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왕기 41 / 왕하 23:4-14 / 2010.02.21 / 개역개정판
4 왕이 대제사장 힐기야와 모든 부제사장들과 문을 지킨 자들에게 명령하여 바알과 아세라와 하늘의 일월 성신을 위하여 만든 모든 그릇들을 여호와의 성전에서 내다가 예루살렘 바깥 기드론 밭에서 불사르고 그것들의 재를 벧엘로 가져가게 하고
5 옛적에 유다 왕들이 세워서 유다 모든 성읍과 예루살렘 주위의 산당들에서 분향하며 우상을 섬기게 한 제사장들을 폐하며 또 바알과 해와 달과 별 떼와 하늘의 모든 별에게 분향하는 자들을 폐하고
6 또 여호와의 성전에서 아세라 상을 내다가 예루살렘 바깥 기드론 시내로 가져다 거기에서 불사르고 빻아서 가루를 만들어 그 가루를 평민의 묘지에 뿌리고
7 또 여호와의 성전 가운데 남창의 집을 헐었으니 그 곳은 여인이 아세라를 위하여 휘장을 짜는 처소였더라
8 또 유다 각 성읍에서 모든 제사장을 불러오고 또 제사장이 분향하던 산당을 게바에서부터 브엘세바까지 더럽게 하고 또 성문의 산당들을 헐어 버렸으니 이 산당들은 그 성읍의 지도자 여호수아의 대문 어귀 곧 성문 왼쪽에 있었더라
9 산당들의 제사장들은 예루살렘 여호와의 제단에 올라가지 못하고 다만 그의 형제 중에서 무교병을 먹을 뿐이었더라
10 왕이 또 힌놈의 아들 골짜기의 도벳을 더럽게 하여 어떤 사람도 몰록에게 드리기 위하여 자기의 자녀를 불로 지나가지 못하게 하고
11 또 유다 여러 왕이 태양을 위하여 드린 말들을 제하여 버렸으니 이 말들은 여호와의 성전으로 들어가는 곳의 근처 내시 나단멜렉의 집 곁에 있던 것이며 또 태양 수레를 불사르고
12 유다 여러 왕이 아하스의 다락 지붕에 세운 제단들과 므낫세가 여호와의 성전 두 마당에 세운 제단들을 왕이 다 헐고 거기서 빻아내려서 그것들의 가루를 기드론 시내에 쏟아 버리고
13 또 예루살렘 앞 멸망의 산 오른쪽에 세운 산당들을 왕이 더럽게 하였으니 이는 옛적에 이스라엘 왕 솔로몬이 시돈 사람의 가증한 아스다롯과 모압 사람의 가증한 그모스와 암몬 자손의 가증한 밀곰을 위하여 세웠던 것이며
14 왕이 또 석상들을 깨뜨리며 아세라 목상들을 찍고 사람의 해골로 그 곳에 채웠더라
오늘 본문에 보시는 이 요시야왕은 열왕기 역사상 가장 분명한 그리고 정직한 종교 개혁을 시행한 왕입니다. 오늘 본 23장 25절 말씀부터 보면
'25 요시야와 같이 마음을 다하며 뜻을 다하며 힘을 다하여 모세의 모든 율법을 따라 여호와께로 돌이킨 왕은 요시야 전에도 없었고 후에도 그와 같은 자가 없었더라'
이렇게 기록합니다. 그러나 이어 나오는 말씀보시면,
'26 그러나 여호와께서 유다를 향하여 내리신 그 크게 타오르는 진노를 돌이키지 아니하셨,,,' 고
'27 ,,,,,,,내가 택한 이 성 예루살렘과 내 이름을 거기에 두리라 한 이 성전을 버리리라,,,'
고 하십니다. 우리로선 의외이죠. 요시야는 다윗이후 최고의 선왕이요 하나님의 뜻에 온전히 순종하여 많은 개혁을 이룬 왕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이 남왕조 유다를 결국은 물리치시고 심판하시겠다고 말씀하시는 겁니다.
