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왕기 42 / 왕하 25:8-21 / 2010.03.07 / 개역개정판
8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의 열아홉째 해 오월 칠일에 바벨론 왕의 신복 시위대장 느부사라단이 예루살렘에 이르러
9 여호와의 성전과 왕궁을 불사르고 예루살렘의 모든 집을 귀인의 집까지 불살랐으며
10 시위대장에게 속한 갈대아 온 군대가 예루살렘 주위의 성벽을 헐었으며
11 성 중에 남아 있는 백성과 바벨론 왕에게 항복한 자들과 무리 중 남은 자는 시위대장 느부사라단이 모두 사로잡아 가고
12 시위대장이 그 땅의 비천한 자를 남겨 두어 포도원을 다스리는 자와 농부가 되게 하였더라
13 갈대아 사람이 또 여호와의 성전의 두 놋 기둥과 받침들과 여호와의 성전의 놋 바다를 깨뜨려 그 놋을 바벨론으로 가져가고
14 또 가마들과 부삽들과 부집게들과 숟가락들과 섬길 때에 쓰는 모든 놋그릇을 다 가져갔으며
15 시위대장이 또 불 옮기는 그릇들과 주발들 곧 금으로 만든 것이나 은으로 만든 것이나 모두 가져갔으며
16 또 솔로몬이 여호와의 성전을 위하여 만든 두 기둥과 한 바다와 받침들을 가져갔는데 이 모든 기구의 놋 무게를 헤아릴 수 없었으니
17 그 한 기둥은 높이가 열여덟 규빗이요 그 꼭대기에 놋 머리가 있어 높이가 세 규빗이요 그 머리에 둘린 그물과 석류가 다 놋이라 다른 기둥의 장식과 그물도 이와 같았더라
18 시위대장이 대제사장 스라야와 부제사장 스바냐와 성전 문지기 세 사람을 사로잡고
19 또 성 중에서 사람을 사로잡았으니 곧 군사를 거느린 내시 한 사람과 또 성 중에서 만난 바 왕의 시종 다섯 사람과 백성을 징집하는 장관의 서기관 한 사람과 성 중에서 만난 바 백성 육십 명이라
20 시위대장 느부사라단이 그들을 사로잡아 가지고 립나 바벨론 왕에게 나아가매
21 바벨론 왕이 하맛 땅 립나에서 다 쳐죽였더라 이와 같이 유다가 사로잡혀 본토에서 떠났더라
요시야왕의 마지막 종교개혁마져도 이제 실패로 끝나고, 그 아들 여호아하스, 그다음에 여호야김, 여호야긴, 시드기야에 이르기까지 계속 또다시 하나님의 명령과 계명을 거스르고 유다가 반역된 생활을 계속하다가, 결국 바벨론에게 철처하게 멸망당하는 장면입니다.
마지막 왕이었던 시드기야는 자기가 보는 앞에서 두 아들이 죽고 두눈이 뽑히고 쇠사슬에 묶여 바벨론으로 끌려가고, 그 직전 왕이었던 여호야긴도 그 전에 이미 바벨론으로 포로가 되어 갑니다. 이 마지막 장들은 다 마지막 유다의 멸망이 얼마나 처참하고 완벽했는가, (여기다 완벽이란 말을 쓰기는 그렇지만) 얼마나 철처하게 그 멸망이 이루어졌는가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루살렘 성전도 파괴되고 왕궁도 파괴되고 성전안에 있던 모둔 기명들과 도구들 값나가는 모든 물건들 심지어 기둘들도 다 바벨론으로 약탈되어 갔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뿐아니라 모든 국민들이 귀인들이나 지도자들은 당연히 바벨론의 포로가 되었고, 비천한 자들만 남겨지고 앗수르에 멸망한 북왕조가 그랬듯이 남왕조도 대부분의 국민들은 여러나라로 뿔뿔히 흩어지게 됩니다.
