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함없이 지켜보시는 하나님 (말라기 3장 1-6절)
< 변함없는 하나님 >
성공은 어떻게 주어질까요? 기본적으로 하나님이 성공을 허락해주셔야 합니다. 또한 좋은 멘토를 만나야 합니다. 며칠 전에 방송된 세계 최고의 출판인 지영석 회장도 멘토의 중요성을 역설하며 자신이 좋은 멘토를 만났기에 누군가의 좋은 멘토가 되어 살겠다고 했습니다. 좋은 사람을 만나면 성공 가능성도 커집니다. 또 하나의 중요한 성공 요소는 꾸준하게 자기 일을 감사하며 창조적으로 하는 자세입니다. 흔들리지 않고 꾸준히 예배하고 기도하고 봉사하고 선교하고 일하면 깊은 평안이 주어지고 그 평안의 기초 위에 성공도 주어집니다.
어떤 성도는 어려울 때는 기도하다가 성공하면 기도를 안 합니다. 그러나 다니엘은 어려울 때도 기도했고 나중에 총리가 되어서도 변함없이 기도했습니다. 그처럼 가난할 때보다 부요할 때 더 잃을 것이 많기에 성공하면 더 기도해야 합니다. 그런데 많은 분들이 조금만 편해지면 기도를 외면합니다. 사실 지금 잘 사는 것은 이전에 기도의 씨를 뿌렸기 때문입니다. 기도에는 외상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천국 갈 때까지 계속 기도하십시오.
어떤 일을 잘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일터에서 변함없이 충성하는 것입니다. 일을 잘하다가 훌쩍 떠나버리면 더 손해가 됩니다. 결국 탁월하다는 사람보다 부족하다는 사람이 나중에 보면 더 잘할 때가 많습니다. 교인 중에도 “내가 우리 교회에서 제일 잘났지!”라고 하면 시험과 갈등과 상처가 많이 생깁니다. 반면에 “내가 우리 교회에서 제일 부족해!”라고 하면 교회를 위한 가장 선한 청지기가 됩니다.
영적인 전투는 빨리 달리는 토끼보다 꾸준한 거북이가 결국 이깁니다. 크고 빨리 잘하는 것보다 자기 일을 꾸준히 잘 가꾸고 관리하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결국 멀리 보고 목표를 정해 꾸준히 기도하며 나가야 성공합니다. 교회도 떴다방 식으로 대중을 따라 몰려다니면 인물의 길은 멀어집니다. 자기 자리를 변함없이 지키면서 움직일 때는 하나님의 뜻과 사명을 따라서만 움직이는 사람이 결국 인물이 됩니다. 그처럼 변함없는 사람이 복 받는 이유는 하나님이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신 변함없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 선한 변화를 이루는 길 >
바벨론 포로생활에서 돌아온 직후, 이스라엘 백성들은 감격 속에서 오직 하나님만 바라보는 순결한 신앙을 회복했습니다. 그러나 몇 십 년 후에 생활이 안정되자 하나님 중심적인 신앙이 후퇴했습니다. 살다 보면 때로 변해야 할 때도 있고 변하지 말아야 할 때도 있습니다. 즉 좋은 일을 할 때는 변하지 말아야 하지만 좋은 것을 향해서는 변해야 합니다. 그처럼 복된 존재로 선한 변화를 이루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1. 죄를 제거하십시오
본문 1절 말씀을 보십시오.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보내리니 그가 내 앞에서 길을 준비할 것이요 또 너희가 구하는 바 주가 갑자기 그의 성전에 임하시리니 곧 너희가 사모하는 바 언약의 사자가 임하실 것이라.” 이 구절에서 ‘내 사자’는 세례 요한에 대한 예언이고 ‘너희가 구하는 바 주’와 ‘너희가 사모하는 바 언약의 사자’는 메시아를 뜻합니다. 즉 메시아의 길을 예비하는 자가 준비되면 곧 메시아가 임한다는 말씀입니다.