조금전에 본문으로 본 4절에서 14절에 이르는 긴 구절을 읽는 동안에 여러분들이 보시는바와같이, 요시야왕이 많은 종교개혁을 시행해서 우상들을 헐고 성전안에 들어와있는 우상들을 다 내어다가 빻아서 가루를 만들어버리고 또 우상들을 섬기던 제사장들을 폐하고 그를 따르는 자들을 폐하고 하는 여러 종교적 개혁을 시행한 내용을 보셨는데,
결국 이 설명들은 요시야왕이 얼마나 철저한 신앙으로 복귀했는가와 함께 당시의 남왕조 유다의 우상숭배가 편만했었는가, 얼마나 유다백성들의 모든 개개인 백성의 심중 깊이 골수에 사무치게 우상숭배가 자행되었는가를 고발하고 있는 것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남왕조 유다의 멸망이 요시야왕 지도자 한사람의 회개나 열심으로 회복될 수없는 모든 국민 국가 총체적인 우상숭배로 말미암는 부패와 그 극심한 형편을 돌이킬 수없는 국면에 이르렀다는 것을 알게됩니다.
이사야 1장에 가면 이문제에 대한 우리의 이해를 도울 이사야선지자의 이런 이스라엘 백성을 향한 지적이 있습니다.
이사야 1장 10장,
'10 너희 소돔의 관원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지어다 너희 고모라의 백성아 우리 하나님의 3)법에 귀를 기울일지어다
11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너희의 무수한 제물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뇨 나는 숫양의 번제와 살진 짐승의 기름에 배불렀고 나는 수송아지나 어린 양이나 숫염소의 피를 기뻐하지 아니하노라
12 너희가 내 앞에 보이러 오니 이것을 누가 너희에게 요구하였느냐 내 마당만 밟을 뿐이니라
13 헛된 제물을 다시 가져오지 말라 분향은 내가 가증히 여기는 바요 월삭과 안식일과 대회로 모이는 것도 그러하니 성회와 아울러 악을 행하는 것을 내가 견디지 못하겠노라
14 내 마음이 너희의 월삭과 정한 절기를 싫어하나니 그것이 내게 무거운 짐이라 내가 지기에 곤비하였느니라
15 너희가 손을 펼 때에 내가 내 눈을 너희에게서 가리고 너희가 많이 기도할지라도 내가 듣지 아니하리니 이는 너희의 손에 피가 가득함이라
16 너희는 스스로 씻으며 스스로 깨끗하게 하여 내 목전에서 너희 악한 행실을 버리며 행악을 그치고
17 선행을 배우며 정의를 구하며 학대 받는 자를 도와 주며 고아를 위하여 신원하며 과부를 위하여 변호하라 하셨느니라 '
여기 이사야 선지자의 지적을 보면 구약에 나타남 모든 선지자의 공통된 임무이고 지적이기도 한 이 지적이죠.
너희는 신앙을 개인 체험의 영역에 묶어두지 말고 그 신앙으로 사회적인 책임까지 져야한다 이것이 선지자들의 지적이요, 지금 이사야 선지자가 오늘 우리가 보는 이사야 1장 10절에서 17절까지 한 내용입니다. 하나님을 섬기되 제 개인의 관계, 개인의 내면, 영성, 인격에만 국한 될 것이 아니라 그것이 각 신앙인이 몸담고 사는 시공간속에서 각 사회속에서 실천되어야한다 그겁니다.
이게 지금 읽은 17절에서 보는바와같이 '선행을 배우며 정의를 구하며 학대 받는 자를 도와 주며 고아를 위하여 신원하며 과부를 위하여 변호하라' 이렇게 나옵니다. 이 대목은 만만치않는 주제입니다. 너무 쉽게 사회정의라는 것으로 '모든 신앙의 무게 중심을 옮기자' 그렇게 얘기하면 안됩니다.