첫번째 이 열왕기서의 독자가 되었던 바벨론의 포로로 살고있거나 여러나라에 흩어져서 살고있던 북왕조 이스라엘과 남왕조 유다의 유민들은 이 열왕기서의 마지막을 보면서 어떤 마음이었겠는가, 그것이 우리가 이 열왕기서의 저자가 이 글을 쓰면서 헤아리고 또 그 마음에 둔 시각일 것입니다.
포로가 되고 오늘날 유민이 된 것은 우리가 하나님앞에 범죄한 탓이다라는 분명한 결론을 상기시키고 있습니다. 그 멸망이 얼마나 이스라엘 백성들 자신들의 잘못으로 인한 것이며, 변명의 여지가 없는 것인가 에 대하여 분명하게 확인시키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 22절 이하의 말씀을 보면, 그다리야라 하는 사람이 남아있는 유다백성들의 지도자가 되어 남아있는 유민들을 다스려 바벨론의 통치에 순종하여 목숨을 연명하도록 임명을 받았는데,
25 칠월에 왕족 엘리사마의 손자 느다니야의 아들 이스마엘이 부하 열 명을 거느리고 와서 그달리야를 쳐서 죽이고 또 그와 함께 미스바에 있는 유다 사람과 갈대아 사람을 죽인지라
26 노소를 막론하고 백성과 군대 장관들이 다 일어나서 애굽으로 갔으니 이는 갈대아 사람을 두려워함이었더라
이 짧은 후기는 말하자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벨론을 섬기고 목숨을 연명받았던 그 최소한의 보호로부터도 거부하는 사람들이 생겨 바벨론의 보호도 받을 수없게 된것을 알고 남은 유민들이 다 애굽으로 도망갔다하는 기록을 남기고 있습니다.
이런 기록들은 다 열왕기의 저자가 마지막에 확인시키고 싶은 이런 확인들을 포로된 이스라엘과 유다 백성들에게 또 오늘 현대 독자들에게 동일한 질문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그건 뭐냐하면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선택하셨고 하나님이 그들의 하나님이 되기로 약속하셨고, 그 백성이 자기의 백성이 되기로 약속하셨으며 그리하여 기꺼이 예루살렘 성전을 짓도록 허락하셨고, 이스라엘의 예배를 받으셨으며 다윗과 약속하여 다윗의 왕권이 영원하리라 약속하셨습니다.
그러나 이제 성전이 다 훼파되었고 약탈되었으며 다윗의 후손인 이 마지막의 왕들은 전부 처참한 모양으로 포로가 되어 적국에 끌려가 있습니다. 게다가 늘 이스라엘 백성들을 하나님의 특별한 백성으로 인정하는 하나님의 약속이나 호칭속에 있는 '나는 너희를 종되었던 애굽땅에서 인도하여 낸 너희 하나님 여호와니라가 지금 무산되고 있습니다.
애굽에서의 해방 하나님이 애굽으로부터 이스라엘 백성을 구출하여낸 것은 언제나 이스라엘 백성을 선택하시려는 하나님의 깊으신 뜻으로 말미암아 시작된 것이요, 이스라엘 백성을 다른 민족과 구별하는 역사적 사건이요 하나님이 개입하시는 보이는 큰 증거였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다시 애굽으로 도망감으로써 하나님의 이 모든 약속들과 그 약속들의 근거되는 이 출애굽 역사까지도 지금 무효화시키고 있습니다.
첫번째 독자들이 읽었을 때 가졌을 마음의 놀라움을 우리가 잠깐 헤아려볼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이제 더이상 희망이 없구나, 하나님이 약속한 다윗의 왕권들은 그 후손들이 지금 포로로 다 잡혀와 있고 성전은 다 훼파되어서 솔로몬이 그 성전을 세우고 이스라엘 백성들과 하나님앞에서 하나님을 섬기고, 하나님앞에 와서 기도하고 회개하면 우리 하나님은 들어 주십시요했던 그 하나님을 향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신앙고백과 하나님의 열랍이라는 것도 다 무너져내렸습니다.