그처럼 지금도 예수님의 재림을 예비하려면 가장 먼저 죄를 제거하고 자신을 깨끗하게 만들어야 합니다. 본문 2절 말씀에 의하면 하나님이 나타나실 때 하나님은 금을 연단하는 불과 표백하는 잿물처럼 죄와 각종 불순물을 멸하시는 심판자로 임하십니다. 그 말을 거꾸로 하면 죄와 불순물을 제거할 때 하나님이 임재하고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난다는 말씀입니다. 결국 회개는 하나님의 임재와 하나님의 역사를 가져다주는 최고의 통로입니다.
왜 성도에게 가끔 고난이 주어집니까? 더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하고 주님의 재림을 예비하는 존재가 되도록 죄와 불순물을 제거하는 하나의 준비과정으로 주어진 것입니다. 그러므로 연단을 너무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성도들을 고난으로 연단해 하나님께 바쳐질 만한 공의로운 제물로 만듭니다(3-4절). 그래서 연단을 잘 견뎌내면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쓰실만한 선한 제물로 변화될 것입니다.
2. 하나님을 경외하십시오
연단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하지만 하나님의 심판은 두려워해야 합니다. 즉 사탄은 결코 두려워하지 말아야 하지만 하나님은 두려워해야 합니다. 왜 선하신 하나님이 성도를 연단하십니까? 심판을 받지 않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처럼 심판을 받지 않도록 구체적으로 제거해야할 불순물로 하나님은 본문 5절에서 다음과 같은 몇 가지를 권고합니다.
먼저 점을 치지 말 것을 권고합니다. 구약시대에 우상숭배와 무속신앙이 창궐할 때는 예언을 빙자한 점이 성행했습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점은 하나님을 믿지 않고 하나님의 약속을 믿지 않는 가장 대표적인 행위이기에 재미로라도 혹은 호기심으로라도 점을 치지 마십시오. 내일 일은 잘 몰라도 매일 최선을 다해 살면서 하나님의 뜻과 약속을 의지하고 “죽으면 죽으리라!”라고 나가는 사람에게 가장 복된 미래가 펼쳐질 것입니다.
또한 간음하지 말고 거짓 맹세하지 말 것을 권고합니다. 그리고 약자를 괴롭히지 않도록 품꾼의 삯에 대해 억울하게 하지 말고 과부와 고아를 압제하지 말고 나그네를 억울하게 하지 말 것을 권고합니다. 그 모든 잘못된 행동들이 결국은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 삶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더욱 경외하는 존재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의 심판을 받지 않고 그를 통해 선한 변화의 역사가 나타날 것입니다.
3. 하나님을 굳게 믿으십시오
본문 6절 말씀을 보십시오. “나 여호와는 변하지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야곱의 자손들아 너희가 소멸되지 아니하느니라.” 이 말씀은 변하지 않는 하나님을 의지할 때 소멸되지 않는다는 말씀입니다. 왜 하나님을 굳게 믿을 수 있습니까? 하나님은 변함없는 하나님이고 하나님의 약속도 변함없기 때문입니다. 변하는 세상에서 변하는 사람들과 살면서 상처와 두려움 없이 평안하게 사는 제일 비결은 변함없는 하나님을 굳게 믿고 변함없는 성경 안에 있는 변함없는 하나님의 약속을 굳게 믿는 것입니다.
왜 성경은 완벽한 하나님의 말씀입니까? 변함없기 때문입니다. 완벽한 것은 변함이 없어야 합니다. 오늘날에도 성령님의 계시는 계속된다면서 성경의 변화를 시도하면 성경은 불완전한 책이 되고 성경 말씀을 믿는 것도 불완전한 것을 믿는 셈이 됩니다. 그래서 성경의 변화와 수정을 시도하거나 성경 외의 다른 경전을 첨가하면 성경을 하나님의 완벽한 말씀으로 인정하지 않는 행위가 되기에 이단이 되는 것입니다.
