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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계시록의 교회를 통해 드러나는 하나님의 영광

by 【고동엽】 2021. 12. 21.
요한계시록의 교회를 통해 드러나는 하나님의 영광
- 계시록 2,3장의 소아시아 일곱교회를 중심으로 한 서언적 논술 -

이광호 목사


1. 서론

요한 계시록이 주어진 목적은 명확하다. 그것은 “반드시 속히 될 일을 그 종들에게 보이시기 위해서”(계1:1;4:1)이다. 그러나 이 말은 단순히 미래에 대한 종말론적인 예언(豫言)이 아니라 예루살렘 성전파괴와 더불어 하나님께서 보여주시는 교회론적인 예언(預言)으로 이해해야 한다. 이는 요한계시록이 창세기와 직접 연결되는 의미로서 파괴된 하나님의 영광의 회복을 계시로 보여주고 있다. 즉 요한계시록은 단순히 먼 미래에 일어날 예언(豫言)을 기록한 책 이상의 의미를 지니는 것이다.1) 이는 성경의 다양한 말씀들이 궁극적으로 교회의 세움을 통한 하나님의 영광에 관련있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주님께서는 요한계시록을 통해 역사적 시대의 고통과 세상적 형편에 처하게 될 교회들에게 하나님의 영광을 찬송하는 천상의 본질을 보여주고 있다. 요한계시록 2,3장에 기록된 말씀들은 소아시아의 각 교회들에게 제한적으로 주어진 메시지가 아니라 개별적인 메시지들을 통해 구속사적 의미 가운데 존재하는 지상의 전체 교회들에게 전하는 메시지이다. 즉 요한계시록의 각교회에 주어진 메시지들은 직접 언급된 교회에만 유효한 것이 아니라 일차적으로는 전체 소아시아 교회들에게 집합적으로 유효한 말씀이다. 예를들어 에베소 교회에 대하여 한 말씀은 에베소 교회만 귀담아 들어야할 내용이 아니라 다른 여섯 교회들 역시 직접적으로 귀담아 들어야 할 주님의 말씀인 것이다. 그러므로 소아시아 일곱교회는 하나의 단일한 교회로 보아야 하며, 당시 세계에 흩어져 있던 모든 교회들 뿐 아니라 일체를 이루고 있는 지상의 모든 건전한 교회들에 대한 궁극적 대표성을 띠게 된다. 그리스도의 신부로서의 단일한 우주적 교회에, 시대와 지역에 따라 흩어져 존재하는 모든 지교회들이 하나로 엮어져 붙어 있는 것이다. 이 모든 교회들은 그리스도 오심을 예비하신 구약의 구속사적 은혜 가운데 존재하는 것이다. 이는 요한복음 15장에서 제시된 포도나무 비유에서 처럼, 한 뿌리를 가진 포도나무에 모든 가지들이 붙어 있으며 동일한 포도열매를 맺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따라서 요한계시록의 메시지는 소아시아의 교회뿐 아니라 당시 예루살렘과 시리아, 갑바도기아, 본도, 마게도니아, 고린도, 로마 등 전 세계에 흩어진 모든 교회들에게 동등하게 주어진 말씀이며, 2세기, 3세기를 거쳐 오늘 우리시대의 교회를 포함한 전체 교회에 주어진 메시지인 것이다. 그러므로 소아시아 일곱교회를 공간적으로 분리한 상태에서 각각 이해하거나, 일곱교회를 역사적 시대에 따라 일곱시대로 나누는 것은 의미없는 주장이다.2)
당시 소아시아 지역은 유대지역과 함께 로마제국이 주시할 수 밖에 없는 특수한 지역이었다. 비단 기독교에 대해서 뿐 아니라 일반적인 정황들 역시 그러했다. 역사적 배경도 그러하거니와 철학, 사상에 있어서도 그렇다. 소아시아 지역은 로마제국 치하의 다른 지역에 비해 상대적으로 저항성이 강하고 주민들이 깨어 있었다. 그러므로 당시 소아시아 지역에 살던 시민들이 일반적으로 어떤 사고를 하며 어떤 가치관을 가지고 살았던가 하는데 관심을 가질 필요가 있다. 이는 하나님을 믿는 성도들 역시 그 지역에 살면서 다른 일반 시민들처럼 <기존 가치>로부터 상당한 영향을 받고 있었으며 그것이 교회내에 침투해 들어올 가능성은 항상 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기독교 내부에서 생성된 이단적 요소>와 함께 교회를 위협하는 요소가 될 수 있었으며 성도들은 항상 그에 대해 깨어 있어야 했다. 우리는 요한계시록 2,3을 통해 구속사적 배경 위에 세워진 교회에 대한 이해와 더불어, 역사적 배경을 이해함으로써 항상 독특한 시대적 현실에 처해있는 주님의 몸된 교회에 대해 더욱 분명한 자세를 가지게 되기를 바란다.


2. 요한계시록의 기록과 소아시아의 배경

(1) 요한계시록의 기록연대와 그에 따른 의미
요한계시록은 신약성경 중 교회에 주어진 맨 마지막 서신이자 기록계시를 종결한 책이다. 사도교회 시대의 마감을 앞두고 있는 교회들에게 하나님께서는 계시로서 최종적인 편지를 하면서 주님의 재림때 까지 지상에 존재하게 될 모든 교회들에게 천상의 영광과 관련된 중요한 메시지를 주고 있다.
요한계시록의 중요한 메시지는 ‘지상 교회에 대한 위로와 하나님께 대한 천상의 영광’으로 요약할 수 있다. 당시 정치, 사회, 경제적 상황이나 교회 안팎에서 발생하는 종교, 철학, 문화적 사상의 혼란으로 인해 핍박 중에 있던 교회들에게 궁극적으로 승리하게 될 영광의 약속을 하나님께서 보여주신 것은, 교회의 커다란 위로가 되며 그런 위로로 인한 소망을 가지게 된 교회의 궁극적 목적이 영원토록 하나님을 경배하며 찬송하는 하나님의 영광에 귀결됨을 보여주는 내용이다.
당시 소아시아 지역에 살던 성도들이 속한 교회는 그 곳에 있었지만 그들의 신앙적 삶은 여전히 예루살렘 성전에 연결되어 있었다. 이것은 사도시대 교회의 매우 중요한 특성으로서 그에 대한 명확한 이해를 요구한다.3)이러한 사도교회의 특성은 AD70년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된 이후에는 그 연결고리로부터 완전히 자유롭게 된다.
요한계시록의 기록연대를 어떻게 보느냐 하는 문제는 단순한 궁금증 때문이 아니다. 계시록의 기록연대는 성경해석을 위한 중대한 지침이 될 수 있다. 학자들이 요한 계시록의 기록 연대에 관심을 가지고 그에 대한 다양한 의견을 제시하는 것은 대개 외부적인 정황들에 그 근거를 두고 있다. 그러나 필자는 성경의 내적 증거와 함께 구속사적 의미 가운데서 기록연대를 이해해야 한다고 믿는다. 이는 필자가 요한계시록을 구속사를 배경으로 한 교회론적 의미에서 살펴보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중요한 이유이기도 하다.
학자들은 일반적으로 요한계시록의 기록연대를 도미티안 황제 시대로 보고 있다.4) 절대 다수의 학자들은 도미티안 황제의 사망직전인 AD95년 경에 요한계시록이 기록된 것으로 보고 있다.5) 도미티안 시대에 요한계시록이 기록되었다는 주장은 이레네우스(AD180)로부터 시작되어,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6)(AD200), 오리겐(AD254), 빅토리아누스(3C말),7) 제롬,8) 교회사가인 유세비우스(AD325) 등의 견해로써 현대에 이르기까지 그 주장은 거의 대세를 이루고 있는 것이다. 그런 주장을 하게 되는 중요한 배경은 성경의 내적 증거가 아니라 1세기 말 로마제국에 의해 발생한 ‘기독교 박해’에 관련된 종교, 정치적 문제이다. 로마제국의 도미티안 황제 치하(AD81-96)에서 기독교에 대한 극심한 박해가 시작되었으며 그 전에는 요한계시록에서 말하는 정도의 심한 박해가 있지 않았다는 것이다. 도미티안 황제가 등극하면서 황제숭배를 로마제국의 전 영역으로 확장시켰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요한계시록2:10의 박해를 도미티안 황제의 기독교 박해와 동일한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다.
그러나 역사적 박해사건과 일반적인 상황을 배경으로 하여 요한계시록을 이해하려는 그런 생각은 너무 피상적인 이야기이다. 기독교는 초기부터 로마제국의 박해를 받았는데, 클라우디우스 황제는 AD40년대 후반, 로마에서 유대인들을 축출하기 위한 칙령을 내리게 된다.9) 그리고 네로황제 때는 기독교에 대한 대박해가 일어나게 된다.10) 특히 AD64년의 로마 대화재사건과 기독교인들을 연루시킴으로써 일어난 기독교 박해는 엄청난 일이었다. 그러나 도미티안 황제 이전의 박해는 전 로마제국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로마시(市)를 중심으로 일어난 지역적인 박해라는 것이다. 그런 정황을 근거로 하여 요한계시록이 예루살렘 성전파괴보다 훨씬 후대에 기록이 되었다고 생각하는 학자들은 종교적으로 기독교에 대한 엄청난 박해가 시작된 도미티안 황제의 통치기간인 AD81년에서 96년 사이에 기록되었을 것으로 이해하며 그 중에도 박해가 극심했던 도미티안 황제의 말기로 본다. 그렇지만 그러한 주장은 교회사적 전통일 뿐 성경의 내적인 증거는 있지 않다. 도미티안 시대에 요한계시록이 기록되었다는 주장들은 실제 기록연대보다 100여년이 지난 다음 이레네우스가 주장한데 그 근거를 두고 있다는 것이 일반적인 생각이다. 만일 그렇다면 이레네우스는 당시에 존재하던 전통에 따라 기술했을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볼 수 있다.

