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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 새벽 설교)지극히 높으신 예수의 이름에 무릎 꿇는 행복(로마서 1:5-7)

by 【고동엽】 2021. 12. 21.

본문: 로마서 1:5-7
제목: 지극히 높으신 예수의 이름에 무릎 꿇는 행복


예수 이름이 도대체 무엇이길래 사도 바울은 온 세상 만민들이 예수를 믿어야 된다고 주장을 했을까요? 이게 굉장히 놀랍지 않습니까? 1장 5절 한번 보세요.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은혜의 사도의 직분을 받아 그의 이름을 위하여 모든 이방인 중에서 믿어 순종하게 하나니


바울은 예수를 믿어 순종을 하는 이 일이 모든 이방인 중에서 일어나야 된다고 주장을 하고 있는 거예요. 바울이 지금 그렇게 주장을 하고 있죠. 어떻게 바울은 모든 이방인들이 무슨 삶을 사는지, 그들이 어떤 상태에 있는지를 알고 갑자기 예수의 이름을 모든 이방인들이 믿어서 순종을 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는가? 여기가 기독교 복음의 모든 엑기스이면서 동시에 많은 사람을 실족하게 만드는 지점이니다. 일단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특정한 한 사람을 믿어서 구원을 받으라고 말할 때 가장 많이 부딪히는 것이 그 특정한 한 사람이 도대체 누구길래 라는 질문입니다. 예수는 구약성서의 세계관 안에서 구약성서의 문법 안에서만 말이 통합니다. 구약성서의 문법 안에서는 어떤 문법이 있냐 하면은 한 사람의 원리입니다. 한 사람의 원리. 한 사람이 인류의 모든 죄와 죽음을 초래한 원죄적인 죄인 한 사람이 있다는 한 사람 문법, 한 사람의 대표성의 문법이라는 그 문법 때문에 예수 이름이 중요한 거거든요. 그러니까 예수 이름보다 더 중요한 이름은 아담! 아담이 아담 안에서 아담과 같은 죄를 짓지 않는 사람에게도 모든 사람에게 죽음이 역사했다, 그것이 5장 12절 이하의 논리잖아요. 여러분, 바울의 로마서를 보면은 바울이 창세기를 해석하는 책인 걸 알 수 있죠? 여러분 한번 잘 보세요. 바울의 복음을 읽자마자 도처에 창세기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로마서는 창세기 1장의 창조 이야기부터 시작하여 야곱과 에서의 이야기로 끝납니다. 그러니까 로마서는 바울이 창세기를 펴놓고 쓴 책이다 이렇게 말할 수 있어요. 그래서 로마서의 해석은 창세기 문법 안에서만 가능한데 창세기의 문법은 뭐냐하면은 선택을 통하여 선민을 통하여 한 사람을 통하여 세계만민의 운명을 좌우하려고 마음을 굳힌 하나님의 문법입니다. 그래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인류가 시작되었고 인류의 죄가 시작되었기 때문에 그 한 사람이 한 행동은 다른 종말에 온 다른 한 사람, 종말에 온 아담, 둘째 아담의 행동으로 그게 수습이 된다는 거예요. 이 원리가 하나님의 원리입니다. 이 원리를 이해해야만이 로마서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로마서는 창세기의 원리, 창세기의 문법을 이해해야만 풀릴 수 있는 암호문과 같아요. 그래서 예수의 이름을 믿어 순종하게 한다는 말은 뭐죠?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인데 이때 하나님 아들이란 말뜻은 생물학적 혈연관계를 가르키는 말이 아니라 순종의 화신을 가리킵니다. 고대 히브리어 샘어에서 아들은 incarnation of obedience 순종의 화신을 가리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 아들이 복음이란 말은 뭐죠? 하나님 아들이 복음이란 말은 불순종하는 아담 인류에게 죄와 죽음의 세력에 감금당해 있는 아담 후손에게 들려줄 수 있는 복음은 하나밖에 없습니다, 아담 후손을 감금하고 있는 죄와 사망으로부터 풀어 줄 수 있는 사람 즉, 아담과 정반대의 사람, 순종의 화신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아들, 즉 순종의 화신을 이 세상에 보내어 불순종의 자녀들이 망쳐버린 세상을 구원해 주겠다는 것이 하나님이 미리 예언자들로 약속하신 복음이었어요. 그러니까 하나님이 미리 예언자들로 약속하신 복음의 내용은 하나님 아들을 보내주신다는 말인데 그 하나님 아들은 순종의 화신이라는 뜻이에요. 그러니까 여러분 일반 지성인들한테는 이렇게 설명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계명을 어겨서 이 세상을 지옥처럼 만들어버린 이런 현실에 하나님의 아들 즉 하나님의 계명을 완벽하게 순종하는 아들이 와서 이 실낙원 상태를 회복시켜 복낙원 상태로 만들어준다 이것이 복음이다, 이것이 기독교이다 라고 말하면은 이것이 일반원리화된 기독교입니다. 일단 우리가 이것을 이해를 해야 됩니다.