개인이 가지는 신앙고백과 그 개인의 고백이 그 개인의 자유로운 책임있는 고백인 것같이 그 개인이 살아야하는 현실을 그 고백과 연결시켜야 한다의 그런 차원에서 사회적책임을 가진다는 것이지, 사회앞의 하나의 권력으로 정치적 힘으로 기독교신앙을 강요하여 정의로운 사회를 만들자하는 것을 지칭하는 것은 아닙니다.
지금 요시야왕이 개혁사건을 통해서 우리가 확인하는 바는 한나라의 붕괴, 한 사회의 붕괴는 그 사회나 나라가 근거하는 근거와 기준의 어떠함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것이죠. 한사회나 나라가 유지되려면 그 유지할 근거가 분명해야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물질적이기 보다 정신적인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기독교신앙으로 얘기하자면 그것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요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믿음이라고 얘기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기독교 신앙인이 사회적 책임이 직접적인 우리의 책임으로 연결될 수밖에 없는 이유가 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북왕조 이스라엘에 있어서나 남왕조 유다에 있어서나 우상을 섬기는 것이 하나님을 외면했다하는 그 사실하나라도 분명히 심판받을 조건이 됩니다만 그것은 한 공동체, 사회나 국가라는 조직을 무너뜨리기에 충분한 이유가 된다 그것이죠.
한 사회가 서 있으려면 건강한 기준과 근거가 있어야되고 질서가 있어야되며, 한나라가 건강하게 있으려면 정신적인 밑받침이 없이 나라가 서있을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역사속에서 이미 로마의 멸망이 밖으로부터의 위협이 아니라 로마시민들 자체가 가졌던 너무 너무 큰 영토와 부, 여가시간들에 의하여 저들의 정신상태가 무력해진데 첫번째 이유가 있다는 역사학자들의 지적을 기억해야합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의 백성들에 있어서나 마찬가지로 오늘 우리에게 있어서도 우리의 신앙이 개인적인 차원에서 하나님과의 관계를 분명하게 묶어놓는 것만큼 우리가 한인간으로 살아야하는 시공간속에서, 즉 현실이라는 환경과 무대속에서 시대속에서 사회속에서 요구되고 있는 성경적인 신앙적인 책임을 분명하게 알고 실천해야만 합니다.
지금 요시야시대 남왕조 유다가 멸망하는 데에는 저들이 우상을 섬기므로 말미암아 우상이란 다 자기욕심을 채우는 수단으로 밖에는 가치가 없는 존재들이죠. 그것은 그 우상을 섬기는 영혼에게 진리와 생명을 가져다주지 않습니다.
하나의 개인의 영혼을 위해서나 그들이 몸담고 살고있는 사회를 건강하게 지탱시킬 아무런 힘도 갖고있지 못합니다. 자연히 나라는 그 사회는 파멸하고 붕괴될 수 밖에 없습니다.
오늘 우리의 현대, 우리가 현시점을 우리가 확인해 보아서 우리의 책임은 어떤가!
요시야왕 시대의 남왕조 유다의 삶의 상황과 우리와 어떤 관계성이 있는가!
우리의 책임은 이 역사를 봄으로써 어떤 교훈을 얻는가, 이렇게 이어갈 작정입니다.
우리가 살고있는 현대사회, 이제 다 세계화되어서 어느 나라나 별 차별없이 비슷한 문화적 또는 정신적 배경속에 노출되어 있고 또는 영향을 받고있는 것이 현대입니다. 우리가 살고있는 이나라도 뭐 옛날같이 쇄국이나 이렇게 고립된 채 존재하지않고 온 세상에 유행하고 있는 현시대정신속에 노출되어있고 영향받고 있습니다.
현대성에 대한 많은 지적과 분석이 필요하지만 오늘은 가장 대표적인 두가지만 다루어볼려고 합니다.