한편 요한계시록은 AD70년 예루살렘 멸망을 앞두고 기록된 책으로 생각하는 학자들이 소수 있다.11) 그들은 보통 요한계시록이 네로황제의 치하(AD54-68)에서 기록이 되었을 것이라 생각한다. 그러나 학자들은 AD70년 이전의 기록연대를 입증할 수 있는 확실한 근거를 제시한 사람은 아직까지 없다고 말한다.12) 어떤 학자들 가운데는 아예 기록연대를 AD65년에서 95년 사이로 이야기하기도 한다.13) 그들은 요한계시록의 기록연대를 구체적으로 알 수 없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한계시록 기록연대를 AD70년 이전으로 보는 학자들이 제시하는 중요한 근거 가운데 하나는 예루살렘 성전파괴와 이스라엘 멸망은 기독교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사건임에도 불구하고 신약성경 어디에도 언급이 없는 것을 보면 모든 성경이 AD70년 이전에 기록되었다는 것이다.14) 그리고 반더발(Cornellius van der Waal)은 이레네우스가 연대문제에 대하여 많은 실수를 범했던 자였음을 지적하면서 요한계시록의 기록연대는 그 본문의 내적 증거를 통해 밝혀야만 할 것이라고 주장한다.15) 그런 학자들은 요한계시록의 기록연대를 AD70년대 이전으로 보고 있다.
필자가 요한계시록의 기록연대를 AD70년 이전으로 보고 있다는 점 자체는 그들과 같다. 그러나 그 근거를 동일한데서 찾지는 않는다. 필자는 요한계시록의 기록연대를 AD70년 이전으로 보아야 할 중대한 이유를, 성경의 내증16)을 배경으로 한 구속사와 관련된 두 가지 역사적 측면에서 찾는다.
첫째는 요한계시록의 기록시기를 구약의 기록과 관련된 구속사적 의미에서 찾는다. 그것은 역사상 ‘특별한 40년들’과 관련이 있다. AD 30년에 있었던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역으로부터 AD70년 예루살렘 성전 파괴까지의 40년의 의미는 구속사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필자는 이 기간을 ‘사도교회 시대’로 이해하며 교회사 가운데서 ‘초대교회 시대’와 분명히 구분짓는다.17) 이 40년은 구약시대 이스라엘 백성의 출애굽이후 광야 40년의 때와 구속사적으로 조화되는 의미를 지니는 기간이다. 출애굽을 통한 이스라엘 민족의 해방과 광야 40년 동안의 특별계시의 시기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을 통한 영원한 해방과 그 이후 40년 동안의 특별계시의 시기와 연관된다. AD30년에서 70년까지의 40년은 구약의 구속사적 의미와 함께 사도들을 통한 이적과 기사가 일어나던 시기였다. 그 40년이 지나게 되었을 때 예루살렘 성전은 완전히 파괴되고 이스라엘 민족의 의미는 그 의무를 완성함으로써 종언을 고하게 된다. 그것은 교회의 놀라운 새로운 시대를 전제한다. 예루살렘 성전의 파괴는, 아브라함과 이삭의 모리아산 사건으로부터 계시되어 다윗, 솔로몬을 통한 예루살렘 성전 건립에 따른 의미와 함께 ‘여자의 후손’(창3:15)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모든 사역의 완결과 성취를 의미하는 것이다. 이는 신약성경 계시의 완성과 함께 성령의 오심으로 인해 제시된 새로운 교회시대를 ‘반드시 속히 될 일’(계1:1)로서 예고하고 있다. 요한계시록은 예루살렘 성전의 파괴라는 역사상 중대한 분깃점인 AD 70년에 가까운 시기에 기록되었으며 교회에 주어진 완성된 신약성경의 계시종결의 의미를 동반하게 된다. 따라서 사도교회 시대 40년은 이후의 교회 시대의 특별한 기초가 되는 것이다.
둘째는 예루살렘 성전파괴를 앞둔 4년간의 시민전쟁에서 그 근거를 찾는다. 로마제국의 통치하에 놓여있던 이스라엘 민족은 항상 국가 독립을 꿈꾸고 있었다. 그 가운데 다수는 독립운동에 직접 가담했다. 성경에 기록된 ‘열성당’(Zealots)은 민족 독립운동을 하는 단체였으며, 예수님 역시 민족의 독립운동을 하는 자로 오인되기도 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처형당하신 중요한 이유 중 하나가 바로 그것이었던 것이다. 이렇듯이 로마제국의 통치를 받고있던 이스라엘 민족에게는 국가적 독립에 대한 강한 열망이 있었는데 그것이 AD66년 이후에 폭발하게 된 것이다. 당시 유대지역에서 일어난 대대적인 반란은 곧 민족 독립을 위한 시민전쟁이었다. 결국 AD70년 로마제국에 의해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되고 이스라엘은 완전히 멸망하게 되지만, 그 전 약 4년간은 <로마제국>이나 <유대민족주의자들>, 그리고 <기독교회>에 있어서 정치적으로 매우 민감한 시기였음이 틀림없다.
필자는 그 4년 동안 로마제국이 기독교에 대해 어떤 우려의 시각을 가지고 있었을까에 대해 주목한다. 물론 유대지역의 시민전쟁에 대해서는 로마제국의 시각과 유대 민족주의자들의 시각, 그리고 기독교회의 시각이 서로간 전혀 달랐다. 그렇지만 로마제국이 사도요한을 밧모섬에 유배한 것은 유대지역에서 일어난 대대적인 반란과 직접적인 관련이 있었을 것으로 보는 것이다.


