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 개혁을 성공시키는 길 (열왕기하 23장 1-20절)
< 개혁이 필요한 한국 교회 >
며칠 전 사우나에 가자 한 직원이 말했습니다. “선생님! 저는 도대체 이해가 안 돼요? 왜 사람들이 화장실에서 담배를 피우는지 모르겠어요. 저들도 집에서는 자녀들에게 담배 피우지 말라고 하겠지요?” 그렇게 말과 행동이 다른 얘기를 하다가 C 목사님 얘기까지 했습니다. 저는 묵묵히 듣고만 있었습니다. 며칠 전 언론에는 검찰로부터 5년 구형을 받은 C 목사님이 실형을 받을 가능성이 크다고 했습니다. 안타까운 일입니다. 사람은 그저 사람이기에 아무리 대단해도 하산의 때를 놓치면 강제하산을 당합니다.
얼마 전에 나온 <개역개정> 성경을 보면 번역과 표현에서 아쉬운 점이 곳곳에 꽤 있습니다. 어차피 사람의 번역이기에 완벽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너무 서둘렀다는 아쉬움이 있습니다. 가장 아쉬운 것은 C 목사님 곡이 2곡이나 새 찬송가에 들어간 점입니다. 그 곡을 볼 때마다 마음이 찔려서 부르기가 꺼려집니다. 찬송가에 채택될 정도의 곡이면 돌아가시고 일정기간 지난 분의 곡이 채택되어야 그런 고민이 줄어들 것입니다.
한국 교회는 지난 30년의 융성기를 거쳐 지금은 정체기에 접어들었습니다. 그것은 변화가 필요하다는 뜻입니다. 변화가 없으면 도태됩니다. 한때 잘 나가는 대기업도 평균 수명이 30년 정도라고 합니다. 그러나 가끔 50년 혹은 100년 이상 건재한 기업들도 있습니다. 그런 기업들은 끊임없이 자기개혁을 이뤄낸 기업들입니다. 호황일 때 불황을 대비하고 불황일 때 호황을 준비하며 경영혁신을 이뤘기에 오래 건재하게 된 것입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무리 대형교회도 30년 정도 부흥기를 보내면 대개 정체 및 쇠퇴의 길로 들어섭니다. 경직성이 커지기 때문입니다. 지금 한국 교회가 전반적으로 그런 과정을 겪고 있습니다. 폭발적인 교회성장 시대는 갔고 지어진 교회들조차 비어가고 있습니다. 개혁이란 말을 쓰면 주로 남의 개혁만 요구하는 경향이 있기에 거부감이 들어서 쓰기 싫지만 그래도 지금 한국 교회가 개혁되어야 하는 것은 사실입니다.
< 교회 개혁을 성공시키는 길 >
본문에는 요시야 왕의 종교개혁이 나옵니다. 그러나 결국 미완의 개혁으로 끝납니다. 요시야 왕의 종교개혁의 좋은 측면과 아쉬운 측면을 동시에 살펴보면서 교회 개혁을 성공시키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4가지 원리를 살펴보겠습니다.
1. 말씀에서 시작해야 합니다
요시야 왕 18년 어느 날, 왕이 서기관 사반을 보내 성전을 수리하게 했습니다. 그때 대제사장 힐기야가 성전에서 율법책을 발견하고 그것을 사반에게 주었습니다. 사반이 그 율법책을 읽어주자 요시야 왕은 옷을 찢었습니다. 그리고 유다와 예루살렘의 모든 장로를 모으고 성전에 올라가서 거기 모인 백성들과 제사장들과 선지자들에게 그 율법책의 말씀을 읽어주었습니다(1-2절). 결국 요시야 왕의 종교개혁은 말씀 운동에서 시작되었습니다.
루터의 종교개혁도 말씀운동에서 시작되었습니다. 1517년 10월 31일 루터는 독일 비덴베르그 대학 정문에 95개 조항을 쓴 대자보를 붙여 속죄권을 팔던 교향청의 부패를 비판했습니다. 그때 교황 레오 10세는 베드로 성당의 건축재정이 딸리자 조상 이름으로 속죄권을 사면 연옥에 갇힌 죄인들이 다 나와 낙원으로 올라간다는 이교적인 주장으로 교인들을 속였습니다. 또한 당시의 한 건축헌금 징수자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헌금함에 돈을 땡그랑 넣을 때 그 땡그랑 소리와 함께 연옥에 있는 형제들이 해방된다.”
