저희를 떠나 돌 던 질 만큼된 거리에 가서 그 분은 무 릎을 꿃고 기도를 시작하십니다. 이제 누구를 찾습니까? 하나님을 찾 습니다. 그 분의 기도는 이렇게 시 작됩니다. 오늘 본문의 36절을 보 시면 '가라사대 아바 아버지여' 이 렇게 기도가 시작되었어요. 아바 아바. 이 아바란 말은 우리 말의 아 빠라는 말과 거의 같은 뜻입니다. 그래서 어린 아이가 아버지를 부르 는 애칭입니다. 지금 예수님은 마치 어린아이의 심정으로 돌아가 아버 지이신 하나님을 기대고 싶은 심정 으로 그 분 앞에 자기의 절망, 자 기의 고통, 자신의 아픔을 지금 속으로 부터 끄집어 내고 있는 순간 에 아바 아버지, 아바 아버지 자 기 마음 속에 있는 고통을 끄집어 내놓고 있는 이 상황을 보시기 바랍 니다.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드러내 놓아요. 기도란 무엇입니까? 조렌 이라는 기독교 철학가는 기도를 정 의하기를 '기도는 하나님 앞에 홀 로 서는 단독자의 체험'이라고 정의 했습니다. 주님 앞에 홀로 서는 것.아무도 나를 함께 할 수 있는 사 람이 없을 때도 여전히 나는 그 분 앞에 설 수가 있습니다. 비젼 칼리 지의 학장인 제임스 휴스톤은 기도 에 대한 아름다운 제목 가운데 정 의 가운데 기도는 하나님과의 우정 이라고 정의 했습니다. 하나님과의 우정. 하나님을 나의 친구로 삼는 것. 그리고 그 분 앞에 내 마음을 쏟아 놓고 있는 장면입니다. 그 분 은 고독하셨습니다. 외로우셨습니 다. 그러나 아직도 부를 수 있는 아 버지가 계셨습니다. 자, 이 대목에서 요한 복음은 감동적인 주님의 심정 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요한 복음 16장 32절에 보시면 '보라 너 희가 다 각각 제 곳으로 흩어지고 나를 혼자 둘 때가 오나니 벌써 왔도다' 여러분 주님의 고독의 심 성이 느껴지십니까? 이 표현을 이 고백을 다시 한번 들어 보십시오. ' 보라 너희가 다 각각 제 곳으로 흩 어지고 나를 혼자 둘 때가 오나니 벌써 왔도다' 그 분이 고독해 하 시는 순간이예요. 제자들은 떠나 가 고 있습니다. 그러나 고백은 거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그 다음이 중요 합니다. '그러나 내가 혼자 있는 것 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나와 함께 계 시느니라' 할레루야. 하나님이 함께 계시다. 친구들이 따라오지 못하는 길이 있을 수 있습니다. 부부도 함 께 할 수 없는 길이 있을 수 있습니 다. 그것은 죽음의 길입니다. 우 리가 한참 연예 감정이 북받쳐 오를 때는 상대방에게 '여보 우리 같이 죽읍시다. ' 저도 옛날에 한번 말 해 본 적이 있지만, 지금은 철이 들어서 절대로 그렇게 말하지 않습 니다. 그렇지만 죽음의 길을 건너 갈 때 우리는 함께 건너갈 수가 없 어요. 따로 가야합니다. 물론 예외 적으로 사고가 나서 같이 가는 경우 가 있을 수 있지만 대부분의 경우 죽음의 다리를 우리는 홀로 건너가 야 합니다. 남편도 함께 갈 수가 없습니다. 아내도 함께 갈 수가 없 습니다. 사랑했던 친구도 함께 갈 수 없는 고독한 그 길을 건너갈 때, 그때도 함께 할 수 있는 분, 그때 도 내가 부를 수 있는 하나님, 부를 수 있는 아버지가 계시다면 사랑하 시는 여러분, 결코 우리는 고독하지 않을 것입니다. 고독은 극복될 수 있습니다. 믿으시기 바랍니다. 만약 내가 하나님과 함께 하는 것을 정말 배울 수가 있다면 그러려면 평소 부 터 하나님과 함께 하는 삶을 살아야 되요. 습관이 중요해요. 오늘 같은 말씀을 누가 복음에서 읽어 보시면 겟세마네 동산에 들어가사 기도하는 주님의 모습을 누가복음의 기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저가 습관을 좇아 감람삼에 가서 기도하셨다. 좋은 습 관은 좋은 습관입니다. 믿으십니까?. 좋은 습관은 좋은 습관이예요.