(2) 예루살렘 멸망을 앞둔 시점의 로마제국과 이스라엘의 관계

예루살렘 멸망을 앞두고 유대지역에서 발생한 로마제국에 항거하는 시민운동의 기미는 이미 오래전부터 있어왔다. 성경에 언급된 ‘열성당’에 속한 자들은 이스라엘의 독립운동을 하는 반제국주의적 투사들이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신 것도 로마제국의 입장에서 볼 때는 역시 그와 동일한 맥락에서 일어난 사건이었다. 물론 예수님은 이스라엘의 정치적 독립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었다. 그러나 유대인 당국은 예수님을 정치범으로 몰아 로마당국에 고소했고 로마제국 역시 최종판결을 하면서 그에게 국가모반죄를 적용했다.
로마제국 하의 이스라엘 역사 가운데는 끊임없는 독립운동이 일어났는데, 예루살렘 성전파괴와 직접 연관된 독립운동은 AD 66년 신임총독 플로루스가 유대지역에 부임했을 때 그 문제가 발생하게 된다. 그는 유대인들을 심하게 박해했을 뿐 아니라 예루살렘 성전의 금고 자금을 빼내어 유용하려 했다. 이에 유대인들은 심하게 분노했고 그것이 로마제국에 대한 반란의 직접적인 원인을 제공했다. 유대인의 반란이 확산되자 당시의 네로황제는 이듬해 베스파시안(Vespasian) 장군에게 반란 진압의 책임을 맡겼다. 베스파시안 장군은 이집트에 있던 자기 아들 티투스(Titus)를 반란진압을 위해 팔레스틴으로 불러들였다. 당시 6만여명에 달하는 로마 군단은 갈릴리 지역으로부터 시작하여 예루살렘으로 진입해 들어갔다. 유대지역에서 그런 일이 진행되던 중 로마에서는 네로 황제가 자결하고 뒤이어 1년 사이에 황제가 4명이나 교체되는 소위 ‘4황제의 해’가 뒤따랐다. 갈바, 오토, 비텔리우스 등이 차례로 황제의 자리에 올랐지만 피살당하거나 자결하는 혼란이 계속되다가 유대인 반란 진압 사령관이었던 베스파시안이 69년 황제로 추대되자 자기 아들 티투스(Titus)에게 유대인 진압책임을 맡겼다. 티투스는 공격 작전을 시작한지 5개월만에 예루살렘 성벽을 무너뜨렸다. 유대인 저항세력들은 예루살렘 성전에 들어가 항거했지만 결국 로마 군인들이 성전에 불을 지름으로써 성전을 완전히 파괴하게 된 것이다. 이렇게 그 마지막 독립전쟁이 실패함으로써 이스라엘은 AD70년 예루살렘 성전파괴와 더불어 멸망하게 된다.18)

이제 우리는 사도요한이 밧모섬에 유배된 까닭을 생각해 보아야 한다. 그렇다면 로마제국이 사도요한을 밧모섬으로 유배한 이유는 무엇일까?19) 그는 일반 범법자가 아니었다. 그는 살인이라든지, 절도, 사기 등과 같은 파렴치한 범죄를 저지른 것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그런 죄몫이 없는 그를 왜 밧모섬에 유배했을까? 그가 기독교인인 자체가 범죄였다고 하는 말은 그다지 호소력이 없다. 만일 당시에 기독교 신앙 자체가 범죄행위였다면 요한 뿐 아니라 소아시아 지역을 비롯한 로마제국의 모든 기독교인들이 범죄자일 수밖에 없었을 것이며 대대적인 체포 및 구금이 이루어졌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요한계시록을 기록한 당시는 아직 예수 믿는 것 자체는 범죄행위가 아니었음을 성경의 내증을 통해 볼수 있다. 그것이 요한계시록의 기록연대가 도미티안 황제의 박해시기가 아니라 그 보다 훨씬 이전에 기록되었음을 말해주는 매우 중요한 근거가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필자는 요한의 밧모섬 유배가 결국 이스라엘에서 일어나고 있는 독립전쟁과 깊은 연관이 있는 것으로 본다. 당시 예루살렘에는 사도들이 남아있지 않았다. 우리가 알기로 베드로와 바울 같은 사도들은 네로 황제의 로마화재 사건 이후 순교를 당했다. 따라서 마지막 남은 사도는 요한 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러한 상황 가운데서 로마제국은 유대지역에서의 독립운동에는 기독교가 깊이 개입되어 있거나 그 개연성이 농후할 것으로 판단했을 것으로 보인다. 어쩌면 마지막 남은 사도로서 요한이 예루살렘에 엄청난 영향력을 미치고 있거나 미칠 수 있다고 판단하여 그를 강제로 격리시켰을 것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도요한에 대한 밧모섬 유배는 로마제국의 정치적 의도가 깊이 깔려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요한은 로마제국이 판단하고 있던 것과는 달랐다. 그가 이스라엘에서의 정치적 위기상황과 예루살렘 성전의 파괴에 대해서는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겠지만 그에 대한 정치적 구출을 위한 세력 결집에 대해서는 아무런 관심을 두지 않았다. 도리어 요한은 ‘돌 위에 돌 하나도 남지 않을 정도로 예루살렘 성전이 완전히 파괴될 것’(마24:2;막13:2;눅21:6)이라 언급하신 주님의 말씀을 마음깊이 기억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되는 것을 막기 위해 특별한 노력을 기울이거나 이스라엘 민족을 지키기 위한 어떤 노력이나 운동도 하지 않았다. 그는 이스라엘 민족 가운데서 ‘예루살렘 성전의 의미’로 오셔서 몸된 교회를 세우신 주님의 뜻을 기억하며 그의 교회를 지키는데 관심을 기울였던 것이다. 그것은 예루살렘 성전 파괴와 연결되는 지상의 참된 교회의 건립과 연관되는 내용이다. 즉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됨으로써 그 장소적 의미가 온전히 성취되어 그 바탕 위에 초대교회 시대가 열리게 되는 것이다. 사도 요한이 하나님의 계시를 통해 소아시아 일곱교회들에 편지를 쓰게 된 것은 바로 그런 맥락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로마제국이 사도요한을 밧모섬에 격리시킨 것은 의미상 ‘지상의 교회’를 유배한 것과 마찬가지로 이해할 수 있다. 이는 단순히 요한의 개인적인 문제가 아니라 당시 로마제국 전역에 흩어져 있던 전체교회와 연관된 문제이다. 마지막 사도로서 요한은 전체 교회를 대표하는 인물이기 때문이다.20) 따라서 요한에 대한 밧모섬 유배와 박해는 교회의 박해와 직결된다. 그러므로 마지막 사도의 로마제국과의 격리는 사실상 세상과 교회의 분리를 의미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이는 단순히 역사속의 한 시대적 사건이나 제한적 의미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구속사적 교회론과 연관이 있는 문제이다. 즉 사도교회가 로마제국과 분리됨으로써 이후의 지상의 교회는 세상과 완전히 분리되는 상태에 놓여있음을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됨으로써 역사상 구속사적 이스라엘의 의미가 완료되었으며 구속사의 주변 역사의 한 주체로서 로마제국의 역할은 완전히 끝났다. 로마제국은 그리스도가 오심에 대해 나름대로 특별한 역사적 의미를 담고 있었다. 즉 하나님께서 로마제국을 구속사 가운데 이용하셨던 것이다. 아우구스투스(Augustus) 황제의 호적조사로 인한 베들레헴에서의 그리스도 탄생과 로마제국의 총독 본디오 빌라도를 통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처형은 그리스도의 생애에 있어서 로마제국과 직접 관련된 중요한 사건들이다. 이처럼 로마제국은 구속사 가운데 하나님께서 특별히 도구로 사용하신 나라인 것이다. 이는 당시 한(漢) 제국을 비롯한 세계의 여러 나라들이 구속사 가운데서 달리 도구로 사용되지 않았음과 비교해 볼 때 매우 중요한 문제이다.
이렇듯이 로마제국이 예루살렘 성전을 파괴하고 새로운 교회시대가 열림으로써 하나님의 일시적인 특별한 도구로 사용된 로마제국의 역할이 사실상 끝난 것이다.21) 그러므로 요한계시록이 기록된 사도교회 시대의 마지막 의미는 영광의 교회가 새로운 존재로 세상에 드러나는 시작인 셈이다.