그런 부패상을 비판한 루터의 95개 조항은 크게 2가지로 요약됩니다. 첫째, 오직 성경만이 하나님의 말씀이고 믿음과 행위의 표준이다(오직 성경). 둘째, 율법이나 선행이나 고해성사가 아닌 십자가의 은혜를 믿음으로 구원받는다(오직 믿음). 그렇게 교황청을 비판하고 제일 먼저 한 일이 성경번역입니다. 당시에는 신부들만 라틴어로 된 성경의 절대해석권을 가졌습니다. 그래서 성경을 번역하면 죽였습니다. 그 성경을 평신도들에게 돌려주려고 먼저 라틴어 성경을 독일어로 번역한 것입니다.
참된 개혁은 말씀운동에서 시작되어야 합니다. 성경을 경시하게 하는 사탄의 유혹에 넘어가지 말아야 합니다. 사랑의 사도 요한은 평소의 성품과는 달리 강한 표현을 써서 말씀 밖에 있는 이단선생은 집에 들이지도 말고 인사도 하지 말라고 했습니다(요이 1:10). 이단과 사이비의 제일 특징이 무엇입니까? 성경의 절대성을 훼손하려는 태도입니다.
성경에 없는 말을 해서 성경 밖으로 벗어나지 말라고 하면 거짓 선생들은 궤변을 펼칩니다. “고양이가 성경에 없는데 그럼 고양이란 동물이 없는 것입니까? 성경에 있는 것보다 성경에 없는 것이 훨씬 더 많습니다. 성경만 가지고는 못 삽니다. 성경을 우상화하지 마십시오. ‘성부 성자 성령’의 삼위일체 대신에 ‘성부 성자 성경’을 내세우면 잘못입니다. 교황에게 절대 권위를 부여하면 잘못인 것처럼 성경에 절대 권위를 부여하면 잘못입니다. 성경은 하나님과 연결시켜주는 도구입니다. 도구에 절대 권위를 부여하면 우상이 됩니다.”
성경을 교묘하게 훼손하는 논리적 비약으로 가득한 궤변입니다. “성경 밖으로 나가지 말라!”는 말은 “성경에 언급이 안 된 사물은 사물이 아니다.”란 말이 아닙니다. 또한 ‘성부 성자 성령’을 ‘성부 성자 성경’으로 대치시키는 표현을 했는데 성경과 성령은 대치되는 개념이 아닙니다. 또한 사람인 교황에게 절대 권위를 부여하는 것과 성경에 절대 권위를 부여하는 것은 전혀 차원이 다른 얘기입니다. 또한 믿음의 기본 원리가 담긴 성경을 인간적인 도구로 폄하해서 ‘성경의 우상화’란 표현으로 연결시키는 것은 논리에 맞지도 않습니다.
모든 세상의 원리 및 정의는 공리를 바탕으로 형성됩니다. 공리란 증명이 필요 없는 자명한 기초명제이자 모두가 진리로 받아들이는 대 원리입니다. 예를 들어, “하나님은 유일해야 전능한 하나님이다.”란 명제가 공리입니다. 하나님이 두 분 이상이 되면 상대적인 하나님이 되기에 ‘전능, 절대’란 말을 못 씁니다. 그 공리에 모순될 수 없어서 성부 성자 성령은 한분이란 삼위일체 사상이 나온 것입니다. 결국 삼위일체란 용어는 성경에 없어도 ‘전능하신 하나님, 유일하신 하나님’이란 무수한 표현 자체가 사실상 ‘삼위일체 하나님’이란 말과 같은 말입니다.
또한 기독교 신앙의 기본 공리는 성경입니다. 사람마다 막연하게 가진 하나님 개념을 구체화시켜서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을 참 하나님으로 믿는 것이 기독교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성경의 절대성을 주장하는 것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절대성을 주장하는 것과 같은 것이기에 ‘성경의 우상화’라는 표현은 ‘예수님의 우상화’라는 표현이 있을 수 없듯이 있을 수 없는 표현입니다. 왜 그런 논리적인 교묘한 비약을 통해 성경의 권위를 훼손합니까? 계시와 예언을 내세워 성경 원리에 어긋난 말을 자기 멋대로 하고 싶기 때문입니다.