여러분, 날마다의 새벽기도가 언제나 은혜가가 아닐 수도 있어요. 어느 날의 새벽기도는 아주 미미하 게 기도할 수가 있습니다. 왠지 오 늘은 피곤하기만 하다. 그래도 습관 은 중요해요. 좋은 습관이 되어 있 으면 어떤 때는 무미건조하지만 어 느 날의 새벽기도에 갑자기 성령으 로 충만해지고 하나님의 은혜가 나 를 붙잡을 수가 있어요. 모든 큐티 가 날마다의 큐티가 새벽마다의 Quiet Time이 항상 나에게 감격이 요, 은혜는 아닐 수가 있습니다. 그 러나 Quiet Time이 습관이 되면 날마다 성경 읽고 기도하는 것이 습 관이 되면 내가 정말 도움이 필요 할 때 절실하게 하나님의 텃치와 하 나님의 다루심이 필요할 때 그 습관 을 좇아 기도하던 나에게 주님이 임 하시고 나를 일으켜 세워주시고 나 를 만져 주시고 나를 소생시켜 주시 는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하게 될 줄 로 믿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과 함 께 하는 것을 배우십시오.
고통을 이기는 위로 그 세번 째 비밀, 그 마지막 비밀은 하나님 의 뜻을 확인할 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니의 뜻을 확인하고 하나님의 뜻을 확신할 줄 아는 것 저는 이것 이 고통을 이기는 가장 중요한 비밀 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고통을 당할 때 정말 힘든 것은 뭐냐하면 이 고통이 어떤 의미가 있을까? 그 고통이 아무리 어려워도 , 아무 리 힘든 것이어도 이 고통이 의미가 있다 견딜 만한 의미가 있다. 이것 만 확신 할 수 있다면 뚫고 나갈 수 가 있어요. 어느 정도 견딜 수가 있 어요. 근데 정말 힘든 것은 뭐냐 하면 내가 아무런 의미 없이 고통을 당하는 것 같다. 내 죽음이 어쩌면 개죽음일지 모른다.그렇다면 그것은 비극입니다. 만약 내가 의미만 발견 할 수 있다면 내가 겪는, 내가 부 딪쳐 있는 이 고통의 진정한 의미만 내가 확인 할 수 있다면 사랑하시는 여러분, 우리는 고통을 극복할 수 있는 줄로 믿습니다. 그래서 의미 는 중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어떻게 기도하십니까? 36절에 '가라 사대 아바 아버지여 아버지께는 모 든 것이 가능하오니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뭐예요?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 대로 하옵소서' 다같이 ' 나의 원 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 옵소서' 다른 복음서에서는 같은 내 용이지만 번역을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 이렇게 번역했지요. 아버 지의 뜻대로. 내뜻대로 마옵시고 아 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 주님이 생각하셨을 거예요. 십자가 앞에서 이것이 무슨 뜻이 있을까? 이것이 정말 하나님의 뜻일까? 내가 이 수 치를 당하고 모욕을 당하고 그리고 내일 아침이면 저 잔인한 십자가에 매달려야 하는 것. 그것이 무슨 의 미가 있을까? 그러나 주님은 마침 내 거기에 하나님의 어떤 뜻을 바라 보고 계셨습니다. '맞아, 그것 때문 에 나를 보내신 거야 나는 십자가 에 달려야 해 그래야 내 피로 모든 사람들의 죄를 속죄하고 사람들이 십자가의 보혈로 죄를 구속함을 받 고 속량함을 받고 새로운 피조물, 새로운 사람이 되어 하나님을 아버 지로 부르고 하나님 안에서 새로운 삶을 살아가게 만들 수가 있다면 나의 죽음이 저 수 많은 사람들을 구원할 수 있다면 나는 이 십자가를 받아 들여야해. 아마도 주님은 자신 에게 이렇게 말씀하고 있었을 것입 니다.
