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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의 장벽을 무너뜨리는 십자가! (행 11:19-26)

by 【고동엽】 2021. 12. 21.

마음의 장벽을 무너뜨리는 십자가! (행 11:19-26)

 

 

인도네시아 선교사 수련회에서 많은 선교사님들을 만났습니다. 그 중에 자카르타까지 한 시간 반 비행기를 타고 가서, 다시 14시간 배를 타고 가는 섬에서 사역하시는 여 선교사님도 계시고, 99.9% 이슬람 강성 부족이라 신분이 드러나면 언제든지 살해 당할 위험한 곳에서 사역하시는 한 젊은 부부 선교사님, 그리고 2개월 전 샤워 중에 회교 성직자가 강도로 위장하여 집에 들어와 남편 선교사님을 무차별 폭행한 일을 겪은 여 선교사님 등이 아직도 기억이 됩니다. 제가 이 선교사님들에게 무슨 드릴 말씀이 있었겠습니까? 제가 선교사님들에게 은혜를 끼치러 갔다기 보다는 그 선교사님들에게서 엄청난 도전과 은혜를 받고 왔습니다. 그러면서 무엇이 이 분들로 하여금 이런 상황에서도 선교사의 길을 가게 하는가? 이런 어려움과 위험을 감당하면서도 어떻게 끝까지 그 선교지로 다시 들어갈 수 있을까? 하는 질문을 가져 보았습니다. 그 선교사님들의 용기에 대해서 경외하는 마음을 갖게도 됐습니다. 그 때 이것이야말로 성령의 역사임을 깨달았습니다. 성령님이 아니라면 결코 그와 같은 일을 생각할 수도, 감당할 수도 없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우리 안에 오신 성령님의 한결같은 소원은, 오순절 마가 다락방에 임하신 성령께서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부어주신 마음이 땅 끝까지 모든 족속에게 가서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사도행전은 바로 성령의 이 역사를 기록한 성경입니다.