성도는 말씀에는 귀를 열어야 하지만 기복주의와 무속신앙과 헛된 종말신앙과 같은 비성경적인 말들에는 귀가 꼭 닫혀야 합니다. 그리고 늘 성경 말씀을 지표로 삼으려고 해야 합니다. 역사적으로 이단들은 무수히 성경의 권위를 훼손하려고 했습니다. 그런 교묘한 작업에 넘어가 성경 말씀보다 특정인의 말에 귀가 더 솔깃해지지 말아야 합니다. 교회가 개혁되어 세상 변화의 초석이 되려면 말씀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1985년 거대한 악의 제국으로 여겨진 소련에 54세의 젊은 고르바초프가 서기장에 올랐습니다. 그때부터 소련은 달라졌습니다. 그 전의 지도자들은 기독교를 인민을 타락시키는 아편종교로 규정하고 성경만 가져도 강제수용소로 보냈습니다. 그러나 고르바초프는 그런 광기의 역사를 끝내고 성경배포와 성경읽기의 자유를 허락하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한 나라가 바로 서려면 최소한 성경의 십계명은 있어야 한다. 그런데 공산당 선배들이 성경을 금하면서 러시아 공산주의 운동은 망하기 시작했다.”
고르바초프는 어린 시절에 할아버지와 부모님들과 형제들이 함께 모여 비밀리에 성경을 읽는 가정에서 자랐습니다. 그때 할아버지가 성경을 읽어주면 고르바초프가 망을 보다가 인기척이 나면 그 사실을 알렸습니다. 그러면 할아버지는 성경을 얼른 벽에 걸린 액자 뒤에 숨겼고 모든 가족들은 차를 마시는 척 했습니다. 그렇게 자랐기에 나중에 소련의 변화를 선도할 수 있었습니다. 모든 참된 개혁은 성경 말씀운동에서 출발해야 합니다. 말씀을 가까이 하고 말씀대로 살 때 심령이 변하고 교회가 변하고 결국 세상도 변화될 것입니다.
2. 단호하게 추진해야 합니다
요시야 왕이 율법책을 읽어주고 단 위에 서서 여호와 앞에서 언약을 세웠습니다. 그리고 마음과 뜻을 다해 여호와께 순종하고 그의 계명을 지켜 율법책에 기록된 언약의 말씀을 이루게 하겠다고 했습니다. 그러자 백성들도 다 그 언약을 따르겠다고 했습니다(3절).
그 백성들의 호응을 힘입어 요시야 왕이 단호하게 종교개혁을 추진했습니다. 그리고 가장 먼저 바알과 아세라와 하늘의 일월성신을 위해 만든 모든 그릇들을 성전에서 내다가 예루살렘 바깥 기드론 밭에서 불사르게 했습니다(4절). 그리고 산당에서 우상을 숭배하는 제사장들을 폐하고 성전의 아세라 상을 기드론 시내에서 불사르고 빻아서 가루를 만든 후 그 가루를 부정한 곳으로 여겼던 평민의 묘지에 뿌렸습니다(5-6절).
또 성전 안에 있던 아세라 여 사제들의 처소였던 남창의 집을 헐었습니다(7절). 당시 남창은 그 여 사제들과 의식상의 성관계를 맺거나 동성의 상대 역할을 했는데 그런 행위를 성전에서 용납한 것은 그만큼 미신이 창궐하고 도덕성이 무너졌다는 뜻입니다. 또한 예루살렘 북쪽의 게바에서부터 유다 최남단의 브엘세바까지 유다 전역의 산당을 변소 및 쓰레기 처리장으로 만들었습니다(8절). 또한 산당 제사장들의 제사장 직무를 박탈했지만 그래도 무교병을 먹는 식사에는 참여할 수 있게 했습니다(9절).
또한 예루살렘 성 밖 ‘힌놈의 골짜기’에 있던 도벳 산당을 부수고 몰록 신에게 자녀를 불태워 바치는 의식을 금지시켰습니다(10절). 또한 태양신을 위해 드린 말들을 제거하고 태양 수레를 불살랐습니다(11절). 또한 아하스의 다락 지붕에 세운 제단들과 므낫세가 성전 두 마당에 세운 제단들을 다 헐어 가루로 만들어 기드론 시내에 뿌렸습니다(12절). 또한 예루살렘 앞 멸망의 산(감람산)에 세운 산당과 석상들을 부수고 사람의 해골로 그곳을 채웠습니다(14절).