애굽으로부터의 구원 그리하여 이스라엘의 특별한 하나님이 되셨던, 그리하여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의 관계를 분명하게 확인시켰고 근거로써 증거되었던 출애굽도 무산된 꼴이 되었습니다.
포로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변명의 여지가 없습니다. 오늘 우리가 이꼴이 된것은 모두 우리의 잘못이라, 우리가 하나님의 약속을 깼고 은혜를 저버렸고 믿음을 지키지 못했다하는 것은 이제 핑계댈 수없는 저들의 책임인 것으로 저들도 납득했을 것입니다.
그럼 남는 문제는 하나입니다.
그러면 이제 우리는 뭔가!
이스라엘이라는 국가, 하나님과의 특별한 관계에 있었던 민족이라는 정체성은 어떻게 되는 것인가 ,
우리의 미래는 있는 것인가 하는 문제만 남았죠. 열왕기하 맨 마지막에 기록된 말씀은 이 문제에 대한 어떤 답을 줍니다.
27 유다의 왕 여호야긴이 사로잡혀 간 지 삼십칠 년 곧 바벨론의 왕 에윌므로닥이 즉위한 원년 십이월 그 달 이십칠일에 유다의 왕 여호야긴을 옥에서 내놓아 그 머리를 들게 하고
28 그에게 좋게 말하고 그의 지위를 바벨론에 그와 함께 있는 모든 왕의 지위보다 높이고
29 그 죄수의 의복을 벗게 하고 그의 일평생에 항상 왕의 앞에서 양식을 먹게 하였고
30 그가 쓸 것은 날마다 왕에게서 받는 양이 있어서 종신토록 끊이지 아니하였더라
잡혀간 맨 마지막 왕은 시드기야왕이지만 시드기야는 이 여호야긴의 삼촌입니다.
여호야긴이 먼저 포로로 잡혀가는 바람에 바벨론인 왕이 그 삼촌된 시드기야를 마지막 왕으로 삼습니다.
연대기적으로 따지며는 여호야긴이 제일 끝 왕인 셈이죠. 역사적으로는 시드기야가 맨끝 왕이지만 연배로 그는 여호야긴의 삼촌이었습니다. 이 잡혀간 여호야긴이 포로된 지 삼십칠년만에 포로에서 놓여나고 복권이 됩니다.
그 나라를 다스리게 되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왕의 명예나 대접을 회복받습니다. 이 마지막 후기는 잡혀간 포로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묘한 희망을 주었을 것입니다. 이게 뭔가! 아직도 희망이 있다는 말인가?
이런 문제가 된 것이죠. 우리는 사무엘하 7장 14장입니다. 다윗에게 하는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14 나는 그에게 아버지가 되고 그는 내게 아들이 되리니 그가 만일 죄를 범하면 내가 사람의 매와 인생의 채찍으로 징계하려니와
15 내가 네 앞에서 물러나게 한 사울에게서 내 은총을 빼앗은 것처럼 그에게서 빼앗지는 아니하리라
16 네 집과 네 나라가 내 앞에서 영원히 보전되고 네 왕위가 영원히 견고하리라
다윗 왕권의 영원성을 약속하는 장면인데, 그기에 만일 말을 듣지않는 순종하지않는 왕이 생기면 사람의 매와 인생의 채찍으로 징계하는 한은 있어도, 그 왕권은 단절시키지는 않겠다고 약속하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열왕기서의 마지막에 나오는 유다의 멸망 더 크게 보통하는 호칭으로써 이스라엘 민족의 멸망이 끝은 아니지않는가, 라는 희망을 가지게 됩니다.