우리가 살고있는 시대가 어떤 영향아래있고 그래서 우리의 책임이 얼마나 큰 가, 이것을 이 요시야와 그의 종교개혁에도 불구하고 멸망할 수밖에 없었던 남왕조의 역사적 사건을 교훈적으로 돌아보면서 우리 책임을 살펴보려고 하는 것입니다.
지금은 가장 세속성이 강한 시대입니다. 세속성이라는 것은 세상이 보이는 것으로 우리의 관심과 목적을 끌어당기는 그런 경향을 말합니다. 그런 세력이죠. 길게는 한 인간이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가 가장 중요하다고 우리를 위협하는 정신이고, 짧게는 매일매일의 삶속에서 지금, 여기라는 순간성을 강조하는 정신입니다. 이 정신이 얼마나 강한지, 우리는 목적을 이 세속성 때문에 놓치고 있다는 것을 느끼지못합니다. 지금이 가장 시급하고 가장 중요한 때라서 영원한 방향을 어디로 잡아야하고 목적을 향하여 하루하루를 쌓아나아가야한다는 것이 그냥 생각에서 없어져버렸습니다.
목적과 의미가 상실되면 그 인생은 공허해집니다. 우리 잘알다시피 그렇습니다. 그 어느때보다 재미있는 일이 많은 시대인데 그 어느때보다 삶은 가벼워졌습니다. 우리가 목적과 의미를 상실해서 공허해지면 우리인생이 공허해짐으로써 끝나는 것이 아니라, 의미를 공허하게 만드는 것을 즐기게 됩니다.
우리나라에만 있는 현상이 아니라 이미 미국의 저명한 학자가 미국사회를 연구하고 내놓은 분석에 의하면 가장 큰 현대성의 세속성을 보여주는 것이 토크쇼라는 거죠. 토크쇼라는 거는 처음에는 사회저명인사를 불러다가 그에게서 들을 만한, 배울 만한 점을 대담을 토해서 시청자에게 그 의미나 또는 중요한 교훈을 남누려고 시작을 했습니다. 그러나 곧 토크쇼는 제담이 되고 말았죠. 그리고 모두 나와 낄낄거리기 시작했습니다.
우리도 TV에 여러 프로가 있습니다. 다 낄낄거리는 겁니다. 아주 재미있고 그리고 아주 한심합니다. 잘 생각해 보십시요. 그기는 누가 나와도 그 존재와 그 한 존재의 인생 같이 나누는 내용속에 진지할 구석이 없습니다. 진지할 여유를 주지않습니다. 다 가볍고 쉽자고만 합니다. 누가 나와도 똑 같습니다. 큰 손해를 보고있다고 기억해야합니다. 우리는 진지함을 잃고 있습니다. 또하나 있습니다.
또하나 우리가 살고 있는 현대성의 우리가 꼭 기억하고 넘어갈, 분석해서 확인해야 할 문제있는 정신은 실용주의 입니다.