요새 자칭 신 사도란 사람들은 성령의 임재로 사도가 될 수 있다고 하면서 자기들의 계시에 특별한 권위를 둡니다. 그러면서 성경에 집착하는 것을 꽉 막힌 교조주의로 여기며 자신들의 영성을 자랑합니다. 그처럼 계시를 펑펑 잘 받는 것이 더 영성이 있는 것일까요? 그러나 성경 외의 계시를 내세우는 것은 성경을 불완전하게 보는 태도이기에 꽉 막힌 주장 같지만 66권 정경으로 확정된 성경은 세상 끝 날까지 변하면 안 됩니다. 성경을 조금이라도 변화시키려는 것은 그 전의 성경이 불완전했음을 인정하는 성경 남용 행위가 됩니다.
작가는 자기 글이 인터넷 등을 통해 남용되는 것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어떤 사이트 운영자는 수많은 남의 설교들을 허락 없이 수집해 자신의 설교 사이트에 축적한 후 가입비를 받고 회원가입을 시킵니다. 재주는 곰이 부리고 돈은 왕서방이 챙기는 모습입니다. 미국에서는 그러면 이익금의 50배 이상을 물어주고 큰 제재와 벌을 받습니다. 그래서 유명 설교자들의 설교를 구입하려면 설교 한 편에 4불 이상을 주어야 할 때도 있지만 신기하게도 그 돈을 내고 구입하는 사람들이 예상 외로 많습니다.
저작권이 존중되는 사회가 선진사회입니다. 우리는 그런 개념이 약해서 지금도 수시로 광고 스팸메일이 거의 매일 옵니다. “VIP 목회자료 판매!” 그 자료들 중 자기네들이 만든 자료나 판매를 허락받은 자료도 하나도 없습니다. 다 인터넷에서 수집해서 자기 홈페이지 자료실에 보관하고 감옥에 갈 각오를 하고 팔아먹는 것입니다. 용기가 대단합니다. 그런 자료는 불법으로 사지도 말고 그런 사이트에는 유료 회원으로 가입하지도 말아야 합니다.
또 한 가지 남의 글을 남용할 때 생기는 문제는 그 글들이 인터넷을 떠돌면서 출처불명의 글들이 되거나 저작자가 바뀔 때도 많다는 것입니다. 물론 구글로 자세히 검색하고 추적하면 누구 글인지 대략 파악되고 결국 허가 없이 남의 글을 대량으로 살포하면 나중에 걸려들어 크게 배상하는 경우도 요새 많이 생깁니다.
얼마 전에는 한 대형 꽃가게에서 홈페이지에 있는 남의 꽃 그림 하나 잘못 사용해서 5백만 원을 배상했습니다. 요새 왜 백화점에서 캐럴을 듣지 못합니까? 허가 없이 맘대로 틀면 몇 천만 원을 보상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점차 저작권이 강화되는 추세입니다. 결국 남의 글을 허락 없이 퍼 나르고 이용해 수익을 취하거나 방문자나 회원자 수를 늘리지 말라는 뜻입니다.
메일로 좋은 글을 보낼 때도 개인이 소수의 지인들과 좋은 글을 공유하려고 출처를 밝히고 인용해 보내는 것은 괜찮지만 몇 만 명이나 몇 십만 명의 회원을 가진 단체가 남의 글을 허락 없이 뿌려 새로운 회원이나 후원자를 모집하는 것은 불의한 일입니다. 저도 분명히 제가 쓴 글인데 남의 이름으로 되거나 무명으로 처리되어 수십 만 명에게 뿌려진 경우를 몇 번이나 당했습니다. 그때의 불쾌감은 꽤 컸습니다. 그때 성경을 왜곡하고 계시를 남발하는 사람에 대해 하나님이 가지실 불쾌감의 크기를 간접 체험할 수 있었습니다.
가끔 누가 출처를 명확하게 밝힐 테니 제 글을 자기 사이트에 실어도 되느냐고 하면 다 허락하지는 않습니다. 퀄리티를 높이려고 수정작업을 하는 글도 많기 때문입니다. 지금까지 완성한 41개 설교파일 중에 3개는 이미 출판했습니다. 출판한 것은 특별 사유가 없으면 더 이상 내용을 바꾸지 않는 최종적인 확정 글입니다. 반면에 나머지 38개 파일은 지금도 계속 수정 중입니다. <산상수훈>과 <스가랴>는 지금 출판 직전 단계인 4교를 진행 중입니다. 저는 교정할 때 내용까지 바꾸면서 교정하기에 처음 설교파일과 4교 후의 설교파일은 내용이 상당히 바뀝니다.