3. 소아시아 일곱22)교회 - “영광의 하나님을 경배해야 할 하나의 단일한 교회”

(1) 소아시아 교회들과 그 지역의 일반적인 형편
소아시아 일곱 교회라 함은 에베소, 서머나, 버가모, 두아디라, 사데, 빌라델비아, 라오디게아 교회이다.23) 이 교회들은 사실상 하나의 단일한 교회이며 나아가 소아시아 일곱 교회들은 예루살렘을 비롯하여 여러 이방지역들에 흩어진 교회들과 더불어 하나의 교회를 이루고 있다. 소아시아의 일곱 교회들을 각기 독립적으로 단절된 교회로 보는 것이 옳지 않은 이유는, 적어도 요한은 소아시아의 모든 교회들을 동일한 의미를 소유한 하나의 교회로 보고 있다는 점과 주님 보시기에 그 교회들은 별개의 교회가 아니라 하나인 주님의 교회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일곱 교회들을 역사적 일곱시대로 나누어 해석하고 적용하려는 것은 우선 이치에 맞지 않는다. 만일 그런 식의 나눔이 된다면 초대교회 시대에 살던 성도들에게는, 에베소 교회나 서머나 교회 등 앞에 언급된 교회와 관련된 내용들은 자신들에게 적용할 수 있는 내용이지만 빌라델비아 교회나 라오디게아 교회 등에 관한 기록들은 마치 그들과 상관이 없는 말씀처럼 되어버린다.24)21세기에 살고 있는 우리가 요한계시록을 이해하는 방법과 역사상 과거에 살았던 성도들이 그 동일한 말씀을 이해하는 기준이 상이하다고 볼 수 없기 때문이다. 즉, 21세기의현대문명 시대의 성도들은 라오디게아 교회를 염두에 두고 성경을 보고, 초대교회의 성도들은 에베소 교회를 염두에 두고 성경을 보아야 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소아시아 각 교회들에게 연속적으로 주어지는 메시지 가운데는 구약성경의 언약적 의미가 담겨 있음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즉, 창세기부터 노아, 아브라함, 모세, 다윗, 이스라엘 왕국시대, 예수 그리스도와 사도교회 시대, 그리고 그 이후 교회시대를 연결짓는 성취되는 약속의 의미가 담겨있는 것이다. 각 교회들에 주어지는 메시지가 어느정도 개체적으로 이해된다 할지라도 각 교회들의 마지막에 주어지는 언약, 즉 이기는 자들에게 주어지는 약속은 구약의 구속사적 약속의 성취와 연결되어 있는 것이다.