모든 것은 의미의 문제가 아니고 화폐가치의 문제가 되고 말았습니다. 사실 도덕이나 성품 인격같은 것은 돈으로 환산할 수없는 가치임에도 불구하고 지금은 뭐든지 돈입니다. 그러자 뭐만 남았냐하면, 운이 좋은 사람과 운이 나쁜 사람으로 모든 사람은 이분화되었습니다. 성공한 사람은 운이 좋은 사람이고 성공하지 못한 사람은 운이 없는 사람이지, 저 사람이 어떻게 노력했고 저 사람이 어떻게 성실했는가는 따지지않게 되었습니다. 다시말하면 성공못한 사람은 순진한 바보고, 성공한 사람들은 교활한 사람이 됐죠. 성실이란 말을 갖다 붙일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진지함과 성실함이라는 것을 빼앗기고 사는 시대에 우리가 속해 있습니다. 아마 그래서 그럴 겁니다. 기독교는 그 무엇보다도 진지함과 성실함이라는 것이 토대가 되는 뎁입니다. 하나님이 누구시냐로부터만 출발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진실하시고 창조주되시며 하나님되시며 심판자되시는 하나님, 우리를 당신의 형상으로 만들어 당신의 뜻으로 요구하시는 하나님이라는, 무엇과도 바꿀 수없고 대치할 수없고 외면할 수없는 진지함, 진실한 진리라는 것이 외면되는 세상속에 살다보니까 우리가 세상속에 들어가 진지함과 성실함을 놓고 사는 사람들과 정면으로 우리가 가진 진리와 생명이라는 것으로 싸우기보다, 우리끼리 있을 때 말이 통하고 이해되는 사람끼리만 하는 싱앙으로 우리가 스스로를 아마 외면한 것 같습니다. 그래서 한국교회는 뭐 세계교회사에 그 기록될 만한 부흥과 큰 성공을 거두었음에도 불구하고 사회적인 영향력과 책임에서는 대단히 미흡하다고 볼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신앙이 하나의 형태로 나타나고 명분으로 나타내는 일에는 그 어느 교회들보다도 어느 나라보다도 일을 잘하지만, 삶의 현장에서 신자 노릇을 하느냐하는 문제에 있어서는 우리는 거의 거의 점수가 모자랍니다. 우리가 이렇게 주일날 모이고 개인이 기도하고 성경을 읽고 하는 것들로 그것이 나를 하나님의 자녀되게 한 고백을 만들어내고 항복을 만들어내고, 기꺼이 하나님의 목적하심과 약속하심에 내 인생과 나라는 존재를 맡겼다면, 우리는 나라는 존재와 인생이 나의 삶의 터전에 모든 정황속에서 하나님의 사람의 노릇을 해야됩니다. 그 노릇을 우리는 하나의 기독교적 임무라는 어떤 형태가 되기를 원합니다. 여러번 예를 들지만 신우회를 만드는 식입니다. 그렇기는해도 동일한 믿는자나 믿지않는 자 모두에게 공통되게 요구되는 삶의 현장속에서 그 삶을 이해하고 책임을 지고 극복하는 그 정신, 그 근거, 이해, 분석이 세상사람들과 다른 신자로서의 모습을 보여주기 위하여 삶에 뛰어들고 삶을 짊어져야하는 책임은 안하고 있다 그겁니다.
우린 마태복음 22장에서 어떤 율법사가 예수님께 나아와 한 이 질문을 기억합니다.
계명중에 어느것이 제일 큽니까? 예수님께서 첫째는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뜻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되는 계명이요, 둘째는 이와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명이니라 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세상에 나가면 우리는 바로 이 하나님, 이 하나님과 우리를 지으실 때, 나만이 아니라 혹 지금 아직 예수를 믿지않는다 할지라도 모든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하나님이 지은 그의 사랑과 은혜의 대상이라는 존재의 가치를 인정하는 기중에서 우리가 사회에 나가 선다 그겁니다.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하나님이 지은 사람들과 대면하여 하나님의 뜻을 믿고 아는 자로써 살되, 저 사람들을 적으로써 여기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현실과 마주쳐야되는 모든 영혼앞에 하나님 나를 찾아오신 그 은혜와 능력과 목적으로 저 사람들을 대하고 우리 인생에 주어지는 모든 일들을 직면하고 책임진다 그게 우리 몫입니다. 사회적인 책임입니다.
세상이 보고 압니다. 저 사람들은 무엇때문에 저렇게 살까, 우리는 성공을 위해서 결과를 위해서 보상을 위해서 사는데, 저사람들은 그것보다 더 큰 이유가 있다,,, 우리와 다른 원리가 있다,,, 이걸 해내지 않으면, 우리는 개인적으로 하나님앞에 신자된 책임을 지는 것과 함께, 하나님이 나를 불렀을 때 나를 부른 그 시대, 그 자리 우리가 속한 사회와 국가라는 책임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되기를 거부하는 불신앙의 죄를 짓는 것과 같다 이렇게 성경이 지적하는 겁니다.