사도행전을 꼼꼼히 읽으신 분들은 사도행전 10장에서부터 교회의 중심이 예루살렘에서 안디옥으로 옮겨지고 있음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사도행전 1장부터 9장 까지는 예루살렘 교회가 중심이고 사도행전 10장부터는 안디옥 교회가 중심 교회가 됩니다. 저는 이것이 하나님께서 의도적으로 하신 일이라고 믿습니다.
그것은 예루살렘 교회가 이방인 선교에 대하여 너무나 마음이 닫혀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방인 선교에는 수많은 장애물이 있었습니다. 핍박도 많았습니다. 사도행 전 1장 8절의 예수님의 예언대로 성령이 임하여 제자들이 큰 권능을 받았기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방인 선교의 가장 큰 장애물은 외적인 핍박이 아니었습니다. 처음 예수를 믿은 예루살렘 교회 교인들에게 있었던 이방인에 대한 마음의 장벽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 조차 처음에는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해야 한다는 마음이 없었습니다.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리라는 약속을 당연히 모든 유대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19절에 보는대로 그들은 외국에 나가서도 유대인들에게만 전도하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깜짝 놀랄 소식이 들리는 것입니다. 성령이 이방인 고넬료 집에 임하였고 그들도 예수를 믿었다는 것입니다. 예루살렘 교회 교인들은 그 소식을 듣고 기뻐한 것이 아니라 당황했고, 일이 잘못되어가는 줄 알았습니다.
(2-3절) 베드로가 예루살렘에 올라갔을 때에 할례자들이 비난하여 이르되 네가 무할례자의 집에 들어가 함께 먹었다 하니
이것은 우리가 보기에는 너무나 이상한 일입니다.
여러분은 인도네시아 선교 보고를 들으면 기쁘십니까? 화가 납니까? 기쁘지요!
그런데 예루살렘 교회 교인들 중에는 비난하는 사람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고넬료 집에 성령이 임하고 그리고 그들이 다 예수를 믿게 됐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어떻게 당신이 이방인과 함께 한 집에서 식사를 할 수 있느냐? 고 생각했습니다. 그때 베드로가 그 점에 대해 해명을 합니다. 사실 그 때 나도 안 가려고 했어요. 예수님의 제자들도 처음에는 이방인에게 전도하는 것이 아닌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환상 중에 이방인에게 가라고 분명히 제게 계시를 해주셔서 제가 갔거든요. 그리고 제가 복음을 설교하는데 성령이 먼저 임하지 않았겠습니까? 그러니 제가 세례까지 베풀고 온 것입니다. 예루살렘 교인들은 베드로의 설명을 듣고서야 복음이 이방인에게도 전해졌다는 사실을 받아들였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고넬료 집에 국한한 예외적인 것인 줄 알았지, 모든 이방인들에게 복음의 문이 열렸다고 인정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예루살렘 교회 교인들은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이 하나님의 계획이구나! 이런 생각을 하지 못했습니다. 예루살렘 교회 교인들 마음이 이렇게 답답했습니다.
그런데 20절에 보니 안디옥에 가서 전도하는 사도들로부터 소식이 오기를 헬라인들이 예수를 믿더라는 것입니다!
이 소식을 듣고 예루살렘 교회는 할렐루야! 하지 않고, 큰 걱정거리가 생긴 것처럼 반응하였습니다. 빨리 가서 조사해 보자! 하며 바나바를 파견하였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왜 예루살렘 교회에 대하여 답답하게 생각하였는지 이해할만 하십니까? 지금 하나님의 마음은 복음이 세계 모든 족속에게까지 전해지기를 원하고 하나님이 그 일을 진행하고 계시는 중인데 예루살렘 교회 교인들이 계속해서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을 부정적으로 생각하고 오히려 그것을 걱정거리라고 여기고 있으니 하나님의 마음에 예루살렘 교회로는 안되겠구나. 그렇게 생각을 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나 안디옥 교회는 분위기가 완전히 다릅니다. 그 교회는 이방인들로 넘쳤고, 이방인에 대하여 개방적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이방인들이 예수를 믿으면 잘했다고 박수를 치고 환영했으니까 이방인들이 자꾸 늘어나게 된 것입니다.
23절에 보면 바나바는 안디옥에 와서 이방인들이 예수를 믿는 것을 보고 크게 기뻐하였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당시 예루살렘 교회 일반적인 정서와 다른 반응이었습니다. 성경은 바나바가 이렇게 기뻐한 것이 그가 진정으로 성령충만한 사람이었기 때문이라고 설명하였습니다.
(24절) 바나바는 착한 사람이요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이라 이에 큰 무리가 주께 더하여지더라
그러니 안디옥 교회를 보시는 하나님의 마음이 얼마나 기쁘시겠습니까?
그래서 세계 복음화의 중심 교회가 예루살렘 교회에서 안디옥 교회로 옮겨지게 된 것입니다.
(21절) 주의 손이 그들과 함께 하시매 수많은 사람들이 믿고 주께 돌아오더라
이것은 우리에게도 깊은 교훈을 주는 내용입니다.
예루살렘 교회와 안디옥 교회의 문제는 지금 우리에게도 일어납니다.
외국에 나가서 다른 나라 사람들에게 선교를 해야 되느냐 말아야 되느냐? 선교사 한 사람을 보내는 일이 상당한 기도와 재정이 필요한 일입니다. 선교사로 가겠다는 사람이 생기면 기뻐하고 도와야 되겠다는 마음이 있는 교회는 하나님의 마음이 있는 교회입니다.
그런데 선교는 왜 해야 돼? 선교사 도와주려면 부담 되는데. 지금도 그런 마음이 있는 교회와 성도들이 있습니다. 아직도 선교해야 하나, 하는 문제로 갈등하는 교인도 있고, 심지어는 그 문제 때문에 싸우는 교회가 있습니다. 이렇게 되면 하나님의 마음이 떠납니다. 우리 복을 걷어차는 것입니다.
21절에 보면 하나님의 손을 얹어주시는 역사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 역사가 어떤 역사냐?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하나님의 계획에 대해서 같이 마음이 열려있는 교회와 성도에게는 주의 손이 함께하신다는 것입니다.