동시에 여기서 일곱 교회들은 각기 오늘날 장로교에서 말하는 노회의 성격을 띠고 있다고 볼 수 있으며, 소아시아 지역의 전체 교회를 일반적으로 말하는 ‘가지’(branch)로서의 공교회로 이해할 수 있다.25) 다양한 시대, 다양한 지역에 흩어져 있던 성도들이 세상에 대응하며 주님의 몸된 교회를 온전히 세워나가는 방편으로 집합적 공교회 개념을 가지게 되는 것으로 보는 것이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것처럼 당시 소아시아 지역에는 일곱 개의 개체적 지교회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매주 집에서 회집하는 더 많은 지교회들이 있었다. 그렇다면 요한계시록이, 그 지역 이름이 언급된 일곱 교회들에게만 주어지고 언급되지 아니한 다른 지교회들에는 주어지지 않은 말씀인가? 그렇지 않다. 장로교회에서 이해하는 데로 말한다면 일곱 교회란 일곱 노회이며 그 안에 많은 개체적 지교회들이 있었던 것이다.26) 그러므로 일차적으로는 소아시아 지역에 흩어져 있는 모든 교회들이 직접적인 수신자들이었던 것이다.
좀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에베소 지역에는 가정에서 모이는 여러 지교회들이 있었다. 요한계시록이 기록되기 오래 전에 이미 그 지역에 여러 지교회들이 있었음을 신약성경이 입증하고 있다. 사도바울은 에베소에서 고린도교회에 서신을 보내면서 그 점을 분명하게 언급하고 있다. 에베소에는 아굴라와 브리스길라의 집에 모이는 교회(고전16:19)가 있었으며, 아볼로를 중심으로 모이는 교회(고전16:12)가 있음을 암시하는 구절들이 나온다.27)
그리고 라오디게아 지역에는 히에라볼리(골4:13)와 골로새에도 지교회들이 있었다. 그렇다면 라오디게아 교회에는 지교회로서 골로새 교회와 히에라볼리 교회가 포함된 것으로 볼수 있다. 즉 라오디게아 교회를 하나의 노회로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메시지 가운데 언급하고 있는 어떤 부분은 개체적 지교회로서 라오디게아 교회에 해당되는 언급일 수 있음을 감안한다 할지라도 라오디게아 지역에는 여러 다른 지교회들이 함께 있어 포괄적으로 그 메시지가 주어졌던 것이다.
그 이외에도 소아시아 지역과 그 주변에는 이름이 밝혀지지 않은 교회들이 많이 있었을 것이다. 성경에 나오는 지명들인 밀레도, 앗소, 사모스 등에도 교회가 있었을 가능성이 있다. 요한계시록이 기록되기 전 이미 오래 전에 바울을 비롯한 사도들과 여러 전도자들이 소아시아 지역을 방문하여 복음을 전파했다. 그러므로 소아시아 지역에는 이름이 밝혀지지 않은 여러 지교회들이 있었을 것이며, 일곱 교회들은 각 교회마다 또다시 가정에서 모이는 여러 지교회들을 포함하고 있었던 것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소아시아 지역의 교회들도 다른 모든 교회들과 마찬가지로 세상 가운데 존재하는 교회였다. 그 교회에 속한 성도들도 우리처럼 노동하며 먹고 생활하는 가운데 일상적인 활동을 하면서 매주 교회로 모여 주님의 언약과 은혜 가운데 하나님을 찬미하며 참된 소망을 확인했던 것이다. 그렇지만 그들이 살던 시대와 지역은 다른 여타의 시대 및 지역과는 다른 독특성을 띠고 있었다. 우리시대의 교회들도 지역에 따라 많은 차이가 난다. 어떤 지역의 성도들은 현대문명의 혜택을 받으며 평안한 삶을 누리는가 하면 또 다른 어떤 지역의 성도들은 전혀 그렇지 못하다. 또한 자유민주주의 지역에 살면서 기독교적 배경을 가지고 있는 국가에 존재하는 교회가 있는가 하면, 공산주의나 이슬람 혹은 힌두교와 같은 사회적 배경 가운데 존재하는 교회들도 있다. 이처럼 소아시아 지역에 존재하던 교회들도 매우 독특한 사회환경 요소를 가지고 있었는데 우리는 그것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물론 우리는 마지막 사도의 직접 가르침을 받던 소아시아 지역 교회의 유일성을 염두에 두어야만 한다.
우선 소아시아 지역은 전 로마제국 가운데서 가장 야성(野性)이 강하고 주민들의 의식이 깨어있는 지역 중 하나였다. 당시 권력을 장악하고 있던 로마와 그에 강점 당한 상태였지만 역사적 자존심을 가지고 있던 헬라의 정서적 대립관계에서도 우리는 그 점을 충분히 감지할 수 있다. 나아가 당시의 정치, 사회적 정황은 매우 억압적이었으며 힘의 논리가 지배했을 뿐 아니라 경제적으로도 일반인들은 생활하기에 어려웠다. 그러므로 전반적으로는 사람들이 가난했으며, 기독교인들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이었므로 신앙의 양심을 지키려 하면 다른 일반시민들 보다 더욱 어려운 삶을 살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요한계시록이 기록될 당시에는 유대지역에서 발생한 당시 특별한 정치적 상황으로 인해 기독교인들이 더욱 심한 억압을 당하며 감시의 대상이 될 수 밖에 없었던 시대였다.
당시의 교회는 사회적 입장에서 본다면 전반적으로 매우 유약한 상태였다. 그런 상태에서 복음을 가장한 거짓사상이 교회 가운데로 진입하는 것은 성도들이 대처해야 할 가장 힘든 일이었다. 그러므로 교회 내부에 조성되는 이단사상으로 인한 위협으로 부터 복음을 지키기 위한 노력은 더욱 절실할 수 밖에 없었다. 우리가 여기서 우선적으로 정리해 보아야 할 내용은 교회의 순결을 위협하는 기독교 내부의 다양한 이단사상들이다. 그들 가운데도 오늘날처럼 율법주의, 세속주의, 자유주의, 혼합주의 등의 이단사상이 교회를 직접 위협하고 있었던 것이다.
스스로 하나님을 가장 잘 믿는다고 생각하며 창조사역이나 아담의 존재, 노아홍수, 아브라함, 모세 등 성경의 진리성과 역사성을 받아들인다고 주장하지만 사실은 자기 종교적 신뢰에 빠진 유대인들의 율법주의는 그 중 가장 경계해야 할 대상이었다. 그들은 성경을 강조하면서도 성경의 가르침을 전혀 깨닫지 못하는 자들이었다. 그리고 이방인의 종교사상을 교회 가운데로 끌어들이기를 주저하지 않는 니골라당(계2:6,15)이나 우상제물을 먹고 돈으로 신앙사상을 대체하려는 발람의 본을 따르는 자들(계2:14), 그리고 성공 지상주의적이라 할 수 있는 이세벨 사상의 유혹(계2:20) 등은 세속주의와 혼합주의로써 소아시아의 교회들을 위협하고 있었다. 이단자들은 그렇게 하는 것이 지혜라 생각했으며 그렇게 함으로써 이룩되는 교회의 부흥을 성공으로 주장했을 것이다. 그것은 구약시대의 아합왕이 민족부흥을 꿈꾸며, 그 아내 이세벨이 이스라엘의 번영을 위해 바알과 아세라신을 섬기는 사제들을 두던 혼합주의와 다르지 않은 것이다.
아울러 당시에는 주변의 많은 이방신 사상이 있었다. 그리스의 여러 신들에 대한 종교사상이 일반인들에게 편만했으며 특히 아데미 여신숭배(행19:23-25, 참조), 제우스와 헤르메스 숭배(행19:35) 사상은 보편적이었다. 소아시아에 살던 사람들 역시 그런 이방신 사상에 직접 노출되어 있었을 것이며 성도들 중 다수는 복음을 알기 전 그런 신들을 섬겼을 것이다. 아직 신앙이 어린 성도들은 이 세상에서의 번영을 바라며, 마치 하나님이 다른 이방신들처럼 인간의 풍요를 위해 존재하는 것인 양 오해하기도 했을 것이다. 교회는 잘못된 율법주의와 이방종교의 영향을 받은 거짓 사상을 드러내는데 적극적이어야 했지만 소극적 반응을 보이는 지도자들도 많이 있었던 것이다.
또한 우리가 중요하게 생각해야 하는 것은 당시 소아시아 지역 사람들의 정신적 사고 저변에 깔려 있던 농축된 철학사상이다. 그런 철학사상들은 로마제국의 전 지역에 퍼져있었겠지만 특히 소아시아 지역은 더욱 심했을 것이다. 때로 윤리적일 수 있으며 때로 합리적일 수 있는 철학적 사상들이 당시의 성도들의 신앙에 직, 간접적인 위협요소로 존재했을 것이란 사실을 결코 간과해서는 안된다.
소아시아와 그 인근지역은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전반적인 철학사상의 본거지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소아시아 지역이 이방 철학사상의 본거지라 말하는 것은 그곳에서 다른 불신자들과 더불어 일상생활을 하는 성도들에게 엄청난 영향을 끼쳤음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바 탈레스(BC624-546)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시기 수백년 전에 살았던 사람으로 오늘날 철학의 아버지라 일컬어지고 있다. 그는 자연주의 철학자로서 밀레투스 출신이므로 그를 추종하는 학자들을 밀레투스 학파라 일컫는다. 그들이 주장하는 사상은 한마디로 말해 다양한 진화론적 사상이라 보면 된다. 그런 사상을 가진 자들은 우주만물의 근원이 무엇인가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가지고 그것을 신앙화하였다. 그런 사상의 발생지라 할 수 있는 밀레투스는 에베소와 지근의 거리에 있다. 사도바울이 세 번째 전도여행을 마치고 예루살렘으로 돌아가는 길에 밀레도에서 에베소 장로들을 불러 교회를 부탁하던 일을 우리가 기억하고 있다(행 20:17-38).
그리고 소아시아에는 유명한 피타고라스(BC582-497)의 고향이 있다. 사도행전에 보면 바울이 방문한 적이 있는 사모스 섬이 그의 고향이다.28) 그 사모스섬은 요한이 유배되었던 밧모섬과 매우 가까운 거리에 있으며 에베소와도 바로 보일만큼의 근거리에 있다. 피타고라스는 일반적으로 수학자로 알려져 있지만 사실은 철학자이다. 그 당시에는 모든 학문이 철학이었던 것이다. 피타고라스는 소위 법칙철학의 창시자라 할 만한데 그의 주장은 우주 만물에는 일종의 법칙이 있다는 것이다. 즉 주기에 따라 운행하는 천체의 움직임이라든지 날마다 해가 뜨고 지는 것, 조수간만의 차이, 사계절, 인간의 출생과 사망, 꽃의 피고 짐 등 모든 것에는 법칙이 있으며 그 법칙이 있게 한 ‘그 무엇’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를 유신론적 철학자라 부른다. 그렇다고 우리는 피타고라스의 유신론적 철학사상이 탈레스의 진화론적 철학사상 보다 더 건전한 것으로 볼 수 없다. 그 둘 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위험한 사상인 것이다.
또한 우리가 잘 아는 아리스토텔레스(BC384-322)는 소아시아 지역인 앗소와 미둘레네에 학교를 세우고 후진을 양성했다. 주님 오시기 몇 세기 전의 일이었다. 그는 아테네에서 연구하며 활동했으나 나중 소아시아지역으로 와서 후진양성을 하며 학문활동을 하던 철학자였다. 특히 그의 학교가 있던 미둘레네는 레스보스섬의 도시로서 당시 레스보스는 도덕적으로 매우 타락한 곳이었다.29)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은 매우 실용적인 학문으로서 현실지향적이라 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그 인근에는 역사의 아버지라 일컬어지는 헤로도투스(BC5C)의 고향 할리카르나소스가 있으며, 의학의 아버지라 불리우는 히포크라테스(BC460-370)의 고향 코스섬이 있다. 이러한 모든 지역은 사도바울을 비롯한 많은 성도들이 머물던 지역들이기도 하다. 또한 북쪽 흑해연안에는 철학에서 회의주의 혹은 견유학파라 불리는 디오게네스(BC404-323)와 그의 제자들이 본거지를 삼고 있던 시노페가 있다. 사도교회 시대 본도에 있던 교회들에 관한 형편을 우리는 베드로전서를 통해 알고 있다.
그 외에도 소아시아 지역에는 호메로스(BC700년경)라든지 이솝(BC6C전반)과 같은 고대에 유명한 자들이 살던 곳이다. 호메로스의 일리아드와 오디세이는 지금까지 세계 최고의 명작으로 뭇사람들의 관심을 끌고 있으며 이솝 우화는 전 세계 어린이들에게 엄청난 영향을 끼치고 있다. 또한 당시 사회에 퍼져있던 사상 가운데는 스토아학파와 에피큐로스 학파(행17:18)를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이 사상들은 원래 아테네에서 일어났지만 아테네에만 머물러 있었던 것은 아니다. 그들이 주장하는 금욕주의나 쾌락주의 사상은 로마제국의 전지역을 통해 여러 형태로 변모를 되풀이 하면서 사람들의 가치관에 영향을 끼쳤던 것이다.
이러한 내용들을 살펴보면서 우리는 소아시아 지역이 과연 어떤 철학 사상적 배경을 가지고 있던 지역이었는가 하는 것을 충분히 감지할 수 있다. 이제 중요한 것은 우리가 요한계시록의 일곱 교회들의 형편을 생각할 때, 이런 모든 사상들이 당시 소아시아에 살고 있던 일반 사람들에게 농축되어 있었음을 결코 간과할 수 없다는 사실이다.30) 성도들 역시 복음을 알지 못하던 때 자기도 알지 못하는 사이 그런 사상들의 영양을 받았을 것이며 신앙이 어리거나 잘못된 사람들은 그런 사상을 종교적으로 변형시켜 교회로 도입하고자 했을 것이다. 사도요한이 교회를 향해 근절하도록 요구한 사상들 속에는 그런 사상들도 들어 있었음에 틀림없다.