에베소서 5장과 6장에 가면, 사도바울 선생이 이 문제를 다룹니다. 기독교 신앙이란 건 얼마나 삶의 모든 영역에 적용해야 되는가 그것의 대원칙을 이렇게 가르치죠. 부부됨을 어떻게 가르치는가, 부부됨은 서로 사랑하는 것인데 그 사랑은 어떤 사랑이냐하면 남편은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위하여 자기를 주신 사랑이며, 아내는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그리스도께 복종하는 신자의 자세로 입니다. 그러니까 부부는 개인이 가지는 열심이나 개인이 가지는 헌신이라는 최고의 정성을 가지고 부부를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짝지어 주셨고 믿음으로 살라고 한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는 것같이 그리스도앞에 순종하는 교회같이 믿음이라는 차원에서 부부됨을 지켜냅니다. 세상은 한 개인이 가질 수 있는 최고의 성의와 열정에 불과하니까 같이 살 마음들이 점점 없어집니다. 우리는 사실 둘이 서로 사랑할 실력이 없습니다. 어쩌다 사랑하는 마음이 생기기도하지만 아닌 때가 더 많고 왜 같이 살까까지 생각이 드는 것이 우리의 실력이니까 우리의 힘으로 버텨내지 못합니다. 점점 결혼들을 안하죠. 애는 물론 안낳고 이걸 뭐 다 싸잡아서 뭐라 그러자는 것이 아닙니다. 어디에 우리가 우리의 정신이 잠식당하고 있는가 보십시요.
실용적인 문제죠. 애기르는 것 보통 힘드는 것 아닙니다. 부부생활하는 것 보통 힘드는 것 아닙니다. 혼자 살면 제일 편안합니다. 여러분들이 다 경험하시는 일입니다. 그러나 그거를 우리는 어떻게 가정을 지킨다고요? 우리는 믿음으로 지킵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하라고 했으니 하나님이 좋은 결과를 주실 것이라고 믿고 오늘 우리에게 벅찬 짐을 집니다. 그것은 부모와 자식간에도 요구되고 있습니다. 부모를 왜 공경해야 되느냐, 부모는 하나님의 대리자라는 것입니다. 부모가 부모답지 못한 사람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기본으로 그렇습니다. 부모를 공경하라는 십계명에도 들어있습니다. 자식은 사랑해야됩니다. 투자하시지말고 자식에게서 어떤 보상을 받으려하시지말고 사랑하십시요. 신앙인이라면,,, 그러니까 세상과 우리가 함께 살면서볼 때, 어떻게 저들 부부는 삶을 이겨내는가, 어떻게 자녀와 부모가 관계를 유지하는가, 저들과 다르죠. 해달라는 것 다해주고 뭐 깜짝 이벤트를 하고 이렇게해서 하루하루를 떠넘기는 것이 아니라 저 사람들이 가진 근거는 우리와 다르다. 그 살아가는 힘은 어딘가 우리와 다른데서 생긴다. 그까 사회적 책임이라니까요. 상전과 종의 관계도 얘기하고 있습니다. 상전을 주님을 모시듯이 모시랍니다. 그렇게 나가서 회사생활하는 겁니다. 회사생활이 쉽지않다는 걸 저도 압니다. 이 우리의 삶의 쉬운 것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전부 신앙생활을 어떻게 하느냐하며는 그러니까 가능한한 사회적 책임들, 삶의 현장에서 우리가 도망가서는 안되는 자리매김해야되는 책임들에서 도망와서 보다 쉬운 것들 주문을 외우고 말이 통하는 사람들끼리 서로 격려하고 위로하고 우리끼리 끌어안고 울고마는 일로 다 도망온 것같은 느낌이 듭니다. 이러면 우리가 몸담은 사회가 붕괴합니다. 우리가 이 나라와 이 사회를 꼭 승리케하고 성공케하는 정치적인 책임을 갖고 있지않습니다. 우리가 몸담고 있는 사회에 정의를 구현해야합니다. 우리 한사람이 자기가 처한 삶의 현장에서 정의를 구현하고 있을때 정의는 하수같이 흐를 것입니다. 소돔 고모라에게 의인 열명있느냐 물으시는 것이 마지막 심판을 위한 하나님의 마지막 조건이었습니다. 그렇지않습니까?