자, 그 기도를 세번하십니다. 세 차례에 걸쳐서. 그리고 본문의 상황 을 가만히 읽어보시면 한차례 기도 가 끝난 후에 제자들을 와서 봐요. 그러면 제자들은 아직도 자요. 그래 서 처음 어떻게 말씀하십니까? 어찌 하여 자느냐? 아마 이렇게 말씀하셨 을 것입니다. 두 번째 한 참 또 ' 하나님 정말 그것이 주님의 뜻이라 면 할 수밖에 없죠 뭐. 정말 주님의 뜻입니까?' 그 하나님의 뜻을 확인 하면서 기도하시다가 또 와서 보니 까 제자들이 또 자는 거예요. 아직 도 자는 거예요. 아마도 이번에는 주님의 옥타브가 더 높아졌을 것입 니다. '어찌 하여 자느냐?' 아까 보다 주님의 옥타브가 높아졌을 가 능성이 있습니다. 이렇게 세번 기도 합니다. 세번 기도 하고 와서는 주 님이 전혀 다른 말씀을 하십니다. 그 장면이 아주 흥미롭습니다. 자, 오늘 본문에 41절을 주목해 보세요 . '세번째 오사 저희에게 이르시되 이제는 자고 쉬라 그만이다 때가 왔도다 보라 인자가 죄인의 손에 팔 리우느니라' 세번째는 달라지죠? 세번째 와서는 아직도 자요. 뭐라 그랬습니까? '아, 그냥 자' 저는 이 때쯤 주님의 마음 속에 어떤 확고 한 심경의 변화가 있었을 거예요. 그는 십자가를 하나님의 뜻으로 받 아들이기로 완전히 결정한 것입니 다. 나는 가야한다. 그리고 더 이상 제자들에게도 기도를 요청하지 않았 습니다. 그냥 자게 내버려 두자. 사 람이 자신의 마음이 평안하면 옆의 사람을 들복지 않습니다. 그렇죠? 내 마음이 평안하지 못하면 괜히 옆 에 있는 사람을 들복아요. 주님은 이때쯤 하나님의 십자가를 하나님 의 뜻으로 견고한 하나님의 뜻으로 완전히 받아들였습니다. 그리고 괜 챦다. 자라. 나는 준비되었다. 'I am ready.' 나는 준비되었다.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일어나자 가자. 십자가로' 그는 그 고통을 대 결할 준비가 되어 있었던 것이예요.
여러분, 뜻을 알면 내 고통의 의미를 알면 우리는 고통과 대결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렇게 말하지 않았습니까? 우리가 알거니 와 모르면 안되요. 중요한 것입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께이 사랑을 받는자, 또 하나님의 뜻대로 부르심 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 하여 뭐예요? 선을 이룬다. 그것 만 알 수 있다면 내가 겪는 불가사 이한 고통도 억울해 보이는 이 아픔 도 결국은 하나님의 뜻을 이룬다. 결국은 하나님의 선이 이루어 질 것 이다 라고 믿을 수가 있다면 우리는 이 고통을 뚫고 나갈 줄로 믿습니 다. 우리는 고통을 대결할 것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이루어질 하나님의 빛나는뜻을 바라보며 우리는 고통을 향해서 담담히 그리고 당당하게 걸 어나갈 수가 있을 줄로 믿습니다 . 저 유명한 데이빗 리빙스톤이 아프 리카의 선교사.데이빗 리빙스톤이 아프리카의 정글에서 수차례 목숨의 위기를 겪어가면서도 선교를 포기하 지 않고 선교를 계속했던 이유가 뭐 냐고 물었을 때 그는 이런 유명한 대답을 했습니다. '나는 이것을 내 머리 속에서 한 순간도 떠나본 적이 없습니다. 나는 이 생각으로 일해 왔습니다. 뭡니까? '나는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그 사명이 다하기 전까 지는 나는 죽지 않는 다고 나는 확 신했습니다.' 'I shall not die untill my work is done.' 하나님의 사역 이 나에게 주신 그 미션이 다할 때 까지 나는 죽지 않는다. 나는 결코 죽지 않는다. 하나님의 뜻을 확신했 던 그것. 주께서 뜻이 있어 나를 이 곳에 보내셨다. 그러면 그 뜻이 이 루어지기 전까지 나는 여기서 죽 을 수 없다. 그것이 그를 힘있게 용기있게 능력있게 만들었던 비밀인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인도 선교 의 문을 열었고 현대 선교의 문을 열었던 그래서 현대 선교의 아버지 라고 불리어지는 윌리엄 케리 그는 32살의 젊은 나이로 영국을 떠나 인 도로 갔습니다. 