(2) 그리스도가 교회의 사자에게 주는 메시지, 곧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
요한계시록 2,3장을 통해서 일곱 교회에 주시는 말씀은 다음과 같은 구조를 띠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교회 사자에게 말씀하심(선언) // 예수 그리스도의 속성과 존재 // I know your works(KJV) // 각 교회들에게 일차적으로 주어지는 메시지 : 인정과 책망, 권면 // 이기는 자에게 주시는 약속: 구속사적 의미 //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선언)>

앞에서도 언급한 것처럼 요한계시록 2,3장에서 하나님께서는 일곱 교회들의 각 형편을 구체적으로 드러내며 메시지를 주고 계시지만 사실은 ‘하나의 교회’에 말씀하고 계신다.31)
우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각 교회의 사자들에게 선언적 메시지를 주고 계신다. 사도요한은 주님의 계시를 전하면서 각 교회의 ‘사자’(계2:1;8;12;18;3:1;7;14)에게 메시지를 전하고 있는데 좀더 엄밀한 의미로는 그리스도께서 직접 말씀하고 계신다. 여기서 말하는 ‘사자’란 무엇을 의미하는가? 한글개역성경과 새번역 성경을 제외한 대다수 성경번역들은 ‘사자’를 ‘천사’로 번역하고 있으며 대다수 다른 외국 번역성경들 역시 ‘천사’(angel)라 번역하고 있다.32)
여기의 천사는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영적인 존재인 하늘의 천사를 의미하지 않는다. 신약성경은 종종 하늘의 천사들 뿐 아니라 사람을 지칭하여 ‘천사’ 혹은 ‘사자’라 표현하고 있다.33) 필자가 이해하기로는 여기의 천사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사역자 즉 말씀을 맡은 교사를 의미한다.34) 우리는 여기서 말씀을 선포하는 교회의 교사는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직접 주님의 음성을 들어야만 한다는 사실을 볼 수 있다. 즉 공예배시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설교자는 자의적으로 설교할 것이 아니라 성경을 통해 듣는 하나님의 음성을 교회 가운데 선포하여 전달하는 것이다. 이는 우리시대의 목사가 공예배 시간 선포하는 말씀선포에 계시적 의미가 담겨 있어야 하는 것은 바로 그것과 조화되는 개념이다.
그리고 요한은 각 교회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속성과 존재에 관한 묘사를 하고 있다. 주님께서는 각 교회에 메시지를 주시면서 그리스도가 어떤 존재인지 다양한 묘사를 하고 있는 것이다. 에베소 교회에게는 ‘일곱 별 일곱 금촛대 사이를 다니시는 이’(계2:1)로 묘사하고 있으며, 서머나 교회를 향해서는 ‘처음이요 나중이요 죽었다가 살아나신 이’(계2:8), 버가모 교회를 향해서는 ‘좌우에 날선 검을 가진 이’(계2:12), 두아디라 교회를 향해서는 ‘그 눈이 불 같고 그 발이 빛난 주석과 같은 하나님의 아들’(계2:8), 사데 교회에는 ‘일곱 영과 일곱 별을 가진 이’(계3:1), 빌라델비아 교회에는 ‘거룩하고 진실하사 다윗의 열쇠를 가지신 이’(계3:7), 그리고 라오디게아 교회에는 ‘아멘이시오 충성되고 참된 증인이시오 하나님의 창조의 근본이신 이’(계3:14)로 묘사하고 있다.
주님께서는 여기에서 왜 각 교회에 묘사되신 대로 특별한 모습을 보여주시고자 했던 것일까? 일곱 촛대 사이에 계시는 인자(人子) 곧 그리스도에 대한 이런 묘사는 이미 요한계시록 1:13-20에서 전체적으로 묘사되고 있는 바이다.35) 한 주님에 대한 다양한 모습을 이미 앞부분에서 소개하신 후 다시금 각 교회들에게 달리 나누어 묘사해 보이신 것은 일곱교회가 각기 상이한 형편에 놓여 있기는 하나 하나의 교회임을 보여주시는 것과 동시에 주님이 각교회에 구체적으로 역사하고 계심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주님께서 그 다음 각 교회들을 향해 공통적으로 하시는 말씀은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I know your works, 계2:2,9,13,19;3:1,8,15)36)라는 말씀이다. 이 말씀 가운데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각 교회들에 대해 직접적인 관심과 사랑을 가지고 계심이 그대로 나타나고 있다. 여기서 ‘행위’(works)라는 말은 어떤 행동을 가리키고 있다기 보다 전체적인 삶 자체를 지칭하고 있는 것이다.37)
우리는 여기서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에 대한 관심과 더불어 그의 철저한 사랑의 감독을 깨닫게 된다. 지상에 존재하는 그 어떤 교회도 주님의 눈을 벗어날 수 없으며 그 앞에 드러나지 않을 것이 없다. 세상의 많은 사람들이 교회의 외형을 보고 판단하게 될지 모르지만 주님께서는 교회의 내면들을 속속들이 들여다 보고 계시는 것이다. 그런 주님께서 각 교회들에게 메시지를 전함으로써 소아시아 전체 교회에 일차적으로 메시지를 주고 계신다. 주님께서는 각 교회들의 상이한 형편을 감안하시고 각교회에 말씀하시면서 동시에 그것을 소아시아 전체 교회와 우주적이며 하나인 교회에 메시지를 주고 계시는 것이다.
각 교회들에 주어진 내용들 가운데는 인정, 칭찬, 격려, 책망, 교훈, 요구, 권면, 경고, 약속 등이 들어 있다. 주님께서는 각 교회들이 제각기 처한 상황 가운데서 순종하고 있는 면들에 대해서는 칭찬을 하신다. 각 교회들의 행위, 수고, 인내, 환란과 궁핍을 견딤, 사랑, 믿음, 섬김의 자세 등을 인정하시는 것이다. 그리고 주님께서 가장 중요한 것으로 말씀하시며 칭찬하시는 것은 교회의 순결 유지이다. 그 순결유지는 죄악을 분리시킴으로써 가능케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주님께서는 거짓교사와 자칭 사도라 하는 자들을 시험하고 그들의 이단성을 드러내는 일(계2:2), 유대인이라 주장하지만 사실은 사탄의 모임인 자들의 훼방에 대해 싸워 이긴 일(계2:9,10), 그리고 옷을 더럽히지 않고 흰옷을 유지한 점(계3:4) 등에 대해 칭찬하신다. 그리고 교회를 어지럽히는 그런 자들의 힘과 그들로 인한 고난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격려하신다.
또한 주님께서는 ‘처음 사랑’을 버린 일(계2:4), 이단사상을 용납하는 일(계2:14,20), 차지도 뜨겁지도 않아 미지근한 상태(계3:15) 등을 책망하셨다. 교회 가운데 침투해 들어오는 각종 이단 사상들을 대처해서 싸우는 일은 그것 자체로서 처절한 전투였다. 그러므로 교회는 항상 깨어 있어 하나님 앞에 서있는 자신의 모습을 정확하게 직시해야 한다. 소아시아의 교회들 가운데는 그에 잘 대처하는 교회가 있기도 했으나 그렇게 하지 못하는 예들이 많았다. 그로 인해 주님의 칭찬을 받는 교회가 있는가 하면 책망을 듣기도 했다. 그리고 어떤 교회와 성도들은 궁핍한 삶을 살았으나 부자로 인정받았는가(계2:9) 하면, 스스로 부자라 생각했지만 하나님 보시기에는 가난하고 불쌍한 자들(계3:7)도 있었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부(富)란 단순히 물질적인 것 뿐 아니라 영적인 문제와 연관된 것이다. 그리고 실상은 생명이 없어 죽은 상태이면서 살았다 하는 이름만 가진 위선적인 모습을 가진 자들(계3:12)에 대해서도 말씀하신다.
