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로마서 1:1-4
제목: 하나님이 약속한 복음: 하나님의 아들
로마서는 상식적으로는 다 교우들이 이해하는 본문입니다. 왜냐하면 로마서 안에는 우리 개개인이 가장 궁극적으로 관심을 갖는 구원 문제가 다뤄지기 때문입니다. 로마서가 이토록 사랑 받는 이유는 개인 구원에 관한 결정적인 교리가 나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로마서 안에서 개인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은 발견하고 하나님 나라에 대한 비전을 발견하지 못한다면, 개인 구원에 집착할수록 우리는 하나님 나라와 그 의를 구하는 일에서 점점 멀어져 버립니다. 역설이 일어납니다. 그러니까 자기 구원문제에 그렇게 집착하는 사람들이 세상의 공공 쟁점에 대해서 이렇게 무관심할 수 있는 것이 가능한 겁니다. 왜? 로마서가 말하는 구원 자체를 근본적으로 오해하기 때문입니다. 로마서는 하나님께서 피조물을 구원하시려는 복음을 선포하는 내용이지 내가 세상 문제를 다 잊어버려도 괜찮게 만드는, 내 개인만 기쁘게 만드는 그런 복음과는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복음을 많이 알고 개인 구원에 집착할수록 보통 사람보다 세상 문제에 대해서 더 무관심해지고 세상 문제에 대해서 더 어른다운 책임감이 없어지는 이유는 구원을 뭐라고 생각하냐면은 남들은 누리지 못하는데 나한테 특권적으로 열린 기회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구원은 완전히 정반대입니다. 로마서의 구원은 온 인류가 들어도, 구두선포를 들어도 가던 길을 멈출 수밖에 없는 기쁜 소식입니다. 복음은 기쁜 소식입니다. 복, 기쁜 소식 그 말은 복잡한 설명이 필요하지 않고 지나가던 사람들을 놀라게 만드는 기쁜 소식이 복음입니다. 그렇게 명료하고 오해의 여지가 없는 겁니다. 그런데 누구에게 복음이냐면은 이사야 52장 7절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다스린다고 하는 기쁜 소식 아름다운 소식 바벨론 포로들이 70년의 노예살이에서 풀려났다는 소식 그래서 바벨론 포로들이 마침내 고국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소식 이런 구두선포가 명료하게 우리에게 영향을 끼칠 때 그걸 복음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런 복음이 복잡한 산문으로 설명되고 납득이 안 될 만큼 길게 장황한 논리로 설명되면은 복음의 구두선포성 그러니까 귓전에 들려서 금방 나를 들뜨게 만드는 그런 구두선포성이 사라져 버리는 것입니다. 홍정길 목사님이 신학자들을 불신하는 가장 큰 이유를 이렇게 말하더라고요. “나는 신학자들을 믿지 못해. 신학자들은 자기 생업을 위해서 복잡하게 글을 쓰는 사람이야.” 설교 도중에 하신 말씀입니다. “로마서가 도대체 900페이지짜리 주석을 써야 될 내용이란 말인가?” 로마서를 가지고 900페이지 책을 쓴 사람이 지금 우리나라에 두 사람 있습니다. 한 사람은 총신대 교수고 한 사람은 전주 한일신학대 교수인데 이 두 사람이 900페이지의 두꺼운 책을 썼는데 그걸 조롱하면서 “사람들을 감동시킬 수 있는 이 엄청난 구두 선포된 복음을 복잡한 사변과 논리로 만들어서 영구적으로 기쁜 소식임을 알지 못하게 만드는 이런 사람들이 신학자다” 라고 비판을 하셨습니다. 그 말도 참 충격적이지만 맞는 말씀입니다. 그러니까 복음은 뭐와 같은 것이냐면 7년 동안 시베리아에서 돌을 깨는 유형생활을 하던 도스토예프스키가 사형대에 올라갑니다. 사형대에서 교수대에 목이 감기는 순간에 갑자기 저 교도소 바깥에서 파발마가 뛰어옵니다.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파발마가 뛰어오는데 그 파발마를 타고 오던 사람의 손에 이렇게 적인 종이 쪽지가 있었습니다. “벨린스키 사건으로 반체제인사로 몰렸던 도스토예프스키를 비롯한 몇 명은 즉시 사면한다. 사형을 즉각 중지시킨다”라는 명령입니다. 만약에 파발마가 가지고 온 이런 쪽지가 1분만 늦게 와도 우리는 ‘죄와 벌’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같은 명작을 영원히 못 보는 거죠. 그런데 도스토예프스키가 700번의 신약성경을 읽었다고 그러네요. 7년 동안 그러니까 신약성경을 엄청나게 많이 읽었는데 그 사람은 진짜 기쁜 소식을 들은 거죠. 어떻게? 교수대에 올라갔다가 목이 감기는 순간에 황제의 특사로 살아났으니까 진짜 기쁜 소식을 들은 거죠. 그런 정도로 감격적인 소식이 복음인데 이 복음을 오늘날 사람들은 이렇게 전율하면서 듣지 못한 채 복잡한 기독교의 교리로만 알고 있으니 하나님이 우리를 바라보실 때 얼마나 답답하실까요?