여러분, 예수님을 믿으면 왜 구원을 받습니까? 그걸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 믿으면은 내 안에 역사하는 나를 지배하는 하나님의 계명을 위반하고 싶은 거센 충동에 좌우되는 나의 이 원시적 생명력, 충동력이 예수를 주라고 고백하는 순간부터 약해지는 거예요. 약해져요. 그러나 소멸되진 않습니다. 예수를 주로 고백한다고 죄가 소멸되진 않아요. 죄가 약해지는 거예요. 여러분, 죄가 아예 없어지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죄는 내 생명력과 밀접하게 관련돼 있고, 나의 욕망은 내 생존욕구와 열기로 가득 찼기 때문에 죄가 없어지진 않아요. 그러나 내 욕망을 과잉 충족시키려는 그 열망이 줄어들어 정당하게만 내 욕망을 충족시키려는 마음이 생기기 때문에 죄는 없어지지 않지만 약해지는 거예요. 예수를 믿으면은 예수 이름 앞에 무릎을 꿇으면 어떤 일이 벌어지냐 하면은 내 인간성 안에 역사하는 아담의 원시적인, 하나님의 계명을 위반하면서까지 나의 행복을 추구하려고 하는 내 열망, 나의 야생적인 욕망, 열정 이런 것들이 약해지고 순화되고 길들여져서 좋아진다 이런 뜻입니다. 그래서 예수 믿으면 구원받는다는 이 말은 예수를 믿으면 죄와 죽음의 감금 세력으로부터 해방된다는 말인데 그럼 이 해방은 누가 시켜주는 것입니까? 로마서 8장 1절부터 2절까지 좀 읽어주십시오. 강보선 형제님이 좀 읽어주십시오.


1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2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예, 잘 보세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했다고 말합니다. 다시는 죄를 짓지 않는 상태가 된다는 말이 아닙니다. 죄와 사망의 법에서 나를 해방했다고 느낄 만큼 즉 죄와 사망의 법을 내가 응시하면서 내가 통제할 만큼 내가 예수님과 가까워졌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죄와 사망의 법에서 나를 해방하는 성령이 내게 역사하기 때문에 내가 구원을 받았다고 느끼거든요. 제가 구원을 받았다고 느낀 1979년에는 제가 제 안에 역사했던 아담 인류의 본성 그 무시무시한 죄악의 원시적 생명력, 충동력, 하나님의 계명대로 살고 싶지 않고 내 맘대로 살고 싶었던 모든 야생적 열정과 욕망들이 예수를 주로 고백하는 순간 더 이상 나를 지배하지 못하고 나를 장악하지 못하고 나를 사로잡지 못합니다. 그러면 그때는 뭐가 됩니까? 예수 믿고 나서는 내가 죄를 지을, 나를 장악했던 그 열망을 예수 믿고 나서는 내가 부리는, 내가 지배하는 하나의 열등한 하나의 부하가 돼 버리고 나의 종이 돼 버려요. 그래서 예수를 믿으면은 죄를 영원히 짓지 않는 상태가 되지는 않지만 죄를 이기는 상태가 벌어져요. 보선 형제님 로마서 8장 8절부터 12절 읽어주십시오.