26절에 보면 안디옥 교회에서 처음 교인들이 세상 사람들로부터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리워졌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예수믿는 사람을 그리스도인이라고 말합니다. 이런 말이 처음 생rusks 것은 예루살렘 교회가 아니라, 안디옥 교회에서였습니다. 이방인에 대하여 복음을 전해야 되겠다는 마음이 열린 사람들이야말로 진정으로 그리스도인이라 불리울 자격이 있다는 뜻입니다.
또 27절에 보면 안디옥 교회가 예루살렘 교회에 구제금을 모아 도왔다는 기록이 나옵니다. 흉년이 들어서 어렵다는 말을 듣고. 매우 의미심장한 일입니다. 예루살렘 교회는 모 교회이고 안디옥 교회는 개척 교회입니다. 그런데 개척 교회가 모 교회를 도와주는 교회가 되었습니다. 왜 이런 기록을 하였을까요? 하나님께서 안디옥 교회와 함께 하셨습니다. 그래서 돕는 교회가 된 것입니다.
이방인 선교에 마음이 열린 교회에 돕는 교회가 되는 복을 받는 것입니다.

이번에 인도네시아 선교사 수련회를 갔더니, 선교사님들이 그렇게 고마워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전 세계적인 경제 위기 상황인데, 수련회가 취소될 줄 알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전 어느 때보다 더 풍성하고 뜨거운 헌신으로 섬겨주어서 너무나 감사해 하였습니다. 선교사님들의 감사 인사를 받으면서 제 마음에 하나님께서도 그렇게 인정해 주시면 충분합니다. 하고 생각했습니다. 우리는 섬기고 복을 받았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주의 손이 그들과 함께 하시는" 성도와 교회가 되려면 우리 마음 안에 무너져야 할 장벽이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예루살렘의 유대인 그리스도인 뿐 아니라 우리 마음에도 이방인과 같은 존재가 있습니다. 좀처럼 마음이 열리지 않는 사람, 솔직히 가까이 하기 싫은 사람이 있다는 말입니다. 유대인들은 사람들을 유대인이냐 이방이냐 하는 잣대로 판단했습니다. 한국 사람은 어느 학교 출신이냐, 어느 지역 출신이냐, 얼마나 돈을 많이 가졌느냐로 판단합니다.
여러분은 예수님을 영접한 후에 마음 안에 있던 사람에 대한 이러한 장벽이 무너졌습니까?


김승회 선교사님께서 우리 선교 팀을 안내해 주면서 인도네시아 사람들을 보고 섣불리 판단하지 말아주십시오. 라고 부탁하셨습니다. 선교사님이 인도네시아에 와서 처음에는 인도네시아 사람들의 행동에 대하여 짜증나는 일이 많았답니다. 하루는 너무 화가 나는 일이 생겨서 인도네시아 사람들은 왜 이 모양이냐고 불평하는데, 하나님께서 물으시더랍니다, 너 인도네시아에 왜 왔느냐? 인도네시아 사람들을 판단하러 왔느냐? 아니면 나의 사랑과 구원의 복음을 전하러 왔느냐? 선교사님은 화를 내었던 것이 부끄러워 아무 말을 하지 못하겠더랍니다.

여러분, 우리가 선교사로 나가 있는 것이 아니더라도 똑같습니다.
선교사만 아니라 우리도 다른 사람을 판단하고 미워하고 화를 낼 때,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우리 주변에 있는 사람을 판단하기 위해서 사는 사람입니까? 그렇지가 않습니다.
내가 너에게 왜 인생을 허락하였는지 아느냐?
하나님께서 왜 우리에게 인생을 허락하셨을까요?
다른 사람과 경쟁하라고 주신 세월이겠습니까? 한 생애를 분노하고 싸우고 투쟁하다가 오라고 하셨겠습니까? 남보다 더 잘 산다고 더 잘 되었다고 자랑하고 오라고 하셨겠습니까? 다른 사람과 비교하며 열등감에 사로잡혀 고통스럽게 살다가 오라고 하셨겠습니까? 누가 잘했나 싸움하다가 오라고 하셨겠습니까?
그렇지가 않습니다. 한 사람이라도 더 지옥에 갈 사람을 천국 가도록 구원하고 오라고 우리에게 생명도 주시고 건강도 주시고 시간도 주신 것입니다. 우리 생애가 끝나는 날 하나님 앞에 서게 되는 날 그때는 명확하게 알게 됩니다.결국은 무엇이 남겠어요? 여러분, 세상에서 다른 사람보다 조금이라도 더 잘 살고 넉넉해지고 성공한 것이 남겠어요? 여러분이 살았기 때문에 한 영혼이라도 더 구원받았던 것만 소중하게 남는 것입니다.
자신을 죽이려 하는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러 가는 젊은 부부 선교사님, 그들 안에 역사하시는 성령님과 우리 안에 역사하시는 성령님은 다른 분이십니까?