오늘 본문은 복음을 미리 약속하신 것, 예언자들을 통해서 미리 약속하셨다 그랬습니다. 이때 예언자는 모세를 가리킵니다. 모세를 비롯한 모든 예언자들입니다. 모세부터 말라기까지 심지어 세례요한까지입니다. 구약성경에 나오는 모든 예언자들은 모세부터 말라기까지 하나님이 보내실 하나님의 아들에 대해 이야기했습니다. 이때 하나님 아들은 먼저 예수님이라고 생각하지 마세요. 먼저 구약성경에 나오는 하나님 아들에서 아들의 뜻은 ‘순종의 화신’이라는 뜻입니다. 아들은 순종의 화신을 뜻합니다. 출애굽기 4장 22절, 신명기 14장 등에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당신의 뜻에 순종하는 이상적인 순종의 화신을 아들이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복음을 누구에게 맡겼냐 하면은 하나님의 계명을 잘 순종하는 순종의 화신에게 당신의 복음을 맡기겠다고 약속을 했는데 구약시대 때 복음을 누가 맡았냐 하면은 이스라엘 민족이 아들로서 맡은 겁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하나님의 아들로서 복음을 맡은 거예요. 그러니까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이스라엘 민족의 조상인 아브라함이 세계 만민에게 갈 복음을 맡은 것예요. 모세 시대 때는 모세가 하나님의 아들로서 복음을 맡은 거예요. 그런데 하나님의 아들에 관해 미리 약속하신 복음이 원리적으로 무슨 말이냐 하면은 하나님의 마음에 합하여 하나님의 뜻을 순종하는 순종의 화신이 세계 만민에게 복음이 된다는 말이에요. 그러니까 그 말은 하나님의 계명에 불순종하는 사람들이 즉 아담 인류가 만든 이 엉망진창이 된 세상을 정돈할 복음이 뭐냐?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아들이라는 거예요. 그러니까 구약성경은 하나님의 마음에 아멘으로 응답하고 하나님 아버지와 완전히 교감을 나누는 아들을 불러내는 하나님의 간절한 호소라고 볼 수 있어요. 구약성경 전체가요. 그러니까 구약성경은 하나님 아버지의 뜻에 100% 교감하고 하나님의 마음과 합한 아들이 아담 인류가 만들어 놓은 엉망진창으로 만들어놓은 세상을 바로잡고 하나님의 통치, 하나님의 다스림, 하나님의 복을 유포시키고 유통시키고 펼치는 그것이 바로 이스라엘 민족이 온 세상에 퍼뜨릴 복음이었어요. 그러니까 이스라엘 민족이 최초로, 하나님의 아들에 관한 복음을 이스라엘 민족이 세계에 위탁받았는데 그 이스라엘 민족의 민족적 사명을 혼자 집약적으로 개인이 감당한 아들을 독생자라고 해요. 하나님의 독특한 아들인거예요. 이처럼 이스라엘 민족의 사명을 집약적으로 홀로 감수한 분이 예수 그리스도이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라는 그런 순종의 적분, 순종의 완성체, 완전체 그 이전에는 순종의 미분, 예수님의 순종을 부분적으로 완성케 한 그런 구약시대 때 작은 순종들이 있었단 말이에요. 예레미야의 순종, 사무엘의 순종, 예레미야와 이사야와 모세의 순종, 이 모든 순종은 예수 그리스도의 순종에 적분될 것 총합될 순종들이었어요. 예수 그리스도를 여러분 어떻게 봐야 하냐면은 구약시대 때 이스라엘 백성이 받쳤던 순종에 총 적분적 순종 모든 순종의 총합이라고 생각하면 돼요. 그러니까 예수님은 아브라함부터 시작해서 1500년 동안 계속된 하나님 백성들의 순종의 총합이었단 말이죠. 예수님 같은 분이 지금도 가향교회에 뚝뚝 나타나면 그게 복음인거예요. 그니까 예수님 같은 분들 때문에 하나님이 세상에 복음을 전파했던 것을 확신하듯이 우리 교회도 결국 그런 사람이 있는 거거든요. 여러분 아무리 작은 교회도 거기에는 예수님 같이 복음을 전파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지금 우리 가향교회도 가향교회가 좋다고 느끼는 사람이 있다면 그것은 예수님 같이 복음을 전하는 사람이 지금 있기 때문이예요. 가향교회도 우리가 불완전하지만 가향교회에 가고 싶은 이유는 가향교회는 하나님의 아들의 순종 즉 완전체의 순종에 버금가고 그 완전체의 순종을 방불케 하는 그런 또 다른 아들다운 순종이 있기 때문에 교회가 좋은 거예요. 교회가 공연히 좋은 게 아니래도요. 하나님의 미리 약속하신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아들들의 순종이 있기 때문에 교회가 따뜻하고 교회가 십일조가 모이고 교회가 구제헌금을 하고 교회가 청년들을 도울 수 있고 교회가 가난한 사람을 도울 수 있는 거예요.