더 나아가 그 종교개혁은 북 이스라엘 땅 벧엘로 확대되었습니다. 당시 앗수르의 쇠퇴기에 벧엘은 남 유다의 영향력 안에 있었기에 벧엘에 세워진 제단과 산당들까지 헐고 불사르고 빻아서 가루로 만들었습니다(15절). 그리고 산의 무덤에서 해골을 가져다가 제단 위에서 불살라 제단을 더럽혔는데 약 300년 전에 자신의 일을 예언한 하나님의 사람의 뼈와 그와 함께 묻힌 노선지자의 뼈는 그대로 두게 했습니다(16-18절). 또한 북 이스라엘의 산당들을 다 제거하고 그 산당 제사장들을 다 제단 위에서 죽이고 불사른 후 예루살렘으로 돌아왔습니다(20절).
거센 종교개혁의 광풍입니다. 고대에 미신이 성행할 때 우상을 그렇게 잔인하게 처리하면 저주받는다는 두려움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요시야 왕은 그런 우상들이 가치 없는 것임을 확실히 보여주려고 과감하게 부수고 가루로 만들고 해골들을 그곳에 버렸습니다. 그는 경건한 왕이었지만 단호할 때는 무서울 정도로 단호했습니다.
때로는 단호하게 선한 결단을 실천해야 합니다. 누군가 무속적인 저주를 하면 “죽으면 죽으리라!”고 하면서 더욱 담대하게 미신을 끊어내고 미신단체를 벗어나야 합니다. 안전지대만 고집하면 미신을 끊어낼 수 없고 인물도 될 수 없습니다. 인물들은 불굴의 용기를 가지고 어떤 위험도 개의치 않고 선한 길을 갑니다. 남들이 힘들고 위험하다고 할 때 장비를 챙기고 떠나는 단호함과 용기가 있어야 그를 통해 새로운 역사가 나타날 것입니다.
3. 기도로 준비해야 합니다
요시야 왕은 질풍노도처럼 개혁을 위해 물불을 가리지 않고 달렸습니다. 그러나 아쉬운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기도하는 시간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왕은 정신없이 이방 제단을 헐려고 열심히 다녔지만 그때 기도하면서 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처럼 아무리 시급한 일이 있고 아무리 바빠도 기도하면서 해야 합니다. 기도할 시간까지 없을 정도로 바쁘면 안 됩니다. 사실상 가장 바쁠 때가 가장 기도할 때입니다
종교개혁이 확산되면서 루터는 너무 바쁘니까 수면시간을 6시간에서 3시간으로 줄였습니다. 그때 그가 아내에게 말했습니다. “여보! 정말 바쁘오! 그래서 더 기도해야겠소.” 가장 바쁜 때가 가장 기도해야 할 때입니다. 기도 없이 어떤 일을 하면 좋은 작품이 나올 수 없습니다. 기독교는 기도교입니다. 신앙생활에서 여러 역설을 목격하지만 그 중에서 가장 놀라운 역설은 기도하지 않고도 복을 받을 수 있을 것이라고 여기는 것입니다.
현대는 할 일이 참 많은 스피드 시대입니다. 문제는 어느 일부터 해야 할지 모른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도가 필요합니다. 기도하면 어떻게 살아야 할지, 무엇을 해야 할지, 무엇을 먼저 해야 할지, 무엇이 가치 있는 일인지를 깨닫습니다. 사람들은 기도할 때 문제해결을 위해 기도하는데 사실상 기도해야 할 더욱 중요한 이유는 문제의 해결보다는 사명의 발견을 위해서입니다. 그래서 힘들 때도 기도해야 하지만 바쁠 때도 기도해야 합니다.
느헤미야가 어떻게 각종 난관을 뚫고 짧은 시일에 예루살렘 성벽을 건축할 수 있었습니까? 사전에 충분히 준비했기 때문입니다. 그런 준비 없이 서둘러 개혁에 나서면 좋은 결과를 낳지 못합니다. 모세는 40년을 광야에서 준비했습니다. 바울도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님을 만난 후 3년간 아라비아 사막으로 들어가 영성과 신학을 준비한 후 사역에 나섰습니다. 그처럼 준비해야 비전을 이룰 수 있습니다. 그 준비 중에 최상의 준비가 바로 기도입니다.