가끔 오래 전 설교를 다시 할 때는 전체 내용의 3분의 2 이상 바뀔 때도 있습니다. 그런데 설교 포털 사이트에서 마구 수집해서 보관된 설교들은 대부분 수정 전의 옛 설교들입니다. 그런 설교들이 그대로 인터넷에 떠돌면 솔직히 마음이 불편합니다. 그처럼 계속 교정 과정을 거쳐 최종적으로 확정하면 책으로 출판하고 더 이상 교정하지 않습니다. 결국 제 글들 중에 어떤 글들은 ‘수정 중인 글’이고 어떤 글들은 ‘확정된 글’입니다.
그렇게 최종적으로 확정된 글은 제 이름으로 되어 있는 한 제가 살아있을 때는 물론이고 제가 죽어도 후세 사람들이 맘대로 수정하고 뜯어 붙이면 안 됩니다. 후세 사람이 자기 이름으로 해석본을 만드는 것은 괜찮지만 원 저자의 이름을 그대로 쓰면서 내용을 바꾸고 첨삭하는 것은 마치 역사 왜곡과 같습니다.
그처럼 한 개인이 최종적으로 확정한 글도 함부로 내용을 바꾸면 안 되는데 하물며 최종적으로 확정된 완벽한 성경을 자기가 받은 계시로 맘대로 내용을 바꾸거나 추가하는 것은 성경의 권위를 훼손시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원리 강론>이나 <몰몬경>을 만들고 교주가 받은 계시를 따라 성경을 영생교 버전이나 다미 버전이나 신 사도 버전으로 엡데이트 하는 것은 탁월한 영성의 표시가 아니고 성경을 불완전한 책으로 만드는 이단 행위가 됩니다. 성경이 계속 수정되고 첨삭되면 어떻게 성경이 영원한 진리가 되겠습니까?
글 중에는 계속 수정되어야 할 글도 있지만 최종적으로 확정되어야 할 글도 있습니다. 그런데 온전한 진리는 최종적으로 확정될 때 진리가 됩니다. 하나님도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변함없기에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진화하거나 발전하지 않습니다. 진화하거나 발전한다면 그 전의 하나님은 전능하지 않았다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그처럼 하나님이 변함없는 분이라고 해서 하나님을 닫히고 막힌 분이라고 하지 않듯이 변하지 말아야 할 것은 변하지 말고 열리지 말아야 할 것은 열리지 말아야 합니다.
주후 397년에 열린 칼타고 공의회 때 신약성경 27권이 정경으로 확정되어 신구약 66권의 정경이 확정된 후 지금까지 성경은 고집스럽게 꽉 닫힌 상태에서 단어 하나도 바뀌지 않았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성경이 구시대의 교조주의 책입니까? 아닙니다. 온전한 진리는 바뀌지 않아야 합니다. 그것을 수많은 이단들이 바꾸려고 시도했고 요새는 신 사도라는 사람들이 자신들이 받은 계시도 성경적인 권위를 가진 것처럼 행동합니다. 그렇게 계시를 남발해야 성령 충만한 신앙입니까? 결코 아닙니다.
열린 마음을 가져야 하지만 계시와 영성을 강조하며 성경을 불완전하게 만드는 태도에까지 마음이 열리면 안 됩니다. 성경을 온전한 진리로 여기고 그 기반 위에서 해석이나 실천을 다르게 할 수는 있지만 새로운 계시를 남발하며 성경 밖으로 나가면 안 됩니다. 그것은 자유가 아닌 방종이고 영성이 아닌 영성의 배반입니다. 그처럼 영성주의자들이 자기 계시를 내세워 성경의 권위를 조금이라도 훼손한다면 거기에는 마음이 닫혀야 합니다. 성경은 온전한 책이기에 변함없어야 하고 하나님도 온전한 분이기에 변함없어야 합니다.