여러분께서 기독교 복음을 원리적으로 먼저 이해를 해야 됩니다. 우리가 예수님만 바라보지 말고 왜 온 세상은 복음을 그토록 열망할까? 온 세상 사람들이 바라는 바가 뭐냐 하면은 왕이지만 권력 남용하지 않는 왕을 바라는 거예요. 사장님이지만 권력 남용하지 않고 사원들을 위해 애쓰는 사장님이 나타나면 복음이 나타난 거예요. 사랑이 충만하지만 자녀들을 무력으로 통치하지 않고 자녀들에게 지극히 인격적이고 겸손한 부모님이 자녀들에게 복음이에요. 그래서 이 세상은 하나님 아버지의 계명에 불순종하여 죽음을 초래한 아담 같은 사람들이 판치는 세상에 그 아담 같은 사람의 죄를 대신 지고 공치사 하지 않고 우리를 자유케 하면서 다스려주시는 예수 그리스도 같은 사람이 나오길 목이 빠지도록 기다리고 있는 거예요. 지금도 예수님 같은 사장님 나오길 예수님 같은 목사님이 나오기를 예수님 같은 부모님 예수님 같은 교수님 예수님 같은 이웃이 나타나기를 바라는 거예요. 그래서 로마서를 하나의 큰 원리로 이해를 해야 합니다. 마무리합니다. 로마서는 하나님이 우리를 창조할 때부터 예수님 같은 분 예수님 같은 인류를 창조하려고 하나님의 형상대로 우리를 창조하셨습니다. 이성형 형제님 로마서 8장 29절 좀 찾아주시고요, 하수진 자매님 창세기 1장 26-28절 좀 읽어주세요. 이거 읽고 마치겠습니다. 자 마무리합니다. 로마서 8장 29절, 창세기 1장 26절이 하나님이 우리를 최초로 만들 때 어떤 사람처럼 되기를 기대하고 만들었나가 나옵니다. 창세기 1장 26절부터 27절까지 읽어주십시오.
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들로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가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네,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하였다는 말이 정확하게 무슨 말인지 로마서 8장 29절이요.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을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고 하심이니라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창조하였다는 말이 맏아들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아 창조하였다는 말과 똑같네요. 그러니까 우리 모두가 하나님이 예비하신 비밀 병기 같은 복음이라는 거, 우리 모두가 복된 존재가 되어서 남을 복되게 하려고 우리를 창조하셨다는 거죠. 이게 너무 중요합니다. 여러분, 로마서는 내가 개인 구원에 집착할수록 세상에 무관심해지고 이기적인 사람이 되게 만들지 않고 내가 세계만민에게 복된 존재가 되게 만듭니다. 그게 진짜 구원받은 사람의 살아있는 증거입니다. 여러분 모두가 로마서를 통하여 이 세상에 여러분을 창조하여 불러내신 목적이 예수 그리스도를 방불케 하는 예수 그리스도를 닮은 복음적 아들 복음적인 자녀 복음적인 딸로 여러분을 불러내었음을 기억하셔야 합니다. 여러분 이미 그렇게 살고 계신 분이 많죠. 여러분 그것이 우리의 희망입니다. 로마서는 세계만민을 구원하시려는 아버지 하나님의 뜻이 잘 드러나 있습니다.
아버지 하나님 고맙습니다. 우리를 창조하셨을 때 그 원상은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이었음을 깨닫습니다. 주님 우리를 ‘순종의 화신’ 만들어서 세계 만민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려고 우리를 창조하셔서 대한민국에 보내셨습니다. 하나님, 우리가 우리 마을과 우리 공동체에 복음을 전하는 사도적 은혜의 사람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렸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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