또 주님께서는 교회들을 향해 ‘회개하고 처음행위를 가지라’(계2:5)고 요구하시며 ‘죽기까지 충성을 다하라’(계2:10)고 요구하신다. 그리고 ‘회개하라’(계2:5,16;3:3,19), ‘너희에게 있는 것을 내가 올 때까지 굳게 잡으라’(계2:25), ‘가진 것을 굳게 잡아 면류관을 빼앗기지 말라’(계3:11), ‘내게서 금, 흰옷, 안약을 사서 새롭게 하라’(계3:18)고 요구하셨다. 이는 세상에 존재하는 교회가 끊임없이 주님께로 향하는 자세를 견지하지 않으면 안되는 긴박성을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회개하지 않고 잘못된 자리에 지속적으로 머물게 될 경우 있게 될 두려운 심판에 대해 경고하신다. 주님의 말씀을 들어 순종하지 않는 자들이 어떻게 될 것인지 말씀하고 계시는 것이다. ‘네 촛대를 옮기리라’(계2:5), ‘아니면 내 입의 검으로 그들과 싸우리라’(2:16),38) ‘회개치 아니하면 큰 환란 가운데 던지리라’(계2:22), ‘내가 도적같이 이르리라’(계3:3), ‘내가 토해 내리라’(3:15). 이러한 주님의 경고는 일부가 아니라 전체 교회들에 해당되는 말씀이다.
주님의 요구에 순종하는 것이 하나님 앞에 살아가는 성도로서 주님을 찬양하는 기본 조건이 되며 그들에게는 하나님의 새로운 약속이 주어지게 된다. 하나님께서는 ‘이기는 자’에게 놀라운 약속을 주셨다. ‘이기는 것’ 즉 승리란 세상과 이단자들에 대한 궁극적인 전투 결과를 말하는 것이다. 여기서 ‘이기는 자’는 단수로서 그 의미가 지역적 교회 단위임을 보여주고 있다. 이는 이 세상에서 다양한 역사적 지역 교회에 속한 성도들이 그 도리를 다하며 살아가는 것이 결코 쉽지 않음을 말하고 있으며 그것은 곧 피흘림을 의미하고 있는 것이다.
지상의 성도들에게는 궁극적인 평화와 기쁨이 약속되어 있지만, 이 세상에서 누리게 되는 일반적인 평화나 기쁨, 혹은 번영은 아니다. 그리고 단순히 사랑이 넘치고 즐거움이 넘치는 그런 교회를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지상의 교회가 천국의 기쁨을 미리 맛본다 할지라도 그것은 이 세상에서 발생하는 현상들 때문이 아니라 주님께서 허락하시는 약속으로 인한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각교회들에 허락하신 그 약속들은 ‘이기는 자에게’(to Him that overcometh, 계2:7,11,17,26;3:5,12,21)만 주어지는 궁극적인 하나님의 선물이다.
우리가 여기서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은 이기는 자들에게 주어진 약속이 하나님의 구속사적 기틀 위에서 주어지는 언약적 선물이라는 점이다. 이기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낙원에 있는 생명나무 과실(에베소교회, 계1:7)과 둘째 사망의 해를 피함과 생명의 면류관(서머나 교회, 계2:10,11), 만나와 흰돌 위의 새 이름(버가모 교회, 계2:17), 만국을 다스리는 권세, 철장으로 다스림과 새벽별(두아디라 교회, 계2:26-28), 흰 옷과 생명책의 이름(사데 교회, 계3:4,5), 새 예루살렘의 이름과 ‘나’의 이름(빌라델비아 교회, 계3:13), 하늘의 보좌(라오디게아 교회, 계3:21)가 약속되었다. 이는 각 지교회들에게 제한적으로 주어진 이념적 약속이 아니라 전체 지상교회에 주어지는 하나님의 실질적인 영원한 생명의 약속이다. 즉 각 교회들에게 주어지는 메시지를 통해 구속사의 통합적 의미를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에베소 교회에 주어진 언약적 성취인 낙원의 생명나무 과실이 에덴동산과 연관된 것이라면 서머나 교회에 주어진 둘째 사망에 연관된 언약적 성취는 노아 홍수시대 및 족장시대와 연관이 있다. 버가모 교회에 주어진 언약인 만나와 흰돌은 시내광야에서의 언약의 표징인 만나와 모세의 두 돌판과 연관되며, 두아디라 교회에 주어진 언약인 권세와 철장, 새벽별은 다윗언약과 연관이 있다. 그리고 사데 교회에 주어진 흰 옷과 생명책의 이름에 연관된 언약은 이스라엘 왕국시대의 배교와 바벨론 유수 및 성전의 재건을 통한 회복과 관련이 있으며, 빌라델비아 교회에 주어진 새 예루살렘 및 주님의 이름과 연관된 언약에서는 예수 그리스도로 인한 언약의 성취가 드러나며, 라오디게아 교회에 주어진 하늘의 보좌와 연관된 언약의 말씀은 교회시대와 궁극적인 하나님 나라의 회복에 연관된 언약이다. 그러므로 소아시아 일곱 교회에 주시는 언약의 말씀들은 하나님의 경륜을 통한 구속역사를 보여주며 그로 인해 이룩된 교회 위에 계시록 4장 이하의 ‘천상의 영광’이 임하게 되는 것이다.
주님께서는 각교회들에게 메시지를 주신 후 그것이 성령께서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임을 확증하고 계신다. 즉 ‘그리스도가 사자에게’ 한 말씀을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과 동일시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여기서 눈여겨 보아야 할 점은 ‘사자’라고 하는 단수와 ‘교회들’이라고 하는 복수이다. 즉 말씀을 받는 사자가 단수로 묘사되고 있으면서 동시에 그 말씀을 들어야 할 교회는 단수가 아니라 복수인 여러 교회들로 표현되고 있는 것이다.
각 교회들에게 주어지는 메시지의 처음에는 공히 그리스도께서 단수인 ‘사자’에게 말씀하시는 것으로 묘사되고, 마지막에는 공히 성령께서 복수인 ‘교회들’에게 말씀하시는 것으로 되어 있음은 무엇을 의미하고 있는 것일까? 우리는 여기서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 전달하는 교사는 어느 시대 어느 지역에 있는 교회의 교사라 할지라도 동일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전해야 한다는 점을 알게 된다. 또한 그 말씀을 듣는 교회들은 상이한 시대와 지역에 따라 실로 다양한 형편에 놓여있지만 동일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해야 함을 잘 묘사하고 있는 것으로 이해된다. 이렇게 함으로써 다양한 시대와 지역 형편 가운데 존재하는 교회들의 통일성을 유지하게 되는 것이다.
또한 요한계시록 2,3장은 예전적 의미에서 이해해야할 필요가 있다. 계시록 4장 이후에 기록된 천상의 경배와 찬양의 의미를 반영하는 기초로서의 교회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각교회들을 통해 절차상 나눔의 의미와 더불어 통합의 의미가 동시에 연결되어 있는 것이다. <하나님 - 인자같은 이 - 교회의 사자를 부르심 - 예수 그리스도의 속성과 존재에 대한 다양한 표현들 - “I know your works” - 각 교회들을 향한 독특한 교훈의 말씀들 - 이기는 자들에게 주어지는 언약의 확인 -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이는 우주적 교회에 속한 우리 시대의 지교회들의 의미와 함께 하나님을 경배하는 예배절차에 적용되어 이해되어야 하는 내용이다.