그것은 다윗에게 한 약속같이 잘못하면 사람 막대기과 인생 채찍으로 징벌은 할 지라도 포기하지는 멸절시키지는 않는다는 하나님의 약속과 여호야긴의 복권이 가져오는 이 기록이 갖는 의미때문에 그렇습니다.
물론 나중에 바벨론 포로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돌아오고 이스라엘이 자기네 국가를 다시 회복한 후에도 이 이스라엘의 다윗 왕권이 회복되지 않습니다. 그 뒤에 일어나는 왕들은 다윗왕조가 아닙니다.
여러분 잘 아시는 우리 예수님 오셨을 때에 왕이었던 헤롯왕도 다윗왕조가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는 신약을 시작하는 마태복음 1장1절에서 보는바와같은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그리스도의 세계라 에서 예수님이 다윗왕권을 잇는 하나님의 약속의 후손이라는 사실을 확인합니다.
우리는 우리 신앙생활속에서 사실은 이스라엘 백성이 겪었던 역사와 비슷한 현실을 겪습니다.
그 현실은 다름아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대접하고 우리의 인생에 목적하시는 것과 우리가 하나님께 기대하고 하나님께 원하는 것과의 갈등입니다.
이스라엘 역사가 주는 교훈이 뭔가하면 저들은 저들 나름대로 하나님을 섬겼지만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것같이 하나님만 섬기는 일에는 실패했다는 사실입니다. 저들은 성전안에 우상을 끌어왔고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 말하자면 성전을 짓고 제사를 드리는 일들은 있었을지라도 구약에 나타나는 선지자들의 지적같이
'너희 더이상 헛된 제사를 가지고 오지마라 너희는 헛되이 내 마당만 밟을 뿐이다'
말리기서에서 같이
'누군가 성전문을 닫을자가 있었으면 좋겠다'
이런식의 하나님의 한탄을 기록한 내용을 만나게 됩니다.
이런 모든 문제는 가장 중요하게 어디에 근거하느냐하면, 하나님이 우리의 하나님이 되고 우리를 당신의 백성으로 삼는다는 문제의 심각성을 그 깊이를 우리가 깨닫는데 너무 오래 걸린다는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의 현실속에서도 우리는 기독교 신앙이라는 것이 전적으로 하나님앞에 순종하는 신앙이 아닙니다.
하나님에게 원하는 신앙입니다.
내 소원과 기대의 대상이지 하나님앞에 순종하고 무릎꿇어야되는 신앙으로서는 어느시대에나 기독교는 유혹을 받습니다.
이 싸움이죠. 우리가 이 중요한 싸움속에서 이스라엘의 실패를 보는데 그리고 이 실패에 대해서 하나님이 정말 엄중한 심판을 내리는 것을 봅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철처한 멸망으로 이스라엘 역사를 끝내는 것은, 하나님이 이스라엘에 대하여 가지는 목적과 뜻이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크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일상을 살면서 여러분들이 언제 관대해 지십니까? 여러분들이 관대해지는 것은 사소한 것일 때만 관대해 집니다.
중요한 일에 관대해질 수가 없습니다.
그렇지않습니까? 사람이 목숨이 달린 문제를 웃을 수가 없습니다. 지금 하나님은 그러시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문제를 끝까지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는 것이 역사의 고갈입니다.
그다음에 성전을 지었고 하나님앞에 때에따라 제사를 지내었지라도 그것은 그냥 일부분이었던 것으로 우리가 평가할 수밖에 없습니다.
왜요, 결국 이렇게 끝났으니까.
그럼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이런 심판과 이런 철처한 멸망으로 끝을 냈고 그기에 핑계댈 수없이 모든 책임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있는 것이라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져야하는 희망, 즉 여호야긴의 복권이나 다윗에게 한 약속같이 이런 하나님께서 그러나 그 약속을 취소하지 않는다라는 것은 무엇을 근거로하여 희망으로 가질 수 있겠습니까?
어떻게해야 이스라엘 백성들과 오늘날 우리들에게 그것이 믿을만한 희망이 될 수 있겠습니까?