왜 하나님은 영원히 굳게 믿을 하나님입니까? 속성이 변함없으시고 그래서 하나님의 약속과 사랑도 변함없기 때문입니다. 왜 성도에게는 현실이 어려워도 희망이 있습니까? 하나님의 사랑은 변함없기 때문입니다. 지금 주변을 살펴보면 탄식할 일이 참 많지만 그래도 왜 희망이 있습니까? 지나온 경험에 의한 지식과 내일을 향한 의지도 약간의 희망을 주지만 무엇보다 하나님이 변함없는 하나님이기에 희망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약속은 변함없습니다. 사람은 잘 변하지만 하나님은 변하지 않습니다. 그 믿음이 희망의 뿌리입니다.
< 변함없이 지켜보시는 하나님 >
하나님은 성도의 불순물은 태우지만 성도를 소멸시키지는 않습니다. 성도는 연단은 받지만 버림은 받지 않고 넘어질 수는 있지만 망할 수는 없습니다. 성도의 연단은 정제를 위한 연단이지 버림을 위한 연단이 아닙니다. 요새 불의한 현실에 교회가 침묵하거나 오히려 편승하는 것에 분노해 교회 출석을 포기한 성도들이 많지만 하나님은 그를 포기하지 않습니다. 구원받은 성도는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려고 하면 오히려 그의 내면은 더 하나님을 향할 때가 많습니다. 결국 나중에 하나님께 돌아와 큰 인물이 된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프랜시스 톰슨은 자기 시에서 하나님을 ‘하늘의 사냥개(the hound of heaven)’라고 표현했습니다. 네트영어의 원리로 설명하면 ‘hound(사냥개)’는 ‘hide(뒤에 있게 하다, 감추다)’에서 나온 단어입니다. 그 hide라는 단어에서 hind(뒤의)라는 뜻과 behind(뒤에)라는 뜻도 나왔습니다. hind의 분사형 변형형인 hound는 원래 ‘뒤에 있는 존재, 뒤따라가는 존재’를 뜻하는 단어입니다. 뒤에서 추적하는 존재는 ‘사냥개’ 뿐만 아닙니다. 어떤 존재이든지 집요하게 뒤따르고 추적하는 존재는 다 hound란 단어로 표현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성도를 끊임없이 추적하는 하운드(hound, 추적자)이십니다. 아무리 도망쳐도 하나님의 추적을 피하지 못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거룩한 팬이시고 선한 스토커이십니다. 세상 현실에 절망해서 세상을 다스리시는 하나님께 실망해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려고 해도 이미 그의 의식 속에는 하나님이 세상을 다스리신다는 의식이 깊이 있기에 하나님의 추적하는 손길을 벗어나지 못하고 결국은 하나님 품으로 돌아옵니다. 그런 변함없는 사랑의 하나님이 있기에 여전히 부조리한 현실 속에서도 희망은 있는 것입니다.
지금의 고통스런 현실을 하나님도 지켜보고 계십니다. 그 사실이 얼마나 큰 위로가 됩니까? 베드로가 회개하기 직전에 예수님은 돌이켜 그를 보셨습니다(눅 22:61). 그 변함없는 사랑의 시선이 베드로를 돌이킨 것입니다. 부모가 자녀들에게 아무 것도 해 줄 수 없다고 느낄 때 여전히 해줄 수 있는 것은 조용히 지켜봐주는 것입니다. 목회자가 고통에 빠진 성도들을 위해 아무 것도 해줄 수 없음을 절감할 때가 많습니다. 물질과 건강을 줄 수도 없고 취직을 시켜줄 수도 없습니다. 그때도 여전히 해줄 수 있는 것은 조용히 기도하며 지켜봐주는 것입니다.