느헤미야는 오랫동안 기도로 준비하다가 마침내 아닥사스다 왕의 마음을 얻고 백성의 참여를 이끌어내어 성벽건축의 비전을 이뤄냈습니다. 왜 요시야 왕의 개혁이 미완의 개혁으로 끝났습니까? 기도 없이 너무 한꺼번에 많이 바꾸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급진적인 개혁은 항상 반작용을 부릅니다. 개혁의 의지는 커도 과거의 관행을 존중하며 겉으로는 약간만 개선하겠다고 말하면서도 내적으로는 기도하면서 치열하게 성공적인 개혁의 길을 모색하며 나갈 때 결국 그 개혁이 성공합니다.
4. 자기개혁도 잘해야 합니다
왜 요시야 왕의 종교개혁이 미완의 개혁으로 끝났습니까? 가장 큰 이유는 외적인 변화에만 치중했기 때문입니다. 모든 개혁은 자기로부터 시작되어야 합니다. 세상은 급변하고 있지만 사람은 가장 안 변합니다. 그처럼 변화의 주체가 변하지 않으면 개혁은 어려워집니다. 왜 요새 많은 개혁이 실패합니까? 개혁의 목표가 분명치 않은 것도 문제지만 정치가, 부자, 권력자 등의 특수층만 개혁대상으로 한정시키는 것도 문제입니다. 사실상 자기를 비롯한 모두가 개혁대상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의식개혁이 필요합니다.
사람들은 개혁이란 말을 남의 개혁만 요구하며 쓸 때가 많습니다. 그러면서 자기를 개혁대상에서 빼면 참된 개혁은 멀어집니다. 결국 개혁이 실패하는 가장 중요한 원인은 참된 개혁자의 부재 때문입니다. 누가 누구를 개혁합니까? 오십보백보입니다. 개혁을 주장하는 목소리가 높은 사람일수록 자기를 수성하는 벽도 높은 아이러니 때문에 참된 개혁이 더뎌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항상 자기고민과 자기개혁을 개혁의 출발점으로 삼아야 합니다.
왜 루터의 종교개혁은 성공했습니까? 깊은 고뇌 끝에 자신을 먼저 변화시켰기 때문입니다. 루터는 수도원에서 항상 “내 죄! 내 죄!” 하면서 지냈습니다. 남이 들으면 죄 같지도 않은 죄로 고해성사를 계속 하자 주임신부는 “그런 것도 죄가 되겠느냐?”고 말할 정도였습니다. 어떤 날은 하루에 20번 이상을 찾아가 고해성사를 하자 주임신부가 지친 나머지 이렇게 말했습니다. “루터야! 죄 좀 모았다가 가지고 와라.” 그처럼 자기개혁에 대한 깊은 고뇌가 있었기에 종교개혁도 성공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로마에 가면 예수님이 빌라도의 법정에서 친히 올라가신 계단이 있습니다. 콘스탄틴 대제의 어머니 헬레나가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의 향취를 느끼고 싶다고 해서 빌라도 법정의 계단을 뜯어 로마로 옮긴 것입니다. 그 계단을 무릎으로 기어오르면 죄를 깨끗이 사함 받는다는 전설이 있어서 루터는 그 계단을 무릎으로 기어오르며 눈물로 회개했습니다. 그러나 끊임없이 기어오르고 내려도 죄 사함의 확신을 얻지 못했습니다.
어느 날, 그 계단을 무릎으로 기어오르던 루터의 귀에 로마서 1장 17절 말씀이 뇌성처럼 들렸습니다. “의인은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루터는 거기서 벌떡 일어났습니다. 사실상 그때 종교개혁은 시작된 셈이었습니다. 그때 루터는 자기 의를 완전히 포기하고 하나님의 의롭게 해주시는 은혜를 받아들였습니다. 그처럼 자기개혁이 선행되어야 세상의 변화도 이끌 수 있습니다. 쉽게 말하면 “내 탓이요! 네 덕이요!”의 정신이 필요합니다.