그것은 전적으로 하나님께 달린 문제입니다.
하나님께 달린 문제라면 하나님이 어떤 마음을 먹느냐에 문제라는 뜻인데 그 하나님이 어떤 마음을 가지시느냐하는 그 기준은 하나님이 어떤 분이냐에 달려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구약 내내 하나님에 대한 설명은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이에 성실함과 책임의 관계속에서 하나님이 잘못하시는 적은 없으십니다.
하나님은 성실함에 있어서나 그 공의로움에 있어서나 그 책임에 있어서 실패하시지 않으십니다. 늘 이스라엘이 실패합니다.
실패한 이스라엘을 회복시키는 것은 하나님의 어떠하심, 하나님의 속성의 문제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구약에서 선언하는 이런 말씀들의 중요성을 발견합니다.
여호와는 자비로우시고 은혜로우시고 노하기를 더디하시고 인자가 크신 하나님이로라라는 선언의 중요성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하박국 선지자의 고백같이 '주여 진노중에라도 긍휼함을 잊지마옵소서'
우리 신약에 대표적인 이런 맥락의 표현중에 ,,'우리는 미쁨이 없을지라도 주는 일향 미쁘시니 자기를 부인하실 수 없습니다'
이것이 기독교 신앙을 유지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느 자리 어떤 절망에서도 희망을 얘기할 수있는 것은 하나님이 자비롭고 은혜로우시며 성실하시며 전능하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만일 이것을 놓친다면 우리는 이스라엘 역사가 여기서 끝났을 것이고 우리도 우리인생에 희망이 없을 것입니다.
우리 인생에 희망이 있어야하는 이유는 뭐죠? 우리는 이스라엘의 역사와 별 다름이 없는 인생을 삽니다.
우리는 늘 실패합니다. 실패하는 가장 중요한 이유는 뭐라구요?
하나님이 우리를 향하여 가지는 목적과 우리가 하나님에 대하여 가지는 목적의 무게에 차이가 나는 탓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것을 요구하십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의 모든 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가장 대표적으로 우리는 하나님의 거룩함을 원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능력만 필요로 합니다. 이게 언제나 부딫히죠.
그래서 우리 예수 믿는 신자들의 인생의 고단함은 우리안에 이 모든 문제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소원하는,
하나님이 나를 사랑한다는 문제만이 가장 중요한 소원이 되는 자리에 이르기까지 우리안에서 그 허다한 우상들이 뿌리 뽑히기까지 우리 하나님의 심판아래 있기때문에 고단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정금같이 단련 하십니다. 이스라엘의 멸망은 우리의 현실속에서 사실 늘 반복되는 사건일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사는 이 시대에도 보듯이 우리가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며 창조주라고 고백하며 예수를 믿고 그의 십자가를 필요로 한다고 고백을 하지만 아마 어느시대에나 그랬었던것 같습니다.
구약에 나타난 바와같이 지난 이천년 기독교 역사에서도 언제나 문제는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를 목적하는 무게로 하나님을 섬기지않곤 한다는 사실입니다. 이스라엘 멸망이 백퍼센트 이스라엘 그들에게 책임이 있었던 것같이 즉 그들은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대접하지 않았습니다. 물론 우리도 같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심판받아 마땅한 우리가 자초한 죽음이라는 결과까지도 극복하시고 우리를 구원하실 것입니다.
그것이 십자가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배반하고 하나님의 심판을 자초했음에도 불구하고 결국 우리에게 복으로 주실 것입니다.
그것이 부활신앙입니다. 그러나 그 문제는 그렇게 쉽게 결국은 하나님이 복주실꺼야하는 마치 어린 아이들이 가지는 순진하고 무지한 이해로서 취급되어서는 안됩니다. 빌리보서 2장으로 가 봅시다.