하나님께서 우리 마음에 사람에 대한 장벽을 가지기 말라 하시는 것은 그런 마음을 가지면 복음 전하는 일이 막혀버리고 말기 때문입니다. 내가 사람에 대해서 싫고 좋은 것에 대한 마음의 장벽을 가지고 있으면 그것이 복음 전하는데 결정적인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최근에 결혼을 하고 신혼여행을 아프리카 알제리로 다녀온 여 전도사가 있습니다. 알제리에도 좋은 신혼 여행지가 있는가? 궁금해 하실 것은 없습니다. 알제리 선교사님이 한국에 와서 아이를 출산하고 임지로 돌아가야 하는데, 몸이 너무 약하여 두 아이를 데리고 갈 수 없었습니다. 누군가 보호자로 따라가 주어야 될 상황이었습니다. 너무 안타까워하고 있다는 말을 들고 신혼여행 삼아 선교사님을 도와주러 갔다 온 것입니다. 아기도 보아주고 짐도 많이 가지고 갈 수 있었답니다.
전도사님이 알제리를 갔다와서 준 편지 속에 안타까운 글이 있었습니다.
알제리가 130년 동안 프랑스의 지배를 받았는데, 프랑스가 얼마나 못되게 굴었는지 알제리가 독립한 후에 가장 먼저 한 일이 교회와 성당에 걸린 십자가를 떼고 이슬람 사원으로 개조하였다는 것입니다.
우리도 이러한 일에서 깊은 교훈을 받아야 합니다.
식민지 시대에 지배하는 나라 국민의 마음에 피지배 국민은 어떠한 존재였겠습니까? 착취와 멸시의 대상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그렇게 하면 안되는 것이었습니다. 그 결과가 얼마나 두려운 일입니까?