8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느니라
9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10 또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시면 몸은 죄로 말미암아 죽은 것이나 영은 의로 말미암아 살아있는 것이니라
11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
12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빚진 자로되 육신에게 져서 육신대로 살 것이 아니니라


예, 맞습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더 이상 육신에게 빚진 상태가 해소된다는 말이죠. 그래서 그게 바로 뭡니까? 이렇게 멋진 복음 사도 바울은 이것을 깨달은 겁니다. 예수를 주라 고백했을 때 자기가 율법을 지키려고 그렇게 애썼을 때에는 되지 않았던 죄와 죽음의 원시적인 지배력이 사라지는 걸 경험한 것입니다. 바울은 예수를 주라 고백하자마자 죄와 사망의 법에서 생명의 성령의 법이 나를 풀어내는 이런 원초적 해방 경험을 한 거거든요. 제가 이걸 했기 때문에 저는 이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서 돌아다니는 것 아닙니까? 저는 사도 바울이 말하는 이 상태를 맛을 보았기 때문에 너무너무 제가 복음에 대한 확신이 강해졌거든요. 그래서 제가 복음 전파자가 된 거예요. 지금도 복음을 전하러 다니는 거고요. 그래서 이런 복음, 예수님의 이름을 믿어 예수님께 순종하는 자의 행복을 바울은 나누고 싶어서 로마에 가고 싶은 거예요. 그래서 성도의 교제 우리 가향교회도 150명 모두가 똑같은 수준으로 성도의 교제를 할 수는 없어요. 그렇게 안 돼요. 단계가 다 달라서...그러나 우리 교회도 가만히 보면은 그 수가 몇 명인지는 모르지만은 영적으로 소통하는 영적인 네트워킹이 있거든요. 여러분 숲을 보시면, 어떤 지역에는 나무가 갑자기 많이 자란 숲이 되고, 어떤 지역에는 숲이 없죠. 숲이 되는 지역과 숲이 안 되는 지역의 가장 큰 차이가 뭔지 아세요? 숲이 되는 지역에는 그 땅 아래 곰팡이 균이 굉장히 많습니다. 다시 말해서 곰팡이 균이 땅 밑에서 엄청난 신호 체제를 만든 그 땅에는 숲이 들어서는데 그 밑에 곰팡이 균이라는 미세한 균들의 시그널 이런 의사소통 체제가 없는 곳은 숲이 들어서지 않거든요. 그러니까 숲의 생명력은 곰팡이 균에 있어요. 땅 밑의 곰팡이 균에 있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교회가 생명력이 넘치는 곳, 불평도 사라지고, 항상 웃음이 넘치고, 봉사하려고 너무 애를 쓰고, 청소하라고 하면 너무 빨리 달려오고, 아무도 강제하지 않는데 많은 헌금을 바치는 이런 성도들의 그 보이지 않는 숲을 이루는 곰팡이 균과 같은 이런 미세한, 보이지 않은 이런 네트워킹은 성령만이 가능케 하는 거거든요. 모든 교회의 중심에는 성령의 내적 네트워킹이 역사합니다. 그것을 믿음을 가지고 피차 안위한다고 그랬습니다. 여러분 우리 가향교회는 제가 볼 때는 그 핵심에 예수 이름을 믿은 자의 행복이 가향교회를 끌어가고 있습니다. 물론 제가 처음에 교회를 창립을 할 때 이바지 했고, 양진일 목사님이 이 교회를 이루는 초창기 멤버를 모았지요. 