5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6 그는 근본 하나님의 1)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2)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또는 형체또는 보류
7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3)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또는 본체
8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9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10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에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11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우리는 이 문제를 잘 알고 있습니다.
최소한 예수를 믿는다라고 고백하는 모든 사람들이 알고있는 그 신앙의 가장 중요한 핵심된 내용입니다.
예수님께서 성자 하나님이시지만 이 땅에 오셔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셨고 살아나셨습니다.
그리고 이일로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셨다고 합니다.
하나님이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로 영광을 받으셨다라는 것은 이 사건이 굉장히 큰 문제라는 것을 시사합니다.
우리도 이것이 큰 문제라고 고백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고백은 대부분의 경우 너무 너무 로맨틱합니다.
감상적입니다. 한번 울고 그만두는 한번 감격하고 때우면 되는 적이 너무 많습니다.
우린 우리 인생을 걸지않으며 우리 목숨을 건다는 것을 비장한 한순간의 어떤 열정이라고 생각하시면 안됩니다.
우리에게 길어보이는 우리의 인생을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기로하고 예수를 믿는다고 고백하는 것으로 전면적으로 방향과 내용을 바꾸셔야 됩니다. 우리는 이 문제에 대해서 거의 갈등도 하지않습니다.
예수를 믿었고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는 것으로 마치 열왕기서에 기록된 이스라엘이 솔로몬의 영광된 성전을 짓고 좋아한 것처럼 그리고 때를 따라 제사를 지내고 그것으로 하나님앞에 할 도리를 다 한것처럼 그리고 실제 생활속에서는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지않은 것처럼 그렇게 삽니다.
이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 그리고 이일로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셨다는 이 선언은 이런 구절로 이어집니다.
12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뿐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13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
우리의 모든 소원이 이 하나님께,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그 영광을 받으신 것에 걸맞게 반응해야 합니다.
두렵고 떨림으로. 여러분 이 두렵고 떨림을 공포라고 이해하지 마십시요.
무게로 이해하십시요. 그 심각성으로 이해를 하십시요. 이것이 이해되지않으면 우리는 열왕기가 증언하는 이스라엘 역사의 의미를 놓치게 됩니다. 그리고 우리의 인생을 제대로 이해를 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예수를 믿으면 행복하고 기쁘고 평안한 신앙생활을 한다는 그런 약속을 성경에서 받습니다.
그러나 그 평안과 그 기쁨들은 세상적인 것 아닙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의 문제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과의 관계의 정상화가 만들어주는 평화와 기쁨보다 세상과의 관계의 평화와 기쁨을 하나님께 요구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역사와 조금도 다를 것이 없습니다.
그기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은 철처한 심판이었습니다. 두려워해야 합니다.
그리고 무겁게 생각하고 이것이 얼마나 귀한 일이길래 하나님이 이렇듯 철처하게 이 문제에 반응하시는가 생각하셔야 됩니다.
그리하여 여러분의 신자된 인생과 생애가 하나님을 모시고 사는 자의 진정한 영광을 취하셔야 합니다.
그렇게하지않고 있다면 일어나는 모든 삶의 어려움과 고통과 갈등들이 하나님의 무게와 나의 반응 내 신앙고백이 갖는 무게의 차이 때문에 일어난다는 사실을 변명하지 않으셔야 됩니다. 변명할 수 없음을 알아야 됩니다.
그것이 예수를 믿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의 생애와 존재가 이 하나님의 무게에 답하는 신앙이 되시길 바랍니다.
기도하십시다.
하나님 아버지 은혜를 감사합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는 우리의 고백에 귀한 것을 확인합니다. 그 무게를 확인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부르시는 그 기쁘하심과 그기에 두신 하나님의 성의와 열심을 기억합니다.
그렇게 우리의 삶을 우리의 존재를 하나님앞에 바치게하사 참으로 이 땅을 사는 동안 하나님의 자녀로 살게하시고 우리를 지켜보는 사람들이 우리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아는 복을 누리게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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