어느 목사님께서 군목 시절, 한 미혼 장교를 전도하였는데 좀처럼 마음을 열지 않더랍니다. 어느 날 만나서 깊은 대화를 하던 중에 교인들 때문에 마음이 닫혀져 있음을 알았습니다. 예수 안 믿기로 결단을 하였다는 것입니다. 대학생 때 하숙을 했는데, 하숙집 주인 아주머니가 열심히 예수 믿는 분이더랍니다. 그 아주머니의 전도를 받고 교회를 다녔답니다. 그런데 그 주인 아주머니가 같은 교회 교회를 다니는 어느 집사님 험담을 자꾸 하는데 그렇게 싫었답니다. 그 집사님은 아주머니와 함께 남대문 시장에서 미군 부대에서 나오는 물품을 파는 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왜 같은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끼리 저렇게 사이가 안 좋을까?
그런 어느 날 전화가 왔는데, 전화를 받는 아주머니가 큰 소리로 말하더랍니다. 뭐라고? 그 집사가 경찰에 붙잡혀 갔다고! 할렐루야! 그 말을 들은 다음부터 교회에 안 나갔다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고도 사람에 대한 마음의 장벽이 무너지지 않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왜 하나님이 이 문제를 그렇게 답답하게 여기실까요? 예루살렘 교회에서 안디옥 교회로 사명의 촛대를 옮기신 이유가 무엇일까? 전도의 문이 다 막혀버리기 때문입니다. 나중에 하나님 앞에 갔을 때 그 사실을 알게 된다면 얼마나 두려운 일이 되느냐 말입니다.
그러나 예수 믿는다고 마음의 장벽이 한 순간에 다 쉽게 해결이 됩니까? 결국 좋은 사람이 있고 싫은 사람이 있고 가까이 하고 싶은 사람이 있고 멀리 하고 싶은 사람이 있지 않습니까? 가족 중에도 그런 사람이 있지 않습니까? 교우 중에도 그런 사람이 있지 않습니까?
마음에 드는 사람 익숙한 사람들과만 어울리고, 불평, 원망, 판단, 미움, 다툼으로 세월을 다 보내는 이들이 있습니다.
어떻게 하면 우리 마음에 있는 이방인 문제가 극복될 수 있습니까?
우리 힘으로는 해결 못합니다. 우리의 본성은 어쩔 수 없이 나 중심이라 내게 잘해주는 사람, 내 마음에 드는 사람은 가깝게 느껴지고, 그렇지 않은 사람은 멀리 느껴집니다. 같은 예수 믿는 사람들끼리도 마음에 드는 사람 안 드는 사람이 있는 것입니다. 교단, 교파 그것이 왜 그렇게 큰 문제가 됩니까?
십자가가 분명해야 합니다. 자아가 예수님과 함께 죽은 사람은 마음이 달라집니다.
예수님의 마음을 품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한번은 세리 마태의 집에서 앉아서 음식을 잡수실 때, 그 식탁에는 수많은 세리들과 당시 유대 사회에서 정죄 받고 버림받은 죄인들도 초대되어 함께 음식을 먹고 마셨습니다. 그것이 문제가 되었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에게는 큰 일입니다.
유대인들은 안식일 법 못지 않게 ‘식탁 정결법’을 목숨같이 지킵니다. 율법 전통 가운데 무려 67%의 내용이식탁교제에 관한 법입니다. 유대인들은 먹을 수 있는 음식과 먹을 수 없는 음식을 엄격하게 구분합니다.
성지순례를 가서 호텔에서 식사할 때, 김 고추장 김치를 먹지 말라는 주의를 받았습니다. 그들의 그릇에 한국 음식을 담은 것이 발각되면, 그 그릇도 깨뜨려서 폐기처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음식과 그릇만 아니라, 한 식탁에 함께 앉아서 밥 먹는 사람의 정결도 중요합니다.
함께 밥 먹을 수 있는 사람이 있고, 같이 밥 먹을 수 없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들은 식탁의 정결을 위하여 세리들, 죄인들, 문둥병자들과 저주 받은 각종 병자들, 신체가 온전치 못한 사람들, 창기들과는 함께 식사를 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부정한 자들이 함께 식사하면 식탁의 거룩함이 깨어진다는 정결법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유대인들의 생명과 같은 금기법을 깨뜨리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까지 하시면서 말씀하시려는 는 것이 무엇입니까?
예수님은 그 어떤 사람도 다 구원받기를 원하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주님의 마음입니다. 하나님의 소원입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누구를 싫어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으면 하나님을 너무너무 괴롭게 하는 것입니다. “나는 어떤 사람하고는 상종 안해, 나는 어떤 사람하고는 절대 밥도 안 먹어, 어떤 사람은 쳐다보기도 싫어.” 여러분 마음에 그런 마음이 있다면 하나님을 너무너무 괴롭게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그렇게 싫어하는 그 사람을 하나님은 너무너무 사랑하셔서 그 사람을 위해 십자가 위에서 예수님을 죽게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사랑하시는 사람인데 여러분은 그렇게 싫어하면 하나님의 마음이 어떠하시겠느냐 말입니다.
여러분이 싫은 사람이 있으면 어떻게 그 사람에게 복음이 전해지겠고, 또 여러분이 누구를 싫어하는 것을 다른 사람이 보고 예수 믿는 사람이 그러냐? 그 사람도 예수 믿을 마음이 없어집니다.

예수님의 복음은 결국 사람을 귀히 여기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도저히 수용할 수 없는 그 사람, 남편과 아내, 아들과 딸, 이웃을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도 용서하고, 사랑하는 것입니다.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실 때, 이 세상에서 가장 나쁜 사람에게도 구원받을 길을 열어주시고 싶은 마음 뿐이었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들이 구원받기 원하십니다. 그들 중에는 내가 가장 싫어하는 유형의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좋아하는 사람 위주로 인간관계를 갖는다면 하나님은 나를 통하여 다른 사람들에게 다가갈 수 없을 것입니다.

십자가를 통과하면 다른 사람을 보는 눈이 바뀌게 됩니다.
나는 죽었습니다, 고백하고 나면 직장 동료, 이웃 사람, 가족 친지가 다르게 보입니다. 그들이 내 마음에 드느냐 아니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영혼을 구원하라고 나와 만나고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십자가를 통과하고 나야 비로서 예수님의 마음을 누리게 됩니다.
사랑 못할 사람이 없습니다. 전도 대상자는 모두 다 사랑스럽습니다.