지금 세상에는 기득권을 쥐려는 패권 싸움이 심합니다. 그런 세상을 어떻게 변화시킵니까? 자기개혁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자신의 작은 희생적인 몸짓 하나가 나비효과를 일으키고 큰 폭발력을 일으킵니다. 금전적인 손해도 감수하고 거리에서 운전상의 손해도 감수하는 작은 일부터 실천해야 합니다. 작은 원자를 깨트릴 때 엄청난 위력의 핵폭탄이 생기듯이 작은 희생적인 삶을 통해 세상은 점차 변화되고 자신에게도 깊은 평안이 임하게 됩니다.
< 한 사람의 인물이 되십시오 >
지금 한국 교회는 개혁이 필요한 시점입니다. 물론 성경은 지상교회가 완벽해야 한다고 가르치지 않습니다. 지상교회는 늘 부패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래서 선한 변화를 늘 추구해야 합니다. 어떻게 선한 변화를 이룹니까? 세상의 악인들을 다 제거하거나 선인으로 만들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좋은 인물이 더 나올 토양은 만들 수 있습니다. 왜 교회가 존재합니까? 영혼을 구원하고 구원의 복음을 전하는 복된 인물을 만들어내기 위해서입니다.
어떻게 복된 인물을 만들어냅니까? 훈련도 필요하지만 자칫 훈련은 경직된 율법주의자나 조직주의자를 만들 수도 있습니다. 말씀중심적인 신앙 대신 훈련중심적인 신앙을 추구하면 인간조직은 커져도 인간영혼은 왜소해집니다. 그래서 교회성장을 위한 세미나를 줄이고 인물의 비전을 도전하는 예배를 살려야 합니다. 한국 교회가 교회성장을 이뤄내고 맹종성도를 조직적으로 만들어내는 다단계와 흡사한 방식의 세미나에 집착하면 잠시 교회성장의 단물은 빨아먹을 수 있어도 한국교회 전체의 하향적인 변화는 피할 수 없게 됩니다.
요즘 교회성장 세미나 등을 통한 조직적인 훈련의 부작용을 많은 교회 리더들이 자각하게 된 것은 희망입니다. 예수님이 제자들과 3년 동안 삶을 나누고 말씀을 주신 것은 요즘처럼 조직적인 매뉴얼에 따르는 방식의 제자훈련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앞서서 영적인 피리를 불며 인도하는 목자였지 뒤에서 몰아대며 훈련하는 교관이 아니었습니다.
물론 그런 이유 때문에 몇 만 명, 몇 천 명, 몇 백 명 목회도 아닌 몇 십 명 목회밖에 못하다가 결국 십자가에 돌아가셨는지 모릅니다. 그렇지만 바로 그 소수의 그룹에서 인류 역사를 뒤흔든 제자들이 나왔습니다. 결국 인물의 비전을 도전하고 그렇게 도전받은 성도가 자기 달란트를 최대한 활용해서 인물이 된 후 소리 없이 헌신할 때 거기서 참된 제자가 나옵니다.
어느 날, 한 교회에 한밤중에 갑자기 큰 일이 생겼습니다. 그때 목회자는 한밤에 불러도 교회로 올 수 있는 사람을 꼽았는데 많은 교인 중에 몇 명 되지 않았습니다. 그들을 불러 교회의 긴급한 큰일을 해결하면서 그때 그는 큰 꿈과 비전을 공유하며 같이 위기를 겪고 같이 위기를 해결하면서 보내는 세월들이 몇 단계 성경공부로 보낸 세월보다 더 참된 제자를 만든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조직의 확대와 유지를 위한 훈련 시스템과 프로그램도 필요하지만 그것들을 너무 앞세우면 안 됩니다.
지금 한국교회의 진통은 성숙을 위한 진통입니다. 너무 비관주의와 패배주의에 빠지지 마십시오. 교회를 잘 섬기는 한 사람만 있으면 교회는 얼마든지 새로워질 수 있고 좋은 교회가 하나만 있으면 한국 교회도 얼마든지 새로워질 수 있습니다. 그런 소망과 믿음을 가지고 각자가 말씀 위에 굳게 서서 자신을 변화시키고 인물의 꿈을 향해 열심히 달리면 선한 변화의 역사는 시작될 것입니다. 그런 한 사람의 인물이 되어 한국 교회를 새롭게 하는데 큰 보탬이 되는 복된 심령들이 되십시오. - 주일설교(140209) - <성경66권설교파일에 열왕기하전체 설교59편이 있습니다.>
ⓒ 이한규목사 http://www.john316.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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