그러나 양진일 목사나 제가 없다 하더라도 우리 교우들 사이에 예수 이름 때문에 피차 위로를 나누는 이 강력한 네트워킹이 역사하면은 그러면 교회가 숲을 이루는 그것은 인적 숲을 이루는 공동체가 되는 거거든요. 저는 가향교회는 충분히 인적 숲을 이루는, 영적 숲을 이루는 저는 곰팡이 균과 같은 보이지 않는 네트워킹이 있다고 봅니다. 그래서 가향교회가 예수의 이름을 믿고, 예수 이름 앞에 순종했더니 이런 행복이 왔다는 그 주체할 수 없는 행복이 가득 찬 사람들이 모여서, 예수 이름으로 모여서 기도하면은, 두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그곳에 나는 그곳에 있다, 마태복음 18장 20절입니다. 예수 이름을 믿고, 예수 이름 때문에 죄와 사망에서 풀려난 사람이 두 사람씩만 조별로 모여 있으면 그곳에 예수님의 현존이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이 예수님의 현존 때문에 우리 교우들은 우리 가향교회가 예수님이 종횡무진 역사하는 교회인 걸 확신하게 된다는 거죠. 바울은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로마사람들에게 이런 믿음의 위로를 나누기 위해서 달려가기를 원했습니다. 바울은 로마를 지나 스페인까지 가길 원했습니다. 땅 끝에 서바나까지... 로마에서 서쪽 끝은 지브롤터 해안이 있는 그 스페인이었거든요. 로마에서 끝은 스페인입니다. 바울은 이렇게 한 번도 가보지 않은 로마와 스페인까지 가서 이방인 중에서 예수 이름을 전파하여 이방인들도 예수 이름에 무릎 꿇고 죄와 사망의 법에서 풀려나는 그 감격을 누리게 하기 위하여 달려가고자 한 것입니다. 저는 예수 이름이 얼마나 엄청난 것을 실감을 하고 있고, 또 제가 복음을 전할 때마다 예수 이름 앞에 무릎 꿇은 자의 행복을 볼 때 이 예수 이름과 복음에 마술적인 힘을 저는 경험합니다. 여러분, 예수 이름만이 우리 가향교회 토대가 되고, 예수 이름에게 복종했더니 죄와 사망의 법에서 풀려났다는 이런 원초적인 생생한 간증이 우리 가운데 넘실댈 때 우리는 이게 교회인 거거든요. 사도 바울은 서바나까지 가려고 로마에 있는 사람과 피차 위로를 나누기 위해서 가려고 했습니다. 교회의 본질은 예수 이름을 믿고 무릎 꿇어본 자들이 내밀하게 나누는 위로입니다. 이것이 교회의 본질입니다. 교회 본질은 운영위원회도 아니고, 담임목사, 당회장도 아닙니다. 교회의 본질은 성도들끼리 이렇게 피차 지지하고 견인하고 부축해 주는 믿음의 간증 이것이 교회의 본질입니다. 여러분 이것을 꼭 아시길 바라고 우리 가향교회 교우들은 제가 볼 때는 교인 수 150명 정도, 다 모아도 150명인데 한 30명 정도가 이렇게 똘똘 뭉쳐서 간절히 기도하면은 이 교회는 예수님의 인도를 받을 가능성이 많다고 봐요. 저는 그렇게 봅니다. 여러분 로마서를 통해서 예수 이름을 믿으면 왜 구원을 받는가를 더 세밀하게 깨닫는 여러분 되길 바랍니다.


아버지 하나님
불순종의 자녀들이 망쳐버린 세상을 순종의 화신인 예수님이 오셔서 회복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을 믿을 때, 예수님 이름에 무릎을 꿇을 때 행복이 넘치는 이 간증을 우리 교우들이 쉴 새 없이 나눌 수 있도록 도와주옵소서. 예수님 이름 들어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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