한 사회를 살려낼 수있고 한 나라를 살려낼 수있는 것은 그런 의미에서 기독교인 뿐입니다. 물론 동양적 도덕들도 가치있는 것들도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폐회도 많이 봤습니다.
조선시대에 유교가 갖었던 경직성을 실컷 봤습니다. 선비가 가지는 그 고고함과 함께 그 오만함도 봤습니다. 기독교 신앙이 가지는 윤리와 도덕을 대신 할 수있는 건 세상엔 없습니다. 최고의 도덕이며 최고의 윤리이며 그것은 사랑입니다. 그 책임은 우리에게 있습니다. 그 한 개인뿐만 아니라 그 개인이 몸담은 사회를 위한 나라를 위한 그 시대를 위한 세상을 위한 하나님의 부름심이기도 합니다. 이 책임을 지셔야합니다. 우리는 마태복음 5장에서 이런 중요한 명령을 받고 있는데 오늘 우리가 생각한 이 맥락에서 이 내용이 분명해집니다. 마태복음 5장 14절입니다.
14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겨지지 못할 것이요
15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에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 안 모든 사람에게 비치느니라
16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빛의 사명은 뭐라고 되어 있습니까. 사람앞에 비취어서 사람들로 하여금 너희 착한 행실을 보게하라, 너희 실용성을 보게하라가 아닙니다그죠? 너희 무슨 유형성을 보게하라가 아니라, 착한 행실이라고 표현된 이 말이 갖는 그 깊이와 크기를 아시기 바랍니다. 진리와 생명,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입니다. 나누어야합니다. 비추어야합니다. 산위에 있는 동네가 숨기우지 못합니다. 빛을 사람이 등불을 켜서 댓박속에 덮어놓을리가 없습니다. 말위에 두지아니하고 등경위에 둡니다. 이렇게 크게 얘기할 수 있는지 모르겠습니다만 한국교회는 세상에 빛이 되지는 않고있습니다. 언젠가 예를들었던대로 가로등끼리 모여있는것 같습니다. 띄염띄염 한 오십미터 간격으로, 이십오미터 간격인가요? 그렇게 서 있으셔야 됩니다. 여러분들이 돌아가 내일부터 시작될 사회생활속에서 여러분들의 직장 여러분들이 살고있는 삶의 터전에서 만나야하는 이웃들앞에서 여러분들은 신자여야 합니다.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알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어떤분인가를 아는 근거와 기준위에서 여러분들의 삶을, 기독교신앙의 윤리와 질서위에서 짐을 지십시요. 책임을 외면하지 마십시요. 하나님이 여러분과 함께하사 여러분의 생애를 통하여 하나님 영광 받으시며, 이 사회와 시대앞에 은혜를 베푸실 것입니다.
기도하십시다.
하나님 은혜를 감사합니다. 우리의 삶의 무게와 중요성을 확인합니다. 내가 믿고 고백하는 하나님이 이 시대와 우리가 몸담은 사회를 하나님의 나라로 부르고 있습니다. 우리의 빛된 사명과 소금된 책임을 감담하므로 하나님께서 우리와 우리의 생애를 통하여 이루시는 일과 나누시는 일과 받으시는 영광이 넘쳐나는 우리의 생애가 되기를 소원합니다. 우리의 눈을 밝히시고 오늘 말씀을 근거로하여 더많이 엎드려 기도하고 더순종하게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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