고생 많이 했습니 다. 40년 동안 선교하는 과정에 있 어 자기 아내는 정신병자가 되었습 니다. 너무나 많은 선교 식구들을 먹여 살리기 위해 벅차게 그는 경제 적인 아픔을 당해 왔습니다. 그가 하기를 원했던 과제중에 하나가 인 도 말로 성경을 번역하는 거예요. 그런데 인도말은 하나가 아니예요. 수십개의 dialect 방언이 있습니다. 이는 너무나 힘든 과제였습니다. 그 러나 지치지 않고 그는 하나님의 사 역에 몰두했습니다. 그 비밀이 무엇 이냐는 질문 앞에 윌리엄 케리는 유 명한 이런 대답을 했습니다. 영어로 'The will of God 하나님의 뜻. nothing more, nothing less, nothing else ' 그 이상도 아니고, 그 이하도 아니다. 그밖에 다른 어 떤 것도 아니다. 하나님의 뜻.'The will of God.' 하나님의 뜻. 나를 보 내신 하나님의 뜻. 그리고 이 고통 속에도 뜻이 있다. 이 아픔 속에 도 뜻이 있다. 견디기 어려운 오늘 의 나의 실존, 나의 존재 속에도 하 나님의 뜻이 있다. 하나님은 나를 사랑하신다. 하나님은 나를 사용하 신다. 하나님은 나를 바라 보신다. 나는 그 뜻을 다할 것이다. 이 사실 을 믿었을 때 그들은 앞을 향해 전 진했습니다 .우리도 전진할 것입니 다. 만약 이 뜻을 알 수가 있다면 우리는 주님처럼 일어나 하나님 주 의 뜻대로 하옵소서. 더 이상 우리 는 불평할 필요가 없습니다. 더이상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더 이상 좌절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 주 변을 향해서 여유있게 이렇게 말 할 수가 있습니다. 괜챦아요. 형제들, 쉬십시오. 나는 일어나 갈것입니다. 십자가로. 기도하십시다.
사랑하시는 여러분,그렇습니다. 인생은 고통입니다. 쉴새없는 고통 이 우리를 아프게 옥조이고 있고 우 리를 괴롭게 하고 있지만, 내가 이 고통을 함께 나눌 수 있는 친구들만 있다면 그리고 무엇보다 살아계신 하나님 앞에 내 고통을 아뢸 수 있 는 하나님과의 교제가 살아 있다면 그리고 내 인생을 향한 하나님의 뜻 만 확신할 수 있다면 우리는 앞을 향해 갈 것입니다. 오! 하나님 도와 주시옵소서. 하나님 함께해 주시옵 소서. 그리고 하나님의 뜻을 알려 주옵소서. 그래서 승리하게 도와 주 시옵소서.
<하나님의 사랑을 사모하는 자 >
기도하시겠습니다. 예배를 드리 면서도, 기도하면서도 아직도 가슴 이 눌려있고 아프고 괴롭고 무거운 가슴, 버거운 가슴으로 있는 형제와 자매들이 계시면 조용히 가슴에 손 을 얹으세요 그리고 같이 기도해요. 하나님 그렇습니다. 우리가 주님의 자녀이고 주님의 제자이고 하나님의 자녀이지만 그러나 때로는 인생의 모든 프래셔와 스트래스를 견디기에 내 자신이 너무 작아보이고 초라해 보이고, 인생이라는 이 과제가 너무 나 힘겹게만 느껴지는 분들이 있습 니다. 하나님, 당신의 자녀들입니다. 도와주시옵소서. 저들의 마음을 누 루고 괴롭고 아프게 만드는 온갖 악한 영들의 공격에서 부터 저들을 궂세게 해 주시옵소서. 권세있게 하 시옵소서. 모든 악한 영들, 불안과 낙심과 초초의 영들을 주께서 쫓아 주시옵소서. 권세있는 능력의 영으 로 오시옵소서. 우리를 충만이 채 워주시옵소서. 자유와 진리의 영으 로 우리를 해방시켜 주시옵소서. 성 령 충만하게 도와주시옵소서. 이 악 한 세대를 이기고 찬미와 그리고 감격과 비전의 노래를 부르면서 우 리 인생이 내일을 향해서 달려가게 도와 주시옵소서. 고통을 이기고 마 침내 내 인생을 향한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생애를 살도록 도와 주시옵 소서. 이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 도의 은혜와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 하심과 성령의 교통케 하심이 오늘 당신의 말씀을 받고 나아가는 당신 의 백성 들에게 성령으로 함께 하시 기를 간절히 축원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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