지난 성령집회 때 교회를 위해 기도하신 권사님께서 첫 번째로 내신 기도 제목이 가난한 자를 돕는 교회가 되게 해 주십시오. 였습니다. 이것은 정확히 성령의 마음입니다.
사 61:1 주 여호와의 영이 내게 내리셨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사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예수님은 이 말씀이 예수님에게서 이루어졌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예수를 영접했고 누구든지 성령받은 교회라고 한다면 반드시 그 다음에는 가난한 사람들이 기쁩니다. 성령받은 사람, 성령 받은 교회가 옆에 있다면 가난한 사람에게 기쁜 일이 생깁니다. 왜냐하면 가난한 사람들에게 마음이 가게 되어있기 때문입니다.


제가 부산제일 교회에서 목회할 때 가장 기억에 남는 일은 행려자들을 섬겼던 일입니다. 그러나 이 일의 시작은 마음 아픈 일 때문이었습니다.
어느 날 경찰관이 교회에 와서 행려자 한 사람을 끌고 나갔던 일이 있었습니다. 그는 잔뜩 술이 취해 있었고, 교회 사무실에 와서 오랫동안 행패를 부렸습니다. 이런 일이 종종 있었습니다. 이렇게 밖에는 할 수 없었던 교회 관리집사나 사무원의 고충을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끌려 나가면서 욕을 섞어 가면서 소리를 질렀습니다. 이것도 교회냐? 도와달라고 온 사람을 경찰을 불러 끌어내는 것이 교회냐? 그 행려자의 외침은 제 귀에서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우리에겐 그만한 사정이 있었지만 예수님이라면 이렇게는 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 일로 인하여 우리 교회에서 행려자 급식소를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1998년 여름에는 200명이 넘게 매일 아침을 먹으러 오기도 했습니다. 지나고 보니 기억에 남는 일은 그 일이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도 그러리라 생각됩니다.

여러분, 진짜 복음은 사람을 귀하게 여기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때때로 남에게 다 퍼주다 보면 나는 어떻게 하나? 하는 심정이 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더 큰 은혜를 받고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단기선교 마지막 평가회 날 김승회 선교사님이 고백했습니다. 선교사로 살다보니 항상 다른 사람을 섬겨야 하고 위로해 주어야 하니 때로 나는 누구에게서 위로받고 사랑받나? 하는 생각이 들었답니다, 선교사님도 위로받고 싶은 마음 사랑받고 싶은 마음이 강하게 일어났었답니다. 그런데 그 때 하나님께서 말씀하셨답니다, 내가 너를 위로하고 너를 사랑하지 않느냐! 뜨거운 눈물이 흐르더랍니다. 너는 모든 이들을 위로하고 사랑하라! 그 고백을 하시면서 눈가에 눈물이 맺히셨습니다.

성도 여러분, 한 번 사는 인생 길, 영혼을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역사에 참여하는 삶을 사시기를 축원합니다.
오늘 이 시간도 마찬가지입니다. 십자가에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복이 무엇입니까? 왜 나를 그렇게 사랑하시고, 왜 나를 그렇게 위하시는지. 예수님은 나와 함께 죽으신 것 뿐만 아니고 이제는 나를 통해서 사십니다. 오늘 이 시간 여러분에게 그 은혜가 충만하게 있으시기를 축복합니다.

십자가를 붙잡고, 우리 안에 사람에 대한 마음의 장벽이 무너지기를 기도합시다.
하나님, 혹시 제 마음에 사람에 대한 장벽이 나도 모르게 가지고 있는 것이 있습니까? 내가 싫어하는 사람 가까이 하기 원하지 않는 사람이 내 마음에 있습니까? 가족 중에 교우 중에 또는 이웃 중에 있었습니까? 자기를 죽일지도 모르는 사람들에게도 복음 들고 들어갔던 젊은 선교사 부부를 생각합니다. 그 들 안에 역사하는 성령님이 지금 내 안에도 역사하시는 그 성령님이 아닙니까? 나를 죽이려고 하는 사람일지라도 십자가에 굳게 서보면 사랑할 수 있는 힘을 얻게 됩니다. 하나님 역사해 주옵소서. 제가 십자가 안에서 내 마음에 사람에 대한 장벽이 다 무너지는 역사를 얻기 원합니다.

출처 : 창조주가 선물한 세상
글쓴이 : 박종태목사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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