어느 날 한 기자가 알베르 까뮈에게 질문했습니다. “까뮈씨! 당신은 인생의 허무나 좌절이나 부조리에 관한 글을 많이 썼는데 그래도 여전히 당신은 살아있고 노벨상 수상 작가가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무엇인가 당신의 삶을 붙들었던 밝은 면도 있었을 텐데 그 밝은 면이 무엇입니까?” 그때 까뮈가 즉시 말했습니다. “제 삶에서 유일하게 밝은 면 한 가지는 어머니였습니다. 저는 어머니 때문에 여기까지 왔습니다.”
알제리에서 탄생한 까뮈는 생후 한 달 만에 아버지가 돌아가셨습니다. 그래서 잘 듣지 못하는 청각장애인인 홀어머니가 행상과 가정부를 하며 까뮈를 키웠는데 까뮈가 20세에 파리로 떠날 때 어머니는 평생 잊지 못할 한 마디 말을 했습니다. “까뮈야! 항상 너를 생각하며 지켜보겠다. 용기를 가져라!” 그처럼 어머니가 지켜본다는 사실로도 힘을 얻는데 변함없는 하나님이 지켜본다는 사실을 믿으면 얼마나 힘이 되겠습니까?
이제 변함없는 하나님을 믿고 선한 변화를 추구하십시오. 새 일을 시작해서 2014년을 선한 변화의 해로 만드십시오. 그것을 위해 과거를 잘 잊을 줄 알아야 합니다. 술 취한 사람이 배를 타고 밤새 노를 저어도 왜 건너편에 닿지 않습니까? 배의 밧줄을 육지에 묶은 채 노를 저었기 때문입니다. 그처럼 과거의 실패와 수치에 묶이면 새로운 내일을 향해 나갈 수도 없고 창조성도 생기지 않습니다. 때로는 잘했던 일도 잘 잊어야 합니다. 잘했던 일을 잊지 못하면 인생을 끝없이 괴롭히고 넘어뜨리는 교만이 틈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과거의 죄도 회개했으면 다 잊고 남의 죄도 회개했으면 다 잊어주십시오. 그처럼 자기와 남을 잘 용서할 줄 알아야 하나님이 새로운 은혜를 체험할 수 있습니다. 매일 손과 얼굴을 씻듯이 과거에 붙잡힌 마음도 씻으십시오. 과거의 수치와 실패에 젖어 분노와 한탄으로 살면 정신이 병듭니다. 그러므로 어제의 죽고 싶었던 마음을 성령으로 세척하고 그 마음을 내일 무엇이 되고 싶은 마음으로 승화시키십시오. 그래서 잃어버린 것을 슬퍼하지 말고 지금 남아있는 것을 가지고 새롭게 도전해서 인물 되는 꿈을 이루십시오.
우리는 하나님께 큰 기대를 하지만 하나님도 우리에게 큰 기대를 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이 땅에 보내실 때 하나님의 크신 뜻을 이루려는 큰 기대를 가지고 보내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를 통해 하나님의 일이 멋지게 이뤄지기를 원하십니다. 그런 거룩한 비전의 조력자가 되도록 과거의 아픔과 상처를 잘 잊어야 합니다. 부스럼은 긁으면 더 심해지고 종기는 만지면 더 커지고 디스크와 관절염과 위장병은 계속 신경 쓰면 더 심해집니다. 그처럼 과거의 잘못된 일을 자꾸 긁으면 영혼은 약해지면서 새로운 역사는 더 멀어집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꿈같이 찬란한 역사를 우리를 통해 펼쳐주실 만반의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문제는 우리의 마음입니다. 마음을 희망차게 가지십시오. 세상을 멸망시키는 것은 핵무기가 아니라 마음속의 절망입니다. 자기 내부의 적을 극복해야 합니다. 내일은 희망을 가진 사람의 것입니다. 사람들이 희망이 없다고 할 때 “하나님 안에서는 희망이 있습니다!”고 하며 일어서는 사람에게 축복의 문도 활짝 열릴 것입니다. 그처럼 변화하지 않는 하나님 안에 희망을 두고 창조적인 변화를 만들어가는 복된 심령들이 되십시오. - 주일설교(14010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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