4. 결론
우리는 요한계시록 2,3장 소아시아 일곱 교회를 중심으로 한 계시의 말씀 가운데서 무엇을 배우는가? 우리는 우선 요한계시록을 구속사를 배경으로 한 교회론적으로 이해해야 할 필요가 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창조된 세계가 사탄에 의해 망가뜨려졌지만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몸된 교회를 통해 다시금 그 영광을 회복하시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요한계시록을 통해 교회의 궁극적 승리와 천상의 영광을 지상 교회 가운데 계시하고 있다. 그러므로 교회는 단순히 성도들 간의 친교를 위한 교제(fellowship) 공동체가 아니라 말씀과 성례를 통한 거룩한 교제(Holy Communion)공동체여야 한다. 그 교회는 항상 예배를 통해 천상의 영광을 반영하게 되고 성도들은 그 은혜를 누리게 된다.
소아시아 일곱 교회는 일곱 개로 완전히 분리된 별개의 교회들이 아니라 상호 연결되어 있는 ‘하나’의 공교회이다. 그리고 그 ‘하나’의 공교회는 또다시 전체적으로 ‘하나’인 우주적 교회에 속해 있다. 그러므로 요한계시록 2,3장의 여러 교회들에 주어진 말씀을 평면적으로 분할하거나 단순히 역사적으로 구분하려는 생각은 주의해야 할 일이다. 요한계시록 4장 이후의 말씀은 하나의 공교회인 소아시아 교회와 하나님의 구속사를 바탕으로 한 더 큰 하나의 교회인 전체 지상교회에 주어진 계시의 말씀이다. 즉 소아시아 일곱교회는 전체적으로 하나인 우주적 교회에 대한 대표성을 띠는 것으로 보아야 하는 것이다.
요한계시록 2,3장에서 우리는 교회가 주님으로부터 조성된 공동체임을 알 수 있다. 주님께서 마태복음 16장의 가이사랴 빌립보 약속에서 베드로를 비롯한 제자들에게 “내가 이 반석(베드로) 위에 나의 교회를 세우리라”(마16:18)고 하신 후 그의 십자가 사역과 오순절 성령이 오심으로 인해 교회가 세워졌다. 사도교회 시대를 거쳐 예루살렘 성전파괴와 함께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되는 지상의 교회가 하나님의 영광을 소유한 공동체로서 어떤 고난의 형편 가운데 있으며 어떤 소망의 자세를 지녀야 할지에 대해 계시의 말씀을 주신 것이다.
주님께서는 지상의 교회가 소유해야 할 구체적인 천상의 영광을 교회 가운데 계시하고 계신다. 참된 교회는 세상철학과 이단 사상의 위협으로 인해 끊임없이 핍박을 받고 고난을 당하지만 그 가운데서 인내함으로써 투쟁하며 피흘리기 까지 선한 싸움을 경주해야 한다. 그로 말미암아 교회의 순결을 지키며 주님께서 허락하신 약속 가운데 주님을 찬양하게 되는 예배공동체를 유지해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요한계시록 2,3장에서는 지상의 교회가 순결을 회복하여 유지하도록 요구하고 있다. 그 교회인 하나님의 백성이 예수 그리스도의 신부로서 영원한 하나님의 영광에 참여하게 하기 위해서이다.
우리가 결론을 맺으면서 잘 생각해 보아야 할 역사적 의미는, 예루살렘에서 소아시아 지역으로 지상교회의 중심이 이동해 간 사실과, 그림자인 예루살렘 성전에서 온전한 참된 성전인 주님의 몸된 교회로 중심이 이동하게 된 역동적 관계이다. 즉 예루살렘 성전의 파괴와 소아시아 지역에 있는 마지막 사도인 요한으로 말미암은 계시 완성의 관계를 통해 지상교회에 대한 하나님의 놀라우신 경륜을 배우게 되는 것이다. 예루살렘 성전이 일차적으로 언약을 성취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역이 완성되었을 때 그로부터 제사와 제단의 역할은 종료된다. 그러나 그 후 AD70년 예루살렘 성전이 완전히 파괴될 때 까지는 그 성전이 여전히 구속사적 의미를 함유하고 있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특별히 세우신 사도들의 임무가 종료되고 마지막 사도인 요한에게서 최종적 신약성경의 완성이 이루어졌을 때 그것이 새로운 시대 교회의 본질적 지침이 된다. 그러므로 예루살렘 성전의 파괴와 신약성경의 완성은 동시에 이해되어야 하는 것이다.
또한 구속사적 의미를 배경으로 한 각 교회들에게 주어진 메시지와 예배를 위한 예전 사이에 깊은 연관이 있음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이는 요한계시록 4장 이후에 계시된 하나님의 영광이 지상의 교회를 통해 반영되어 드러나게 되는 것과 관련되는 것이다. 즉 천상의 영광이 계시록 2,3장의 지상 교회에 주어진 질서 위에 마치 구름처럼 뒤덮게 되는 것으로 묘사될 수 있다.
우리가 요한계시록 2,3장에서 이와 함께 얻어야 할 중요한 교훈은 우리 시대에 팽배한 개교회주의의 극복이다. 천상의 영광을 누리며 살아가야 할 주님의 백성인 교회는 “I know all about you”라고 하시는 주님의 말씀에 귀기울여야 하며, 그의 은혜를 의지하는 가운데 교회를 위협하는 이단사상과 세상의 풍조에 대항하는 전투를 쉬지 말아야 한다. 이기는 자들에게 천상의 영광과 함께 허락된 승리의 약속은 하나님을 경배하는 예배공동체로서 교회에 주어진 유일한 기쁨이요 소망이다. “아멘 주 예수여 속히 오시옵소서!”(계2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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